#1
되로 주고 되로 받는 인간관계가 좋다. 적당한 인사치레와 호감, 애정을 주고 비슷한 수치와 농도로 돌려받는 것은 편한 데다가 상대방에게도 나쁘지 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상호작용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 수고로움 따위는 사치였다.
“오늘 날씨 쌀쌀한데, 다들 잘 챙겨 입고 오셨어요?”
그 쓸데없는 짓을 지금 하고 있다. 춤 연습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두 발을 딛고 떳떳이 서 있는 곳은 팬사인회장이었다.
“정훈아! 정훈아아아아악! 태양아! 제이야!”
눈앞에서 실물을 영접하게 된 팬들이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특히 바로 옆자리에 앉은 분은 거대 봉제 인형으로 나를 후려칠 정도로 흥분하신 듯싶었다. 멤버들이 손가락이라도 하나 꼼지락거리면 사방에서 어김없이 비명이 쏟아졌고, 같이 그 분위기에 올라탄 나는 당연한 듯 설렘 가득한 얼굴로 얌전히 줄을 섰다.
이 사인회장에 서 있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더라. 지난날을 떠올리니 생각만으로 피곤이 훅 밀려왔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앨범 판매점에 캐리어를 끌고 가서 앨범을 뭉텅이로 구매하고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자필로 응모권을 적어 넣었다. 응모권을 적으라고 준비해놓은 책상은 하필 좁아서 뒷사람들 눈치를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다. 삼촌을 부를 걸 하는 뒤늦은 후회도 했다.
그 과정에서 대략 3시간이 소요됐고 통장의 돈을 대부분 투자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빡빡한 일상 속에서 가끔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으니까.
“정훈아, 나 여기 오려고 10kg 빼고 왔어요.”
“에이, 안 빼도 예쁜데요.”
멤버들 입에서 쉴 새 없이 칭찬들이 터졌고 동시에 대포 카메라의 셔터 소리도 터졌다. 천천히 멤버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자니 줄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내려가세요!”
팬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기로 유명한 멤버들 덕분에 줄이 줄어드는 속도는 거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더뎠다. 뒤쪽에 선 팬들은 애가 타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표출했고 몇몇 팬들은 휴대폰으로 현재 상황을 커뮤니티에 중계하기 바빴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촉박하게 뛰어온 터라 아직 교복 차림이었다. 혹시 사진이라도 찍혀 학교 SNS 게시판에 올라가지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썼던 마스크는 그 누구도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 슬쩍 내렸다. 하긴 코앞에 있는 멤버들 얼굴 감상하기라는 완벽한 선택지가 있는데 누가 옆 사람한테 관심을 줄까 싶었다.
차례는 금방 찾아왔다.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으니 잘생긴 얼굴들이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보였다. 사인회는 두 번째였는데 똑바로 눈을 마주치기는 좀 쑥스러웠다. 게다가 오늘의 맨 앞 타자는 팬들과 지긋이 눈을 맞춰주는 거로 유명한 멤버였다.
“안녕하세요, 정훈이 형.”
“오랜만에 오네요. 이번 앨범 어때요?”
“안무가 진짜 좋아요. 하이라이트 부분 단체 군무요.”
“그 부분 좋죠. 근데 고등학생인데 열공 안 해요?”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번 앨범 안무가 정말 좋았다. 특히 멤버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맞춰서 스텝을 밟는 부분이. 좀 더 길게 말하려다가 그냥 끊었더니 정훈이 형이 손을 한 번 맞잡아줬다. 짧은 악수가 끝나고 천천히 반듯한 새 앨범을 펼쳐 정훈이 형이 있는 페이지를 찾았다.
“뭐라고 써줄까요?”
“이름 써주세요.”
간혹 발음 때문에 이름을 잘못 듣는 사람들이 있어서 교복 조끼에 달린 명찰을 끄집어내 보여주니 정훈이 형이 호탕하게 웃으며 사인을 했다. 멤버들 중 글씨체가 가장 어른스러운 정훈이 형은 사인마저 어른스러웠다. 사인이 완성된 후 옆으로 이동하라는 말에 왼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어, 또 왔네요! 저 기억해요! 교복 입고 왔네요? 어, 이거 한국예고 교복 아닌가?”
“네? 아, 네.”
“재능 있나 보다. 어떤 거 해요?”
“저 실용무용이요.”
“멋있다, 졸업하면 뭐 할 거예요? 아이돌은 어때요?”
“저는 대학 가려고요.”
“그래, 그래. 파이팅. 합격하면 또 와서 자랑해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배배 꼬던 제이 형이 자연스럽게 이름을 묻고 빠르게 사인을 해줬다. 수많은 팬 중의 한 명일 뿐인데 기억해주는 게 신기해서 사인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가방에서 겨우겨우 선물을 꺼내두고 다시 옆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어?”
갑자기 몸이 아래쪽으로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누가 밀었나?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던 주변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보기도 전에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서 손을 마구잡이로 휘젓자마자 놀랍게도 현실적인 고통이 닥쳤다. 딱딱한 무언가와 충돌하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마주한 것은 바닥이었다.
이 나이 먹고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줄은 몰랐다, 쪽팔리게. 그것도 사인받고 좋아서 가다가.
“언제 적 꿈을 지금 꾸냐…….”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버릇처럼 늘어난 혼잣말을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오자마자 어제 하다만 옷 정리를 시작했다.
내일이면 쇼핑몰에서 구매한 가을옷들이 무더기로 배송 올 예정이기 때문에 이 여름옷들을 한시라도 빨리 정리해야 했다. 힘겹게 옷장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박스를 내려놓자 먼지가 풀썩 바닥으로 주저앉는 게 보였다. 저 불쾌한 먼지 덩어리를 일단 청소기로 쓸어버릴까 하다가 어차피 끊임없이 나올 테니 일단 보류해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맨 위에 놓인 옷을 집어 들었다.
[삼촌]
다급한 목소리로 삼촌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목 부분이 늘어난 티셔츠를 버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연습할 때 자주 입었던 옷이라 왠지 모르게 쉽사리 버릴 수가 없어서 한참 들었다 놨다 반복하고 있었을 때.
-하현아,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응?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에 용건을 묻기도 전에 무작정 애원하는 삼촌으로 인해 불길한 예감이 넘실넘실 밀려왔다. 영상통화도 아닌데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액정을 가만히 바라봤다.
삼촌은 평소 나에게 자질구레한 부탁들을 자주 했다. 워낙 덜렁대고 깜빡거리는 삼촌은 조용한 성격이라 친구도 몇 없었다. 그런 삼촌에게 집에서 일하고 밖에 나가는 일도 별로 없는 조카는 소중한 인적자원이었다. 방송 쪽에서 일하다 보니 인력이 부족하거나 스태프 중 하나가 못 온다거나 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자주 생겼는데, 이럴 때마다 삼촌은 나를 심심찮게 호출했다.
“뭔데요.”
-너 이번에 우리 프로그램 하나 출연해주면 안 되겠냐?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일단은 얌전히 듣기로 마음먹었다. 기껏해야 중간에 잠깐 나와서 아이돌 그룹 이름을 외치는 팬들 사이에 끼이는 사람1 정도겠지 싶었다. 삼촌이 부탁할만한 자잘한 대타들을 예상하며 별생각 없이 티셔츠를 마대 자루에 던지듯 넣었다. 입지도 못하는 거 땀 흘렸던 기억 담겼다고 내버려 두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별 건 아니고, 일반인들 데려다가 아이돌로 데뷔시키는 프로그램인데.
“옆에서 잘생겼다고 감탄해주면 돼요?”
-아니, 참가자.
“……삼촌 전화 잘못 건 거 같은데 이만 끊어요. 저 작업하던 거 마저 해야 해요.”
밝기를 낮춰놔서 조금 어두운 빛을 내는 노트북 화면에 힐끗 시선을 준 뒤 최대한 빨리 전화를 끊기 위해 변명을 내뱉었다. 사실 어제 평소 작업량보다 많이 작성해놓은 탓에 바닥에 어질러진 옷들을 전부 다 치운 뒤에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이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많이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데 지금 나오기로 한 사람 하나가 구멍 나서 그래.
“나 말고 쓸 사람 많잖아요. 추가 모집한다 그래요.”
-그게 사정상 안 되니까 그렇지. 일부러 출연 신청도 안 받았고. 뒤에서 좀 이름있는 애들한테 얘기 넣고 길거리 캐스팅까지 해가면서 꾸역꾸역 채운 건데 이렇게 구멍이 날 줄은 몰랐어. 근데 딱! 하현이 네가 생각나서…… 어떠냐고 했더니 메인 피디님이 일단 무조건 데려오라고 하셨어.
삼촌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2년 전쯤에 겨우 유명 지상파 방송사에 피디로 취직했다. 그 과정까지 얼마나 힘겨운 노력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어서 작게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지만 이건 작은 도움의 범위에서 조금 넘어선 수준이 아니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아이돌 데뷔 프로그램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명왕성에서 바라보는 태양만큼 멀어 보였다.
-내 주변에 나이대 맞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응?
“저 그쪽으로 길 아예 접었잖아요. 아이돌이 뭐예요. 저 못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못해요. 정말 제가 삼촌 생각해서 최대한 도와드리고는 싶은데 이건 좀.”
-너 많이 힘들어서 춤 그만둔 건 아는데……. 진짜 그냥 나왔다가 바로 빠지면 돼. 데뷔하라는 거 아니고 그냥 프로그램에 나와 달라는 소리야. 너 데뷔할 일 절대 없어. 어차피 인원수만 채우면 되는 거라서 딱 1화, 2화만 나오고 없었던 사람처럼 가면 돼. 단독샷 제외하고 카메라 앵글에 네 얼굴 절대 안 잡히게 해줄게. 춤도 그냥 막 추면 돼. 연습할 필요 없고.
“아, 삼촌…… 급한 건 알겠는데요…….”
말끝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안 되는데. 하지만 거의 안 잡히게 자른다니까 괜찮지 않을까? 삼촌의 부탁에 유독 약한 마음이 협곡 사이의 낡은 다리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대. 춤. 멈춘 지 한참 된 다리를 한 번 쳐다봤다. 졸업하고 한 번도 춤춰본 적 없는데.
‘하현아, 삼촌 왔다.’
가족들 전화도 다 무시하고 한심하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 척 이불 속에 처박혀있던,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던 나에게 델몬트 주스 한 병을 들고 찾아온 삼촌이 떠올랐다. 그래서 결국 수락의 의미가 90% 반영된 질문을 했다.
“언제부터 하는데요?”
-맨날 뒤에서 잡일만 하다가 드디어 제대로 된 자리 얻은 거라 어떻게…… 어? 한다고?
“대신 진짜로 안 잡히게 해주세요. 공기 속의 아르곤보다 존재감 없어야 해요.”
-아르곤, 하하…… 공기에 그런 게 들었나?
삼촌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가 뭔가 더 말할 것이 있는 듯 입을 오물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진 몇 컷은 어쩔 수 없이 찍어야 하는데 괜찮아? 사진 감독님한테 최대한 말씀드려서 줄여줄 수는 있는데.
“괜찮아요.”
최대한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게 느껴져서 거기까지 요청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편히 먹고 통화를 종료한 뒤 몸을 옆으로 돌리자마자 캐주얼한 운동복을 입은 노블 멤버들과 아이컨택을 했다. 물론 실물은 아니고 사진이었다. 앨범은 싹 다 버렸는데 딱 저 브로마이드만 못 뜯었다. 미련이 남았다고 묻는다면 그건 전혀 아닌데.
[날짜 정해지면 바로 연락줄게]
[하현아 진짜 고맙다ㅜㅜ]
삼촌의 진심이 듬뿍 담긴 문자를 눈으로 대충 보다가 휴대폰 화면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러자 눈물을 흘리던 이모티콘이 순식간에 엿으로 변신했다. 평지 길만 걸으려고 했는데 눈앞에 산악코스 길이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