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7/7)

외전

서류를 정리하며 훑어보는 눈길이 꽤 집요했다. 문서 안에 있는 내용은 물론이고 자칫 쉽게 놓치기 쉬운 오류까지 전부 잡아낼 듯한 표정이었다. 가끔 저렇게 무표정하게 있는 재선의 얼굴을 볼 때면 현재는 꽤 잔혹한 충동이 들곤 했다. 날카로워 보이는 눈이 아주 일그러질 때까지 귀를 혀로 쑤신다든가, 그만하라고 애원할 때까지 유두를 빨아 본다든가, 헐떡이느라 말도 못 이을 때까지 아래를 쳐올린다든가 하는 충동. 물론 아주 잘 실천할 자신도 있었다. 그럴 만한 사이이기도 했다.

“다 읽었습니다. 이거로 그럼, 정리가 됐다는 건가요?”

대출 계약 해지 약정서를 읽고 있는 사람에게 들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 정도의 양심은 어딘가 폐기한 현재는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런데 굳이 할 수 있는 일을 참는 이유라고 한다면 그저 재선의 눈앞이니까 나름대로 숨겨야 할 건 숨기고 있다는 본능이랄까, 내숭이었다.

“맞아요. 사실 진작 해 줬어야 했죠……. 완전히 합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것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죠, 이만큼도 어려웠을 거 압니다. 감사합니다.”

“……어렵진 않았어도 아버지한테 조금 혼나긴 했네요. 고객끼리 차별 대우 한다고요.”

“네? 그럼 이거 처리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에이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냥 가끔 한 번씩 괜히 그러시는 거예요. 관심받고 싶다고 땡깡…… 서운해하는 중이어서 신경 안 써도 괜찮아요.”

“아, 그럼. 관심이라니…….”

약정서에 사인을 하다 말고 현재를 바라보는 재선의 얼굴이 걱정으로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이 정도 밑밥으로는 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없다는 것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성실하고 고지식하며 바른 생활을 하는 성정이 재선의 큰 매력임을 부인할 수 없고 그런 점에 더 사랑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하는 바를 굽힐 순 없었다.

-혹시, 전에도 사귀었던 분을 가족들이 알고 계셨나요……?

-아뇨, 그렇진 않았어요. 왜요?

-그럼 제가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형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거면 가족 분들도 좋지 않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고.

-안 돼. 없으면 내가 가장 큰일 나니까 절대 안 돼요. 차라리 내가 형 입을 막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물론 형의 입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재선은 모르고 있었지만 현재는 형이 재선을 내쫓은 날, 형의 눈앞에서 물건을 부수며 형을 내쫓고, 둘만의 보금자리엔 앞으로 절대 출입하지 말라 단단히 경고했다. 다른 가족들도 예외는 없었다.

쉬는 날이면 번갈아 가면서 전화를 걸어오는 이유는 뻔했다. 얼굴 좀 비춰라. 도대체 사귀는 사람이 누구냐. 동거하는 거면 우리도 한번 보자. 왜 둘째만 보여 주느냐, 등등. 가족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까진 상관없었으나 지나치게 간섭하는 건 사절이었다. 솔직히 동생에게 애인이 생겼다고 이래저래 질투가 나서 거짓말로 놀리려 든 것 까진 이해했다. 하지만 형의 장난질에 재선이 오해하고 집을 뛰쳐나간 일은 아직까지 짜증이 났다.

현재는 재선이 여길 나서더라도 언제든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이유 하나 정도는 만들어 놔야겠다 생각했다. 현재의 쓸데없이 좋은 잔머리가 맹렬하게 움직인 건 그래서였다.

“안 그래도 갑자기 일이 늘어서 너무 힘들어요……. 완전히 나만 부려먹어.”

“제가 뭐 도울 거라도…….”

“에이, 재선 씨가 집에 있어 주니까 괜찮아요. 그거면 돼. 회사가 바빠져서 못 보는 시간이 너무 아쉽긴 하지만……. 사람도 안 구해지고 말이죠.”

구인난이라고는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회사였지만, 현재는 청산유수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재선이 안 믿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냥 재선이 듣지 않더라도 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많았으니까.

“그럼, 저라도 가서 도우면…….”

“형이?”

재선은 현재의 일만 되면 판단력이 심각할 정도로 흐려졌다. 이미 재선의 눈에 현재는 가족들이 떠넘긴 일에 치여 몇 없는 직원으로 야근하는, 안타까운 애인이었다.

재선은 현재가 자연스레 저를 형이라고 불러 순간 조금 놀라 얼굴이 좀 뜨거워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전에 하던 일도 회사 일이었습니다. 많이 다를 수도 있지만 간단한 서류 작업이나, 다른 일이어도 뭐든 시키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서류로 정리하면 저는 채무자도 아니게 되는 거니까 일할 수 있지 않습니까?”

“……기억하고 있었네요? 그렇다고 서류 정리하자마자 재선 씨 불러내면 나 너무 능력 없는 대표 같지 않아요?”

“전혀, 아닙니다. 대표님을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리가요.”

“우리 직원들도 다 재선 씨처럼만 여겨 주면 좋겠다.”

정색하는 재선을 보며 장난스럽게 답하는 현재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재선은 이번 기회에 평소 생각하던 걸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슬슬 직장을 구하고 싶었다. 최근에 집으로 오는 우편물도 현저하게 줄기도 했고 집안일도 능숙해졌기 때문에 다른 일을 구해서 현재가 없는 시간을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가만히 얹혀사는 사람인 건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했고 현재에게 너무 기울어지는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필요하다면 저라도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요즘에 일도 적고,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싶었으니까요…….”

“아르바이트…….”

“단기로 절 써 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재선은 현재의 회사가 하는 업무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게 없었지만 배우면 잘할 자신이 있었다.

“알겠어요. 한번 알아보고 알려 줄게요.”

곰곰이 생각하던 현재의 대답에 재선의 표정이 밝아졌다. 썩 중요한 일을 맡지 않아도 괜찮았다. 같은 곳으로 출근했다가 같은 집으로 들어오는 상상만으로도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고 좋았다.

***

“어때요? 좀 비좁긴 하지만 괜찮죠?”

어디가 비좁다는 건지 모르겠고…….

“혼자 처리하던 업무가 많아서 앞으로 재선 씨도 같이 바빠지긴 할 거예요. 하루 동안은 그냥 분위기만 봐 주세요.”

대표의 책상이 왜 일개 계약직 사원 책상과 한 공간에 있는 걸까.

“갑자기 자리를 마련해서 책상 종류가 다른 게 좀 튀네. ……역시 바꿀까.”

“아뇨! 아니 이 책상 좋은데요.”

“으음, 그래요?”

“네, 그럼요. 이 정도면 일하기 정말 편할 거 같습니다.”

중얼거리던 현재의 말에 화들짝 놀란 재선이 서둘러 안내받은 자리로 가 앉았다.

대표실은 수십 명이 함께해도 이상하지 않을 회의실 정도의 크기로, 꽤 잘 꾸며져 있었다. 마호가니일 게 분명한 임원 책상과 업무용 기기들. 책상 위의 수많은 서류들과 현재의 이름이 새겨진 투명한 대표 명패. 그 옆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스탠드와 군데군데 있는 관엽 식물까지. 너무 삭막하지도 그렇다고 아예 편안하지도 않은 전형적인 회사 대표실의 풍경이었다. 거기에 왜 자신의, 계약직 사무원의 책상이 한쪽에 더 마련되어 있는 건지는 죽어도 알 수가 없었지만.

사무용 PC인데 왜 이렇게 좋은 모니터가 듀얼로, 현재의 서재에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쿠션감 좋은 의자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싶었지만…… 알면 그것도 머리가 아플 것 같아 더 이상의 생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말을 막으려 다급히 앉은 의자는…… 성능이 어마어마했다. 공중에 떠오른 것 같은 감각이 몸을 감싸며 안정적으로 척추를 받쳐 주었다.

앉아서 자라는 걸까, 일을 하라는 걸까 모르겠는 의자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뒤로하고 현재가 바꾸고 싶어 하는 책상부터 사수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표실에 임원 책상이 두 개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재선이 현재의 비서……가 됐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더 깊게 알려고 들다가는 이미 몇 개월 전에 사라진 위염이 다시 도질 것 같았다. 없어진 전 직장에서 근무하던 때 이후로는 없던 증상이었다. …… 밖에 비서실이라고 버젓이 적힌 부서명은 일단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재선 씨 제 비서여도 괜찮아요?

-제가 비서요……? 할 수 있는 게 없을 텐데요…….

-사실 말이 비서지 그냥 제 업무 서포트 해 주시는 거예요. 다른 부서로 갑자기 보내기에는 개인 정보가 많은 곳들이라 계약직 제약이 조금 있다던데요?

-그런 거라면……. 아무 부서여도 괜찮습니다.

설마 그렇다고 대표실에 들여놓고 일을 시킬 줄은 몰랐다. 이미 벌어진 일은 수습하는 것보다 자신이 적응하는 게 낫다는 걸 재선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의외로 현재는 독보적인 외모만큼이나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줄 알았고. 그게 의견이 아닌 고집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가끔은 현재에게 유독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의 탓인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건, 자력으로 이겨 낼 수 없는 일은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단기 계약직으로 오는 거여서 준비를 조금밖에 못 했는데……. 재선 씨가 마음에 든다니 좋네요. 차라리 정직원 자리 날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나 봐.”

“하하, 그러게요…….”

재선은 절대 정직원으로 일한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앞으로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첫날부터 헤아려야 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재선의 업무는 원활하게 흘러갔다. 간단한 잡무는 스스로 처리했고, 인수인계가 필요할 정도의 업무는 비서실로 가 기존 직원에게 따로 배웠다. 그것도 크게 어렵진 않았다. 기본적으로 사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오피스 업무가 주였고 그건 전 직장에서도 재선이 주로 하던 일이었다. 새로운 일이라면 현재의 스케줄을 부분적으로 확인하고 결재 서류들을 정리해 현재에게 필요한 것만 넘겨주는 정도여서 힘들 것도 없었다.

실제로 현재는 일이 정말 바빴고 종종 자리를 비우기도 해서 대표실 안이라고 부담을 느낄 틈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일하던 중간에 모니터 너머로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멋쩍게 웃는 현재를 보는 건 나름 즐거웠다. 현재와 함께하고 있다고 실감이 나서 행복하기까지 했다. 잔잔하게 지나가는 일상이, 평범하게 채워지는 순간들이 좋았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같이 퇴근하며 마트나 편의점에 들리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하지만 이건 재선보다는, 무엇보다 현재가 굉장히 즐거워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말로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함께 마트에서 식재료를 같이 둘러보거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골라 입에 물려 주는 것 같은 장난을 칠 때마다 눈이 반짝거려서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재선의 눈앞에 있는 목캔디나 작은 초콜릿들도 그렇게 장을 보고 현재가 놓아둔 것이었다. 혹시라도 일하면서 피곤하면 하나씩 입에 넣으라면서.

한 공간에서 일하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명색이 대표와 같이 일하게 되어 다른 이들이 욕하진 않을까 걱정도 됐었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업무도 원활했고 현재도 재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 같았다.

***

“어? 뭐야……. 현재는 어디 갔나?”

“누구…….”

“그러는 거기 계시는 분은 누구신지.”

“업무 서포트 하고 있는 사원입니다. 혹시 대표님과 약속이 있으셨나요?”

오늘은 현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불쑥 대표실로 들어왔다. 밖에 비서들이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아하니 이미 안면이 있거나 방문 예정돼 있던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오늘 출근할 때 체크한 일정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돌발적으로 생긴 미팅인가 싶어 비서실에 확인을 요청하려던 찰나, 대표실 안을 둘러보던 사람이 갑자기 재선의 자리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비서실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앉아서 기다려 주시면…….”

“맞아. 생각났다. 이재선!”

재선은 큰 덩치가 가까워져 오자 약간 당황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저지하려는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상대가 덥석 손뼉을 치며 화색을 띄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재선은 깜짝 놀랐다.

“에…….”

“나 기억 못 하려나. 지성일이라고 하는데. 대화고.”

“대화고 지성일……? 그…… 빡빡머리.”

“아하하. 맞아, 맞아. 그 빡빡머리. 내가 좀 격투기에 미쳤었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맞장구를 치는 얼굴을 보자 학창시절에 겪은 장면들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운동을 하던 시절 대회에서 오가며 보던 이였다. 당시에도 꽤 유망주였던 애였는데, 늘 머리를 바짝 밀고 대회에 나오는 바람에 지성일이라는 이름보다는 빡빡머리로 더 유명했던 동갑내기 유도 선수였다.

성일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재선에게 악수를 청하며 살갑게 굴었다.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재선은 대표실에 있던 응접용 소파에 성일을 앉힌 뒤에야 간신히 좀 정신이 들었다.

“마실 거라도 줄까? 대표님 뵈러 온 거 맞지……?”

“아냐 됐어. 그건 그렇고 여기 앉아 봐. 어떻게 여기서 보지?”

반가워하는 그를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아마 잠깐이면 될 테니까 거듭 거절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재선은 반갑기도 하고 멋쩍기도 해서 앞의 남자를 살폈다. 고급스러운 정장에 잘 정리된 헤어스타일이 그가 사회에서 꽤 자리를 잡고 일하는 인물임을 알게 했다. 게다가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로 현재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잠깐 좀 일하게 되어서. 그건 그렇고 정말 오랜만이네.”

“그랬구나……. 아니 현재랑 아는 사이야? 운동은?”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운동은…… 부상을 입어서…….”

“아……. 내가 괜히 물었네. 미안하다.”

“아냐, 괜찮아 그런 건. 어차피 오래전에 지난 일이고.”

“네 경기 진짜 좋아했거든. 시원시원해서. 나도 대학 가고 운동 안 했지만 어쩐지 세계 대회에서 네 얼굴이 안 보이기에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난 당연히 올림픽 나갈 줄 알았거든.”

지성일의 얼굴에서는 거짓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과거에 열심히 했던 운동을 한순간에 그만둬야 했을 때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난 일을 회상하는 지금에야 아깝다는 기분이 들었다. 재선은 그런 자신이 괜스레 이상했다.

“어? 벌써 와 있었네?”

“왔어? 근데 재선이가 왜 여기서 일해?”

“……아는 사이야?”

이야기를 이어 가려던 그때 마침 현재가 돌아왔다. 현재는 대표실로 들어서며 눈에 띈 지성일과 아는 척을 하려다가 소파에 재선이 앉아 상대하고 있다는 것에 첫째로 놀라고, 성일이 재선에게 스스럼없이 구는 것에 두 번째로 놀라서 상황을 살피려 들었다. 그런 현재를 바라보던 재선은 중간에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사이, 지성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운동할 때 알던 사이지. 학교는 달랐어도 대회에서 자주 만났으니까.”

“아……. 그랬구나.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나간다고 해서 주차장에서 기다렸더니 여기 와 있어서 놀랐잖아.”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한번 둘러보기도 할 겸 와 봤지. 재선아,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어, 그…… 그래.”

재선은 기분 좋게 손을 흔들어 주며 인사하는 지성일에게 대강 함께 손을 흔들어 주다, 밖으로 나가려던 현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재선이 ‘연락할게요.’ 하고 입 모양으로 건네는 말을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는 그 모습에 씩 웃었고, 덕분에 재선은 둘 다 나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깜짝 놀랐네…….”

자신을 아는 사람을 현재의 사무실에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쩐지 민망하기도 한데, 동시에 반가운 마음이 아직 남아 있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서도 입가에 은은하게 미소가 걸렸다.

예상치 못하게 어릴 적 만난 인연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도 크게 동요하거나 비관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이 신기했다. 분명히 마주하면 조금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알아봐 주는 그가 신기하고, 알던 사람을 만나 반가웠을 뿐 그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마저도 현재의 곁에 있으면서 얻게 된 여유인가 싶어져서 누구도 없는 자리에서 혼자 쑥스러워했다.

“그건 그렇고, 둘이 무슨 관계지……. 같이 일을 하는 건가.”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나간 뒤라 답을 알 수 없었다. 궁금했지만, 일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현재가 사무실로 돌아온 뒤에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오전 중에 받아 온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파일들을 열어 보다가 문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대표실은 근무하기에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아도 되고, 업무에 방해가 될 만큼 소란스러워지는 때도 없었다. 다만 현재가 자리를 비운 틈에는 가끔 쓸쓸해지곤 했다. 집안일을 하느라 혼자 집을 지킬 때와는 또 다른 외로움이었다.

모니터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는 초콜릿을 하나 까서 입 안에 넣었다.

요즘의 재선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 은근히 기대가 되는 일이라는 걸 새롭게 알아 가고 있었다.

***

“근데 재선이가 왜 너랑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

“음? 그냥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인데 왜. 무슨 이야기 해?”

“이야기는, 그냥 네가 곁에 누굴 둘 거 같진 않은데 그 안에서 일하니까 이상해서. 계약직이라고? 그거 끝나면 그냥 우리 회사에서 일하라고 해 볼까. 성실할 거 같고.”

“가만 보면 참, 눈치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니까.”

현재는 뜨끔하는 마음을 숨기고 모르는 척 대꾸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성일은 현재의 첫째 형이었다. 상의할 일이 있다 그래서 잠깐 보기로 한 거였는데 재선을 먼저 만나게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뭐,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둘째 형도 알고 있기도 하고. 첫째 형의 경기 덕분에 재선을 알게 된 거나 마찬가지이기도 해서 첫째 형에겐 마음이 좀 너그러운 상태이기도 했다.

재선은 형을 보고 전혀 자신의 혈육이라는 걸 눈치도 못 챈 것 같았다. 저와 성일이 형제라고 하기엔 너무 다른 이미지긴 했다. 성일은 격투기 선수다운 체격과 얼굴이어서 모르는 이들은 곧잘 현재와 그를 남남인 줄 알았다.

“뭐야, 뭔데 그래?”

“둘째 형 만나면 물어봐. 내 입으로는 아직 말 안 할 거니까.”

“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성일이 재선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직 자신이 재선에게 직접 가족을 소개시켜 주기도 전에 재선만 가족들에게 알려 주기엔 조금 걸렸다. 자신의 성향이야 이미 가족들이 다 알고 있었지만 재선은 본인이 게이라는 사실 자체를 주변에 알린 적이 없을 사람이라 차근차근하게 순서를 밟고 싶었다. 일부러 회사로 불러낸 것도 그래서였다. 일단 가족들에게 재선이 자신의 일을 돕는 아주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리고, 재선에게는 우연이라도 가족들을 자주 보게 만들어서 아예 미리 서로 익숙해지게 만들고 싶었다. 재선이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도록 배려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성일과 재선이 서로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운동을 하고 대회까지 나가면 타 학교 학생과 교류하기도 한다는 걸 몰랐던 게 실수였다.

“형수는 요즘 어때?”

“안 그래도 요새 둘째 때문에 잠도 잘 못 자는 거 같은데 큰일이야……. 저번에 네가 구해다 준…….”

현재는 일부러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성일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막내인 자신을 예뻐하는 가족들의 비위를 맞추는 건 얼마든지 자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현재는 가족들의 비위를 맞추는 걸 아주 귀찮아했다. 지금이야 원하는 바가 있어 적당히 맞춰 주고 있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둘째 형과도 충분히 매끄럽게 정리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심술이었다. 둘째 형은 아직까지도 그때 집어 던진 병인지 컵인지 때문에 생긴 생채기를 가지고 징징거리는 중이었다. 누가 들으면 정말 전치 3주는 나온 줄 알 지경이었다. 바닥에 던진 걸 자기가 잘못 피해서 얼굴에 맞아 놓고선. 고작해야 유리 조각이 살짝 스친 거로 유세도 그런 유세가 없었다. 이쪽은 형이 재선에게 제가 내 애인이라며 장난질한 사실을 가만히 묻어 주고 있는데.

둘째 형이 이미 현재에게 자신이 잘못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엄마와 아빠, 심지어 셋째 형까지 동원해서 자신에게 연락을 취하려던 건 알았지만 차단해 놓은 걸 절대 풀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는 스토커니 뭐니 때문에 원래도 받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첫째 형은 절대 현재의 편이었다. 형과 죽고 못 사는 사이인 큰형수는 현재를 무척 예뻐했고, 현재 자신 역시도 형과 형수의 일이라면 최대한 챙기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만약 엄마 아빠가 재선을 보고 마뜩찮게 여긴다 해도 큰형과 큰형수가 그 사이를 잘 조율해 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계약 기간 내에 하나씩 해치우다 보면 재선도 자신과 붙어 있는 일도, 가족들이 오가는 환경도 이해할 것이다.

일단 오늘은 하기로 한 대화를 마쳤으니 얼른 사무실로 복귀해서 재선과 같이 있고 싶었다. 때때로 사무실에 혼자 있는 얼굴까지 녹화해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분명, 자신의 일에는 턱없이 둔하면서 눈썰미는 좋은 재선이 알아차릴 게 뻔해 생각하는 데 그쳤다.

괜히 건드려서, 재선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나오기라도 했다간 사무실에서 함께하는 소소한 재미마저 사라질지도 몰랐다. 어차피 기간 한정인 즐거움을 더 줄이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

들어서는 사무실에는 당연하지만 재선이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고개만 들고 현재를 맞는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현재의 눈에 그런 재선의 솔직한 표정은 언제나 보기 좋았다.

“다녀왔어요. 잘 있었어요?”

“오셨습니까?”

“둘밖에 없을 때는 딱딱하게 굴지 말라니까.”

“그래도……. 갑자기 다른 분들이 오실 수도 있으니까요.”

현재가 은근히 눈감아 주던 존대를 지적하자 재선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멋쩍게 싱긋 웃었다. 얼굴 위로 솔직하게 드러나는 감정이 보기 좋았다.

재선의 웃음이 잦아지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으나 이럴 때마다 어디 가둬 두고 싶어지는 마음 또한 같이 들어 현재는 날이 갈수록 고민이 많았다.

다가오는 재선의 손이 자리를 비운 동안 쌓인 서류들로 묵직했다.

일하느라 걷어 둔 소매 밖으로 재선의 팔뚝이 뽀얗게 드러나 있었다. 서류를 하나씩 현재가 앉아 있는 데스크 위로 올릴 때마다 움직이는 근육들이 탐스러웠다. 이 감상을 느끼는 게 절대 자기 혼자만은 아닐 거라고 현재는 장담할 수 있었다.

“전일 올라온 결재 서류는 이쪽이고, 오늘 오전에 급하게 봐 달라고 요청 들어온 건들은 이쪽입니다.”

고작해야 종이 몇 장 옮기는 손짓마저 굉장히 야하게 느껴졌다.

재선의 몸을 매일 보는 현재는 흡족하면서도 또 그만큼 조급해졌다. 무엇보다 재선이 자주 입고 있는 흰 셔츠는 엄청 위험한 옷이었다. 오늘따라 거슬렸는지 셔츠 안으로 넥타이를 넣은 것까지…….

아니 가슴만으로도 충분히 터질 것 같은데 거기에 왜 타이까지 넣어 둔 거지?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금방 확인할게요. 그런데 혼자 안 심심했어요?”

“……예? 으음.”

싱긋 웃으며 묻는 가벼운 말에 재선이 움찔했다. 그러고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게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현재 역시 평소 같았으면 일하면서 기다렸는데요 뭘, 이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굴 거라 생각한 사람이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받아칠 말을 잃었다. 그보다 가볍게 흐트러진 차림을 하고 있던 재선이 얼굴까지 살짝 붉히니까 참을 수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걸 굳이 참을 현재가 아니었다.

느슨하게 두고 있던 재선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쪽으로 이끈 현재는 그대로 뒷목으로 손을 걸어 얼굴을 마주했다. 당황스러워하던 얼굴이 색을 달리하는 것도 보기 좋았지만 애써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는 불안한 눈동자는 더 유혹적이었다. 언제 봐도 흥미로움을 자아내는 태도는, 재선의 큰 매력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무표정한 재선을 보고 차갑고 냉정할 거라 생각하기 일쑤였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재선의 누구보다 진중하고 순진한 성정이 두드러졌다.

“여기, 사무실인…….”

“우리밖에 없잖아요.”

물론 이곳에 둘뿐이 없으며, 함부로 드나드는 사람이 있지 않다는 건 재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회사였다. 현재가 이렇게 가끔 그 사실을 잊고 천둥벌거숭이처럼 굴 때면 재선은 그 제어를 종종 해 줘야 했다. 평소처럼 가만히 자신을 잡아 온 손을 떼어 내고 자리로 돌아가면 그만인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게 쉽지가 않았다.

두 얼굴이 붙게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재선이 입술끼리 닿게 한 채로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인 현재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혀끝이 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현재가 입 안을 살살 달래듯 움직였다.

재선은 현재를 따라가지 못하다가 점점 숨이 가빠 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슬쩍 고개를 뒤로 물리며 시선을 맞췄다. 눈동자 가득한 열기를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곤 다시 달래듯 현재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나긋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입맞춤은 색정적이지도 유혹적이지도 않아서 참으로 재선다웠다.

그 움직임 하나에도 현재는 장소 구분 못 하고 동해 버렸다. 자신은 정말 재선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결론만 나왔다.

“대체 갑자기 왜…….”

“맛있다. 초콜릿 먹었었어요? 입 안이 단데.”

그런 현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선은 방금까지 붙어 있었던 입술을 제 손등으로 애써 가렸다가 또 금방 시선을 피한다. 아무래도 사무실에서 간식을 주워 먹고 있다가 키스까지 했다는 걸 이제야 자각한 모양인데 그런 모습도 귀여웠지만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할 현재가 아니었다. 오늘따라 순순히 놓아주는 것도 괜히 재선의 맘만 편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란 생각에 심술이 났다.

손가락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현재의 옷 위를 쥐었다 놓았다. 재선의 눈동자가 차마 현재를 계속 바라보지 못하고 천천히 흔들렸다.

현재는 잠시 재선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재선 씨는 혼자 여기 있으면 안 심심해요?”

“일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아까는 대답 못 했잖아요.”

“그건…….”

“나 별로 안 보고 싶었구나.”

“…….”

“알겠어요. 일하는 데 내가 괜히 방해하면 안 되지. 얼른 일해요.”

얄팍하게 밀당을 하려는 속셈은 아니었는데 재선이 지나치게 수줍어해, 심술이 났다. 한 번쯤은 정신없이 자신을 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거나 상황을 과하게 꾸미면 심각하게 오해할까 봐 그러지 못했지만……. 현재는 더 심술부리고 싶은 마음을 얌전히 눌렀다.

그렇게 재선을 자리로 보낸 뒤 느긋하게 상황을 살펴보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됐다.

재선이 방황하던 시선을 채 숨기지 못하며 현재 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는데, 오늘따라 앞머리가 몇 가닥 흘러내린 채 응시하는 깊은 눈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앞머리도 슥슥 만져서 올려 주고 손가락으로 뺨도 가만히 훑어 주고 어깨도 툭툭 털어 주는 동안 움찔거리는 반응마저…….

아니, 그게 아니라. 속삭이는 건지 중얼거리는 건지 입 속에서 말을 얼버무리는 목소리도 조금 갈라져 있는 것 같고.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재선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할 현재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보, 보고 싶었습니다.”

재선이 질끈 눈을 감으며 속삭이는 것에 가깝게 목소리를 쥐어짰다. 누가 보면 꼭 누가 괴롭힌 모양새였지만 현재는 알았다. 지금 재선은 정말 천년의 용기를 끌어 올려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보고 싶다고 스스로 말해 놓고서도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 집이었다면 당장 재선을 침대에 눕혀 놓았을 거고, 그러면 더한 소리도 잘 뱉고, 투정도 가끔 부리게 만들 수 있었지만. ……물론 그런 소리를 뱉게 하기까지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엄청 괴롭혀야 했지만. 현재는 지금 둘이 있는 이곳이 집이 아닌 회사라는 게 아쉽기 짝이 없었다.

“그랬구나아…….”

현재가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는 재선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손목을 휙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보고 싶기만?’ 이라고 하며 더 재선을 추궁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장난기 어린 나긋한 목소리였는데 재선은 이상하게 오늘따라 현재 목소리가 참, 진정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야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난처했다. 여기는 사무실인데, 이런 맘이 들면 안 되는데…….

재선은 자꾸만 문을 힐금거리며 ‘그럼, 뭘 더…….’ 하면서 곤란하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뒤에는 데스크가, 자신의 앞에는 현재가 몸을 가로막은 뒤였다. 슬슬 몸이 가까워진다 싶었는데 어느새 사이에 낀 상태가 되어 버렸다. 더는 도망갈 곳도, 갈 수도 없어진 재선은 시선만 자꾸 허공을 배회할 따름이었다.

“재선 씨는 다 좋은데 가끔 이렇게 모르는 척하더라.”

“뭐, 뭐를 말입니까…….”

괜히 모르는 척하면서 얼버무리다가 고개를 현재 쪽으로 돌렸는데 제대로 시선이 딱 마주쳐 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웃음기가 자글자글 서려 있었던 아름다운 얼굴이 이제는 생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진지하게 재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에라, 모르겠다. 재선은 팔을 뻗어서 현재의 목뒤로 손을 감고 입술을 먼저 부딪쳤다.

일을 저지르면서도 재선은 사무실에서까지 이래도 되나, 아니 현재가 자꾸 추궁하니까 벗어날 길이 없지 않았나, 그러게 왜 갑자기 몸을 붙이고 분위기를 야릇하게 만드느냐 말이야. 도대체 왜 이놈의 대표실에는 사람도 잘 안 들어와서 나를 인내심도 분별력도 제대로 없는 인간을 만드는지 모르겠다…… 싶다가도, 솔직히 친절하고 살갑게 자신에게 붙어 오는 사람이 이런 얼굴을 하고 자꾸 밀폐된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도 떨리고 긴장되는 게 당연한데 그런 사람이 애인이야, 근데 자꾸 보고 싶었냐 물어봐, 당연히 보고 싶지 안 보고 싶으면 남자야? 사람이야? 같은 갖가지 생각을 했다.

현재는 당연히 이런 재선을 반겼다. 닿아 있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서툴게 잇는 입맞춤에 현재는 재선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약간은 느린 재선의 속도에 맞춰 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제가 몰아붙여 허겁지겁 뒤따라오게 만든 게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선이 이렇게 덥석 먼저 현재를 원하는 일이 드물어 욕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놀리고 싶어서 입술도 괜히 느릿하게 비비고 벌렸다.

그럴수록 재선은 현재의 뜻대로, 점점 애가 닳았다.

현재가 제대로 협조를 해 주지 않아, 재선의 조급함이 한계에 도달한 찰나.

기어이 일이 벌어졌다.

“현재 너, 내가 들은 일이 사실이 맞아?”

덜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조금 전에 왔다가 현재와 함께 나갔었던 지성일이었다. 들키면 들키는 대로 귀찮아지고 아니어도 재선에게는 날벼락 같은 상대임은 틀림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이 열리기 무섭게 놀란 재선은 현재의 데스크 아래로 잽싸게 들어가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에서 몸을 붙이고 입술에 매달리던 재선이 바로 숨어 들어가는 걸 보고 현재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데스크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지성일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앉은 현재는 여상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또 왔어.”

“내가 들은 게 영……. 이해가 안 가서.”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기에 방금 봐 놓고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와서 이래.”

차라리 연락이라도 했다면 재선이 데스크 아래에서 숨만 색색 몰아쉴 일은 없지 않았겠나. 조금 전까지 분위기로 봐서는 연락을 했어도 현재가 몰랐을 가능성이 컸지만.

그냥 자리를 피해 사무실 안에 준비된 응접용 소파에서 대강 이야기하고 보내야겠다 싶어 일어나는데 아래에 숨죽이고 있던 재선이 뭐 때문인지 현재의 다리를 덥석 잡았다.

재선은 재선대로 데스크 아래에서 정신이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서 서둘러 몸을 낮춰서 숨긴 했는데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수 없어 더 불안해졌다. 당장은 현재가 자신을 가려 줘서 그나마 안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현재마저 여기 없으면?’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덜컥 겁부터 나 버렸다.

사실 데스크가 재선을 전부 가리고 있기 때문에 지금 방문한 사람의 눈에 보일 리 만무한데, 놀란 재선은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현재의 다리 하나를 꾹 안고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으면서 가지 말라고 간신히 어필을 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나름대로 눈치를 챈 현재는 재선의 상태를 살피며 어색하지 않게 자세를 고쳐 앉아 이야기를 이었다.

“아니, 못 오는 곳 오는 것도 아니고. 방금 봤으니까 바로 다시 온 거지.”

“언제부터 그랬다고. 바쁘다고 오히려 먼저 갔잖아.”

“……그건 그거고.”

“그래서 진짜 왜 온 건데. 나도 바쁜데.”

여상하게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재선은 눈치로 조금 전에 방문했었던 지성일이 다시 찾아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일단 당장은 현재가 가려 주고 있으니까 자신이 들킬 위험은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괜히 갑작스러웠던 사태에 초조했던 긴장이 조금 풀리니까 굳었던 몸이 느슨해졌다. 그래서 자신의 앞에 들어와 있는 현재의 무릎에 얼굴을 툭 기대고 한숨을 짧게 쉬었다. 그런데 그 순간 현재가 움찔하고 눈에 보일 정도로 긴장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평소 현재는 작은 일에도 당황하고 긴장하고 늘 상황에 끌려다니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여유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작 재선이 책상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거로 예민하게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 왜 어째서 이렇게…….

짜릿한 거지?

“언제부터 우리 지현재 씨가 그렇게 바쁜 걸로 신경 썼다고 이러실까 의심스럽게.”

“……어디서 뺨 맞고 와서 나한테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에이, 내가 아니라 지 대표에 대한 걸 다 듣고 와서 이러는 거지, 내가 무슨 뺨을 맞는다고 그래.”

“……더 하면 징그러울 거 같은데. 지성일 이사님.”

재선은 한참이나 데스크 아래 숨죽이고 있으면서 장난기가 샘솟았다. 앞에 들어와 있는 현재의 무릎에 자기 이마를 비비면서 적당히 숨을 내쉬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평소와 다른 현재의 반응 탓이었다. 이런 때 아니면 자기가 언제 현재에게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사이, 현재는 얼른 대화를 마치고 지성일을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자기 데스크 아래 낌새가 영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준 걸 도대체 재선이 어떻게 생각한 건지 닿아 오는 느낌이 심상치가 않았다. 점점 다리며 무릎에 얼굴인지 손인지 하여튼 가리지 않고 살살 비비적거리는데 애교도 아니고 자극도 아니고 영 간질거렸다.

눈앞에는 좀 제발 오늘만큼은 그냥 얌전히 나가 줬으면 하는 혈육이 숫제 유유자적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재선에게 다리를 잡혀 있는 현재의 귀에 그 내용이 온전히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런데 데스크 재선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바짓단 아래로 손가락을 슬금슬금 집어넣곤 양말 위로 간지럽히듯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현재도 제대로 발동이 걸리고야 말았다.

“와이프가 안 그래도 요즘 네 소식이 영 없다고 서운해하던데.”

“연락드린다고 전해 줘. 오늘 같이 만났다고 하면 좀 의문이 풀리시겠지.”

그래도 건장한 사람 하나가 들어가 편안하게 있기엔 좁은 데스크 아래라 자신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무릎을 굽힌 채 등을 웅크리고 있을 재선을 피해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했었는데. 재선이 먼저 이렇게 군다면 말이 달라진다.

앞에 있는 지성일에게 집중하며 대화하는 척하던 현재는 가만히 있던 구둣발을 슬그머니 옮기기 시작했다. 재선이 아래에서 어떻게 앉아 있는지는 아까의 곁눈질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발을 살그머니 옮겨 내며 구두코로 재선의 허벅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날렵한 앞 축으로 단단한 허벅지를 툭툭 건들이다가 그 안쪽으로 슬슬 옮기기 시작했다.

안쪽에서 현재의 한쪽 발목 위를 가볍게 잡아 만지작거리던 재선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아직 깨닫지 못한 채 그냥, 현재가 지금 자신 때문에 많이 초조하구나 싶어 괜스레 흥이 올랐다.

바짓단 아래에 조금 더 대담하게 손가락을 넣고 양말 위 주름을 긁기도 하고 슬쩍 양말의 밴딩을 내리며 살갗을 만지작거리기도 하면서 숨을 죽였다. 솔직히 사무실에 지성일이 들어오기 전까지 키스를 하고 서로의 몸이 딱 붙어 있던 상태에서 남몰래 이러고 있다는 게 자극이 안 될 리가 없었다. 진작부터 흥분은 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처음엔 그저 장난에 맞서 놀아 줘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현재는 지금 아래에서 꼬물거리는 재선을 상상하니 심히 본격적으로 어울려 줘야겠다는 결론만 들었다. 평소에는 자신이 아무리 들러붙어도 사무실 내에서는 불편해하고 남들 눈을 의식하기 바빴던 사람이 오히려 혼자 버려두니까 이런 식으로 재밌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키스를 살짝 미뤄 둔 덕분인지, 남이 사무실에 갑자기 온 탓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재선은 엄청 보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그러지 말고 집에 한번 오지 그래.”

“……집에?”

데스크 아래에 숨어 있던 재선은 제 숨이 거칠어지는 것도 몰랐다.

바지의 천 위로 쏟아지는 숨결이 짙어지는 그때, 현재는 허벅지를 쓰다듬던 구둣발을 더 깊숙이 넣어 재선의 앞섶을 눌렀다. 생각보다도 더 단단해져 있는 성기가 구두 밑창 아래로도 느껴졌다.

이제는 현재도 정말 웃을 수만은 없게 돼 버렸다. 당장이라도 아래 구겨져 있는 재선을 꺼내서 남이 있든 없든 엎어 놓고 박고 싶은데……. 여기서 잘못했다가는 더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꾹꾹 참았다.

재선은 현재가 구둣발로 정확하게 성기 위를 누르는데 미칠 거 같은 기분이 됐다. 아까부터 흥분은 했었고, 현재는 평소랑 좀 다른 것 같고. 얼굴이라도 보이면 눈치껏 어떻게 할지 생각을 이어 갈 여유라도 조금 찾겠는데 지금은 그럴 만큼 주어진 정보가 없었다. 일단 현재가 자극하는 대로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현재가 일부러 자극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구둣발에 짓눌린 아랫도리를 치우지도 못한 채 소리를 참았다. 원초적인 부분이 자극되자 괜히 데스크 아래 숨기 전 보았던 현재의 여유 없던 얼굴 표정과 흥분이 들어차 있던 눈동자가 자꾸 떠올랐다. 더불어 입술도 제대로 벌려 주지 않아 이어지던 감질났던 키스도 생각났다.

직전까지 뭐든 다 부족했었던 재선은 끓는 욕망에 바짝 마른 입술을 스스로 혀를 내어 축이기 바빴다.

그런데 현재의 발 움직임이 서서히 이상해졌다.

아까는 발을 둘 곳을 못 찾았던 거라 생각될 정도로 같은 자리를 꾹꾹 누르기만 하더니, 이제는 바지 앞섶에 드러난 윤곽을 따라서 살살 긁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부드럽지 않은 소재의 바지를 입고 있었던 재선은 슬슬 곤혹스러워지고 있었다. 성기가 자극 때문에 발기한 것도 발기한 거지만 빳빳한 천 위로 자극되는 게 너무 감질났다. 그냥 바로 바지를 풀고 밖으로 꺼내 제대로 잡고 흔들어서 싸 버리면 시원할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제대로 된 소리도 뱉을 수가 없던 터라, 점점 숨 쉬는 일마저 어려워졌다.

지금은 그저 끙끙 앓으면서 현재의 무릎에 이마를 세게 비비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 왔다가 가는 거랑 말만 전해 주는 거랑 어떻게 같아?”

“……왜 갑자기 집에 오라고 그래? 안 그러던 사람이?”

“솔직히 네 얼굴 보면서 수다 떠는 시간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내가 뭐라고 하냐.”

“그래서 내가 거기 가는 거 싫어했구나?”

아래에서 재선은 진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위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듣고 있긴 했지만 재선으로서는 내용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은밀한 부위에 닿아 살살 약 올리는 발끝을 고스란히 몸으로 버티고 있다 보니 비로소, 현재가 일부러 이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 얼굴만큼 성격도 빌어먹게 아름다운 대표님 같으니라고.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는데 현재가 재킷 앞을 여미면서 데스크에 바짝 당겨 앉았다. 재선은 좀 더 몸을 웅크렸다. 아마 다른 물건을 집으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그런 거 같았다. 하지만 당장 재선에게는 그 무엇도 상관이 없었다. 급기야 위험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아예 이렇게 된 김에 현재가 발로 자신을 지분거린 걸 지금 바로 갚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뻗는 손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결론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들리는 거라고는 어렴풋한 둘의 말소리뿐이었다. 그런데 혼자만 이렇게 답답한 데스크 아래 갇혀 있으려니 자신의 숨소리와 현재의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심술이 났다.

재선은 자기가 왜 이 아래 숨게 되었는지 따위는 이미 뒷전이 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현재가 잘 여며 놓은 재킷도, 그 안의 베스트도 슥슥 헤치고 바로 지퍼를 내렸다. 벌어지는 천 사이로 드러난 현재의 브리프는 이미 두둑하게 올라와 있었다. 재선은 그 위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에이, 왜 그러실까. 내가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서.”

“그런 사람이 이렇게 막 쳐들어오냐.”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에 움직이던 재선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데스크 아래의 대담한 움직임을 내심 즐기고 있던 현재는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서 여유롭게 성일의 말을 받아쳤다.

“말은 바로 하랬다고, 네가 와이프랑 같이 있으면 괜찮지 가고 난 뒤에는 얼마나 수습이 힘든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현재는 거리낄 게 없으니 성일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귓등으로 흘렸지만, 문제는 지금 데스크 아래의 재선이었다. 천 조각 하나 헤쳐 놓고 발발 떨리던 손이 이상할 정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현재는 뭐라도 찾는 척 슬쩍 데스크 아래에 있는 재선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자기 앞섶에 놓인 재선의 손을 가만히 얽어서 손가락 사이 여린 살갗을 슬슬 문질러 줬다. 들킨 적 없으니까 괜찮다고.

“안 그래도 따로 연락드리려던 참이긴 했는데. 여기 뒀었나…….”

현재가 괜히 정돈되어 있는 데스크 위의 서류며 물건들을 뒤적거리다가 입고 있던 재킷도 뒤져 보고 서랍까지 휘저으며 한참을 지체했다.

드디어 찾았다는 듯 휴대폰을 들어 연락처를 성일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재선이 있던 바닥의 앞에는 콘돔 봉투가 툭 떨어졌다.

노골적으로 의사를 표시한 현재는 이제 재선이 어떻게 할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사실 재선이 여기에서 안기고 싶다고 한다거나 뭔가를 더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한 조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 흥분하면 원래 사람이 앞뒤가 잘 안 보이기도 하고 하지 않던 짓을 하기도 하는 법이라 재선도 딱 그 정도의 충동이겠거니 싶었다. 아니면 자신이 발로 깔짝거리며 친 장난에 같이 장난으로 갚아 주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일단은 무슨 용건 때문인지 안 가고 서 있는 성일을 잘 달래서 내보내고 난 뒤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릴 굴리던 중이었다.

하지만 재선은 떨어진 콘돔에 있는 대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현재가 일부러 이걸 내준 거라 생각해서였다. 혹시 소리가 들릴까 봐 잠시 손을 멈춘 거였는데 오히려 현재가 자신이 한 일 때문에 더 흥분했다고 여겨졌다. 사람이 있는 것도 신경 안 쓰고 콘돔을 냅다 던져 줄 정도가 됐다 생각하니 이젠 거리낄 게 없어야 한다고 재촉받은 기분이었다.

아까부터 재선은 자신의 손아래에서 움찔거리는 현재의 성기가 느껴진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가장 조용하게 꺼내서 당황하는 현재를 볼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콘돔 봉투를 잡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이제는 정말 참기 어려워진 재선은 브리프의 갈라진 틈으로 손가락을 넣고 힘을 받은 현재의 기둥을 밖으로 꺼냈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흥분하고 있었는지 평소보다 오히려 더 커진 거 같기도 하고 아직 덜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매끈하고 두툼한 살덩어리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지금 연락하려고? 왜?”

“왜긴, 자꾸 여기 와서 일 방해한다고 이르려고.”

“아, 왜 그래. 그러지 말자, 우리.”

이번에는 현재가 당황했다. 슬그머니 책상 아래로 콘돔이 사라지는 걸 보고 기껏 해야 아래 쪼그린 채로 구둣발 아래 서 있는 본인의 성기를 달래려 자위나 좀 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재선이 제 것이 아닌, 현재 걸 꺼낼 줄은 몰랐다.

“그거야 형이 하기 나름……! 이지…….”

“내가 뭘 그렇게…… 뭐야. 왜 그래.”

갑작스럽게 맨살 위로 습기가 느껴졌다. 눈으로 굳이 살피지 않아도 재선의 젖은 입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시켜도 제대로 무는 일도 버거워하던 사람이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무실 데스크 아래서 불이 붙었냔 말인가.

이런, 씨발.

입 안으로 욕을 간신히 삼킨 현재가 아래로 손을 뻗어 가까이 있던 재선의 머리를 제 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컥,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물론이고 순간적으로 막힌 숨구멍에 재선이 현재의 허벅지 위를 움켜쥐었다. 바짝 붙은 아래에서 뜨거운 숨이 색색 새는 것까지 전부 느껴졌다.

“아냐 아무것도, 얼른 가기나 해. 나중에 전화해서 우리 지 이사님 칭찬이나 잔뜩 해 줄게.”

“그래 주면 고맙지. 나중에 내가 톡톡히 이자까지 쳐서 갚지.”

브리프 속에서 튕겨져 나오다시피 한 좆을 자신이 어떻게 쥐었는지, 손가락 끝으로만 살짝 잡고 기둥을 가만가만 쓸어 올리면 표피가 어떻게 꿈틀대는지, 번들거리는 귀두 끝이 얼마나 예쁜 모양을 하고 있는지, 그걸 하나하나 눈으로 새기던 재선이 귀두에 입술까지 가져가 지분거린 건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평소 같았으면 시도조차 않을 짓을 한 자신에게도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놀란 건, 기다렸다는 듯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질량이었다.

물론 밖에 있는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드물게 당황한 현재를 놀려 주고 싶었다.

조금 핥고 입술로 빨아 주다가 사람이 나가면 조금 놀리고 정리나 잘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부 다 삼키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생리적으로 숨은 쉬어야 해서 입을 한껏 벌린 채 혀를 바깥으로 빼 보았지만 그게 발기한 좆이 핥아지며 더 자극이 됐었는지 뒤통수를 잡고 있는 현재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빨리 끝내자 싶어진 재선은 얕고 가볍게 고개를 꺼떡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 안에 쩍쩍 달라붙는 피부의 열기와 함께 타액이 엉겨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머리로 열이 오르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올 때는 애인도 데려오고.”

“알았구나?”

“그래서 온 거였어. 근데 재선인 어디 나갔어?”

“잠깐 일 보러 나갔어. 왜 궁금해하는데?”

“……진짜 맞구나. 너 잘해 줘라, 꼭.”

좀 가. 간다. 빨리 가. 현재는 앞에서 떠드는 성일에게 대강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둘러 인사를 했다. 성일은 찝찝한 표정으로 자꾸만 뒤돌아보며 나갔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진 못했다는, 마음에 단단히 걸리는 게 있다는 그 속내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당연히 현재는 성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했다. 어쩌다가 저런 거한테……. 하고 중얼거리는 말도 들었지만 무시했다. 그래도 성일의 뒷모습이며 문이 닫히는 걸 끝까지 살피는 건 잊지 않았다.

완전히 문이 닫힘과 동시에 데스크에 올리고 있던 주먹이 떨렸다. 꽉 다문 하악에서 과하게 힘이 들어가 저절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어이 문이 닫히고 조용해졌다는 게 확인되고 나서야. 츄웁.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들리는 젖은 소리에 허리를 뒤로 젖히며 아래를 봤다. 손아귀 안에서 반쯤 뜯어진 콘돔을 들고 어디다 쓸 새도 없이 게걸스럽게 자신의 좆에 달려들어 문 것 같은 재선의 모양새에 헛웃음이 나왔다. 질척하게 젖어 버린 굵직하고 단단한 성기는 그렇다 쳐도 그걸 맛있게 빨고 입술로 지분거리느라 붉어진 입술이며, 당연히 버거울 정도 크기의 좆을 담느라 목구멍이 꽉꽉 눌려 생리적으로 걸린 눈물이며, 그 눈물 때문에 촉촉이 젖은 속눈썹까지 어느 하나 야하지 않은 게 없었다.

“재선 씨, 고팠어요?”

“……대표님이 물리셨는데요?”

“그걸 그대로 빨아 주는 건 뭘까. 싫으면 피하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자신의 무릎 사이에서 황당한 듯 바라보며 대답하는 꼴을 느긋하게 앉아서 보고 있자니, 저절로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현재는 아예 구둣발로 재선의 바지 앞을 툭툭 건드리면서 노골적으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재선도 그 행동에 저절로 허리가 움직여졌다. 지퍼를 내리고 스스로 꺼내서 잡고 흔들고 싶은지 움찔움찔하는 손끝이 눈에 보였다. 보고서도 모르는 척한 현재가 재선의 머리를 다시 자기 좆 앞으로 당겼다. 부풀어 오른 아래는 구두코로 톡톡 건드리면서 말랑말랑할 게 분명한 고환까지도 슬그머니 눌러 주었다. 그보다 더 은밀한 곳에 처박고 싶은 걸 참아 가면서.

“……너무, 큰 데요.”

“저번에도 한번 해 봤잖아요. 앞에만, 응?”

“아까처럼은…….”

“잘만 삼키던데, 재선 씨도 하고 싶었던 거 맞잖아요.”

싱그러울 정도로 웃음 짓는 현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어서 재선은 다시 입을 벌려 눈앞에 빳빳하게 서 있는 커다란 기둥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재의 손가락이 슥 머리카락 사이로 느릿하게 들어왔다. 그게 왜 이렇게 야릇한지 모를 일이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타액으로 흥건하게 입술을 적셔야 다치지 않을 정도로 넣을 수 있는 흉악한 성기 크기는 그렇다 쳐도, 자꾸만 점점 깊게 삼키게끔 살살 당기는 손 때문에 코끝으로 음모까지 비비적거리게 되어서 감각이 다 예민해졌다. 게다가 구둣발로 성기를 자꾸 자극해 와 곤란했다. 직접 흔들기나 할 수 있으면 알아서 조절이라도 하겠는데, 참고 있는 와중에 다리 사이를 자꾸 현재의 구둣발이 건드니까 뜻하지 않은 소리들이 입 밖으로 새고 말았다.

“으, 하응…… 읏.”

“하, 재선 씨. 오늘 진짜 작정했구나.”

더 이상은 그대로 두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는지 현재가 그대로 머리채를 쥐듯이 길게 잡아 뺐다. 물고 있던 좆이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재선의 입에서 침이 길게 늘어나든지 말든지 일단 일으켰다. 데스크 위에 기대게 하곤 바지부터 벗겼다.

급했던 건 재선도 마찬가지라 잘 벗겨지지도 않는 뻣뻣한 바지 때문에 끙끙 앓았다.

재선이 브리프와 바지를 동시에 내려 대강 한쪽 다리만 빼낸 채 흥분한 좆을 잡고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흐으, 너무. 대표님, 제발. 좀.”

재선이 어설프게 데스크에 등을 대고서 흰 허벅지를 다 드러내고 쥐어짜려고 좆을 흔드는 건지 아니면 참아 보려고 몸을 비비는 건지. 온몸을 비틀어 댔다.

뭐든 이 광경에 눈이 돌지 않으면 현재가 아니었다. 재선의 바지가 걸려 있는 한쪽 다리를 그대로 우악스럽게 벌린 현재는 그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게걸스럽게 핥아 올렸다. 이미 기둥을 잡고 꾹꾹 참고 있던 재선은 눈앞으로 별이 팍 튈 정도로 성감이 올랐다. 단순히 고환이니 음모 부근을 부드럽게 핥기만 한 게 아니라 회음에서 딱 올라붙은 고환 바로 아래를 앞니 끝으로 긁기까지 해서였다.

“아, 그냥 빨리……. 어떻게 좀!”

“뭐, 어떻게. 뭘 해 줄까요? 아직 버틸 만한 거 같은데? 씨발, 여기 빨갛게 부은 거 봐.”

현재는 재선이 안달 낼 때마다 잘게 떨리는 허벅지 안쪽을 흡족하게 핥았다. 자신이 새겨 넣은 흔적으로 빨갛고 도톰하게 변한 회음을 감상하기도 했다. 물론 하얀 피부 위를 자근자근 씹는 것도 꼭 잊지 않았다.

제대로 몸을 가누기 어려워할 정도로 흥분한 재선은 흥분이 한계에 이를 때마다 발발 떨었다.

그때마다 현재는 재선의 근육이 튀어 오르는 게 생생하게 느껴져서 자꾸만 새로운 자극을 주는 일에 열중하곤 했다. 재선이 부끄러워할 게 뻔한 모습에 욕심내는 스스로가 좀 짓궂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 생각은 아주 잠깐 스쳐 갈 뿐이었다.

한참을 핥아서 축축하게 적신 회음과 좁은 입구는 현재의 숨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현재가 이미 붉게 달아오른 재선의 구멍 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쑤셔 넣으면서 길게 한 바퀴 휘저은 건, 질 나쁜 쾌락에 휩쓸려 같이 즐기고 싶어진 욕망이 먼저였던 탓이다.

“하악! 으응. 거기…… 흐윽!”

“어디? 잠깐 참아요. 같이해야지.”

“안 돼, 아니야. 아, 싫어, 제발……하읏! 아!”

정말 반칙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완전히 쌀 것 같은 타이밍이었는데 현재가 한 손으로는 뒤를 쑤시고 다른 손으로는 기둥을 잡아채서 아예 싸지도 못하게 힘주어 잡아 버렸다. 곧 찾아올 거라 생각한 해방감이 목전에서 콱 틀어막혔다. 절로 허리가 튕겼다.

절정에 달하지 못하도록 막은 게 현재인데, 그런데도 이걸 해소해 줄 사람도 현재뿐이어서 재선은 자꾸만 몸뚱이를 가까이 가져가게 되었다.

상의는 벗지도 못한 채 현재가 일하는 데스크 위에 널브러져서 이러고 있다는 것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도무지 가게 해 주질 않으려 하는 현재 때문에, 재선은 그저 허릴 튕기며 싫다고 도리질 칠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지금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아래에 지금 당장 처박았다가는 진짜 누구 하나 피를 볼 것 같았다. 아니 피를 보더라도 멈추지 않을 게 분명했다. 매번 몸을 물리며 빼기만 하던 재선이 이만큼 달아오른 건 꽤 충격이었다. 그것도 사무실에서. 현재는 자신의 이성이 아예 날아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겼다.

아래를 파고든 손가락은 어느새 세 개를 넘어갔고, 사이로 찔꺽이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손가락을 빼내곤 콘돔과 젤을 찾아 서랍을 뒤적거리는데.

“그냥, 대표님. 하으, 그냥 바로…….”

“다쳐요. 잠깐만.”

뺨이 붉게 달아오른 채 아래 서 있는 현재의 성기 위로 자신의 구멍을 맞추려 꼼지락거리는 재선의 몸짓이 예쁘지 않을 리가 없다.

“현재야, 빨리……!”

“미친, 진짜. 형, 이건 내 책임 아니야 정말.”

재선이 현재의 허리를 다리로 휘감으며 하는 말에 현재도 기어이 이성을 놓고야 말았다. 서랍을 뒤지던 손끝에 잡힌 젤을 통째로 재선의 다리 사이에 퍼붓고는 콘돔을 씌우자마자 그대로 달려들었다. 곧추서 있는 좆을 좁은 구멍 사이로 쑤셔 박으면서 퍽, 하고 쳐올렸다.

묵직한 질량감에 재선의 몸이 데스크 위를 쭉 밀어낼 정도였다. 재선은 하윽, 하고 새된 신음을 뱉었다.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버틸 수 없었다. 곧 넘어갈 것처럼 아래에서 퍽퍽 쳐올리는 힘 때문에 재선이 허리를 움직이는 일은 의미가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골반째로 떠오른 채 아랫배 가득 차오르는 강한 자극에 현재의 팔뚝을 더듬으며 붙잡아 매달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미 두어 번 쳐올리는 와중에 현재의 손에서 놓아진 재선의 성기는 흥분해 터질 것처럼 부푼 상태였다. 허벅지며 아래가 덜덜 떨렸다. 가득 차오른 흥분 정도론 금방이라도 사정해야 정상인데 정액이 나오기는커녕 단단한 발기가 가라앉지 않고 미칠 것 같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간지럽고, 아프고, 동시에 내부를 꽉 채운 채로 짓이기듯 꾹꾹 자극하는 현재의 성기 때문에 척추를 따라 몸이 찌릿했다.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 순간 현재가 데스크 위에 널브러져 있던 재선을 확 잡아당겨서 팔을 목에 두르게 하고 들어 끌어안은 채 움직였다.

“아악!”

“윽, 힘 조금만 빼요.”

“잠, 잠깐만. 잠깐.”

다급하게 목뒤로 팔을 둘러 감아 안은 재선이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사이 소파로 간 현재가 재선의 몸을 꽉 안은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악! 아!”

동시에 재선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성기를 물고 있던 내부가 강하게 수축했다. 떨림이 가시지 않자 영 이상했던 현재는 그대로 소파에 앉은 채 재선의 엉덩이를 안쪽으로 당겨 안으며 등허리를 보듬듯이 문질러 주었다. 그런데 재선이 경련하듯이 진저리를 쳤다. 그러면서 현재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다가 몸뚱이를 붙이고 자꾸만 현재에게 비벼 왔다. 눈도 살짝 풀리고 말도 어색하게 대표님, 현재야아. 하고 늘어졌다. 왜 이러나 싶어 재선의 몸을 천천히 살피던 현재에게 바짝 약이 오른 재선의 좆이 눈에 띄었다. 맞붙은 두 아랫배 사이에서 재선의 좆이 아직 사정하지 못한 채 빨갛게 달아올라서 꺼덕거리고 있었다.

손끝으로 살짝 귀두를 툭 건드리자 마치, 재선이 사정한 직후에 툭툭 괴롭힐 때 같은 그런 느낌으로 자지러졌다. 그러면서도 현재와 몸이 약간이라도 떨어질라 치면, 흐아, 으, 아으. 하고 신음을 흘리며 다시 현재에게 닿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재선 씨.”

“하아, 하아……. 나, 이상, 해요. 대표님, 나 몸이…….”

“아주 오늘 예쁜 짓만 골라서 하네.”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현재는 재선을 아예 끌어안은 채 다시 한번 콱 성기를 처박았다. 재선이 히익, 하고 반응했다. 싸지 못하는 게 괴롭긴 하겠지만 뒤로만 가서 그런 거니 조금 이따가 풀어 주기로 했다. 일단 한 번 하고 직원들 퇴근도 시킨 다음에 이 차를 뛸까 계산하면서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건너편 소파로 집어 던졌다. 그러다 재선이 입고 있던 셔츠가 눈에 걸렸다. 통통하게 올라붙은 성기도 붉어져서 예뻤지만 현재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가려져 있어서야 완벽한 그림이 되지 않았다.

“다 해 줄게. 내가 우리 재선 씨 아끼는 거 알죠?”

끌어안고 있던 재선의 몸을 뒤로 살그머니 눕혀 준 현재가 아까부터 거슬렸던 셔츠부터 잡았다.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는지 땀에 젖은 천 뒤로 피부가 비쳐 보였다. 유두는 바짝 서서 툭 튀어나와 있었다. 현재는 두툼한 가슴 위를 잡고 엄지로 튀어나온 유두를 꾹꾹 눌러 지분거렸다. 이 광경만으로도 한 발 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잠깐만……. 아으……. 싫, 싫어어!”

“여기 좋아하잖아요. 만질 때마다 맨날 몸은 자지러지는데 입만 싫다 그러면 누가 믿어.”

“으응, 하……. 하으……읏, 아!”

“이거 봐요. 여기도 막, 어? 더 만져 달라고 빨딱 서서.”

우두둑, 재선의 셔츠 단추가 한 번에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천 위로 만지는 걸로 더 만족할 수 없었던 현재가 저지른 행패였다.

드러난 가슴에선 붉게 달아오른 유두가 유독 돋보였다. 주저 없이 그 위로 고개를 박은 현재는 혀끝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힘껏 빨아 들이기를 반복했다. 금방 발갛게 색을 달리하는 가슴이 탐스러웠다. 입이 닿지 않으면 손으로 잡아당겼고 입이 닿으면 혀와 이로 핥고 물고 빨았다. 연약한 피부가 거듭되는 자극에 예민해지고, 통증을 넘어서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재선은 금세 그 쾌감에 젖어 들었다. 사정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참이니, 가슴으로 집중되는 자극에 점점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단단해진 유두가 현재의 혀끝에 튕겨질 때마다 몸이 찌릿찌릿 울렸다. 자꾸만 할딱이는 숨이 튀어나오고, 몸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내벽이 힘껏 물고 있는 성기는 움직이지도 않는데, 가슴이 물리고 빨리는 자극만으로 재선의 허리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재는 재선이 해소되지 못한 열기로 힘겨워한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나쁜 생각이 현재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랑 같이 가고 싶죠? 빨리 싸게 해 줄까요?”

“……으응?”

현재가 입술로 유두를 물고 살살 빨아 들이다가 놓아준 뒤 고개만 들어 재선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채 재선의 가슴 위에서 당연한 질문을 했다. 그런 현재의 얼굴이 말갛기만 했다.

이미 반쯤 정신이 날아가 이곳이 어딘지도 잊은 재선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뜯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이 현재의 입질 때문에 유두와 유륜까지 색이 조금씩 달랐지만, 재선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현재가 하체가 맞붙은 채로 상체만 일으켜 재선을 내려다봤다. 양손을 살집이 있는 가슴 위에 얹어 주물거리면 손가락 모양 그대로 붉어졌다가 색이 하얗게 바래어지는 변화가 절경이었다.

“재선 씨, 전보다 가슴이 예민해진 것 같아.”

“아니, 아닌데…….”

“이거 봐요. 엄청 빨갛고 커진 거 같은데.”

바짝 긴장해 현재의 것을 꽉 물고 있던 구멍에서 서서히 성기를 빼냈다. 옴찔거리며 놓아주지 않는 내벽도 맛있었지만 현재는 재선이 쾌감에 젖어 있을 때 저지르고 싶은 제 충동대로 몸을 움직였다. 둘 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흥분이 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누워 있는 재선의 위로 몸을 옮긴 현재가 무릎으로 재선의 양팔을 꽉 눌렀다. 얌전히 누워 있는 재선을 내려다보던 현재는 콘돔을 바로 벗겨 내고 기둥을 잡고 흔들다가 자신의 귀두 끝을 재선의 유두 위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젤과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현재의 성기가 발기한 채로 미끄러지듯 재선의 가슴 위를 오갔다. 두툼하고 단단한 살덩이 끝이 피부 위를 문지르는 것은 날카로운 자극과 거리가 멀었지만, 현재가 흥분한 좆을 잡은 채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마구잡이로 가슴 위를 희롱하는 광경은 충분히 야했다.

“흐으…….”

“여기도 세우고 좆도 세우고. 우리 재선 씨 엄청 야해.”

바짝 서 있는 유두 위를 현재의 귀두가 스칠 때마다 요도구 사이에 걸렸다. 축축하게 젖은 조그마한 구멍 틈으로 유두가 긁히는 느낌도 이상했지만 현재가 자신의 위에서 거친 숨을 내쉬며 허리를 들썩이는 광경도 쾌감이 엄청났다. 누워 있는 재선의 몸을 희롱하고 가지고 노는 것은 현재인데 도리어 재선이 더 자극이 됐다.

젖어 있는 앞머리를 뒤로 넘긴 현재는 좆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부어 있는 유두 위로 귀두를 꾹꾹 누르다가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재선의 얼굴을 살피다가 머지않아 흥분을 참지 않고 재선을 불렀다.

“재선 씨, 하아……. 이렇게 하니까 재선 씨도 나한테 쑤시는 거 같지 않아요?”

“그, 그만……. 읏. 으응…….”

“눈 피하지 말고 봐요. 이게 서 있으니까 막 구멍에 들어오잖아.”

“흐으, 읏!”

몸만으로도 부족해 시각적으로도 과한 자극을 받은 재선이 견디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현재가 팔을 움직일 수 없도록 재선의 몸을 구속하고 있다는 점도 재선을 애가 타게 만들었다. 평상시에도 예뻐해 마지않는 현재가 쾌감에 가득 차 제 몸을 만지고 이용해서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물드는 광경이 지독한 흥분을 불러왔다.

결국 이미 한계치 이상의 자극을 받고 있던 재선의 몸이 동시에 들어오는 이 자극들을 이전보다 더 과민하게 느껴 버렸다.

“아……. 하아악!”

현재가 몸을 누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재선의 몸이 펄떡하고 튕겨진 건 그래서였다. 등 뒤로 무엇인가가 세게 뿜어져 나오는 걸 느낀 현재가 몸을 내려 재선의 다리 사이를 벌리고 자리 잡았다. 재선의 아랫배 위까지 점점이 흩어진 점도 높은 자국들이 뭔지는 굳이 제대로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흐으, 으…….”

숨을 몰아쉬는 재선의 가슴이 울긋불긋했다. 쾌감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허벅지 사이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젖은 구멍이 탐욕스럽게 오물거리며 개폐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재선의 모습을 자신만이 볼 수 있다니. 퇴폐적이고 자극적인,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귀한 광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자신의 눈이 그 넓은 경기장 위에 있는 재선을 담았을 때부터 오로지 이걸 위해 집중하지 않았을까.

“재선 씨, 가슴으로 갔어요?”

“아…….”

“나하고 같이 가기로 했으면서…….”

“잠, 잠깐만……. 지금은, 지금 넣으면.”

“같이 가야지요. 응?”

재선은 현재가 주는 자극에 충실히 반응했을 뿐인데, 그런데 현재가 마치 이용당하고 홀로 버림받았다는 듯 처연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재선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보단 마음이 약해져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러면 누군들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 아아……!”

“씨발, 누가 이렇게 예쁘래. 응? 나 봐야죠, 형.”

단박에 구멍 속을 파고들어 간 성기가 재선의 배 속을 가득 채웠다. 탄력 있는 몸이 자지러지며 현재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재선의 몸은 체액과 땀으로 흠뻑 젖어 번들거렸다. 덕분에 움직이는 근육들이 더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버거울 정도로 큰 성기를 한 번에 받아 놓고도 재선은 반쯤 다시 흥분했다. 늘어졌던 성기가 아랫배에 살살 올라붙기 시작했다.

현재는 분명 지금 재선이 과도한 쾌감으로 아직 힘겨워할 때임을 예상하면서도 꺼떡거리는 재선의 좆을 가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부추기듯 아랫배끼리 딱 붙인 채 느릿하게 내부에 자리 잡아 가는 일에 집중했다.

현재가 시선을 요구할 때마다 가물거리는 시야를 다잡아 가면서 눈을 맞추는 재선이 너무 좋았다. 좋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좋았다.

현재가 아래에서 움직일수록 재선의 몸은 그에 맞춰져 가고 있었다. 아니, 떠올려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찰기가 느껴질 정도의 올라붙은 엉덩이도, 잘 가꿔진 근육 덕분에 잡는 맛이 좋은 가슴도, 박아 올릴 때마다 잘게 흔들리는 모습마저 처음부터 현재에게 딱 맞춤이라 느껴질 정도로 흡족했다. 재선을 몰랐다면 절대 현재가 알 수 없었을 감각이었다.

“아, 좋아…….”

“으응. 조금만, 살살……. 현, 현재, 아읏……!”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아래를 박아 올리기 시작한 현재의 움직임에 재선은 눈앞이 새하얗게 바래져 갔다. 좆이 구멍을 들락거리면서 나는 적나라한 소리와 배 속을 울리는 자극이 몸속에 가득 차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연약한 점막은 거대한 성기에 쑤셔져 잘게 경련하면서도 꾸역꾸역 원하는 만큼 삼켜 댔다. 허리가 절로 튕겨지고 박힐 때마다 재선의 성기 끝에서 무언가 툭툭 뿜어져 나왔다. 실은 끊어지지 않은 자극 때문에 성기에서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한 말간 체액이 현재가 강하게 움직일 때마다 위로 튕겨지는 것뿐이었지만.

“조금만요, 조금만…….”

“흐아……아……! 아앗!”

두 사람 모두 한계치까지 끌어 올려진 쾌감으로 사고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재선은 어느새 시간도 장소도 잊은 채 온몸이 열락과 욕망으로 꽉 들어차 결합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현재가 재선의 몸을 꽉 끌어안고 옴짝도 하지 않으며 재선을 덮쳤고, 재선은 몸속 깊숙한 곳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놓고 말았다.

***

“……아니, 아니라니까. 아 왜 안 믿는데!”

아무래도 머지않아 반드시 병원을 가 봐야 하지 않을까.

눈을 뜬 재선이 제일 처음 한 생각이었다. 평소 체력이라면 남부럽지 않다 자신했던 몸뚱인데도 현재랑 좀 어울리려고 하면 저도 모르게 잠들거나 기절하거나 어디론가 옮겨지는 것도 모르고 있거나……. 아, 이건 취했을 때니까 상관없는 걸까. 하여간 기운이 쭉 빠졌다.

기억하기로는 홀딱 벗고 있었는데 모르는 옷이 입혀져 있었고 무엇보다 말끔할 정도로 몸이 찝찝하지 않다는 점이 가장 신기했다. 그래도 침대가 아니어서 몸이 좀 불편해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틀었다가 처참할 정도로 얼룩진 건너편 소파를 보고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그냥, 아까 그 소파가 아니었을 뿐이구나.

그건 그렇고 지금 자기가 베고 있는 건, 현재의 허벅지였다. 혼자 여기를 수습하느라 정신도 없었을 텐데 재선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는지 굳이 통화하면서까지 붙어 있는 현재가 괜히 귀여웠다.

“알면서 좀 모르는 척하면 덧나냐. 기억도 못 할 정도면 아주 존재감도 없었던 선수 아니었냐고. 빡빡머리 말고는.”

그건 그렇고 이미 퇴근 시간은 진즉 지났을 거 같은데 저녁은 어떻게 챙겨야 하지. 현재가 혼자 챙겼을 것 같진 않은데. 시간은 몇 시지. 재선은 서서히 정신을 차려 갔다. 힐금 현재의 눈치를 보며 몸을 조금씩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재선 씨한테 반말하지 마라. 짜증 나니까. 자꾸 그러면 작년에 형수님한테 출장이라고 구라 까고 몰래 낚시 갔던 거 다 이른다.”

현재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제 이름에, 재선은 차마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재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과 달리, 통화가 이어질수록 말투는 계속 험악해져만 가서 더 그랬다.

어떡하지,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일어날까. 괜히 찝찝한데…….

“작작하지 좀, 씨발 귀찮게.”

재선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속으로 고민만 하던 순간, 낮게 읊조려지는 현재의 매서운 말에 몸이 저절로 움찔 떨렸다. 더는 모르는 척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아, 깼어요?”

“……누군데 제 얘기를.”

끊어. 나중에 얘기해. 통화를 하던 현재가 서둘러 전화를 끊고는 휴대폰을 테이블로 내려놓았다. 대수롭지 않게 씩 웃으며 재선에게 집중했다. 조금 전까지 목소리만으로도 누구 하나 죽일 거처럼 이야기하던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상큼한 모양새였다. 물론 질척질척 젖을 정도로 난잡하게 뒹굴었던 기색 역시 하나 없었다.

재선의 앞머리를 살며시 넘겨 주며 바라보는 눈에 애정이 가득해 그 시선을 마주한 재선이은 더더욱 민망해져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문제는 현재가 재선을 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다는 데 있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아니 뭐…….”

“옷은 여기 놔두던 거로 입히긴 했는데 약간 불편하긴 할 거예요. 제가 입던 거라.”

“……괜찮습니다.”

멀쩡한 옷이 여기 있는 게 어디냐. 자칫하면 재킷만 입고 나가야 할 뻔했을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재선은 그나마도 감사하게 생각했다. 현재가 그새 또 재선의 입술 위를 가볍게 쪼지 않았으면 더.

재선은 살살 입술을 부비며 또다시 가슴 위를 더듬어 대는 현재의 손을 얌전히 잡아 내렸다. 가만히 뒀다간 정말 사무실에 있는 모든 소파를 당장 다 가져다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재선은 조금씩 몸을 물려 현재에게서 떨어져 소파에서 일어났다. 허리 아래로 미약한 통증과 약간의 이물감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이것조차 이기지 못할 만큼 약하진 않았다.

“그래도 내 옷 입고 있는 것도 좋네요. 이런 걸 남친 셔츠라고 하지 않나?”

“…….”

다만 한껏 만족스러워하는 현재와 다르게 가슴 위로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은 조금 거슬렸다. 뭐, 집에 들어갈 때까지만 조금 버티면 되는 일이니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판단한 재선은 현재의 헛소리쯤은 가볍게 넘겼다.

……소파는 진짜 어떻게 하지. 모르겠다. 너무 많은 걸 걱정하다가는 현재가 자신에게 옷을 입혀 줄 때의 상황까지 떠올리며 걱정하게 될 것 같으니까 일단 생각을 멈춰야 했다.

“저녁은 뭘로 하시겠어요? 밖에서 먹을까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뒷정리를 하고 휴대폰을 챙기던 재선이 현재에게 물었다.

그사이, 심각하게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는 현재를 발견했다. 방금 소파에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인데도 재선, 자신과 대화할 때와는 또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온도가 아예 다른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의 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해서 다시 말을 걸지는 못했다. 재선은 쥐고 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의미 없이 문지르다가 슬그머니 현재의 뒤로 가 비어 있던 손으로 어깨를 짚었다. 걱정이라도 조금쯤 덜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행동이었다.

“음, 정리 다 했어요?”

“네, 혹시 뭐 걱정할 일이라도…….”

“아뇨. 아무것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젓는 현재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처럼 밝고 말갛기만 했다. 아무래도 재선이 자신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모르는 척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재선은 일단 식사부터 챙겨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현재의 능청에 장단을 맞춰 주기로 마음먹었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집에서 먹을까요? 아니면 전에 갔었던 불고기 집은 어때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드시고 싶은 거 있나요?”

재선이 밖으로 먼저 나가 현재가 나오기 쉽도록 문을 잡아 주었다. 현재는 그런 재선의 옆으로 다가서며 가볍게 물었다.

“나 말고 재선 씨 먹고 싶은 곳으로 가지. 오늘 점심도 간단하게 때웠잖아요.”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 큰일이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재선은 항상 문 밖으로는 자신이 먼저 나가고 안전을 확인한 뒤에야 현재가 지나가도록 했다. 둘이 같이 움직일 때마다 항상 그랬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로 이동할 때도 항상 사각지대로는 재선이 먼저 향했다.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재선은 현재 위주로 움직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현재는 재선의 이런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러 내색한다거나 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다. 주변이 위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도 했지만 재선이 자신을 세세하게 신경 써 주는 그 순간들이 좋았다.

위험한 일이 생겨도 현재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지만 재선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자신의 눈에도 재선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전에 들깨 칼국수 먹었던 곳은 어떻습니까?”

“아, 거기 동치미 맛있었죠.”

“그럼 그리로 갈까요? 운전은…….”

“오늘은 운전 내가 할게요. 재선 씨가 내비 찍어 줘요.”

자연스럽게 운전을 하겠다고 하는 현재를 재선이 굳이 말리지 않았다. 부러 하나하나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같이 지내는 시간이 쌓여 가면 쌓여 갈수록 마치 톱니바퀴가 딱 맞물리듯 자연스레 맞춰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방문하신 분은…….”

“아, 서로 아는 사이라면서요?”

“예전에 운동할 때 종종 마주쳤었습니다.”

도로로 나서는 사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재선의 입에서 오늘 사무실에서 마주친 지성일에 대한 화제가 나왔다.

핸들을 잡고 재선이 내비에 입력한 곳을 향해 운전하던 현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선의 말에 답했다.

“본사에 이사로 있어요. 가끔 이렇게 오는데 재선 씨 있을 때 또 올 일이 있으려나.”

“대표님과 서로 친한 분인가요?”

“아……. 내가 말 안 했었나. 형이에요. 제일 큰형.”

“형이셨……예? 친형이요?”

“네, 진짜 몰랐나 보네.”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한 사이, 현재가 옆에 있는 재선을 보며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재선은 새로 알게 된 사실에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었다. 형이라는 걸 왜 둘 다 이야기를 안 하는 거지. 회사라서 그랬나? 아니, 회사면 더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많이 안 닮았긴 했나 보다.”

“닮았으면 제가 당연히 알았겠죠. 어떻게 말을 안 했…… 지성일 씨가 말을 안 하면 대표님이라도 해 주셨어야죠.”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럼 다음에는 꼭 이야기할게요.”

“다음이라니, 그럼 아까 거기. 거기 아래에서 제가 막, 그러고 있을 때 대표님이랑 이야기하던 것도 다 지성일 씨…….”

그건 누구더라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싶지만 운전하던 현재는 별말을 하지 않고 그러네, 그랬네요. 아이고. 하면서 재선이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재선은 얼굴도, 귀도, 목도 다 빨개져서 오른 열을 식히지 못해 허둥거렸다.

“거기 재선 씨가 그러고 있던 것도 형은 몰랐을 텐데 잊어버려요. 다음에 정식으로 소개해 줄게요.”

“당연하죠! 그러고 있는 걸 알면 콱 그냥…….”

“그냥? 그냥 왜요. 뭐.”

“……아닙니다.”

예전에 재선이라면 아예 일을 이제 안 하겠다고 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도망가 버리거나 했을 텐데 이젠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나오지가 않았다. 백미러를 통해 마주친 현재의 눈빛이 살벌한 것도 있었지만, 자신이 현재의 곁을 떠난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부딪혀서 깨지는 일이 있어도 노력하고 싶어졌다. 조금 우습고 부끄럽고 부족한 모습은 이미 현재의 앞에서 많이 보인 뒤니까. 남들의 시선은 어떻든 크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형만 넷이라고는 말했었죠?”

“네.”

“만났던 지성일 이사님이 우리 가장 큰형이에요. 아빠하고 똑같이 생겼어요. 근데 사실 가족들끼리는 조금씩 다 서로 닮았는데 나만 좀 달라요. 그래서 어릴 적에는 어디서 나 주워 왔냐, 사 왔냐 그랬었어요.”

“……사 오다니.”

“농담이었죠 뭐. 둘째 형은 그때 재선 씨한테 나쁜 장난 치고 도망간 사람. 그 사람이 둘째 형인데 철이 덜 들어서 가끔 그렇게 엇나가요. 셋째 형은 지방에서 따로 일하고 있고. 넷째 형은 외국 나가서 잘 안 들어와요. 종종 들어올 때마다 이상한 거 사 오는데 올 때마다 요란하니까 오면 소개해 줄게요. 회사로 갑자기 오는 경우에는 꼭 이야기해 주고요.”

“……저는 사실 가족이 없어서.”

“으음,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가족들이 많은 건 불편하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현재였지만 재선의 앞에서만큼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 가족에게 냉정하게 구는 현재를 알고 있는 재선은 현재에게 가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눅이 들거나 동경하지 않았다.

“아뇨, 불편하진 않아요. 익숙하기도 하고 이미 대표님은 조금 아시고 계시니까요. 부모님이 계시긴 한데 고등학교 때 두 분 다 이혼하고 재혼하셨어요. 저는 성인이 되기 직전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안 만나고 있어요. 어디 계신지도 잘 모르고요.”

“……찾아보려면 찾을 수는 있어요.”

“괜찮아요. 포기한 게 아니라 지금은 정말 괜찮아졌어요.”

서로를 위해 조금씩 하게 되는 일들, 그리고 조금씩 물러서는 일들. 가끔은 어긋나 삐걱거려도 제자리를 찾기 위해 다시 똑바로 바라보는 일들. 둘은 그렇게 서로를 열심히 익히고 열심히 맞춰 가고 있었다.

“근데 형은 재선 씨한테 반말 막 하던데.”

“아, 저도 성일이하고 이야기할 때는 그랬죠……. 동갑 선수로 만났었으니까요.”

“왜 나한테는 말 안 놔요.”

“……대표님이잖아요. 그리고 가끔 놓잖아요.”

“꼭 내가 말해야 하면서.”

뾰로통하게 입술을 비죽거리며 운전하는 현재를 바라보던 재선이 피식 웃었다. 억지를 부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엄청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걸 본인도 알고 하는 걸까. 알고 있겠지?

“회사에서는 직원들도 있으니까 조심하는 거죠.”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형한테 구두로라도 약속 받을 걸 그랬어. 절대 재선 씨랑 같이 있지 말라고. 반말도 하지 말라고.”

“설마, 사무실에서 통화하던 사람이 성일이었습니까?”

일어났을 때 들리던 말이 그럼 고작 존댓말 때문에 형한테 그렇게 대들던 거였구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귀엽기도 했다.

현재는 재선의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투덜거림이 점점 심해져 갔다.

“안 그래도 아까 사무실에서 재선 씨한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잔소리나 하는 양반인데. 도대체 챙겨도 내가 더 잘 챙기지 형이 잘 챙기겠냐고요.”

“……쓸데없는 짓?”

웃고 있던 재선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말이 현재의 입에서 섞여 나오기 시작해서였다. 사무실에서 쓸데없는 짓을 한 적이 없……는 게 아니라 것도 나하고? 그걸 지성일이 콕 집어서 말을 했다고?

“애인이라고 하는데도 내가 약점 잡은 거 아니냐고 하고. 서로 좋아하니까 하는 거라는데 안 믿더라니까요?”

“잠, 잠깐만. 애인이라고 말하셨습니까? 좋아하니까 뭘, 하는데요. 사무실은 왜……?”

“아…….”

그제야 현재가 말한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 버린 재선의 낯이 점점 붉어졌다. 그리고 다시 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아까, 분명히…… 모르고 있다고.”

“아니이……. 정확히 본 건 아니니까요…….”

“저하고 사무실에서 뭐 하는지 알면 다 안 거죠!”

“……내가 말한 건 아니고. 그냥 형이 좀 눈치를 챈 거죠. 보진 않았다니까요.”

운전하랴 완전히 사색이 된 재선을 풀어 주랴 정신이 없었다. 현재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며 재선의 눈치를 살폈다. 하여간 형들이라고 있는 작자들이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 아무래도 앞으로 절대 만나지 못하게 막기라도 해야지.

“그리고 쫌 알면 어때요. 우리가 뭐 못할 짓 한 것도 아니고.”

“……예?”

“사귀는 사인데 가끔 색다르게 그럴 수도 있지. 솔직히 재선 씨도 좋았으면서.”

“……뭐?”

“이젠 뒤로도 가고 가슴으로도 가고 그랬…….”

“……지현재.”

이건 좀 너무 많이 갔다는 걸 또 뒤늦게 알아차린 현재가 얌전히 식당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나서기 전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숨소리만 들리는 차 안에서 현재는 자신과 재선의 벨트를 풀어낸 뒤 과감하게 재선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미안해요. 화 풀고 밥 먹어야죠. 안 그러면 재선 씨 채해.”

“…….”

현재는 쪽, 쪽. 계속해서 입술이며 뺨, 눈두덩이, 콧망울, 턱 끝, 여기저기 입술을 갖다 대며 살살 애교를 부렸다. 울먹였다가 씩 웃기도 했다가 코끝을 찡긋거리면서 삭삭 빌기도 했다가 정말 다 했다. 다 하고 있었다.

재선은 풀려 가는 화를 느끼며, 얼굴 천재는 이런 인간에게 붙여야 하는 말이라고 현재의 얼굴이 가진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선 하등 쓸모없어지는 이성도 조금 반성했다.

“알겠으니까 이제 가요.”

“화 푼 거죠? 진짜지?”

“알았다니까요.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떡해요,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떨어진 현재가 차에서 내려 재선이 앉아 있던 조수석까지 쏜살같이 가 차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그 너스레에 재선은 결국 헛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현재는 못내 불안했는지 천천히 식당 입구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들어가서 내가 백숙도 사 줄게요. 여기 능이 넣은 거로 맛있게 잘해요.”

“괜찮아요. 아, 먹고 싶으면 시켜요. 같이 먹으면 되지.”

“아냐, 우리 재선 씨 먹이고 싶어서 그렇죠. 다음에는 내가 진짜 조심할게요. 오늘 보니까 너무 일찍 가는 거 같긴 했거든요 조금만…….”

“……그냥 집에 갈까?”

진짜 재선이 발길을 돌릴세라 현재가 재빨리 팔짱을 끼곤 딱 붙었다. 재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동시에 밥 먹는 상 앞에서 이 소리 안 나온 게 어디냐 싶었다. 한껏 낮아진 기준에 자신도 점점 능청스러운 현재를 닮아 가는 거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다.

“사랑해. 우리 재선 씨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죠.”

하긴 뭐가 어떻든 문제겠는가.

“……뭐, 나도.”

서로 잘 맞추기도 하고 서로 투닥거리기도 하고 서로 매달리기도 하고 사는 거지.

“어? 다시 말해 봐요. 나 잠깐 못 들었는데.”

“얼른 들어가요. 배고프다.”

둘이니까. 함께니까. 같이니까. 이렇게 있으면 다 괜찮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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