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7)

04.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이거 언젠가 분명히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 스치는 기시감에 불안해져 서둘러 잠에서 깼다. 움직이는 몸이 부위마다 제각각 삐걱거렸다. 손을 들어 올려 눈꺼풀 위를 비비는데 범상치 않게 부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조금씩 움직이는 몸이 비명을 질러 댔다. 그것도 말하기 참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곳들이 주로.

“뭐지…….”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을 끔벅이던 재선이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나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으응, 흐……. 제발. 대표님…… 하으.

-후, 여기. 넣어 주고 있잖아요. 부족해요?

분명히 그래서는 안 되는 사실이 영화처럼 재선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자신이 취했어도 남에게 불필요한 신세를 한 번 진 적이 없는 인생인데. 미치지 않은 이상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고용한 남자랑 그랬을 리가. 지현재랑 그런 걸 했을 리가. 없어야…… 하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평소에 지내던 방보다 훨씬 넓은 크기의 깔끔한, 언제나 익숙하게 드나들며 정리를 도맡았던 방이었다. 헐벗고 있는 상체로 고개를 숙였다. 울긋불긋해진 피부가 꼭 역병 걸린 사람……일 리가 없었다.

“아, 일어났어요?”

“으앗……!”

침실 옆에 붙어 있는 욕실에서 현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선은 고개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허리에만 수건을 간신히 걸친 남자를 마주해야 했다. 알몸인 채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는 걸 알고는 황급히 고개를 다시 돌렸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워졌다.

“그, 크흠 어제는.”

“음?”

“어제는…….”

간밤에 혹사당한 뒤 잠에서 막 깨어난 터라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준비되어 있었는지 자신의 손에 머그잔을 쥐여 주는 현재의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고개를 한 번 꾸벅여 고마움을 표현한 재선은 천천히 목을 축였다. 적당한 온도로 식어 있는 꿀물이었다.

“재선 씨 보기보다 술이 약하더라고요. 많이 마신 건가?”

“어제 제가 좀…….”

“그래도 너무 기분 좋았어요. 재선 씨는요?”

도대체 제가 취한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나요.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데 설명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분명히 물어봐야 하는 질문들인데 입 밖으로 하나도 나가질 않았다. 마치 혀가 묶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오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깜박이는 현재의 얼굴을 보자 말들이 더 속으로 숨는 것만 같았다.

기분, 기분을 물어봤지.

당장 떠오르는 장면들은 파편처럼 토막이 나 있긴 했지만 확실히 기억났다.

거칠게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며 눈가가 가늘어지던 아름다운 얼굴과 땀으로 젖은 등을 끌어안을 때의 묵직함. 입술을 핥던 야살스런 혀끝과 아랫배가 얼얼할 정도로 깊이 찌르던 성기. 서로의 몸이 부딪히고 비벼지면 바짝 날이 서곤 하던 강렬한 쾌감.

“좋았……죠. 당연히.”

“그죠. 진짜 신기하게.”

좋았는데. 어쩌다가 그랬던 걸까요? 길게 이어져야 하는 의문들은 도무지 입 밖으로 나가질 못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선의 입가와 뺨을 거쳐 다시 입술 위로 파고드는 현재의 입술 때문에 더 그랬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차분하게 머리를 가라앉히려던 재선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런 식의 접촉을 할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현재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양, 충격으로 벌어진 재선의 입술 사이를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평소보다도 더 달달한 향이 훅 끼치며 재선의 머릿속을 흐무러지게 만들었다. 강하게 휘감지도 않으면서 잔잔하게 입 안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부드러운 혀끝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현재가 곱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재선은 그런 현재를 바라보다 어쩐지 아쉽다고 느껴진 재선이 느낀 스스로에게 놀랐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이야기에서 계속 절정만 마주치는 지금이 이상해야지 않나. 이쯤하면 그냥 날로 먹겠다는 심보 아닌가. 이게 날도둑이지 다른 게 날도둑인가.

“……달다.”

하지만 현재의 생각은 재선과 아주 많이 다른 것 같았고.

“아까 주신 게 꿀물이라…….”

“응, 한 입만 더요.”

다시금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감는 손을, 쪽, 쪽 소리를 내며 달라붙는 입술을 마다할 수는 없었다.

몸을 붙인 채 침대로 파고들려는 현재를 간신히 말리는 정도가 재선의 최선이었다. 부어오른 가슴 때문에 현재가 바짝 붙어 올수록 반사적으로 흠칫거려서 별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하고 나서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재선은 자꾸만 붙잡는 현재에게서 벗어나는 사이, 몸이 삐거덕거렸지만 참았다. 현재의 침실에서 나와 제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말 못 할 부위가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절대 현재의 앞에선 내색할 수 없었다.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사이에 현재가 출근을 했기를 내심 바랐지만, 그런 재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현재는 느긋하게 아침 겸 점심까지 해결하고 나서야 집을 나섰다.

집 안에 혼자 남았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재선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어젯밤 취하기 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천천히 떠올렸다. 생각나는 족족 살색의 향연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는 숙취를 호소할지언정 기억을 잊진 않았다. 재선은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질지언정 필름이 끊긴 적은 없었다. 생각보다 독한 술을 빨리 마셔서 좀 몽롱했던 건데.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요. 회식이라기엔 홈 데이트 같지만.

-……데이트라니, 저 오해한다고 말씀 드렸잖습니까?

취기에 짜증까지 섞인 말투를 들으면서도 싱글거리는 현재의 낯은 밝았다. 그게 오히려 더 가벼워 보여 투덜거린 것 같다. 답답한 현실에 얽매여 있는 자신에게 가질 수 없는 걸 자꾸 물어보는 건 장난으로라도 싫었다.

-오해 아니니까 하는 말인데요. 재선 씨는 나 별로예요?

-오해가 아니라고요? 대표님이 저랑 잠이라도 자고 싶으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호기롭게 느껴지는 현재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던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재선의 입 밖으로 절대 꺼내지도 않을 이야기들을 뇌도 안 거치고 그냥 뱉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가장 심하게 취했던 건 확실했다. 재선은 취하기만 하면 솔직해지고 쓸데없는 말이 늘었다. 그래서 회식을 할 때에도 취하기 전까지만 마셨었는데……. 미처 마시는 술의 도수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던 게 패착이었다.

-……재선 씨는? 나랑 자고 싶어요?

-……대표님과 제가 말입니까? 진심으로 물으시는 건가요?

-완전 진지한데요.

-그럼 저는 완전 감사한데요.

도대체 뭐라고 지껄였냐, 이재선. 제정신이냐고.

그 뒤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굳이 기억해 낸 걸 되새기지 않아도 됐다. 자신의 뻐근하고 찌뿌둥한 몸이, 얼룩덜룩한 피부가, 아직도 벌어져 있는 것 같은 뒤가, 어젯밤을 조목조목 말해 주고 있었다.

게이라는 걸 절대 숨겨야 한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으면서, 게이라고 말하고 나서 안 쫓겨난 건 진짜 다행이긴 한데. 다행인데…… 왜 이렇게 찝찝하고 불안하지. 재선이 예상하고 염려하던 것과는 아주 다른 커밍아웃 결과였다.

현재와, 고용주와 자 버리고야 말았다.

***

세상에는 참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재선도 알고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꾸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남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사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재선이 일하던 회사의 사장도 밖에 나가면 인자하고 사람 좋기로 유명했다. 늘 방문하는 식당에서는 언제나 그를 반겼고 거래처 앞에서는 싹싹하게 굴었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인색했다. 월급은 대부분 초봉에서 동결 중이었고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이었다.

사장을 욕하기도 하고 잦은 야근에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직원 대부분은 그렇게 그냥 살았다. 그래서 재선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경력이 차면 알아서 엉망인 회사에서 벗어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딘가에서 한 번쯤 이직은 어떠냐며 전화가 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새로운 곳에서 또 적응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칠 경우 생길 수 있는 박탈감도. 또한, 만약 고스란히 그걸 반복하게 된다면 그게 어떻게 또 자신을 무너지게 할지 알 수 없어 무서웠다. 아득바득 돈을 모아 새로운 집으로 가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꾼 것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어차피 사라질 회사인 줄도 모르고.”

창가에 놓아둔 스투키에 물을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집 정리를 하고 나오면서 같이 들고 나온 녀석이었다. 쌓아 둔 짐들 중 대부분은 꺼내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화분은 계속 돌봐 줘야 하니까 창가에 뒀더니 오히려 전보다 색이 더 생생해졌다.

이 녀석도 현재의 집에서 잘 적응하는데 자신은 왜 가면 갈수록 이렇게 어색한 걸까.

재선은 자신을 잘 알았다.

아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평범하게 사는 일이 목표였으며 게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단점이라 여긴 적은 없었다. 정체성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런 걸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았다. 노력도 했다.

절대 어지간한 일에는 휩쓸리지도 않는, 나름대로 고집스러운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평범하고 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아주 온건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남들 눈에 어떻든 내 눈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연인과 인생을 걸어갈 거라 꿈꿔 왔는데. 닥쳐온 현실은 제 삶의 목표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했다.

생각을 계속해 봤자 혼란스럽기만 하지. 아직 할 일이 있으니 몸을 움직이며 잡생각을 떨치기로 했다.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방에서 나가 평소처럼 집 안 정리를 하던 재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 앞에서 멈췄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어제 저녁 때문이었다.

-식탁이란 장소도 은근히 야하지 않아요?

-……식탁이요?

영문 모를 현재의 말에 잠시 생각이 멈춰서 멍하니 바라봤더니 정말 야한 장소로 만들어 버렸다. 갑자기 옷이 벗겨져 식탁 위에 눕혀지기까지 순식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현재보다 조금 작긴 했지만 재선도 평균을 웃도는 건장한 남자였다. 그런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완력은 평생 현재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런, 그렇게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자세를.

-자, 허벅지 잡고 벌려야죠. 괜찮아요, 나밖에 안 보잖아.

-흐으……. 하지, 하지만…….

-안쪽에 넣게 해 주기로 했잖아요. 응? 나 너무 넣고 싶은데.

말도 안 되게 울먹이는 얼굴을 하는 바람에 그냥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준다고 했을 뿐인데. 원하는 게 성인용품을 써 보고 싶다는, 정말 말 그대로 성인의 놀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엇보다 전부터 꼭 해 보고 싶었다며 들고 온 검정색 털이 달린 딜도와 아이들이나 할 법한 고양이 귀는 정말, 순간 집어 던질 뻔했다. 그 외 유리 막대, 실리콘, 줄줄이 이어지는 체인, 돌기가 잔뜩 달려 있는 바이브……. 거의 자신의 주먹만큼 두꺼운 흉물은 아예 시선에 걸리는 것도 싫었다. 게다가 색들은 또 왜 그렇게 알록달록한 건지. 도무지 제정신으로 장난감들을 살펴볼 수 없을 정도로 넋이 나갔다. 뭐라고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반응을 할 수 없었다.

그놈의 고양이에 집착하는 현재에게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다고 간신히 떼를 쓴 덕분에 이상한 꼴은 그나마 피할 수 있었지만. …… 고르고 고른 물건에 진동 기능이 있을 줄이야.

-여기가 벌어져서 다 흐르고 있잖아요. 칠칠치 못하게.

-아아……. 안 돼. 안 돼요…….

식탁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구멍에는 장난감을 꽂은 채, 아래로 액체가 줄줄 흘러넘치는 광경을 묘사하는 현재의 목소리라니. 아래가 자꾸만 욱신거렸다.

물론 현재가 묘사하는 액체가 재선, 자신의 체액이 아닌 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반복해 말할수록, 정말 스스로 물을 질질 흘리고야 마는 야한 몸뚱이로 변한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더 안 흐르게 막아 줄까요? 막아 달라고 해 봐요.

현재가 유두를 소리 내 빨아 당기다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면서, 아래에 쑤셔 넣어진 장난감을 움직이는 손은 쉬지 않았다. 막으면 되는 건가, 그럼 이 자극에서 해방될 수 있는 건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솔깃한 제안처럼 귓가에 속삭이는 현재는 악마였다.

입술을 벙긋거리며 속삭이듯이 그 말을 따라하자, 현재는 재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긴 했다. 문제는…… 단박에 뽑혀 나간 장난감에 가볍게 가 버린 자신과, 빳빳하게 발기해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현재의 성기가 한 번에 들어왔다는 것. 더불어, 삽입당한 자신은 그와 동시에 사정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건, 정말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지독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진동 기능이 켜지기도 전부터 재선은 그에게 애원하며 매달릴 정도로 자극을 받았다. 술을 빌리지 않아도, 뇌가 흐물거릴 정도로 정신을 놓지 않아도 변한 몸을 알 수 있었다. 아래가 벌어지고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게 어색하지 않아졌다는 말이다. 재선의 몸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건 현재였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어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지난주에는 밤늦게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현관에서 휩쓸렸다. 현관 전전날에는 갑자기 출출하다 하기에 라면이라도 먹겠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정신 차리니 현재의 침실이었고, 대청소를 했던 지지난 주에는 늦은 오후까지 스파 욕조를 닦고 있다가 일찍 퇴근을 한 현재에게 청소를 하다 말고 욕조 안에서 인사했더니 그대로 옷까지 다 적시면서 뒹굴었다. 지난 주말에는 같이 영화를 보겠냐고 해서 ‘편하게 넷플릭스로 볼까요?’ 했다가 거실에서 난리가 났다. ……러그는, 다음 날 어떻게든 세탁해 보려다가 결국 버렸다.

……언제부터 입주 가정부 겸 경호원의 업무가 이렇게 음란하고 욕망이 넘치는 일이 됐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포지션에 익숙해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문란한 잠자리를 이어 가고 있는 자신이.

이재선이라는 사람이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렇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웃으면서 자신이 해 준 음식을 먹고, 정리해 둔 옷을 입고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다녀왔다는 말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매 순간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는 현재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다 해 주고 싶어졌다.

섹스는 가장 은밀하지만 가장 보이기 꺼려지는 모든 부분을 다 보이는 행위였다. 예상하지도, 표현하기도 어려운 종류의 섹스를 지현재와 경험하게 되면서 재선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현재와 은밀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입주했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 했는데 저질러지고 보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스토커나 원치 않는 호의에 차가운 사람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자신이 게이인 것도 최대한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하지만 재선도 할 말은 있었다. 현재처럼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이 달려들면 마다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그의 부드러운 미소가 그대로 쏟아지는 걸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잔뜩 흥분한 채 욕망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 같은 현재의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는 걸 싫어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딩동 딩동.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흠칫 놀랐다. 자동으로 켜진 비디오폰으로 밖을 보는데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밖에서 벨을 눌렀으니 문 앞 방범카메라도 작동했을 텐데. 벨을 눌러 놓고 모습을 감췄다는 건 위험한 인물일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현재의 주변에는 문제가 많은 인간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아예 지금 한 번 정도 주변을 둘러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선은 긴장했다. 현관까지 들어오려면 각 세대가 승인해야 열리는 건물 보안을 거쳐야 했으니 방금 비디오폰에 보인 광경은 현관 앞이 아니었다. 건물 밖에까지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챙긴 뒤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데 문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뭐야, 당신은.”

엄청나게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강렬한 사람이었다. 주렁주렁 걸고 있는 금목걸이와 탈색한 금발, 그리고 현란한 무늬의 점퍼까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차림새였다. 굉장히 안 좋은 카테고리로.

“그러는 그쪽은 누구십니까?”

“……내가 먼저 물었잖아. 너 뭐냐고?”

발끈하며 묻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곧 화를 낼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왜 이렇게 인상이 익숙하지.

“남의 집 앞에서 이러시면…….”

“누가 남이야! 우리 현재 집인데!”

지현재는 집안에서 막내였다. 지현재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고, 친근한 호칭을 보면 혹 형님인가 싶었다. 하지만 얼굴 생김새나 분위기, 차림새가 너무 달랐다. 지현재의 형님이라기엔 암만 해도 이상했다. 아무래도 아래 있을 경비를 부르거나 해야 하나 싶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남자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재선을 위아래로 훑었다.

“보아하니 입주해서 일하는 사람인가 본데 나한테 이렇게 군 거 현재가 알면 당신 잘리는 건 일도 아니거든?”

태도가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게 거짓말로 보이진 않는데. 하지만 현재와 정말 친밀한 관계라면 현재가 귀가하는 시간 정도는 알아야 정상이지 싶었다. 지금은 그가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다.

“……대표님과 아는 사이십니까?”

“그럼, 알기만 하나 아주 각별한 사인데. 왜?”

“……뭐요?”

순간적으로 대꾸를 할 수 없는 답을 들은 재선은 멍해졌다. 끽해야 먼 친척일 수도 있지 싶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걸 보니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뭐가 켕긴 건지 흠칫 놀란다. 역시 거짓말인가.

“지현재, 골든캐피탈 서남부 대표. 이 집 주인이잖아. 아냐?”

“……누가 오신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원래 말 안 하고 오갈 정도로 아주 친밀한 사이라니까?”

“그래도, 오신 목적이라도 이야길 해 주셔야…….”

“현재한테도 말 안 했는데 내가 당신한테 말해야 해?”

그러네. 말할 이유가 없지 그건. 그렇지만……. 각별하고 친밀한 사이라면서 왜 눈치를 보는 건데……? 무슨 목적이라서 부끄러워하는데? 눈에 뭐가 끼인 건지 자꾸 연애하는 사람의 수줍음처럼 보였다. 물론 지현재가 교재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에는 남자의 태도가 지금까지 근무하면서 보던 스토커들과도 좀 달랐다.

한참 문 앞에서 재선이 납득하지 못하고 비키지도 않자 남자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답답하네 진짜. 서슴없이 대놓고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진짜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기다려 봐. 확인시켜 줄 테니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누군가 부르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뭔가 신호라도 보내는 건가. 남자의 뒤편과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경계하던 재선이 슬그머니 현관 쪽으로 몸을 물리는데.

“어, 나야. 지금 너희 집 앞인데……. 아이 참, 그럴 수도 있지. 우리가 언제 연락하고 오고 가고 그러던 사이야?”

남자의 입에서 조금 전과 딴판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태도가 돌변할 수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불퉁하기 이를 데 없던 음성이 단숨에 순한 양처럼 변했다. 친근하고 다정한 말투와 환해진 표정. 도무지 좀 전과 동일인물 같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있는 사람은 고용인? 나 지금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다고…….”

시무룩해지는 표정까지…….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면 재선이 괴롭히고 울리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을 지경이라 잠시 주변을 둘러봐야 했다. 당연히 사람이 있진 않았다.

“응, 그렇다니까. ……잠깐만.”

잘못 짚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재선의 앞으로 휴대폰이 불쑥 내밀어졌다. 빨리 통화를 해 보라는 듯 휙휙 흔들어 대는 걸 받아서 조심스럽게 귀로 가져갔다.

“……전화 받았습니다.”

[재선 씨?]

“…….”

[여보세요? 재선 씨? 들려요?]

현재였다. 그렇다면 정말 저 사람이 지현재와 아는 관계라는 말이다.

점점 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일단은 저 남자를 집 안에 들여야 할 것 같았다. 차마 그다음까지는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재선은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아, 네. 들립니다. 전화 받았습니다. 지금 찾아오신 분은 대표님 오실 때까지 집 안에서 기다리게 하면 될까요?”

[네, 부탁 좀 드릴게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럼.”

현재가 뭐라고 더 하는 것도 같았지만 당황해 허둥지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너무 급하게 전화를 끊었을까. 현재가 놀라진 않았을지 걱정됐지만 이미 종료된 화면은 검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남자를 앞에 두고 더는 다른 이야기를 이어 갈 수도 없었다. 당장은 상황을 알았으니 현관에서 몸을 비키며 휴대폰을 돌려줬다. 일단은 집 안에서 기다리라고 안내를 하고 손님이니까 뭐라도 대접을 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재선은 자신이 제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 남자가 정말 당당해서, 점점 쿵쾅거리는 심장이 드러나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게 구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오, 스탠드 바꿨네? 전에 있던 것도 좋았는데 이게 더 내 취향이다. 현재가 참 안목은 좋지.”

언제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지현재가 카탈로그를 보며 고민하다 물어봐서 추천했던 제품이었다.

“새로 바꾼 러그 너무 괜찮다. 현재 오면 달라고 할까?”

러그가 왜 바뀌었는지 말로 할 수 없는 재선은 얼굴이 뜨거웠다. 지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집 안을 살피던 남자가 이젠 냉장고를 열며 혀를 찼다.

“식사 좀 잘 챙기라니까. 여기서 일한다면서 당신이 이거 다 한 거야?”

“그렇습니다만, 식단은 딱히 불만이 없으셨고…….”

“바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알아서 챙겨야죠. 월급만 받으면 뭐 해.”

“……네.”

남자는 이 집에 생각보다 더 자주 와 본 듯했다. 그래도 염려한 것처럼 위험한 사람이 아니란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는 스스로가 좀…… 이상했다. 화를 내야 할 거 같은데 화를 낼 수 없었다.

“내가 좀 뜸했더니 아주 엉망이네.”

“……뭐 이상한 거라도.”

“보면 몰라요? 이래서 현재가 마음 놓고 밖에서 일을 하겠나.”

사실 화가 나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자신이, 그저 입주 가정부라는 명목으로 집에 머무는 이재선이 지현재의 뭐라고. 하지만 자꾸 이상해지는 기분은 간단히 누르기가 어려웠다.

익숙하게 집 곳곳을 돌아보며 깐깐하게 굴던 남자는 이제 소파에 늘어져라 앉아 있었다.

진짜 무슨 관계일까. 닮지는 않았으니 가족은 아닌 거 같고, 친한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친구일까. 아니, 친구는 아니다. 그랬으면 미리 약속을 잡고 방문한다고 현재가 먼저 알려 줬겠지. 태도를 보아하니 회사 직원은 당연히 아니고.

각별하고 친밀한 사이. 말도 안 하고 집을 오갈 정도로 가까운 관계.

애인 말고 이런 관계가 또 있나?

“그건 그렇고, 그쪽은 계속 같이 지내면서 현재에 대해 하나도 모르네요.”

“……대표님을 말입니까.”

“하긴 뭐…….”

남자가 손을 휘휘 저으며 혼자 휴대폰을 했다. 이미 재선은 관심 밖이었다. 이것저것 캐물으며 쌀쌀맞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재선은 한낱 고용인이니 별달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현재에 대해 말할 때마다 묻어 나오는 애정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전화를 걸었을 때 순식간에 변하던 목소리만 해도 그랬다. 현재도 그렇게 받아 주었을까. 자신에게 건네던 목소리보다도 더 다정하고 친근하다면…….

……애인이 맞는 것 같다.

재선은 깊게 소파에 기대서 늘어져 있는 남자를 뒤로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남자는 현재의 허락으로 당당하게 집 안에 있었고 재선은 저도 모르게 밖으로 나왔다. 잊고 있었던 현실로 끄집어내진 기분이었다. 현재의 영역에서 지내고 있다고 해서, 그와 예상치 못한 밤을 계속 보내고 있다고 해서, 정말 그와 가까운 사람이 된 건 아니었다.

사실을 눈으로 확인까지 받자 정확하게 자신의 위치가 보였다.

지현재의 제안에 응한 채무자, 입주 고용인, 상주 경호원, 그리고 같이 지내면서 어쩌나 몸까지 섞은 사이. 그냥 그런 사람.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나가 근처 공원까지 걸어가면서 이어지는 생각에 재선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익숙한 풍경이 보이자 그나마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낮에는 한 번씩 나와서 바람을 쐬는 곳이었고 가끔은 한 시간씩 운동도 했었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었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재선은 이런 풍경에 익숙해질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 보러 어디로 가요? 백화점?

애초부터 지현재는 평범한 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재선이 알고 있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 자신과는 단 한구석도 비슷한 부분이 없는 사람.

마트에서도 장 보는 것보다는 자신의 입에 뭘 넣어 주기 바빴지. 그때 맘에 들어 한 소시지로 반찬을 해서 줬더니 뭐라고 했더라.

-제가 맛있다고 했다고요? 그랬구나. 재선 씨한테 그랬으면 맞겠죠.

현재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걸 챙겼던 스스로가 좀 부끄러웠던 것 같다. 현재는 고개를 끄덕이곤 젓가락으로 한 번 정도 건드리곤 더 이상 소시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라도 해치우려고 조용히 계속 집어 먹었더니 아예 그릇을 옮겨 줘서 더 열심히 먹었다. 자신이 먹지 않으면 다 버릴 반찬이니까. 실망스러운 기분에 먹기라도 열심히 먹었었다.

그런데 왜 실망까지 한 거지. 지현재는 고용주인데. 그 정도 반찬 투정쯤은 할 수 있지 않나? 다 큰 어른이 반찬 투정이라니 차라리 좋아하는 걸 말이라도 하지.

게다가…… 애인이 있었으면. 도대체 그동안 왜? 왜 이야길 하지 않았지?

기분이 말도 못 하게 엉망이었다. 아무렇지 않고 싶고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왜 자신과 뒹굴었던 거지. 거의 매일을. 욕구 불만? 하필이면 왜 매일 마주하는 나를? 편했나? 아니면 이용하기 좋아 보였나? 집에 다른 사람이 애인이라고 와 있잖아. 애인을 만나기 어려워서 그랬나?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나저나 나, 뭘 잘못했다고 왜 손님을 두고 여기까지 도망 나온 거지?

이쯤 되자 스스로 하는 질문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차라리 안에 있을 걸 그랬나 싶지만 그러기엔 같이 있기 껄끄럽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현재가 잘 알려 줬으면 이럴 일이 없지 않은가. 마음에 드는 음식이 있으면 제대로 말하든가. 불쑥 찾아올 만한 사람이 있으면 미리 언급이라도 주든가. 애인이 있으면 있다고 하든가. 도대체 지현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공원을 몇 바퀴째 돌았는지 모르겠다. 어쩐지 다쳤던 무릎이 쑤셨다. 구석진 벤치에 가 털썩 주저앉았다. 어둑어둑한 주변에 해가 진 걸 알았다. 아마도 현재가 집으로 돌아왔을 시간이다.

이제 더 이상 현재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떠올랐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이상한 기분으로는 지현재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나서 확인받고 싶기도 했다.

좀 정리하려고 나왔는데 오히려 자기 학대에 가까운 의문들이 머릿속을 채운 뒤다. 도무지 좋은 방향으로 생각되질 않아 더 짜증이 났다.

그래, 자신의 이 이상한 기분은 짜증이다.

어떤 설명도 해 주지 않은 지현재가, 무엇도 요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그동안 최소한의 거부도 하지 않은 욕심이, 한꺼번에 다 터진 것 같은 상황이 다 짜증이 났다.

아무렇지 않고 싶었는데.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매번 혼란스러워하다가도 당장 일을 해야 하니까 꾹꾹 눌렀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속에 깊게 잠수하던 재선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급하게 나오느라 집에서 입던 트레이닝 복 차림인 것도 짜증이 났다. 당장 그 집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처지도 싫고 구질구질한 상황에 지현재가 끼어 있다는 것도 답답했다. 지현재가 아니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까. 이렇게 답답하고 서글픈, 초라하고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까.

아니, 전부 아니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밉고 싫은 것도 관심이 가야 할 수 있는 일이더라고요.

언젠가 현재가 했던 말에 충격을 받았던 건 단지 지현재가 자신의 앞에 벌어진 일에 무관심해서가 아니었다. 그 무관심이 저에게까지 이어질까 봐. 그게 어떤 형태로 올지 몰라서.

왜냐면, 왜냐면 자신은.

지현재를.

Rrrrr.

그때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지현재였다. 모르는 척 받지 않으려 그냥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알아서 어디 외출이라도 갔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어차피 슬슬 일어나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긴 해야 했다. 얼굴 보고 얘기하면 되지, 통화는 무슨.

어쨌든 저는 정식 계약서도 작성한 고용된 처지였고 그의 집이 아니면 당장 잘 곳도 없었다.

전화가 끊기며 화면이 검게 변하는 걸 보고서야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같았으면 현재의 귀가 시간에 맞추려 잠깐 마트까지 다녀오는 일도 서둘렀을 텐데 의욕이 나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서 다시 전화가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왜 쉴 새 없이 전화를 거는 걸까. 퇴근해서 돌아왔으면 애인이라던 사람과 있을 텐데 애인이나 신경 쓰지.

“……설마 밥하라고 그러는 건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부려먹을 사람은 아닌데. 하긴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지현재가 진짜 지현재인지도 잘 모르겠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내 갈 곳 없는 투덜거림만 흩뿌렸다.

집 근처에 다 와서 잠시 멈춰 섰다. 얼마나 전화를 많이 한 건지 주머니에 넣어 둔 전화기가 뜨끈뜨끈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진동에 결국 휴대폰을 꺼냈다.

“……네.”

[재선 씨? 재선 씨. 어디예요. 왜 집에 없어요?]

“그냥 좀, 밖에……. 손님 와 계실 텐데요.”

[그 새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말도 없이 나갔다면서요. 지금 아까 저하고 통화 마친 지 다섯 시간도 더 됐는데.]

“아…….”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었나. 전혀 몰랐다. 그런데 내가 어디서 뭘 하든 자기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대표님, 애인분이랑 계시잖아요.”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애인……?]

“제가 괜히 방해될까 봐 나왔으니까 그냥 편히 계세요. 알아서 들어가겠…….”

[……당신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편하게 있어!]

갑자기 터져 나온 큰 목소리에 잠깐 휴대 전화를 물렸다. 처음 듣는 현재의 고함에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건가? 지현재가? 뭘 잘해서?

“지금 저한테 소리 지르셨습니까? 왜요?”

화가 점점 치밀어 오르다 기어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아예 화르르 타 버렸으면 싶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상황이…… 내가 말을 안 한 게 있어서…….]

지현재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 애인이 있다는 이야기도 안 했는데 다른 걸 이야기했겠는가.

“말을 안 하셨다고요? 뭘요? 전 알 필요도 없는 거라서 안 한 게 아니시고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대체 이 사람은 뭘까. 뭐기에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차라리 무시를 하지. 차라리 빚을 갚으라고 윽박이라도 지르지.

이 이상 비굴하고 구차해지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비굴하고 구차해진다. 바닥에서 구해 준 줄 알았던 사람이 나를 더 깊은 늪으로 푹푹 빠지게 한다. 착각하고 있을 땐 즐거웠는데 착각이 끝나니 숨이 막힌다. 괴롭고 슬픈 일이 좋은 일이 아닐 텐데.

[하……. 어디예요? 어딘지 말해요. 나갈게요.]

“아닙니다. 어차피 그 집 말고는 갈 곳도 없는 처지인 거 아시잖습니까.”

[……이재선 씨.]

욱하며 튀어 나간 말에 재선은 바로 미간을 좁혔다. 이번 건 자신이 잘못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현재의 호의까지 욕하는 건 아니었다. 말을 뱉어 놓고 바로 후회할 거면 도대체 왜 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아랫입술을 감춰 물었다. 이런 말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서 물어본 거 아닙니다.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혼자 있고 싶으면 차라리 집에 같이 와서 이야기해요. 이유가 있으니까…….]

다정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현재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도 하고 싶은 말도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정말 다 모르겠다. 이렇게 속이 진창이 된 경험이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제가 서투른 건가 싶다가도 알아서 알아주지 않는 현재가 밉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만 들어 호구 같은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사과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대표님께서 할 수 있는 이야기고.”

[재선 씨.]

“재선 씨!”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본 사람인데도 아직까지 깔끔……. 아니 조금 흐트러져 있다. 집에서 하는 차림새보다 더 엉망으로 달려온 꼴이 심상치가 않았다. 저 정도로 당황한 현재의 얼굴은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뒤로, 현재의 뒤로 뭔가가…….

“……저게 뭐지.”

순간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현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진 뒤에 현재의 집이 있는 건물 주변 골목은 전등이 많지 않아 대체적으로 어둑했다. 온통 검은 옷과 검은 마스크를 쓴 채 위험해 보이는 사람 같은 건 보통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현재의 뒤편 남자가 재선에게 성큼성큼 걸어오는 현재를 소리를 죽이고 뒤따랐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동안 받아서 태워 버렸던 수많은 이상한 우편물들이 떠올랐다. 언제 어디서 더 미친 짓거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했다. 하나씩 태우면서도 기분이 나빠지던 기이한 집착들. 재선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손바닥으로 단단히 감아 잡았다.

“재선 씨, 제가…… 제가 다 설명할게요.”

서서히 가까워지는 검은 괴한을 모르는 척 현재의 귓등을 응시했다. 이렇게 해도 다가오는 윤곽 정도는 보였으니까 무리는 없었다.

조금만 더, 더 가까이.

두어 걸음 정도 앞으로 현재가 가까워졌을 때 검은 괴한의 윤곽이 움찔 떨렸다. 재선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동시에 바짝 붙을 정도로 가까워진 괴한의 옆 목을 쥐고 있던 휴대폰 옆 날로 냅다 찍었다. 잠시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팔뚝을 들어 턱 아래로 걷어 올린 뒤 쭉 밀고 앞으로 한두 걸음 전진해 현재와의 거리를 벌렸다.

“……재선 씨?”

“거기 그대로 있어!”

현재가 가까이 오면 안 됐다. 고함은 지른 재선은 긴장해 제가 반말을 했단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괴한에게 집중한 눈이 파고들 곳을 다시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양손을 뻗어 괴한의 옷깃을 감아쥐고 다리를 안쪽으로 걸어 넘어트리며 그대로 바닥에 매다 꽂았다.

챙그랑, 쇠붙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본 곳에는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과도가 있었다. 하마터면 현재가 저 칼을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칼이라니.

“이, 이거. 놔! 놔아악!”

옷깃에 목이 졸렸는지 터져 나오는 괴성이 다 쉬어 있었다. 길바닥에 널브러진 인간을 힘으로 강하게 누르고 있는 재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타다닥. 뭐야. 빨리 안 데려가? 빨리. 김 팀장! 김 팀장 어딨어!

갑자기 늘어난 주변의 소음이 귓전에서 다 튕겨 나갔다. 그저 지금은 당장 지현재가 칼에 맞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몸의 떨림이 멈춰지지가 앉았다.

“이제, 이제 됐어요. 재선 씨.”

재선의 뒤로 따뜻한 체온이 다가와 감쌌다. 떨리는 손을 꾹 쥐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익숙한 좋은 냄새가 은은히 느껴졌다. 긴장으로 바짝 날이 섰던 감각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람을 힘으로 제압하고 있느라 잘 펴지지 않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 주며 괜찮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어디론가 잡혀가는 괴한을 보곤 그제야 재선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보는 현재의 눈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대표님은, 괜찮…….”

“지금 내가 문제예요?”

버럭 화를 내는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의아했다. 꼭 엄청 걱정한 것 같은 모습이라서. 자신을 왜 걱정한단 말인가. 그것도 지현재가. 고개를 젓다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남자와 길바닥에서 몸싸움을 하느라 옷에 묻은 먼지부터 털었다. 그나마 잡아서 다행이었다.

“저 사람들은 누굽니까?”

“……사설 경호원이에요. 얼마 전부터 상근 중이었는데.”

“전 그것도 몰랐네요.”

괜히 재선이 끼어들었다 싶었다. 프로인 저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했을 텐데. 번거로운 일을 만든 건 아닌지 사람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다치지는 않았어요? 저 새끼 칼도 들고 있던데.”

“제가 왜요. 괜찮습니다. 이런 거라도 해야…….”

“왜 그런 걸 재선 씨가 하냐고요!”

현재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또 화를 냈다. 멀뚱히 바라보는 재선의 손을 덥석 낚아채더니 주변 건물로 들어갔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차림새는 둘째 치고, 이제는 머리까지 벅벅 문지르는 현재가 낯설었다. 원래 이렇게 조급하고 거친 사람이었나. 그때 현재가 아직 주변에서 일을 처리하던 남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새끼 잡아 둬요. 조져도 내가 조집니다.”

으름장을 놓는 얼굴이 엄청 사나웠다. 그러다가 힐금 재선을 보는 눈은 온순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내 눈치를 본 것 같은데. 재선은 도무지 현재가 왜 이렇게 정신없이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냥, 가요.”

“손을 좀…….”

“그냥, 좀. 그냥 가자고요. 내가 불안해서 그런 거니까.”

불안하다니 대체 뭐가.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재선은 현재가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얼마나 꽉 움켜쥐었는지 팔목이 살짝 저릴 지경이었는데도 그랬다.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무언가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주방이나 다른 곳은 재선이 정리해 두고 나간 그대로였는데 거실이 좀, 달랐다. 뭐가 달라진 건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현재가 거실 중앙까지 가서 재선을 소파에 끌어다 앉힌 후 물었다. 최대한 차분히 말하려고 노력한 것 같은데 목소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왜 나간 건데요?”

“……저한테 왜 화내십니까?”

“내가 언제……!”

화를 간신히 눌러 참는 현재의 모습이 어색했다. 현재가 가만히 서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아무 말 않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현재가 평소에 받는 이상한 편지들과 비슷해 보였다. 내용이 온통 잡지에서 오려 붙인 글자들로 짜깁기 되어 제대로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회사로도 이런 걸 받으신 겁니까?”

“……제가 아니에요.”

“…….”

“제가 아니라, 재선 씨를 위협하는 편지였어요.”

현재의 말에 다시 한번 이상한 우편물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현재에게 도착하는 편지들엔 있지 않은 재선의 이름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리고 도촬을 한 건지 흐릿한, 재선의 사진도 여럿 있었다. 아마도 근처를 오갈 때 멀리서 찍은 거겠지.

“……저한테 이런 게 왜 오는데요? 그런데 왜 전 몰랐습니까?”

“……제가 숨겼어요. 이유는 저도 모르지만 온 지는 조금 됐어요. 처음에는 차 안에 있어서 제 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어차피 여기는 누가 잘 안 오고 큰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요?”

“오늘 너무 자세하게 적힌 편지가 온 걸 봤어요. 실제로 일을 벌일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을 급하게 불렀고요.”

“……그런데 집에 있을 줄 알았던 제가, 도착해 보니까 없었던 거고요.”

자꾸만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힘이 점점 없어지더니 이제는 고개만 끄덕이는 현재의 얼굴이 창백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자꾸 자신을 돌아보며 눈치를 보던 표정을 지금도 짓고 있었다. 꼭 누군가에게 버림받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얼굴. 재선이 살아오는 내내 짓던 얼굴. 어디엔가 숨고 싶을 때 하던 그 얼굴.

지현재가 봐 왔던 날들 중 오늘이 가장 소심하고 작아 보였다.

“대표님.”

“……네, 어디 다친 덴 없어요? 정말 괜찮죠?”

분명히 뭐든지 자신보다 훨씬 많이 가진 사람인데. 조금 뻔뻔하고 가끔 버겁긴 하지만, 항상 아름다운 사람인데.

“……제가 좀 이상한 말을 할 거 같은데, 정말 혹시나 싶어 여쭙는 건데요.”

“숨긴 건 제가 잘못했어요. 진짜 안전하게 있게 해 주고 싶어서 그랬어요.”

왜 지금은 자신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어색하고 불안해 보이는지.

“대표님, 혹시 저한테 잘못하신 거 있습니까?”

“나간다는 말만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현재의 말에 의아해진 재선이 다시 한번 현재에게 물었다.

“저 나가야 하는 겁…….”

“제가 또 뭘 잘못해요?”

잠깐, 잠깐만요. 어쩐지 꽤 많이 답답해 보이던 현재가 가슴을 퍽퍽 치더니 냉장고로 가 생수병을 하나 들고 왔다. 뚜껑을 열어 순식간에 반병을 다 들이켜더니 남은 건 재선에게 건넸다. 재선도 그 김에 받은 물로 목을 축였다.

“재선 씨, 우리가 지금 같이 지낸 지 좀 됐는데……. 그동안 꽤 많이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당연히 우리가 함께 좋은 감정으로…….”

“예? 대표님 애인 있다면서요.”

“애인이요?”

현재가 풉, 웃음을 터뜨리다 점점 일그러지는 재선의 얼굴에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재선을 보면 또 웃음이 터지는지 몇 번이나 표정을 갈무리하고 나서야 제대로 말을 이었다.

“……절대, 절대 아닙니다. 진짜예요.”

재선의 앞에서 당당하게 애인이라고 지껄인 그 사람은 그럼 누구란 말인가.

“그럼 그 사람은 왜 집으로 들이라고 한 건데요. 왜 누군지 말을 못 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면 매달리기라도 할까 봐? 저 그렇게 구질구질한 사람 아닙니다. 뭐 그래요. 애인한테 사기 맞고 집도 절도 없는 호구일 수는 있는데요. 그렇다고 막, 양아치처럼 굴진 않는다고.

“……형이요.”

“……예?”

“……형이 좀, 장난을 잘 쳐요. 제가 재선 씨 좋아한다는 거 알고는 샘나서 장난친 건데, 나중에 꼭 사과시킬…….”

잠깐, 지금 누가 누구를.

“누가, 누구를 좋아해요……?”

재선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맞는지 잠깐 헷갈렸다.

눈앞에서 말하는 사람은 지현재다. 집에 찾아왔던 금발머리 남자는 지현제의 친형이다. 친형이 지현재가 좋아하는 사람을 샘내서 자기가 애인이라고 뻥을 쳤다. 그리고 그 뻥을 들은 사람은 바로 자신, 이재선이다.

그럼 여기서 지현재가 좋아하는 사람은?

“……재선 씨?”

“대표님이, 저를? 좋아한다고 하신 겁니까?”

“지금 그걸…… 물어보는 거예요?”

황당해하는 얼굴마저 아름다운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재선도 할 말은 있었다.

“……저는 들은 적이 없는데요?”

“당연히 좋아하니까 처음부터 들이댄 거죠. 누가 집에 처음 보는 사람을 들여서 같이 지내요!”

발끈한 현재의 말이 재선의 앞에 툭 떨어졌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꼬신 거라고? 재선의 혼란이 곱절로 늘었다. 자신은 게이라는 이유로 괜히 피해를 줄까 봐 조심스러웠는데. 취해서 어쩔 수 없이 휘말리는 바람에 서로 몸이 익숙해진 거라고 위안 삼기도 했는데. 처음부터라고?

“원래 막 마음에 드는 사람 꼬셔서 같이 지내고 그랬습니까?”

“재선 씨 말고는 그런 적 없다고요…….”

“그러니까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냔 말입니다.”

“내가 좋아해서 그랬다니까!”

다정하던 목소리도, 반짝이는 웃음도, 설레서 행복한 분위기도 없이 다급하고 절박한 외침이 거실을 갈랐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현재는 전에 없이 초조해 보였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 현재가 현실감이 없어서 혼란스러웠던 재선은 그 외침에 온몸이 불타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얼굴만 지독하게 예쁜 게 아니라 머릿속도 얼토당토않은 꽃밭이었나 보다.

“그걸 혼자만 알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재선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그대로 무릎 사이로 묻었다. 뭐든 좀 열을 식힐 게 있었으면 좋겠다. 당장 찬물로 샤워라도 해야 이 열이 좀 식을 거 같았다.

“아니,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 촌스럽게?”

“아, 예. 저 촌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사람은 혼자 나랑 열심히 사귀던 거였다고.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맨날 물어봐도 맨날 좋다고 해 놓고선 왜 그래요.”

낑낑거리듯 자신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가까이 다가오는 이 사람이 지현재라고.

“……그런 건 원래 말 안 하면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요.”

얼굴도 들지 않고 이야기하는 내 옆에서 그래도 계속 처음부터 좋아했다고 속삭이는 남자가.

“……어제는 식탁에서도 좋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잠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고백이라고 주장하는 게 지현재라고.

“지금 그걸! ……다 무횹니다.”

울컥한 재선이 얼굴을 들어 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어디까지 하나 했더니 자기주장이 사기꾼급이다. 잘 풀리는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챈 현재가 다시 옆으로 붙어 손을 꼭 잡아 온다.

“왜요! 무효인 게 어딨어요. 그런 거 없어요. 난 다 기억해. 처음부터 나 좋다고 그랬다고요.”

쪽, 쪽. 지현재가 주물주물 손을 만지며 뺨에 살살 입을 맞췄다. 쪽, 쪽 하는 소리가 귓가를 재차 울렸다.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분명히 지현재가 말하는 처음은 재선이 알고 있는 처음과는 다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좋아요.”

“거봐요, 정말이라……. 다시, 뭐라고요?”

부산스럽게 치대던 현재가 딱 멈추더니 시선을 마주해 왔다. 아까부터도 화끈거리고 있었지만 재선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웃었다. 현재의 귀 끝도 꼬마전구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다는 걸 알아차려서 그랬다.

“……좋아합니다. 대표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락 끌어안아 오는 현재의 품에선 재선이 가장 좋아하는 좋은 냄새가 났다.

***

함께 샤워를 한 후 정말 아무렇지 않게 멀쩡한 정신으로 현재의 침실에 누웠다. 제정신인 채로 손만 잡고 누운 건 처음이라 진정이 안 되는 재선과 달리 현재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자려고 누웠음에도 속삭임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요?”

현재는 아까부터 빨리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며 오히려 추궁하고 나섰다. 자기 전까지 서로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하고 누웠더니 벌어진 일이다. 가족 관계나 생일 같은 인적 사항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은 건 현재이지 않은가. 현재 탓이었다.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한 건 본인이면서 본인의 정보는 상대에게 알려 주지 않다니. 어느 나라 연애 법인지.

“아까 다 물어봤잖습니까.”

“진작 물어보지 않은 사람은 재선 씨면서.”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너무 늦었다고 투덜거리는 입술이 툭 튀어나온다. 서로 마음이 통해서 연애를 한다고 확신에 가득 차 있던 현재는 오히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던 재선이 이상한 거라고 한다.

“……촌스러워서 그런가 보죠.”

“와, 뒤끝까지 있었네요.”

의외로 현재는 겨울 생이었고, 누나는 한 명도 없이 형만 넷이라고 한다. 남자와의 연애를 형에게까지 말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해서 물었더니 가족이 전부 현재가 게이라는 걸 안다는 말에 안심했다.

현재는 형들이 많아 손주는 안 보태 줘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이 현재의 아버지였다면 이 유전자는 남겨야 한다는 욕심이 들었을 것 같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은 무적에 가깝다는 걸 오늘도 느낀 재선이었다.

“솔직히 인적 사항 같은 걸 하나하나 물어봐서 아는 사람이 요새 어디 있어요?”

“적어도 뒷조사로 아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요.”

조사하지 않아도 이미 회사에 기본적인 정보는 있었을 테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긴 했다. 하지만 좀 알아보긴 했다는 말을 듣고 넘기긴 그래서 뭐라고 했더니 현재가 잘못했다고 서류도 많지 않았다고 변명하면서 쩔쩔매는데……. 재선은 그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웃었더니 자주 웃으라면서 또 들러붙어 와서 그냥 그 앞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원래 좋아하면 지는 거라고도 하고.

“그건 이제 잊어버려요. 원래 연하 사귀면 업고 다니는 거랬어.”

“……하아.”

재선은 현재가 저보다 무려 7살이나 어리다는 사실까지 듣고는 경악했다. 다시 생각해 보자는 말이 입술 언저리까지 튀어나와 간지럽혔지만, 나이 때문에 버리면 어디에 취직하든 쫓아가서 소문내 버릴 거라며 으름장을 놓는 현실적인 협박에 그냥 넘어가 버렸다. 실천할 재력과 실행력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진짜로 저지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표정이 진지해 더 무섭기도 했다.

“왜요? 좋지 않아? 적어도 내가 먼저 죽진 않잖아요.”

“가는 덴 순서 없습니다.”

“그래도 매일매일 어린 애인이 옆에 있잖아요.”

사실은 현재가 뭐라고 이야기하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 형이라고 해 보시죠.”

“……제가요?”

내 모습이 좀 비굴하고 구차해도, 가끔 초라하고 볼품없어도.

“제가 연하는 아니잖습니까.”

그게 둘이 하는 연애라는 걸 알았으니까.

“……재선이 형?”

“……아니, 안 해도 될 거 같네요.”

네 모습이 정신없고 두근거려서, 반짝이고 찬란해서.

“왜요, 형도 나 불러 봐요. 반말도 좀 하고.”

“……됐습니다.”

내가 세상에 빚진 셈치고 너를 옆에 둘 수 있으면.

“빨리요…….”

계속 그냥 빚지고 살아도 다 상관없어져서.

“현재야. 자자, 이제…….”

그렇게 사랑이라는 걸, 해 보고 싶어졌다. 무섭고 힘들어도 버텨 보고, 평범한 생활이 아니어도 견디고, 다쳐도 상관없이 너에게 뛰어들자고. 그럴 수 있겠다고.

“응, 자요 형. 나는 재선이 가슴이랑 인사하고…….”

“자자.”

“네에…….”

가끔 육아하는 게 아닐까 싶은 건 현재에게 딸려 온 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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