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처음 지현재의 집으로 들어선 재선의 감상은 ‘여기가 집이라고?’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혼자 사는 남자의 집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명색이 회사 대표의 집과 자신의 좁은 집을-이제는 자신의 집도 아니었고-비교하는 게 오히려 무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필요한 물품은 이 카드로 지출하시면 돼요. 부득이하게 사비 쓰시면 영수증만 잘 챙겨 두셨다가 청구하시고요. 욕실은 방에 있는 걸 사용하시고요.”
“네…….”
“짐은 지내시는 방 바로 옆방에 넣어 뒀어요. 아직 사용하는 곳은 아니어서. 천천히 정리하세요.”
“……감사합니다.”
“뭘요, 먼저 부탁드렸었잖아요.”
방은 총 여섯 개. 그중 욕실이 딸려 있는 방은 두 개. 공용 욕실은 별도. 주방, 거실, 테라스, 다용도실이 있고, 복층은 아니지만 오피스텔 한 개 층을 단독 가구로 사용하는 일종의 스위트 세대였다. 원래는 지현재가 그냥 벽만 터서 쓰려고 했던 걸 못생긴 집에서 살게 할 수 없다며 가족 중 누군가가 인테리어를 새로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고. 재선의 고용주이자 집주인인 지현재의 표현에 의하면…… 쓸데없는 스파 공간이 테라스 옆에 별도로 있었다.
“그래도 제가 직접 집을 알려 주는 건 처음이라 괜히 설레네요. 다들 이런 건가.”
아무래도 이 순간 가장 쓸데없는 건 이런 때마저 반짝이고야 마는 지현재의 미모가 아닐까 싶지만. 보기에 좋으니 부러 말로 꺼내진 않았다.
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재선이 느낀 건 어마어마한 크기도 크기였지만 공간 전체에 은은하게 깔린 향이었다. 처음 재선이 현재를 마주했을 때 느껴졌던 그 독특하고 나른한, 어딘가 모르게 달달하면서 자꾸 신경 쓰이던 냄새. 좁은 재선의 집에 현재가 들어왔을 때 어쩐지 좋은 냄새까지 난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재선은 거실에 서서 현재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운동을 할 때도, 학부 때도, 군대에서도, 심지어는 회사에서도 시작은 늘 같았다. 인사는 함께 지낼 사람에 대한 예의니까.
인사를 하고 난 뒤 허리를 들자마자 마주한 현재는 어쩐지 다른 곳을 보는 듯했지만 재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을 아예 꺼 버렸다. 절대, 절대 고용주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은 두지 않는다. 업무 외에 재선이 결심한 가장 큰 과제였다.
그렇게 새로운 집에서의 입주 업무가 시작되었다.
***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바깥에서 수거해 온 우편물을 식탁 위에 놓고 정리를 시작하며 재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혼자 사는 남자가 굳이 왜 입주 가정부가 필요한가 싶었는데 며칠 일해 본 결과, 사람을 쓰지 않고서는 이 집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는 결론이 났다. 종일 집에 붙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 집은 일하면서 동시에 혼자 관리하기는 쉽지 않은 곳이었다.
“머리카락에, 압정에, 칼날에……. 도대체 자기 알몸 사진은 왜 보내는 거지.”
변태들에게 노려지고 있는 남자란 엄청나게 잔손이 많이 가는 존재였다. 우편물이 있어서 가져와 보면 필요한 우편물보다는 태워야 하는 우편물이 더 많았다. 그릴이 구비되어 있는 쾌적한 베란다는 바비큐보다 우편물 소각을 자주 했다. 멋지게 조성된 베란다가 아까울 정도였다. 소각을 매일 하진 않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단백질 타는 냄새가 싫어진 재선이다.
영화에서나 보던 스토커의 편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우편물들을 처음 눈으로 확인했을 땐 진심으로 당황했다. 사랑을 고백하는 단순한 편지로 생각했던 봉투에서 피가 묻은 칼날이 떨어진 순간 소름이 돋았다. 업무를 알려 주던 현재가 우편물을 다룰 땐 맨손으로 하지 말라고 한 말이 괜한 걱정이 아님을 알았다. 그 후 아무리 무해해 보이는 봉투도 반드시 장갑을 끼고 가위로 열었다. 안에서 우수수 떨어지곤 하는 위험한 물건들은 수습한 뒤 직접 태웠다.
그다음엔 괜히 화가 났다.
현재의 유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범죄를 저지르는 데 서슴없는 인간들의 낯짝이라도 제대로 뭉개 주고 싶은 마음에 울컥해서 다 고소하는 건 어떠냐고 진지하게 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현재의 반응이 오히려 더 충격이었다.
-어차피 신고해도 금방 풀려나고. 아무리 싸워야 몇 백? 벌금으로 끝나요. 나오면 더 심한 짓을 하는 걸 막을 방법은 없더라고요.
-이런 일, 싫지 않습니까? 강하게 경고할 수도 있잖습니까.
-조금도 관심을 주고 싶지 않아요. 원래 밉고 싫은 것도 관심이 가야 할 수 있는 일이더라고요.
미워하는 일도 관심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조금도 타인에게 여지를 주지 않는 그 말은 생각보다 더 차가워서 오히려 말을 꺼낸 재선이 움츠러들었다.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현재의 말이 맞았다. 미움도 누군가에게 필요 이상의 신경을 쏟는 일이니까. 아주 작은 틈도 주지 않는 게 지현재가 선택한 대처였다.
따지고 보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복수이지 않을까.
아마 그에게 집착하는 인간들은 그게 더 괴로울 거고.
아무래도 자신이 게이라는 걸 절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가끔 집 주변에서 위험한 인물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신고하고 보니 더 그랬다. 재선이 게이라고 밝히면 현재는 무감한 얼굴로 나가라고 할 게 뻔했다. 절대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고 설득한다 해도 현재는 스토커들에게 하듯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고 싶어 할 것 같았다.
지금처럼 일이라도 하고 빨리 돈을 갚을 수 있는 숙식 제공 직장이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된 김에 돈이라도 빨리 벌어서 다 갚는 게 나았다.
그런데 왜.
현재의 확실한 외면에 자신이 상처받은 기분이 드는 걸까. 봉투를 차곡차곡 쌓아 두고 같이 소각해야 하는 쓰레기들을 모아 정리하던 재선이 괜히 가슴팍을 문질렀다. 요새는 종종 별일도 없는데 한숨이 나왔다.
평생 인연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화려한 사람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온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그의 집에서 입주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그날 현재가 방문했던 덕분에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는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심지어 잘못 선 보증 탓에 당장 전액을 토해 내야 했던 상황도 조금은 해결이 됐다. 물론 돈은 갚아야 하더라도 현재의 집에서 일하면서 약간의 유예 기간을 얻은 셈이었다.
-일단은 보증인인 재선 씨가 직장을 가진 걸로 처리를 해 뒀어요. 상환 일정도 조정해 보고 확정되면 알려 드릴게요.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놀라자, 현재는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며 재선이 몇 번이고 건넨 고맙다는 인사조차 부끄럽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전에는 어떻게 일했더라……. 새벽같이 나가 한밤중에 퇴근하면서도 원래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라며 야근 수당 한 번 주지 않던 전 회사. 마지막도 야반도주로 실직하게 만든 그 사장과는 너무도 다른 고용주였다, 지현재는.
고용주도 훌륭한데, 재선이 맡은 입주 가정부 일도 감격스러울 만큼 손쉬웠다. 청소는 이미 다른 용역 업체가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고. 재선은 식사 준비와 주기적인 주변 확인, 우편물의 위험물 확인, 용역 업체가 할 수 없는 구역의 청소나 집 내부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정도였다. 하나하나 꼽아 보면 많지만 재선이 느끼기에는 이 정도면 아주 편한 일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워낙 혼자 생활한 기간이 길었고 오래전이지만 알바로 주방 보조도 했었던 적이 있어 문제는 없었다. 게다가 직접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주어진 식단대로 데워서 내는 정도였으니 더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한 음식은 대부분 현재가 아닌 재선이 먹게 되었다.
지현재는 생각보다 많이 바빴다. 아침에 일어나 먹는 식사는 과일 약간이나 녹즙, 아니면 커피 한 잔 정도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바로 출근해서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점심과 저녁은 거의 먹지 않았다. 냉장고에 잘 정리되어 있는 반찬과 음식들이 재선의 몫이 되는 이유였다.
-집 안에서는 편하게 계시면 돼요. 식사도 편하게 하시고요.
-원래 이렇게 많이 바쁘신가요?
생활을 시작한 지 3일째였나, 4일째였나.
연달아 늦은 밤에 귀가한 현재의 얼굴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나치게 피곤해 보인 날이었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보니 자잘하게 궁금하거나 허락을 받을 일들이 쌓여 있었다. 비단 그런 것뿐만이 아니라고 해도 매일매일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게 걱정이 됐다. 그날 낮에 수거한 우편물에서 혈서로 보이는 종이가 나와서기도 했다. 그랬는데.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저는, 아뇨. 대표님께서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해서…….
-재선 씨, 절 걱정하셨던 거예요?
빙긋 웃으며 묻는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괜히 식재료가 많이 남는다는 둥, 혼자 먹으려고 차리기엔 아깝다는 둥, 집이 너무 넓어서 안정이 어렵다는 둥. 이상한 소리만 한참 지껄였다. 자각이 들자마자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헛소리는 뱉을 대로 뱉은 뒤였다.
-……죄송합니다. 쉬세요.
-요즘 바쁜 일이 터져서 계속 늦었어요. 조금 정리되면 같이 저녁이라도 해요.
머리 위에 있던 전등이 현재의 눈을 비추자 연한 동공 색이 더 잘 보였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멍하니 그 눈에 홀려 버렸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재선 씨?’ 하고 현재가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네……. 좋, 좋죠. 저녁. 말씀해 주시면 준비해 두겠습니다.
간신히 대답을 하면서 자신이 웃었는지 인사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다음에는 정말 자신에게 미리 연락을 준 현재 덕분에 식사를 준비했고, 그 후로는 꼬박꼬박 제때 퇴근을 하는 현재와 저녁을 늘 함께하게 되었다.
베란다에서 우편물을 조금씩 태워서 없애야 한다는 주의 사항도 식사를 하면서 알게 된 거였다.
“오늘은 뭘로 해야 하나…….”
재선이 자신이 만드는 음식을 한두 가지씩 식단에 추가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전에는 혼자 먹고 남는 음식을 처리하는 형태라 부족한 걸 몰랐는데, 둘이 함께 먹자니 양이 조금 부족했다. 무엇보다 현재가 생각보다 저녁을 넉넉히 먹었다.
취향도 확실했다. 아무거나 다 잘 먹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호오를 내색하진 않았지만 같이 먹다 보니 유독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저절로 눈에 보였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식단에 신경을 쓰지 않기가 어려웠다.
몇 시간 뒤에는 퇴근일 테니 주변을 한번 둘러볼 겸, 장이라도 보러 나가야지 싶어 현관을 나서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어?”
언제 이런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꿈인가.
“어디 나가요?”
안으로 들어서려다 멈칫한 남자가 얼굴에 평소와 비슷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생각보다 현재의 이른 귀가에 재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저녁 준비를 좀 하려고 장을 봐 올까 했는데……. 지금 퇴근하시는 겁니까?”
“오늘 좀 일찍 끝냈거든요. 일이 좀…… 있어서.”
“아……. 그럼, 쉬고 계시죠.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어디로 가는데요? 백화점? 택시로 가요?”
가까운 마트에서 간단하게 사서 들어오려 했던 재선은 갑자기 자신을 멀리로 보내는 현재의 말에 잠깐 당황하다가 곧 바로잡았다. 가끔 이렇게 씀씀이가 차이가 나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놀랐다.
“그냥 가까운 곳에 다녀올 겁니다.”
“같이 가요.”
“예? 아니, 아닙니다.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그래요. 혹시 내가 같이 가면 불편해요?”
“그럴, 그럴 리가요…….”
고용주의 당당한 질문에 솔직히 대답할 용기가 없는 채무자이자 사용인인 재선은 그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얼떨결에 현재와 장을 보러 가게 생겼다. 회사 일을 다 처리하고 들어온 거면 피곤할 법도 한데, 현재는 집에 채 발을 들이기도 전에 다시 밖으로 나가는데 피곤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심심했던 건가.
재선이 봉투를 대신할 재활용 백을 챙기며 현관에 있는 현재의 옆에 섰다.
엘리베이터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숫자를 하나씩 속으로 헤아렸다. 무심코 응시하고 있던 앞쪽에 뒤에 서 있는 현재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한번 인지하기 시작하자 시선이 계속 그리로만 움직였다.
현재는 기초적인 체격도 좋았지만 넓게 벌어진 어깨와 상완에서 팔꿈치까지 이어지는 선이 매끄러웠다. 옷으로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탄탄한 몸은 헬스나 크로스 핏 같은, 미용을 위한 운동으로 관리한 것이 아니었다. 재선 역시 사정으로 일찌감치 떠나오긴 했지만 운동을 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저 모습은 그럭저럭 운동을 해선 만들 수 있는 게 절대 아니었다. 오랫동안 단련해야만 가질 수 있는 골격이었다.
처음 봤을 때에는 연예인인가 싶었지. 화려한 얼굴 때문에 대부업체 대표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건물을 벗어나 마트에 도착하기까지 대화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편하지 않았다. 말주변이 썩 좋지 않은 재선으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평소에도 그랬다. 식사를 하거나 저녁에 일을 마무리할 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현재가 없으면 큰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한 번은 애써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재선에게 현재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편하게 이야기하라 일렀었다.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여러모로 눈치도 빠르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마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현재가 먼저 카트를 챙기고 안으로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재선의 옆에 섰다. 곱게 큰 도련님이 하기엔 놀라운 모습이었다.
“……익숙하시네요?”
카트를 끌기 위해 손잡이를 잡고 있는 현재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보였다. 큼지막한 손은 손잡이를 전부 감싸고도 손안 공간이 한참은 남아 보였다.
집안일에 서툴고, 장 보러 간다고 하니 백화점부터 말하던 사람이라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할 줄 알았는데 집에서 가까운 마트니까 자주 오간 적이 있었던 걸까.
“제가 그 정도로 아무것도 안 할 것처럼 생겼나요?”
“그건 아니지만…….”
움직이기도 전에 누군가 냉큼 와서 도와줄 거처럼 생기기는 했다.
“이런 거라도 해야 사랑받는다고 그러던데요.”
“……예?”
“큰형이 애처가거든요. 알려 주더라고요.”
“아……. 그건 그렇겠죠?”
큰형이 결혼하셨구나. 보통 형제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몰랐지만 동생에게 애틋한 가족이니 이런 연습도 해 보라고 하나 보다. 자연스럽게 납득한 재선은 고개를 끄덕이곤 식료품 코너 쪽으로 발을 옮겼다.
신선식품을 지나 가공식품 코너에서 차분히 물건을 고르던 시야에 불쑥 흰 종이컵이 들어왔다. 종이컵은 현재의 손에 들어 있어서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무슨…….”
“드셔 보세요.”
시식 코너에서 받았는지 컵 안에 잘라진 소시지가 들어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하곤 서둘러 입에 넣었다. 기름에 볶은 따듯한 소시지는 식감이 탱글탱글하고 맛이 짭짤한 게, 꽤 괜찮았다.
“……맛있네요.”
“그러게요.”
어쩐지 뿌듯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현재의 얼굴이 흡족해 보였다.
현재가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한 묶음 사서 반찬을 만들어 둘까. 의외로 입맛이 꽤 애기 같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아무 거나 먹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재선이 유심히 성분표를 보고 있는데, 입술 앞에 무언가 툭 닿아 왔다. 흠칫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현재가 이쑤시개에 꽂힌 체리를 가져다준 거였다.
재선은 얇은 피부 위에 닿아 오는 은근한 압력에 눈치를 보며 자연스럽게 입을 벌렸다.
그대로 재선의 입 안에 체리를 물려 주곤 씩 웃는 현재의 얼굴이 정말 심하게 반짝거렸다. 혀 위에서 살살 굴리다가 툭 씹히는 과육이 달고 향긋해서 침이 고였다.
“……재선 씨 입술에.”
입가를 툭툭 두드리는 손으로 무언가 묻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재선이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아무래도 방금 체리가 닿으면서 묻은 듯했다.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워 잡고 있던 소시지를 더 살피지 않고 허둥지둥 카트에 넣었다.
“체리는 별로예요?”
보폭을 맞추며 카트와 함께 다가온 현재의 목소리가 재선의 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재선은 의식적으로 말 대신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했다. 입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체리 향이 옆에서 말을 건네는 남자의 입에서 나는 향과 같다는 사실이 신경이 쓰였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데 신경이 쓰였다. 같이 안 와도 괜찮았는데. 마트를 왜 간다고 솔직하게 말해 가지고 이런 상황에 처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저 사람은 고용주다. 대표님이다. 나는 매일매일 근무하는 노동자다.
그 후로 재선은 빠르게 물건들을 담으며 마트에서 나가기까지 끊임없이 그 사실을 상기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재선을 알아차렸는지 현재도 그 후로는 별말이 없었다. 다만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나눠 들려는 현재를 말리기까지 해야 하는 건 솔직히 진땀이 났다.
주방에서 장 본 것들을 정리할 때 튀어나온 체리 박스에 갑자기 얼굴로 열이 오른 건 절대 재선의 잘못이 아니었다.
***
식사 준비를 마칠 때까지 현재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지나가는 말로 ‘오늘 저녁은 뭐예요?’ 묻기에, ‘제육볶음에 양배추 쌈을 할까 하는데요.’ 답한 게 대화의 전부였다. 따로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묻기도 했지만 현재는 맛있을 거 같으니까 기다리겠다 답하며 서재로 들어갔다.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업무를 보려는가 보았다.
간단하게 파 기름을 낸 웍에 빠르게 삼겹살을 볶다가 양파, 버섯 같은 야채를 넣고 양념장까지 넣어 불 맛을 입히는 중이었다. 다른 가스레인지 위에는 이미 찌개가 끓고 있었다.
요리를 하는 손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지만 주방이 넓어 불편은 없었다. 다만 아예 마음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보니, 주의하면서 요리하느라 항상 시간은 넉넉히 잡고 일을 했다.
“식사하면서 반주도 한잔할까요?”
반찬을 이미 가지런히 식탁에 차려 놓고 마무리를 하던 재선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잠깐 몸을 돌렸다.
주방 근처에 있는 와인 셀러를 살펴보던 현재가 이제는 장식장을 보고 있었다. 진열되어 있는 양주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보는 눈이 꽤 기분 좋아 보였다. 건드리기 겁날 정도로 화려한 병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에 그저 장식용인 줄 알았는데.
“……마실 수 있는 거였습니까?”
“안 먹을 거면 왜 가져다 놓겠어요.”
이상한 소릴 들었다는 듯 웃으며 그중 하나를 꺼내는 손이 거침없었다. 어차피 현재의 것이니 가타부타 말을 얹을 일은 아니었지만 반주로는 독한 술이 아닌가 걱정이 됐다. 자신은 회식을 하느라 그래도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지만 곱게 자란 현재는 술이 셀 것 같지 않았다.
“독한 술은 아니죠?”
“이 정도는 괜찮을걸요. 다 마실 것도 아니고. 재선 씨 술 잘 못해요? 그러면 음료수랑 섞어 마셔도 되고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대표님 드실 거면 같이하시죠.”
걱정한 것은 자신의 주량이 아니라 현재의 출근이었지만 재선은 딱히 내색하지 않았다.
식사를 위해 준비된 메뉴들을 식탁 위에 마저 두면서 컵도 같이 챙기려고 둘러보는데, 재선보다 현재가 더 빨랐다. 아예 살림을 안 해 봤다던 사람인데도 물건의 위치는 기억을 하고 있었는지 찬장을 열고 닫는 손이 거침없었다.
“맛있겠다. 얼른 와서 앉아요.”
“네, 식기 전에 드시죠. 금방 가겠습니다.”
현재의 움직임을 무심코 눈으로 쫓다가 오히려 늑장을 부린 꼴이 되어 버린 재선이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이미 얼음이 든 술잔까지 완벽하게 세팅이 되어 있는 식탁에 마지막으로 찌개를 얹어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항상 먹기 전에 하는 현재의 인사에 똑같이 응수한 재선이 평소처럼 식사를 시작했다. 자신이 직접 한 찬에 현재의 손이 갈 때마다 괜히 뿌듯해졌다.
음식을 차려 두면 서슴없이 먹어 주고 맛에 대해 확실히 표현하며 고맙다는 인사까지 잊지 않아 주는 아름다운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상상한 적도 없었지만 현실에서 겪으니 만족도가 엄청 높았다. 자신이 이 일을 꺼려 했던 사실은 잠깐 잊힐 정도였다. 지현재를 보다 보면 항상 무심코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 내리느라 애써야만 했다. 이쯤 되니 위기감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게이라는 걸 절대 들키면 안 된다. 첫 월급도 받기 전이다. 감히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지현재는.
하지만 그렇게 되놰도 또다시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현재는 쓸데없이 이상한 것들이 들러붙을 정도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과 눈에 띄는 몸매, 유복한 집안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 남자였다. 자꾸 마음이 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현재를 원하는 사람은 저 말고도 많았고, 현재는 그런 일에 초연했다. 진심이 담긴 질 좋은 선물조차 스토커가 보낸 우편을 대하듯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냉정하게 버렸다.
그렇게 칼 같은 사람에게 감히 저 따위가 어설픈 마음을 품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품어서도 안 됐다. 가끔 스스로가 벼랑에 서 있는 것처럼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 적이 더러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월급을 벌자, 오천만 원. 이재선 너는 빚쟁이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재선 씨가 직접 한 거죠?”
“아……. 입맛에 맞으셔서 다행입니다.”
몇 번이나 제육볶음에 손을 대는 현재의 모습에, 예쁘게 웃으며 맛있게 먹어 주는 입술에, 이렇게나 두근거리고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일종의 일을 잘해서 받은 칭찬이 주는 뿌듯함 같은 거라고 재선은 반복해서 상기했다.
자신이 원래 이렇게 줏대도 없고 얄팍한 사람이었나 싶어 우울해지다가도 현재의 얼굴을 보면 그래, 그럴 만도 하지 하고 몰래 한숨을 삼키기도 했다. 안구 건강에는 참 좋은 사람인데.
입주 초기에 현재가 바쁠 때에는 아침과 밤에 겨우 인사만 하는 정도라 서먹함이 잘 가시지 않았었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는 첫인상도 문제였지만 앞으로 꾸준히 빚을 갚아야 하는 대부회사의 대표라는 점도 거리감에 한몫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처리할 방법을 열어 주기도 했고 매일 생활하면서 부딪혀야 했기에 천천히 익숙해졌다. 이제는 식사를 하면서 편안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은 가까워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 멀고도 아름다운 사람이 재선에게만은 친근하게 다가오는 듯이 느껴져 좋았다. 사람 손을 안 타는 도도한 고양이를 길들인 거 같은 기분이 이런 걸까. 제법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럼 한잔할까요?”
현재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두 손으로 잔을 받쳤다. 몇 년간의 회식으로 단련된 술자리 예절이 재선의 손끝에 그대로 배어 나왔다. 현재가 술병을 기울여 잔의 절반 정도 술을 채웠다. 유심히 보던 재선도 현재에게 똑같이 잔을 채워 주고 나니 현재가 잔을 들어 재선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챙, 하는 소리가 경쾌했다.
“여기서 지내신 지 딱 한 달인 날인데 모르셨죠? 축하해요.”
“……아. 감,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건배를 하게 된 재선이 그 말에 눈을 끔벅였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 정신없이 적응하고 상황을 확인하느라 날짜가 지나가는 걸 전혀 몰랐다. 그렇게 따지면 재선의 인생에 재난이 덮쳐 온 지도 벌써 한두 달 가까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원래는 더 좋은 곳에서 식사라도 함께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재선 씨 취향을 잘 모르고 있더라고요.”
“아닙니다. 이거로도 충분한데요. 술도 있고…….”
일상에서 평범하게 먹을 수 있는 식단이었다. 끽해야 자신이 새로 만든 거라고는 제육볶음에 된장찌개였다. 다른 건 정기적으로 배달되어 오는 밑반찬들이고. 간단한 메뉴인 데다가 오히려 주변 식당에서 더 맛있게 하는 곳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텐데.
“오히려 식사는 항상 제가 대접받고 있으니까요. 오늘도 마찬가지고요.”
“……너무 흔한 메뉴라 오히려 좀, 부끄럽네요.”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나머지 재선은 이어 헛소리를 지껄이게 될 것 같아 황급히 술잔을 기울였다. 알싸한 알코올의 자극이 서서히 퍼지면서 깊은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술이 부드럽게 넘어가기 시작하자 참지 못하고 한 모금을 더 머금었다. 묵직한 첫맛과 다르게 끝 맛은 달큼하게 마무리되는 게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도 꽤 마음에 들었다.
“……맛있죠?”
“아, 네. 처음 보는 건데…… 진짜 맛있네요.”
맛있어하는 게 표정에서도 보인 걸까. 반문하는 현재의 반응에 어쩐지 멋쩍어져 한 모금을 더 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자꾸 해외로 나도는 형제가 있는데, 이런 술은 가끔 들어오니까 편하게 마셔요.”
“……네, 잘 마시겠습니다.”
재선은 뿌듯한 표정이 떠오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다 가만히 입꼬리를 올렸다.
현재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고용주였다. 심지어는 자신이 떠안아야 하는 빚까지 다 알고 있는. 그걸 빌미로 못살게 굴거나 착취하진 않지만 지금처럼 그와 자신이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임을 인식하게 되는 때마다, 다시금 둘 사이의 거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저 같은 사람들이 많은가요?”
“……재선 씨 같은 사람들이요?”
“왜, 상황을 모르고 보증을 잘못 선다든가 하는…….”
“아아…… 그렇죠. 아직도 꽤 있기는 하죠. 제가 직접 가는 경우는 없지만.”
현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다 잠깐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곧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잘못 보증을 서는 이들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평생 겪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대출, 보증, 신용 불량, 사기, 실업…….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진 뒤에야 그런 일이 나한테 벌어진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혼자 살아가는 처지라 해도 세상 어딘가에는 자신의 자리가 있었다고 믿었다. 끝까지 붙잡고 있던 운동이 그랬고, 가족이 그랬고, 회사가 그랬으며, 서영원의 곁이 그랬다. 그러나 실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결론만 얻었다.
와중에 우연히 얻은 이 자리가 기껍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만큼 무섭기도 했다. 대부업체 대표라는 지현재의 직업도 그랬었고 그의 집에 살아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으며 타인이 주는 호의가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성격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주는 사람이 지현재라는 게 가장 걸렸다.
“보증은 잘못되면 다 망가지는 줄 알았습니다.”
“비슷해요. 재선 씨의 경우는 개중 액수가 작은 편이지만 다른 이들은 억 단위로 피해를 보니까요. 저희도 손해고요.”
“그래서 저는 그냥 몸으로 해결하게 할 줄 알았…….”
콜록! 술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었는지 현재가 기침을 했다. 재선은 빠르게 물을 옆에 놓아 주며 유심히 그를 살폈다. 물로 체하면 약도 없다 그랬는데. 술이 안 받는 체질인 걸까.
“괜찮으십니까? 술을 치울까요?”
“네, 뭐…… 괜찮아요. 오랜만에 마셔서……. 근데 몸이라뇨?”
“아…….”
머뭇거리던 재선이 술을 조금 더 마시곤 입을 열었다.
“영화에서 보면, 엄청 험지에서 일하거나 집도 다 부수고 끌려가서 장기 팔리고 뭐 그렇기에…….”
“하하, 재선 씨도 참…….”
말을 꺼내 놓고서도 괜히 눈치를 보던 재선은 고개를 저으며 웃는 현재의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가 비어 있는 잔에 술을 다시 채워 주기에 가만히 잔을 받쳐 받았다.
“하긴, 아예 그런 업체가 없다고는 못 하죠. 가끔 여러 군데 빌리는 사람들 집에 가 보면 이미 박살이 나 있는 경우도 있긴 했어요.”
“……그렇군요.”
“저희도 완벽한 금융사는 아니니까 가끔 강압적인 방법을 쓰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진행하진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폭력을 동원하면 저희가 고소당할 수도 있어서 더 위험하고요.”
천천히 흘러나오는 현재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내용만큼을 그렇지가 않아 재선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오늘 드리려고 했는데.”
잠시만요. 잠깐 뭘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가 식탁으로 돌아오는 현재의 손에 큰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재선이 앞으로 내밀어진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건, 뭔가요?”
“열어 보세요.”
머뭇거리며 겉을 살피다가 봉투를 열어 보니 근로 계약서였다.
“근로 계약서는 갑자기 왜…….”
“아무리 제가 약속했다고 해도 기본적인 건 해 드려야지 싶어서요. 안 그렇게 봤는데 재선 씨에게 좀 서운하기도 하고.”
“저한테요?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일단 그거부터 천천히 읽어 보세요.”
서운하다는 말에 오히려 그쪽으로 정신이 팔린 재선을 알았는지 현재가 다시금 서류를 가리켰다. 아주 일반적인 근로 계약서였다. 근무 환경이나 근무 시간 같은 것도 적혀 있었고 입주 근로의 특성상 하루 근로 시간이 유동적이라는 것까지 포함해서 급여를 산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적혀져 있는 급여가…….
“550만 원……?”
월 급여 550만 원, 연봉으로는 6천 6백만 원. 월급 150만 원을 잘못 계산해서 적은 걸까.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550만 원이 맞았다. 아무래도 현재는 최저 시급을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쩐지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재선이 현재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지적했다. 눈앞이 핑 돌았다.
“월 급여가, 그…… 급여가 잘못 적혀 있는데요, 대표님.”
“음? 550만 원 아닌가요? 혹시 오타 났어요?”
“아니, 550…… 550만 원. 이게, 대표님께서 이렇게 산정하신 게 맞다고요?”
“나름 전문가한테 물어보고 산정한 건데. 전 직장 경력이 7년 차라면서요. 그리고 입주하셔서 일하는 시간도 유동적이고요. 휴일이 정해져 있지 않은 업무면 추가 수당 주어지는 게 맞지 않나요?”
“……기준이 그건 맞습니다. 맞는데. 그래도 이렇게 고용하지는 않을 텐데요.”
어지러웠다. 550만 원, 그거면. 1년 바짝 일한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현재에게 진 빚을 다 갚고도 남았다. 일하던 때에 받는 급여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였다.
좋았지만 그러면서도 걱정이 됐다. 자신이 그렇게 담이 작은 인간인지는 몰랐는데. 앞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지현재보다는 확실히 담이 작은 사람이었다.
술로 목을 축이면 안 되는데, 술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입을 열기도 무서워, 자꾸 술을 들이켜게 됐다. 550만 원이라니. 전 직장의 두 배에 가까운 월급이었다.
돈은 허투루 생기지 않는다. 재선은 서류에 사인하라는 현재의 손짓을 보면서도 팍팍했던 자신의 수많은 경험을 떠올렸다.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는데…….”
점점 취하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술로 또 입을 축였다.
“……저,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 비용도 제하지 않으신 거 같고요. 무엇보다 제가 빚을 진 입장인데 이런 월급은.”
“잠깐, 빚은 재선 씨가 진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숙식 제공은 일반적인 공장에서도 해 주지 않나요?”
……여기가 공장 기숙사랑 같은 공간은 아니잖습니까.
“개인 고용이라 상시 밀착 경호도 같이 하고 계신 거잖아요.”
그런데 집에서 잘 안 나가시지 않습니까.
“재선 씨가 고용 조건에 대해서 한 번도 안 물어보셔서 오히려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데. 설마 빚 대신 일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죠?”
“……그건.”
맞잖아? 맞는데. 그게 아닌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술이 들어간 정신으로도 지금 현재에게 허투루 답하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본능에 가까운 거였다. 눈을 끔벅이며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얼음 때문에 젖은 술잔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현재의 눈가도 반짝거렸다. 응? 눈가가 반짝여?
“아무리 제가 대출이나 해 주고 있는 회사 대표긴 하지만. 적어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거든요. 그래서 어렵게 부탁드렸던 거였고…… 재선 씨도 저를 나름 믿어 주신다고 생각해서 나름 뿌듯했었는데…….”
“……아뇨! 절대로 빚 대신 일하는 거 아닙니다. 저도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가 우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푹 가라앉는 눈빛과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현재의 얼굴은, 꼭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중얼거리는 입술은 이미 술에 젖어서 붉게 반질거렸는데 그걸 살짝 깨물기까지 하자 마트에서 먹었던 체리 향이 갑자기 코끝에 스치는 기분이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그래서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맞지만 아니어야 했다.
“그렇죠? 재선 씨가 그랬을 리가 없지…….”
일하기 좋다는 이야기까지 하자 이젠 완전히 얼굴이 핀다. 방금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눈앞이 화사해질 정도로 웃는 현재를 멍하니 바라보던 재선은 무의식적으로 잔을 들어 또 술을 들이켰다. 뇌 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취한 걸까. 많이 안 마셨는데, 저 얼굴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술, 술이 맛있네요.”
아예 말을 돌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무렇게나 흘린 이야기에 현재가 다시 술잔을 채워 준다. 난처하지만 진짜로 술은 맛있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마음을 다스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재선의 얼굴이 붉었다.
“마음에 드시는 거 같아 다행이네요.”
“이런 걸 마셔 본 적이 없어서요…….”
“앞으로 다른 것도 다 드셔 봐야겠어요.”
현재의 말에 술병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쁘고 비싼 병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걸 보다가 재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렇지 않게 또 퍼 주려고 하는 현재를 자제시켜야 했다. 그냥 봐도 비싼 술들이고, 장식장 안에 있을 때 예쁘고, 또…… 일하는 사람에게 술을 마시라고 권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았다.
저 예쁜 인간은 자꾸 재선이 감당하기 어려운 걸 주려고 한다. 아무래도 많이 마시긴 한 건지 머릿속이 흔들리고 조금 어찔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죠. 저는 일하는 사람이고…….”
“아직 계약서 안 쓰셨잖아요.”
계약서. 그래, 근로 계약서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지. 그런데 그런 월급으로 내가 일을 해도 되나? 근데 일을 안 하면 현재의 눈이 슬퍼졌다. 그의 슬픈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더 싫었다.
“그거…… 쓰면 되는 겁니까?”
“이 월급으로 일해 주실 건가요?”
조금은 두려운 듯, 조심스럽게 묻는 현재가 재선을 응시했다. 자신의 선택을 종용하는 눈이 은근히 무겁기도 하고 한편으론 고작 사용인이면서 대표님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는 재선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같다.
자신이 지금 가릴 게 뭐 있다고. 많이 주면 냅다 고맙습니다 해야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재가 그렇게 하자는데.
조용히 바라보던 재선이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 끄덕, 두 번 들어 올렸다 떨어지는 턱이 무겁다. 손톱만큼 남은 양심이 껄끄러워서 차마 소리 내 답하기는 어려웠다. 많은 돈이 오면 많이 일하면 되니까. 앞으로도 더 열심히 일하면 되겠지.
재선이 눈앞에 쥐여지는 펜에 술을 조금 더 마신 후, 정성껏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현재가 짚어 주는 곳마다 서명을 마치고 나니 큰일을 해치운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실 전 직장에서도 일 년도 넘게 지난 뒤에야 근로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었는데, 한 달을 자신이 이야기하길 기다렸다고 말해 주는 고용주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고맙, 습니다…….”
“제가 고맙죠. 앞으로 길게 보면 좋겠네요.”
빚을 대신 갚기 위해서도 아니고 순전히 자신이 마음에 들어 선택해 주었다고 하는 남자가 말갛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인사치레일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받지 못한 돈을 처리하려고 이러는 거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런 다정함이 절실했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세상에 혼자 있는 건 생각보다 더 외롭고 비참해지기 쉬워서.
자신에게 애정이 없는 이라도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넘어가고 싶어질 정도여서.
점점 우울한 생각이 이어지는 걸 고개를 저어 애써 털어 낸 재선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네요…….”
어질어질한 정신으로 앞을 바라보던 재선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약간씩 동작이 둔해지는 감각이 낯설어서 손가락을 쥐었다 펴 보기도 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도 했다.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얇은 티 위로 선명히 보였다.
“많이 드셔도 돼요. 어차피 집이니까 바로 잠들어도 되잖아요.”
“그래도, 주방 정리도 해야 하는데…….”
“신경 안 써도 괜찮아요. 지금은 다른 걸 신경 써야 하는데.”
쪼르륵. 현재가 다시 채워 주는 자신의 잔을 바라보던 재선은 점점 마르는 입술을 핥았다. 맛있어서 계속 들이켰더니 기어이 주량을 넘긴 모양이다. 그래도 맛있으니까 하루 정도는. 대표님이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은 거겠지.
술기운 탓인지, 앞에 같이 마주 앉아서 계속 방실방실 웃고 있는 대표님의 얼굴이 예쁜 탓인지 자꾸 가슴이 답답해졌다. 손가락으로 앞을 늘려 펄럭이며 물을 찾아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시원한 느낌에 살짝 웃음이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발목을 타고 무언가가 살살 문지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야릇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
뭐지. 식탁 아래를 보려고 재선이 상체를 휙 기울이는 순간 술에 절여진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였다.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겠다 싶어 눈을 꾹 감았는데 그대로 무언가에 몸이 감싸였다.
몸을 단단하게 쥔 큰 손과 따뜻한 체온, 그리고 이제는 항상 맡아서 익숙해진 달고 묵직한 좋은 냄새.
“재선 씨, 괜찮아요?”
“…….”
목소리가 가까이서 아득하게 떨어졌다. 덩달아 재선의 심장이 어딘가로 툭 떨어졌다.
“술이 많이 독했나…….”
“……괜찮, 괜찮습니다.”
애써 몸을 일으키려는 자신을 오히려 품으로 꾹 감싸 안으며 부축하는 손길이 다정했다. 어디에서도, 누군가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느낌이라 조금 허둥거렸던 것도 같다. 다시 자리에 앉으며 남아 있는 술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빨리 자리를 정리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자꾸 눈이 현재를 쫓으려고 하는 것도 곤혹스럽고.
“어, 그거 너무 급하게 마시면…….”
자꾸 예쁜 걸 보다 보니 자꾸 혹하는 거 같고. 그러면 자신이 파렴치한 눈으로 현재를 볼 것 같고.
취기에 절여진 뇌가 아무렇게나 달려 나가려는 순간, 술잔을 잡고 있는 재선의 손을 넉넉하게 감싸 잡은 손이 있었다. 무척 부드럽고 따뜻했다. 매일 보는 크고 곧은 손. 원래 현재는 자신의 앞에 있었는데. 고개를 돌리자 현재가 옆에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이 흐릿하게 뭉개졌다가 다시 분명하게 보이기를 반복했다.
“예쁘네요. 정말…….”
“재선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절로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
“다시, 다시 말해 봐요. 응?”
“좋아……. 아, 좋아요…….”
“재선 씨 취하면 말투가 이렇구나……. 귀엽네.”
성기가 젖은 곳에 감싸여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유두 부근을 갉작이며 살살 건드려지는 게 거슬렸지만 은근히 간질간질한 자극이 되어서 그대로 뒀다. 탁, 탁. 아랫배로 피부가 부딪히는 소리가 차지게 귀를 울렸다.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곳은 방출만을 앞두고 있었다. 허리를 조금 더 흔들었다. 꽉 붙잡혀 있는 성기를 어떻게든 움직이려는 욕구에서 나온 몸짓이었다.
“으……. 방금, 아…….”
“후……. 여기? 이렇게 조여 주는 게 좋아요?”
이미 헤어진 애인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다정한 말투에 등골이 찌릿하고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성기 전체를 감싸고 있던 압박이 귀두로 옮겨 가는 데에 정신이 쏠렸다.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다급하게 몸을 움직이며 지금보다 더 강한 자극을 갈구했다.
더, 더 느끼고 싶어. 조금만 더.
이렇게 야릇하고 간지러우면서 노골적이고 강렬한 흥분은 처음이었다. 쉴 새 없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바짝 태우는 날카로운 감각이 갉작거리기는 하는데 도무지 시원하게 긁어 주지는 않아 미칠 것 같았다.
“흐으, 윽. 아……!”
잔뜩 달아오른 귀두 끝이 어딘가에 툭 닿았다. 그 순간 전신의 말단에서부터 전기가 통하듯 몸이 벌떡 튀었다. 잘게 허리를 떨며 숨을 들이켰다. 눈앞이 붉게 번쩍였다. 익숙한 해방감이라 하기엔 폭력적인 감각이었다.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정액 양이 많았던 것 같다. 흥건하게 젖은 아래가 축축해서 고간으로 뭔가가 고여 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만 좀, 씹어요.”
숨을 고르느라 색색거리는 사이로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개운해진 눈을 끔벅였지만 바로 초점이 잡히진 않았다. 술이 아직 덜 깼나. 분명 자신이 아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잔뜩 흥분했었던 몸이 사정 한 번에 멀쩡해질 리가 없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열기는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여전했고 발기는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아, 흐읏! 아!”
찔꺽, 소리와 함께 하체가 거세게 쳐올려졌다. 재선의 다리 사이가 공중으로 한 뼘쯤 떠오를 정도로 거센 움직임이었다. 이럴, 이럴 일이 뭐가 있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이 선명했다. 동시에 발긋하게 부어오른 가슴이 콱 잡혔다. 재선의 하얀 피부 주변이 붉어질 정도의 악력이었다.
가슴이 부어올라? 잡혀? 왜?
제대로 상황이 인지되기도 전 끙끙거리며 자신이 투덜거리던 게 문득 떠올랐다.
-……자꾸 그렇게 웃으시면, 안 됩니다.
분명히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엉뚱한 짓을 해서 현재가 웃었을 텐데 괜한 트집을 잡은 사람은 헛소리를 한 재선 자신이었다.
-왜요? 웃으면 보기 흉한가. 나 보기 싫어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지만 표정은 명백히 시무룩했다. 덕분에 다급해진 사람도 자신이었다.
-아니…… 아니요.
아니, 아니어야 했다. 악몽인가 보다. 설마 지현재에게 말했을 리가.
-대표님이 웃으면 너무 예쁘니까…….
예쁜 건 맞지.
-……제가 오해할 것 같아서요.
……취했으면 그냥 곱게 방에 들어가 잠이나 잘 것이지.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 걸까.
-왜요. 무슨 오해를 하는데?
-대표님은 잘났는데, 나는 그냥 일하는 사람인데…… 자꾸 잘해 주시니까요.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자신의 말에 놀라는 듯했던 것도 잠깐, 현재는 오히려 더 꼬치꼬치 캐물어 왔다.
그런 현재가 귀찮았던 것도 같다. 그래도 실망시키기는 싫어서 계속 대답을 했었다. 대답을 하다가 갑자기 또 휘청이며 몸이 기울자 현재가 불안하다며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옮겨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어딘가에 몸이 기대어졌고 편해서 좋았지만 옆에 들리는 목소리에 더 취했고…….
-……는데,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그다음에는 뭐가 입으로 부딪혔고. 부딪혔는데……. 그다음이 왜 생각이 안 나지.
“아까부터 눈앞에서 잡아 달라고 흔들리는데. 안 잡아 줄 수가 없네. 하아, 더 움직여야죠. 응?”
“아, 잠깐……. 아앗! 제, 제가 언제…… 하으응!”
유두를 꼬집으며 비트는 손길이 꽤 거칠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손길에 흥분해서 신음을 흘렸다. 귀로 들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미간이 절로 좁아지며 예민하게 진저리를 치자 현재는 비틀려 금방 부어오른 유두 끝을 혀로 핥으며 달래듯 쭉 빨았다.
찌릿한 통증 때문에 가슴에 시선을 옮기니, 지독할 정도로 흥분한 예쁜 얼굴과 마주쳤다.
저절로 움찔거리는 재선에게 무얼 느낀 것인지 현재의 얼굴이 조금 사나워졌다. 유두 부근을 할짝거리며 성질을 죽이는 듯하더니 양손으로 재선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처음, 이라면서. 이렇게 잘, 벌리고…… 후으. 잘 씹으면 어떡해요…… 응?”
철썩, 철썩. 느릿하게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힘에 몸이 흔들렸다. 얼마나 심하게 흥분을 한 건지 체액이 질질 흘러내렸다. 서로의 피부에 마찰되며 미끈거릴 정도였다. 그로도 부족해서 내부를 짓이기듯 꾸역꾸역 들어오는 감각은 재선으로선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자극이었다.
“흐아……. 그, 그만. 제발…… 하악!”
“당신이 먼저 쌌잖아. 한 번은 버텨요.”
현재가 골반과 허리를 양팔로 강하게 틀어쥔 채 단호하게 말하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흔들던 속도를 높였다. 퍽, 퍽 아래에서 밀어 올려치는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머릿속이 자글자글 끓었다. 벌어진 아래에서 정수리까지 몰아치는 쾌감이 잔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이, 남자의 성기를. 현재를 뒤로 받아 내고 있었다.
“……아으, 아……. 대표님. 아으흣.”
결코 작지 않은 재선의 몸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며 신나게 박아 대던 현재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좀 전에 지적당한 가슴 한쪽을 다시 입으로 물었다. 입 안에서 유두를 혀끝으로 굴리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점점 숨이 달아올랐다. 뻐끔거리는 입술 사이로 간신히 호흡만 이어졌다.
이상했다.
처음인데, 분명히 처음인데.
게이로 살아오면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포지션인데.
쾌감은 착실하게 몸 안에서 부피를 키워 재선을 점점 몰아붙였다. 마치 이런 걸 모르고 살았던 날들이 더 이상하지 않냐는 듯, 피부 위로 곰실거리는 감각들이 선명했다. 스스로는 절대 해소할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절실했다. 더듬거리며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매달렸다. 그 순간, 뒤를 파고드는 성기를 엉덩이로 꾹 조였다.
“하, 이제 좀 술이 깨요? 나 부르면서 조이네.”
“그만, 그만요…….”
“안 되는데. 오늘 나한테 선물 주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이잖아요.”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지만. 제가 준다고 한 그 선물은 분명 이런 게 아니었을 거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붙잡아 밀어내려 하는데 전혀 밀리지 않았다. 단단한 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니면 자신이 지금 취해서 제대로 힘도 못 쓰고 있다거나.
이 순간에도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성기가 자꾸만 안을 찔러 왔다. 빙글거리면서 골반을 살살 흔들던 손이 장난스럽게 꼬리뼈를 문지르다가 허리를 쓰다듬었다. 어디를 만지든 흠칫거리면서 자극에 놀랐다. 그러다 힘껏 자신을 고쳐 안는 현재의 손길 때문에 안에 들어와 있던 귀두가 내벽 어딘가를 스쳤다. 순간, 파득하고 몸이 떨리며 재선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아, 하윽…… 아!”
“……여기구나.”
느릿하게 움직이며 밖으로 빠져나가던 성기에 몸을 부르르 떨자.
“아!”
현재가 퍽, 하고 방금 스쳤던 곳을 정확하게 다시 쑤신다. 눈앞이 번쩍거릴 정도로 강렬한 쾌감은 도무지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미 곧추선 성기는 재선의 아랫배에 바짝 붙어서 쿠퍼액을 줄줄 흘려 댔다.
“이렇게 민감하면서 처음이라니……. 그동안 어떻게 산 거예요.”
“몰, 모르는, 흐으…….”
“쉬이……. 물어본 거 아니니까. 후, 어깨 다시 잡아 봐요. 아예 끌어안으면 더 좋고.”
뿜어내는 열기에 들러붙은 앞머리가 거추장스러웠는지 입김으로 이마 위를 불던 현재가 재선을 재촉했다. 얼얼한 정신에도 시키는 대로 착실히 목뒤로 양팔을 두른 재선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에 끙끙거렸다.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하는 투정이었다. 그런 몸을 마주 잡은 현재는 웃음 띤 얼굴로 살살 달래듯 재선의 등을 쓸어 주었다.
어루만지듯 어깻죽지에서 척추, 엉덩이까지 만져 주던 손길에 재선이 긴장을 풀어 갔다. 그때, 현재의 입술이 어깨선 위로 닿았다. 탄력 있는 피부를 입술로 지분거리다가 목덜미를 콱 물자 재선이 흠칫 놀라며 성기를 품고 있던 안을 수축했다. 붉게 자국이 남을 정도로 살을 실컷 빨아 들이며 혀끝으로 자국 위를 덧그리는 현재의 행동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이거 봐, 또 씹어 대잖아요.”
“이건, 대표님이 깨물어서…….”
“깨무는 것도 좋고 박아 주는 것도 좋고?”
“…….”
미친 건가. 반짝거리던 얼굴이 더 빛나는 것 같기는 한데. 재선은 대꾸할 수 없는 말에 숨만 색색 내쉬었다.
재선의 몸이 빙글 돌려졌다. 그대로 침대 위에 눕혀져 등이 시트 위로 닿자 편안해진 몸이 만족감을 나타냈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천에 머리가 닿은 것까진 좋았지만 그곳이 온통 익숙한 냄새로 꽉 차 있는 건 재선에게 좋지 않았다. 마치 뇌 속까지 현재에게 절여지는 기분이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바짝 아래를 붙이며 들어온 현재가 재선의 허리를 잡은 채 뒤로 천천히 허리를 물렸다. 꽉 붙잡고 있던 기둥이 빠져나가자 예민하게 부어 있는 내벽이 같이 딸려 나가듯 움직였다. 그리고 꽉 다물려 있어야 하는 아래에서 뭔가가 툭, 걸리는 느낌이.
이거, 설마.
섬뜩한 기분에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다 귀두가 입구에 걸린 채 그대로 물려 있는 걸 빤히 보고 있는 현재와 눈이 마주쳤다. 입구 주변을 서서히 엄지로 문지르는 게 느껴졌다.
“으……하, 하지 마십…….”
“조금 부었네. 그러게 처음은 누워서 하자니까……. 이제 천천히 할게요.”
천천히라니,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걸까. 성기가 부드럽고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런 생각도 곧 끊어졌다. 내부를 탐색하듯이 이어지는 움직임과 동시에, 현재가 바짝 서 있는 재선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흐, 아?”
귀두가 안을 다시금 벌리고 기둥이 그 뒤로 밀고 들어오면서 예민해진 내벽을 살살 문질렀다. 이미 달아올랐던 몸은 작은 불씨에도 쉽게 타올랐다.
온몸을 긁고 싶었다. 터질 것같이 부풀어 있는 감각이 제대로 건드려지지 않은 채 표피만 살살 긁히는 느낌이었다. 해갈되지 않는 욕구에 그대로 허우적거렸다. 부드러운 손바닥 안에서 발기한 성기가 흔들릴 때마다 자신의 안으로 깊게 성기가 들어왔다 빠져나갔다. 입 밖으로 자꾸만 흘러나오는 신음에, 시트 위를 더듬어 꽉 쥐어짜는 손끝에, 재선의 흥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빠듯하게 벌어진 아래가 버겁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쾌감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워 다른 건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하게 되더라도 당장 이걸 해소할 수만 있다면. 시원하게 절정에 오를 수만 있다면.
“……으응, 흐……. 제발. 대표님……. 하으.”
“후, 여기. 넣어 주고 있잖아요. 부족해요?”
살살 움직이면서 안쪽을 쿡 쑤셨다가 다시 느릿하게 빠져나가며 하는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열기가 차오른 몸은 더 심하고 강력한 자극을 원하는 걸 재선은 알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무슨 느낌이지. 정신없이 부들부들 떨던 재선이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헐떡이는 입을 벌렸다. 꽉 물고 있었던 아랫입술이 기어이 터졌는지 피를 보였다.
“……더, 더요.”
“쯧, 입술 터졌네. 여기 깨물지 말아요.”
현재가 상체를 숙여 혀끝으로 재선의 입술을 핥았다.
몸이 기울며 안에 들어 있던 성기가 각도를 달리하자 눌리지 않던 내벽이 눌리며 아랫배로 힘이 들어갔다. 축축하게 타액으로 젖은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렀다.
“하앗, 아. 하으……. 대표님…….”
“움직이지도 못하게 조이는데……. 원하는 거라도 있어요?”
능청스럽게 묻는 현재의 낯이 말갛게 반짝였다.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집에 처음 찾아왔을 때도, 매일 저녁 마주하는 식사에 고맙다고 인사를 전해 올 때도, 재선의 처지를 공감하며 술잔을 기울였을 때도.
재선이 간신히 손을 뻗어 현재를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입에서 생전 처음 해 보는 말이 흘러나왔다.
“안, 안에…… 더 세게…….”
“하, 씨발.”
처음 듣는 욕설에 재선이 흠칫하며 굳자, 현재가 괜찮다는 듯 손으로 조심스럽게 다독이곤 곧 상체를 살짝 떨어트렸다. 그 뒤엔 재선의 오금을 양손으로 꽉 쥐며 말했다.
“다음에는…….”
퍽! 강하게 안으로 짓치고 들어온 성기가 내벽을 때렸다. 아니, 아랫배 안까지 울린 걸 보니 더 깊게 들어온 것 같다.
“흐아아, 흐으…… 아!”
“박아 달라고 해 줘요.”
재선이 저도 모르게 이리저리 고개를 저으며 아랫배를 감쌌다. 어마어마한 감각이 몰아쳤다. 흥분에 가득 차 질질 흐르는 목소리가 남의 것인 양 멀었다. 가차 없이 안을 후벼 파는 추삽질에 재선의 손끝이 벌벌 떨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 사이로 사납게 오가는 성기가 뜨거웠다. 몸 어딘가에 불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열기였다.
“……흐, 아아. 하읏.”
“……하, 너무 좋잖아.”
배 속으로 현재가 강하게 들어올 때마다 시트 위에서 몸이 밀리는 것도 몰랐다. 얼굴을 시트 위로 부비며 어떻게는 정신을 차리려 해 봤지만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찌르르 울리는 아랫배를 손으로 감싼 건 본능이었다. 그 위로 곧추선 제 성기가 흔들리며 툭툭 때렸지만 재선은 느끼지 못했다. 현재의 성기가 강하게 자신을 밀어붙이고 내벽을 쑤시며 주는 쾌감에 휩쓸려 흐느끼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몸뚱이로 현재가 손을 뻗었다. 좀 전보다도 더 깊숙이 안을 쳐올리면서 빨갛게 부어오른 재선의 성기를 잡자 벼락같은 쾌감이 찾아왔다.
“으응, 아! 아읏!”
“……크윽.”
허벅지가 경련하듯 떨리며 절정을 알렸다. 현재의 손에 정액을 싸지른 재선이 내벽을 급격히 수축했다.
현재가 가까이 하체를 붙이며 강하게 조여드는 감각에 잠시 몸을 맡기다가 빠르게 성기를 빼냈다. 이미 반쯤은 사정의 여운에 젖어 있는 재선의 성기와 제 성기를 동시에 잡아 흔들며 그의 몸 위로 정액을 흩뿌렸다. 후드득 피부 위로 떨어지는 하얀 액체를 따라 현재의 시선이 움직였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쿰쿰하고 짙은 냄새가 섞였다. 그대로 쓰러지듯 덮쳐 몸을 끌어안아 오는 남자에게선 이제 좋은 냄새만 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야해서 이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느릿느릿 끔벅이는 재선의 눈을 봤는지 큰 손이 그 위를 덮었다.
“편하게 자요. 괜찮아요.”
다리 사이가 홧홧하고 몸은 알 수 없는 액체들로 젖어 있었다. 허리와 엉덩이가 욱신거렸고 유두는 아직도 좀 부어 있는 듯도 했다. 씻고 싶었다. 주방의 상태도 궁금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다시 이야기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재선의 귓가에서 가만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 달았다. 잠으로 감겨드는 눈을 도무지 막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