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7)

02.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자리도 점점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서영원 씨와 연락은 전혀 안 되시는 건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동거까지 하신 거면 꽤 가까운 관계 아닌가요.”

아무래도 저 혼자 그렇게 생각한 것 같네요. 재선은 푸념 같은 말이 흘러 나가지 않도록 입을 힘주어 꽉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상처로 헤벌어진 속은 자꾸만 넘치는 원망과 미련을 흘렸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지. 너는 왜 나여야 했을까. 그렇게 싫었던 걸까. 입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내리며 꾹 쥐었다.

“작정하고…… 돈을 빌린 거 같네요. 나갔다 돌아오니까 물건도 옷도 다 사라져서…….”

“아…….”

“왜, 저한테 왜 그랬을까…….”

“…….”

사람은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싫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있다. 그 정도는 재선도 알았다. 하지만 서영원은 자신의 연인이었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그에게 좋은 것만 주기 위해 애썼다.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어렵게 만난 사람이어서. 처음 만난 연인이어서. 더 잘해 주고 더 행복해지고 싶었다. 둘이 함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지, 왜 이런 식으로 했어야만 했는지…….”

“……사인하실 때.”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재선이 말을 멈췄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구나 싶었다. 실수였다. 뒤늦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인하는 대가로 받고자 한 게 있으셨나요? 약속받은 금액이나 물건이 있다거나.”

“아뇨, 아닙니다. 일이 당장 어렵다고 했고 그냥 도움이 된다고 하기에…….”

“금품이 사전에 오가지도 않으셨을 거고요.”

식탁 위로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하는 현재의 설명에 재선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해야 사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보증해서 그의 일이 잘 풀리면 다행이라 여겼다.

짧게 숨을 내쉬며 한참 말을 고르던 지현재의 입에서 다시 말이 흘러나왔다.

“……돈을 빌리는 건 없어서 빌리겠죠. 당장 필요하니까.”

“……그렇, 죠.”

“제1 금융권은 기준이 더 빡빡하니까 넘어갈게요. 절대 안 되니까 저희에게 왔겠죠. 하지만 저희도 회사에서는 서영원 씨 신용으로 안 된다고 했을 겁니다. 정 빌리고 싶으면 담보나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했을 거고요. 물론 저희 회사가 아니어도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신용으로 빌리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담보나 보증인.”

“네, 그리고 그걸 해 주신 겁니다. 서영원 씨에게 부족한 걸 이재선 씨가 채우신 거죠. 어떻게 허가가 났는지는 저도 확인은 안 해 봐서 알 수 없지만 났으니까 돈이 나갔을 거고요.”

“……네.”

“그러니까 재선 씨는…….”

하던 말을 멈춘 지현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게 느껴진 걸까.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답답했다. 자신에게야 연인인 남자에게 보증을 서 준 거지만 동거인에게 그렇게까지 해 준 걸 본 걸 테니까. 진짜 동거인이라고 생각이나 할까.

어쩌면 이 회사에 큰 민폐를 끼친 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누군가 큰돈을 빌리면서 갚을 수 있다고, 보증인이라고 하면 자신이 대신 갚아 줄 수 있다고 서류에 사인까지 한 거나 마찬가질 텐데. 정작 와 보니 아무것도 없던 거다. 대출을 갚지 않으면 서영원 대신에 피해를 보는 건 맞지만 오히려 그런 돈을 빌려준 대표 앞에서 하소연을 하고 앉았으니.

“서영원 씨를 믿은 것뿐이에요.”

“…….”

“잘못된 결과로 지금 좀 곤란하시긴 하지만 믿은 이재선 씨 마음이 잘못은 아니니까요.”

“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대꾸를 하려던 재선의 속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믿음.

그랬다. 떠난 이유가 뭘까, 조금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을까, 연락을 더 자주 했어야 했나, 모든 원망과 잘못을 저 스스로에게 돌리고 있었다.

사실은 영원을 믿었다. 믿었기 때문에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었고 자신도 그에게 그만큼 차지하고 있다 믿었다. 눈앞의 사람이 그 이야기를 지적해 주고 나서야 고개를 겨우 끄덕일 수 있었다.

처음 본 사람도 다독여 줄 만한 이 상황을 연인이었던 사람이 저지르고 나간 건 여전히 속이 쓰렸지만.

“그래서 말인데요.”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는지 서류를 다시 살펴보면 남자가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 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의 모양이 길고 예쁜 조개껍질 같다는 생각을 하던 재선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말씀하십쇼…….”

“그 과정에서 저희 직원의 설명이나 안내 전화를 받으신 일이 있나요? 아니면 따로 통지서나 계약서를 받으셨다거나.”

“…….”

사인을 하고 난 다음에 따로 연락을 받은 일은 없었다. 보증을 섰단 사실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영원을 통해서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대출이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오늘 처음 듣는 일이었으니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재선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다는 듯 끄덕이는 남자의 얼굴에 다시 눈이 갔다.

“이건 제가 회사로 가서 다시 확인을 좀 해 보죠. 문제는 당장 상환을 하고 서류상으로라도 처리를 해야 한다는 건데…….”

“무슨, 처리인가요?”

“전액 상환을 하시려면 현금이 가장 낫습니다만……. 불가능하다면 월급을 저희가 차압하게 되는데 직장이 없으셔서……. 제가 고용주가 된다고 하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닐 거 같아서요.”

“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방법이 있나요?”

재선이 다급히 손을 뻗어 현재의 팔을 붙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발아래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싶었다. 서영원이 저지른 일들로 더 엉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직장을 잃은 지금, 최대한 피해를 줄이려면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뭐든 해야만 한다는 건 알았다. 그걸 하루라도 빨리 시작할 수 있다면 좋은 게 아닐까.

“그런 방법은 아니고 필요한 사람을 구하는 거라서요…….”

“어떤 사람을, 아니.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하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회사 일도 했었습니다. 아무 일이나 다 잘할 수 있습니다. 체력도 나쁘지 않고요. 물론 회사에 제가 필요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뇨, 회사 일은 아니고 제가 개인적으로 필요한 겁니다.”

“……개인적이라면.”

많이 험한 일인 걸까. 원래 이런 처지에는 배도 타고 건설 현장에서 구르기도 하고 자칫하면 섬에 노예로 끌려가기도 하던데…….

계속해서 고민을 하는 현재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어두워졌다.

말할 수 없는 일인가. 아니면 자신이 필요에 못 미치는 인물로 보이는 걸까. 체력은 자신 있는데. 당장 5천만 원을 갚아야 하는데 까짓 지금 배든 섬이든 가릴 문젠가.

침묵이 길어질수록 덩달아 긴장하게 된 재선이 마른침을 삼켰다.

“저와 같이 살아 주실래요?”

“물론, 같이 살 수 있…… 예?”

혼란스러웠던 재선의 머릿속은 이젠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같이? 어디서? 이 사람 집에서?

이런 남자가?

갑자기? 대체 왜 나랑?

아니 같이 살자고? 오늘 처음 봤는데?

“급여는 지불하겠습니다. 일단은 저희 집으로 들어오셔야 해서 물은 거고요. 아무래도…….”

“아니 무슨. 새우잡이나 뭐야……. 원양 어선 타는 게 아니고요?”

“……입주 가정부를 구하는 게 쉽지가 않아서요.”

“아…….”

뭐가 구하기가 어렵습니까? 지금 나가서 저희 집 가정부 하실래요? 하면 줄을 설 거 같으신 분인데요.

울컥한 재선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가기 전에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왜 가정부를 권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일단은 자신이 게이라는 게 걸렸다.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내지 않았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미 어릴 적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난처한 경험이 여럿 있었다.

물론 재선이 게이인 걸 모르는 동기나 선후배들은 재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편히 생활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본인이 성적으로 보는 대상이 남자다 보니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늘 속에 고여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기숙사는 어쩔 수 없이 하는 단체 생활이란 핑계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현재는…….

“그건, 저는 집에 있으니까 입주까지는…….”

힐끔 바라만 봐도 순간 긴장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진 이 사람을 매일 보고 있다간 자신이 어딘가 이상해질지도 몰랐다. 굉장히 바라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재선은 분수를 알았다. 지현재는, 아무리 친절하고 아름다우며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다독여 주는 말을 건네는 좋은 사람이어도, 결국 대부업체의 대표였다. 번거로운 일을 해치우려는 목적으로 건넨 제안일 뿐, 그 안에 얼굴을 밝히는 게이와 같이 사는 상황이 끼어 있지는 않을 터였다.

자신도 이렇게 눈이 저절로 가는 사람과 같이 지내는 건 무리였다. 매우. 심장에.

“그렇군요, 사실 제가 거의 나가 있는 터라 입주라고 해도 크게 불편하진 않으실 텐데. 출퇴근이 가능하면 좋겠지만 집안 어른들 때문에 꼭 입주로 구하고 있어서요.”

“……가정부를요?”

“부끄럽지만 제가 막내라. 일한다고 나가서 사니까 걱정이 과해요. 이래 봬도 다 큰 성인인데. 사실 이런 일을 자꾸 맡는 이유도 가족들에게 믿음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고요.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걸로 보이나 봅니다.”

“아니, 그럴…… 그럴 리가요.”

“재선 씨도 저보고 대표인데도 어리다고 하셨잖아요. 제 꼴이 좀 못 미더운 거죠.”

그거야…… 못 미더운 게 아니라.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남자가 안쓰러우면서도, 이런 오류를 봤을 때 어디서부터 잡아 줘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 입만 벙긋거렸다.

무엇보다 생김새가 문제였는데. 못 미더워 보여서는 아니지만, 지나치게 불안하긴 했다. 자신이 가족이어도 그랬을 거다. 날아가진 않을까 잘못되진 않을까 걱정이 안 될 얼굴이 아니잖은가. 불안한 쪽을 본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긴 하지만.

“일은 아주 잘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어물거리며 수습하는 말에 대답 대신 조금 웃던 현재가 재선의 얼굴에서 어깨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재선 씨는 운동, 하셨었죠?”

“아, 네. 어릴 때 유도를 조금.”

“운동하신 분들은 금방 알겠더라고요. 경호원들과 가까이서 지낸 적이 있어 그런가.”

“그런데 운동은 왜……. 문제가 있나요?”

“오히려 좋아서요. 운동을 꽤 하신 거 같아서 입주 이야기도 말씀드린 거예요.”

가정부 일을 하는데 운동은 왜 필요하지? 체력이 좋을 거 같아서 그런가.

재선이 의아해하는 사이, 말을 꺼내지 못해 머뭇거리던 현재가 식탁 위 재선의 손을 잡더니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이었다.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저, 손을 좀.”

“운동하셨으니까 간단한 경호도 가능하시죠?”

“경호요……?”

어쩐지 비장해 보일 정도로 굉장히 절박하게 말하는 현재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재선은 자세를 바로잡고 귀를 기울였다.

“생각해 보니 처음 뵙는 분과 이렇게 평범하게 대화하는 일도 좀 오랜만인 거 같아요.”

“……그게 무슨.”

“제가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친구도 없고. 아, 그래도 일하는 분들과는 잘 지냅니다.”

주변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만 바글거릴 거 같은 남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더더욱 의아함만 깊어져 가는데, 현재가 잠시 콧잔등을 긁적이더니 컵으로 손을 뻗어 물을 마셨다. 긴장이 서린 표정과 행동이 어색했다. 몇 번 손가락을 얽다가 편안한 자세를 찾았는지 현재가 잠시 숨을 고르던 입술을 다시 열었다.

“어릴 적에는 갑자기 달려드는 사람을 막느라 따로 경호원을 고용하기도 했었어요.”

“예? 달려들어요? 그건 범죄…….”

“지금은 키도 꽤 크고 건강하지만 어릴 땐 많이 왜소했거든요. 그런데 집안은 대부업을 하니까 부모님 주변에 적이 많았었죠. 학교도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친구 없이 다녔어요. 어딘가 끌려갈 뻔한 뒤로 등하교 때는 늘 부모님께서 보낸 사람들이랑 같이했고요.”

“아…… 세상에.”

확신했다. 그놈들은 적이 아니라 아마 몹쓸 변태들일 것이다. 재선은 현재의 설명에서 그의 과거가 보이는 듯했다. 이런 얼굴로 어릴 적에 작고 왜소했다면 쓸데없는 질투와 비난을 막을 수 없었을 거다.

운동하는 애들끼리도 조금만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시샘이 말도 못 했다.

차라리 몸으로 부대끼면서 싸우기도 하고 오해도 풀면 잘 지낼 수 있는 계기라도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아예 곁에서 눈치만 보면서 오해가 쌓이면 서로 피하게 되는 거다. 진실은 둘 다 알지도 못하고. 아마 지현재의 주변은 계속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겠지. 그러니 저 사람의 입에서 친구가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작고 여린 어린이 현재가 혼자 꿋꿋하게 지냈을 시간이 상상이 아닌 사실인 듯 재선의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예쁜 사람이 친구가 없다는 건 좀 슬펐다. 자신처럼 운동이나 알바를 하느라 시간이나 여건이 없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래도 학창 시절 친구 한둘은 있지 않나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남자든 여자든 친구라고 믿었던 애들이 달려들어서…….”

……그래, 너무 예쁜 것도 문제긴 문제다. 어쩐지 친구였다던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은 자신이 더 쓰레기같이 느껴졌다. 재선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이러니까 자신이 입주해서 일하는 건 더더욱 안 된다. 험한 일까지 겪은 사람인데 전문가가 옆에 있어야지. 자신이 아무리 예쁜 얼굴에 약하고 눈앞의 남자가 매우 안타까워도 아닌 건 아니었다.

“그,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렇죠……. 도대체 제 어딜 보고 그러는 건지.”

어디라고 굳이 꼽자면 그냥 전부 다인데. 전부 다라는 걸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 주기도 뭐하고.

언제 어디서든 현재의 곁에 사람들이 꼬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런 얼굴이 실재한다는 것에 자신도 보자마자 놀라지 않았나. 하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지나친 호의가 피곤하지 않을 리도 없었다. 문득문득 보이는 현재의 쓸쓸한 표정이 애처로워서 재선은 자신의 허벅지를 괜히 꽉 꼬집었다.

“성인이 된 뒤에는 그래도 좀 간섭을 덜하나 했는데 이 일을 하다 보니까 오히려 더 잘 아셔서 그런지 옆에 꼭 사람을 둬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다 큰 남자가 경호원을 두자니 좀, 그렇잖아요…….”

“……완전 필요할, 아니. 이해합니다.”

하나도 이해가 안 됐지만 어쩐지 이해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재선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현재가 약간 부럽기도 했다. 인간이 아무리 의학의 힘을 빌리고 자본을 투자한다고 해도 절대 이룰 수 없는 수준의 저 얼굴이 부러운 게 아니라, 가족들의 끊임없는 관심이. 그런 사람들이 곁에 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가족들이 그러는 게 당연하고 현재도 가족의 투정을 들어주고 싶어 한다는 게.

어쩐지 마음이 간질거렸다. 같이 살던 서영원도 재선이 늦은 귀가를 하거나 연락이 없음에 이런 걱정을 하진 않았었다.

물론 부러움은 잠깐일 뿐이었다. 지금 갑은 지현재였고, 저는 빚을 진 을이었다. 한가하게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 따위 없었다.

“가정부라고 말은 했지만 경호원도 겸하는 거고, 가족들은 회사에 있는 시간 외에도 누군가 저를 케어 했으면 싶은 거죠.”

“……혹시, 최근까지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집에도 들어오고 그랬던 겁니까?”

너무 많이 갔나 싶었지만 사람에게 집착해서 확 돌아 버린 사람들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짓을 저지른다는 건 뉴스에도 자주 나오니까. 연예인들도 그런 놈들 때문에 고생한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고. 눈앞에 있는 지현재라는 남자는 그런 나쁜 짓을 하는 인간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좀, 남달라 보였다.

“실은, 얼마 전에도 고용했던 분을 좀 안 좋게 해고해서…….”

“입주 가정부를요?”

“네. 집안일도 돌봐 주실 겸, 비서도 겸하고 계시던 분인데. 아무 생각 없이 경력으로만 고용했다가 제가 먹는 음식에 약물이 들어 있어서 밤에 응급실엘 다녀와야…….”

“예에……?”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사건에 재선이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런 재선의 목소리에 말하던 현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저런 표정도 예쁘시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약물이라니. 도대체 그런 짓을 왜 하는 거지?

“별일은 아니었어요. 그냥 수면제 같은 거였고.”

“아니 그게 어떻게 별일이 아닙니까? 위험하잖아요.”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어서요……. 그래서 좀 든든한 사람으로 구하고 싶네요.”

그게 재선, 자신이라는 말을 하려는 거 같다면 너무 자의식 과잉인 걸까. 재선은 어쩐지 또 속이 홧홧해지는 기분이 들어 가슴을 슬슬 문지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는 남자가 더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 위험한 사람이 자신이 되는 장면을 조금 상상해 버린 재선은 또 황급히 고개를 털었다.

아무리 그래도 입주는 위험하다.

처지가 딱해 보이는 저를 위해 해 준 제안인 건 알았다. 물론 현재도 급했겠지. 하지만 자신일 필요는 없었다. 돈이 아쉽지 않은 사람인데 입주 경호원 구하는 게 일이겠는가.

하지만 남자는 오늘 처음 본 재선의 뭘 좋게 봤는지 도무지 굽힐 줄을 몰랐다. 재선에게 꽂힌 현재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노골적인 시선은 재선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꼭 갖고 싶은 장난감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 같은, 애착 인형을 마주한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본인이 아무리 둔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사람이었어도 알 수밖에 없을 거다. 너무 티가 나게 꼬드기고 있으니까.

게이라고 모든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물론 제안해 주는 일을 정말로 한다고 해서 재선이 그 스토커들처럼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입주는 좀. 대표님께서도 모르는 사람을 들이면 불편하실 텐데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차라리 제가 회사 일을 돕거나 출퇴근에만 경호를 하거나.”

현관문을 열자마자 눈에 띈 얼굴에 꿈을 꾸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험은 흔한 게 아니다. 게다가 현재의 곤란한 경험을 듣고 더더욱 권하는 일을 하는 게 꺼려졌다. 게이라서 날 선 시선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성향 때문에 편견으로 대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사실이 밝혀질까 봐 겁나고 무서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사람과 살게 된다? 그게 더 무서웠다. 평범하고 소박한 자신의 이성으로 오래 버티기 어려운 화사하고 아름다운 외모가 훨씬 겁났다.

동시에 5천만 원도 무서웠다. 가정부라는 일의 평균 급여는 몰랐지만 ‘그 정도로 큰돈을 버는 업무인가?’ 하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제시받는 입장에서도 좀 껄끄러웠다. 차라리 이 집에 버티고 있으면서 서영원을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일단 돌아올 때까지 일을 하면서 조금씩 갚고 경찰에 신고라도 해서 서영원을 찾아보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저희 회사는 채무 기록이 있는 분을 고용하진 않고 있어서……. 물론 재선 씨는 채무자는 아니시지만 그분이 워낙 연체를 심하게 하시고 지금 행방도 알 수 없는 상태니까요.”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이 집을 떠나면 더 안 되는 게 아닐까요? 갑자기 이곳에 영원이가 올 가능성도 있는 거고.”

Rrrrr.

그때 거실 충전기에 꼽아 둔 재선의 휴대폰이 울렸다. 말을 하려다 멈춘 재선이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가지러 갔다. 화면에 뜬 모르는 번호에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이재선입니다.”

[아이고, 이제 전화를 받네. 305호 총각 맞지? 여기 부동산인데 집 언제 비워 주나 하고.]

“예……?”

부동산에서 자신에게 전화가 올 일이 뭐가 있나 싶었다. 아직 계약 만기까지는 몇 개월이나 더 남아 있었다.

[왜, 같이 살던 총각이 빨리 처분한다고 해서 아주 급하게 처리해 줬잖아. 저번 주에 집이 나가서 다행이지 뭐야. 다음 주면 새로 오는 세입자가 이사 온다고 알려 줬는데, 얘기 못 들었어? 그럼 이번 주에 언제 나가? 도배 새로 해야 하는데.]

“예에……?”

[날짜 알려 줘야 우리도 도배를 부르니까는. 그래서 그날 다 계산해서 미리 돈도 빼 줬잖아.]

“잠, 잠시 만요. 잠깐, 그…… 월세랑 보증금 말인가요?”

아니어야 했다. 자신을 이 정도로 바닥까지 내몰면. 서영원이 그래서는 안 됐다.

[그래, 그 같이 사는 잘 웃는 총각이 꼼꼼히 챙기더라고. 이번 달 월세는 집주인이 고맙다고 안 받는다고 그랬고. 그래서 보증금만 먼저 깔끔하게 처리해 줬지. 305호 총각이 이사는 나간다기에 연락했어.]

집까지 전부 처분했던 거였다. 정말 계획적으로 모두 다 싹 들고 사라졌다. 도대체 왜. 고작해야 이천짜리 보증금까지 왜.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빨리 연락 줘야 해. 요즘 도배가 잘 안 마르더라고.]

전화기를 통해 나오는 음성에 고개만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들고 힘없이 식탁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현재를 마주했다. 어쩐지 아까보다도 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는 게…….

“통화, 들으셨나요…….”

비좁은 집에서는 어디서 무슨 통화를 해도 참 잘 들렸다.

“……네, 조금.”

그래도 다 들리지는 않았으면 했다. 오늘 처음 보는 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비참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 월세가 좀 밀려서.”

“부동산에 집을 내놓으셨다고…….”

“……아마 금방 집은 구할 수 있을.”

“보증금이랑 다 이미 가져갔다고 아까…….”

“…….”

조금 들은 게 아니잖아.

고개를 푹 숙인 재선의 입에서 막을 수 없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혹시, 일하면서 주의할 점이 뭐가 있을까요…….”

더 이상은 팔릴 낯도 없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