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타고나길 성실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재선이었다.
하지만 성실함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았다. 성실하게 운동을 했지만 재선의 관절엔 성실함이 독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운동을 포기하고 성실하게 입시를 봤지만 공부머리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은 아니라는 결론만 마주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했다. 부모님이 각자의 이혼과 재혼으로 재선에게 관심이 없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재선!”
“네, 부르셨습니까.”
“이거, 저번에 디자인 발주 넣었어?”
“부장님께서 고르신 거랑 업체랑 안 맞는다고 미루셨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지긴 했다. 꾸역꾸역 살다 보니 회사도 꾸역꾸역 다니고 있었다. 당장 오전에 자신이 지시한 일을 오후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부장 아래서 일을 하고 있어도.
“이게 딱인데……. 알겠어, 다른 시안 오면 넘기고.”
눈이 발에 달렸는지 뒤통수에 달렸는지 의심되는 안목의 상사가 자신의 눈까지 고통스럽게 해도.
“……네.”
입사 후 4년 동안 연봉은 동결이었다. 간신히 100만 원 올려 주면서 대리 달았으니 더 열심히 하라고 유세를 부려도, 대리라는 직함의 명함은 벌써 2년째 나오지도 않았고 아직 아무도 자신을 대리라고 부르지 않는 직장이라도. 꾸역꾸역 다니면 월급이라도 나왔고 꾸역꾸역 오래 버틴 값인지 요샌 그래도 주말에는 편히 쉴 수 있었다.
재선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도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운동을 하면서부터는 더 그랬다. 재선이 하는 유도는 혼자서 하는 경기였고 그만큼 시간이 많이 필요했으며 학업과 박자가 맞지 않았다. 부모는 무관심했고 감독과 코치는 수시로 닦달했기에 매년 알아서 몸을 키우기 급급했던 때였다. 허울뿐인 부모가 용돈을 생활비만큼 잔뜩 주기는 했지만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사고가 있었다.
허공에서 상대와 같이 떨어지며 왼쪽 무릎이 잘못됐다. 병원에서 운동을 포기해야 한다는 진단 결과를 들었다. 그런데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무릎이 상대의 몸에 깔리는 순간 예감했기 때문이다. 연습 게임 도중 벌어진 일이라 원망할 곳도 없었다. 이미 자식의 곁에 없었던 사람들은 부모의 동의가 필요한 수술이라는 말에 한 번 왔다 갔을 뿐이었다. 그래서 돈을 더 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큰돈을 쓰지 않아 통장에 모여 있던 용돈으로 다 처리했다. 사는 데 지장은 없었으니까.
목발보다는 휠체어가 나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 가지고 있는 돈을 헤아리며 목발을 선택했을 때도, 퇴원 후에 돌아간 학교에서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 곤란을 겪었을 때도. 더 이상은 집에 돌아오지도 않는 부모에게 성인이니 알아서 살라는 통보를 들은 게 졸업식 전날이었어도.
어떻게든 살아지긴 했다.
지금이 버텨지는 건 그래서였다. 더는 주변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인생이라 느꼈던 날에 비하면 몸은 편했다. 잦은 야근과 자신에게 덮어씌우는 업무에 가끔 속이 쓰리더라도 체력은 자신 있었고 무엇보다 이뤄야 하는 작은 목표도 있었다. 그 미래를 꿈꾸게 하는 사람이 재선의 곁에 있었다.
「♡ : 오늘 언제 들어와? 11:47」
「♡ : 야근해? 11:47」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알림을 누르니 곧장 도착한 메시지가 보였다. 떠오르는 입가를 애써 누르던 재선은 서둘러 답장을 했다. 이미 생활화되어 있는 야근이었지만 매번 한 번씩 물어 오는 연인의 질문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다.
「응, 야근이래.」
「매번 늦어서 미안해. 11:59」
익숙하지 않은 일에 여기저기 치이며 그제야 좀 회사에 적응했을 무렵 서영원을 만났다.
이태원의 한 바에서 우연히 만난 그 사람은 지금 재선의 연인이다. 재선은 자신의 성벽이 남자에게 국한되어 있다는 걸 첫 몽정과 동시에 알았다. 하지만 대학 졸업 직전까지 직접 벌어 학비를 조달하는 여유 없는 생활로는 누군가 만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볼 수가 없었다. 쭉 혼자인 생활을 이어 갔다. 그렇다고 답답하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 인터넷에서 도시 전설처럼 전해지던 이태원 이야기를 떠올리곤 혼자 술집을 찾아갔다. 처음 들어간 곳이 나름 조용해서 두려움이 조금씩 가셨다.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며 구경만 하다가 지금의 연인을 만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에 한 번쯤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이었다. 스스로가 게이라는 걸 알았던 순간부터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 제 처지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나 있을까 싶었던 마음의 벽을 허물어 준 사람이다. 귀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 : 무리하지 말고 힘내! 12:54」
그래서였다. 한순간도 이 사람을 의심하지 않은 건. 옆에서 자신을 지탱해 주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했으니까. 같이 지내는 집을 서서히 키워 가야지 하는 꿈이 있었으니까. 이 모든 일이 전부 재선 자신만의 허황된 꿈이었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평소와 똑같은 월요일이었다. 아니, 아주 조금 운이 없었던 것도 같다.
다른 회사들보다 몇 분이라도 빨리 시작해야 더 많은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는 사장의 지론에 따라 8시 30분에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정해진 출근 시간은 9시여도 그랬다. 그러려면 집에서 30분이 아니라 1시간 정도 더 일찍 나와야 지각을 면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두르는 와중이었다. 급하게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다가 온전하지 못한 무릎이 기어이 삐거덕거렸다. 아침부터 거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까지 시큰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병원 신세를 면한 게 어디냐 생각하며 출근을 서둘렀다.
꾸역꾸역 죽지 못해 다니는 직장이지만 없어서 아쉬운 건 재선이다. 다달이 들어오는 정기 수입원이 사라진다는 가정만으로도 두려움이 앞서곤 하는 건 사회인이면 겪는 일상의 고통이다. 지금도 풍족한 생활을 하진 않았지만 학부 때보단 나아졌다. 아르바이트를 번갈아 바꿔 뛰면서 폐기 찍힌 김밥이나 빵으로 끼니를 때우던 때와 달리, 지금은 무엇보다 목표가 있었으니까.
사람들 틈바구니에 꽉꽉 끼인 지하철을 견디고 간신히 회사에 도착했는데 건물 입구에서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 재선이 다니는 회사는 건물의 두 개 층 정도를 사용하고 있었다. 전체 직원은 10명도 되지 않았으나 워낙 작은 작은 빌딩이라 한 층을 사무실로 쓰고 다른 한 층은 창고였다. 재고나 쓰지 않는 물품을 적재해 놓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뭐야, 여기 직원이야?”
“예?”
“당신네 사장 어디 있어! 사장 나오라 그래!”
“그게 무슨…….”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대여섯이 눈앞으로 쏟아졌다. 그 중간에 이미 넝마가 된 김 주임이 보였다. 사람들을 헤치고 김 주임을 끌고 건물 복도 한편으로 몸을 피했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은 씩씩거리면서 재선과 재선의 뒤에 숨은 김 주임을 흘금거렸다. 당연히 이 회사 직원이라는 걸 알아봤지만 섣불리 다가오진 못하는 게 억울해 보였다.
“비켜, 비키라고! 여기 사장이 얼마나 해 처먹었는지 알아?”
“벌써 5개월이 넘어간다고 그러더니 아예 잠수를 타?”
“이게, 이게 무슨 말이에요. 김 주임님?”
더 당황해서는 김 주임의 어깨를 잡아 흔드는 재선의 표정이 당황으로 시시각각 변했다. 김 주임은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재선이 아무리 다그쳐도 묵묵부답인 걸 지켜보던 사람들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는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더니 한 층 더 위에 있는 사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멀어지는 무리를 힐금 보고 그제야 한숨을 푹 쉬던 김 주임이 거세게 몸을 비틀어 재선의 손을 털어 냈다.
“김 주임님……?”
“아으 씨,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재선 씨는 뭐 아는 거 없어요?”
“아는 거라뇨…….”
“사무실이고 창고고 아무것도 없어요. 진짜 주말 동안 아예 다 싸 짊어지고 나른 거 같아요. 여기서 오래 일했으면서 정말 아는 거 없어요?”
다른 곳에서 이직해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김 주임이 재선을 추궁했다. 하지만 재선으로선 지금 이 상황이 더 어이가 없었다. 회사가, 직장이 사라지다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김 주임과 재선을 다그치던 사람들은 이미 건질 게 없는 곳이라 여기고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없어…….”
사무실에는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갖은 짜증을 풀던 부장의 자리도, 가끔 고장 나서 말썽이던 복사기도, 심지어 자신의 자리까지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휑한 사무실 바닥에는 드문드문 채 치우지 못한 쓰레기들만 보일 뿐이었다.
정신없이 찾아낸 회사 사람들의 연락처로 모조리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누구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사장의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주말에도 혹시 돌발 업무가 있을 수 있으니 연락은 취할 수 있게 해야 진정한 사회인이라던 사람이었는데.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망연한 기분으로 사무실을 돌던 재선의 눈에 창가에 버려진 화분이 보였다. 입사했을 때 사무실 안에 자신의 자리가 생겼다는 게 기분이 좋아서 첫 월급으로 놓아뒀던 스투키였다. 내내 돌보던 일도 재선의 몫이었지만 거두는 일도 재선의 몫이 될 줄은 몰랐다. 모든 집기를 다 정리해 빼 가면서도 이 녀석은 버리고 갔다는 게 꼭 자신의 처지와 같아 보여 화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봤으니까 데리고 가야겠지. 길게 숨을 내쉬곤 결국 건물을 나섰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볕이 따가운 월요일 낮, 성실한 이재선은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버렸다.
그 뒤에 재선이 바로 집으로 돌아갔냐고 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같이 지내고 있는 영원에게 자신이 직장을 잃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영원은 최근에 새로 시작한 일이 궤도에 올라가고 있다면서 기뻐했었다. 신나던 표정으로 말하던 영원에게 이런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가 않았다. 당장 회사를 잃었다고 해서 재선에게 대놓고 실망하는 연인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자존심의 문제였다.
가족이 없는 건 비슷했지만 밝고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며 때때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서영원과 회사와 집, 그리고 연인만 알고 사는 이재선은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화려한 걸 좋아하고 애교 많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스타일인 영원이 어디서나 즐겁게 지내는 부류라면 저는 어딜 가든 적응하느라 숨 가쁘고 요령이 없어 무뚝뚝한 인상이나 줄까 걱정하는…….
소위 말하는 아싸였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런데 직장까지 잘못된 걸 영원이 알게 하기는 많이 꺼려졌다.
어영부영 작은 화분을 손에 든 채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해가 다 지고 난 다음에서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평소에는 이 길로 퇴근을 하며 들어가는 길이라 발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정반대였다. 그래도 안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바닥에 쩍쩍 들러붙는 것만 같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 앞에 서서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키패드를 눌러 현관을 열었다.
불이 꺼진 집 안으로 들어서며 신발을 벗으려는데 발에 무언가가 툭 걸렸다.
“……뭐지.”
뒤늦게 재선을 감지한 센서 등이 현관을 밝히자 발에 채인 게 신발장 위에 붙여 둔 인형이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영원과 같이 있을 때 재미삼아 뽑았던 거였다. 왜 떨어져 있지. 좋지 않은 예감에 손을 더듬어 마저 불을 켰다.
“이게, 무슨…….”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집에 숨이 턱 막혔다. 비좁은 거실은 물건들이 뒹굴어 다녔고 서랍이라는 서랍은 다 열려 있었다. 식탁에 간신히 화분을 놓고 조심스럽게 둘러본 방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옷장과 침대 옆 협탁은 물론이고 다른 방에 있던 책상과 책장은 마구잡이로 뒤섞여 바닥과 가구를 구분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꼭.
“도, 도둑…….”
다급한 손으로 112에 전화를 걸려던 재선의 손이 멈췄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든 탓이다. 헤벌어져 있는 옷장 문을 다시 열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헤쳤다. 침대 옆 협탁도 다시 한 번 뒤졌다.
“……사진이 없어.”
이미 물건을 쏟아 놓느라 엉망인 방과 거실도 다시 살폈다. 이상했다. 평소 보이던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이상했던 건 옷이었다. 크지 않은 옷장이었지만 자신의 옷은 적었다. 정장과 집에서 입을 편한 옷 몇 벌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빈약한 물건들이었다. 그런 재선을 대신해 옷장을 다 채운 건 영원이었다. 하지만 집 안의 모든 물건이 헤집어져 있는 지금, 어디에도 영원의 옷이 보이지 않았다. 책상이나 협탁, 서랍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살면서 서서히 늘어난 물건들이라 전부 기억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명백히 자신의 물건이 아닌 것들은 기억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매일 생활하는 공간에서 갑자기 한 사람의 물건만 싹 빠져 있는데 위화감이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건 딱 한 장 있는 같이 찍은 사진이 안 보인다는 거였다.
꼭, 부모님들이 헤어진다고 하던 그때처럼.
이성을 잃은 재선은 집을 마구잡이로 뒤졌다. 이미 엉망인 집이 더 난장판이 될 지경이어도.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함께 집을 옮기려고 모아 둔 적금 통장 몇 개와 저금통까지 없어진 걸 알았다. 심지어는 몇 년간 생일이나 기념일마다 재선이 영원에게 사 줬던 신발과 액세서리, 시계도 없어져 있었다. 형편이 이러니 고가의 선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걸치는 것보다는 몇 곱절 좋은 걸로 장만하려 애쓰던 선물들이었다.
도둑이 든 게 아니라…….
서영원이 그 모든 걸 가지고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어렴풋이 날이 밝고 있었다.
***
며칠이나 지난 걸까.
허공에 부옇게 떠오른 먼지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거실 한구석에 드러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키자 잔뜩 굳어 있던 근육들이 여기저기 쑤시기까지 했다. 직장도 구해야 하고 이 일을 추슬러야 하는데 아무런 의욕이 들지 않았다. 언제 식사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숨만 쉬고 집을 뒤지다 기운이 소진되면 물건들을 뒤지던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불쑥 치밀어 오르는 요의를 참지 못한 재선은 비틀비틀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얼굴 한번 볼만하네…….”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더니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거울로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허옇게 질려선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라 턱은 보이지도 않고 눈 아래는 거뭇하게 다크서클이 가라앉아 있는 게 꼭 죽다 깨어난 몰골이었다. 바깥에서 마주쳤다가는 10미터 밖으로 도망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얼굴.
매번 과거보단 지금이 낫다 자신하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려던 재선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닥친 인생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는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울 속 자신을 확인하자마자 이대로 살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면도부터 해야겠지. 샤워도 좀 하고. 입 속으로 해야 하는 일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시큰하긴 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으……. 언제 이걸 다 치우지.”
씻고 조금은 개운해져 욕실에서 나왔다. 그러나 바로 보이는 눈앞의 광경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일단 거실부터 조금씩 치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거실 바닥에 뒹구는 휴대폰을 들었다. 절망적이었던 새벽, 영원에게 통화 시도만 수십 수백 번 했는데 연결 음만 줄기차게 들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을 울리지 않았다. 전원 버튼을 눌러도 켜지지 않는 걸 보니 긴 시간 방치해 둔 탓에 이미 방전된 상태인 듯싶었다. 휴대폰을 다시 충전기에 꽂은 뒤 주변부터 살폈다. 막 씻고 나온 뒤라 하의만 챙겨 입은 재선이었지만 더워질 게 뻔해 그대로 정리를 시작했다. 수많은 물건들을 정리하며 청소까지 같이 하느라 움직임이 더뎠다.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됐던 걸까?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도 한동안 믿기지 않았다. 그런 본인이 답답하다 생각할까 봐 영원이 외출이나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심하게 묻지도 않았다. 누군가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영원의 곁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야 늘 있었다. 영원이 살던 집이 계약 기간이 끝난 김에 같이 살기 시작하고부터는 불안함은 줄었지만 그렇다고 제 주제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사를 위해 붓던 적금까지 들고 떠날 정도로 자신이 뭘 잘못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떤 기미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긴 작정하고 모든 걸 다 가지고 나간 시점에서는 그런 추측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앞으로 당장 어떻게 생계를 꾸려 나가느냐 하는 거였다.
천천히 물건을 치우고 쓰레기들을 정리하며 재선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직 생활비가 좀 남아 있으니 며칠은 버틸 수 있다지만 이미 들고 나른 적금도 은행에 가서 알아봐야 하는 걸까…….
딩동, 딩동.
그때 누군가 벨을 눌렀다. 소리에 화들짝 놀란 재선이 밖을 경계했다. 그간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도 방문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갑자기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 집을 찾을 일이 없었다. 비디오폰이 설치되어 있는 집이 아니라고 해서 불안했던 적은 없는데 닥치고 보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영원이라면 분명 그냥 들어왔겠지. 벨이 몇 차례인가 더 울리는 동안 대꾸도 못 한 재선이 더 놀란 건 그다음이었다.
“계십니까? 안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서영원 씨?”
영원을 찾는다고? 이 시간에?
이제는 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영원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후다닥 나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아……. 이제 나오셨네.”
열리는 문틈 사이로 뭐라도 보여야 하는데 흔치 앉게 앞이 막혔다. 재선이 살짝 고개를 들자 처음 보는 얼굴이 씩 웃으며 마주 눈을 맞춰 왔다. ……사람의 얼굴 뒤로 흰 빛이 퍼져 나갔다. 꿈인가 생시인가. 지금 자신이 며칠째 밖을 못 봐서 살짝 맛이 가긴 했는데 설마 나 지금 죽은 건가. 죽으면 헛것으로 천사도 볼 수 있나. 그럴 리가.
뭐지, 이 미친 듯이 예쁘고 빛나는 얼굴은.
“누, 누구십니까?”
“혹시, 서영원 씨?”
남자가 손가락으로 서슴없이 재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질문이 바로 귀로 들어오지 않은 건 재선의 탓이 아니었다. 남자는 재킷 안에 눈이 아플 정도의 핑크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외모는 그보다 더 튀었다. 한쪽 감각이 지나치게 자극되면 다른 쪽 자극이 둔해진다던가. 지나친 시각적 자극 때문에 청각이 무뎌진 듯 남자의 질문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피부는 어지간한 연예인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뽀얬고, 눈매는 남자가 하는 말이 전부 한국어라는 게 괜한 위화감이 들 정도로 깊었다. 그밖에도 코는 이마에서 코끝까지 날카롭게 날이 섰고, 자꾸 영문 모를 질문을 하는 입술은 너무 빨갛고 매끈했다.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이목구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모든 게 자그마한 얼굴 안에 다 들어가 있다는 점이…….
아니, 집 앞에서 서영원을 찾고 있다는 게 가장 이상했다.
“저는, 아닙니다. 혹시 영원이를 아시는…….”
“아하, 그럼 이재선 씨?”
정신없이 남자의 얼굴을 보던 재선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답을 하자마자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나온 딱 소리가 경쾌했다. 바로 다시 재선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은 깨끗하고 가지런했다. 고생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손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저를 어떻게…….”
“이런,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좀 나눠도 될까요?”
얼떨결에 현관에서 물러난 재선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남자를 식탁으로 안내한 뒤에야 자신이 생판 모르는 타인을 집 안에 들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다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정말 누구신지…….”
너무 늦은 질문이라 생각은 했지만 별문제는 없을 듯싶었다. 훔쳐 갈 거라곤 하나 없는 집구석인 데다, 남자에게서 이런 집에서 무언가 긁어갈 정도로 궁한 사람은 아니라는 분위기가 줄줄 흘러서였다.
“참,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재킷 안을 뒤적이던 남자가 곧 재선의 앞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얼결에 받아 든 재선이 남자와 명함을 번갈아 바라보며 새겨진 글씨를 읽었다.
「골든캐피탈 서남부 대표 지현재」
“……캐피탈이요?”
“네, 제가 지현재.”
이런 사람이…… 대표라고? 게다가 캐피탈이면 대부업체? 거기까지 생각하던 재선은 자신의 집에 대부업체 대표가 올 일이 뭐가 있나 의아했다. 게다가 처음에는 분명 서영원을 찾지 않았나. 하지만 대표라잖아.
“……어려 보이는데.”
“실제로도 어립니다.”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냉큼 대답하는 남자를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괜히 민망해서 ‘아…… 네.’ 하고 중얼거리다 이어 물었다.
“그런데 왜 저희 집에 오신 건지…….”
“추심 절차 때문인데 추심이라고 혹시 알고 계신가요?”
“추심……이요?”
“네, 돈을 갚지 않는 경우 강제로 받아 오는 권리를 이야기하는 건……데 말이죠.”
재선은 서른이 넘도록 대출과는 가까이하지도 않던 재선이었다. 재선은 귀에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들리자 그저 눈을 끔벅였다.
어쩐지 헐벗은 기분에 팔을 긁적이다가 현재의 시선이 얼굴이 아닌 좀 더 아래에 머물러 있는 걸 보곤 따라서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자신이 상의를 입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샤워 후 청소를 마무리하느라 맨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 바…… 방금 청소를 좀 하느라고 자, 잠시 만요. 옷 좀.”
“……아니, 그건 신경 안 쓰셔도.”
현재의 말을 채 듣지 못하고 재선은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웃통 좀 까고 있는 일이야 같은 남자끼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법한 일이었지만 상대의 저 예쁘장한 얼굴이 문제였다. 남자가 집에 들어오고 난 뒤로부터는 나는 듯한 은근히 좋은 냄새도 그렇고…….
얄팍하긴 하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아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다급히 움직이는 통에 얇은 천 아래에서 가슴이 들썩였다.
재선이 옷을 입고 나오는 동안 식탁에 가만히 앉아 집 안을 살피던 남자가 다시 눈을 맞춰 온다.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에 재선은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집이 엄청 깨끗하네요.”
아마 물건들이 대부분 사라져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걸 테지만. 집 안을 둘러보면서 웃는 현재의 얼굴에 구차한 설명까지는 하지 않은 재선이 허둥지둥 냉장고에서 음료를 찾았다.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물 한 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의 대답에 컵에 물을 따라 건네자 긴 손이 컵을 감아 왔다. 움직이는 대로 꼭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 진짜 세상에 있긴 하구나.
연예인을 처음 본 사람이 호들갑 떠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평소에 보던 풍경과 전혀 다른 세상을 보는 기분이랄까. 물을 조금 마신 뒤 컵을 내려놓은 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곧 재선을 쳐다보며 설명을 이었다.
“일단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추심 업무 진행차 방문했습니다. 채무 변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요.”
“그런데 저는 돈을 빌린 적이 없는데요…….”
문제는 그거였다. 재선의 기억에 자신은 대출을 받은 적이 전혀 없었다. 회사를 다니기 전부터도 대출에는 손을 댄 적이 없었다.
“혹시 서영원 씨랑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영원이요?”
재산 가지고 도망간 애인이요. ……라는 말은 다행히 나오지 않았지만. 그냥, 뭐. 얼버무리며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걸 어떻게 생각했는지 현재의 낯이 흐려졌다. 미안한 기색이 어리는 얼굴에 어쩐지 재선은 제가 큰 잘못을 한 기분이 들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손끝만 만지작거리던 와중 곧 그가 그의 얼굴만큼 친절한 설명을 이었다.
“서영원 씨의 대출에 이재선 씨가 채무 보증인으로 되어 계셔서 서영원 씨가 상환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이재선 씨가 상환의 의무를 가지게 되시는 건데…….”
“네? 채무 보증…… 무슨 의무요……?”
“간단하게 말해서 서영원 씨 빚을 이재선 씨께서 갚아야 한다는 거죠.”
“네에?”
“여기, 서류 기억하시는지…….”
식탁 위로 종이 여러 장이 펼쳐졌다. 쉽게 알 수 없는 계약 내용과 더불어 맨 마지막 즈음에 있는 인적 사항과 이름이 재선의 눈에 들어왔다. 서영원의 연락처와 이름이 적혀 있고 인적 사항에 동거인이라는 관계 기재와 더불어 재선의 주소, 연락처, 이름. 그리고 서명까지.
-진짜 고마워, 재선 씨. 자기가 나 믿어 줘서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
-……내가 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지.
-이번에 일이 잘 풀리면 우리 좋은 집으로 이사 갈 때 내가 더 많이 보탤 수 있지 않을까?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
자금이 부족해서 급하게 빌려야 하는 거고 몇 개월 안에 바로 조치를 취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데 워낙 혼자다 보니 보증을 받을 곳이 없어서 곤란하다고. 그 말에 도움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울적해 보이는 얼굴에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더해져 사인해야 하는 란에 서슴없이 전부 사인을 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게 그럼…….”
“예, 상환을 조금이라도 하셨으면 조금 더 기다릴 수가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상환을 하지 않으셔서요. 기록을 보니까 보증인에게 연락만 피해 달라고 기다려 달라 하셔서 기다린 거로 압니다. 그러다 아예 서영원 씨 연락이 끊겨서 보증인인 이재선 씨에게도 연락드렸지만 연결이 불가능했다고 하더라고요.”
“아……. 제가 요 며칠 휴대폰이 꺼져 있었을 겁니다.”
“네, 무슨 사정이 있으셨겠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서류를 읽어 봐도 이 사람의 설명이 맞았다. 이 채무 무슨 서류에 서명한 자신은 이제 앞으로 서영원의 채무까지 갚아야 하는 처지였다. 서영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더더욱.
“……오천만 원.”
“대출 관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일시 상환 금액은 그보다 더 큽니다. 더 늦어지면 이재선 씨에게도 신용 문제가 생기실 수 있고요. 문제가 가볍진 않아서요.”
빌린 금액을 보자마자 더더욱 아득해졌다. 자신은 평생 한 번도 쥐어 보지 못한 액수였다. 심지어 영원이 들고 나른 적금을 다 합쳐도 이 정도 금액은 되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래도 멀쩡히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았다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게다가 갚지 못할 경우에는 남자의 말처럼 신용에 문제가 생긴다. 대출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인 상식은 알았다. 당장 직장을 새로 구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대부업체에서 자신이 직장을 가서 돈을 벌 때까지 기다려 줄까? 무지한 분야더라도 지금 상황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정, 당장 상환이 어려우시면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요.”
“……뭐가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에 재선이 간신히 대답하며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이어지던 생각을 추슬렀다. 길게 숨을 내쉬고 나서 서류를 모아 정리하고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마쳤다. 그래, 적어도 해결을 위한 방법은 있겠지. 없지는 않겠지.
“대환이라고 대출을 한 번 더 받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현재까지 밀려 있는 이자와 연체 비용까지 포함해서 전체 금액으로 다시 산정하는 거죠. 대출 받을 수 있는 기준만 되신 다면요.”
“기준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다. 일단은 남자의 친절한 설명에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대환이면 자신이 회사를 새로 구해서 월급으로 꼬박꼬박 갚을 수 있었다.
“혹시 자가용은.”
“……없습니다.”
“따로 융자나 담보가 가능한 부동산이 있으시다거나…….”
“어…… 아뇨.”
대환 조건을 들으면 들을수록 재선은 궁지에 조금씩 몰리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거였구나. 점점 더 곤란해졌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고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 집은 자가신가요?”
“아뇨……. 월세인데요.”
“그럼 현재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직장에 재직 중이신가요?”
“……아, 그건. 얼마 전까지.”
드디어 기준에 맞는 이야기가 들렸다. 순간 기대를 품은 재선의 얼굴을 읽었는지 마주한 지현재가 난처한 듯 덧붙이는 말만 아니었어도.
“지금 시점에도 근무 중이셔야 하는데요.”
“……아니요.”
다시금 축 처지는 어깨가 무거웠다. 오천만 원. 아니 그보다 더 큰 금액이라고 했으니 조금의 이자만 더 붙어도 어마어마할 거다. 머리를 감싸며 웅크리는 재선의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나름대로 자신을 추스르며 잘 살아왔다 생각했다. 성실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있을 거라는 꿈도 꿨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뤄 줄 수 있는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 여겼는데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단 며칠 사이에.
-성인이니까 알아서 살아야지.
엄마는 차갑게 말하며 통장만 쥐여 준 채 그대로 집을 나갔다. 아버지란 작자는 자신이 없는 사이 짐을 정리해 연락도 없었다. 갓 입학할 대학교의 학비가 간당간당한 금액이 담긴 통장이 있어 그래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다른 생활비까진 여유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기숙사가 있어서 씻고 자는 일은 문제가 없었다.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졸업만 할 수 있으면 직장을 다니며 나아질 거라 믿었다.
-어떡하니, 그래도 넌 부모가 살아 계시니까 한 학기 정도는 양보하렴.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앞에 두고 한 모금도 마시질 못했다. 눈앞이 아득해졌었다. 마지막 학기 등록을 앞둔 때였다. 장학금에서 밀려 떨어진 건 성적 때문이 아니라 기준치 미달이었다. 농어촌자녀, 교육자자녀, 차상위계층, 유공자자녀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순위가 밀렸단다. 학과에서 장학 금액이 전체 축소되는 바람에 고학번들이 불리했다는 음성에는 걱정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 신입생으로 들어왔다던 학과장 아들이 1등을 했다던가.
-재선 씨가 양보 좀 해 줘. 이번에 회사가 좀 어려웠잖아.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연봉이 깎였다. 처음 입사하고 들은 설명에서 10% 금액이 덜어졌다. 그래도 알바를 하던 때보단 나아서 참았더니 그 후에는 때마다 회사의 힘든 시기와 자신의 연봉 협상 시기가 겹쳤다. 항의를 하기엔 금방금방 잘리고 빠지는 자리들이 자신의 자리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미련하게 버티다가 결국 회사가 사라졌다.
“이재선 씨.”
이름이 불린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바라본 얼굴이 아름다웠다. 그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뱉은 현실은 깜깜했지만.
그게 저 사람 탓은 아니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당장 갚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아니, 아닙니다.”
“그런데 원래…… 이런 일을 회사 대표가 하나요?”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흐르던 생각을 멈추려 아무렇게나 나온 질문이었다. 질문을 하고 보니 궁금해졌다. 재선이 알던 대표는 그냥 가끔 한 번씩 회사를 순회하며 직원들이 일을 지켜보는, 그러다가 수틀리면 잔혹한 지적도 서슴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끔 만나는 다른 회사 대표들도 그랬다.
“아, 그게. 원래는 안 하죠…….”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남자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 얼굴을 또 홀린 듯이 바라봤다. 하얗기만 하던 뺨이 살짝 붉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대답을 하려는지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재선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씩 웃는다. 그 표정에 재선은 속이 확 달아올랐다. 영문을 모를 기분에 당혹스러워져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헛기침을 했다.
“가족 사업이라. 대표라고 명함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작은 지부의 대표 직함일 뿐인 거죠. 일은 이거 저거 다 합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본사에서 단단히 당부한 것 중 하나가 추심 업무라……. 영업은 아무나 해도 괜찮은데 이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사원들이 곤란한 것 중 몇 개만 제가 하겠다고 한 거죠.”
“아…… 그러시구나. 그래도 직접 발로 뛰시다니 대단하시네요. 가만히 앉아 계실 것 같은데. 아니, 이건 나쁜 뜻은 아니고……. 아!”
무심코 흘러 나간 말을 허둥거리며 수습하려다 그만 입술을 씹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얼핏 쇠 맛이 났다. 기어이 피를 봤지 싶다. 그래도 방문까지 하면서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 보기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처럼 생겼어도. 눈짓만 해도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해결해 줄 얼굴이어도. 말로 뱉지는 않았어야 했는데.
“원래는 사무실에 앉아서 결재하고 다른 업무를 진행하는 편입니다.”
“네…….”
속으로 자책하는 재선의 눈앞에 어두운 색의 손수건이 쑥 내밀어졌다. 식탁이 좁긴 했지만 넉넉히 뻗어 입술 아래에 가져다 대는 손이 여유로웠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올리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상처를 꾹 눌러 주기까지 했다. 그런 현재의 뒤로 환한 빛이 보였다.
사무실 사람들은 좋겠네요. 매일 그 얼굴을 보다니.
다행히 이번에는 생각이 밖으로 흘러 나가지 않았다.
손수건을 받아 입술을 가만히 가리고 있자니 좋은 냄새가 코 안으로 흠뻑 들어왔다. 향수인가. 눈앞의 남자와 잘 어울리는 향이다.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지금 이재선 씨 상황으로는 대환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겠죠.”
자꾸만 옆으로 새던 생각이 현실로 끌려왔다.
대환은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