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선물
2월의 새벽은 고요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전혀 없었고, 멀리서 이름 모를 새 떼가 날아오르는 소리만 간혹 들려왔다. 하진은 녹지 않은 눈이 그대로 얼어붙은 빙판길을 조심조심 걸었다.
“후우우….”
숨을 길게 뱉을 때마다 입 주변으로 하얀 솜뭉치가 생겼다가 흐트러졌다. 하필이면 며칠째 한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겨울이 끝나가는데도 이런 강추위라니. 12년 전 오늘의 날씨를 검색해 봤을 때도 기온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진은 검푸르게 잠긴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드는 한낮을 선택하면 좀 덜 추웠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시간대라면 실제로 졸업식이 열릴 가능성이 있어서 이런 새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추워서 몸이 마구 떨리는 것만 제외하면 차라리 잘한 선택 같았다. 이렇게 길에 누구 하나 지나다니지 않을 시간이어야만, 오롯이 둘만의 재회 장면을 다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아, 하아.”
숨이 점점 가빠졌다. 코와 볼이 얼어 감각이 없는 와중에도 서둘러 걸었다. 길이 미끄러워 두어 번 넘어질 뻔한 끝에, 멀리서 익숙한 듯 낯선 학교 건물이 보였다.
차선오는, 아마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빨갛게 얼어붙은 얼굴로. 12년 전 그날처럼.
지난 기억을 다시 현실로 불러온 건 오롯이 하진 혼자 꾸린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과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지나가는 말로 차선오가 오랜 짝사랑의 역사를 읊어줄 때면, 하진은 그의 마음을 몰랐던 때가 아쉽고 미안해서 늘상 마음이 저렸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아픈 기억을 새로이 덮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졸업식이었다.
한 달 전부터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새벽에 차선오보다 먼저 일어나는 연습을 했고, 몰래 집에서 나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결국 결전의 날인 오늘, 하진은 캄캄한 새벽에 몰래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일부러 살을 에는 추위 속을 한참이나 배회하다가 차선오가 깨어날 시간쯤에 맞추어 문자를 보냈다.
오래전 그날과 똑같이, 학교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
학교 건물만 살짝 봤는데도 벌써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하진은 패딩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까지 빼고서 거의 달리듯 학교를 향해 나아갔다.
인적 없는 거리가 먼저 보이고, 그 너머로 굳게 닫힌 정문이 보였다. 차선오는 그 어둑어둑한 겨울 풍경의 가운데 서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리던 하진의 두 발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정신없이 나왔는지, 그는 집에서 입는 가벼운 옷차림에 얇은 외투만 겨우 걸친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오한이 들 정도로 추워 보였으나, 정작 차선오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도 저렇게 기다렸겠구나.
심장이 욱신거렸다. 하진은 더 망설이지 않고 달려갔다. 수십 걸음이 한 걸음처럼 짧게 느껴졌다.
“선오야!”
그림 같은 얼굴이 정확히 제 쪽을 돌아봤다. 그 움직임이 순간 슬로우 모션을 건 것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패딩 주머니에서 데워 놓은 핫팩을 서둘러 꺼내면서, 하진은 차선오의 앞까지 다가갔다.
“너….”
“나 왔어, 선오야.”
“…….”
“이제야, 이제야 이렇게 왔어.”
더 그럴듯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자꾸만 숨이 찼다. 몸 전체가 들썩였다. 그래도 하진은 계속 말했다.
“미안해. 하아, 내가 너무 늦었지?”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추운데….”
하진은 준비한 핫팩을 차선오의 차가운 두 손에 쥐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손목을 잡아 올리려는 순간, 몸이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아니야, 안 추워.”
생각보다 담담한 그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렸다. 하진은 자신을 세게 끌어안은 차선오의 단단한 등 위에라도 핫팩을 문질렀다. 그가 웃자 상체가 따라 흔들렸다.
“기다리면 올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하나도 안 추웠어.”
…이렇게 온몸이 얼었으면서.
그땐 어려서 이런 추위가 더 혹독했을 텐데. 하진은 코끝이 찡해져서 차선오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다행히 외투 안쪽은 조금 따뜻했다.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하진은 우스갯소리를 꺼냈다.
“일어나고 놀랐지? 나 또 어디 간 줄 알고….”
“조금. 솔직히… 내가 너 나가는 것도 모르고 잠이나 잔 게 어이없더라.”
“안 들키려고 너 몰래 연습했어. 한 달 전부터.”
“…그래도 걱정은 안 했어.”
너 이제 나 없이 못 사는 거 아니까. 금방 올 거 알고 기다렸어.
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변화 때문에, 차선오는 생각한 것보다 담담한 모양이었다. 응, 맞아. 하진이 활짝 웃으며 수긍했다.
“그래도… 이런 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평생 못 잊을 거야.”
두 사람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차게 언 입술이 이상한 모양으로 뒤틀려서, 그것 때문에 더 웃음이 나왔다.
“춥다. 이제 갈까?”
“잠깐만, 하진아.”
“응?”
“나도 준비한 거 있어.”
뭔데? 그렇게 묻기도 전에 그가 키스했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없어도 엄연히 바깥인데 어쩌려고 그러나 싶었다. 하진은 긴장을 풀지 못한 채로 어쩔 수 없이 주위를 의식하며 익숙하게 혀를 섞었다.
입속이 따뜻해서 좋았다. 금세 몸이 녹는 느낌이었다. 하진은 들뜬 마음으로 그에게 더 깊이 안겼다. 그래서 핫팩을 꼭 쥔 자신의 왼손에 뭐가 끼워지는 줄도 몰랐다.
“그거 하나 줘.”
입술이 떨어진 뒤, 차선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하진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그러다 핫팩 하나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게 아까부터 준다니까. 자, 주머니에 넣어.”
“그건 너 쓰고, 반대쪽.”
“이게 더 따뜻한데… 어?”
왼손을 앞으로 내민 하진은 그제야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란 시선이 차선오의 왼손으로 옮겨갔다.
“누구한테 반지 끼워주는 거 처음이라 좀 긴장했는데.”
“너 이거….”
“안 들키고 잘한 것 같네.”
어스름한 새벽인데도 정교하게 커팅된 다이아가 스스로 빛을 내듯 반짝거렸다.
“빼지 마, 알았지?”
진지하게 덧붙인 말에 정신없이 반지를 구경하던 하진이 확 고개를 쳐들었다.
“…혹시.”
하얀 얼굴은 혼란에 차 있었고, 덕분에 어딘가 얼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방금 빼지 말라는 말, 무슨 주문 같은 거야? 뭐라고 했지? 최면? 암시…? 나 그런 거 없어도 이제….”
“뭐?”
전혀 예상 못 한 질문에 차선오는 소리 내 웃고 말았다. 반지를 빼지 못하게 하는 암시라니. 곱씹을수록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리둥절해 보이는 하진의 손끝을 당겨 반지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 그런 걸로 해.”
한 몸처럼 겹쳐진 두 사람의 뒤로 해가 뜨기 시작했다. 긴 겨울의 어둠을 밝히는, 부드럽고 섬세한 빛이었다.
델리케이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