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6)

11.

하진은 일부러 저녁마다 거실 소파에서 알짱거렸다. 그럴 때면 차선오는 정말 그날의 일이 실수라고 믿게 만드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하진의 몸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잘 시간이 되어 손님방으로 도망친 하진은 혼자만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며칠째 몸 안에서 무언가 자글자글 끓었다. 시선과 목소리만으로는 절대 꺼뜨릴 수 없는 불씨가 안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하진을 달아오르게 했다.

불을 끄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입가에서 연신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번졌다. 그렇게 조금 버티자 곧 닫아둔 문 바깥이 조용해졌다. 침묵 속에서 욕망은 어떤 기폭제도 없이 스스로 새어 나왔다.

하진은 바지춤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속옷 위로 성기를 문지르는 손은 서툴고 어색했다. 사실 이런 자위는 보통 남자라면 누구나 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차선오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성적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하진으로서는 큰 변화이자 용기 있는 시도였다.

성기는 이미 반쯤 부풀어 있었다. 완전히 딱딱하지 않고 말캉거리던 기둥은, 만질수록 서서히 힘을 얻기 시작했다.

“흣… 아….”

하진은 숨죽여 성기를 주물럭거리면서 차선오의 것을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손으로 만질 때의 촉감. 제 입술 사이에 걸쳐 놓고 직접 흔들던 차선오의 커다란 손.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던 거친 숨소리. 뺨 아래서 물결치듯 흔들리던 허벅지 근육. 그 모든 게 너무….

“…읏…!”

적당히 꼿꼿하던 성기가 순식간에 아플 정도로 발기해 손바닥을 찔렀다. 두근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차선오의 오피스텔. 차선오가 내어준 손님방. 그가 주문했을 침대와 이불…. 그 위에서 이런 음탕한 행동을 하는 게 꼭 도둑질이라도 하는 기분이었지만, 도무지 멈출 수 없었다.

하진은 이불을 얼굴 위까지 끌어 올려 완전히 뒤집어썼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의식하면서 손끝을 세워 빳빳해진 기둥을 긁듯이 어루만지고,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가며 압박했다. 그 모든 행위가 쾌감을 주었다.

손등을 짓누르는 바지의 밴드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하진은 헐렁거리는 바지를 허벅지까지 끌어 내리고 속옷 밴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갇혀 있던 기둥이 수줍게 튕겨 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끝이 살짝 젖어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보니 다시금 차선오가 사정하던 순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입 안이 말랐다. 하진은 속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귀두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죄의식 때문인지 점점 흥분이 커졌다. 납작한 아랫배를 찌르는 귀두는 만지면 만질수록 뜨거워져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다. 한계가 정해진 것처럼, 단순히 거길 만지는 행동만으로는 안에 들끓는 욕구가 가시지 않았다.

어떡하지…. 하진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거추장스러운 속옷을 끌어 내렸다. 그리고 다시금 딱딱해진 성기를 힘주어 쳐올렸다. 오래 참다가 시도했으니 조금만 만지면 금방 사정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흐으, 읍….”

무언가 이상했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앞에 하진은 답답하고도 괴로운 숨을 터뜨렸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만지작대던 걸 이제는 아프도록 치대고 있었다. 점점 팔이 저렸다. 하진은 무릎을 세웠다. 허벅지쯤에 걸쳐진 바지와 속옷이 자연스럽게 종아리까지 흘러내렸다. 다리를 더 벌리고 슬쩍 아래를 확인하니 자세가 꽤나 민망했다. 시각적인 자극에 오히려 더 대담해진 건지, 휑하니 드러난 아래가 신경 쓰였다.

사실 처음부터 알았다. 해소되지 않는 열기는 분명 더 아래에 고여 있었다.

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애처롭게 떨렸다. 문지르고 싶은 부위가 있었다. 정확히 그게 어디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손을 내렸다.

떨리는 손가락이 성기를 지나 점점 아래로 향했다. 살짝 오목하고 촉촉한 부위가 만져졌다. 여긴가 싶어 더듬었더니 아니었다. 그보다 더 아래… 아무런 습기 없이 건조하지만 성기보다 더 뜨겁게 벌름거리는 구멍이, 마침내 손끝이 닿았다.

확실했다. 열기는 거기서부터 피어올랐다.

“하, 아아….”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의식해본 적 없는 부위였다. 아프지 않을까. 이렇게 만져도 되는 걸까. 암시로 인해 당연히 처음이라고 생각한 하진은 겁을 먹고 망설였다. 하지만 손가락이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대체할 수 없는 쾌감이 피어올랐다. 하진은 용기를 내어 검지 끝에 힘을 주었다. 주름 사이의 야트막한 틈을 문지르는 순간….

“흐, 앗…!”

허리와 골반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살갗이 쓸리도록 만지고 흔들어도 아프기만 하던 성기 끝에서, 무언가 축축한 물기가 울컥 흘러내렸다.

말도 안 돼….

그대로 사정해버린 하진은 깜짝 놀라 허벅지를 움츠렸다. 미끌거리는 게 닿았다. 겁이 나서 구멍에서 얼른 손을 떼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랫배에 거미줄처럼 쏟아진 액체는 분명 정액이 맞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다음 날까지 하진은 하루 종일 사정하던 순간만을 반복해 생각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업무 시간을 보내고, 차선오와 함께 퇴근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것까지는 똑같았다.

하지만 하진은 더 이상 소파에서 알짱거리지 않았다. 차선오는 꼭 무언가를 아는 사람처럼 빙긋 웃으면서 그의 행동반경에서 더 벗어나 하진을 방관했다. 하진도 아쉬울 게 없었다. 몸속의 열기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지난밤의 행위로 깨달은 덕분이었다. 그는 아예 피곤한 척 연기하며 일찍이 방으로 숨어들었다.

깨끗이 샤워한 몸은 촉촉하고 보들보들했다. 그 상태로 이불 속에 틀어박혀 사위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온종일 얼른 자위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버텼는데도, 그 짧은 몇 분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적당히 때가 되자 하진은 이불 속에서 허겁지겁 속옷과 바지를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이제 멈출 수 없었다. 사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몸과 정신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듯,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는 게 생소하기만 했다.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 것처럼,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하진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처음부터 무릎을 세우고 구멍부터 만지작거렸다. 겉은 보송하지만 살짝 벌려 건드려본 안쪽은 쫀득하고 뜨거웠다.

이 구멍을 축축하게 하고 싶었다. 더 거칠게 자극하고,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하진은 시트를 디딘 뒤꿈치를 살며시 세웠다. 발목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하의가 완전히 떨어지고, 시끄럽게 바스락거리는 이불까지 살짝 밀어 내리니 이제 갑갑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손을 뻗기 수월하도록 엉덩이를 들었다. 오늘은 조금 더 안쪽까지 만질 생각이었다. 간지러운 부위를 전부 건드려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어느새 성기가 꼿꼿했다. 그 끝이 명치에 닿을 정도로 다리를 거꾸로 띄운 채, 손가락 하나를 세워 맞붙이고 그대로 꾹 밀어 넣었다.

“으, 응…!”

살짝 넣었다 뺀 정도에 그쳤던 지난밤과 달리, 처음부터 깊은 삽입에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분명 꽉 닫혀서 버겁고 아플 줄 알았는데, 틈은 손쉽게 갈라졌다. 마치 잘 익은 과일의 속살처럼 부드러웠다.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삼키고는 무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벌름거리며 조였다.

“아… 흐으….”

안이 제멋대로 움찔댔다. 너무 좋아서 울 것만 같았다. 하진은 자신이 처음이어서 이렇게 쉽게 느끼는 줄로만 알았다. 이미 수도 없이 쑤셔져 개발되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그저 민감한 몸을 타고나서 이만큼 좋은 거라고 착각했다.

거의 다 밀어 넣은 손가락을 천천히 휘저었다. 달라붙은 내벽이 따라 움직이면서 안쪽에 과도하게 몰린 성감을 자극했다. 숨소리 사이로 살 치대는 소리가 야릇하게 섞였다.

“힛, 으, 흐읏….”

머릿속이 점점 멍해졌다. 축축하게 만들고 싶단 게 무슨 의미였는지 그제야 명확해졌다. 혀 위로 쏟아지던 맛. 울컥하고 터져 나오던 그 뜨겁고 비릿한 정액을 이 구멍 안에 문지르고 싶었다. 임신해야 한다는 암시 때문이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진은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고 구멍을 푹푹 쑤셨다. 그나마 남았던 이성이 수챗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머릿속엔 오로지 소파에서의 아슬아슬하던 상황만이 가득했다. 응, 읏! 흐으…! 철퍽거리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졌지만 도저히 멈출 방법이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만져선 안 되는 부위를 건드리고 있단 사실도 잊고 하진은 정신없이 뒤를 헤집었다. 온몸이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고 오직 구멍 안에 촘촘하게 주입된 열기만이 남았다. 해도 해도 목이 말랐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전까진 하지 않았는지 후회마저 들었다.

“아, 조, 좋아… 히이, 흐…!”

나오는 목소리가 꼭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진은 조금이라도 더 깊이 쑤시기 위해 안달을 냈다. 힘주어 밀어 넣은 중지가 어느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렸다. 몇 번을 더 시도해 마침내 간지러운 부분을 강하게 치대자, 순간 내벽이 바싹 좁아지며 경련했다. 아, 아으응…! 부들부들 떨리는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 안에….”

어떤 말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안에 싸, 싸줘….

놀란 하진이 몸을 확 움츠렸다. 생각에 앞서 튀어나온 그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대상자의 얼굴이 또렷해서 더 그랬다.

“…흐, 흐으.”

어, 어떡하지…. 상상이 덧씌워진 덕분인지 자극이 더 강했다. 공중에 뜬 무릎과 허벅지가 연신 파들거렸다. 손가락을 삼킨 구멍마저 그랬다. 손도 대지 않은 성기 끝에서 물이 줄줄 샜다.

방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달칵.

그 짧은 소음에 세상이 다 무너졌다.

“하진아.”

전등을 켜 밝아진 실내로 차선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실로 감격에 젖은 음성이었으나, 얼핏 듣기엔 그저 조금 놀란 것처럼 들렸다. 물론 엉덩이가 다 드러나도록 구멍을 들쑤시다 들킨 하진에게는 특히나 더 그랬다.

“무슨 앓는 소리 같은 게 나서 들어와 봤는데.”

그가 태연히 거짓말했다.

“어디 아픈 줄 알았더니….”

“…….”

“내가 방해한 거야?”

조심스러운 건 그저 말뿐이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온 차선오는, 하진이 누운 침대 한쪽에 걸터앉았다. 걱정 가득한 시선이 하진의 달뜬 몸을 빠르게 훑었다.

“자, 잠깐만… 흡, 나는….”

당황해 머릿속이 굳어버린 하진은 한발 늦게 뒤로 물러나며 다리를 오므렸다. 그래봤자 엉덩이 사이로 구멍이 다 보인다는 건 전혀 모르는 듯했다. 차선오가 허리를 살짝 숙여 그의 하체를 검사하듯 빤히 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오로지 시선과 행동으로 물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와중에도 하진은 그 시선이 주는 자극에 하체를 움찔거렸다. 보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불이라도 끌어와 가리려 했지만 차선오가 깔고 앉아 당길 수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

누가 봐도 불순한 짓을 하다 걸린 꼴이었다. 도무지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상상 속의 당사자가 나타나자 몸이 더욱 달아올라 난처하기만 했다.

쫓겨날지도 몰라. 하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불순한 짓을 좋게 볼 리 없으니까. 평범하게 성기를 만지던 것도 아니고 몰래 뒷구멍을 쑤시는 친구를… 어떻게 계속 한 집에 둘 수 있을까. 불쾌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겁먹은 하진의 눈시울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그게, 흐으….”

“괜찮아?”

그때 차선오가 뜻밖의 말을 했다. 덧씌워진 위선을 눈치채지 못한 하진이 울먹이며 그를 보았다. 지금, 괜찮냐고 물은 게 맞나?

“혼자 해결하긴 힘들어 보여서.”

“…….”

“이런 말 하면 싫으려나? 근데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저번에 나도 그랬잖아.”

하진은 그가 갑자기 성기를 꺼내 만지작대던 때를 회상했다. 뺨에 닿던 뜨거운 기둥의 느낌. 입속으로 들어오던 딱딱한 그 살덩이….

“내가 도와줘?”

그렇게 묻는 차선오는 무척이나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건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라고, 그러니 안심하고 솔직해지라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하진아. 불쾌하지 않으면.”

그 미소에 하진은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불쾌하긴커녕, 솔직히 꿈만 같았다.

“그, 그렇진 않은데….”

“다행이다.”

차선오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가 하진의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허벅지 안쪽에 닿자마자 한껏 뜨거워진 내벽이 바짝 조여들었다.

“아, 서, 선오야, 거긴….”

“사실 나도 해주고 싶었어. 너도 그때 나 만져줬잖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 차선오가 마치 외운 대사처럼 중얼거리면서 하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 여기가 좋아?”

“읏… 잠깐만….”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미 침대 구석까지 내몰린 하진은 더 피할 데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렇지 않게 허벅지 안으로 파고든 차선오의 손이 부끄러운 부위를 훑기 직전이어서, 도저히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나 너무, 이, 이런 건….”

그는 애꿎은 시트만 잡아 뜯을 듯 붙들었다.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이상하잖아, 그냥 내가 혼자….”

차선오는 혼자 해결하겠다는 하진의 말에 웃고 말았다. 누구 때문에 몸이 그렇게 된 줄도 모르면서.

“얘기 못 하겠으면 내가 찾아볼게.”

“아흐….”

그는 상황을 아주 약간만 쉽게 만들기로 했다.

“다리만 좀 벌려봐, 만지기 좋게.”

만지기… 좋게.

암시를 깨우는 짧은 말에, 꽉 맞붙은 하진의 무릎이 스르르 벌어졌다. 하진은 그저 자신이 유혹을 참지 못한 줄로만 알았다.

손쉽게 하진의 아래를 벌려 놓은 차선오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구멍을 더듬기 시작했다. 며칠간 자신이 건드린 적 없는 구멍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하진이 손가락을 넣고 흔들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서, 겉만 살짝 문질렀는데도 벌써부터 그걸 씹고 싶어 안달이었다.

최면에 잠겼을 때보다 더 예민한 듯했다. 처음이라고 인지해서 더 그런 걸까? 차선오는 그게 신기하면서도 기뻤다.

“아… 아흐, 으….”

하진은 만지는 족족 소리를 낼 정도로 느끼면서도 활짝 벌린 허벅지를 다물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맨정신으로만 느낄 수 있는 수치심과 그 틈을 파고든 섬세한 암시가 딱 적절하게 섞여든 모습이었다.

아, 씹물 좀 봐. 차선오는 조붓하게 조여드는 구멍 입구를 둥글게 휘젓다가 틈을 넓게 벌렸다. 촉촉한 내벽이 보였다. 그가 포식을 앞둔 육식동물처럼 입맛을 다시면서 일부러 난감한 척 중얼거렸다.

“친구끼리 이런 거 이상하지만.”

친구라고 강조하면서 그가 손가락을 푹 찔러 박았다.

“읏…! 으흐, 응!”

“아파? 이렇게 하면, 아픈가? 난 잘 모르니까 네가 말해줘야 해.”

정확히 전립선 쪽을 문지르면서 그는 처음인 양 유세를 떨었다. 전혀 아프지 않을 걸 알면서도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으니 하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헐떡였다.

“아, 읏, 거기는, 흐….”

“여긴 하지 마?”

“아니이… 흐, 아… 아앙.”

말과 달리 차선오는 안에 넣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내벽을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능숙한 손놀림이 쾌감을 돋궜다. 찔꺽대는 소리가 금세 요란해졌다.

하진은 믿을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굵고 단단한 손가락이 안을 헤집기 무섭게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허벅지가 제멋대로 벌어지고 거부감이 빠르게 사라졌다. 심지어 좀 더 빨리 쑤셔줬으면 좋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하진아, 그만 빼? 솔직하게 말해야 알지.”

그가 다시금 암시를 깨웠다.

솔직하게… 어디가 좋은지….

“거기 조, 좋아.”

하진이 이끌리듯 고백했다.

“안쪽에, 좀 더 깊이… 넣, 아흑…!”

손등뼈가 엉덩잇살을 짓누를 만큼 깊이 틀어박혔다. 아… 아아….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침이 질질 흘러 턱과 가슴까지 떨어졌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한계에 다다른 하진은 차선오의 손에 대고 엉덩이를 잘게 흔들기 시작했다.

“으응, 좋아, 여기, 흐, 아으응…!”

직접 넣고 혼자 만질 때와는 비교도 못 할 만큼 좋았다. 어쩐지 이런 행위가 익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차선오의 말대로 친구끼리 이러는 건 이상한 게 맞지만 정작 그의 몸은 더 강한 자극을 원했다.

아래로 콱콱 찍어 누를 때마다 단단한 손가락이 정확히 정점을 찔렀다. 하진은 실금하듯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사정했다. 손길 하나 닿지 않은 성기는 스스로 한계까지 발기한 채 끝에서부터 흰 물을 뚝뚝 흘려 보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하진은 차선오의 탐스러운 좆을 떠올렸다. 이런 손가락이 아니라, 그 굵고 뜨거운 걸 엉덩이 사이에 넣고 싶었다. 벅차도록 깊이 넣고 흔들다가 안에 정액을 듬뿍 부어주었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자연스레 이어졌다.

부탁하면 해줄지도 몰라.

하진은 싫은 내색 없이 신기할 만큼 좋은 부분만 쑤셔주는 차선오에게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었다. 저번처럼 두툼하게 세운 성기를 이 구멍 안에 넣어달라고….

하지만 그러면 돌이킬 수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건 정말… 섹스였다. 이런 손장난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삽입 섹스.

슬그머니 벌어졌던 하진의 입술이 다시금 딱 맞붙었다. 아주 투명한 유리 어항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 너머에서 쏟아질 황홀이 뻔히 보이는데, 최후의 관문이 그를 에워싸고 꼼짝 못 하게 했다. 문제는 어항 안에 담긴 물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단 사실이었다.

“좋았어?”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차선오가 제 입술을 핥았다.

“엄청 많이 쌌네. 앞은 만지지도 않았는데… 배가 다 젖었어, 하진아.”

“그, 그런 말 하지 마.”

“뭐 어때서. 이제 와서 창피해?”

차선오는 구멍에 찔러 넣은 손가락을 빼내면서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하진은 그 반응에 안심했다. 이렇게까지 남부끄러운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또 선뜻 도와주는 차선오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고마웠다.

정말 괜찮은 건지 아직 의심스럽긴 하지만….

“또 하고 싶은 거 있어? 도와줬으면 하는 거.”

여전히 뺨을 잔뜩 붉힌 채 쌕쌕거리며 숨을 고르는 하진에게, 차선오가 물었다. 하진의 떨리는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 신음을 마구잡이로 토해내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달싹거렸다. 차선오는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번에 넌 손으로 만지다가 입으로도 빨아줬잖아.”

“…그렇긴 한데….”

“나도 똑같이 해줄까? 여기.”

그가 조금 벌어진 하진의 구멍 입구를 엄지로 꾹 눌렀다.

“구멍 빨아줘?”

“뭐… 뭐?”

하진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깜짝 놀라 무릎을 모았다.

“아, 안 돼, 그건. 더럽잖아…!”

“뭐가 더러워.”

“아니야, 아니, 싫어. 제발…. 그건 못 해….”

한사코 거절하자 금방이라도 고개를 숙일 것 같던 차선오가 조금 물러났다. 하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마 그런 걸 해주겠다고 선뜻 나설 줄은 몰랐기에.

“싫어할 것 같진 않은데.”

“…….”

“너 또 섰어, 하진아.”

턱을 내려 살피니 그의 말대로였다. 단지 몇 마디 말만으로 이렇게나 쉽게 발기한 게 부끄러웠다. 아마… 상대가 차선오여서 그런 거겠지. 하진은 터질 듯한 얼굴로 손을 내려 앞을 가리는 척했다. 손바닥에 아까 싼 정액이 끈적하게 묻어났다. 도무지 가라앉을 줄 모르는 성욕에 눈앞이 다 아찔했다.

“빨아주는 거 창피하면 다른 거라도 얘기해 봐. 응?”

차선오의 말은 유혹적이었다. 이제 하진은 그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차선오는 이 모든 게 아무렇지 않은 건지. 왜 뭐든 말만 하면 들어줄 것처럼 구는 건지….

“그러면….”

하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그가 원하는 건 정해져 있었다. 제 몸보다도, 차선오의 몸에 더 관심이 갔다.

지난번처럼 그의 성기를 입으로 머금고, 정액이 샐 때까지 핥고 싶었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았다. 삽입은 아직 무섭지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미 지난번에 한 번 해봤으니까… 말하면 하게 해주지 않을까?

“저번처럼 나도 네 거… 하면 안 돼…?”

“하다니, 무슨 말이야?”

되묻는 차선오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 표정에 조바심이 났다.

“빨고 싶어….”

하진이 무력하게 중얼거렸다. 말하고 나니 더 간절히 원하게 됐다. 그는 대답도 듣기 전에 서둘러 덧붙였다.

“네 거 빨게 해줘, 선오야. 응?”

“뭐?”

차선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싫었던 거 아니야?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아, 아니야. 안 싫었어. 한 번만 더 해보고 싶어. 저번보다 더 잘할 수 있어.”

하진은 어느새 빌고 있었다.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탐욕스러운 눈으로 차선오의 고간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움찔거리기까지 했다. 구멍으로 자위를 하다 들켜 울먹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진아.”

“으응.”

“정말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입으로 내 자지 물고, 정액 삼키면서 싸는 거?”

차선오가 어항 밖에서 떠보듯 물었다. 괴리감이 느껴지는 직설적인 표현에 하진은 순간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 떨었다. 유순한 낯 위로 잠시 망설임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응. 마, 맞아.”

“그럼 해 봐.”

느긋하게 몸을 물리는 차선오를 향해 하진은 얼른 상체를 숙였다. 방금 오간 말을 다시 생각하니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지만,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허락해준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엉금엉금 기듯이 다가갔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섞인 손끝이 차선오의 바지춤에 닿았다.

“아….”

손쉽게 성기가 드러났다. 하진은 차선오의 양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고 자세를 낮추었다. 지난번처럼 그의 것은 이미 딱딱하게 서서 하진의 턱을 부드럽게 찔러왔다. 냄새. 촉감…. 모든 게 그대로였다. 좋아서 견딜 수 없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장은 이걸 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천천히 해. 무리하지 말고.”

차선오는 허겁지겁 자지에 달라붙은 하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의욕과 달리 몸은 고작 두 번째라고 믿고 있을 테니까. 저번처럼 서툴게 입술을 열고 귀두만 간신히 담으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흐우, 음….”

하진은 혀를 내밀어 뿌리부터 정신없이 핥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듯 코를 박고서 뿌리 주변을 혀끝으로 샅샅이 적셔 놓더니, 고환에 말랑한 입술을 비비면서 쪽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

어디로 봐도 자지에 환장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하라고 시키지 않았는데도 꼭 몸에 새겨진 것처럼 능숙하게 굴었다.

지금의 그는 누구일까. 차선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하진을 말리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성욕에 함락된 하진을 막을 이유가 그에겐 없었다.

기둥을 꼼꼼히 핥으며 올라온 하진은 황홀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닿고 싶어 무릎을 모아 웅크리고 상체를 바짝 낮추었다. 엉덩이가 다 드러나는 줄도 모르고 하진은 마침내 귀두를 물었다.

둥글고 뜨거운 게 입 안을 찌르자 머릿속이 혼탁해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흐, 으음, 응…. 목을 울리며 서둘러 안까지 넣으니 금세 입속이 가득 찼다. 턱이 뻐근하게 당겨왔지만 불편함보다도 오로지 기쁜 마음뿐이었다.

목구멍을 조이며 좆을 빠는 하진의 엉덩이 사이로 다시금 차선오의 손가락이 닿았다. 아흐… 응…. 구멍에 넣어주는 줄 알고 하진은 허리를 더 낮추었다. 그러나 손끝은 더 아래로 움직였다. 가운데를 향해 살짝 오목하게 패여 습기가 모인, 미끌한 살갗 위에.

하진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구멍을 쑤실 때와는 또 다른 쾌감에 얌전히 엉덩이를 쳐들었다.

“흐, 으웃….”

그렇게 하진의 입속에 사정할 때까지, 차선오는 보지가 생길 자리를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여기가 어떠냐고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면서.

*

모든 순간이 생생했다.

오염된 물에서 너무 오래 지낸 탓일까. 맑고 투명한 물속에서 깨어난 사실만으로 하진은 몹시 얼떨떨했다. 차라리 뭍으로 나왔다면 모든 게 달라졌겠지만, 이미 하진은 어항 밖으로 나갈 방법을 잃은 지 오래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텅 빈 침대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겁이 났다. 기억이 뚝 잘린 것 같은 묘한 느낌은 없었지만 무언가 단단히 실수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엉덩이 사이가 불편했다. 하진은 화끈거리는 부위로 손을 찔끔 내려보았다. 긴장감 때문에 감히 고개 숙여 확인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겉만 겨우 스치도록 아주 살짝 만져 보니, 말라붙은 정액이 묻어났다. 어떻게 된 거지, 하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사실 찬찬히 떠올려볼 필요도 없었다.

‘입 말고, 안에도 싸줄 거야…?’

그렇게 애걸한 건 분명 제가 맞았으니까. 아아…. 하진은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베개에 머리를 콕콕 박았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원나잇을 저지르고 후회하는 인물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뒤로 자위하다 들켰단 사실만으로 충분히 부끄러운데 어쩌자고 그런 말들을 뱉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차라리 누가 시킨 거라면, 술이든 약이든 뭐라도 먹고 저지른 일이라면 나았을까. 그렇지만 전부 제 머릿속에서 생겨난 충동이 만든 일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더 수치스러웠다. 매운 걸 잔뜩 삼킨 것처럼 코끝이 찡해서, 하진은 빈 침대에서 얼굴을 감싸고 훌쩍거렸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누군가 들어왔다.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방금까지 요리를 하다 왔는지 따끈한 설탕 시럽 냄새 같은 게 풍겨왔다.

“아침 먹을 수 있겠어?”

하진은 마지못해 뒤를 슬쩍 보았다가 그대로 눈을 내리깔았다. 차선오는 바지만 겨우 걸친 반나체였다. 조각상처럼 잘 깎인 상체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코가 점점 더 매워졌다. 딱 이대로 사라지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부끄러워서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하진아.”

“…아!”

대답 없는 하진에게 다가온 차선오가 등을 확 끌어안았다. 하진은 깜짝 놀라서 침대 위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아침 먹을 수 있겠냐니까. 팬케이크 구웠어. 커피랑 우유 둘 중에 뭐가 좋아?”

혀끝에 단맛이 맴돌아 잠시 망설이던 하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먹… 못 먹겠어.”

“코가 왜 이렇게 빨개? 울었어?”

“보, 보지 마.”

하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피했다. 방금 차선오가 만진 등이 간질거렸다. 분명 그가 짚은 건 등인데 그 안쪽의 심장까지 요란히 뛰었다. 왜 이리 동요하게 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사실 좋았다. 이대로라면 더 만지고 안아달라고 어젯밤처럼 매달리게 될 것 같았다.

제발 나가라…. 하진은 속으로 빌었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 될 것 같으니까 내버려 뒀으면 싶었다. 그는 거의 무릎이 가슴에 닿도록 몸을 웅크렸다.

“너 근데 엉덩이….”

그때 차선오가 무언가 말하려다 말았다.

“음, 아니다.”

뭐지? 답지 않게 싱거운 반응이었다. 하진은 뒤늦게 아래가 훤히 드러나고 있단 걸 의식했다. 발갛게 달아올라선 엉덩이 사이에 정액이 말라붙어 있을 텐데.

그걸 얘기해주려던 거라고 생각하니 왈칵 수치심이 솟았다. 하진은 이제라도 아래를 가리기 위해 팔만 뻗어 이불을 당겼다.

“내 티셔츠는 왜. 냄새 맡고 싶어?”

“…….”

그러나 딸려온 건 어젯밤 차선오가 벗어 놓은 티셔츠였다. 어쩐지 이불치고는 얇다 싶었는데 하필이면…!

“배고파지면 나와, 먹고 있을 테니까.”

다시금 등을 한 번 쓸어준 차선오가 웃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방에서 나갔다. 벽을 보고 웅크린 하진은 그가 확실히 나갔는지 곁눈질했다.

몰래 티셔츠에 코를 묻었다. 이미 발기한 아래가 움찔거렸다.

*

“퇴근할 때까지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봐.”

차선오는 태생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다정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였는데도 피하긴커녕 전보다 더 살갑게 대해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아니면 같이 하고 싶은 거나, 그냥 대화도 좋고. 중요한 얘기라면.”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가 나긋하게 말했다. 중요한 얘기. 의미심장한 표현이었으나 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같이 하고 싶은 거라니…. 자칫 입을 열면 이대로 정전이라도 일으켜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서 목구멍 가득 자지를 삼키게 해달라고 빌게 될까 봐 무서웠다.

하진은 아직도 차선오의 태도가 헷갈렸다.

그의 속마음이 어떤지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여태 보여준 친절함의 기저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왜 갑자기 저와 성적인 행위들을 한 건지. 왜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게 더 친밀하게 구는 건지. 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건지…. 뭐 하나 궁금하지 않은 게 없었다.

동시에 스스로의 감정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아 더욱 복잡했다. 그를 단순한 동창으로 대할 수 없게 된 건 사실이지만, 이게 연애 감정인지 되묻는다면 망설여졌다.

정말 이상한 표현이긴 해도 속궁합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의 몸만 닿으면 참을 수 없이 열이 오르고 시도 때도 없이 성욕이 끓는 게 정말 이상했다. 무슨 성에 처음 눈뜬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렇게 정신 못 차리고 달려들게 되는 게 정상은 아니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묻는 목소리에도 심장이 떨렸다. 짝사랑이라도 하게 된 기분이었다. 하진은 대답 없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가 계속 움직이는 동안 그가 고안해낸 해결책이 점점 또렷해졌다. 차선오에게 더 이상은 이런 식으로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온종일 그와 뒹구는 생각뿐이었지만, 몸이 멀어지면 이 마음도 차차 정리될 거라고 믿었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좋아한다는 자각도 하기 전에 음탕한 모습을 보인 게 민망했다. 하지만 다시 어제로 돌아가더라도 분명 자신은 같은 방식으로 구멍을 쑤시고 자지를 핥으리란 걸 알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문제였다.

띵. 짧은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가자.”

그가 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차선오가 팀장실로 들어간 뒤, 오전 업무 시작 전에 하진은 몰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재무팀으로 향했다.

둘만이 있는 집에서 나와 회사로 오니 계획이 점점 뚜렷해졌다.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하진은 모든 걸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정규직 전환은 깔끔히 포기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전환을 기대할 만큼 제대로 된 성과도 전혀 내지 못했으니,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하면 되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저기, 안녕하세요. 저는 개발2팀 인턴….”

“박하진 씨 맞죠?”

안면도 튼 적 없는 재무팀 사원이 하진을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하진은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내심 마음이 놓여 얼른 다가갔다.

“네, 네. 여쭤볼 게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소문만 들었는데 진짜 얼굴이…. 와, 차 팀장님이 이런 취향이었구나.”

“…네?”

“아하하, 칭찬이에요. 귀엽게 생기셔서.”

무언가 이상한 말이 지나간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진은 마음이 급해 무작정 말했다.

“그, 혹시 인턴도 이용할 수 있는 사내 대출 제도가 있을까요? 제가 급히 이사할 일이 생겨서요. 아니면 남은 계약 기간 월급을 가불받는 방법이라든가….”

워낙 급히 떠오른 방법이라 말하면서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진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히 사원은 밝게 웃으며 되물었다.

“주택 자금 대출 말씀이신가요?”

“네. 제가 사정상 고시원에 살았었는데 작은 원룸이라도 얻고 싶어서요.”

“도와드리고 싶지만 3년 이상 근속해야 자격이 주어지거든요.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차 팀장님이랑 다투기라도 하셨어요?”

“네? 선오는 왜….”

무의식중에 묻고선 아차 싶었다. 다른 팀 사람은 차선오와 자신이 동창인 것도 모를 텐데. 그러기엔 아까 취향이니 뭐니 얘기한 게 이상하긴 했지만. 다퉜냐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설마 여기까지 소문이 났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저, 아까부터 차 팀장님 말씀하시는 건 무슨 의미로….”

“요즘 안에다 잘 안 싸주세요? 그럴 분이 아닌데.”

그가 일상 얘길 하듯 자연스럽게 중얼거리며 갸웃거렸다.

하진은 귀를 의심했다.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사이 말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아무리 사람에 따라 임신이 어렵다지만 계속 노력하고 시도하면 결실이 있을 거예요. 제가 친분은 없어도 하진 씨 상상 임신 증상 있다는 말 듣고 얼마나 마음 아팠는데요.”

“…….”

“수유 브라는 하셨어요? 요새는 나시도 잘 나오는 거 아시죠? 시도 때도 없이 젖이 새서 일할 때 참 곤란하시겠다 싶어요. 가뜩이나 여름이라 더운데.”

쏟아지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하진이 한쪽 손을 움찔 떨었다. 그러고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아랫배에 만지작거렸다.

“아….”

임신…. 무언가 까맣게 잊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게 이거였나?

“참, 이건 근거 없는 속설이긴 한데….”

늪에 빠진 하진에게로 그가 의자 바퀴를 끌며 다가왔다. 아주 주의 깊게 들어야 겨우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침에 발기한 상태로 바로 삽입하면 좋대요. 깨기 전부터 몰래 보지에 넣고 안에 질펀하게 싸달라고 한 번 해보세요.”

“아… 네에….”

“근데 보지는 만들어 주셨나요? 아직 저희 팀엔 그 소식까진 안 들려와서.”

하진은 텅 빈 눈을 깜빡였다.

“어… 그건 아직….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저런. 흠, 어쨌거나 잘 해결하도록 해봐요.”

진심 어린 충고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차 팀장님 같은 분, 어디 가서 만나기 힘들 거예요. 박하진 씨가 제일 잘 아실 거잖아요. 다정하고 좋은 분인 거.”

“마, 맞아요.”

“무엇보다 여태 그렇게 임신 못해 고생해 놓고 결실을 못 보면 제가 다 아쉬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좀 힘들어도 더 버텨보세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죠? 이해하실 거라 믿어요. 저희 팀도 다들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어요.”

“…네. 가,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똑바로 서니 머리가 핑 돌았다. 갑자기 속이 요란하게 뒤틀렸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진은 울렁거리는 가슴팍을 겨우 짓누르고 말하며 돌아섰다.

상식 밖의 말들이 폭우처럼 쏟아져서 체할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직원이 그런 말을 조언이랍시고 한 것도 그렇지만,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하고 전부 수긍한 스스로가 더 이상했다. 하지만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어쩔 수 없었다. 꼭 이 모든 게 정해진 것처럼.

바삐 움직이던 하진의 두 발이 멈추었다.

아니…. 상식 밖의 말들이… 맞긴 한 걸까…?

임신이니 보지니 하는, 듣기만 해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그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수유 브라를 했느냐고…. 그건 아침에 깜빡했는데. 너무 정신없이 출근한 게 문제인 것 같았다. 여분을 챙겨온 게 있는지 이따가 가방을 뒤져봐야 할 듯했다.

“하아….”

헛구역질이 간신히 멈추었다. 그에 앞서 확인할 게 있었다. 하진은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 아래가 미친 듯이 신경 쓰였다. 얼른 거길 보고 싶었다.

비어 있는 칸에 거의 고꾸라지듯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변기 커버를 내렸다. 하진은 똑바로 선 채 다리를 어깨만큼 벌리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성기는 전혀 부풀지 않은 채 죽어 있었다. 하진은 아래로 힘없이 늘어진 자지를 잡아 들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아래에 손을 넣어보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정확히 뭘 확인하려는 건지 자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지와 후장 사이, 아무것도 없어야 할 부위에 무언가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게 만져진 순간.

“이… 이게….”

하진은 뱉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무언가에 단단히 취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직 꿈속이라거나. 얼굴이 희게 질리도록 숨을 참으면서 하진은 빠르게 속옷과 바지를 다시 갖춰 입었다. 그대로 나갈 생각이었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잠금쇠에 손을 대기도 전에 마음이 바뀌었다.

뒤돌아선 하진이 애써 정리한 하의를 아까보다 더 빠르게 잡아 내렸다. 변기 커버 위에 주저앉는 얼굴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신발까지 벗은 하진이 흰 양말만 남은 두 발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약간 점성 있는 물기가 천천히 흐르는 게 느껴졌다.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연한 감각이었다. 하진은 다시 같은 부위로 손을 내려 만져 보았다. 정말 있었다. 아주 작고 보들보들하며 매끄러운, 절대 제 몸에 있어선 안 될, 여성기가.

“…흐, 으읏….”

울음 비슷한 소리가 가쁘게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어서 갈라진 틈을 위아래로 비벼보자, 무섭도록 쾌감이 돋았다.

미세하게 쪼개져 부푼 살점 사이, 동그랗게 돋아난 무언가를 건드리니 아까 흐른 물기가 다시 쏟아질 것 같았다. 그건 꼭 요의와 비슷했다. 도무지 말이 안 됐지만, 이게 정말 보지라면… 그러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아, 아… 흐으, 흐….”

하진은 마치 그렇게 하면 보지가 없어진다고 믿는 사람처럼 연약한 살갗을 마구 긁고 비볐다. 그러자 아까까지 늘어져 있던 자지가 서서히 부푸는 게 보였다. 흐… 으응, 싫어…. 하진은 무서워하면서도 계속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좁은 화장실 칸막이 안에 금세 찔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보짓물을 약간 흘려버린 하진은 티슈로 젖은 부위를 조심스럽게 닦고 일어섰다. 오줌이 마려워서 딱딱해진 자지를 붙잡고 변기에 조준했다.

“흐으… 아, 아… 선오야….”

주입된 이름이 기계처럼 흘러나왔다. 끝을 살짝 찌르자 다행히도 귀두 끝에서 노란 물줄기가 쪼르륵 흘러나왔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완전히 넋이 나간 하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더러워진 부위를 잘 닦고 칸막이에서 나온 하진의 눈가며 코끝이 죄다 발그스름했다. 누가 봐도 음탕한 짓을 한 얼굴이었지만 그에 신경도 못 쓸 만큼 늦었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하진은 절뚝거리며 사무실로 향했다.

*

하진은 정말 제 몸에 여성기가 생긴 게 맞는지 다시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하루 종일 화장실 가는 걸 참아야 했다. 요의가 느껴지긴 해도 견딜 만했다.

역대 가장 힘든 근무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일한 시간보다 파티션 뒤에 숨어 아래를 힐끔대느라 허비한 시간이 더 길 것도 같았다.

이미 변해버린 몸을 바꿀 방법은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정말로 차선오를 떠나야겠다는 것. 그에게 성욕을 느껴버린 이상, 이런 비정상적인 몸으로는 도저히 머무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진은 두 번 다시 그의 앞에서 옷을 벗고 싶지 않았다.

만약 보지가 생겼다는 걸 어떻게든 숨기고 지내더라도, 그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언제 갑자기 이상한 욕망에 지배되어 그에게 달려들지 몰랐다. 실제로 오늘 아침엔 차선오의 티셔츠 한 장만으로 구멍을 푹푹 쑤신 것처럼 전율했으니까.

퇴근 시간. 두 사람은 주차장까지 말없이 움직였다. 차선오는 어딘지 피곤해 보였고, 하진은 짧은 보폭으로 따라 걸으며 눈치를 살폈다.

해사한 윤기가 돌았던 아침과 달리 그의 얼굴엔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보였다.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 모습에 겁이 났지만 하진은 용기를 냈다. 할 말이 있었다.

“차선오.”

앞서 걷던 구둣발이 멈추어 섰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선오, 야. 나랑 얘기 좀 해.”

아무래도 정이 없어 다시 부르니 비로소 그가 몸을 돌렸다.

새까만 동공이 보였다. 단지 눈만 마주쳤는데도 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소변을 흘리던 게 떠올랐다. 다리 사이가 움찔 떨리고 불편했다. 하진은 눈을 질끈 감고 얼른 속에 담긴 말을 뱉었다.

“저, 나 이제 너희 집에서 못 지낼 것 같아.”

“…….”

대답이 없었다. 차라리 다행인가? 아니면… 이 기분은 뭐지.

순간 무언가 크게 실수하고 있단 느낌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하진은 모른 척 넘겼다. 그리고 또 해야 할 얘기가….

“회사… 회사는, 어차피 내 능력으로는 계속 다닐 수 없는 곳이니까 계약 기간만 채우든지…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목소리가 좀 떨렸지만 생각보단 그럭저럭 잘 얘기해서 다행이었다. 하진은 소맷자락을 꾹 말아 쥐었다. 아침부터 내내 긴장한 터라 힘에 부쳤다. 얼른 이야기를 끝내고 쉬고 싶었다.

“그럼 어디서 지낼 건데?”

어느샌가 성큼 다가온 차선오가 물었다. 익히 아는 체향이 위협적일 만큼 가까이서 풍겨오자, 하진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어, 어?”

“어디서 지낼 거냐고. 당장 갈 데나 있어?”

빈정거림, 혹은 차가운 조소. 예상과 다른 반응에 하진은 당황했다. 왜 그러냐고 걱정하거나 어제 일 때문이냐 너스레라도 떨 줄 알았는데.

마치 화를 참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차선오는 빙긋 웃어 보였다. 거짓말처럼.

잘못 본 건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하진이 이끌리듯 입을 열었다.

“고시원에….”

스스로 듣기에도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일부러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덧붙였다.

“원래 살던 고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당분간은 그렇게….”

“너 거기 못 가.”

그가 계속해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그렇게 웃고 있으니 오히려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못… 가다니?”

“데려다줘? 가서 직접 확인해 볼래?”

“…무슨….”

“확인하고 나서 집으로 가자. 그러면 되겠지.”

하진이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작정 못 간다는 말이 이상했다. 그 완고한 반응 앞에서 하진은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대화가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는데.

“따라와. 바로 출발하게.”

“자, 잠깐.”

차선오는 정말 같이 고시원에 갈 기세였다. 이런 상황에 그와 함께 그 볼품없는 고시원에 가는 건 전혀 내키지 않았다. 어쩌지. 하진은 손을 꼼지락대다 핸드폰을 꺼냈다.

“내가 전화해볼게. 그럼 갈 필요 없잖아.”

차선오는 그렇게 하라는 듯 선선히 눈썹을 까딱였다. 닿는 시선에 뚫릴 듯한 기분이었다. 그 눈을 피하면서 하진은 더듬더듬 주소록 창을 열어 고시원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21호실 사는….”

하진의 목소리가 조용히 번졌다.

“…….”

차선오는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으로 차 키를 꽉 움켜쥐었다. 코앞에서 점점 굳어가는 하진의 입술과 창백해지는 얼굴빛을, 그는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통화 내용은 사실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주변을 힐끔 확인했다. 차 한 대가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쨍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하진의 얼굴 위로 부서졌다. 탈색되듯 과도하게 빛나다 이내 다시 그늘로 가라앉는 하진의 얼굴엔 오로지 당황한 기색만이 가득했다.

전화가 끊겼다. 하진이 핸드폰을 다시 밀어 넣기 전부터, 차선오는 이미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고 있었다.

“이제 이해했지?”

“…….”

하진은 할 말을 잃고 공연히 입만 뻐끔거렸다. 고시원 관리인의 권태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웅웅 맴돌았다.

남자는 계약이 끝나지 않았냐고 되물었다. 남은 기간의 월세 전부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방을 빼지 않았느냐고, 게다가 그 방은 이미 다른 사람이 쓰고 있다는 황당한 말까지 들려주었다. 짐도 누군가 다 가져갔다고 했다. 모든 설명이 아주 명료하고 확신에 차 있어서 한마디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너 갈 데 없어, 하진아.”

차선오가 방점을 찍듯 느긋이 설명했다.

“…정말이네….”

멍하니 중얼거린 하진은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머리가 돌처럼 굳은 듯했다. 대체 차선오는 이걸 어떻게 알고….

“설마….”

하진은 한발 늦게 중얼거렸다.

“네가 그런 거야?”

숨이 막혀서 조금 헐떡이는 듯한 소리가 섞였다. 차선오는 아무렇지 않게 잘라 말했다.

“이제 집에 가자.”

“…진짜야? 왜? 나한텐 그런 말 없었잖아.”

“어차피 거기로 돌아갈 일 없으니까.”

그때까지 순종적으로 되묻던 하진이 처음으로 미간을 구겼다.

“…뭐?”

“나랑 살아야지. 평생 그러겠다며.”

“펴, 평생?”

차선오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전혀 오간 적 없는 말을 아주 당연하게 일깨웠다.

“그래. 너 분명 나랑 약속했어. 네가 먼저 그러고 싶다고 했고.”

“…….”

하진은 속으로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평생… 선오와…. 은밀한 상상에 빠진 얼굴이 따끔거리며 달아올랐다. 물론 어제까지처럼 좋은 관계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나는….

“하진아.”

혼란스러워하는 하진의 어깨 위로 차선오가 한쪽 손을 올렸다.

“집으로 가자.”

그건 아주 조용하고도 곧은 음성이었다.

여름 저녁의 눅눅한 공기가 두 사람의 사이를 맴돌았다. 주위가 스산했다. 방금 빠져나간 차를 마지막으로 주차장은 어느새 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난….”

하진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계속해서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에 숨이 턱턱 막혔다. 손은 자연스럽게 사타구니 쪽을 보호하듯 가리고 있었다.

“차 타. 우선 집에 가서 얘기해. 응?”

이제 차선오는 완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여유롭고 침착한 목소리. 나긋한 태도. 하진을 안심시키는 모든 것.

“너 아까 점심도 제대로 못 먹어서 배고프잖아. 집으로 가.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점심 못 먹은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회사에선 일만 하느라 바쁜 줄 알았는데. 그 서슴없는 다정함이 하진을 더 헷갈리게 했다.

“갈 거지?”

하진의 속눈썹이 떨렸다.

“…어….”

하진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제야 어깨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차선오가 차 키를 꺼냈다. 주차된 차 한 대가 눈을 번뜩였다. 익숙한 차종이었다. 그쪽을 향해 몸을 틀면서도 하진은 연신 눈을 굴렸다.

차선오의 말대로 일단 오늘 하루는 그의 집에 돌아가는 게 최선이긴 했다. 어차피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하루만 잘 넘기고 숨기면 되겠지만, 이 역시도 실수처럼 느껴져 불안했다.

이대로 괜찮은 건가? 무언가 놓친 게 있지 않나? 그다지 좋지 않은 머리로 열심히 고민하던 하진은 불현듯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위화감이 드는 이유. 그가 앞서 걷는 차선오의 곧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나가겠다고 하는 건지. 왜 회사도 그만두겠다는 건지. 뭐 하나 듣지도 않고 무작정 갈 곳이 없다는 말로 막아서고 몰아세웠다.

꼭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아는 사람처럼.

“근데 있잖아….”

조수석 문이 열리기 직전, 하진이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왜 자꾸 집으로 가자고 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묻고 나서야 한 가지를 더 알아차렸다. 차선오는 집에 집착하고 있었다.

반드시 함께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 데려다 놓아야만 안심이 되는 것처럼, 혹은 집으로 가면 생각이 바뀔 거라 확신하는 것처럼, 무작정 거기 가서 얘기하자고 했다. 어쩌면 한마디 상의 없이 고시원을 정리한 이유도….

다시 헛구역질이 나오려 했다. 생각할수록 앞뒤가 맞지 않았다. 대체 왜지? 하진은 차에 타지 않고 그를 돌아보았다. 다시 본 그의 얼굴 위로 어울리지 않는 조바심이 스쳐 보였다. 참지 못한 하진이 떠보듯 다시 물었다.

“꼭… 그 집으로 가야 해?”

그 집. 차선오의 오피스텔.

그래, 그게 문제였던 걸까.

따지고 보면 거기에 들어간 이후로 모든 게 이상해졌다. 몸이 피곤해졌고 기억이 뚝뚝 잘려 나갔다. 최근엔 회사에서의 시간이 그랬지만 되짚어보니 그에 앞서 퇴근 후 집에서 보낸 시간이 점차 사라져간 게 시작이었다.

기절하듯 잠들었다는 자각만 남고 모든 장면이 깨끗이 지워진 것도… 그 집에 들어갈 때였다.

돌연 소름이 돋아났다.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진아.”

그가 급히 손을 잡아 왔다. 하진이 피할 새도 없이.

설마, 혹시.

분명 의심은 드는데 형체가 흐릿했다. 떠오르는 추측마다 현실성이 전혀 없어서 하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무엇을 어떻게 따져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낼 수도 없었다.

“우리 집이잖아.”

“…….”

그가 확신에 차 말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의 집이었다. 하지만 하진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차선오는 붙잡은 손을 더 강하게 옭아맸다.

“우리 집 가자는 건데, 싫어?”

“…….”

“손은 왜 이렇게 떨어. 무슨 오해를 하길래.”

그 악력과 온기가 이상한 안정을 주었다. 들끓던 속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냥 좀… 이상해.”

하진은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차선오, 넌 못 느꼈어? 나…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않아?”

“…….”

“아니… 아니다. 넌 잘 모르겠구나. 우리 다시 만난 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

기억을 더듬는 목소리가 두서없이 이어졌다.

“근데 난 알아. 이제 좀 알겠어. 너랑 다시 만나고부터 이래. 일도 제대로 못 하겠고 몸도 피곤하고, 꼭 내가 아닌 것처럼…. 뭐가 잘못되는 것 같아. 기억이… 이상하단 말이야. 몸도 막 변해가고… 솔직히 좀 무서워. 원래도 이랬나? 내가 몰랐던 거면 그게 더….”

“하진아.”

내내 조용하던 차선오가 스치는 바람처럼 말했다.

“좋아해, 하진아.”

짤막한 말이 아주 느리게 고막으로 스몄다.

“뭐…?”

하진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붙잡힌 손이 스르르 끌려갔다. 차선오는 아주 귀중한 것을 대하듯, 하진의 손을 입가로 가져간 채 어둠 속에서 고백했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그러고는 손등 위로 천천히 입술을 묻었다. 괴로움 섞인 씁쓸한 목소리가 살갗 위로 흩어지며, 종국엔 오로지 뜨겁고 짙은 흔적만을 남겼다.

“이렇게 고백할 생각은 없었는데… 네가 떠나려고 하니까 도저히 숨길 방법을 못 찾겠어.”

“…서, 선오야.”

입술이 떨어지고 잡은 손도 사라졌다. 그러나 하진은 여전히 그와 연결된 것처럼 긴장해 어떤 거부의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꿈 같았다. 모든 현실이 지워지고 거짓말처럼 심장이 뛰었다.

“싫다고 해도 괜찮아. 정말 집에서 나가고 싶은 거면 그렇게 해.”

“…….”

“대신 딱 하루만, 내 얘기 들어.”

간절한 애원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가서 전부 말할 기회를 줘….”

“…….”

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유달리 애틋해 보이는 낯이었다. 하진은 차선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차선오는 약간 망설이는 얼굴로 하진의 턱을 살며시 잡아 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입술을 찍어 누른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흡….”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이 감기고 입술이 벌어졌다. 달고도 끈적했다. 첫 키스. 하진에게는 그것이 출발점이자 동시에 도착점이었다.

그는 무척 능숙했다. 조심스러웠던 고백과 달리 단숨에 안까지 파고들어 여린 부분을 모조리 적셔놓았다.

“흐으, 음… 으응….”

하진은 거기에 이끌려 가면서도 생각보다 수월하게 혀를 얽었다. 익숙한 지점들이 뭉개지고 몸이 붕 떠올랐다. 차선오는 하진의 안에 고여 있는 불안감을 샅샅이 핥아 먹었다. 대신 그 자리에 기분 좋은 감각만을 모아 부드럽게 주입해 주었다.

커다란 손이 하진의 뺨을 붙잡아 더 가까이 당겼다. 몰아치는 격렬한 키스 속에서 하진도 어느새 발꿈치를 들고 따라갈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기분 좋아…. 멈추지 말아 달라고, 계속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이렇게 되기만을 내내 원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입속으로 밀려드는 감정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아주 요란하게. 빠르고 시끄럽게. 폭풍처럼 휘돌며 세포와 혈관을 헤집어 놓았다.

이내 모든 것이 수면 아래로 잠겼다. 정확히 키스가 끝난 순간이었다.

“부탁이야, 하진아.”

젖은 입술이 다시 애원하는 척, 하진에게 종용했다. 하진은 이미 눈이 풀려 차선오의 말만 얌전히 기다렸다.

“내일 아침에 바로 가게 해줄게. 재무팀에 얘기도 했다면서. 내가 너 살 곳도 다 준비해놨어. 그러니까….”

같이 가자. 마지막으로 나 믿어줘.

감미로운 초대였다. 위화감이 감히 낄 자리를 찾지 못할 만큼, 몸이 죄다 녹아내렸다. 좋아해, 하진아. 그 꿈 같은 고백이 견고하게 틈을 메웠다.

“좋아….”

같이 갈게. 벽을 무너뜨린 하진이 수줍게 턱을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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