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정신을 차렸을 땐 아침이었다.
높은 천장과 충분한 방음 시설, 보송한 이불, 쾌적한 에어컨이 없는 환경에서 하진은 아주 오랜만에 깨어났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발소리가 귀를 때렸다. 불쾌하고 후덥지근한 공기로 인해 몸 여기저기 땀이 났다. 하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큰일 났다….”
여기서 자버렸다. 짐을 챙기려고 온 고시원에서.
계속 피곤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아침까지 깨지 않고 쭉 자버릴 줄이야.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출근 생각부터 났다. 하진은 급히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지금 바로 준비하면 지각은 면할 것 같았다.
“선오한테 연락을 해야… 아니지.”
본능처럼 차선오를 떠올린 하진의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젯밤, 이 침대에서 저지른 일이 믿기 힘들 만큼 생생하게 떠오른 탓이었다. 하진은 그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은 스스로를 아직 인정하기 어려웠다.
아무런 언질 없이 퇴근해 버린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지만, 하루쯤 외박하는 걸로 무슨 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사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불안했지만 그게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해 억지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핸드폰 배터리도 나가서 회사에서 해결해야 했다.
“옷도 안 갈아입고….”
샤워부터 하려고 보니 어제 퇴근한 옷차림 그대로였다. 불편한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으로 깊게도 잠들었구나 싶었다. 고시원에 여분의 옷이 있어 다행이었다. 문제는, 턱을 내리기 무섭게 보이는 자신의 몸이었다.
단추가 풀려 벌어진 가운데 틈 사이로 여전히 팽팽하게 당겨오는 가슴이 보였다. 아래 핏줄이 얼핏 보일 만큼 투명한 흰 피부 아래, 물이 올라 야릇한 모양으로 팽창한 하진의 가슴은 어제보다도 더 부은 것처럼 보였다. 젖몸살이란 게 이런걸까 싶을 만큼, 이제는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얼얼하기까지 했다.
“흣, 으… 진짜 이상해….”
그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비좁은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조심스레 나머지 단추를 다 풀어내면서도 성감이 느껴져 곤란했다. 빠르게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땀에 젖은 몸을 씻을 때는 최대한 가슴을 건드리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아… 선오… 으응.”
그러나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진은 수압으로부터 느껴지는 희미한 쾌감 속에서 저도 모르게 다시 차선오를 생각했다.
마음이 불편해도 어쩔 수 없었다. 마치 그에게 만져지는 것 같은 착각에 뺨이 붉어지고 허리께가 움찔 떨릴 만큼 기분이 좋아서, 저절로 이름을 부르게 됐다.
“아, 안 돼… 으응, 흐, 좋아.”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었다. 언제부터 그를 이렇게까지 열렬히 원하게 된 것인지. 차라리 연애 감정이라면 받아들일 텐데, 그것도 아니어서 미칠 노릇이었다.
그와 난잡하게 뒹굴고 싶었다. 하진은 전혀 알지 못했던 성적 취향이 모조리 튀어나온 것처럼, 음탕하고 부끄러운 짓들을 벌이고 싶었다. 심지어는 그런 장면들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오르기까지 했다. 마치 이미 여러 차례 저지르기라도 한 듯.
…너무도 난처했다. 인식하지 못했을 땐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 와서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당장 출근해서 차선오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면 차라리 이대로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정리해야지. 가능한 한 빨리….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이런 죄를 품고서는 그에게 계속 신세 질 수 없었다. 하진은 모든 욕망을 감추기로 했다. 어젯밤처럼 무너지지 않도록, 당사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무조건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그는 물을 아주 차갑게 틀고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자꾸만 튀어 나가려는 신음을 참느라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땐 마구 깨물린 아랫입술이 얼얼하기까지 했다.
몸을 닦고 옷을 꺼내 입으니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널브러진 짐이 눈에 들어왔지만 챙겨나갈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회사로 가야 하기에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하진은 다음을 기약하면서 어제 메고 온 가방을 찾았다.
앞 버클을 보니 또 희미한 성욕이 일었다. 다시 자위를 하라고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하진은, 아주 조심스럽게 아래를 살폈다.
“흡….”
아까 옷을 갈아입으며 얼떨결에 봐 버린 유두의 표면은 알 수 없는 반투명한 물기로 반들반들하게 젖어 있었다. 생리적인 두려움과 묘한 호기심이 하진을 넝쿨처럼 휘감았다.
설마 젖지는 않겠지…?
다행히 셔츠 사이즈가 넉넉한 편이어서 겉보기엔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크게 움직이면 언뜻 도톰하게 솟은 유두의 윤곽이 잡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가만히 있으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괜찮아야만 했다.
하진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얇은 가디건을 걸쳤다. 오늘 하루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보내는 것으로 어떻게든 모면할 생각이었다. 브래지어가 있으면 좋을 텐데. 문득 그런 아쉬움이 일었다.
“…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하진은 제가 한 생각이 너무나 천박해서 신발을 신다 말고 벽에 이마를 콱 처박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언젠가 이미 브래지어를 입었던 것 같단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만. 제발 그만 생각하자. 그는 마치 현실에서 도망치듯 빠르게 고시원 밖으로 나갔다.
*
택시를 타고 회사 건물 앞에서 내린 하진은 사무실로 들어서며 주변부터 살폈다. 항상 차선오와 함께 출근하다가 혼자 오니 생각보다 외롭고 쓸쓸했다. 어제 그렇게 잠들어버린 게 생각할수록 후회됐다. 그냥 편히 기다리다가 같이 퇴근했다면 모든 게 좋았을 텐데.
잠잠한 호수에 스스로 돌을 던진 기분이었다. 어느새 마음이며 몸이며 전부 한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 줄도 모르고, 하진은 짧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사무실은 조용했다. 마주친 미화원에게 인사하고 자리로 향하면서 슬쩍 팀장실을 확인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
따지고 보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근심이 깊었다. 마주치자마자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그보단 나중에 점심시간에라도 따로 기회를 봐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래도 실은, 차선오가 먼저 다가와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주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니까. 고시원 월세와 생활비 때문에 그랬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그런 걸 뭣 하러 걱정했느냐면서 가볍게 웃어넘길지도 몰랐다.
하진은 걱정을 덜어내면서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이 하나둘 출근했다. 웬일로 혼자 일찍 왔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저 웃어 보이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보이려 애썼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 보니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차선오는 그런 하진을 비웃듯, 정확히 출근 시간 정각에 나타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누군가 그렇게 인사하기 무섭게 하진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
정장을 입은 차선오는 언제나처럼 흠 하나 없이 말끔했다.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 아래의 그늘이나 약간 푸석해 보이는 피부는 알 수 없는 권태감과 피로감을 담고 있었으나, 조화로운 이목구비가 모든 것을 상쇄했다.
얼핏 봐서는 이상함을 전혀 찾지 못할 만큼,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진은 자리에 앉아 파티션 너머로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인턴 책상은 분명 출입구에서 가까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심리적인 거리감이 느껴졌다.
무표정한 얼굴 뒤의 감정을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진이 익히 아는 다정함은 없었다.
“아, 차 팀장님! 잠시 이것만 좀….”
저벅저벅. 일정한 박자로 걷는 그를 누군가 붙잡았다. 차선오는 하진이 앉은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곧장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팀원의 모니터를 보며 상황을 전달받는 차선오의 주변으로 어제 회의에 참여한 인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하진에게도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으나 이해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다만 두 가지는 확실했다. 이성적인 어조로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차선오가 매우 능력 있는 상사라는 것. 그리고 지금 차선오에게 자신은 우선순위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것.
“…….”
하진은 왜 자신이 이토록 실망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좋아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저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니었던 걸까…?
그러나 동창 사이를 넘어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완벽한 직장 상사였다. 고시원에서 헐레벌떡 일어나 출근한 하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
절대 들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네가 가슴을 만져 주는 상상에 사로잡혔다고, 거기서 헤어나기 힘들 만큼 머리가 단단히 고장 난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울컥 감정이 새어 나가려 해서 하진은 파티션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뒤, 급한 안건을 해결한 차선오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30분에 전체 회의합시다.”
여기저기서 네, 하는 대답이 들렸다. 하진은 아무 말없이 애꿎은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그 위로 문득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오늘은… 전부 참석하는 걸로 하죠. 한 명도 빠짐없이.”
그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을 땐, 차선오는 이미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하진은 무언가에 홀린 듯 급하게 일어섰다. 보이지 않는 끈이 그의 몸을 잡아당겼다. 서운하고 부끄러운 감정은 사라지고 오로지 차선오를 따라가야겠단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앞뒤 재지 않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등이 닿을 듯 닿지 않았다. 다행히 팀장실 앞에서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
“서, 선오야!”
“…….”
돌아본 얼굴은 냉정했다. 하진이 부를 걸 예상했단 표정이었다. 그 앞에서 하진은 죄인이 됐다. 어떤 충동 때문에 그를 부르긴 했지만, 이유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문을 텄다.
“있잖아. 어제는 내가….”
“준비 안 해?”
차선오가 말을 끊었다.
“어…?”
“회의.”
감정 없이 서늘한 얼굴 앞에서 하진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이 느낌이, 왜 익숙할까?
길지도 않은 차선오의 말이 꼭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아주 천천히 고막을 파고들었다. 보이지 않는 선이 하진의 앞에 여러 번 그어지며 벽을 만들었다.
공과 사를 구별하라는 의미 같았다. 초라해진 기분에 하진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래서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차선오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어떤 눈을 하고 자신의 몸을 훑어보는지.
“아프겠네. 지금쯤이면.”
그가 하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심지어는 하진에게도 잘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혼자만을 위한 확인 같았다.
“이쪽으로 서. 내 앞에.”
차선오는 팀장실 앞의 벽에 한쪽 어깨를 붙이고, 하진을 그 앞에 서도록 했다. 하진은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가디건 안쪽으로 커다란 손이 불쑥 들어왔다.
“흐…!”
곧바로 얇은 셔츠 위로 확인하듯 가슴을 움켜쥔 차선오가, 힘이 실린 엄지 끝으로 하진의 유두를 튕겼다. 안 그래도 빳빳하게 서 있는 돌기가 직접적으로 건드려지자 숨이 턱 막혔다.
“무슨, 흡, 응…!”
“입 다물어야지. 여기서 다 들키고 싶어? 네 젖꼭지가 발딱 서서 물을 질질 흘린다고.”
그가 평온한 얼굴로 믿기 힘든 말을 했다. 아무리 봐도 그의 얼굴은 아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반면 손놀림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하진은 너무 놀라 속수무책으로 가슴을 내어준 채 벌벌 떨었다.
“…그, 그걸 어떻게….”
차선오는 피식 웃었다.
“아, 내가 모를 줄 알았겠구나.”
“흐, 흐으, 그만….”
가디건 안에서 왼쪽 유두를 꾹 짓누르고 아무렇게나 튕겨대던 손이, 셔츠 단추를 툭 풀어냈다. 소름이 돋았다. 맨 살갗 위로 손가락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안 돼, 이건…. 비록 차선오에게 바짝 붙어 몸 전체가 가려졌지만 그래도 하진이 겁을 먹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어쩌지, 앞으로 알려줄 게 더 많은데.”
“아… 아흐, 읏….”
문득 의문이 피어났다. 어떻게 차선오가 제 욕망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지. 자신은 도저히 만질 수 없던 곳까지, 어떻게 전부 파고들어 아무렇게나 만지고 간지럽히는 건지.
이 모든 게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지.
셔츠 위로는 봐주지 않고 거칠게 움직이던 손이, 정작 맨 가슴을 더듬을 때는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하진은 애가 탔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정신을 놓고 더 강하게 만져달라고 빌고 싶을 만큼, 목이 말랐다. 하아…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제발 거길….
“난 전부 너한테 맞춰주려 했어, 하진아.”
그가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셔츠 안의 손이 집게 모양을 만들어 유두를 꽉 비틀었다. 기어코 물기가 약간 터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하으… 으, 응…!”
“기회를 버린 건 너야.”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거짓말처럼 손이 불쑥 빠져나가고, 셔츠 단추가 다시 채워졌다.
“쉬이, 회의 늦겠다.”
“…….”
“끝까지 자리 지켜. 너 때문에 하는 거니까.”
그게 내가 주는 벌이야. 마지막으로 속삭인 차선오가 더 할 말 없다는 듯 팀장실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진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벌이라는 한 글자를 통해 그의 심정을 어렴풋이 헤아릴 뿐이었다.
닫힌 문 앞에 혼자 남은 그는 뒤늦게 주위를 의식하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차선오의 손이 닿았던 부위가 온통 이상했다. 마치 정상 감도보다 몇 배나 민감해진 듯,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해도 뜨겁고 간지러웠다. 게다가.
“…축축해.”
강하게 짓눌린 유두 주변이 분명 알 수 없는 액체로 젖어 있었다. 만약 차선오가 그 상태로 손가락에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면, 그대로 더 많은 것들이 울컥 쏟아졌을지도 몰랐다.
아침부터 우려하던 상황이, 그것도 차선오의 손길에 의해 일어나 버려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뭘 어쩔 수 있을까. 하진은 약간 구겨진 가디건을 탁탁 펴면서 빠르게 자리로 되돌아갔다.
팀원들은 회의 준비에 한창이었다. 차선오에게 잡혀 있던 시간 때문에 약속된 30분까지는 얼마 남지도 않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망설이던 하진은 무언가 결심하고 빠르게 탕비실 쪽으로 향했다.
“…….”
조심스레 비치된 구급상자를 열고 밴드를 찾았다. 가로로 길쭉한 기본 밴드와 정사각 모양의 밴드를 잡히는 대로 꺼낸 그는 잠시 망설이며 주변을 확인했다.
다행히 탕비실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진은 뒤에서 누가 갑자기 나타나도 잘 보이지 않을 법한 사각지대에 몸을 바짝 맞붙이고, 조심스레 가디건을 좌우로 벌렸다.
“하아….”
셔츠 위로 아침보다 현저히 솟아오른 유두가 보였다. 이대로 회의에 들어갔다간 곤란해질 게 뻔했다. 그는 다시 고개만 돌려 누가 오는지 확인하고선 재빨리 셔츠 가운데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민감해진 가슴을 내놓은 채 밴드를 뜯기 시작했다.
머릿속엔 계속해서 차선오의 손길과 표정이 떠올랐다.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 제게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건지, 하진은 알지 못했다. 간질간질하게 피어오르는 욕망과 이유 모를 서러움이 뒤섞여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실행에 옮기는 수밖에.
그가 뜯어 놓은 밴드를 유두 위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차선오의 손길로 인해 겉이 딱딱해진 데다가, 젖꼭지의 크기도 원래보다 훨씬 커져서 밴드 하나로는 도무지 가려지지 않았다. 특히나 왼쪽은 겉이 살짝 젖어서 접착 면이 잘 붙지도 않았다.
“아… 얼른….”
마음이 급한 나머지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하진은 거의 울먹이면서 겨우겨우 짓누른 유두 위에 밴드를 붙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 위로도 정사각 모양의 밴드를 몇 개나 겹쳐 올리고, 기다란 기본 밴드를 덕지덕지 붙였더니 그나마 고정이 됐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서 셔츠 단추를 다시 잠그자 튀어나온 부분이 많이 눌려 보였다. 이 정도면, 아주 눈에 띄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이렇게나마 숨길 수 있어서….
작업을 마친 하진은 빠르게 뒷정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이미 몇몇 팀원들은 보이지 않았고, 자리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하진을 기다리며 잡담 중이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하진 씨만 안 보여서 기다렸네.”
“아….”
하진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얼른 필기구 따위를 챙겼다.
“죄송합니다. 바로 갈까요?”
“그래요. 시간도 거의 다 됐으니까.”
사람들과 함께 회의실로 움직이려니 기분이 몹시 불안했다. 하진은 주변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가디건을 더 바짝 여미고 노트를 끌어안는 척 가슴을 가렸다.
“근데 하진 씨도 같이 회의 들어가는 건 처음이네.”
“긴장한 거 아니죠? 숨은 왜 이렇게 헐떡거리고.”
“…아….”
아무래도 티가 난 모양이었다. 사실은 아까부터 아침에 샤워하면서 터져 나왔던 야릇한 신음이 남아 목구멍 안쪽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당장 만지고 싶다기보다, 밴드 아래 짓눌린 유두가 한껏 예민해진 탓에 가만히만 있어도 온 신경이 그쪽에 쏠렸다.
“아, 아니에요! 아무 일도….”
하진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부정하니,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저들끼리 짧은 농담이 오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첫 회의여서 긴장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면.
“근데 팀장님은 왜 하진 씨까지 불렀지?”
“그러게요. 왜 굳이.”
“하진 씨, 아마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될 거예요. 모르는 건 잘 적어놨다가 나중에 기회 있으면 물어보고요.”
“네, 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더 꼬투리를 잡진 않았다. 이제 하진 혼자만 잘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회의에 빠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침처럼 당장 차가운 물을 끼얹어서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그저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라면서 버티는 방법뿐이었다.
하진은 회의실 유리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표정 관리에 한껏 신경을 곤두세웠다. 둥근 반원형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기다리니 잘 모르는 다른 팀 인원들도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다 모이고 보니 꽤 머릿수가 많았다. 보는 눈이 많다는 건 그만큼 몸가짐에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걱정이 불어났다.
최대한 주목받지 않으려고 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은 게 그나마 심리적으로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할 순 없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밖으로 달콤한 신음이 새어 나갈 것 같아서 하진은 재채기라도 하는 척 입을 막아야 했다.
“전부 왔습니까?”
잠시 기다리니 차선오가 들어와 상석에 섰다. 그의 눈이 멀찍이 앉은 하진에게로 닿았으나, 곤란한 기색을 숨기기 바쁜 하진은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시작하죠.”
회의실 불이 꺼지고 앞에 걸린 거대한 스크린에 자료가 나타났다. 차선오의 주도하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인원들이 돌아가며 회의를 진행했다.
꽤 중요한 사안인지 대부분 경청하느라 내부는 조용하고 진지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애초에 이해하지도 못하거니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여유도 없는 하진은 도저히 회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흘러내릴 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을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가 간과한 게 있었다. 밴드는 겉모양을 가리는 데에만 도움을 줄 뿐, 그 안에 갇힌 야릇한 성감까지는 전혀 막지 못한다는 사실. 게다가 물기에도 취약했다.
어쩐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차선오의 손끝이 건드려 놓은 왼쪽 유두의 감각이 심상치 않았다.
성기로 사정하기 직전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요의도 아니었다. 힘주어 참을 수도 조절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 분명 기분이 좋을 걸 알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회의실 가득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하진은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진 채로 소리 없이 앓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빔프로젝터에서 반사된 불빛이 정수리 위를 스칠 때마다 거짓말처럼 성감이 짙어졌다.
하진은 혹시 누구라도 볼까 봐 억지로 목을 세워 열심히 스크린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나 이마에 배어난 땀과 경련하듯 굳은 입매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하진 씨. 왜 그래요?”
“아…!”
그걸 알아챈 옆자리의 누군가 하진을 툭 건드리며 속삭였다. 하마터면 그 손길만으로 몸 전체가 크게 튀어 오를 뻔해서, 하진은 다리에 힘을 꽉 주는 것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어디 아파요? 아까부터 왜….”
“흡. 아니, 아닙니다.”
이제 숨도 편히 쉬지 못할 만큼 상태가 나빴다. 자꾸 최악의 상황만 그려졌다. 어떡해. 어떡하지…. 화장실에 가는 척할까. 하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라고 했는데….
너무 조용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모든 사람이 쳐다볼 것 같았다. 절대 이런 꼴로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알아차릴까 봐 무서웠다. 유두가 아플 만큼 발딱 서서 조금만 건드리면 물이 질질 흐르기 직전이라는 걸, 아무도 알아선 안 됐다.
제발, 어서 끝났으면. 정말로 나와버리기 전에…. 오로지 그것만이 간절했다.
하진은 고개를 거의 아래로 파묻은 채, 임시방편 삼아 테이블 위로 팔짱을 껴서 가슴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겨드랑이 아래에 손이 바짝 붙을 만큼 필사적으로 몸을 가렸더니, 오히려 그의 손이 다시금 유두를 스치는 모양새가 됐다.
“…….”
의식의 일부가 뿌옇게 뭉개졌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엄지손가락이 제멋대로 가디건 안쪽을 파고들었다.
살짝… 긁고 싶었다. 셔츠 위로, 아주 살짝만 간지럽히면 어떨까. 어차피 밴드도 붙어 놓았으니까. 아까처럼은 아니어도 잠깐 만져버리면, 차라리 이 모든 게 괜찮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팔 안쪽에 가려진 가디건이 서서히 벌어졌다. 엄지 끝에 힘이 들어가자 이제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왜 안 되는 거지? 이렇게나 기분이 좋은데. 어차피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조금만 몰래 만지면….
“…진 씨.”
그때 조용한 회의실 안에 익숙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진은 듣지 못했다. 상체를 바들바들 떨면서, 당장이라도 선을 넘을 듯한 위태로운 얼굴로 오로지 자신의 세상에만 빠져 있었다. 암시가 만들어 놓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 기어코 회의실에서 젖꼭지를 짓누르기 직전이었다. 순간 하진은 생각했다.
이게 차선오가 말한 벌일까?
“하진 씨…!”
그때 옆자리의 누군가가 하진의 어깨를 급히 흔들었다.
“…흐.”
“하진 씨, 팀장님이 부르시잖아요.”
상체가 크게 흔들리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언가 위험 수위를 넘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하으, 건, 드리지….”
“괜찮아요? 진짜 어디 아픈 거 맞죠? 왜 그러고 있… 어머.”
기어코 가슴에서 뭔가 왈칵 쏟아졌다.
“흣, 흐으.”
하진은 참지 못하고 작게 흐느꼈다. 겨우 움직임을 참던 어깨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상체 전체가 힘없이 무너졌다.
하진의 셔츠 안쪽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그 느낌이 너무 선명해서 하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실금이라도 한 듯한 기분. 그러나 그보다 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가슴에 이런 게 나올 리 없으니까. 그것도 아주 조금 건드렸다는 이유로….
왜 이렇게 된 거지?
그토록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지자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양쪽이 아니라 한쪽에서만 젖물이 흘러나왔단 사실이었다.
“…하, 아앗, 흑.”
천을 둥글게 적신 가느다란 물줄기는 곧 피부를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느낌이 마치 손가락 끝으로 맨살을 간질이는 것처럼 좋았다.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하진의 입술이 안타깝게 떨렸다. 그가 짧게 몸서리치며 숨을 깊이 들이켰다. 가까이서 비릿한 단내가 확 풍겨왔다. 그 냄새가 간신히 하진을 현실로 데려다주었다.
벗어나야 해, 당장…. 여기서 이럴 수는….
겨우 고개를 들기 무섭게 상석에 선 차선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또렷했다. 마치 모든 걸 아는 것처럼, 오로지 하진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늘 그래왔던 게 분명했다.
위기감을 느낀 하진이 급하게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다시 젖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그가 한쪽 손으로 젖어버린 가슴을 가리면서 남은 힘을 다해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의 불빛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과한 충격 속에서 하진의 정신이 위태롭게 깜빡였다.
누군가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긴 그림자가 졌다.
“끝까지 자리 지키랬잖아.”
차선오의 목소리.
들켰을까?
물론 그럴 것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숨길 수 없으니까. 그의 앞에선 전부, 뭐든 솔직해야 하니까. 어디가 간지러운지, 느낌이 어떤지, 어딜 만져주면 기분이 좋은지… 전부 말해야 하니까.
하진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
만지기 좋게 있어야 하는데. 선오가 언제든 빨기 좋게….
“흐윽, 마, 만져줘.”
제발, 선오야.
뇌리에 새겨진 암시가 하진을 덮쳤다. 축축한 셔츠가 가슴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집에 가자. 눈이 감기기 직전,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쏟아지는 모든 것이 달콤한 악몽이었다.
*
복도는 지나가는 이 하나 없이 조용했다. 그 가운데 군림하듯 선 차선오는 기절한 하진을 일으켜, 망설임 없이 등에 업었다.
계획대로 차에 태워 집에 돌아갈 생각에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어깨와 날개뼈 사이에서 이상한 느낌이 번졌다.
“흐으… 응….”
가느다란 신음. 이어 가까이서 풍겨오는 비릿한 단내가 코끝을 찔렀다.
차분했던 이성 어딘가가 크게 뒤틀렸다. 그의 두 발이 멎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능을 참지 못한 차선오는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다른 회의실 문을 열었다.
비어 있는 널따란 테이블 위에 잠든 하진을 눕히고, 문을 잠갔다. 혹시 모를 상황을 생각하면 팀장실까지 가는 게 좋겠지만 그럴 정신도 없었다. 하아…. 긴 숨을 뱉은 그가 입고 있던 여름용 정장 재킷을 천천히 벗었다.
하진의 가슴과 맞닿았던 부위에, 희끄무레한 물방울이 묻어 있었다. 마침 검은색의 재킷이라서 그 대비가 더욱 선명했다.
“…….”
차선오는 젖물이 묻은 자신의 옷을 천천히 들어 올려 정확히 젖은 부위에 코를 박았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얌전히 널브러진 하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풋내가 섞여 있었는데 어느새 급격히 무르익었는지 달콤하고 깊은 냄새가 풍겨왔다. 차선오는 다시금 깊이 숨을 들이쉬며 반대쪽 손으로 하진의 가디건을 양옆으로 벌렸다.
셔츠의 왼쪽 가슴만 눈에 띄게 젖어 있었다. 그의 눈이 탐욕으로 가느스름해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젖은 얼룩 뒤로 당연히 보여야 할 진분홍빛 유두 대신 무언가 네모난 이물질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그제야 재킷을 던지듯 내려놓고 하진의 왼쪽 유두를 문질러 보았다.
“흣… 흐.”
정신을 잃고도 기분이 좋은지 하진이 애타는 신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손끝으로 촉촉하고 도톰한 돌기 대신 두툼하고 미끄러운 비닐 같은 게 만져졌다.
차선오는 경련하듯 연신 움찔움찔 떨리는 하진의 어깨를 짓누르면서, 그의 셔츠 단추를 뜯듯이 풀었다. 그러자 정확히 젖꼭지 위에 하진이 급하게 덕지덕지 붙여 놓은 밴드가 드러났다.
“…언제 이런걸.”
팀장실 앞에서 하진을 돌려보낸 뒤 회의가 되기 시작까지, 그 짧은 사이에 이런 짓을 벌였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한 차선오가 다소 황당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반대쪽도 여러 개를 붙여 놓긴 했으나 아까 만져 주어 한 차례 물을 흘린 왼쪽 유두에는 유독 더 많은 밴드가 질서 없이 붙어 있었다. 덕분에 뭘 의도했는지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한 게 가상하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진의 노력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잠깐 업힌 자세로도 어깨에다 음탕한 젖물을 묻혀 놓을 만큼, 이미 그 주변이 흠뻑 젖어 있었으니까.
“…….”
차선오는 하진의 셔츠 단추를 아예 끝까지 다 풀어헤쳐 버리고는 여러 겹의 밴드를 한꺼번에 쭉 잡아 뜯었다. 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아슬아슬하게 끝만 겨우 남기고 단숨에 떨어지는 건, 순전히 그 안에 묻어난 젖물 때문이었다.
접착력이 떨어진 밴드를 어렵지 않게 옆으로 젖혀 놓은 차선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탐스러운 색으로 퉁퉁 부은 유두 주변이 온통 허연 액으로 번들거렸다. 노골적인 발정의 증거였다. 그가 하진의 축축하고 미지근한 가슴에 코를 박았다.
“흐응, 흐….”
“후으… 하진아. 박하진.”
확실히… 농도가 더 진했다. 그는 갈증에 시달려온 짐승처럼 그 모든 냄새를 게걸스레 들이켰다.
계획대로라면 어제 야근 후에 이걸 전부 맛봐야 했는데. 그것으로 하진의 지난 한 달을 축하하고, 주겠다는 생활비를 대신하려 했는데. 일에 집중한 잠깐 사이에 하진이 사라져버릴 거라곤, 차선오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조차 몰랐던 빈틈이었다.
하진의 빈자리를 확인했을 땐 어땠더라.
모든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지난 시간 전부를 통째로 부정당하는 듯한, 처참하고 공허한 기분.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건, 아마도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이번엔 분명 제게 돌아올 걸 알면서도 또다시 형태 없는 겁에 떨었던 건, 순전히 하진이 이미 12년이나 저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선오에게 그보다 두려운 건 없었다.
그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렇게 제 손을 떠난 와중에도 홀로 유두 자위를 한 흔적만큼은 적나라했다. 이걸 기쁘다고 해야 할지…. 내보내지 못한 모유가 잔뜩 들어찬 가슴은 하루 사이에 부쩍 물이 오른 듯 보였다. 조금만 세게 쥐어도 금세 많은 양을 쏟아낼 것처럼 탐스러웠다.
폐부를 다 채울 기세로 한동안 하진의 냄새만 맡고 있던 차선오는 참지 못하고 그 위에 입술을 대고 말았다.
“응…!”
그저 가느다란 숨만 내쉬었을 뿐인데, 하진이 가슴을 크게 튕기며 자지러졌다. 그는 같은 행위를 몇 번 더 반복했다. 마치 얼어붙은 손을 데우듯이 따뜻한 입김으로 반질반질하게 젖은 유두를 간지럽히고 애태우다, 조심스레 혀를 내어 돌기를 길게 핥았다.
“하… 앗, 응.”
꼭 감긴 하진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차선오가 매일 밤 그에게 사랑을 퍼부을 때 보이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로 하진은, 차선오의 부드러운 혀 위에 묽은 젖물을 쏟아내며 기뻐하고 있었다.
“흐… 아으응….”
아주 작고 흰 방울들이 몽글몽글 올라와 축축한 혀로 스몄다. 비릿하고 달콤한 맛이 입 안의 점막을 적시자, 차선오는 마치 숭고한 키스라도 하듯 그걸 공들여 핥기 시작했다.
츕, 츄읏…. 젖은 돌기를 입술 사이에서 굴리며 간질이다 사탕처럼 빨기 시작하니, 질척한 침 소리가 빈 회의실에 은밀하게 울렸다.
“흐읏, 흐, 하아, 응….”
주사기로 약물을 주입한 뒤로 본격적으로 하진의 가슴에 차오르기 시작한 젖물은 이전보다 훨씬 달고 진했다. 적어도 차선오가 느끼기엔 그랬다. 조금만 톡 건드려도 기다렸다는 듯 수줍게 왈칵 쏟아내는 게 예뻤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잘 어울리기까지 했다.
그는 모든 불만을 잊고 말았다. 그저 자신이 만든 하진이 지나치게 소중해서, 힘을 전혀 주지 않은 혀끝으로 맛을 보듯 유두를 빨고 탐했다. 혹시나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쏟을까 손으로 주변을 세게 잡지도 못했다. 잠든 하진 앞의 그는 어떤 조바심도 없는, 다정하고 평온한 애인이었다.
아래가 뻐근하게 당겨왔다. 사실 하진이 내쉬는 숨만으로도 그는 발기했다. 얼마간 왼쪽만을 핥다 자연스레 손을 반대쪽으로 옮겨 오른쪽 유두를 튕기기 시작하자, 하진은 무의식중에 느껴지는 과도한 쾌감에 소리도 더 내지 못하고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곧 오른쪽에서도 약간의 물기가 느껴졌다. 마치 차선오의 손이 닿기만을 기다렸단 것처럼 많은 것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다리를 벌려 아래에 박으면 상체가 흔들릴 때마다 가슴에서 흰 물이 흐를 게 분명했다. 당장 저지를까. 차선오는 생각했다. 오래 공들여 온 순간이니 기왕이면 둘만의 집에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당장 하진의 안에 좆을 쑤셔 박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그 좁고 뜨거운 구멍에다 끈적한 정액을 넘치도록 흠뻑 싸주고 싶었다.
“하아….”
차선오의 젖은 입술 새로 한숨이 흘렀다. 그래도 역시 집으로 데려가는 게 좋겠지. 잠든 하진을 깨워서 저를 향한 마음을 전부 표현하게 하고 싶었다. 오직 저만을 위해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를 내질러 줄지 충분히, 오래도록 듣고 싶었다.
어렵게 상체를 세운 그가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하진의 가슴을 공들여 닦았다. 그 부드러운 감촉에도 연신 물이 흘러 곤란했으나, 가장 잘 느끼는 유두 대신 그 주변을 꾹 누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질질 흐를 정도는 아니게 됐다.
이어 잠시 젖혀둔 밴드를 꼼꼼히 붙이고, 셔츠 단추를 잠가 주었다. 가디건까지 추스르고 나니 겉모습만 봐선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비록 위험한 빛으로 발그레하게 물든 뺨이나, 흐트러진 호흡까지는 숨길 수 없었지만.
차선오는 어깨가 젖은 재킷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다시 하진을 둘러업었다. 그렇게 회의실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 팀장님.”
예상 못 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마주친 시선이 등에 업힌 하진에게로 닿았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단단히 충격을 받은 듯한 창백한 낯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을 듯 비장하게까지 보였다.
“저… 다 봤습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복도에 조용히 울렸다.
“팀장님이 하진 씨한테 뭘 했는지, 전부 다요.”
“…….”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네?”
“…하.”
차선오는 잠시 눈앞의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전히 흰 물기가 남은 입술로 중얼거렸다.
“귀찮게 됐네.”
*
몸이 크게 덜컹거렸다. 머리 한쪽이 어딘가에 콱 부딪히는 둔탁한 느낌에, 깊이 잠들어 있던 하진의 정신이 깨어났다. 하지만 그게 아프단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 전체가 스산한 긴장감으로 굳어버렸다.
“…….”
차는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도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이는 물론… 차선오였다. 그러나 핸들을 쥔 그의 옆얼굴은 흡사 다른 사람 같았다.
“선….”
하진은 버릇처럼 그를 부르려다 빠르게 마음을 바꾸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분명히 회의실에서 뛰쳐나와서 그를 본 기억은 있는데, 언제 이렇게 차에 실렸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수면 아래 잠긴 두려움이 떠올랐다. 또 이렇게 기억이 끊기다니. 아니, 그보다….
“깼네.”
“…흡.”
“다 와 가. 좀 늦었지만.”
끼익! 핸들을 과격하게 꺾으며 차선오가 중얼거렸다.
“성가신 일이 생겨서… 그거 처리하느라 아까운 시간이 너무 가 버렸지 뭐야.”
“…무슨….”
“회사를 통째로 어떻게 해버려야 하나 고민 중이야.”
그가 무감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진의 어깨가 다시 창가에 부딪혔지만 이번에도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네가 걱정할 건 없어.”
“…….”
“금방 집일 텐데 그냥 편하게 눈 붙이고 있지.”
누가 봐도 심사가 뒤틀린 듯한 차선오의 행동. 표정. 그와 달리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가 괴리감을 주었다.
“어디 불편해?”
“…그게.”
불편했다. 언제부턴가 그의 생각을 조금도 알 수 없게 되어서. 차선오가 다른 사람처럼 보여서. 하진은 차 내부에 부딪힌 머리나 어깨 대신, 턱을 내려 자신의 가슴을 확인했다.
젖어 있었다…. 그것도 양쪽 모두, 엄청나게.
가디건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가슴 쪽의 셔츠가 엉망이었다. 심지어 방금 흘린 것도 아닌지 얼룩 테두리가 약간 뻣뻣하게 굳어 희끄무레했고, 가슴 위를 가로지르는 안전벨트의 안쪽까지도 반투명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흐….”
겉으로 보기에 이 정도라면 셔츠 안은 완전히 엉망일 게 분명했다. 하진이 직접 피부로 느끼기에도 심각할 정도로 축축했다. 좋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된 몸 상태를 확인한 하진은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아프게 씹었다.
혹, 차선오가 다시 만진 걸까? 정신을 잃은 사이에 아무렇게나 손을 넣어서 만졌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면 셔츠 위로 문질렀다거나…. 하지만 도무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해 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알 수 없는 욕심이 샘솟았다. 아까 했던 대로, 다시 가슴을 만져달라고 부탁해 보고 싶었다. 아니, 이 정도로 젖었으면 차라리 빠는 게 나을까…?
“…….”
정말 이상한 발상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반쯤은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떨쳐내기 어려운 합리화이자 모순이었다.
“…흡….”
이제는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성감이 유두 주변으로 바짝 모였다. 애타는 신음을 겨우 삼키면서, 하진은 성욕을 떨쳐내기 위해 오른손으로 차 문을 붙잡았다.
그러자 여태 고개를 돌리지 않던 차선오가 갑자기 하진의 반대쪽 팔을 강하게 쥐고 당겼다. 끼이익! 차가 도로 한쪽에 멈추었다. 돌발적인 급정거에 하진의 상체가 크게 들썩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흐아, 읏.”
이미 젖은 셔츠 얼룩 위로 젖물이 다시 왈칵 새어 나왔다. 뽀얀 우윳빛의 액체가 안전벨트에 묻어난 게 확실히 보이자 하진은 당황해 얼른 그걸 손으로 가렸다. 그걸 벨트를 풀려는 것이라 착각한 차선오는, 이미 강하게 붙든 하진의 왼쪽 팔을 더 아프게 움켜쥐었다.
“어디 가려고.”
“아흑….”
하진은 겁에 질려 그를 보았다. 마주 본 얼굴이 여전히 다른 사람처럼 딱딱해 보였다.
“무슨….”
그 순간, 이상하게도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교실 한구석에 홀로 말없이 앉아 있던 차선오가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치고 싶다는 눈이었다. 하진을 당장이라도 어떻게 하고 싶다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눈.
“…….”
하진은 기억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꼼짝도 못 하고 차선오의 진짜 얼굴과 마주했다.
실은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일이라 그에 대한 기억 자체가 아주 희미했지만, 이상하게 가까이서 보니 알 수 있었다.
분명 지금과 똑같이 잘생겼는데도 왠지 꺼려지던 녀석. 같이 웃고 편하게 떠들기엔 묘한 온도 차가 느껴졌던 같은 반 애.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진에게 남은 차선오의 인상은 딱 그 정도였다.
“어디 가려는 거냐고 물었잖아. 대답 안 해?”
“내가 가긴… 어딜 가.”
“…….”
“그냥 좀, 멀미가 나서 그런 거야.”
하진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팔… 아픈데. 야, 안 그래도 너 힘센 거 알거든. 나 어디 안 가. 그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차선오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딱딱한 얼굴도 빠르게 바뀌었다. 재회 후에 늘 하진을 대했던 그 다정한 얼굴로.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변화는 빨랐다.
“후.”
“…….”
“가버리는 줄 알았잖아. 또 나만 두고.”
그가 알 수 없는 소릴 하면서 아프게 잡았던 하진의 팔을 달래듯 부드럽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이제는 아까처럼 과격하지 않았다.
…화가 풀린 건가? 그 갑작스러운 기복이 이상했지만 하진은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모호해도, 다정하고 친절한 쪽의 차선오가 하진은 훨씬 좋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팔뚝 안쪽의 여린 살을 건드리기 시작하고부터는, 그쪽으로 가슴을 비비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아야 했지만.
하진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정상 속도로 운전하는 차선오에게 살짝 물었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뭐가?”
“회사는 어쩌고 왜 차에…. 우리 회의 중이었잖아. 네가 말한 성가신 일이란 건 또 뭐고…?”
순간 차선오의 단단한 손등이 하진의 겨드랑이 가까이 맞붙으며 유륜 근처를 스쳤다.
“흣! 으….”
그러나 손은 이내 다시 팔뚝 쪽으로 옮겨갔다. 팔을 주무르는 힘이 딱 가슴을 만지기 좋은 정도였다. 하진은 애가 탔다. 지금 그대로 조금만 더 이쪽으로 옮겨주면 좋을 텐데….
“아파서 조퇴 처리했어.”
“그, 흐… 그랬구나.”
하진은 자신이 얼마나 티를 내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요의를 참듯 바짝 맞붙인 허벅지를 배배 꼬면서, 차선오의 손에 매달리듯 상체 전부를 기댄 채 마지막 자존심처럼 얼굴만 앞을 향한 모습. 누가 봐도 조금만 건드리면 무너지기 직전의 꼴이었다.
“회의는 걱정 마. 같이 있던 사람들도. 아무도 기억 못 하게 될 테니.”
차선오는 친절히 설명했다.
“그, 그래? 잘, 하아… 잘 됐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 전부가 기억을 못 하게 되는 건지는 몰라도, 하진은 일단 안심했다.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말았으니까. 회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게 아니라면 다행이었다. 사실 애초에 자신이 참석할 만한 회의도 아니었고.
그런데 차선오라면 얘기가 달랐다. 아직 업무 시간일 텐데. 하진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근데 선오 너는…? 넌 왜 조퇴했어?”
“난 너 간호해야지.”
차선오가 그제야 픽 웃었다.
“그거 나밖에 못 하는 거잖아.”
그 말 역시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
문득 하진은 차선오가 자신에 대해 말할 때 늘 어떤 확신에 차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확신이 차선오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모습에 비틀린 위화감을 불어넣는 것 같단 생각이었다.
그게 뭘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하진은 오피스텔 주차장까지 가는 내내 그러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려.”
그러나 정작 차가 멈추고 먼저 내린 차선오가 조수석 문을 열자, 당장의 문제와 직면했다.
“음… 나, 나는 따로 올라갈래.”
“따로?”
고집스럽게 가리고 있던 가슴 부위를 내보일 자신이 없었다. 팔을 주무르며 은근히 스친 탓에 분명 눈치챘을 텐데도, 그에 대해 차선오가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아 자신이 없었다. 마음을 접어야겠다고 결정한 고시원에서의 아침이 떠올랐다.
“어. 금방… 바로 따라갈 테니까 너 먼저 올라가.”
차선오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는 침묵이 아까의 상황을 떠오르게 했다. 하진은 급히 덧붙였다.
“다른 데 안 가….”
아무래도 차선오가 그 문제에 민감한 듯해서.
그래도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하진은 고민하다가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어차피 갈 데도 없어. 그리고 내가 아침엔 너 화난 것 같아서 얘기 못 했는데….”
“뭘?”
“시, 실은 어제도 고시원 갔다가 깜빡 잠든 거야.”
“…….”
“얘기하자면 길지만, 난 너랑 쭉 살고 싶어서…. 미리 고시원에서 짐 챙겨 오려다가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말고….”
혹여 무슨 오해를 할까 봐 횡설수설 떠들었더니 차선오가 갑자기 확 달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랑, 쭉 살고 싶다고?”
믿기 힘들다는 목소리였다. 황당해하거나,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다행인가…? 하진은 이런 얘길 꺼내기엔 상황이 좀 갑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래. 근데 말하기가 좀, 염치없는 것 같아서. 선오 네 생각이 어떤지도 모르고 하니까 말없이 혼자 다녀오려고 했지. 어쨌거나 난 너한테 신세 지고 있잖아.”
“…….”
“고시원 월세도 그렇고, 월급도 받았으니 너한테 생활비도 이중으로 줘야 하는데 그게 좀 부담이었어. 갚을 빚도 남았고….”
“…….”
“그리고 요즘 이상하게 피곤하단 말이야. 잠은 충분히 많이 자는 것 같은데.”
중얼거리는 내내 차선오는 하진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다 말하고 나니 문득 철없는 투정처럼 들렸을까 싶었다. 하진이 조금 민망해져 고개를 살짝 돌리니,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피곤한 건.”
“응?”
“…그건 네가 밤에 잠버릇이 심하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아… 그래? 그건 몰랐는데…. 너한테 피해 주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얼마나 좋은데.”
“…….”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잠버릇 심한 동거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하진이 이상한 기분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음에도, 차선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얘기했다.
“하진아. 나랑 쭉 살고 싶다는 말, 진심이야?”
“어?”
마주한 눈이 당황스러울 만큼 진중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진심이 아니라고 할 상황도 아니었다. 하진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소심하게 말했다.
“뭐… 난 그럴 수 있으면 좋지.”
“그럼 계속 나랑 살아.”
차선오는 준비한 사람처럼 말했다.
“어디 가지 말고, 계속 나랑 있어. 월세니 뭐니 그딴 거 신경 쓰지 말고. 빚 걱정도 할 필요 없어. 평생 지금처럼, 편하게 살게 해줄게.”
“…….”
“응? 그러자.”
얼핏 프로포즈 같단 생각이 스쳤으나 하진은 빠르게 의문을 떨쳐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아하하… 그래, 뭐. 꿈같은 얘기긴 하다.”
하진이 농담으로 넘기려 하자 차선오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하는 말 아니야. 내가 진작 그랬잖아. 언제든 돌아올 집이라고 생각하라고.”
그런 말을 했던가? 어리둥절해진 하진은 기억을 되짚으려 했다. 그러나 차선오의 절박한 목소리는 잠깐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 네 거라고 생각해. 내가 가진 거 전부, 네 거나 다름없어.”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필요한 거 다 줄게, 하진아. 넌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오늘따라 정말 이상했다. 하진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차선오의 단단한 손이 하진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 손길에 망설이던 입술이 열렸다.
“좋아, 그럼….”
그러자 차선오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
“…네가 왜?”
“한 번 안을까? 화해의 의미로.”
그렇게 제안하는 차선오는 이상하게 벅차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잘된 일인가? 걱정했던 월세 문제를 해결하게 됐으니. 하진은 찝찝함을 떨쳐냈다. 과정을 제쳐두고 결과만 보기로 했다. 그가 마지못해 끄덕이니 바깥에 선 차선오가 순식간에 하진의 안전벨트를 풀고, 그를 안아 올렸다.
시트에 기대어 있던 몸 전체가 확 들리더니, 어느새 차선오의 너른 품 안이었다. 조수석 문이 닫히고 차가 잠겼다. 그제야 따로 올라가려던 계획이 떠올라 입을 떼려는데 바짝 맞붙은 가슴 위로 차선오의 옷깃이 스쳤다.
“아! 자, 잠깐….”
“올라가자. 우리 집으로.”
“그만… 흣, 이, 이제 놔.”
놓으라는 데도 차선오는 전혀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대로 하진을 끌어안고 움직였다. 안긴 채로 몸이 질질 끌려갔다.
이게 뭐지…. 하진은 차선오의 품 안에서 움찔움찔 떨면서 최대한 가슴이 닿지 않도록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나 애초에 체격 차이 때문에 가능할 리가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 전체가 바짝 맞붙었다. 하진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나마 평일 낮이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결국 차선오의 품에 안겨 오피스텔 앞까지 도착한 하진의 성기는, 어느샌가 바짝 발기해 있었다. 그게 차선오의 허벅지에 닿을 것 같아 하진은 무척 신경 쓰였다. 분명 감촉이 느껴질 텐데, 정작 몸을 겹친 당사자는 아무 말이 없어 더 민망했다.
“도착할 때 됐다고 시간 맞춰 세운 거야?”
차선오는 문 앞에 도착해서야 입을 열었다. 그의 단정한 손끝이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어…?”
“어차피 앞은 쓸 일 없는데, 그래도 예쁘긴 하겠다. 가슴 빨리면서 계속 세우고 있으면.”
하진은 귀를 의심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진짜 귀엽거든. 전부 핥아주고 싶을 만큼.”
미친 소리를 해대는 차선오의 얼굴이 퍽 즐거워 보였다. 문이 열렸다. 익숙한 집 안 풍경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너… 미쳤어? 무슨 이상한 소릴….”
하진은 눈을 깜빡이며 간신히 되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차선오의 다정한 손이 그를 잡아당겼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