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6)

5.

“하진 씨! 축하해요.”

오후 4시가 지나갈 무렵. 사무실은 조용했다. 떨어진 집중력을 억지로 끌어 올려 문서 작업을 하던 하진의 등을 누군가 툭 쳤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늘 살갑게 구는 같은 팀 사원이 웃고 있었다. 아, 규빈 씨였구나. 하진이 중얼거렸다.

“…근데 축하하다니, 뭘요?”

“오늘 월급날이잖아요! 하진 씨 첫 월급이죠?”

“네? 오늘이 벌써….”

하진은 급하게 탁상 달력을 살폈다. 정말이었다. 인턴으로 입사한 지 딱 한 달은 아니지만, 회사 전체의 급여일이어서 하진으로서는 첫 월급을 받는 날이었다.

“그 표정은 뭐지. 설마 몰랐어요?”

“아뇨…! 들었는데 깜빡했어요. 제가 처음이라 신경을 못 썼나 봐요.”

과하게 놀란 표정을 지은 김규빈이 주변을 살피다가 의자를 바짝 당겨 하진에게 속삭였다.

“아니, 회사는 돈 벌러 다니는 건데 그걸 신경 안 썼다고요?”

“…그러게요. 요즘 정신이 없어서.”

“계획 없어요? 첫 월급 기념으로 사고 싶은 거라든지.”

너스레 떨며 묻는 말에 하진은 생각에 잠겼다.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으나 우선은 차선오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무엇보다 그에게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무사히 월급을 받는 것도 순전히 그의 덕분이니까 뭐라도 하는 게 좋을 텐데….

“근데 하진 씨, 뭐 많이 바쁘고 힘든 거 있어요?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좀 피곤해 보이네.”

“제 얼굴이 왜요?”

“쓰읍, 보자…. 잠깐만. 어깨 제대로 펴고 나 똑바로 봐봐요. 확실히 좀 달라지긴 했는데?”

막무가내로 뻗어온 김규빈의 손이 몸을 만지고 자세를 고쳤다.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하진은 말 한마디도 못 하고 얼떨떨하게 앉아 있었다.

“맞네. 하진 씨, 요즘 잠 잘 못 자죠? 얼굴이 딱 수면 부족인데.”

“음… 아뇨. 아니에요. 저 되게 잘 자는데.”

“그래요?”

하진은 어색하게 콧등을 긁적였다. 사실 잘 잔다고 하기에도 잘 못 잔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퇴근 후 하진이 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곧장 차선오의 차를 타고 그의 오피스텔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쉬고, 씻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전부인, 반복적인 일상이었다.

좀 이상한 건 그 평범한 장면들이 드문드문 끊겨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분명히 뭔가를 한 건 확실한데, 그때 나눈 정확한 대화나 행동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장 어젯밤을 돌이켜 봐도 그랬다. 저녁을 먹고 같이 소파에서 티브이를 본 것 같은데, 그 행동을 했다는 자각만 있을 뿐 자세한 장면은 아주 흐리멍덩했다. 마치 누군가 억지로 머릿속을 헤집고 흐트러뜨린 것처럼.

우스운 생각이었다. 머릿속을 헤집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하진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네. 저 엄청 푹 잘 자요. 매일매일.”

게다가 그는 요즘 한 번 잠이 들면 절대 깨지 않고 죽은 듯이 잤다. 그게 질 좋은 수면 습관이라는 것쯤은 하진도 알았다. 고시원에 살 땐 지긋지긋한 더위와 추위, 층간 소음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도 여러 번 깨곤 했으니까. 그런 방햇거리가 전혀 없는 오피스텔에서는 깊이 잠드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이따가 퇴근하고 거울 한번 잘 봐요. 다크서클도 이만큼 내려오고 안색이 창백해선…. 하진 씨 처음 왔을 땐 되게 밝고 기운도 넘쳤는데. 나쁜 뜻은 아니고 걱정이 돼서 그래요. 괜히 내가 다 아깝네. 그거 돈 주고도 못 만드는 이목구비인 건 알죠?”

“하하…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피곤해 보이는 걸까. 하진은 대충 대답하며 넘겼지만 저도 모르게 고민에 빠졌다.

사실 충분히 자는 것치고 아침마다 유독 피로감이 느껴지긴 했다. 원래도 몸이 약한데 낯선 직장에 적응하느라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김규빈의 말을 듣고 보니 어째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린 퇴근길보다 푹 자고 일어난 출근길이 훨씬 지치고 피곤했던 것도 같았다.

월급 받는 김에 보약이라도 챙겨 먹어야 하나. 아니, 그보다 생각해 보니 첫 월급을 받고 나면 차선오에게 방값과 생활비를 줘야 했다. 보약 같은 사치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대가 없이 자신에게 인턴이라는 기회를 주고, 쾌적한 동거 장소까지 내어준 그에게 빚을 갚는 게 우선이었다.

그 얘기를 분명 오피스텔에 간 첫날에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정리했는지는 가물가물했다. 이런 중요한 것조차 잊어버리다니…. 기억력 감퇴가 좀 심각하긴 했다. 어쨌거나 당연히 주는 게 맞으니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 문제는 얼마를 주냐는 건데….

“어? 잠깐만요.”

“네?”

“하진 씨 왜 그렇게 피곤한지 알았다!”

“무슨….”

생각에 빠진 하진에게 김규빈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회의실에 갔던 팀원들이 우르르 들어와 말을 잘랐다.

“둘이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아주 바짝 붙어서 소근소근.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

그중엔 차선오도 있었다. 하진은 업무 시간에 딴짓을 하다 걸린 게 당황스러워 시선을 올렸다가 곧장 그와 눈이 마주쳤다.

“…….”

순간 몸이 얼어붙을 만큼, 아주 서늘한 눈이었다.

“에이, 과장님도! 그게 아니라 오늘 하진 씨 첫 월급이잖아요. 그 얘기하다 보니까 갑자기 얼굴이 엄청 피곤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왜 그럴까 생각하던 중에 방금 딱 알아챈 참이었던 거죠.”

“어어, 나도 느끼긴 했어.”

“혹시 그거 아냐? 규빈 씨가 하진 씨 뒤에서 괴롭히는 거?”

“차장님, 섭섭하게 무슨 소리세요. 제가 하진 씨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너무 좋아하는 게 보여서 하는 말이지. 일방적인 애정 공세가 은근 사람을 피곤하게 하거든.”

하진은 저를 가운데 두고 왁자지껄 이어지는 잡담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평소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차선오의 표정이 낯설고 두려워서, 거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고요. 제가 보니까 하진 씨 요즘 몰래 운동하는 것 같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신이 난 김규빈과 다른 팀원들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운동? 그런가?”

“네. 보세요. 하진 씨 가슴 쪽이 좀 뭐랄까… 빵빵해지지 않았어요?”

“응? 가슴이?”

짧은 침묵이 번졌다. 의아한 시선들이 셔츠를 입은 하진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진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몸을 가리는 체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렇게 주목받는 게 민망했다.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어? 진짜.”

“듣고 보니 그래 보이네. 하진 씨 요즘 웨이트 해요? 얼굴이랑 좀 매치가 안 되는데.”

“근데 다른 데는 근육이 하나도 안 붙었는데요? 여기, 여기, 팔뚝이랑 어깨도 그렇고. 가슴 운동만 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어요?”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웨이트라니, 가슴 운동이라니. 아무리 퇴근 후의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다고 해도 따로 운동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하진은 그런 쪽에 쥐약이었다. 변한 게 있다면….

“…….”

하진은 조심스럽게 턱을 내려 가슴 쪽을 살펴보았다.

사실 얼마 전부터 거기가 유독 이상하긴 했다.

한 번씩 근육통이 오는 것처럼 뻐근하게 당기거나, 과하게 간지러워서 긁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민감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냥 생활 패턴이나 사는 환경이 달라져서 그런가보다 하고 가볍게 넘겨왔는데 겉으로도 달라 보이는 줄은 몰랐기에 이 상황 자체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저기… 아니에요. 저 운동 같은 거 안 하는데….”

뒤늦게 하진이 해명해 봤지만 이미 동료들은 저마다 다른 대화에 빠져 떠들기 바빴다. 그 이상한 상황 속에서 하진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훑어보았다.

정말 그런가? 모두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서 며칠 사이에 갑자기 가슴이 커지다니.

근육이 붙은 것처럼 빵빵해졌다고 할 만큼은 전혀 아닌데, 이상하게 안에 뭔가가 꽉 찬 듯 무거운 느낌은 확실히 있었다. 살이 찐 건가?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몸이 가벼워졌다 싶은데 어떻게 딱 여기만….

“…아.”

그때 어느새 다가온 차선오가 하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순간, 무언가 이상한 장면이 하진의 눈앞에 떠올랐다.

장면 속 장소는 익숙했다. 차선오의 오피스텔. 거실의 소파 위였다. 하진은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앞이 다 풀어 헤쳐진 채로, 몸 전체가 위아래로 흔들흔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소파에서 그런 꼴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의문이 자라나는데, 불현듯 어떤 감각이 되살아났다. 무언가 축축하고 말캉한 게 가슴에 닿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느낀 쾌감까지 무서울 만큼 생생히 떠올랐다.

사무실 한복판. 최면에 걸리지 않은 하진의 몸에, 고스란히.

“…흣…!”

갑자기 입 밖으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떠들던 동료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의아한 눈으로 하진을 보았다.

“하진 씨, 왜 그래?”

“어디 아파요?”

…말도 안 됐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방금 본 건 뭘까. 누군가에게 맨 가슴을 잔뜩 내밀고서 몸을 비비던…. 그 장면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 하아, 흑.”

다시 떠올리기도 겁날 만큼 추잡한 광경이었다.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날 리도 없는 비현실적인 망상. 하진은 맹세코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본인의 의지로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이런 게 가능한가? 그것도 사무실에서 갑자기, 대체 뭐 때문에?

“하진 씨!”

“갑자기 땀을 왜 이렇게….”

패닉에 빠진 하진은 어느새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귓속에 물이 찬 것처럼 모든 말들이 뭉개져 들렸다. 할 수만 있다면 곧바로 일어서 어디로든 뛰쳐나갔을 테지만, 그조차 불가능했다. 믿을 수 없게도 다리 사이가 아플 정도로 뻐근하게 당겨왔다. 발기한 것이다. 고작 십 초 남짓 이어진, 음탕하고 흉측한 환상을 보고서.

하진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가슴이 또다시 이상했다. 조금 전 느꼈던 알 수 없는 쾌감이 잔상처럼 남아 계속해서 그를 좀먹고 있었다. 간신히 참고는 있어도 스스로 만져서 확인하고 싶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이 솟구쳤다.

“저기, 저… 저는…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만약 조금 전 같은 상황이 한 번이라도 다시 반복됐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저질러 버릴 게 분명했다.

“다들 업무 마무리 안 합니까?”

그때 잊고 있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

차선오였다. 어느새 하진의 어깨를 감싸 쥐었던 손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손이 계속해서 몸을 짓누르는 느낌은 남아 있었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부위로부터 시작된 불순한 욕망이 어떤 소리도 없이 하진을 부추겼다.

“하윽, 흡….”

하진은 물에 빠졌다가 구해진 사람처럼 크게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주변에 선 팀원들이 그런 하진을 걱정스럽게 쳐다봤으나, 차선오가 막아서듯 하진의 뒤에 붙어 교묘하게 몸을 가리는 바람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휴식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 방금 회의 참석 인원들, 내일 오전에 다시 살펴볼 이슈들 분담해서 퇴근 전까지 공유하는 걸로 하죠. 나머지도 하던 업무 마저 정리합시다.”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에 즉시 상황이 종료되었다. 모두가 빠르게 자리로 돌아가는 사이, 하진은 떨리는 손끝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차선오가 일부러 도와준 것인지 긴가민가했지만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희미한 가능성이 보였다. 이대로 조금만 가라앉고 나면, 몰래 화장실에라도 가서 어떻게든….

“그리고 박하진 씨는.”

“…….”

“팀장실로 따라 들어와요. 지금 바로.”

그러나 떨어져 내린 명령에 하진의 계획은 바스러졌다. 의자를 끌고 자리로 돌아간 김규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진을 향해 곁눈질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차선오는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단정한 뒷모습이 빠르게 멀어졌다.

하진은 급히 일어서면서 책상에 둔 서류철 하나를 챙겨 발기한 아래를 가렸다. 움직일 때마다 수치심에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혹시 들키기라도 하면…. 아무리 차선오라고 해도 이런 건 싫었다. 갑자기 몸이 이렇게 된 걸 설명할 방법도 없거니와, 남자로서의 자존심도 문제였다.

“…….”

팀장실 문이 보였다. 당장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갑자기 네 집에서 누군가 혀로 가슴을 핥아주는 이상한 환각을 봤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말하면 얼마나 황당한 눈으로 바라볼까?

아무리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동창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사회 부적응자 따위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 신세까지 지고 있는데, 하필이면 첫 월급을 받는 날 이런 꼴이라니…. 하진은 이제 창피해서 딱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 선오… 아니. 팀장님.”

“안으로 들어가.”

문을 연 차선오가 피곤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거절은 불가능했다. 하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주춤거리며 발을 옮겼다.

하진이 먼저 들어서고 그 뒤로 차선오가 바짝 따라붙었다. 문이 닫혔다. 잠금쇠가 눌리고 블라인드가 내려갔다.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 하진은 천천히, 검은 늪에 몸을 담갔다. 겁에 질렸던 두 눈이 탁하게 풀리고, 딱딱하게 굳은 근육들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들고 있는 거 치워. 대체… 누가 가리라고 했어?”

차선오가 답지 않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씹어뱉는 말 사이사이에 겨우 눌러 담은 감정이 빼곡히 실려 있었다.

“…….”

하진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아래를 가리던 서류철이 스르르 떨어지며 바닥에 종이들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차선오는 성난 구둣발로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짓이기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무용 책상에 몸을 기댄 그가 하진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숨길 수 없을 만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바지춤이 보였다.

“박하진.”

“…응, 선오야.”

벌벌 떨기 바빴던 조금 전과 달리 하진의 대답은 평온했다. 높낮이 없는 순종적인 목소리. 그와 반대로 두 손은 미약하게나마 달싹이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옷을 벗고 싶은 것처럼.

그 모습을 조용히 보던 차선오가 나직하게 물었다.

“내가 너 걸레 짓 하라고 여기 데려다 놨어?”

“…….”

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럴 바엔 그냥 어디 갇혀서 평생 떡이나 칠래? 그게 좋겠어?”

이번엔 어깨가 살짝 움찔대며 동요를 보였다. 그래도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차선오는 하진의 반응 따위 전혀 상관없다는 듯 매섭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어.”

“…….”

“너 다시 만나면 멀쩡한 정신으로 몸부터 길들일까. 좆부터 쑤셔 넣고 아예 내장까지 망가뜨리는 게 좋을까. 말 못 하는 짐승처럼, 할 줄 아는 거라곤 쑤셔 박히는 것밖에 없는 정액받이로 만들어서, 평생 나 버린 거 후회하게 해줄까.”

“…….”

“…그렇게도 생각했었다고.”

차가운 목소리가 잔인하고도 위협적이었다. 그 앞에 선 하진은 여전히 조용했다. 말을 듣고 있는데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표정한 얼굴은 흡사 명령을 기다리는 사물처럼 보였다. 차선오가 후, 하고 짧게 숨을 토해냈다.

“나 봐.”

하진이 텅 빈 눈으로 그를 보았다. 땀에 살짝 젖은 앞머리만이 조금 전 수많은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하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증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타인으로 보일 만큼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내가 그러지 않은 이유가 뭘 거 같아.”

“…….”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 하진의 고개가 살짝 떨렸다. 차선오는 그 작은 움직임을 빠짐없이 지켜보며 계속 말했다.

“이렇게 돈도 벌게 해주고, 넘치게 예뻐해 주는 이유가, 뭘 거 같냐고.”

이번엔 하진의 턱이 미약하게 움찔댔다. 듣다 보니 무언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뿌옇게 뭉개진 기억 속으로 주입된 암시가 떠오르려 했다. 이유…. 그 이유는….

“사랑해서…?”

하진은 홀린 것처럼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확신하듯 재차 말했다.

“선오 네가… 나를 사랑해서. 그래서 이렇게 나, 나를 거둬준 거야.”

“그래.”

차선오가 괴로운 숨을 내쉬었다. 그건 최면 속에서만 자신의 사랑을 인식하는 하진이 원망스러워서가 아니었다.

“근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조금 전 겪어야 했던 불쾌한 상황들이,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난 탓이었다.

경계심이라곤 없는 박하진. 가만히 있어도 관심을 끄는 박하진. 아무 데서나 예쁘게 눈을 휘며 웃는 박하진. 누구에게나 친절한 박하진. 모두가 좋아하는 박하진.

…전부 똑같았다. 12년 전과.

“아무한테나 어깨 내주고, 귀 내주고.”

“…….”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누구 좋으라고 함부로 몸을 굴려.”

처음 좋아하게 됐을 때도, 하진은 학교에서건 밖에서건 늘상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 누가 가장 저를 아끼고 사랑해줄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쉽게 웃어주고 함께 어울렸다.

그게 싫었다.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항상 그럴 방법을 찾았다. 다시 만나게 되면 오로지 제 사랑 속에서만 편히 숨 쉬게 하고 싶었으니까.

방법을 찾고 나면,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다 다리도 막 벌릴 거야?”

“…….”

“대답해. 아무 남자한테나 좆 달라고 헤프게 굴 거냐고.”

“아, 아니야.”

“말로만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널 믿을까. 다 보는 데서 뒤 따이고 나면 정신 차릴래? 그게 좋겠어?”

소심하게 부정하던 하진이 순간 입술을 움찔거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 더 망설이던 하진은 도무지 충동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기어코 솔직히 대답하고 말았다.

“조, 좋아.”

“…뭐?”

“선오 너랑 하는 거면… 좋아. 어디서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가 걸려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차선오는 차게 식은 눈으로 하진의 성기 부근을 보았다. 아까부터 발기한 건 알고 있었다. 그게 사그라들기는커녕 계속해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방금 그 무시무시한 말들을 전부 듣고도, 여전히.

그저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무의식 속에 가두어진 장면을 아주 잠깐 보여줬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하진이 얼마만큼 흥분할 수 있는지 가시적으로 드러난 셈이었다. 첨예하게 쌓아온 분노가 삽시간에 무너지려 했다.

“해줄… 거야?”

차선오의 심정이 어떤 줄도 모르고, 하진은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나… 바지 벗을까? 아니면 네 거부터 빠는 것도 좋아. 어, 어때?”

여기가 회사라는 것도 모르고 금방이라도 다리를 벌리고, 좆을 받을 기세였다. 하진은 진심으로 그걸 바라는 듯 똑바로 선 채로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차선오는 잠시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하진을 책상 위에 개처럼 엎드리게 해서, 사무실 전체에 요란한 교성이 번지도록 욕심껏 좆을 박아 넣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원치 않았다. 가뜩이나 조금 전 젖이 오른 하진의 가슴을 두고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지껄여대는 게 짜증스러웠는데, 전혀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없었다.

“꺼내서 흔들어.”

짧은 생각 끝에 차선오는 한숨처럼 명령했다. 하진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얼른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즉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거 말고.”

“…그, 그럼….”

“쌀 때까지 내 앞에서 자위해 보라고.”

“…….”

자위를 하라는 말에 하진은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왜. 싫어?”

“아… 아니.”

“그럼 군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나가서도 계속 그렇게 세우고 있을 거 생각하면, 진짜 어떻게 해버리고 싶으니까.”

“…응….”

풀이 죽은 하진은 곧 천천히 바지를 내려 꼿꼿하게 선 성기를 내보였다. 얼마나 참았는지 살짝 손이 스치는 자극만으로 벌써부터 음탕하게 꺼떡거렸다.

“다른 덴 놔두고.”

조건을 덧붙인 차선오는 천천히 책상을 돌아 의자에 몸을 기댔다. 사실 조금 전 끝낸 회의가 내일까지 이어질 예정이어서 남은 일이 많았다. 야근을 염두에 두어야 할 만큼 바쁜 상황이지만, 손 닿는 거리에 놓인 수많은 자료가 지금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흣… 저기….”

그걸 눈치챈 건지 하진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여태 기계처럼 서 있던 게 무색할 만큼 성기를 꺼내 놓기 무섭게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예쁘게도.

“왜.”

“그냥… 자지 넣어주면 안 될까? 조금만…. 나 하고 싶은데….”

뻔뻔하게 부탁하는 모습이 꼭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마음이 흔들린 걸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차선오는 짐짓 엄격하게 대꾸했다.

“너 지금 벌받는 거야.”

“으응, 그치만….”

“자지 받고 싶으면 몸 간수를 잘했어야지. 제대로 반성하기 전까진 생각도 하지 마. 알았어?”

“…알겠어.”

미련이 남은 얼굴로 끄덕인 하진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기어이 둥글게 만 손으로 꼿꼿한 기둥을 쥐었다.

“하, 아….”

책상 앞에 앉은 차선오가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수치스러우면서도 동시에 흥분되는지, 하진은 서툴게나마 천천히 아래를 흔들며 연신 애타는 신음을 흘렸다.

“흡… 잘못했어, 선오야…. 아으, 읏.”

야릇한 숨소리와 살이 마찰되는 소리가 조용한 팀장실에 울렸다. 밖에서 들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스릴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서류를 집어 오려던 차선오는 시키지도 않은 사과까지 해가며 자위하는 하진을 지켜보다 참지 못하고 물었다.

“기분 좋아? 일하다 불려와서 벌받는 게?”

“으응, 조, 좋아… 부끄러운데, 너무… 흣, 아….”

“계속해. 더 만져. 가리지 말고.”

“응, 으읏, 미안… 흐.”

하진은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계속 기분 좋은 부위를 잡고 흔들어댔다. 차선오는 끓어오르는 정복욕과 그에 반하는 만족감 속에서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하진아.”

“하아… 응.”

“너 지금 누구 때문에 그렇게 흥분한 거야.”

“그, 그건… 흣!”

하진은 점점 더 빠르게 성기를 쳐올리면서 눈을 감았다. 단정하던 얼굴 가득 쾌락이 번졌다. 뭘 상상한 건지, 길게 뻗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말해.”

“…아까 선오 네가 가, 가슴 빨아주던 게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하으….”

“맞아. 너 다른 새끼들이 아니라 날 생각하면서 흥분한 거야.”

“으응, 응.”

“그거 똑바로 기억해, 하진아. 너한텐 나밖에 없어.”

하진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귀두를 아프도록 문질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했다. 아무리 차선오가 보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 앞을 자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더 강한 자극이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 여, 여기도 만지면 안 돼? 하아… 꼬집고 싶어, 응? 아흑, 가슴으로 싸고 싶어요….”

참다못한 하진이 손을 떨며 빌기 시작했다. 아까 본 회상과 함께 벼락처럼 내리꽂혔던 쾌감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게 분명했다.

차선오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가 무언갈 생각하듯 하진의 가슴에 시선을 두었다. 아까 그걸 두고 함부로 떠들어대던 팀원들의 얘기들도.

“거기가 그렇게 좋아?”

“으응, 너무 좋아. 하루 종일, 생각나고… 흡, 가만히 있어도 막, 가, 간지러워서….”

“근데 만질 수가 없지.”

“응, 으응, 나는… 도저히….”

“그럴 거야. 내가 그렇게 해뒀거든. 아무 데서나 줄줄 흘리고 다니면 안 되잖아.”

그가 무심히 말하자 하진은 현실을 자각하곤 턱을 떨구었다. 어떻게 해야 만져줄까…? 힘껏 주무르고 아플 때까지 빨아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때 차선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첫 월급이라면서.”

첫 월급…. 그런가? 언제 시간이 그렇게나 빨리…. 하진은 마치 처음 듣는 사람처럼 멍하니 아까 했던 생각을 똑같이 반복했다. 그런 와중에도 자위하는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기억나? 네가 월급 받으면 생활비 주겠다고 해서 내가 돈 말고 다른 거 받기로 했잖아.”

그랬던가….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았지만 차선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 맞았다. 하진은 그를 위해 뭐든 줄 수 있었다.

“마침 잘됐네. 그거 오늘 하자, 퇴근 후에.”

“퇴근… 후에….”

“내가 만져주겠다고. 간지러운 데 전부.”

차선오가 넌지시 말했다. 하진은 천천히 그가 한 말들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가슴을 만져준다는 말 같았다. 첫 월급을 기념해서 드디어, 이렇게 아릿하도록 부푼 젖꼭지로 가는 걸 허락해준다는 의미였다. 아아…. 하진은 벌써 그 순간에 맞닥뜨린 것처럼 환희에 젖었다.

“고, 고마워…. 그치만… 내가 줘야 하는데, 흣.”

“나도 그 모습을 갖고 싶어. 내 앞에서 완전히 무너진 너를 준다고 생각해.”

“응, 나 너무 기뻐….”

사실 계획상으로는 젖이 더 여물 때까지 좀 더 시간을 투자하려 했지만, 솔직하게 구는 하진이 예뻐서 어쩔 수 없었다. 여하튼 하진의 앞에선 너무 마음이 약해져서 문제였다.

그래도 서로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겠지. 하진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고.”

고민을 끝낸 그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급하게 쳐내면 얼추 퇴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은 마저 받아. 나도 밀린 업무 해야 하니까.”

차선오가 미련이 남은 시선을 거두면서 드디어 서류를 끌어왔다. 그런데 하진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해서 쳐다보니 발갛게 젖은 눈꼬리가 보였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왜 또.”

“그….”

망설이는 모습에 차선오는 재촉했다.

“뭔데? 빨리 말해.”

“안 박아줄 거면… 뒷보지 조금만, 만져도 돼?”

“뭐?”

기어드는 목소리로 구멍 자위를 허락해 달라고 말하는 하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없어 보였다. 벌을 받고 있다는 걸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야, 흣, 쌀 수 있을 것 같아서… 미, 미안….”

차선오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이제 혼자선 앞만으로 사정하지 못하는 건가. 그건 예상 못 한 변화였다.

겨우 일에 집중하려 구겨졌던 차선오의 미간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후우…. 여기서 넘어가면 빼도 박도 못하게 야근일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책상을 두드렸다.

“와서 벌려. 빨아줄 테니까.”

*

“퇴근 안 해요?”

어느새 이른 저녁. 정해진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사무실엔 야근하는 팀원들이 드문드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진도 그 사이에 섞여 아까 하던 자료 정리를 계속했다.

“이거 좀 더 보다가 가려고요. 먼저 들어가세요.”

실은 뇌가 텅 빈 것처럼 멍했다. 꼭 오늘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선오를 기다려야 하니까.

어쨌거나 계속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다른 사람의 눈에는 업무 때문에 지친 걸로 보일 법했다. 퇴근 준비를 마치고 다가온 김규빈도 마찬가지로 그런 하진을 안쓰럽게 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슬쩍 물었다.

“저기… 아까 팀장님한테 많이 혼났어요?”

“네?”

“아니, 불려갔다가 나오고부터 얼굴이 더 안 좋아져서…. 계속 물어보고 싶었는데 다들 바빠서 눈치는 보이지, 나는 막 미치겠지. 괜찮아요? 나랑 잡담하다 걸려서 그런 거 맞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진은 전혀 모르겠단 얼굴로 되물었다. 당연했다. 그가 넋 빠진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을 땐, 이미 차선오의 책상 위에 올라가 바지를 벗고 뒷구멍을 벌리며 중요한 서류 위에 정액을 뚝뚝 싸지른 모든 장면들이 흔적도 없이 휘발된 뒤였으니까.

정상의 범주로 돌아온 하진의 기억 속엔 팀장실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전부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게다가 그 앞뒤 상황 역시 잘린 필름처럼 뚝뚝 끊겨 뭐 하나 뚜렷한 게 없었다.

“에이. 좀 전에 말이에요. 차 팀장님이랑… 아.”

너스레를 떨며 다시 물으려던 김규빈은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진 씨, 설마.”

그는 하진이 자신을 배려한다고 착각했다. 저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걸 따지지 않고 넘어가려고, 일부러 모른 척 연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와… 감동이네.”

하진은 그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실 모르는 얘기만 해대는 김규빈이 슬슬 귀찮아지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몸이 피곤하고 축축 늘어지는데, 이만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하진 씨. 괜찮으면 지금 같이 퇴근할래요?”

“네? 왜요?”

“요 앞에서 저녁이라도 먹어요. 아까 일도 미안하고, 하진 씨 첫 월급이니 기념으로 내가 맛있는 거 살게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하진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거절했다.

“죄송해요.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부담 느끼지 말고 같이 가요. 나 하진 씨한테 할 얘기도 있는데.”

“괜찮아요. 말씀은 그냥 지금 하시면 안 될까요?”

“…뭐 약속이라도 있어요?”

김규빈이 따지듯 묻자 하진은 뜻밖에도 수줍게 웃었다.

“네. 끝나고 선오, 아니 팀장님이랑요.”

홍조 띤 얼굴과 깔끔히 떨어지는 대답에 김규빈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색하게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 하하, 그렇구나. 두 분 잘 풀렸나 봐요? 근데 차 팀장님 아직 정신없어 보이던데.”

“괜찮아요. 오늘은 제가 뭘 주기로 했거든요. 그거 꼭 줘야 해서….”

김규빈은 더 이상 조를 수 없었다. 뭘 준다는 말이 약간은 이상하게 들렸지만 주고받을 게 있겠거니 싶었다.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 밥 먹어요. 아까 다들 듣는 앞에서 가슴이니, 그런 얘기 한 것도 미안해서 그랬는데….”

“네?”

“나중에라도 기분 나빠지면 언제든지 말해요.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하진은 그가 뭘 얘기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

“먼저 들어가세요.”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자, 김규빈은 조금 복잡해진 얼굴로 도망치듯 사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휴우.”

금세 주변이 조용해졌다. 하진이 피곤한 눈을 깜빡여 다시 모니터를 살폈다.

이제라도 집중해보자 생각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팀장실 쪽을 흘끗 살피니 차선오는 소식이 없었다. 간혹 야근하는 팀원들이 들락거리며 일이 남았다는 걸 간접적으로 알릴 뿐이었다.

“피곤하다….”

정적 속에서 피로가 몰려왔다. 꼭 며칠간 잠을 못 잔 것처럼 눈이 무거웠다. 몸도 영 뻐근하고…. 잠깐 엎드려 쪽잠을 잘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눈치가 보였다. 하진은 쭉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대신했다.

“읏.”

가슴 만지고 싶어….

상체를 크게 움직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시작이었다. 요즘 들어 도통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음탕한 충동. 자리에 얌전히 앉아 일을 하다가도 사무실 책상에 젖꼭지를 비비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조금만… 아무도 없을 때 해볼까? 하진의 눈동자가 다시 분별력을 잊고 흐려지려 했다.

아냐, 정신 차려야지. 야근 중에 이렇게 헤프게 구는 건 안 된다. 게다가 이런 모습은 보여줄 사람도 따로 있고.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충동을 이겨낸 하진은 잠을 깨기 위해 노트에 낙서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조금 전 김규빈 씨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첫 월급이라니. 감개무량한 기분이었다. 아직 업무에 서툰데 이렇게 번듯한 회사에서 돈을 받아도 될까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엔 차선오와 함께 있어야지. 내가 저녁을 사야 할까? 뭘 좋아하려나. 보통 퇴근하고서 집에서 뭘 먹었지. 분명 매번 맛있는 걸 먹긴 먹은 것 같은데 왜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지….

하진은 의미 없는 글자들을 끄적거리면서 다시 몇 시간 전과 똑같은 의문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말 이상하긴 했다. 이렇게나 기억력이 나빠지다니.

언제부터였을까? 잠시 생각하던 하진은 곧 깨달았다.

변화는 정확히 차선오와 재회한 직후부터 생겨났다는 것을.

빚을 갚느라 닥치는 대로 돈을 벌 때, 하진은 그래도 어디서나 똑똑하고 성실하단 말을 꼭 들었다. 그때 알던 사람들이 지금의 하진을 보면 편히도 일한다고 혀를 찰 일이었다. 왜 하필이면 가장 잘해야 할 때 이렇게 된 건지 하진 스스로가 가장 답답했다.

혹시, 차선오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에이.”

말도 안 됐다. 의심하기도 미안할 만큼 그와는 아무런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원인이 있다면 그건 전부 나 때문이겠지. 그렇게 납득한 하진은, 잠시 후에 차선오에게 살짝 도움을 청할까 생각했다. 퇴근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다 보면 돌파구가 열릴지도 모르니까.

일종의 고민 상담이 되겠지. 월급날을 맞아서 주기로 한 것도 있으니 둘이서만 따로 대화할 시간도 충분할 테고….

아, 그런데.

“…….”

내가 뭘 주기로 했더라?

하진의 멍한 얼굴이 찡그려졌다. 골똘히 생각해 보았으나 또 누군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것 같은 기이한 느낌과 다시 맞닥뜨려야 했다.

이 정도면 좀 심각한가 싶었다. 분명 아까 팀장실에서 얘기했었는데 주기로 한 걸 잊어버리다니. 하진은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무슨 단기 기억상실증도 아니고. 차선오에게 다시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받기로 한 당사자에게 되묻는 건 이상하지만, 그라면 아마 이해해줄 것이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하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월세 납기일 확인 바랍니다. -XX고시텔]

“어?”

보자마자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진이 원래 살던 고시원 관리인에게서 온 문자였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월세를 내는 날이었다. 차선오에게 동거 제안을 받고서 너무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거기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이 남아 있었다. 이런 중요한 것까지 잊을 뻔하다니.

[21호실 확인했습니다!!]

하진은 얼른 답장을 보냈다. 고시원은 워낙 밀린 월세를 갚지 않고 도주하는 사람이 많아서 하루라도 늦으면 그때부터 수시로 연락이 오곤 했다. 미리 얘기를 해두는 게 편했다. 문자가 잘 갔는지 살피는데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알람이 떴다. 꺼지기 전에 바로 확인해서 다행이었다.

우선 그렇게 답장은 보냈지만, 돈 문제에는 역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솔직히 살지도 않으면서 월세를 내는 게 좀 아깝긴 했다.

그냥 정리할까 싶다가도, 앞으로 차선오와 쭉 살 것도 아니고 인턴은 고작 3개월일 뿐이니 그건 섣부른 판단 같았다. 물론 지금의 생활이 너무 편해서 계속 신세 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늘 한번 물어볼까? 고시원을 정리해도 괜찮겠냐고.

하진은 슬그머니 가능성을 점쳐 보았다. 선오도 나랑 사는 걸 꽤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만약 허락받는다면 바로 방을 뺄 수 있게 아예 남은 짐을 가져오는 건 어떨까? 그럼 곧장 내일부터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될 텐데.

그가 다시금 팀장실 쪽을 흘끗 살폈다. 금방 차선오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진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무언가를 결정하기까지 길게 시간을 끄는 편이 아니었다. 생각을 마친 하진이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최대한 빠르게 다녀올 방법을 고민하면서.

*

“XX동 XX고시텔 부탁드려요, 기사님.”

회사 앞에서 택시를 잡아탄 하진은 편히 시트에 몸을 기댔다. 오랜만에 혼자 움직이는 게 낯설어서인지 무언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나른한 연주곡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챙길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구는 어차피 고시원에 딸린 풀옵션이고 꼭 필요한 건 이미 한 차례 옮겨둔 덕분이었다. 남은 것들만 대강 정리해서 얼른 캐리어에 넣어 오면 될 것 같았다.

만약 차선오가 난색을 보인다 해도 새로 살 곳을 구할 때까지 오피스텔에 보관하는 것 정도는 문제 될 리 없었다. 기왕이면 쭉 같이 살자고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허락하려나? 하진은 아직도 차선오의 속을 알기 어려웠다.

“다 왔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깜빡 졸아버린 모양이었다. 택시 기사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하진은 얼른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다. 수면 습관이 정말 심각했다. 아마 차선오의 집에서도 매번 이런 식으로 기절하듯 잠드는 것이리라.

바로 앞에 익숙한 건물 외관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면서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던 핸드폰이 기어코 꺼지고 말았다. 고시텔 방 안에 충전기가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새로 인테리어를 했음에도 복도는 스산했다. 지독한 방향제 냄새로도 가려지지 않는 쾨쾨한 공기가 익숙하게 코를 찔렀다. 하진은 얼른 걸음을 옮겼다. 21호실. 몇 번이나 페인트칠을 새로 한 낡은 문에는 어울리지 않게 번쩍거리는 최신식 도어 록이 달려 있었다.

띠릭, 탁.

“아….”

익숙한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희미한 기계음과 함께, 하진의 안에서 무언가 뒤틀렸다. 문이 닫혔다. 하진은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퇴근 후에… 가슴을 만져주겠다고 했는데.

선오는 어디 있지? 분명 가까이 있을 텐데. 보고 있으면 얼른 벗겨달라고 하고 싶었다.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애원하고 싶었다. 셔츠 단추가 죄다 뜯어져도 좋으니, 어서 젖꼭지를 비틀어 안에 뭉친 것을 전부 흘리게 해달라고….

“흡, 어, 얼른 만져 줘.”

혀끝에서 저절로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나 급해, 선오야…. 아까부터 계속… 참았단 말이야. 여기가 너무 딱딱해서….”

기대감에 부푼 하진의 등이 문 위로 미끄러졌다. 참다못한 그가 직접 간지러운 부위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고시원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경계를 맴돌던 눈이 다시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비좁고 캄캄한 고시원의 전경이 시야에 가득 찼다. 제대로 둘러보지 않아도 곧장 사방의 벽이 한눈에 다 보일 만큼 협소한, 그의 공간이.

“…….”

짤막한 꿈을 꾼 것 같았다. 방금 뭔가 크나큰 착각에 빠져 있다가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낸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선오라고 했나? 얼른 만져달라고… 그에게 빌고 있었다. 대체 어딜?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음에도 하진의 얼굴은 꼭 번화가 한복판에서 실수를 한 사람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손끝이 떨려서 스위치를 누르기 위해 힘을 잔뜩 줘야 했다.

익숙한 내부가 다시 보였다. 거의 한 달 만에 돌아온 고시원이었다. 책상은 책상 자리에. 침대는 침대 자리에. 모든 것이 변함없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미약한 안정감이 번졌다.

그러나 자신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퇴근 후에 그에게 주겠다고 한 게….

“…….”

아니야. 다른 생각 말고 얼른 캐리어에 짐부터 챙기자. 그러려고 왔으니까.

하진은 마음을 다잡았다. 방금 입에서 나온 소리는 착각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택시에서 잠깐 조는 바람에 아직 잠이 덜 깨서….

겨우 의지를 되찾은 하진은 그를 잡아끄는 음탕한 충동을 모른 체하면서 빠르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딱 한 사람만 누울 수 있는 좁은 침대까지는 다섯 걸음도 채 걸리지 않았다. 거기 앉아서 급한 대로 메고 있던 가방부터 벗으려 했다. 그러자 있는 줄도 몰랐던 앞 버클이 딱딱하게 선 젖꼭지를 스쳤다.

“흐, 응…!”

이번엔 도무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하, 하아….”

너무… 좋았다. 참지 못할 쾌락에 교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하진은 입을 틀어막았다. 고시원은 방음에 취약했다. 혹여 옆방에 소리가 새어 들어가면 곤란했다. 퇴근하고 돌아오자마자 자위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오해를 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더 만지고 싶어.

사무실에서 내내 억누른 충동이 한꺼번에 터지려 했다. 맨정신의 그는 말도 안 되게 민감해진 자신의 신체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두 손이 다시금 단단한 가방의 앞 버클을 건드렸다.

“…흣, 흐아.”

하진은 참아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걸 점점 빠르게 유두에 비볐다. 고삐라도 풀린 것처럼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중독처럼 만지면 만질수록 더 기분이 좋아졌다.

“아흐, 조, 좋아… 앗, 거기 좀 더… 흐으, 응!”

그는 누구에게 말하는 줄도 모르고 습관처럼 빌고 애원했다. 자꾸 더 노골적인 소리가 튀어나오려 해서 억지로 참아야 했다. 정신이 왔다 갔다 했다. 유두를 비비는 게 이렇게까지 기분 좋은 일인 줄 몰랐기에, 마치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처음엔 조심스럽던 손끝에 점점 힘이 실렸다. 거칠게 비빌 때마다 조금 따끔거렸지만 그게 아픈 줄도 몰랐다. 마찰열마저도 지금의 하진에게는 달콤하기만 했다.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옷 아래에 갇힌 끈적한 열기가 하진을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계속 딱딱한 버클에 대고 유두 자위를 하던 그는 간신히 가방을 벗었다.

그만두겠단 마음이 아니었다. 좀 더 제대로 하고 싶었다. 어느새 고시원에 온 이유는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상체가 나른하게 무너졌다. 이번에도 멋대로 올라간 손이 셔츠의 가운데 단추 두 개를 급하게 풀어냈다.

“아으응….”

짜릿한 해방감이 온몸으로 번졌다. 피부에 닿는 더운 공기까지도 성욕을 부추겼다.

맨살이 드러나고 그 가운데 단단하게 선 젖꼭지가 보였다. 하진은 그제야 자신의 가슴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었다는 걸 인지했다. 실은 진작부터 변했으나 늘 최면에 걸려 있어 제대로 된 정신으로 개조된 맨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흣, 어, 언제 이렇게….”

도톰한 크기로 발기한 유두는 혀보다 더 짙은 선홍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주변도 양감이 느껴졌다. 살집 없는 날씬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탐스러운 가슴의 모양이 이상하다기보다는, 다행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커졌으니까… 선오의 눈에도 예뻐 보이겠지? 이젠 브래지어를 차도 제법 어울릴 것 같았다. 자랑하고 싶었다. 예뻐해 달라고 수줍게 드러내고 싶었다. 어서 상을 줬으면. 얼른 여길 꼬집고 괴롭혀서, 완전히 부르트도록 전부….

“흡…! 흐응, 아….”

미친 줄 알면서도 하진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허리를 뒤틀었다. 한 번씩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죄책감이 피어났다. 그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도무지 밀어낼 수 없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차선오를 성적 대상으로 본 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이런, 딱딱하게 선 젖꼭지를 내보이고 싶다는 지극히 저질스러운 상상을 할 만큼.

그는 좋은 친구인데. 친절하고 다정한 동창일 뿐인데. 같은 성기 구조를 가진, 남자인데.

환하게 불이 켜진 고시원 침대 위, 셔츠의 가운데 단추를 풀어 가슴만 내놓은 음탕한 행색으로 하진은 크게 울먹였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차선오를 떠올리면 당장 더 만지고 싶었다.

대범해진 손이 가슴 주변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만질 수 없었다. 우습게도 그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경련하듯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똑같았다.

젖물이 오른 하진의 가슴을 주무를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다. 몸에 걸린 암시는 최면을 건 당사자가 풀어주지 않는 한 어디서든 정신을 묶고 조종했다.

“흐… 제발….”

눈꺼풀 아래로, 거짓말처럼 차선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보고 싶었다. 더운 열기가 묻은 이불 위로 나약한 몸이 길게 늘어졌다. 죄책감과 성욕 속에서 헐떡이던 하진은 이내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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