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16)

1.

피곤해서일까.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온몸의 힘이 빠졌다. 오피스텔 이름과 호수, 비밀번호를 적은 종이쪽지가 손아귀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밀려드는 나른함을 견딜 수 없었다. 출근한 지 이제 고작 사흘. 사흘 만에 체력이 고갈된 모양이라고, 하진은 생각했다. 그는 원래도 몸이 약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얼른 짐을 풀고 정리해야 하는데…. 생각과 달리 자세가 빠르게 무너졌다. 밀려드는 졸음을 견디지 못한 하진은 어느새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12년 만에 재회한 동창의 집. 현관에서.

“하진아.”

“으음….”

얼마나 지났을까.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하진은 누군가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 몸보다 정신이 먼저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진아. 일어나 봐. 못 일어나겠어?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

웃음기가 스민 음성이었다. 누구지. 누가 내 이름을 이렇게 다정하게….

“아…!”

수면 아래 잠겨 있다가 확 끌어 올려진 것처럼, 그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하진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제 막 들어온 듯한 이 집의 주인이 그를 한참이나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둥지둥 앞을 살피는데 순간 센서 등이 탁, 꺼지면서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상대의 표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 교묘하게 모습을 감춘 이에게 하진은 얼른 물었다.

“차선오…? 선오야?”

“응, 나야.”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오자 빠르게 안도감이 번졌다.

“아… 놀랐네. 왔어? 내가 깜빡, 자버렸나 봐….”

하진은 민망해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현관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구두를 벗고 들어왔다. 움직임을 인식한 센서 등에 다시 불이 들어오면서 환한 조명이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칼 같은 정장 차림과 목 끝까지 올려 맨 넥타이.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와 서류 가방, 손에 들린 차 키. 그리고 아직도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차선오의 얼굴이 차례로 보였다.

“이런 데서 쓰러져 잠들고.”

“미, 미안….”

하진은 사과부터 하면서 바닥을 더듬거렸다. 바로 옆에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이 흐트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무래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분명 키 패드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통과한 것까지는 선명한데, 그 이후는 꼭 물에 잠긴 것처럼 흐리멍덩했다.

지금의 꼴을 보아선 신발만 겨우 벗은 채 몇 걸음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듯 잠든 모양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피곤했나. 꼭 기면증 환자 같은 행동이었다. 아직,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집에서 이러다니.

“나도 이런 적이 없는데… 당황스럽네.”

변명하는 하진에게 그가 물었다.

“그래? 처음이야?”

깎아 놓은 조각처럼 매끄러운 이목구비 위로 미소가 걸렸다. 그 웃음이 억지로 만든 것처럼 어색했으나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하진은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했다.

“당연하지…!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막 아무 데서나 쓰러져서 자진 않아. 그냥 긴장이 쌓여서 피곤했나 봐. 아님… 너희 집이 좋아서 그런가.”

“그 와중에 옷은 벗다 말고.”

하진은 황급히 일어서 가방을 챙기려다 말고 무언가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샌가 앞까지 다가온 차선오가 내민 물건. 그건 자신의 옷이었다. 분명 여기 올 때까지 입고 있던, 오늘 출근길에 입었던 얇은 여름용 와이셔츠.

“어… 어? 이게 왜….”

“더웠던 거 아냐? 오늘 유독 기온이 높잖아.”

차선오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하진은 얼떨결에 자신의 옷을 받아 들었다. 사각거리는 옷감 아래로 서로의 손끝이 스쳤다. 닿는 피부가 유난히 뜨거웠다. 아, 이제 정말로 여름이니까. 그래서 그런 거겠지.

“그런가? 고, 고마워.”

“들어가자. 에어컨부터 틀어 줄게.”

“으응.”

차선오는 다시금 희미하게 웃어 보이더니 익숙하게 불을 켜면서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얼떨떨하게 보면서 하진은 가방을 들고 따라갔다.

좀 이상했다. 깜빡 잠든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아무리 더워도 함부로 옷을 벗는 버릇은 없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뭔가에 취한 것도 아닌데. 꼭 기억이 뚝 잘린 듯한 느낌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는 와이셔츠 대신 안에 받쳐 입고 있던 흰 반팔 티셔츠의 밑단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면서 발을 옮겼다.

“이쪽이야.”

차선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얼른 의아한 표정을 지웠다. 사실 저는 그렇다 쳐도 집주인은 얼마나 놀랐을까 싶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 앞에 옷까지 벗고 널브러진 친구를 발견했을 테니까.

그래도 언뜻 본 그의 모습에 많이 놀란 기색이 없어 다행이었다. 놀라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하진은 그게 차선오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물이라도 마실래? 목마르지.”

“응. 고마워, 정말.”

에어컨을 가동하고 서류 가방만 대충 내려놓은 차선오가 물 한 잔을 건넸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하진은 저도 모르게 고맙다고 고개까지 숙였다. 그걸 뒤늦게 깨닫고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얼른 덧붙였다.

“근데 회식이라더니 일찍 왔네?”

날이 더운데도 건네받은 물은 미지근했다. 혹시 이것도 배려일까 싶었다. 갑자기 찬물을 마시면 꼭 배탈이 나곤 하는 걸 그가 알 리 없는데.

“네 얘기 하면서 빠져나왔지. 다들 얼른 가라고 난리더라. 아직 못 믿는 눈치긴 한데, 뭐.”

“아하하…. 그래도 다들 좋은 분 같아. 친절하시고, 나도 많이 도와주시고.”

“너를 도와줘?”

하진이 물 마시는 걸 지켜보던 차선오가 눈썹을 까딱였다.

“응. 덕분에 금방 적응하지 싶어.”

“…누가 그렇게 잘해주는데?”

“뭐, 다들 잘해주시지.”

하진은 컵을 든 채로 설명했다.

“최 대리님은 옆자리니까 일할 때 잘 챙겨주시고. 표 차장님은 서랍에 간식이 잔뜩이더라. 계속 얻어먹어서 살찌는 거 아닌지 걱정이야…. 아! 김규빈 씨 있지? 그분은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봐.”

“왜?”

“아니, 자꾸 자기랑 같이 운동 다니자고 조르잖아. 괜찮다는데 그냥 하는 말도 아닌지 계속…! 아마 인턴 끝나기 전에 한 번은 따라가야 할 것 같아.”

“아. 그래.”

조용히 듣고 있던 차선오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 툭, 두드리며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최 대리, 표 차장, 김규빈 씨. 언뜻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팀장이다 보니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고작 인턴 나부랭이인 저와 달리, 그는 팀을 이끄는 위치니까. 하진은 옆 팀 사람들과 있었던 일도 떠올렸지만, 괜스레 일을 더 복잡하게 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마친 차선오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하진을 보았다. 아무래도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앞에서 지켜볼 생각인 듯했다. 컵이 생각보다 커서 금방 물배가 찼지만 중간에 내밀기도 무안했다. 하진은 어쩔 수 없이 계속 남은 물을 마셨다.

“…….”

저렇게까지 빤히 볼 일인가. 이게 뭐라고. 어쩐지 애가 된 기분에 귀가 화끈거렸다. 하진은 속을 식힐 겸 벌컥벌컥 남은 걸 끝까지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털어 넣느라 턱까지 줄줄 흐른 물기를 닦아내면서 하진은 말했다.

“잘 마셨어. 방은 어디 쓰면 돼? 짐부터 좀 풀어놔야겠다.”

“응. 알려줄게. 가져온 건 그게 다야?”

“급한 것만 우선 가져왔어. 들고 오는 데 한계가 있어서….”

“다음에 내 차로 가자. 차로 옮기면 금방인데 더운 날에 괜히 고생했겠네.”

그는 다정한 말로 타일렀다. 아까부터 상대를 애처럼 다루는 게 차선오의 평소 습관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동갑인데, 하진은 더욱 민망해졌다.

“아냐, 안 그래도 되는데.”

“그렇게 해. 퇴근할 때 들르면 되잖아.”

그는 생각보다 완고했다. 어쩐지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아 하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느새 목 언저리에 땀이 솟아 있었다. 하진은 반팔 티셔츠를 펄럭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집이 넓어서인지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아직 실내는 덜 시원했다. 살갗에 천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빈 물컵을 싱크대에 넣어둔 차선오가 방을 알려주겠다면서 다시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정장 재킷까지 칼 같이 차려입은 그는 조금도 더워 보이지 않았다. 더운 건 기분 탓일지도 몰랐다.

“하진아. 땀 많이 흘렸어?”

“응? 조금 흘리긴 했는데…. 왜?”

소심하게 티셔츠를 펄럭이던 하진은 순간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호, 혹시 나한테 냄새나?”

“아니. 티셔츠가 약간 젖어 있길래.”

땀 때문인가? 하진이 고개를 숙이고 어디가 젖었는지 살펴보는데,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거침없이 다가와 가슴 부위를 가리켰다.

“여기.”

“아, 여, 여긴….”

단정한 차선오의 손끝이 거의 닿을 듯 가까워졌다가 이내 멀어졌다. 가리킨 위치에는 정말로 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투명한 천 아래로 안쪽 피부가 살짝 비쳤다. 하진은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괜히 그걸 툭툭 털어내면서 말했다.

“땀 난 거 아니고 물 흘린 거야.”

“흘렸다고?”

차선오가 재밌는 얘길 들은 사람처럼 눈으로만 웃었다.

“어. 좀 전에 물…. 네가 준 거 마시다가.”

“잘 흘리는 편이구나. 귀엽게.”

놀림당하는 기분에 다시 열기가 훅 올랐다.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찾아온 정적이 어색했다. 에어컨 온도를 더 낮춰달라 말해도 괜찮을지 고민하는데, 젖은 티셔츠를 유심히 살피던 차선오가 중얼거렸다.

“근데 하진이 너 젖꼭지가 좀 큰 편이네.”

“…어?”

젖…꼭지? 하진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여 젖은 부위를 살폈다. 가슴 근처이긴 해도 그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너용 티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그걸 보고서 하는 말인가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얘길…. 이상함을 깨달은 순간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민망함과 더위 때문에 뺨이 점점 붉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하진과 달리 차선오의 눈빛은 차분하다 못해 서늘했다.

“만져준 사람 있었어? 아님, 거기로 자위도 해?”

“야,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점점 귀를 의심하게 됐다. 차선오의 표정과 어투는 마치 밥 먹었냐는 질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당황한 제가 이상한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순간 하진은 어쩐지 그가 제 반응을 살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착각이겠지. 하진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회식 가서 술 많이 마셨냐? 취하기라도 했어? 아, 안 어울리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취한 것 같진 않았다. 회사에서보다 눈빛이 훨씬 또렷한 데다가, 목소리도 명료했다.

하진은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까 벗어 뒀던 와이셔츠를 이제라도 다시 입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러기엔 영 이상할 듯했다.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이 부담스러워 하진은 결국 팔을 들어 어정쩡하게 가슴 부위를 가리기에 이르렀다.

“장난 그만 쳐. 치, 친구끼리 재미없거든.”

정말로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하진이 재차 말리자 그가 픽 웃었다.

“아, 친구.”

“…….”

“하긴. 아직 친구였지.”

그의 알 수 없는 말에 하진은 긴가민가 싶었다. 계속 대치하듯 물러서 있으니 차선오는 다시 원래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농담한 거야. 기분 나쁜 거 아니지?”

“뭐,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됐네. 이쪽으로 와. 방 안내해줄게.”

그제야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하진은 무거운 눈을 억지로 깜빡이다가 얼른 그를 따라 움직였다.

*

하진이 쓰게 될 방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당장 인테리어 잡지에 실려도 무리가 없을 만큼 깔끔했고, 근사했다. 평범한 짐 가방을 내려놓으니 꼭 예술 작품에 흠집을 내는 기분마저 들었다.

사실 옷차림이나 소지품만으로도 대충 짐작했지만, 차선오는 제법 부자인 데다가 감각도 좋은 편인 듯했다.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만한 외모에 능력과 재력까지. 친구지만 하진은 그가 부럽고 또 신기했다.

12년 전에도 그랬던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았다. 동창이라고는 해도 실은 가물가물했다.

하진이 인턴으로 처음 출근했을 때 사무실에서 먼저 인사를 건넨 것도 차선오 쪽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면접 때부터 하진을 알아봤다고 했다. 믿기 어려울 만큼 신기한 인연이었다. 우연히 지원한 회사에서 오래된 동창을 만날 줄이야. 그것도 면접관과 면접자로.

첫 출근을 하고 나서야 그를 알아본 하진이 난처해하는 데도, 차선오는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어른스럽게 어깨를 토닥여 주기까지 했다. 반가운 마음에 자신이 좋은 점수를 줬다면서, 그것도 네 능력이니 부담가질 필요는 없다는 사려 깊은 말까지 덧붙였다.

그런 친절함이 자신의 집에서 같이 출퇴근하라는 제안으로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그가 그동안 굉장히 성공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면접관으로서 옛 동창을 낙하산으로 앉힐 정도니까.

생각할수록 고마웠다. 사실 처음엔 동거 제안을 사양하려 했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차선오는 당황스러울 만큼 끈질겼다. 거절에 약한 하진의 성격을 간파해 그를 회유했고, 결국 원하는 답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잘 지내봐야겠지. 하진은 방이 마음에 든다는 걸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부지런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진짜 손님방 맞아? 다 새것 같은데.”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 너 온다고 몇 가지 더 급하게 채워 넣긴 했는데 어때? 마음에 들어?”

“당연하지. 나 살던 데에 비하면 천국 같아. 솔직히 여태 살면서 가본 집 중에 제일 좋아.”

“다행이네.”

가난을 고백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조금 자존심 상했지만 한 치의 거짓말 없는 사실이었다. 하진은 유독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아 몸을 위아래로 튕겨보았다. 매트리스가 엄청나게 푹신했다. 원래 살던 고시원의 좁고 불편한 침대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됐다. 신기해하는 하진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차선오가 말했다.

“일단 지내보고 필요한 거 있으면 또 같이 사러 가자.”

“응. 참, 방값이랑 생활비는 꼭 낼게. 사실 당장 이번 달은 곤란한데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어? 첫 월급 받으면 바로….”

“그런 얘긴 됐어. 나중에 하자.”

계속 언급할 기회만 노리던 문제를 그는 아무렇지 않게 끊어버렸다. 어쩌면 동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일 텐데도 그랬다.

“아냐. 내가 생각해 봤는데, 나 집안일도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거든? 요리는 잘 못 해서 그것만 빼고. 뭐든 나한테 맡겨도 돼.”

“하진아.”

“어?”

하진은 자신의 어깨 위에 느껴지는 미약한 무게감에 고개를 들었다.

“그냥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주라. 나도 혼자 지내는 것보다 너랑 있으면 여러모로 좋아서 그런 거니까.”

차선오는 하진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여러모로, 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미안해서 그렇지.”

“정 그러면 돈 말고 다른 걸로 도와줘. 그럼 되잖아.”

제안하는 그의 얼굴이 어른스럽고도 다정했다. 자신이 금전적으로 부담 갖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게 고맙고, 또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하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배려를 봐서라도 더 고집 피우지 않기로 했다. 대신 회사에서도 소속 팀원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서도 눈치껏 잘 지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돈 문제는 그 이후에 다시 생각하면 되겠지.

“대충 정리만 하고 나와. 2차 못 가고 왔으니까 너랑 맥주라도 한 잔해야겠다.”

“그럴까? 좋아, 나도.”

안 그래도 어색한데 잘됐다 싶었다. 술은 잘 못 마시지만 친해지기엔 그것만 한 게 없으니까.

“샤워는 이따가 자기 전에 하고. 그 셔츠는 세탁할 거지? 줘. 내 거랑 같이 맡길게.”

“어? 어. 고마워.”

얼떨결에 오늘 입은 셔츠까지 넘기자 차선오는 웃으면서 방에서 나갔다. 많이 더럽진 않아서 한 번 정도는 더 입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정말 땀 냄새가 날지도 모르니 대신 세탁을 맡겨준다면야 고마운 일이었다. 차선오의 말엔 좀처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틀린 말이 전혀 없기도 했고.

혼자 남은 하진은 그제야 좀 편안해진 마음으로 가방을 펼쳤다. 원래 살던 고시원에서 급하게 챙겨온 짐이라 전부 가져오진 못했지만 사실 필요한 건 거의 다 챙긴 셈이었다.

옷가지와 세면도구, 노트북, 영양제 몇 개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그걸 전부 꺼내 놓고 텅 빈 수납장을 차례로 열어보았다. 사용 흔적 없이 무척 깨끗해서 자신의 낡은 옷을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하던 하진은 대충 갠 옷들을 바닥 한구석에 잘 쌓아 벽에 기대어 놓고는, 몇 없는 소지품들도 따로 모아 놓았다. 당장은 염치없이 신세를 지기로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첫날부터 너무 제집처럼 행세하기가 민망한 탓이었다.

“휴우….”

사실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지난 사흘간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꿈 같고 거짓말 같았다.

새로운 직장과 새로운 집. 오랜만에 만난 친구까지…. 전부 빨리 적응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려면 내가 더 잘해야겠지.

정리를 마친 하진은 서서 방을 휘 둘러보다가 벽에 붙은 거울을 발견했다. 혹시 어색해하는 티가 많이 나려나. 평소에도 표정을 못 숨긴다는 얘기를 듣기에 신경이 쓰였다. 방을 나서기 전에 얼굴이라도 좀 살피려 했는데, 문득 다른 부위가 눈에 들어왔다.

티셔츠에 사라지지 않은 물 자국과, 그 아래 약간 도톰하게 올라온 유두의 실루엣.

“…….”

잊고 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진이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방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지만, 밖에선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차선오도 옷을 갈아입어야 할 테니 방에 들어갔겠지 싶었다.

잠깐만 볼까….

망설이던 그는 이내 티셔츠 밑단을 잡고 가슴 위까지 슬그머니 끌어 올렸다.

커다란 거울 속에 하진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유독 흰 살결이 약간 배어난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정말, 젖꼭지가 큰 편인가…? 그의 비밀스러운 시선이 한군데에 꽂혔다.

살면서 의식한 적이 없었는데 듣고 나니 괜히 그런 것 같았다. 유두의 크기 자체도 좀 큰 듯했고, 연한 분홍빛의 유륜도 눈에 띄었다. 색이 너무 옅어 이상한가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크기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에 기분이 묘했다. 분명 자신의 몸인데 남의 걸 보는 것처럼 부끄럽고 또 생소하기도 했다.

점점 호기심이 피어났다. 티셔츠를 바짝 끌어 올린 채 다시 뒤를 흘끗거린 하진은 조심스럽게 반대쪽 손을 올렸다. 그리고 오른쪽 유두를 살짝 훑어보았다.

“흣….”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진은 당황해 얼른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안타깝게도 건드리는 것만으로는 잘 알 수 없었다. 좀 더 대범하게 꼬집듯이 만져 보고 싶었다. 확실히… 작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진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거울 속 자신의 가슴을 살폈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집게 모양을 만들어 도톰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꾹 쥐었다.

“흐, 아….”

이번에도 소리를 참기 어려웠다. 잠깐의 손길에도 젖꼭지는 금세 단단하게 서서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오돌토돌한 유륜까지도 양감이 도드라지며 가슴 전체가 촉촉하게 번들거렸다. 그 모양을 보고 있으려니 점차 기분이 이상해졌다.

더 만지고 싶었다. 한 번도 이런 걸 해본 적 없었는데, 그래서 더 끌렸다. 건드리는 것만으로 발끝까지 찌릿한 게 마치….

“하진아, 아직 멀었어?”

그때 차선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하진은 화들짝 놀라 얼른 티셔츠를 내렸다.

“어, 어…! 나갈게!”

다행히 그는 멀리 부엌 쪽에 있는 듯했다. 큰 소리로 대답부터 하고 나니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어쩌면 목소리가 떨렸을지도 몰랐다. 그는 뒤늦게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대로 나가려던 하진은 미련이 남은 것처럼 마지막으로 거울 속을 살폈다. 티셔츠를 내렸는데도 얇은 옷감 아래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젖꼭지가 아까보다 훨씬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밋밋한 가슴팍에 솟아오른 유두가 어쩐지 야릇해 보였다. 의식하지 못할 때는 아예 신경도 안 썼는데, 괜히 손으로 건드려서 크기를 더 키운 모양이었다. 천이 닿는 촉감도 간질간질한 게 움직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게 흐무러졌다.

…더 만지고 싶다.

그 욕망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하진은 올렸던 모양대로 구겨진 티셔츠를 펴는 체하면서 가슴 위를 일부러 스쳐 만졌다. 하아, 아…. 머릿속에 뿌연 연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중독 같은 쾌감이었다. 어쩌지, 이대로라면 분명…. 그는 입술을 질겅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바닥에 쌓아 놓은 옷들이 보였다.

“나 미지근한 맥주 먹기 싫은데.”

“지, 지금 나가!”

마음이 더 급해졌다. 시간이 없었다. 하진은 적당한 맨투맨 하나를 잽싸게 집어 들었다. 두께감도 있고 색도 어두워서 들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너무 의식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튀어나온 젖꼭지를 보일 바에야 일단 가리는 게 나을 테니까.

남색 맨투맨이 흰 티셔츠 위를 덮었다. 황급히 방을 나서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

“그 옷은 뭐야?”

나가자마자 곧바로 차선오와 마주쳤다. 기다리다 못해 직접 방으로 들어오려 한 모양이었다. 가슴을 더 만지고 싶어 망설이던 게 떠올랐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순간 하진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놀란 기색을 감출 정신도 없었다.

“옷? 뭐, 뭐가?”

“그거. 입고 나온 거 말이야.”

“아, 이거….”

엉거주춤하게 선 하진이 급하게 껴입은 맨투맨을 툭툭 털어냈다. 변명거리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시선을 피하면서 차선오의 옷차림을 살폈다. 분명 갈아입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을 뿐 여전히 출근 복장 그대로였다.

“…내 잠옷이야.”

“잠옷?”

하진의 대답에 그의 표정이 굳는 듯했다.

“어어. 편하게 있으려고. 근데 넌, 셔츠 불편하지도 않아?”

“…….”

“하긴. 잘 어울리는 거 알고 일부러 안 갈아입는 거지? 몸은 언제 그렇게 키웠어? 어깨도 엄청 넓고…. 여자 꼬시려고 일부러 근육 만든 거야? 언제 나도 팁 좀 주라.”

말을 돌리기 위해 억지로 농담까지 곁들였는데도, 차선오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딘가 어두워진 눈으로 하진의 옷차림을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야…. 왜 그렇게 봐.”

이제 실내는 에어컨을 가동한 덕분에 꽤 시원했지만 하진은 다시 더위를 느꼈다. 역시 너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 것 같았다. 이런 여름에 두툼한 맨투맨을 잠옷으로 입고 자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숨이 다 막혔다. 난처해진 하진이 딴청을 피웠다.

“맥주 안 마실래? 이제 가자. 이러다 진짜 미지근해지겠….”

“하진이 너, 아까보다 얼굴이 빨개졌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몰래 가슴을 만져서 얼굴이 붉어진 모양이었다.

“…그래? 더워서 그런가.”

하진은 어색하게 손부채질을 했다.

“더우면 다시 벗으면 되잖아.”

“그, 그건 안 돼.”

“왜?”

스스로 느끼기에도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 하진이 횡설수설하며 변명했다.

“그게, 그냥 너랑 이렇게 둘이 있는 게 좀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 누구랑 같이 사는 거 자체가 오랜만이거든.”

“…….”

“부, 불편하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 아직 우리 첫날이잖아. 그리고 내가 원래 피부가 금방 빨개지는 편이라… 몸이 약해서 쓸데없이 예민한 건지. 아, 아무튼 좀 그래. 미안.”

아무렇게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던 차선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직 첫날이긴 하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이었다.

“내가 그걸 자꾸 까먹네. 마음이 급해서.”

“으응….”

“일단 가서 앉자.”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하진은 자신의 어설픈 변명이 먹혀들었다는 게 의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말 없이 얌전히 차선오를 따라 부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 위로 맥주 두 캔과 견과류를 담아 놓은 자그마한 종지, 잘라 놓은 치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플라스틱 통 하나가 보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새 이걸 준비한 모양이었다. 하진은 눈치를 살폈다. 쭈뼛거리며 의자를 빼 앉으려 하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말고 여기 앉아.”

“아, 여기가 네 자리야? 그럼 비켜줘야지.”

“아니. 내 옆에 앉으라고. 만지기 좋게.”

말끝이 묘하게 차가웠다. 만지기 좋게, 라니. 이상한 말이었다. 하진이 그가 가리킨 자리를 멀뚱히 살폈다. 뭘 만지려는 건지는 몰라도, 의자가 네 갠데 남자 둘이 나란히 앉는 건 아무래도 어색할 것 같았다.

“왜? 나 그냥 여기 앉을게. 그래야 팔 안 부딪치고 편하지.”

하진이 웃으면서 원래 앉으려던 의자를 당겼다. 끼익. 바닥 긁는 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그때였다.

“자꾸 내 말을 안 듣네.”

“…어?”

“하진아. 내가 하라면 그냥 해. 토 달지 말고.”

차선오가 갑자기 화를 내듯 조용히 읊조렸다.

“…….”

눈이 마주쳤다. 하진은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달라진 목소리와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그는 뭔가를 참는 듯 보였다. 그런 표정으로 명령하는 태도 역시 낯설기만 했다. 몸이 긴장으로 뻣뻣이 굳었다.

“네 말대로 첫날이라 어려운 건 알겠는데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

당황한 표정을 봤을 텐데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크게 소리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용히 말할 뿐인데, 하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겁이 났다. 큰 실수를 한 것처럼.

친구니까 서로 편하게 지내자고, 부담 갖지 말라고,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러던 차선오가 화를 낼 정도면 제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모양이었다. 잔뜩 주눅 든 하진이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쓸데없이 몸을 가리고 나오질 않나. 거짓말을 하질 않나. 오늘은 편하게 넘기려 했는데 처음부터 이러면 나도 곤란하잖아.”

“미, 미안….”

하진은 자신이 뭘 잘못한 줄도 모르고 서둘러 사과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선오야….”

대답조차 없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는 더 버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얼른 차선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 화 많이 났어?”

하진이 단단한 그의 팔뚝을 살짝 어루만졌다. 막상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남자끼리라도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건데, 왜 고집을 부렸을까.

여긴 엄연히 차선오의 집이었다. 그도 분명 살아오던 생활 패턴이 있을 텐데. 고작 얹혀사는 처지인 제가 그걸 깨뜨려선 안 된다고 하진은 생각했다.

“말 잘 들을게…. 너무 편하고… 좋아서 그랬어.”

몽롱하게 가라앉은 머릿속은 다른 이상한 점을 조금도 찾아내지 못했다. 빠르게 납득을 마친 입에서 저절로 순종의 말이 새어 나갔다.

“마, 만지기 좋게 처음부터 옆에 앉았어야 했는데. 이제 네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화내지 마….”

“믿어도 돼?”

“으응, 진짜야. 제발… 선오야.”

이제 하진은 흡사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말간 얼굴을 꽤 심각하게 지켜보던 차선오는, 마치 자비를 베풀듯 명령했다.

“그럼 옷부터 벗어.”

“…어?”

“아까처럼 가슴 만져 보라고. 내가 보는 앞에서.”

직설적인 요구에 하진의 흐릿한 동공이 흔들렸다. 옷을 벗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가슴을 만졌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설마 그걸 뒤에서 전부 보고 있었던 걸까…? 상기된 얼굴이 차차 하얗게 질렸다.

“못하겠어?”

“그, 그게….”

“하라는 대로 한다면서. 그것도 거짓말이었나 보네.”

치익, 탁. 패닉에 빠진 하진을 내버려두고 차선오는 맥주 캔 하나를 따서 아무렇지 않게 마셨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넘어가는 목 넘김 소리에도 하진의 머릿속은 좀처럼 개운해지지 않았다.

…왜 더 재촉하지 않지? 두 번 말하는 것도 성가시다는 의미일까?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뭘?”

“그… 만진 거 말이야.”

애꿎은 옷자락만 구겨대면서 하진이 간신히 물었다. 그사이 캔을 내려놓은 차선오는 안주를 먹는 대신 한쪽에 놓아두었던 정체불명의 플라스틱 통을 집어 들었다.

그가 장난치듯 손안에서 통을 이리저리 굴렸다. 통이 한쪽으로 기울 때마다 안에서 가볍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꼭 작은 알갱이들이 굴러다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 집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없어. 전부 내 뜻대로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니까.”

“…….”

“하진이 너도 마찬가지고.”

차선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설명했다.

“어차피 이렇게 말해도 이해 못 하겠지만.”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지만 그의 짐작과는 반대로 하진은 어느 정도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더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래서 화가 난 거였구나. 뻔히 아는 데도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하니까. 몇 번 지적하지 않고 봐줬는데도 내가 말을 듣지 않아서… 선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진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해졌다. 당장 그가 시킨 대로 옷을 벗고 아까처럼 부풀어 오른 가슴을 만져야 한다는 생각과, 아무리 그래도 이미 한 번 거짓말한 걸 갑자기 실행에 옮기면 오히려 더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상충했다.

그 틈으로 옷 속에 갇힌 유두가 간지럽다는 욕망까지 은밀하게 번졌다.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의심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못 하겠으면 그냥 맥주나 마시고 일찍 쉬어. 네 생각은 알겠으니까.”

“아냐, 선오야. 그게 아니라…!”

정말 별 기대 없다는 듯, 자신의 앞에 캔까지 밀어주는 모습에 하진은 마음이 급해졌다. 하진이 다시 그의 팔을 붙잡고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차선오는 자신을 붙잡은 그 손을 겹쳐 감쌌다. 크기 차이 때문에 완전히 가려진 하진의 손이 짓눌린 채 움찔거렸다.

“할 거야?”

“응. 하, 할 건데….”

하진이 망설이며 간신히 물었다.

“옷… 전부 벗어야 해?”

“싫어?”

“나 샤워도 안 했고… 창피해서….”

“그럼 다 벗지는 말고 그거 하나만 벗든지. 어차피 진짜 잠옷도 아니잖아.”

그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젠 덥고 갑갑해서 얼른 벗어버리고 싶단 생각까지 들던 참이었다.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하진은 일부러 챙겨 입었던 맨투맨의 밑자락을 잡고 위로 조심스럽게 들추어 올리기 시작했다.

“…….”

차선오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스로 옷을 벗는 박하진이라니. 아까 현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하진의 와이셔츠를 벗길 때도 꽤 흥분되긴 했지만, 이렇게 그가 직접 벗는 건 또 처음이라 눈을 뗄 수 없었다.

양팔이 훅 치켜 올라가면서 하진에게서 옅은 땀 냄새가 풍겨왔다. 그 달콤한 향취에 차선오의 바지춤이 슬슬 부풀어 올랐다. 실은 아까부터 묵직하게 피가 몰려 있었던 아래에 시각적인 자극이 더해지자 성기가 더 딱딱해져 왔다.

옷의 머리 부분을 빼내느라 하진의 팔이 완전히 올라갔을 땐, 안에 꾸역꾸역 받쳐 입은 티셔츠도 약간 딸려 올라갔다. 조심성이라곤 없는 박하진. 애처럼 손을 타는 박하진. 군살 없이 납작한 배와 늘씬한 허리가 슬쩍 드러나 보였다.

그냥 엎어 놓고 박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침이 고이는 광경이었다. 꼭 삽입까지 갈 것도 없이 말랑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살결에 대고 몇 번 문지르기만 해도 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성급한 충동을 막아 세우듯,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진이 벗은 무거운 맨투맨이었다.

“선오야, 나….”

다시 티셔츠 한 장 차림이 된 하진이 어서 봐달라는 것처럼, 혹은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수줍게 말했다. 얼굴에 드리워진 것은 분명한 해방감이었다. 옷감 안에 갇혀 있던 열기가 공중으로 퍼졌다. 옆에 앉은 차선오마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하진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도 솜털이 남은 뺨이 상기되어 살짝 불그스름했다. 사랑스러웠다. 12년이 지나도 박하진은 여전히 예쁘고, 하얗고, 또 먹음직스러운 모습 그대로였다. 순하고 말 잘 듣는 소동물처럼. 조금만 정색하고 목소릴 깔았더니 금세 겁에 질려 무너지는 게 기특하기도 했다.

다신 안 놔줘. 차선오는 은연중에 그렇게 마음먹었다. 사실 그의 목표는 놔줘도 하진 스스로 다시 제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만들 방법도, 자신도 있었다.

“이, 이렇, 게 만지면 돼…? 읏, 아….”

그사이 하진은 티셔츠 위로 툭 불거진 유두를 둥글게 비벼대기 시작했다. 서툰 손길이지만 손끝이 닿은 부위는 분명 성감을 자극하는 위치가 맞았다.

“흐으으….”

겨우 참고 있었다는 것처럼 하진은 계속 부끄러운 손장난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앉은 채로 금세 입을 벌리고 허리를 달싹거렸다.

“하진아. 만지라고만 했지 누가 자위까지 하랬어.”

“하아, 그게 아니라… 만지기만, 하고 있는데에….”

“그만큼 만졌다고 벌써 도톰해져서. 아까 나 몰래 그랬어? 문 활짝 열어 놓고, 나한테 들키고 싶었던 거 아냐?”

“흐으, 아니야. 나는 그냥…. 읏!”

더듬더듬 말하던 하진이 상체를 부르르 떨었다. 손끝을 세워 짓이기듯 유두를 꽉 꼬집은 채였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은 걸 스스로 잘도 했다.

“그만해.”

“그, 그만…?”

“응. 손 떼고 팔 뒤로 해서 기다려.”

“…흐….”

차선오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게다가 겉으로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하진은 어쩔 수 없이 반항 한 번 못 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아쉬워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조금만 더 만지고 싶은데…. 잡고 비틀었다가 살살 둥글리듯 굴리면… 좀 더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것처럼 얌전히 두 손을 등 뒤로 모아 감춘 하진은 아까보다 더 가슴을 내민 듯한 야릇한 자세로 연신 움찔거렸다.

“생각보다 더 잘 느끼네, 우리 하진이.”

차선오는 하진이 원하는 게 뭔지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남은 맥주나 들이켜며 시간을 끌었다. 안주는 필요 없었다. 습기가 배어난 흰 티셔츠. 그 위로 볼록 솟아오른 유두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계속 여유 부리는 모습에 견디다 못한 하진이 그를 부르려는데,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적응 못 하고 반항이라도 할까 봐 걱정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네. 이대로라면 금방 할 수 있겠다. 예전에 못 한 것들, 전부.”

“…….”

“뭐, 사실 네가 만지게끔 해두긴 했는데….”

그가 픽 웃었다.

“이따 자기 전에 침대에서나 할 줄 알았거든. 그럼 그거 보면서 아다 딸 생각이었어, 난.”

“…….”

하진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라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가슴 쪽에 진득한 시선이 느껴져서 온 신경이 다 그쪽에 쏠려 있었다.

“근데 잠깐 짐 풀라고 혼자 둔 사이에 이럴 줄이야.”

“나는, 난 네 말 때문에 그런 거였어.”

순간 차선오의 말을 질책으로 오해한 하진이 급히 변명했다.

“…….”

“정말이야. 네가 저, 젖꼭지 큰 편이라고 해서 정말 그런가 하고, 읏, 아흐으!”

하진의 티셔츠 자락이 아래로 확 당겨졌다. 가뜩이나 옷감에 쓸리는 아릿한 감각에 몸이 달아 있던 하진이 크게 상체를 떨었다.

“그래? 하진이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은데?”

상상 이상으로 민감한 몸이었다. 차선오는 핥아주고 싶게 생긴 도톰한 윤곽을 뚫어지도록 보면서 계속해서 옷을 당겼다. 그 상태로 뭔가를 더 하지 않아도, 하진이 알아서 몸을 비틀면서 옷에 대고 유두를 더 부풀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다시 손으로 꼬집고 만지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아, 응, 선오야… 나 손 좀….”

“어떤 것 같냐니까. 대답하면 나도 만져서 한 번 확인해 볼게. 정말 그런지.”

“읏! 아앙, 아…. 그, 그게….”

계속 움찔거리며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던 하진은 만져준다는 말에 허겁지겁 아래를 확인했다.

“조금… 큰 것 같아. 이, 이렇게 옷을 입었는데도 모양이 튀어나와 보이니까… 난 몰랐어. 내 여기가 어떤지….”

“그런가. 역시 네가 생각하기에도 그래?”

“으응, 응. 좀 이상하지…? 흐으, 미안. 용서해줘….”

하진은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온 정신이 차선오에게 쏠려 사소한 반응 하나에도 민감해지고 기분이 시시때때로 변했다.

당장은 젖꼭지가 커서 좋아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인데, 이런 문제로 감정이 상하면 정말이지 서글플 것 같았다. 이러다 젖꼭지를 몰래 만졌다는 이유로 인턴도 금방 잘리고 이 집에서도 쫓겨나는 건 아닌지….

“아냐. 예뻐.”

그러나 점점 심각해지는 걱정과 달리 차선오는 아주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주눅 든 하진의 상체를 끌어당기면서, 마침내 티셔츠를 벗겨주었다. 살짝 스치는 감각에도 하진이 우는 소리를 냈다.

“아으, 흐….”

“내가 보기엔 좀 더 커져도 될 것 같아.”

어느새 차선오의 매끄러운 엄지손가락이 솟아오른 하진의 오른쪽 유두를 훑고 있었다.

“흐읏…! 아, 어떡… 응, 읏…!”

소름 끼칠 만큼 부드러운 감각이었다. 차선오의 시선이 연분홍색의 돌기를 집요하게 살폈다.

“색깔도 아직 너무 연해. 더 진하고 커지면 훨씬 잘 어울릴 텐데. 어떻게 생각해?”

“아… 아, 흐으… 좋아, 좋, 응! 선오야아….”

그가 고개를 숙여 촉촉한 가슴께에 얼굴을 묻었다. 살냄새가 더 진하게 풍겨왔다. 샤워하지 말라고 한 보람이 있었다. 자기 전에도 못 씻게 할까. 어차피 잠든 채로도 정액을 몇 번이나 받아야 할 텐데… 직접 씻겨주는 것도 좋고.

고민하던 사이 입술이 유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하진은 얼굴은 물론이고 몸까지 붉어질 정도로 흥분해선 고개를 젖힌 채 가쁘게 헐떡였다. 상체를 더 내밀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두면 아예 얼굴에 대고 스스로 가슴을 비빌 기세였다.

“그래서 말인데,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만지면서 키우는 건 어때?”

츄웁. 마침내 차선오의 혀가 도톰한 유두를 핥았다. 침이 흥건하게 묻어난 자리에 다시 폭신한 입술을 찍고, 간지러울 만큼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집에선 생각날 때마다 젖으로 자위해도 좋아.”

자극당한 하진의 젖꼭지가 무척 딱딱했다. 핥을 맛이 났다. 혀로 애무하며 튕길 때마다 얼굴 위에서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응원하는 의미로 내가 좋은 선물도 줄 테니까.”

알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진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열심히 키울수록 선물은 빨리 나올 거야. 나긋한 속삭임과 함께 차선오는 다시 하진의 가슴을 빨았다. 플라스틱 통 속의 하얀 알약이 달그락거리는 듯했다.

*

“몇 가지만 지키면 편해.”

어느새 자신의 위에 마주 보고 앉은 하진에게 차선오는 속삭였다. 몇 개인지 모를 알약을 윗입에 잘 먹여둔 뒤였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하진의 눈은 아까보다 한층 몽롱했으며, 맹목적이었다. 오로지 차선오에게만.

“집에 있을 땐 아까 같은 옷 입지 마. 지금처럼 내가 만지거나 빨고 싶을 때 바로 할 수 있게. 무슨 말인지 알지?”

“응…. 선오 네가 만지기 좋게….”

엄격한 척 어르자 하진이 성실하게 따라 중얼거렸다. 속옷 하나만 겨우 걸친 주제에 꼬박꼬박 대답을 잘하는 게 무척 꼴리고 예뻤다.

조금 전, 단내를 풍기는 하진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덥지 않냐고 넌지시 물었다. 물론 에어컨은 잘 가동되고 있었으나 하진은 알아서 바지를 훌훌 벗어 예쁘게 정리해 두기까지 했다. 기특하게도.

벌써부터 이렇게 제 위에 올라타도록 할 생각은 없었는데,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조심성 없이 벌어진 맨 허벅지의 안쪽을 달래듯 살살 어루만졌다. 보드랍고 무른 살이었다. 순하고 말 잘 듣는 하진과 어울리게.

“잠옷이라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도 하지 말고. 오늘은 첫날이라 적당히 봐줬지만 다음엔 아픈 거 시킬지도 몰라. 부끄럽고 창피한 걸로 안 끝날 거야.”

“…….”

내내 끄덕이던 하진이 대답 없이 몸을 움찔거렸다. 겁을 집어먹은 듯,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깔고선 귀 끝을 잔뜩 붉혔다. 발가락은 숨듯이 잔뜩 곱은 채였다. 거기에 또 마음이 약해져 차선오는 하진의 목덜미를 끌어안아 토닥였다.

“어려운 거 아냐. 나만 잘 따라오면 돼.”

“지, 진짜…?”

“그래. 서로 기분 좋게 씹질만 해도 모자란 데. 하진이 너도 떡칠 때 아프기만 한 건 싫잖아, 응?”

“…으응.”

무언가… 살면서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들이 지나간 것 같았지만 하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얼른 적응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어떨 때 느낌이 좋은지, 어디를 만졌을 때 박히고 싶은 기분이 드는지 꼭 말해줘야 해. 숨기는 거 없이.”

“그, 그렇게 할게.”

“참. 잘 때 입을 거 필요하면 내가 골라줄까? 안 그래도 입혀보고 싶은 거 많으니까 하나씩 해보자. 뭐가 어울릴지 나도 궁금하네.”

응. 고마워, 선오야…. 연달아 쏟아지는 암시 속에서 하진이 유순하게 대꾸했다. 자신이 뭘 입게 될지에 대해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만져지고 빨려 퉁퉁 부어오른 가슴을 연신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아직도 복숭앗빛이었다. 흐릿한 눈가에는 계속하지 못해 못내 아쉬운 듯, 원초적인 성욕만이 가득했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느꼈던 기묘한 나른함이 한층 더 무겁게 내려앉아 그의 정신은 온전치 않았다. 게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약까지 삼킨 하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주 한정적이었다.

‘선오를 잘 따라야 한다’.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 그런 기본적인 사항부터.

‘만지고 빨기 좋은 차림으로 지내야 한다’. ‘선물을 받기 위해 꼬박꼬박 젖…으로 자위해야 한다’. ‘기분 좋은 씹질…을 위해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조금은 새롭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문제들까지.

하나하나 짚어보니 어려울 건 없었다. 최면에 빠진 것과는 상관없이 하진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이 아주 약한 편이었다. 차선오 역시 꼭 필요할 때만 굳은 표정으로 말만 약간 세게 할 뿐, 기본적인 태도는 아주 다정한 축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진도 큰 거부감 없이 시키는 대로 전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최면에 빠진 자아와 진짜 하진의 자아 사이의 벽은 너무도 연약했다.

“저기, 선오야. 그러면 나… 할 말 있는데….”

아직 부끄러움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하진이 주저하며 말했다. 뭔데? 차선오는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아까 네가… 빨아줄 때 있잖아. 그때… 기분 좋았어.”

아주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지만 그 의도만큼은 분명했다. 차선오가 떠오르는 웃음을 감추었다.

“어디가 얼마나 좋았는데. 구체적으로 얘기해줘야 알지.”

“으응. 그게, 젖꼭지 말이야…. 네가 혀로 핥고 굴리고… 뽀뽀해줬잖아. 그때 아래가 간지럽고 막, 배가 찌릿하고….”

하진은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웅얼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잘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얼마나 노골적인 단어까지 쓸 수 있는지 궁금해 끝까지 내버려 두고 관찰하려 했는데. 다른 의미로 물러진 차선오는 그만 참지 못하고 답을 알려주고 말았다.

“자지로 박히고 싶었다고?”

“으, 응…?”

“쑤셔지고 싶었다는 말이잖아. 뒷보지가 근질거려서.”

“흐아, 앗.”

단단한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과육을 으깨듯 양손을 크게 벌려 살집을 잡고 주물럭거리니 하진이 금세 우는 소리를 냈다.

“아…! 아응, 읏.”

“하진아. 어땠다고?”

“자, 잠깐만. 그거, 거기 이상… 흐…!”

“확실히 말해줘.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살집이 벌어졌다가 다물릴 때마다 그 사이의 구멍이 움찔거렸다. 게다가 교묘하게 사이를 스치는 두툼한 양감이 뜨겁고 단단해서, 자꾸만 더 닿고 싶었다. 긁어지고 문질러지고 싶었다.

본능처럼 바로 앞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감겼던 눈을 스르르 떴다. 그리고 제가 타고 앉은 이와 눈을 맞추면서 울먹이듯 설명했다.

“마, 맞아….”

“…….”

“박, 히고 싶었어. 선오야…. 아까 이렇게, 여기 핥아줄 때.”

“계속 그러네.”

최선을 다해 설명하는 하진을 지켜보던 차선오는 사뭇 엄격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부끄러워 말고 제대로 설명하라고 했잖아. 피곤한데 그만둘까?”

“흐으, 응… 아니야, 제발….”

“말 안 하면 나도 못 도와줘.”

차가운 겁박과 달리 손은 자비 없이 자꾸만 아래를 긁듯이 건들고 있었다. 구멍의 촘촘한 주름이 움찔거렸다.

이런 부위가 간지러운 건 처음이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에서 침이 떨어져 내렸다. 애가 타서 그대로 무언가 확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진은 더 견딜 수 없어 스스로 허리를 비비면서 울먹였다.

“자, 자지로…. 읏, 뒷…보지가 근질거려서어…. 선오 네 자지로 박히고 싶었, 아, 흐앗, 응…!”

콱, 찧듯이 상체를 아래로 힘주어 내리자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성기와 구멍이 맞부딪혔다. 하진은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하지만 그게 나쁘긴커녕 짜릿하고 좋은지 더 가까이 닿지 못해 연신 하체를 움찔거렸다. 하진의 속옷 앞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하아….”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차선오는 자신이 만든 상황을 비로소 만끽하듯 긴 숨을 뱉었다. 그리고 차오르는 애정을 참지 못해 하진의 뺨이며 목덜미, 겨드랑이에도 입을 맞추고 말았다.

“잘했어. 그렇게 하는 거야.”

“으응, 흣… 아흐….”

그 감촉에도 느끼는지 하진이 한껏 민감해진 몸을 바르작거렸다.

“이렇게 잘할 거면서 왜 이제 왔을까. 난 그게 궁금해.”

“…….”

“쭉 내 옆에 있었으면, 지금쯤 내 냄새만 맡아도 예쁘게 물을 질질 쌌을 텐데.”

“…….”

“졸업식 때 너만 기다린 거 모르지.”

대답 없는 하진이 야속해 차선오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물론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간 알게 될 테니 이쯤에서 봐주기로 했다.

“뭐, 괜찮아.”

대신 벌 아닌 벌처럼 다시 엉덩이를 꽉 꼬집었더니 하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유두에 손을 올렸다. 마치 배운 게 그것뿐인 아이처럼 구는 게 귀여웠다.

“금방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흐응, 조, 좋아….”

벌벌 떨리는 하진의 턱을 잡아 깊게 키스했다. 밤이 깊었다. 붉은 속살을 깊게 쑤셔줄 생각에 아래가 묵직하게 꺼떡거렸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