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상이몽 연애사 AU 외전 (14/14)

동상이몽 연애사 AU 외전

도화국(桃花國)의 왕세자 채하는 지독한 상사병을 앓고 있었다. 채하는 멍하니 서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복숭아나무를 바라보았다. 민심을 살핀다는 핑계로 궁을 빠져나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마주친 어느 사내의 얼굴을 며칠째 잊지 못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눈 것도,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니었지만 스쳐 가는 찰나의 순간에 본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날 채하는 무엇을 하러 나갔는지도 잊어버리고 멍한 상태로 다시 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이후로 며칠이 지나도 아름다운 사내를 잊지 못했다. 하얀 얼굴과 굳은살 하나 없어 보이는 고운 손, 옷차림을 보면 분명 귀한 집의 자제임이 틀림없었다.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매일같이 저잣거리로 나갔지만 그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

‘세자는 곧 혼례를 치를 터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부왕께서 부르신다는 말에 찾아뵈었던 어제, 채하는 자신의 혼례 소식을 들었다. 이미 왕세자들의 평균적인 혼례 나이를 훌쩍 넘은 터라 곧 혼례를 치르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두 귀로 들으니 청천벽력 같았다. 왕세자로서 나라를 위해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도 모르는 사내에 대한 짝사랑으로 상사병을 앓기 전의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부왕의 오랜 친우라는 이유 하나로 왕세자비가 될 유씨 집안 외아들의 평판은 입에 담기 힘들 정도였다. 사치가 심해 한번 입은 옷은 절대 다시 입지 않고 매일같이 유씨 저택으로 사치품을 실은 마차가 드나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심지어 성정도 포악해 그자의 횡포에 손목이 잘려 쫓겨난 하인이 수십, 수백은 족히 된다고 했다.

“얼굴이라도 좀….”

게다가 한번 보면 꿈에 나올까 무서울 정도로 박색이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그 고운 얼굴을 아직 잊지 못했는데 천하제일의 박색과 부부의 연을 맺어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혼례식 날이 되었다. 그동안 왕세자비가 될 유씨 집안의 아들이 여러 번 궁에 드나들었지만 일부러 그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혼례식 당일 처음 마주한 세자빈은 도화국의 전통대로 두꺼운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고운 혼례복을 입었지만 그런 세자빈을 보는 세자의 머릿속에는 ‘나이가 차도 피지 못한 얼굴에 고운 옷만 입히면 뭐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합환주를 나눠 마시는 것으로 혼례가 끝나고 채하와 지원은 정식 부부가 되었다. 그날 밤, 채하가 신방에 들었을 때 지원은 면사포를 쓰고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하는 지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술상 앞에 앉아 잔을 채웠다.

“저하, 제가 따라 드리겠사옵니다.”

술잔을 비우자 지원이 손에 술 주전자를 들었다. 주전자를 쥔 하얀 손가락은 길게 뻗었고 곱게 여문 손끝이 예뻤다. ‘얼굴이 저 손의 반만 닮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채하가 말없이 술잔을 비우다가 지원을 불렀다.

“빈궁.”

“예, 저하.”

“빈궁도 한잔 받으세요.”

술잔을 받는 지원의 하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채하가 주전자를 내려놓자 지원이 고개를 돌려 면사포의 입 부분을 살짝 걷고 술잔을 비웠다. 술 주전자가 텅 비었을 때 채하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주렁주렁 달린 지원의 머리 장식을 하나씩 걷어 냈다. 그러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면사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옷고름에 손을 올렸다. 옷고름이 풀리자 지원이 움찔하고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채하는 개의치 않고 얇은 속적삼이 나올 때까지 옷을 풀어 헤쳤다. 속적삼 사이로 고운 목선과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가 드러났다.

술이 오른 채하는 그동안 배운 성교육을 전부 잊어버린 것처럼 거칠게 파고들었다. 지원은 법도대로 이불자락만 쥐어짜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억지로 참았다. 시체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제 안을 헤집고 있는 그의 성기가 얼른 가라앉기를 빌고 빌었다.

채하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움직임을 멈추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배 속을 가득 채우는 불쾌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바로 방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고통이 몰려왔다.

“…으윽.”

자신도 모르게 고통 어린 소리를 낸 지원이 깜짝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부풀어 오른 성기가 원래대로 돌아가자 채하는 몸을 뒤로 물렸다. 정사가 끝난 후 채하는 대충 옷을 추스르고 바로 신방을 나가 버렸다.

배려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거칠고 무례한 행위였다. 지원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니 덜덜 떨리는 허벅지를 타고 피가 섞인 정액이 흘렀다.

“유모….”

옷을 여민 지원이 작은 소리로 함께 입궁한 유모를 불렀다. 지원의 부름에 유모가 곧바로 신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모는 여전히 면사포를 쓰고 있는 지원을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도련… 세자빈 저하.”

“유모, 나 목욕하고 싶어. 목욕물 준비해 줘.”

넋이 나간 지원의 목소리에 유모가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지원은 멍하니 이불 위에 앉아 있다가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에 목욕통에 몸을 담갔다.

“나 혼자 할게. 유모는 나가 있어.”

“예. 세자빈 저하. 밖에서 기다릴 테니 필요하시거든 바로 불러 주세요.”

혼자 남자 자신도 모르게 양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혼례식 때 처음 세자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주워들은 이야기로, 초야는 아프지만 아픈 만큼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원의 초야는 사랑 대신 고통과 비참함만 남겼다.

자신에 대한 헛소문이 도성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세자 저하는 그런 것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얼음장 같은 채하의 태도에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목욕물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몸을 담그고 있던 지원은 유모가 놓고 간 옷을 챙겨입고 다시 면사포를 썼다. 도화국에서는 결혼한 음인의 면사포를 양인이 벗겨 주는 전통이 있었다. 양인이 면사포를 벗겨 주지 않으면 음인은 절대 맨얼굴을 드러낼 수 없었다.

다음 날 초야를 치렀음에도 면사포를 쓰고 있는 세자빈의 모습에 온갖 소문이 궁 안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지원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폐위라도 당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중전마마, 간밤 평안하셨는지요.”

“빈궁 덕에 평안했습니다.”

지원을 폐위를 바라면서도 해야 할 일은 저버리지 않았다. 매일 중전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채하의 생모인 중전은 여전히 면사포를 쓴 지원을 보고 매일같이 한숨을 쉬었다.

“유모,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지원의 말에 유모가 놀란 얼굴로 주위에 듣는 귀가 없는지 살폈다.

“저하, 이제 여기가 세자빈 저하의 집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들었다가는 큰일 날까 무섭습니다.”

“주상 전하나 세자 저하께서 들으시면 불경하다고 나를 내치시진 않을까?”

그 말에 유모가 눈물을 보였다. 혼례식 날 이후 채하는 지원을 찾지 않았다. 폐위만 바라고 있는 지원도 그 사실을 마음속에 크게 담아 두지 않았다. 그저 혼자 보내는 날들이 늘어 갈수록 마음의 벽을 조금씩 쌓아 갈 뿐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합방 후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의관이 회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 오랫동안 맥을 짚던 의관이 입을 열었다. 의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원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임신 맥이 잡힙니다. 경축드리옵니다. 세자빈 저하.”

의관의 말을 들은 지원은 머리가 멍해졌다. 초야를 치른 지원이 면사포를 벗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처럼 궁 안에는 찬밥 신세인 세자빈이 아기씨를 가졌다는 말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세자빈이 세손을 가졌다는 소식에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는 크게 기뻐하며 진귀한 물건들을 하사하셨다. 하지만 지원은 방 한구석에 가득 쌓은 물건들을 보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가야, 나 때문에 너도 찬밥 신세면 어떡하지?”

채하에게 외면당하는 자신 때문에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저와 같은 취급을 받을까 봐 무서웠다. 회임 사실을 알게 된 지원은 폐위당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을 접어야 했다.

채하는 지원의 회임 소식에 아랫사람을 시켜 서책 한 권을 보냈다. 서책의 맨 앞장에 쓰여 있는 제목을 확인한 지원은 책장을 넘겨 보지도 않고 저 멀리 던져두었다. 부모의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는 책이었다. 세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큰일이 날 행동이었지만 지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저하.”

“몸은 어떻습니까? 빈궁.”

“저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채하와 지원은 서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아버지의 기운을 받는 것이 아이에게 좋다는 이유로 매일 반 시진씩 얼굴을 맞대고 있었지만 지원은 채하의 기운이 불편했다. 오늘도 채하가 돌아간 후에야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아가야, 오늘도 힘들었다. 그렇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기운은 차라리 받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라는 주상 전하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방 안에 혼자 남은 지원이 면사포를 벗고 거울을 손에 들었다. 거울에 비친 하얀 낯은 누가 봐도 예뻤다. 거울을 치운 지원은 다시 얼굴을 가렸다.

“아바마마께서 하사하신 물건들입니까?”

다음 날도 같은 시간에 찾아온 채하가 지원의 처소에 쌓인 물건들을 보고 물었다. 누가 봐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예. 그렇사옵니다.”

“빈궁이 사치를 좋아한다던데, 아바마마께서 그 취향에 맞는 걸 내리셨는지 모르겠네요.”

채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지원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분수에 넘치는 것은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도화국 고위 귀족의 외아들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들만 가졌었다. 하지만 지원의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의 입을 통해 지원은 사치에 눈이 먼 인간이 되어 버렸다.

“빈궁, 태교는 잘하고 계십니까?”

“예, 저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려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포악하기로 유명한 네 성격 안 닮게 태교에 힘쓰라는 뜻이었다. 속뜻을 알아챈 지원이 쓰게 웃으며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채하는 서책을 펼쳤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풀이 죽은 것 같은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포악하기로 도성 내에 소문이 자자한 자가 어찌 그러고 있을까.”

궁에 들어온 지 2달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지원이 큰소리를 냈다는 소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채하는 그저 눈치를 보느라 성격을 죽이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박색만 아니었어도 면사포는 벗겨 주었을 것을. 아니면 성격이라도 좋든가.”

채하는 지원의 존재 자체가 못마땅했다. 기회가 된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쫓아낼 생각이었지만 태중의 아기 때문에 이제 그러지도 못했다. 혀를 끌끌 차고 다시 서책을 펼쳤다.

혼례 이후 이름 모를 사내에 대한 상사병이 싹 사라졌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초여름의 어느 날, 뒤뜰의 정자에 앉아 햇빛을 받던 지원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꺼운 면사포에 답답함을 느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면사포를 벗어 버렸다. 그 모습에 유모가 깜짝 놀랐다.

“세자빈 저하, 누가 보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여기 아무도 안 오잖아.”

다 포기한 것 같은 지원의 말투에 유모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어 감췄다. 지원은 몇 달 만에 맨얼굴로 받는 햇살을 느꼈다. 그리고 그대로 정자의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지원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불 위였다. 방으로 돌아온 기억은 전혀 없었고 중년의 유모 혼자서 자신을 안아 옮겼을 리도 없었다.

“유모! 유모!”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유모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유모, 누가 나 여기로 옮겨놨어?”

“세자 저하께서….”

채하가 자신을 옮겨 놓았다는 말에 지원은 놀란 얼굴이었다.

“뭐? 면사포 쓰고 있을걸…. 별말은 없으셨었어?”

“예, 없었습니다. 내일 다시 오신다고만 하셨습니다.”

멋대로 면사포를 벗었으니 자신을 질책하러 오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 쏟아질 채하의 질책이 두렵지도 않았다. 이제 지원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었다.

***

지원이 햇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던 그때, 채하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세자빈의 처소를 찾았다.

“빈궁은 안에 계시는가?”

“지금 뒤뜰에 계십니다.”

궁인의 말에 채하가 천천히 뒤뜰로 걸어갔다. 뒤뜰로 향하는 길목에서 지원의 유모가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유모는 채하를 보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저…. 저하.”

“뭘 그리 놀라는가. 어서 빈궁께 안내하시게.”

지원의 유모가 뜸을 들이자 채하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정자에 앉아 있는 지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지만 지원은 돌아보지 않았다. 눈길도 주지 않는 지원 때문에 채하는 헛기침을 하며 정자 위로 올라갔다.

긴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지원의 얼굴을 보고 얼어붙었다. 반만 보이더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딱 한 번 스침으로 강렬한 상사병을 앓게 했던 그자였다.

“…빈궁?”

“세자빈 저하, 세자빈 저하.”

사색이 된 유모가 지원을 깨우려 했다. 하지만 채하가 유모를 말렸다.

“빈궁께서 주무시고 계시니 목소리를 낮추게.”

유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원이 숨 쉬는 것마저 못마땅해하는 채하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채하의 행동에 유모는 자신의 눈마저 의심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 주는 행동은 절대 그답지 않은 것이었다.

“얼른 가서 빈궁의 침구를 정리해 두게.”

채하의 말에 유모는 빠른 걸음으로 처소로 걸어가면서 이게 무슨 일이냐며 중얼거렸다. 깊게 잠든 지원은 채하가 안아 들어도 깨지 않고 처소로 돌아갈 때까지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지원을 이불 위에 눕히고 유모에게 나가 있으라 명했다.

“어찌 이런 일이….”

여러 번 봐도 그때 그 사내가 맞았다. 지원의 얼굴을 보자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했던 말과 행동들을 곱씹으며 후회하고 있을 때 지원이 뒤척이자 놀란 채하가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세자 저하.”

“내일, 내일 다시 올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일러두거라.”

유모의 귀에 들리는 채하의 목소리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됐던 앞으로 큰일이 생길 것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한참 후 잠에서 깬 지원이 부를 때까지 유모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는 상태로 떨고 있었다.

다음 날, 채하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지원을 찾았다. 지원은 채하가 온다는 소식에 면사포를 쓰고 일부러 제일 화려한 머리 장식을 꺼내 달았다. 지원의 작년 생일날, 아버지께서 소 수십 마리 값을 주고 외국 상인에게 사 오셨다는 머리 장식이었다.

“빈궁, 정원의 꽃이 곱게 피었습니다. 함께 산책을 가지 않겠습니까?”

어제 마음대로 면사포를 벗은 걸 질책할 줄 알았건만 그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채하가 지원에게 무언가를 함께하자고 권유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원은 떨떠름한 마음으로 승낙했다. 지원이 한 걸음 뒤에서 걷자 채하가 지원과 발을 맞춰 걸었다.

“꽃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예, 아름답습니다.”

지원은 속으로 ‘면사포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속마음을 숨기고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석 장식이 흔들리면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채하의 시선이 지원의 머리로 향했다.

“머리 장식이 참 곱습니다. 빈궁.”

“송구하옵니다. 저하. 제가 사치가 심하고 미색이 부족하여 고운 장신구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하께서도 이미 제 소문을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사치가 심하고 천하의 박색이라는.”

지원은 자신이 뱉어 놓고도 채하가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지원의 생각과는 다르게 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낼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예, 저하.”

산책을 마치고 다시 처소로 돌아온 지원이 무거운 머리 장식을 풀었다. 면사포마저 벗어 버리고 편하게 누웠다.

“갑자기 왜 저래? 아가야, 너희 아버지는 왜 저러시는 걸까?”

배에 손을 얹고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사람 취급도 해 주지 않다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버린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그간의 냉대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은 단단하게 지원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모, 그냥 가자. 어차피 얼굴도 가렸는데 뭐 하러 단장을 해.”

“그럼 제발 머리라도 빗으세요. 누가 보면 세자빈 저하가 아니라 저잣거리의 거지로 알겠습니다.”

유모의 말에 지원은 투덜거리면서 거울 앞에 앉았다. 지원이 얌전해지자 유모가 빗을 꺼내 긴 머리를 빗어 내렸다. 빗질을 마치고 장신구를 꺼내 들었으나 지원이 유모를 말렸다.

“됐어. 머리에 아무것도 달지 마.”

등허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늘어트리고 처소를 나서는 지원의 뒷모습은 누가 봐도 억지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정원에 도착하고 지원은 유모에게 처소로 돌아가라 일렀다.

“빈궁, 오셨습니까?”

“예, 저하.”

지원은 채하가 말을 걸지 않으면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고 길게 대답하지도 않았다. 정원에서 지원을 기다리던 채하의 앞에는 종이와 붓, 물감이 놓여 있었다.

“그림이 태교에 좋다길래 준비해 보았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제가 부덕하여 태교에 힘쓰지 못해 저하께서 이리 신경을 쓰시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빈궁. 그게 아니라….”

채하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지원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세손께서는 저를 닮지 않도록 태교에 더욱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저하.”

그는 지금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빈궁. 제가 그간 빈궁께 몹쓸 짓을 많이 했습니다.”

채하의 사과에 지원은 놀란 얼굴이었다. 두꺼운 면사포 때문에 지원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채하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헛된 소문 따위에 휘둘려 그러면 안 되었는데 빈궁께 상처만 주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

“한참 늦은 것을 알지만 지금이라도 면사포를 벗겨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전통대로라면 채하의 마음대로 면사포를 벗겨도 되었지만 지원의 의사를 물었다. 지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하의 손이 천천히 면사포를 향해 다가오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뒤로 빠졌지만, 채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답답하게 눈앞을 가로막던 면사포가 사라지고 채하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지원은 채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숙였다.

“빈궁, 왜 그러십니까?”

“저하께 보여 드리기엔 너무 추한 얼굴입니다.”

“아닙니다. 아름답습니다.”

“저하,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박색이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지원이야말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채하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구애하던 자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원은 그의 표정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세자빈의 면사포가 벗겨졌다는 소문이 궁 안에 빠르게 돌았다. 그보다 더 먼저 퍼져 나간 말은 세자빈이 박색이 아니라 경국지색이라는 말이었다. 면사포를 벗긴 후 채하는 매일같이 지원을 찾았다. 이미 견고해진 마음의 벽을 허물려는 노력이었다.

“빈궁, 몸은 어떻습니까?”

“저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저와 아기 모두 평안합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고개를 숙인 채였다. 아직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풀어지지 않았음을 알리고 싶어 드러내는 작은 항의였다.

“요즘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특별히 먹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하. 걱정을 끼쳐 드려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지원은 말미에 ‘죽여 주시옵소서’를 덧붙일까 말까 고민했다. 채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원을 바라보았다.

“혹여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지 제게 말해 주세요. 빈궁.”

아랫사람들에게 말해도 되는 것을 꼭 자신에게 말해 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아닙니다. 그런 사사로운 일로 저하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빈궁의 지아비로서, 우리 아이의 아비로서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말을 들은 지원은 조금이나마 채하를 골탕 먹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지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하.”

“예. 빈궁.”

“아, 아닙니다.”

일부러 주저하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채하는 얼른 말해 보라며 재촉했다.

“저…. 아기가 약과가 먹고 싶다고 합니다.”

“약과요? 알겠습니다. 얼른 약과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채하의 말에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약과가 아니고 서쪽 장터의 장신구 가게 옆에서 파는 약과가 먹고 싶다고 합니다.”

“아기가.” 하고 덧붙이니 채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얼른 가서 사 오겠습니다.”

지원은 가만히 앉아 빠른 걸음으로 처소를 나서는 채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닫이문이 스르륵 닫히고 방에 혼자 남자 침구 위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배 위에 손을 얹으니 점점 부풀고 있는 배가 느껴졌다.

“아가야, 나는 아직 너희 아버지가 미워.”

채하는 지원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 중이었지만 그간 자신의 행동을 만회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침구 위에 누운 지원은 배 위에 손을 얹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제 앞에 앉아 있는 채하가 보였다.

“빈궁, 어서 드세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원은 감사 인사를 하고 약과 하나를 들었다. 입가로 가져가 작게 한 입 베어 물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왜 그러십니까? 맛이 없습니까?”

“아니요. 맛있습니다.”

“근데 왜 더 드시지를 않습니까?”

“아기가 저를 닮아 변덕이 심한 것 같습니다. 아까까지는 정말 먹고 싶었는데….”

눈을 내리깔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채하는 지원을 안쓰럽게 여겼다. 지원은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채하를 돌려보내고 유모를 불러들였다.

“유모, 이거 세자 저하께서 장터에서 사다 주신 거야. 얼른 먹어.”

“예? 그리 귀한 걸 저한테 주셔도 괜찮습니까?”

유모는 손에 들고 있던 약과가 채하가 직접 사 온 것이라고 하자 놀란 얼굴이었다. 지원은 괜찮다며 얼른 먹으라며 유모를 재촉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앞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덧붙였다.

이날 이후 지원은 아기가 먹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채하를 종종 부려 먹고는 했다. 물론 채하가 보는 앞에서는 그 음식을 한 입 이상 먹지 않았다. 이런 유치한 행동으로나마 자신이 받은 수모를 갚아 주고 싶어서였다.

“빈궁은 어릴 때 일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까?”

채하는 매일 지원을 찾아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다 가곤 했다. 오늘도 채하가 먼저 질문했고, 지원은 오래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장 구경을 갔던 기억이 납니다.”

지원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채하는 함께 바깥 구경을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바깥 구경이요?”

“예. 빈궁은 궁에 들어온 이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궁에 들어온 지 6개월이 다 되어 가는 지원은 왕실의 법도대로 바깥 구경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허나… 저는 함부로 밖을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저와 함께하는데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밤, 함께 나가지 않겠습니까?”

채하의 제안에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곧 나갈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해가 지고 채하가 다시 지원을 찾아왔다.

“빈궁, 이 옷으로 갈아입고 나갑시다.”

채하가 옷 한 벌을 챙겨 와 손에 들려 주었다. 지원은 옷을 들고 채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채하는 왜 그러냐 물었다.

“저하께서 나가 주셔야 제가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는 지원의 말에 당황한 듯 얼굴이 빨개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채하가 나가고 지원은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었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세자빈의 옷과 달리 채하가 준 옷은 사가에서 입던 것처럼 가벼운 옷이었다.

“세자 저하.”

준비를 마치고 나온 지원이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채하를 불렀다. 지원의 목소리에 바로 뒤를 돌아본 채하가 손을 내밀었다. 지원은 채하의 손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리 보니 배가 많이 나왔습니다.”

“옷이 얇아서 더욱 그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여러 겹 겹쳐 입었을 때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홑옷을 입자 누가 봐도 배 속에 아기가 있는 티가 났다. 채하와 지원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성문까지 걸었다.

“빈궁, 밖에 나가면 우리는 세자와 세자빈이 아닌 평범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채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채하는 지원의 손을 단단히 잡고 성문을 지났다. 궁을 빠져나와 조금 걷자 환하게 등불을 밝힌 야시장이 보였다.

“와, 너무 아름답습니다.”

채하의 손을 잡은 지원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시장에는 처음 와 봅니다.”

밤 나들이에 들뜬 지원은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채하는 혼자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지만, 지원과 함께 온 야시장은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예.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너무 좋습니다.”

채하의 손을 잡아끌고 구경을 시작했다. 여러 상점들을 지나던 지원은 고기 꼬치를 파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저게 먹고 싶다고 합니다. 아기가.”

지원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구워지고 있는 꼬치를 가리켰다. 채하가 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값을 치렀다. 손에 고기 꼬치를 든 지원은 기분이 좋은지 살짝 웃었다.

“입에 맞으십니까?”

채하의 물음에 지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은 고기를 전부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채하는 오물거리면서 고기를 씹는 지원을 보다가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저하는 안 드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부인, 우리는 이곳에서는 평범한 부부입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채하의 말에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자신을 부인이라 칭하는 채하의 말에 한 번 더 놀랐다.

“조심하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제 이름을 불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을요?”

“예. 부인께서는 제 이름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지원이 조심스럽게 채하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채, 채하 님….”

“예. 부인.”

한 번 더 불러 달라는 말에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원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자 채하는 지원과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두 분의 손목에 인연의 실이 단단하게 묶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채하와 지원이 손을 잡고 걷고 있을 때 거리에 자리를 펼친 점쟁이가 그 둘을 잡았다. 지원의 귀에는 점쟁이의 상술처럼 들렸지만 채하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는지 걸음을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 보게.”

채하는 지원과 함께 그 앞에 앉아 자세히 말해 보라며 재촉했다. 채하의 재촉에 점쟁이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굉장히 귀한 분들로 보이십니다.”

채하와 지원은 젊은 귀족 부부나 부유한 평민 부부로 보일 만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점쟁이의 말에 지원은 정체가 탄로 날까 걱정되어 그냥 가자며 채하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채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더 말해 보라고 부추겼다.

“저는 인연의 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인연의 실은 원래 새끼손가락에 묶여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두 분의 실은 손목에 단단하게 묶여 있습니다.”

“그런가?”

“예. 새끼손가락에 묶인 실은 쉽게 끊어지기도 하지만 두 분은 다음 생에도 그 실이 끊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참 신기한 이야기군.”

채하는 점쟁이의 말을 흥미로워했지만 지원에게는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부인께서는 제 말이 못 미더우신 것 같습니다.”

점쟁이가 지원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말했다.

“두 분의 아드님께서도 큰사람이 되겠습니다.”

“아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점쟁이의 시선이 지원의 배로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지원이 배를 감싸 안고 채하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지원의 재촉에 채하가 넉넉하게 복채를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하 님께서는 귀가 참 얇으신 것 같습니다.”

지원이 손을 잡고 걸으며 투덜거렸다. 채하는 그렇지 않다며 부정했지만 지원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도성 안에 떠도는 헛소문도 믿으시고 사기 같은 점쟁이의 말도 믿으셨습니다.”

“그, 그것은….”

“도성에 떠도는 소문대로 제가 저 점쟁이의 손목을 잘라야 할까요?”

가시가 돋친 지원의 말에 채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원은 입술을 삐쭉 내민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채하는 눈치를 보며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빈궁.”

“이곳에서 저를 그런 호칭으로 부르시면 안 됩니다.”

지원이 차갑게 대꾸하고 다시 입을 닫아 버렸다. 말없이 한참을 걷다가 시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까지 올라갔다. 지원은 거리를 밝히고 있는 등불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앉지 말고 여기 앉으세요.”

채하가 자신의 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 주었지만 지원은 고개를 돌렸다. 그 행동에 채하는 다시 옷을 주워 들어 지원의 무릎 위에 덮어 주었다. 지원은 말없이 자신의 무릎을 덮은 옷을 만지작거렸다.

“혼례를 치르기 전 빈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지원이 성의 없이 대꾸했다. 혼례 전 여러 번 궁을 드나들었으니 채하가 자신을 본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궁의 서쪽 문으로 나가면 있는 저잣거리였습니다.”

채하의 말에 지원은 고개를 들었다. 생각도 못 했던 곳이었다.

“서쪽 장터요?”

“예. 그곳에서 환하게 웃는 빈궁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원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서쪽 장터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혼례 전 마지막 바깥나들이였습니다.”

“제가 그때처럼 빈궁을 웃게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지원은 궁에 들어온 이후로 활짝 웃어 본 적이 없었다. 혼례 전 자신의 일상을 생각하자 기분이 울적해졌다.

“저는… 아직 저하가 밉습니다.”

“빈궁께서 저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제게 기회를 한 번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채하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지난 몇 달간 채하는 지원의 마음을 돌리려 갖은 애를 써 왔다. 지원의 마음도 그 노력에 조금씩 풀어져 가고 있었지만 냉대를 받던 시절의 기억을 완전히 떨쳐 낼 수는 없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배 속의 아기까지 밉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지원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채하가 조심스럽게 지원을 품에 안고 괜찮다며 토닥였다. 한참을 채하에게 안겨 있던 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드니 미안해하는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채하가 보였다.

“제 욕심이겠지만 우리 아기는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채하는 자신은 미워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자 지원은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작게 미소를 짓자 채하는 한시름 놓은 듯했다.

“저하, 이제 놓아주세요.”

여전히 지원을 안고 있던 채하는 그 말에 더 단단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채하는 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될 때까지 지원을 품에서 놓지 않았다.

“저하, 안녕히 주무세요.”

“예.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채하가 돌아가고 처소에 혼자 남은 지원은 이불 위에 누웠다. 궁인들이 준비해 놓은 푹신한 침구에서는 좋은 향기가 풍겼다. 하지만 채하에게 안겼을 때 느껴졌던 향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미쳤나 봐. 왜 그 향기가 생각나는 건데.”

지원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

채하는 지원이 처소로 들어간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문에 비치는 지원의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촛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서야 걸음을 떼었다.

“후우….”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채하는 지원을 품에 안았을 때부터 고여 있던 열기를 빼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하얀 액체를 여러 번 뿜어냈음에도 그 열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한번 성기를 잡았지만 자괴감이 몰려들어 손을 내려 버렸다.

“짐승도 아니고….”

채하가 궁인을 불러 차가운 목욕물을 준비하라 일렀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에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시 궁인을 불렀다.

“내가 차가운 물로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찬물을 더 채워 넣게나.”

“세자 저하, 고뿔에 걸리실까 무섭습니다.”

“괜찮네. 얼른 차가운 물을 더 준비하게.”

단호한 어조에 궁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목욕통 안에 차가운 물을 부어 넣었다. 궁인들을 모두 내보낸 채하는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잡스러운 상념이 사라질 때까지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빈궁,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다음 날, 채하는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지원을 찾아와 안부를 물었다.

“예. 저하. 저하께서도 간밤 평안하셨는지요?”

지원의 안부 인사에 채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평안한 상태가 아니었다. 고뿔에 걸릴까 봐 걱정된다는 궁인의 말대로 고뿔 탓에 미열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채하는 티 내지 않고 평소처럼 함께 산책을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지원이 채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하.”

“왜 그러십니까, 빈궁?”

지원은 이전에도 채하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했었다. 원래는 채하의 손을 잡고 일어나 바로 손을 놓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손을 놓아 달라는 뜻으로 채하를 불렀지만 그는 모른 척할 뿐이었다.

“어제는 제 손을 잡고 걷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채하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더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채하가 이끄는 대로 정원을 걸었다. 산책을 마치고 지원의 처소로 돌아와도 채하는 돌아갈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점심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빈궁과 함께할 터이니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라.”

채하는 지원과 점심 식사까지 함께할 생각이었다. 채하의 말을 들은 지원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빈궁, 어서 드세요.”

궁인들이 점심상을 대령하자 지원은 채하가 먼저 숟가락을 들 때까지 기다렸다. 곧 식사를 시작할 거라는 지원의 생각과 다르게 채하는 지원의 밥 위로 반찬을 하나씩 올려 놓았다.

“저하, 제가 먹겠습니다. 저하도 얼른 드세요.”

“아닙니다. 저는 빈궁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채하의 재촉에 떨떠름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밥과 반찬들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맛있게 느껴졌다. 채하가 반찬을 올려 주는 대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궁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밥 한 공기를 비우는 순간이었다.

“아기에게 서책을 읽어 주고 싶은데 빈궁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식사를 마치고 채하가 물었다. 지원이 마음대로 하라고 하자 궁인을 시켜 책 한 권을 가져왔다. 책 제목을 확인한 지원의 표정은 바로 굳어 버렸다.

“정말로 이 책을 읽어 주실 생각입니까?”

“예. 왜 그러십니까?”

“저것을 고르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글자를 뗀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서책이니 미리 읽어 주면 좋을 것 같아 골라 보았습니다.”

그 말에 지원이 한숨을 쉬었다. 지원도 글자를 다 배우고 난 뒤 저 책으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아기에게 읽어 주기엔 적절하지 못했다.

“서책보다는 저하께서 아기에게 말을 걸어 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지원의 말에 채하는 “아가야. 아버지란다.” 하고 말을 걸었다.

“배에 손을 얹어도 되겠습니까?”

한참을 아기에게 이야기하던 채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에 자신의 손을 얹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원은 채하가 손을 올리는 것을 막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손이 자신의 배 위에 있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아기가 움직입니다.”

아기가 움직이는 것을 처음 느낀 채하는 놀란 얼굴과 목소리를 했다. 지원이 손을 천천히 움직여 보라고 했다. 채하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아기도 조금씩 움직였다.

“아가야, 얼른 만났으면 좋겠구나. 사랑한다.”

아기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채하를 보고 지원은 생각했다. 어떻게 만난 적도 없는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냐고. 채하는 말을 마쳤음에도 여전히 배에 손을 얹고 있었다.

“저하, 이제 그만….”

지원은 채하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채하는 지원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지원은 채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눈치챘다.

“저, 저하.”

“싫으면 하지 않겠습니다.”

채하의 말에 지원은 눈을 감아 버렸다.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채하가 지원에게 입을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지원은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빈궁,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급히 처소를 빠져나가는 채하의 얼굴도 빨개져 있었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채하는 궁인들을 재촉해 차가운 목욕물을 준비하라 일렀다. 어제의 호통을 잊지 않은 궁인들은 어제보다 훨씬 차가운 물을 준비했다.

열이 나는 상태에서 찬물 목욕을 한 채하는 다음 날 아침,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여느 때와 같이 궁 안의 말은 빠르게 퍼져 채하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이 지원과 유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자빈 저하, 세자 저하께 다녀오시지요.”

“내가 왜?”

“이참에 세자 저하와 더 가까워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서 일어나세요.”

유모의 재촉에 싫은 티를 잔뜩 내며 걸음을 옮겼다. 채하의 처소 앞에 도착해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발을 멈추었지만 유모가 지원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빈궁,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저하께서 아프신데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원의 말투는 책을 읽는 것 같았다. 채하는 어색한 말투에 힘없이 웃었다. 지원은 채하의 땀을 닦아 내는 궁인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할 테니 나가 있으라 명했다.

“빈궁께서 이런 것도 해 주고, 가끔 아픈 것도 괜찮은 듯합니다.”

지원이 땀을 닦아 주자 채하가 다시 한번 힘없이 웃었다. 의원이 탕약을 가지고 오자 숟가락을 들고 직접 먹여 주기까지 했다.

“아프지 마십시오. 저하.”

“빈궁도 얼른 처소로 돌아가서 쉬세요. 이러다 빈궁까지 아프면 큰일입니다.”

“저하께서 주무시는 것을 보고 가겠습니다.”

채하가 자는 것을 보고 가겠다는 말과 달리 먼저 잠든 것은 지원이었다. 지원은 젖은 수건을 손에 쥔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채하는 지원의 손에서 수건을 빼냈다.

“빈궁.”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지원을 불렀다.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에 지원이 눈을 뜨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채하가 지원을 조심스럽게 안아 이불 위에 눕혔다.

“빈궁.”

“으음.”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 지원이 깨지 않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원이 깊게 잠든 것을 확신하고 도둑처럼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배에 손을 얹고 아기에게도 잘 자라고 속삭였다.

잠에서 깬 지원의 눈앞에는 곤히 잠든 채하가 있었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지원은 이곳이 채하의 처소임을 깨닫고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하지만 자신의 손목을 잡는 채하 때문에 이불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채하가 자신의 품으로 지원을 끌어당겼다.

“가지 마세요. 빈궁.”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지원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채하는 지원이 다시 잠들 때까지 등을 토닥였다.

그날 이후, 지원은 자연스럽게 채하의 처소에 머물게 되었다. 자신의 처소에 있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항상 제 옆에 붙어 있으려 하는 채하 때문에 답답했다.

“저하, 저는 제 처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진작 그리 말씀해 주시지.”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지원의 생각과 달리 채하는 지원을 막지 않았다. 유모와 함께 처소로 돌아온 지원은 가벼운 침의 차림으로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세자빈 저하, 세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밤늦은 시간, 채하가 왔다는 말에 지원은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채하는 편히 있으라며 지원을 만류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기는요. 잘 시간 아닙니까.”

얇은 침의만 입고 찾아온 채하는 손에 베개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 말에 지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채하가 지원의 베개 옆에 자신의 베개를 내려놓았다.

“빈궁, 어서 누우세요.”

“저하, 저는 혼자 자도 괜찮습니다. 부러 이곳까지 찾아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지원은 네가 있으면 귀찮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저는 혼자 못 잡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채하의 말에 지원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저는 이제 빈궁이 없으면 잠이 안 옵니다. 그러니 제가 한밤중에 무례를 무릅쓰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채하가 지원을 눕히고 목까지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빈궁.”

“예, 저하.”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채하는 대답 대신 이불에 덮여 있는 지원의 손을 잡았다. 채하가 커다란 손으로 지원의 손 곳곳을 어루만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손이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을 만지던 채하가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움찔거리는 것을 알면서도 채하는 멈추지 않았다. 엄지손가락 끝에 채하의 입술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손목에 닿았다.

“이것은….”

“빈궁께 어울릴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원의 손목에 붉은 보석으로 장식된 팔찌가 끼워져 있었다.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붉은 보석에 촛불이 비쳐 반짝였다.

“아름답습니다.”

지원이 팔찌를 마음에 들어 하자 채하가 자신의 옷 소매를 걷어 같은 팔찌를 보여 주었다.

“같은 팔찌입니까?”

“지난 바깥나들이 때 점쟁이가 했던 말 기억납니까? 우리 손목에 인연의 실이 단단하게 묶여 있다는.”

“예. 하오나 그게 무슨 관련이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실 대신 눈에 보이는 징표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준비했습니다.”

지원은 한참 동안 팔찌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는 저를 사랑하십니까?”

“예. 사모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채하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채하는 자신에게도, 아기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뱉는 것 같았다.

“빈궁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지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는 걸 압니다. 다만….”

“안녕히 주무세요. 저하.”

지원은 그의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채하는 잘 자라며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다시 한번 정리해 줄 뿐이었다.

“오늘 점심은 함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후 산책 시간에 맞춰 다시 오겠습니다.”

“예. 저하.”

다음 날 아침, 채하가 돌아가고 혼자 남은 지원이 팔찌를 빼 손에 들고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손목을 감싸는 부분부터 장식된 보석까지 전부 붉은색이었지만 천박함보단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팔찌였다. 구경을 마친 지원은 다시 손목에 팔찌를 채웠다.

“유모, 왜 베개를 두 개나 꺼내 놨어?”

“세자 저하께서 오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두 개를 준비해야지요.”

채하가 지원의 처소에서 잠드는 날이 늘어나자 지원의 침구를 준비하는 유모는 자연스럽게 채하의 침구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채하는 항상 오던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혼자 누운 지원은 잠이 오지 않았다.

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침의 차림으로 마루에 걸터앉아 깜깜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얇은 옷차림 때문에 추위를 느꼈지만 답답함에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빈궁?”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채하가 서 있었다. 피곤한 얼굴의 채하는 지원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저하.”

“날도 추운데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얼른 들어갑시다.”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들어가고 싶습니다.”

답답하다는 지원의 말에 채하가 겉옷을 벗어 지원의 어깨를 감쌌다. 옷깃을 단단하게 여며 주고 그것만으로 부족해 보였는지 옆에 딱 붙어 앉아 지원을 끌어안았다. 지원은 자신과 붙어 있는 채하를 썩 편히 여기지는 않았지만 밀어내지도 않았다.

“저는 어릴 적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별을 보면서 어떤 어른이 될지 상상하고는 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지원은 채하의 말에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빈궁과 우리 아기와 함께 별을 보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지원과 채하는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하늘을 보던 지원이 시선을 돌리자 자신을 응시하는 채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원은 채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채하의 숨결이 느껴지자 눈을 감았다.

“사랑합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채하가 지원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원이 채하의 시선을 피했다.

“괜찮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빈궁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제가 완전히 밉지는 않으니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신 거겠지요. 빈궁도 저와 같은 마음이 되도록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채하가 먼저 입을 맞췄다. 얌전히 입술만 붙였다 떨어졌던 방금과는 전혀 다른 입맞춤이었다. 지원은 자신의 입 안으로 천천히 밀고 들어오는 채하의 혀에 움찔하면서 옷자락만 세게 쥐었다. 지원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채하가 그것을 눈치채고 손아귀에서 옷자락을 살살 빼내 자신의 목을 끌어안게 했다.

지원의 마음이 채하에게 조금씩 열리는 순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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