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3/14)

외전

“채하야, 나 이러다 죽지 않을까?”

누워 있기만 하면 회복이 더디다는 말에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채하는 거의 죽어 가는 내 목소리에도 침대 등받이 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등받이를 직각에 가깝게 세우자 나는 억지로 앉아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지원아, 설우 보러 가야지.”

“후, 그래, 가야지.”

숨을 한 번 고르고 채하의 도움을 받아 침대 바깥에 발을 디뎠다. 채하와 손을 잡고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다. 채하에게 반쯤 안긴 상태로 신생아실 앞에 도착하니 통유리 너머로 잠들어 있는 설우의 얼굴이 보였다.

“설우야.”

곤히 잠든 설우를 응시하며 작게 이름을 불러 보았다. 설우가 태어난 지 이틀이 지났지만 내 아이라는 것이 완전히 와닿지 않았다.

“지원아, 저것 봐 봐. 우리 설우가 아기들 중에 제일 커.”

거의 4kg에 육박하는 몸무게로 태어난 설우는 신생아실 아기들 중 가장 컸다. 설우가 제일 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뿌듯함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한 이유였다.

“내가 저렇게 예쁜 걸 낳았다고? 진짜 거짓말 같아.”

나와 채하가 잠든 아기 얼굴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설우가 방긋하고 웃었다. 배냇짓을 하는 설우를 보고 우리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설우도 나 닮아서 보조개 들어가나 봐.”

채하와 판박이인 설우의 얼굴에서 나와 닮은 곳을 하나 찾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신생아실 앞에 서서 설우를 바라보았다.

퇴원을 하루 앞둔 날, 친구들이 나와 설우를 보러 병원으로 찾아왔다. 친구들의 손에는 아기 선물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가서 손 씻고 와. 조금 있으면 아기 올 거야.”

내 말에 친구들이 선물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을 닦고 나오자 아기 침대에 눕혀진 설우가 병실로 들어왔다.

“와, 대박. 진짜 설채하 아들이네.”

손 소독제로 소독까지 마친 친구들이 설우의 침대 옆에 모여들었다. 아기 얼굴을 본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 친구들도 모두 입을 모아 설우가 채하를 똑 닮았다고 말했다.

“채하 혼자 만들었다고 해도 믿겠다.”

힘들게 설우를 낳은 건 나인데 채하를 닮았다는 소리만 들으니 기분이 좀 그랬다.

“나 닮은 곳도 있거든?”

“어디? 발가락?”

윤호의 농담에 눈을 흘겼다.

“설우도 나처럼 웃을 때 보조개 들어가.”

자주 배냇짓을 하며 웃던 설우는 거짓말처럼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나는 설우가 웃을 때 찍어 둔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여 줬다. 하지만 설우의 귀여움을 완벽하게 담아낸 사진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우리 설우 예쁘지?”

친구들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채하의 모습은 ‘너희 집엔 이런 거 없지?’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귀엽긴 한데 작은 설채하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이상해.”

나도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설우를 안고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설우를 안은 것인지 채하를 안은 것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었다. 짧은 면회 시간이 끝나고 설우가 다시 신생아실로 돌아갔다.

“야, 근데 아기 낳을 때 진짜 아파?”

설우가 돌아가고 윤호가 나에게 물었다.

“마취하고 수술하니까 낳을 땐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수술 끝나면 진짜 아파.”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하고 덧붙이자 직접 아기를 낳을 일이 없는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오메가인 희주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덩달아 채하도 죄인이 된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일주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우리 세 가족은 산후조리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도 설우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 나갔다.

“우리 설우, 맘마 먹자.”

능숙한 자세로 설우를 안은 채하가 아기 입에 젖병을 물렸다. 채하는 혹시라도 내 몸에 무리가 갈까 설우조차 오래 안고 있지 못하게 했다. 나는 쪽쪽 소리를 내며 젖병을 빠는 설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 설우, 너무 잘 먹네.”

나와 채하는 설우를 부를 때 항상 ‘우리’라는 말을 붙였다. 어느새 젖병이 텅 비자 채하가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켰다. 몇 번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설우의 입에서 작은 트림 소리가 나왔다.

“우리 지원이도 맘마 먹자.”

설우의 맘마 시간이 끝나자 우리의 식사 차례가 돌아왔다.

“뭘 먹어?”

“맘마.”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어휘 수준은 설우가 태어난 이후로 점점 퇴화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으응, 맘마….” 하고 중얼거렸다.

“채하야, 나 미역국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어.”

“다른 거? 어떤 거?”

“매운 거 먹고 싶어.”

이 주가 넘도록 미역국만 먹으니 미역만 봐도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덩달아미역국을 먹던 채하도 같은 마음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배달 앱을 켜 근처 중국집의 리뷰를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중국집?”

“응, 우리 오늘 점심은 짬뽕 먹자.”

채하는 짐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손목 보호대를 꺼내 와 핸드폰을 든 내 손목에 감았다. 무리가 간다며 설우도 오래 못 안고 있게 하는 채하다운 행동이었다.

“채하, 너도 짬뽕 먹을 거지?”

내 물음에 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짬뽕 두 그릇과 탕수육 하나를 주문했다. 결제를 마치자 배달까지 30분이 넘게 걸린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올 때까지 30분 넘게 걸린대.”

핸드폰을 내려놓고 채하의 옆에 누웠다. 채하는 팔을 괴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채하야.”

“응?”

“설우 아버님.”

“왜요? 설우 아빠.”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었다. 나와 채하는 서로 설우 아버님, 설우 아빠, 하고 부르며 조금씩 새로운 이름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조리원에서 빠르게 유명해졌다. 조리원 아기들 중 가장 크고, 가장 잘 먹는 설우와 수유와 캥거루 케어 등의 모든 일에 제일 열심히 참여하는 채하.

“설우야, 유설우.”

상의를 벗은 채하가 가슴 위에 설우를 올려놓고 있었다. 아기 등을 토닥이는 채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남겼다. 사진 속에는 큰 채하와 작은 채하가 있었다.

“설우 아버님.”

“네.”

“캥거루 케어 하니까 좋아?”

“응. 좋아. 우리 설우, 따뜻하고 말랑말랑해서 안고 있으면 너무 좋아.”

설우를 안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이제 내가 할래.”

채하의 심장 소리를 듣던 설우는 깊게 잠들었는지 내 품에 안겨서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설우의 등을 쓸어내리며 아기 냄새를 폐 깊숙이 담았다.

“설우야, 너 왜 이렇게 귀여워.”

채하보다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설우가 처음이었다. 채하를 닮아 귀여운데 내가 낳아서 더 귀여운 것 같았다. 나와 채하는 팔불출 부모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잘 다녀와.”

“응. 다녀올게.”

설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채하는 아기를 맞을 준비를 위해 대청소를 하러 집으로 갔다. 나는 채하의 만류에도 조리원 입구까지 따라 나가 채하를 배웅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무언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설우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었다.

채하가 없어도 조리원의 시계는 움직였다. 침대에 누워 혼자 있는 시간을 만끽하다 보니 어느새 설우의 맘마 시간이었다. 평소엔 채하와 함께 방에서 먹였지만 이번엔 내가 수유실로 갔다.

“설우 아버님 오셨어요?”

“네. 설우, 우유 먹이러 왔어요.”

조리원의 간호사가 내 품에 설우를 안겨 주고 젖병을 건넸다. 설우가 태어난 지 3주가 다 되어 가지만 혼자 젖병을 물려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우리 설우, 맘마 먹자.”

채하가 설우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젖병을 들자 자동적으로 나오는 맘마 소리에 나 자신이 놀라웠다. 어설픈 자세로 아기 입에 젖꼭지를 밀어 넣자 곧바로 젖병을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우야, 배고팠어?”

이제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젖병이 비고 또다시 어설픈 자세로 설우의 등을 살살 토닥였다.

“아버님, 조금 더 세게 때리세요.”

“더 세게요? 아프지 않을까요?”

아무리 두드려도 트림이 나올 기미가 없자 지켜보던 간호사가 조금 더 세게 두드리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나는 혹시라도 아기가 아플까 봐 힘을 더 싣지 못했다. 보다 못한 간호사가 설우를 안고 등을 두드렸다. 퍽퍽 소리에 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설우는 시원하게 트림을 했다.

“이것 보세요. 안 울죠?”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젖병을 다 비운 설우는 금세 다시 눈을 감았다. 잠든 설우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이따가 보자는 인사를 하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늘 채하와 함께 먹었기에 처음으로 혼자 먹는 점심 식사였다.

“안녕하세요.”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앞에 와서 앉았다.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오며 가며 인사를 주고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나보다 네다섯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 오메가였다.

“안녕하세요.”

붙임성이 좋은 편인지 내가 인사를 하니 곧바로 말을 붙여 왔다.

“남편은 어디 갔어요? 맨날 둘이 붙어 있더니.”

“남편은 일이 있어서 나갔어요.”

채하에게 남편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에 함께 차를 마시자는 제안을 받아 고개를 끄덕였다. 붙임성이 좋아 보인다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단둘이 앉아 있던 티 테이블에 합석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내일 퇴소에요? 항상 남편이랑 있어서 말도 못 해 봤는데. 아쉽네.”

함께 차를 마시던 사람들은 서로 안면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내가 화제로 떠올랐다.

“둘이 손 붙잡고 다니는 거 보면 연애하는 줄 알겠어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래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차를 마셨다. 아직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는 말에 다들 신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어느새 결혼 전 연애 이야기로 흘러갔다.

“지원 씨는 얼마나 연애하고 결혼했어요?”

조용히 앉아 이야기만 듣고 있던 나는 연애 기간이 얼마나 되냐는 질문에 당황했다. 연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억 상실증까지 걸려 버렸었다. 어디까지를 연애 기간으로 봐야 할지 굉장히 모호했다.

“저희는 연애 기간이 좀 짧았어요. 세 달 정도.”

세 달이라는 말에 다들 놀라는 얼굴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나와 채하의 연애 기간이 제일 짧았다. 뭐가 그렇게 급했냐는 농담에 다시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수유 시간이 되어서야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보세요?”

- 지원아, 점심 먹었어?

설우에게 우유를 먹이고 다시 눕혔을 때 채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응, 먹고 설우도 지금 우유 먹었어. 채하 너는?”

- 나도 먹었지. 아무래도 아기 침대는 우리 방으로 옮겨야겠지?

“응, 침대 옆에 붙여 놔.”

- 알겠어. 나 저녁 먹기 전에 갈 것 같아.

채하와 짧은 전화 통화를 마치니 내일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것도 설우와 함께. 이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채하와 단둘이서 설우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몰려왔다. 지금까지 나 자신의 능력을 의심해 본 적이 손에 꼽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내가 걱정에 빠져 있을 때 또다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엄마였다.

“여보세요?”

- 어, 아들. 엄마.

“알아.”

엄마는 핸드폰 화면에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이 뜨는 걸 알면서도 항상 누구인지부터 말했다. 정체를 밝힌 엄마가 바로 목적을 말했다.

- 우리 아가 사진 좀 보내 봐.

“어제 보내 줬잖아.”

- 어제랑 같아? 그때는 하루가 다르게 크는데.

“알았어. 이따가 새로 찍어서 보내 줄게.”

- 조리원에는 언제까지 있어?

“내일 집에 가.”

내 목소리에는 한숨이 가득 섞여 있었다.

- 큰일 났네. 이제.

“왜? 겁주지 마.”

- 백날 말해 봤자 뭐 해. 겪어 봐야 알지. 이제 죽었다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잠이나 푹 자.

육아 경험자의 말을 듣자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전화를 끊고 엄마의 말대로 억지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을 때 또다시 설우의 수유 시간이 되었다. 손에 들고 있는 젖병이 비면 설우의 등을 두드려야 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손에 힘을 실었다. 아기 입에서 트림이 나오자 그제야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 설우, 여기 보자.”

핸드폰을 들고 설우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하품을 하는 모습이 찍혔다. 사진을 확인하고 다시 카메라를 켰다.

“설우야, 웃어 봐. 할머니가 설우 보고 싶대.”

신생아가 자기 의지대로 웃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만 설우가 예쁘게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웃는 얼굴을 찍고 싶다는 마음과는 다르게 눈을 감은 설우의 사진만 잔뜩 찍고 돌아와야 했다.

“지원아, 자기야.”

“어, 채하야.”

조리원으로 돌아온 채하가 나를 깨웠다. 어느새 창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잘 잤어?”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벌리자 나를 안는 채하의 옷깃에는 차가운 바깥바람이 가득 묻어 있었다.

“밖에 많이 춥지?”

“응, 그래서 집 청소하고 보일러도 켜 놓고 왔어.”

“잘했어.”

“그리고 이것도 사 왔어. 저녁 먹고 먹어.”

채하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살살 흔들어 보였다. 상자에는 유명한 디저트 카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식당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채하는 마주치는 알파 전부와 인사를 나눴다.

“다 아는 사람이야?”

“응. 오며 가며 얼굴 보고 인사도 하고, 가끔 이야기도 하고 그래.”

“그래? 몰랐네.”

계속 방 안에만 있던 나와 달리 채하는 조리원 보호자들과 친해진 모양이었다. 식당에는 저녁 식사가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었다.

“지원아, 그릇 들 수 있겠어?”

“그런 말 좀 크게 하지 마. 사람들이 날 뭘로 보겠어.”

약간 묵직한 사기 접시였지만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설우보다 훨씬 가벼운 그릇 하나로 호들갑을 떠는 채하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크게 말하지 말라는 타박에 채하는 이제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갖다줄게. 가서 앉아 있어.” 하고.

말리지 않으면 채하는 숟가락질까지 대신해 줄 것 같았다. 물론 먹여 달라고 하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은 알았다. 나는 직접 접시를 들고 먹고 싶은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았다.

“맛있게 먹어. 자기야.”

채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한 숟가락 떠먹는 것을 본 후에야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자 그가 내 앞에 디저트 상자를 내려놓았다.

“뭐 사 왔어?”

“케이크.”

채하는 상자를 열기 전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주민 등록 등본?”

“응. 우리 설우, 출생 신고 하고 왔어.”

채하가 건네준 주민 등록 등본에는 나와 채하, 그리고 설우의 이름이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겨우 종이 한 장에 코끝이 찡해졌다. 등본을 들고 복잡 미묘한 감정에 빠져 있는데 채하가 케이크를 꺼내 초를 꽂았다.

“그냥 먹으면 되지 초는 왜 꽂아?”

“그냥.”

초에 불을 붙이고 케이크를 내 앞에 내밀었다.

“같이 꺼.”

우리는 함께 촛불을 불었다. 채하는 불 꺼진 초를 치우고 내 손에 포크를 들려 주었다. 포크로 생크림 부분을 살짝 긁어 입에 넣자 입 안 가득 달콤한 맛이 퍼졌다.

“아까 엄마한테 전화 왔는데 내일 집에 간다고 하니까 잠이나 푹 자 두래.”

“밤에는 내가 설우 볼게. 걱정하지 마.”

채하는 내 목소리에 어린 걱정을 눈치채고 나를 달랬다. 나는 케이크를 먹으며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시계는 열심히 움직였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게 최후의 만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예쁘게 키우세요.”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조리원 문을 나서는 내 손에는 설우가, 채하의 손에는 짐 가방이 들려 있었다. 혹시라도 감기에 걸릴까 겨울의 찬 바람이 한 자락도 묻지 않도록 아기를 꽁꽁 싸맸다. 우리는 잠들어 있는 설우를 카 시트에 태우고 조심히 차 문을 닫았다.

“나도 운전 연습할까?”

“갑자기?”

“응. 차 있으면 설우 데리고 다니기 편할 것 같아서.”

내 말에 채하는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수능이 끝나고 함께 운전면허를 땄지만 나는 엄마 차의 사이드 미러를 완전히 박살 낸 이후로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연습시켜 줄게.”

“됐어. 그러다 싸우면 어떡해.”

“그럼 날씨 따뜻해지면 면허 학원에서 연수받을래?”

싸우면 어쩌냐는 말에 그는 곧바로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몇 달 전의 가출 소동 이후로 나와 싸울 일을 원천 차단하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설우는 집 앞에 도착하자 눈을 떴다.

“아이고, 우리 설우. 집에 온 거 알고 일어났어?”

눈을 뜬 설우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채하야, 어떡해?”

“일단 집에 가자.”

고개를 끄덕이고 설우를 품에 안았다. 그러곤 거의 뛰듯이 걸었다. 급한 마음과는 달리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에 서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설우야. 뚝, 뚝 그치자.”

아무리 애원해도 아기가 눈물을 멈추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채하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설우는 집에 도착해 꽁꽁 싸맨 이불을 풀자 울음을 그쳤다.

“답답해서 그랬나 봐. 미안해. 설우야.”

아기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등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린 것을 알아챘다. 설우가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토닥이다가 완전히 잠이 들자 천천히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우리는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아, 너무 힘들다.”

조리원을 나온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드는 생각에 당장 오늘 밤이 두려워졌다. 나는 조심스레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설우가 누운 아기 침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지원아, 점심 차릴 때까지 쉬고 있어.”

채하가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고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설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처음인 듯했다. 곤히 잠든 설우의 얼굴은 천사 같았다. 핸드폰 카메라 셔터음이 나지 않도록 스피커를 손가락으로 꽉 막고 설우의 사진을 찍었다.

내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방금 찍은 설우의 사진으로 바꿨다. 이제 왜 사람들이 프로필 사진을 자기 자식 사진으로 설정해 놓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설우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알게 하고 싶었다.

“지원아, 밥 먹자.”

문을 열고 들어온 채하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팔로 침대를 짚고 일어나려 하자 채하는 나를 말렸다.

“그러다가 나중에 손목 아플 수도 있대.”

채하가 나를 안아 일으켰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함께 설우의 분유를 탔다. 분유 타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우리끼리 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설우, 맘마 먹을 시간이야.”

잠들어 있는 설우를 안아 품에 안았다. 이름을 부르자 아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설우야, 맛있어?”

트름을 시킨 다음에는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작은 목소리로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채하를 불렀다. 내 부름에 그는 손의 물기를 닦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채하야, 설우 기저귀 갈아야 돼.”

채하가 기저귀를 꺼내는 동안 설우의 속싸개를 풀었다. 우리는 힘을 합쳐 겨우겨우 기저귀를 갈고 다시 속싸개를 펼쳤다.

“이러다 아기 터지진 않을까.”

조리원에서 배운 대로 속싸개로 설우를 싸고 있는 채하를 보자 아기가 터지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설우는 신생아답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 주자 금세 잠이 들었다.

“우리 설우, 잘 먹고 잘 자네. 예뻐.”

설우가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

“지원아, 오늘 무슨 날인 줄 알아?”

거실에 누워 분유를 먹고 잠든 설우의 가슴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채하는 그런 나에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핸드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4월 1일, 만우절이네. 왜? 거짓말하려고?”

“오늘 무슨 날인지 진짜 몰라?”

채하가 계속 무슨 날인지 모르냐고 물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만우절이라는 것 외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작년 4월 1일.”

“작년?”

“응. 우리 설우 만든 날이잖아.”

그제야 작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곧 백일을 맞는 설우를 보자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벌써 1년이나 됐네.”

“내가 그때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그 말에 첫 히트 사이클을 겪던 내가 채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하나하나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부끄러움에 오히려 더 큰소리를 쳤다.

“야, 시작은 내가 먼저 했어도 너도 좋았잖아.”

“내 말이 틀려?” 하고 묻자 채하는 고개를 저으며 나를 안았다. 채하의 손은 슬금슬금 내 옷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으응, 안 돼. 설우 깨면 어떡해.”

“아니야, 방금 자서 한두 시간은 안 깨.”

채하의 설득에 넘어가 버린 나는 그에게 안겨 침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숨이 가빠 올 때까지 입을 맞췄다. 평소 뽀뽀는 자주 했지만 키스는 오랜만이었다. 채하가 내 옷을 하나씩 벗겼다. 몸을 가리고 있던 옷이 사라지자 가슴부터 천천히 핥기 시작했다.

“하읏, 읏, 흐응.”

“젖이 안 나와서 너무 아쉬워.”

설우가 젖병을 빨 때와 똑같은 소리를 내며 내 가슴을 빠는 채하는 한껏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으, 네가 왜 아쉬운데.”

“아니다. 나 설우가 젖 먹는 거 보고 질투했을지도 몰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하는 것은 채하인데 오히려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콕콕 찔러 댈 때마다 얼굴을 가린 채로 움찔거렸다. 채하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내 아랫배에 닿았다.

“여기 볼 때마다 속상해.”

그는 손끝으로 아랫배에 일자로 남은 흉터를 어루만지다가 꼼꼼하게 입술로 훑었다. 예민한 곳에 숨결이 닿을 때마다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흐읏, 채하야, 으읏, 아!”

더 밑으로 내려간 채하의 혀가 내 성기를 훑었다. 따뜻하고 말캉한 혀의 느낌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지원아, 큰 소리 내면 설우 깰 수도 있어.”

채하의 말에 곧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기를 낳은 이후 처음 하는 섹스였다. 오늘만큼은 설우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신음을 삼키며 그의 혀가 움직이는 대로 허리를 비틀었다.

“후으, 으응, 그, 그만. 으읏…!”

채하는 내 성기를 한입에 삼키고 머리를 움직였다. 빨라지는 움직임에 점점 사정감을 느꼈다. 입 안에 사정하고 싶지 않아 얼굴을 밀어냈지만 채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돼…! 으응.”

나는 결국 그의 입 안에 사정해 버렸다. 채하가 하얗게 정액이 묻은 혀를 내어 보였다. 그리고 만류에도 불구하고 꿀꺽하는 소리와 함께 내 정액을 삼켜 버렸다. 채하의 손은 내 뒤로 움직였다. 축축하게 젖어 버린 것이 느껴지는 곳으로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다.

“읏, 흐으.”

오랫동안 닫혀 있던 곳은 겨우 손가락 하나가 들어가기에도 버거웠다. 채하도 그걸 느꼈는지 천천히 손가락을 빼내고 내 다리를 활짝 벌렸다. 나는 그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채하를 바라보았다.

“히익…!”

방금까지 손가락이 드나들었던 곳에 닿는 말캉한 혀의 느낌에 다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단단하게 허벅지를 잡은 손에 더는 반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아래를 내줘야 했다.

“흐읏, 거, 거기 하지 마아. 흐으, 응.”

채하는 내 애원에도 멈추지 않았다. 구멍 주위를 넓게 핥아 대는 채하 때문에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을 얼마나 바싹 붙이고 있는지 회음부를 짓누르는 콧대가 느껴져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하으, 흐, 응, 으읏…!”

혀에 힘을 줘 주름 하나하나를 훑는 느낌에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채하도 그걸 느꼈는지 내 다리를 잡은 손의 힘이 더 강해졌다. 충분히 구멍을 적신 채하는 뾰족하게 세운 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따뜻하고 미끈거리는 것이 안으로 들어오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찔함이 느껴졌다.

“으응, 제바알, 하지 마. 흐읏, 으흣.”

구멍 안쪽까지 확실하게 적신 채하가 입을 떼고 콘돔을 꺼냈다. 나는 그의 손에서 콘돔을 빼내 포장을 뜯고 직접 채하의 성기에 씌웠다. 얇은 고무 막이 성기 끝까지 내려가자 그는 나를 다시 천천히 눕혔다.

“채하야, 키스해 줘.”

입을 맞추며 성기 끝을 내 구멍 주위에 비비기 시작했다. 나는 채하의 목에 팔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멍을 움찔거렸다. 움찔거리는 구멍이 느껴질 텐데도 그는 삽입을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안달 나게 하려는 듯 더 느린 속도로 구멍 주위만 맴돌았다.

“하아, 아, 빨리이.”

재촉에도 움직임은 그대로였다. 심술이 난 나는 채하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왜 깨물어.”

“몰라서, 흐읏, 물어?”

채하가 여전히 모르겠다고 발뺌하더니 강하게 페로몬을 내뿜으며 내 목을 애무했다. 짙은 농도의 알파 페로몬에 이제 애액이 내 뒤를 축축하게 적시다 못해 흐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 하아, 아! 흐읏.”

천천히 내벽을 가르고 들어오는 부피감에 설우가 깰 수도 있다는 것마저 잊어버린 채 큰 소리를 내었다.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다행히 설우는 깊게 잠들었는지 거실은 조용했다. 긴장한 듯 굳었던 채하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자 긴장을 풀었다.

“후우, 지원아.”

“으응, 채하야. 흐읏… 으응…!”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채하가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더 강하게 매달렸다.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는 나와 채하의 신음 소리와 살이 부딪히는 소리만 가득했다.

“으읏… 후, 하으, 으.”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내벽이 쓸리는 느낌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쉬지 않고 밀어붙이는 채하 때문에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두 번째 사정을 하자 동시에 채하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사정했다. 그는 사정 후 곧바로 내 안에서 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안고 있었다. 한참을 나를 안고 있던 채하가 아쉬움이 잔뜩 남은 얼굴로 몸을 뒤로 물렸다.

“씻을 수 있겠어? 씻겨 줄까?”

콘돔을 빼고 터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면서 물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채하가 방을 나간 다음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방으로 돌아온 채하는 내가 잠든 줄 아는지 조심히 나를 욕실로 데려갔다.

“너무 뜨겁지는 않아?”

“괜찮아.”

함께 욕조에 들어온 채하가 내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거기, 조금만 더 세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채하에게 몸을 맡기자 온몸이 녹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낮잠을 자던 설우가 깼는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설우 달래고 올게.”

그는 물기를 대충 닦고 하반신에 수건을 두른 채 밖으로 나갔다. 설우를 달래는 채하의 목소리와 욕실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함께 들렸다.

“우리 설우, 아빠 여기 있네.”

욕실로 들어온 채하가 내 얼굴이 잘 보이도록 설우를 안았다.

“설우야, 잘 잤어?”

설우는 나를 보자 빵긋 웃었다. 웃을 때마다 쏙 들어가는 설우의 보조개를 보면 한 번씩 손가락으로 찔러 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우리 설우도 수영할까?”

“그럴까? 설우 옷 벗겨 올게.”

처음 들어올 때보다 욕조 안의 물 온도가 내려간 것 같아 뜨거운 물을 조금 채워 넣었다. 적당히 온도가 올라간 뒤 수도꼭지를 잠그고 손으로 휘휘 저었다. 설우가 놀기에 적당한 수온이 되었을 때 채하가 아기를 안고 욕실로 돌아왔다.

“설우, 물놀이하자.”

목에 튜브를 낀 설우를 조심스럽게 욕조 안으로 집어넣었다. 목을 가누기 시작할 즈음부터 물놀이를 했던 설우는 신이 난 것 같았다.

“채하야, 설우도 기분 좋은가 봐.”

설우는 열심히 팔다리를 움직이며 물 위를 떠다녔다. 나는 아기에게 살짝 물을 튀기며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채하는 욕조에 걸터앉아 열심히 놀고 있는 설우와 아기의 관심을 받으려 애쓰는 내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설우의 백일이 되었다. 우리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로 백일잔치를 대신했다.

“우리 아가, 할아버지가 한번 안아 보자.”

낯가림이 없는 설우는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서도 방긋방긋 웃었다.

“아빠, 그렇게 예뻐?”

“응. 지원이 너 아기 때 다음으로 예뻐.”

설우를 안은 아빠는 아기를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도 한번 안아 보자는 엄마의 말에도 아빠는 설우를 꼭 끌어안고 내주지 않았다. 채민 형의 가족들까지 도착한 후에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설우야, 누나랑 형아 왔네.”

설우의 손을 잡아 아이들에게 흔들었다. 서현이는 아기가 신기한지 그 손을 꼭 잡았다.

“서현아, 아기 좋아?”

“웅, 좋아.”

밥을 먹는 동안 설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서현이에게 주헌 형이 물었다. 서현이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좋다고 대답했다.

“그럼 아빠가 서현이도 동생 만들어 줄까?”

그 말에 서현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채민 형은 정색을 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형이 낳아? 절대 안 돼.”

“아빠, 서현이도 동생.”

“안 돼.”

단호한 형의 말에 서현이가 “아빠, 미어.” 하고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주헌 형이 서현이의 귀에 뭐라 속삭이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환하게 웃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우리 설우도 맘마 먹자.”

채하가 짐 가방에서 분유와 젖병, 보온병을 꺼내 능숙한 솜씨로 분유를 탔다. 설우에게 먹이기 전 손등에 몇 방울 떨어트려 온도를 확인하니 아빠가 채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먹일게. 채하 너도 얼른 밥 먹어.”

채하는 아빠의 손을 보고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아빠, 분유 먹일 줄 알아?”

“그럼, 당연하지. 지원이 너도 아빠가 분유 먹이고 그랬어.”

완전히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옆에 엄마가 있어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아빠 품에 설우를 안겨 주었다. 채하가 들고 있던 젖병을 아빠에게 넘겼다.

“우리 아가, 할아버지랑 우유 먹자.”

설우는 먹성은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서도 죽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며 젖병을 빨 때마다 부모님들은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나와 채하는 아빠가 설우에게 우유를 먹이는 사이 빠르게 식사를 했다.

“아이구, 잘 먹네.”

“잘 먹으니까 예쁘네.”

빈 젖병을 빼내자 설우는 아쉬운지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 트림.”

“알아, 알아.”

말해 주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설우의 등을 토닥였다. 그날 설우는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 할머니, 할아버지의 품에 번갈아 가며 안겨 있었다.

***

“채하야, 나 다녀올게.”

이제 혼자서도 잘 앉는 설우는 현관 앞에 선 내 다리를 잡고 있었다.

“설우, 아빠 다녀올게. 아빠 없어도 잘 놀고 있어. 알겠지?”

설우를 안아 올려 채하의 품에 안겨 주었다. 뺨에 입을 맞추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자 채하가 아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원아, 나는?”

삐쭉 내밀고 있는 채하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설우의 손을 잡고 흔들며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했다. 집 밖으로 나오자 머리 위로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쬈다. 설우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혼자 하는 외출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내 외출의 목적은 운전 연수였다. 운전 강사와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탄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안전벨트를 맸다.

“시동 걸기 전에 룸미러 조정하세요.”

나는 강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키를 돌려 시동을 걸자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기…. 강사님.”

“네. 말씀하세요.”

“브레이크가 왼쪽 맞죠? 아닌가, 오른쪽인가.”

“왼쪽 맞습니다. 그 옆은 액셀이구요. 기어 바꿀 때 브레이크 밟아야 하는 건 아시죠?”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내가 처음이 아니었는지 강사님은 당황하지 않고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기어 변속을 하고 천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차가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일단 여기 한번 돌아보고 도로로 나갈게요.”

나는 강사님이 시키는 대로 학원에 마련된 코스를 한 바퀴 돌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도로로 나갈 생각을 하니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축축하게 땀이 찼다. 학원에서 우리 집으로, 다시 집에서 학원으로 가는 길을 한 번 왕복하자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 기분이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오늘 예약한 연수 시간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핸드폰을 확인하니 채하에게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환하게 웃는 설우의 사진이 첨부된 메시지였다. 나는 빨래 더미 위를 뒹굴며 좋아하는 설우의 얼굴을 보다가 내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채하야, 설우야.”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였으면 시끌벅적했을 집 안이 조용했다. 나는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실 소파 위에는 채하와 설우가 잠들어 있었다. 설우를 가슴 위에 올려놓고 잠든 채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녀왔어.”

“잘 다녀왔어?”

채하가 눈을 뜨자 설우도 꼼지락거리더니 눈을 떴다. 잠에서 깬 설우가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설우야, 아빠 왔어.”

눈이 마주친 설우는 기분이 좋은지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설우를 끌어안고 환하게 웃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행복했다.

***

“설우야, 이제 가야지.”

“압빠, 아가.”

“응. 아기가 귀엽네, 그치?”

이제 할 수 있는 말이 꽤 많아진 설우는 아기들을 볼 때마다 좋은지 눈을 떼지 못했다. 방금까지도 놀이터에서 자기보다 어린 아기와 함께 놀던 설우는 가야 한다는 내 말에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집에 아가.”

“우리 집 아가? 우리 집 아기는 설우인데? 빨리 가자.”

“으으으으응, 아니! 우리 집, 아가!”

답답한지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설우를 번쩍 안아 들어 차에 태웠다.

“설우, 아빠랑 놀이터에서 30분만 놀기로 약속했어, 안 했어?”

“해떠.”

“근데 왜 떼를 써.”

설우를 카 시트에 앉히고 벨트를 채웠다. 볼이 빵빵하게 부푼 얼굴을 보고 뒷좌석의 문을 닫았다.

“설우야, 아빠 출발할게.”

“웅.”

삐쳤어도 꼬박꼬박 대답은 잘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설우의 손을 잡은 채 엘리베이터에 탔다. 채하네 회사는 그사이 규모가 커져 인원도 늘어나고 사무실도 더 큰 곳으로 옮긴 상태였다.

“압빠!”

몇 번 와 본 경험이 있는 설우는 채하가 있는 사무실로 달려갔다.

“우리 아들 왔어?”

설우를 번쩍 안아 든 채하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에 쪽쪽 입을 맞췄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설우 아니야?”

윤호는 호들갑을 떨며 채하에게 안겨 있는 설우를 뺏어 안았다. 설우는 윤호의 품이 불편한지 칭얼거렸다.

“으응, 설우, 압빠가 안아.”

윤호에게 안겨 버둥거리던 설우는 다시 채하에게 안기고서야 조용해졌다.

“설우야, 삼촌이 설우 장난감도 많이 사 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줬는데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돼?”

울상을 지은 채로 말하는 윤호 때문에 설우는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한참 고민하던 설우는 선심 쓴다는 듯이 팔을 뻗었다. 다시 설우를 안은 윤호는 그제야 평범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좋으면 너도 하나 낳지?”

“애는 혼자 낳냐? 애인이 있어야 결혼하고 애를 낳지.”

“그럼 너도 빨리 연애하고 결혼해.”

“아니다. 너희 보니까 순서대로 할 필요는 없겠네.”

윤호가 “설우야, 그치?” 하고 묻자 설우는 무슨 말인지 이해도 못 했으면서 “웅!” 하고 대답했다. 그날 설우는 저녁 식사를 하러 가기 전까지 삼촌들에게 돌아가면서 안겨 있어야 했다.

“설우, 숟가락 들었어요?”

“네!”

손에 쥔 아기 숟가락을 들어 보였다. 식당 메뉴판에서 아기용 메뉴를 시켜 설우의 앞에 놔주었다. 밥을 본 설우는 기분이 좋은지 숟가락을 든 손을 마구 흔들어 댔다.

“숟가락 흔들지 말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요.”

“웅!”

설우가 작은 숟가락을 들고 볶음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와, 유지원 말투 봐.”

“왜, 내 말투가 어때서?”

“이거 봐, 이거 봐. 설우한테 말할 때랑 나한테 말할 때랑 완전 딴판이잖아.”

“내 새끼랑 너랑 같냐.”

나는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설우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채하를 닮아서인지 자주 울고 조금 고집이 세긴 했지만 순한 편이었다. 특히 밥투정이나 잠투정이 없어서 여태까지 채하와 나를 크게 힘들게 만든 적이 없었다.

“아빠, 꼬기.”

채하는 설우의 숟가락 위에 작게 자른 삼겹살 조각을 올려 주었다. 친구들도 설우의 먹성에 놀라는 눈치였다. 볶음밥을 다 비운 설우는 양이 부족했는지 숟가락을 빨았다.

“더 줘.”

“설우, 더 먹으면 배 아야 하는데.”

“으으응.”

여전히 숟가락을 쥔 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설우의 얼굴을 본 채하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밥 한 숟가락을 설우의 밥그릇에 올렸다.

“이것만 먹고 그만 먹는 거야. 알겠지?”

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생아 시절부터 남다른 먹성과 덩치를 자랑했던 설우는 지금도 여전히 남달랐다.

“이야, 설채하. 설우 먹여 살리려면 소처럼 일해야겠네.”

“그래도 잘 먹어서 예뻐 죽겠어.”

식사를 마친 설우는 채하의 무릎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설우는 채하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압빠, 저기 아가.”

설우는 저쪽에 부모와 함께 앉아 있는 아기를 보고 또다시 눈을 떼지 못했다. 채하도 저기에 아기가 있다며 맞장구를 쳤지만 설우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표정이 금세 뾰로통해졌다.

“설우, 아기 좋아?”

선준이의 물음에 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우도 동생 있었으면 좋겠어?”

“웅!”

“너희 설우 동생 만들어 줘야겠다.”

친구들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와 채하는 웃지 못했다. 잠든 설우를 데리고 집으로 가다가 오늘 놀이터에서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아까 오기 전에 설우랑 놀이터에서 노는데 아기들한테서 눈을 못 떼더라.”

“설우도 나 닮아서 아기들 좋아하나 봐.”

“우리 설우, 동생 있으면 잘해 주겠지?”

“음, 글쎄. 잘 모르겠네.”

의도적으로 둘째 이야기를 피하는 것 같았다. 채하가 잠든 설우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하지만 설우의 눈꺼풀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진갈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우리 아가, 깼어?”

설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에서 깬 설우는 채하의 목을 끌어안았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채하가 설우의 등을 토닥였다.

“설우, 치카치카 하고 목욕하자.”

설우의 옷을 벗기는 사이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욕조에 물이 반쯤 찼을 때 옷을 벗은 채하와 설우가 함께 욕실로 들어왔다.

“아빠랑 깨끗하게 씻고 나와. 알겠지?”

“응!”

큰 소리로 대답했지만 유독 양치질을 싫어하는 설우가 채하와 얼마나 씨름을 해 댈지 눈에 훤했다. 나는 까르르 웃는 설우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침실에 딸린 작은 욕실로 들어갔다.

“압빠!”

“우리 설우, 아빠랑 목욕 잘했어?”

“응, 해떠.”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옷 대신 수건을 돌돌 말고 있는 설우가 달려와 내 다리를 안았다. 옷을 들고 설우를 쫓아다니는 채하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설우, 아빠랑 로션 바르자.”

설우를 침대에 앉히고 몸을 가린 수건을 풀었다. 저녁 식사를 많이 해서 그런지 아기의 배는 평소보다 더 빵빵하게 나와 있었다.

“우리 설우, 배 봐.”

손가락으로 볼록하게 나온 설우의 배를 찔렀다. 설우는 내가 찌를 때마다 간지러운지 몸을 비틀며 크게 웃었다. 한참을 설우와 놀다가 몸에 로션을 발라 주고 잠옷을 입혔다.

“자기야, 머리 말리자.”

채하는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설우가 잘 보이는 곳에 의자를 옮겨 놓고 앉았다. 설우는 혼자 넓은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노는 중이었다.

“압빠, 빨리 와.”

“응,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갈게.”

혼자 놀던 설우가 심심한지 우리를 불렀다. 금방 가겠다는 말에도 재촉하는 설우 때문에 결국 드라이기를 끄고 함께 침대에 누웠다.

“채압빠.”

설우는 나를 아빠, 채하를 채아빠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설우의 미숙한 발음 때문에 ‘채하 아빠’가 아니라 ‘채아빠’라는 말처럼 들렸을 뿐이지만, 설우는 그게 더 편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채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설우 토닥토닥해.”

설우는 채하의 가슴으로 기어 올라가 그 위에 엎드렸다. 갓난아기 때부터 채하의 가슴 위에 올려 재우곤 했던 설우는 지금까지도 채하에게 안겨서 자는 걸 좋아했다. 나도 종종 설우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지만 내가 해 주는 것보다 채하가 해 주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채하야, 설우 잔다.”

채하는 잠든 설우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가슴 위에서 내려놓았다. 나는 턱을 괴고 누워 곤히 잠든 설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채하야.”

“응?”

“우리 설우 동생 만들까?”

내 물음에 채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인 채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당연하게도 거절의 말이었다.

“우리 설우만 잘 키우기로 했잖아.”

“그래도. 저번에 아기 생겼을 땐 좋아했잖아.”

설우가 돌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평소와 다른 몸 상태에 병원을 찾았던 나는 임신이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지만 채하를 닮은 아기가 한 명 더 생긴다는 생각에 기뻤다.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채하도 나와 마찬가지로 기뻐했다. 하지만 채하와 함께 간 다음 검진에서 더는 기뻐할 수 없었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말에 우리는 슬픔과 함께 아기를 보내 주어야 했다. 많은 일을 겪고도 설우가 무사히 태어났기 때문에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건….”

채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설우를 낳기 전까지 둘째 생각이 있는 것 같았던 그는 이제 완전히 그 생각을 접은 듯했다. 그에 비해 한 명만 낳아서 잘 키우자는 생각이었던 나는 점점 마음이 바뀌었다. 이제는 한 명 정도 더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빨리 자.”

채하가 설우를 토닥거리던 손으로 나를 토닥였다. 같은 침대에 누운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채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 나는 설우와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설우야.”

“웅.”

설우는 내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나는 설우를 안고 정말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는지 물었다.

“설우는 동생 있었으면 좋겠어?”

“응.”

“동생 생기면 어린이집 다녀야 되는데?”

“갠차나.”

“정말? 그럼 지금처럼 아빠랑 집에서 매일 못 놀아.”

“갠찬다구.”

동생을 갖고 싶다는 설우의 마음은 확인했다. 이제 설우가 혼자 자도록 설득하는 것만 남았다.

“동생 생기려면 설우 혼자 자야 되는데, 설우 혼자 잘 수 있어?”

“혼자? 왜?”

설우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할지 고민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설우는 계속해서 “왜?” 하고 물었다.

“어…. 아기가 부끄러움이 많아서 아무도 없는 밤에만 아빠한테 올 수 있대.”

급하게 생각해 낸 핑계치고는 꽤 괜찮게 들렸다.

“진짜? 채아빠는?”

예상치 못했던 반격이었다. 설우가 점점 나이를 먹어 갈수록 물어보는 질문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 질문에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채아빠는…. 아기가 채아빠는 괜찮대.”

어설픈 변명이었지만 설우는 수긍한 눈치였다. 궁금한 건 많지만 아직 깊은 사고가 불가능한 아이의 단순함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우, 아빠랑 새 침대 사러 갈까?”

“조아!”

설우가 태어났을 때 쓰던 아기 침대는 여전히 집에 있었다. 우리와 같은 침대에서 잠들기 시작한 이후로 설우의 방 한구석으로 옮겨 두었다.

“밥 먹고 씻고 침대 사러 가자.”

침대에 누워 있던 설우가 벌떡 일어났다. 나는 설우를 안고 방 밖으로 나갔다. 토스트기에 빵을 넣고 프라이팬에 계란 세 개를 깨 넣었다.

“설우야, 맘마 먹자.”

밥을 먹자는 말에 설우는 꼼지락거리면서 식탁 의자 위로 올라와 앉았다. 나는 설우의 앞에 놓인 접시에 식빵 한 장과 계란 두 개를 올렸다. 그러곤 아직 도구 사용이 서툰 설우를 대신해 식빵에 사과 잼을 발라 주었다.

“맛있게 먹어요.”

설우가 잼을 바른 식빵을 반으로 접어 손에 쥐었다. 맛있게 먹는 설우의 얼굴을 보다가 내 앞에 놓인 빵에 잼을 발랐다. 잘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 설우를 가졌을 때 엄청나게 늘어났던 내 식욕이 다시 한번 생각났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설우는 텔레비전 속 어린이 만화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냉장고 안을 살펴보며 사야 할 것을 확인했다. 오늘 저녁 메뉴를 고르고 설우를 불렀다.

“설우야, 씻고 옷 갈아입자.”

평소였으면 이리저리 피해 다녔을 설우가 오늘은 순순히 욕실로 따라 들어왔다. 설우의 목에 수건을 두르고 빠르게 양치와 세수를 시켰다.

“아빠 씻을 동안 텔레비전 보고 있어.”

토실토실한 설우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욕실 밖으로 내보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출발!”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자 설우는 신난 목소리로 출발을 외쳤다. 액셀과 브레이크도 헷갈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꽤 능숙하게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설우와 함께 동요를 부르며 20분 정도를 달려 백화점에 도착했다.

“설우야, 가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알겠지?”

“아라떠.”

설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구 매장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매장에는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위한 가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제품이 있으신가요?”

“네. 어린이용 침대요.”

“아, 여기 어린이 손님이 쓰실 건가요?”

직원이 손바닥을 펼쳐 설우를 가리키자 설우가 “네!” 하고 대답했다. 내 새끼지만 설우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귀여워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기 이 침대는 어떠세요? 새로 나온 제품인데 제일 인기 있는 상품이에요. 한번 누워 보시겠어요?”

직원의 말에 설우는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벌러덩 누운 설우가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 댔다.

“설우야, 어때? 마음에 들어?”

“이거 조아.”

“다른 것도 한 번 볼까?”

“시러.”

“다른 침대에도 한번 누워 보자. 설우야.”

“으으으응. 이거 조아!”

지금 누워 있는 침대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완강하게 거부했다.

“알겠어. 이걸로 사 줄게. 일어나서 신발 신어.”

내 말에 활짝 웃으며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하지만 설우의 발에 신겨진 신발은 왼쪽과 오른쪽이 반대였다. 나는 설우의 신발을 바로 신겨 주며 직원에게 이걸로 하겠다고 말했다.

“고객님, 이 침대랑 세트로 나온 책상이 있는데 그것도 같이 보시겠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 설우에게 책상은 과분한 물건이었다. 결제를 하고 직원에게 집 주소를 알려 주었다. 우리는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매장을 나섰다.

“설우야, 침대 샀으니까 이불이랑 잠옷도 새로 살까?”

“조아, 조아.”

매장을 나설 때마다 내 손에 들린 쇼핑백은 하나씩 늘어 갔다. 설우는 원하는 것을 전부 사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잠옷을 입고 방긋방긋 웃는 설우의 모습에 평소보다 과한 지출을 했다. 마지막으로 혼자 자게 될 설우를 위해 인형까지 하나 산 후에야 쇼핑을 마쳤다. 이제 설우의 동생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생각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설우야, 점심 뭐 먹을까?”

“꼬기.”

“설우, 고기 먹고 싶어요?”

“녜!”

고기가 먹고 싶다는 설우의 말에 오늘 점심 메뉴는 소고기가 되었다. 우리는 백화점 근처의 한우집으로 들어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설우야, 여기 봐 봐. 사진 찍자.”

사진 찍는 것에 익숙한 설우가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었다. 예쁘게 웃는 설우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채하에게 보냈다. 채하는 설우의 사진을 확인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지원아, 설우랑 외식해?

“응, 설우가 고기 먹고 싶다고 해서.”

- 설우는 좋겠네.

나는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핸드폰을 설우의 손에 들려 주었다.

“압빠!”

- 우리 설우, 아빠랑 고기 먹으러 갔어요?

“웅, 꼬기.”

- 맛있게 먹고 이따가 봐. 우리 설우.

핸드폰을 다시 넘겨받자 채하는 나에게도 같은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치이익 소리를 내며 익어 가는 동안 공깃밥을 시켜 설우가 먹기 좋을 정도로 식혔다.

앞접시에 적당히 식은 밥과 작게 자른 고기를 올려 주자 설우가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설우야, 맛있어?”

“웅, 마시떠.”

“많이 먹어.”

“마니 머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던 설우가 혼자 앉고, 걷고, 말을 하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점점 할 줄 아는 말이 늘어나는 설우에게서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듣자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우는 피곤했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뻗어 버렸다. 트렁크에 가득 찬 쇼핑백을 든 채 잠든 설우를 데리고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앞이 막막해졌다.

“설우야, 설우야. 아가.”

“으으응.”

완전히 잠에 취한 설우는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잠든 설우만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햇볕이 잘 드는 거실 한쪽에 이불을 깔고 설우를 눕혔다. 외출복을 갈아입히는 동안에도 푹 잠든 설우는 깨지 않았다.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 트렁크에 들어 있던 쇼핑백을 전부 챙겨 왔다. 설우의 옆에 앉아 오늘 산 물건들을 다시 확인했다. 이불 두 세트와 잠옷 세 벌, 그리고 인형 하나. 쭉 늘어놓은 물건들을 보니 과소비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또 한번 들었다. 하지만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설우가 좋아했으니 괜찮다고 나 자신을 세뇌했다.

오늘 산 물건들을 전부 세탁기에 넣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컴퓨터를 켜고 책상에 앉으니 결혼 전 나 혼자 쓰던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나와 채하는 설우가 잠든 사이 저 침대에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섹스를 하고 다시 설우가 있는 침대로 돌아가는 일상을 보냈다.

이제 내일부터는 설우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하지만 둘째 생각이 없는 채하를 어떻게 설득할지가 걱정이었다. 나는 침대 밑에 넣어 둔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콘돔이 잔뜩 들어 있었다.

콘돔 뭉치를 보면서 아예 없애 버릴지, 아니면 구멍을 뚫어 놓을지 고민했다. 억제제 부작용이 심한 편인 채하 때문에 우리는 그 시기를 약으로 견디기보다는 몸으로 때우곤 했다. 곧 돌아오는 나의 히트 사이클과 채하의 러트 사이클에 약간의 수작을 부려 놓는다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 한 번 더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고 콘돔 상자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놓았다.

“압빠.”

다시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 설우가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설우, 잘 잤어?”

“웅.”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설우는 작업실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졸린지 내 얼굴이 잘 보이는 곳에 누운 설우의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설우야, 자면 안 돼. 지금 많이 자면 이따 밤에 못 자.”

“응.”

설우는 대답을 하면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그런 설우의 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덮어 주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기 전 설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원아, 설우야.”

퇴근한 채하가 작은 침대 위에 껴안고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웠다.

“왔어?”

“일하다가 여기서 잔 거야?”

“응, 설우 자는 거 보니까 졸려서 눈만 붙이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잤네.”

채하는 금방 저녁을 차려 줄 테니 기다리라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컴퓨터를 끄고 설우를 안아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설우가 낮잠을 자던 이불이 그대로 있었다. 설우를 이불 위에 올려 두고 주방에 있는 채하에게 갔다.

“잘 다녀왔어?”

“응. 설우랑 오늘 잘 지냈어?”

우리는 입을 맞췄다. 서로의 입 안을 파고드는 진득한 입맞춤은 설우가 잠들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채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압빠, 채압빠!”

방금까지 잠들어 있던 설우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달려오는 설우를 안아 든 채하가 복숭앗빛 뺨에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아빠가 저녁으로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조금만 기다려.”

“마싯는 거!”

“설우야, 우리는 식탁에 앉아서 아빠가 뭐 만드는지 구경하자.”

식탁에 앉은 나는 설우를 무릎에 앉혔다. 품에 안긴 설우는 따뜻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저녁 식사가 완성될 때까지 아이의 손을 조몰락거리며 채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잘 먹는 설우는 이번에도 식판에 놓인 음식을 싹싹 비웠다.

채하와 설우가 목욕을 하는 사이, 세탁을 마치고 건조기에 넣어 뒀던 설우 물건들을 꺼내 왔다. 이불을 먼저 정리하고 잠옷을 하나씩 개고 있을 때 설우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설우야, 좋아?”

“따뜻해.”

설우는 정리해 놓은 이불 위에서 뒹굴었다. 애써 정리해 놓은 이불이 흐트러졌지만 좋아하는 설우의 모습에 나도 함께 웃었다.

“못 보던 거네?”

“응. 오늘 나가서 샀어. 귀엽지?”

“설우는 좋겠네. 새 이불도 있고 새 잠옷도 있어서.”

속옷만 입은 설우에게 노란색 바탕에 곰돌이가 그려져 있는 잠옷을 입혔다. 채하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들어 잠옷을 입고 누워 있는 설우의 사진을 찍었다. 설우가 태어나기 전에는 핸드폰에 서로의 사진이 가득했지만 요즘은 설우의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설우야, 잘 자.”

“아빠도.”

설우가 우리의 뺨에 입을 맞추고 평소처럼 채하의 가슴 위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갔다.

“오늘 설우 침대 사 줬어.”

채하는 침대를 사 줬다는 말에 놀랐는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설우의 재촉에 다시 손을 움직여야 했다.

“침대? 갑자기?”

“응. 이제 설우는 설우 방에서 자기로 했어.”

“우리 설우 아직 아기인데?”

“아기 아냐.”

설우가 채하의 말을 부정했다. 곧 아기 동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기는 아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설우 아기 맞는데. 아빠 아기.”

“으으응. 아니야! 설우 형아야!”

설우는 답답했는지 평소보다 말을 더 길게 했다. 채하는 “설우 형아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와 달리 나는 설우가 남동생이 갖고 싶구나 하고 알아들었다.

“채하야, 설우가 남동생 갖고 싶나 봐.”

설우가 잠들고 나는 다시 둘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우리 설우가 절대 못 갖는 게 갖고 싶어서 어떡한대.”

채하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은근슬쩍 말하면 알아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채하에게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우리 설우 동생 만들어 주자.”

“…나는 지원이 너 아프고 힘든 것도 싫고 지난번 같은 일로 너 마음 아파 하는 것도 싫어.”

“지난번 일은… 임신 초기엔 꽤 흔한 일이라고 했잖아.”

“그래도….”

우리는 결국 의견을 합치지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한 가지였다. 채하의 러트 사이클을 노리는 것. 콘돔을 아예 치워 버릴지, 구멍을 뚫을지는 조금 더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우리의 히트와 러트 예정일 전날, 나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설우는 내일 아침 식사를 하고 채민 형에게 보낼 예정이었다. 콘돔은 이미 채하가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놓았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억제제까지 함께 숨겨 두었다.

설우 때처럼 정신을 놓고 하루 종일 하다 보면 아기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날을 위해 며칠 전부터 밥도 많이 먹고 잠도 많이 자면서 체력을 비축해 놓은 상태였다. 냉장고 가득 채워 놓은 음식들은 최소 일주일은 밖에 나가지 않고 섹스만 해도 될 양이었다.

“지원아, 설우 정말 형한테 맡겨도 괜찮겠어?”

채하는 채민 형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자식 셋을 키우는 채민 형이 우리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채하를 설득했다.

“겨우 하루인데, 괜찮을 거야.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했어.”

“근데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리 주기 제대로 보낸 적 없잖아. 그래서.”

설우가 없을 때 분위기를 잡자는 말에 뭔가 의심쩍다는 표정이었지만 대충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럼 우리 설우 태어나고 처음으로 집에 둘만 있네.”

“맞아. 둘이 자는 것도 설우 태어난 이후로 처음이고.”

혼자 잘 수 있다고 큰소리로 대답하던 설우는 처음으로 혼자 자던 새벽, 울면서 우리 침실로 왔다. 그 이후로 계속 우리 사이에서 자는 중이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침실에 가득 찬 채하의 페로몬과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히트 사이클의 전조가 느껴졌다.

“채하야, 설우야, 밥 먹자.”

러트가 온 채하를 받아 내려면 체력 보충을 위한 식사가 필수였다. 나는 식사 준비를 마치고 채하와 설우를 깨웠다. 설우를 안고 밖으로 나온 채하는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 음식을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이게 다 뭐야? 아침부터 장어?”

“응. 맛있잖아. 우리 설우, 맛있게 먹어.”

“웅. 압빠도!”

설우는 이미 숟가락을 들고 자기 앞에 놓인 장어 덮밥을 먹고 있었다. 채하는 내가 숟가락을 들고 한입 먹자 미심쩍은 표정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채하의 손에는 복분자즙을, 설우의 손에는 요구르트를 들려 주었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마시자 나를 따라 잔을 비웠다.

이미 채하의 정력은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였지만 오늘은 이런 음식의 힘을 빌려서라도 확률을 높이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 채하의 맨 팔뚝을 만져 보았다. 히트사이클의 전조가 느껴지는 나와는 다르게 그의 체온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았다.

“자기야. 나 설우 데려다주고 올게. 설우, 아빠한테 안녕 해.”

“압빠, 안녕.”

설우가 현관에 서 있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설우를 안아 뺨에 입을 맞췄다.

“설우, 큰아빠 말 잘 들어야 돼. 떼쓰면 안 돼. 누나랑 형아랑 재미있게 놀고. 알겠지?”

“아라떠.”

설우와 채하가 집을 나서고 나는 올라간 체온 때문에 몸이 축 늘어져 소파에 누웠다. 저녁쯤이면 히트 사이클이 완전히 시작될 것 같았다.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면 내 페로몬에 반응하는 채하의 러트도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점심 식사까지 내가 정해둔 메뉴대로 차리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누워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자기야, 자기 갑자기 왜 이래?”

“뭐가?”

점심 메뉴는 굴전과 부추전이었다. 채하는 노골적인 메뉴 선택에 내 의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계속 모르쇠로 버티며 부침개를 먹었다.

“채하야, 아 해 봐.”

부침개에 손도 대지 않는 채하를 보고 부추전으로 굴전을 돌돌 싸서 입에 밀어 넣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도 내가 먹여 주는 음식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치자 채하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말을 주고받던 채하가 나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 압빠!

“여보세요.” 하고 말하자 곧바로 설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설우! 맘마 먹었어?”

- 웅. 동까쓰.

“맛있게 먹었어?”

- 응. 마싯게 머거써.

“잘했네. 내일 봐. 우리 설우.”

스피커를 통해 “큰압빠.” 하는 설우의 혀짧은 소리가 들리고 채민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형, 우리 설우 잘 부탁드려요.”

- 잘 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전화 통화를 마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아래에 오랫동안 서 있다가 꼼꼼하게 온몸을 씻었다. 평소보다 긴 샤워 시간에 욕실로 들어가기 전보다 체온은 더 올라가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본격적인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기 전까지 눈을 붙였다. 조금이라도 체력을 더 모아 두려는 생각에서였다.

“으응, 간지러워.”

다시 눈을 떴을 때, 채하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채하는 내가 잠에서 깬 걸 알았지만 그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지원이 향기 너무 좋아.”

침실 안은 채하와 나의 페로몬으로 가득했다. 페로몬 조절에 꽤 능숙해진 나는 일부러 더 강하게 페로몬을 내뿜었다. 아직 이성이 조금 남아 있는 그가 작업실 침대 밑에 둔 콘돔 상자를 가져오려는 것인지 침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채하의 뒷모습을 보며 이불자락으로 입을 가리고 실실 웃었다. 누가 보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것 같은 웃음이었다.

“지원아, 자기야.”

채하가 나를 부르며 침실로 돌아오자 표정 관리를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더 짙은 페로몬을 풍겼다.

“침대 밑에 둔 상자 어디 갔어?”

“상자? 글쎄.”

채하의 목에 팔을 감고 입을 맞췄다. 슬금슬금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채하가 내 손목을 잡았다.

“지원아, 잠깐만.”

“으으응.”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설우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을 때마다 하던 행동이었는데 어느새 나도 채하에게 종종 하곤 했다. 일부러 샤워 가운만 입고 낮잠을 잤던 나는 허리에 묶여 있던 끈을 잡아당겼다. 매듭이 풀리고 가운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채하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내 가운을 여며 주고 매듭까지 단단하게 묶어 주었다.

“일부러 숨겼지?”

허를 찌르는 채하의 말에 나는 흐흐, 하고 웃었다. 히트 사이클로 인해 점점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채하도 나와 별반 다를 건 없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아랫도리는 두둑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채하야아, 아기 만들자.”

맨정신의 나로서는 절대 할 리가 없는 말이었다. 설우와 한 약속을 지키려면 꼭 오늘 설우 동생을 만들어야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채하를 뒤로 밀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된 채하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바지를 끌어 내렸다.

“지원아…. 제발.”

발목으로 떨어진 바지를 보고 속옷마저 내려 버렸다. 검은색 천 조각에 눌려 있던 채하의 성기가 내 턱을 치면서 고개를 들었다. 몇 년을 봐도 적응되지 않는 크기였다. 나는 오늘도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입에 물었다.

“하지 마.”

“우움.”

채하는 내 얼굴을 밀었지만 나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금욕적으로 생긴 채하가 빨개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목구멍 깊숙이 성기를 삼켰다.

“후…. 으.”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채하가 신음 소리를 억지로 참았다. 채하는 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목구멍을 찌르는 감각에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지원아, 윽, 지원아.”

사정하기 직전 채하는 습관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내 입 안에 하얀 정액을 뿜어냈다. 나는 채하의 정액을 꿀꺽 삼키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설우랑 약속했단 말이야. 동생 만들어 주기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채하의 무릎 위에 앉았다. 내 배를 감싸 안은 채하는 한숨만 쉬었다. 그가 움직일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자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채하를 뒤로 밀었다. 완전히 침대 위에 눕게 된 그의 위에 올라타 단단히 묶어 놓은 샤워 가운의 매듭을 풀었다.

“일부러 콘돔도 숨기고 억제제도 숨긴 거지?”

채하의 눈을 피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이미 쿠퍼액으로 앞부분이 끈적하게 젖어 버린 내 속옷을 끌어 내렸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뻣뻣하게 서 있는 채하의 성기를 잡고 내 안으로 넣기 위해 각도를 맞춰 조금씩 움직였다.

“아, 아읏.”

커다란 귀두가 내 몸을 열고 들어오는 느낌은 몇 년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채하가 몸을 일으켜 내 상체를 안았다. 나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허벅지에 힘을 주어 완전히 앉았다.

“하아, 흐으, 흐.”

엉덩이 사이에 까슬한 채하의 음모가 느껴졌다. 아직은 쾌감보다는 뻐근함이 더 강했다. 입을 맞추며 천천히 몸을 들썩이자 채하는 허리를 붙잡아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장어랑 굴 일부러 먹였지? 복분자도.”

“으응. 흐읏.”

“지원이 큰일 났네.”

“뭐가, 하아, 큰일이야.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는데.”

“왜 설우랑 둘이서만 약속했어?”

가슴 전체를 만지다가 손가락으로 바짝 서 버린 유두를 튕기며 물었다.

“으응, 채하 너는 내가 둘째 얘기 꺼내면 피하잖아.”

“둘째 만들고 싶어?”

채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기 만들 거야?” 하고 물었다.

“이렇게 원하는데 만들어야지.”

“정말?”

채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활짝 웃었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으니 짙은 농도의 페로몬이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난 그런 거 안 먹어도 정력 좋은데.”

중얼거리는 채하의 마지막 말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귓불을 살짝 깨문 채하의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이를 세워 페로몬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목덜미를 긁어 대자 나는 한숨 같은 신음을 뱉어 냈다.

“하아, 흐으.”

여린 살에 자국이 남지 않도록 살짝살짝 깨물던 채하는 입술에 힘을 주고 빨아들였다. 빨간 자국을 몇 개 만든 그는 가슴에도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 거울을 보면 목과 가슴에 빨간 얼룩이 가득할 것 같았다.

“보이는 곳은, 으응, 안 돼. 흣.”

예전에는 집에만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 보이는 곳에 흔적을 남겨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점점 궁금한 것이 많아지는 설우 때문에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채하가 계속해서 가슴을 애무하면서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뭘 했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젖었어.”

이미 단단한 채하의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곳 입구에 그의 손끝이 닿았다. 손가락 끝으로 주름을 하나하나 훑는 것이 느껴지니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흑…. 아… 하으. 나, 움직일래.”

채하가 내 허리를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조금씩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벽을 쓸고 나갔던 것이 다시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조금씩 쾌감이 느껴졌다.

“하아, 흐, 하으, 아아…!”

나는 더 속도를 올리지도, 늦추지도 않았다. 허리를 움직이면서 채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쇄골 아래, 옷으로 가려질 것 같은 부분에 나와 같은 자국을 하나둘씩 만들었다.

“아…! 더, 빨리. 하읏, 응.”

내벽 안 깊숙한 곳이 더 강한 쾌감을 원했다. 채하가 내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다리를 더 활짝 벌리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신음했다.

“흐, 윽, 으응…! 아흣!”

활짝 벌린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낀 채하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은 쾌감에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입만 벌리고 몸을 떨었다.

“흐으… 으….”

하얀 정액을 채하의 배 위로 흩뿌린 후에야 나는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내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채하의 성기는 아직 사정까지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벌써 지친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라도 마음을 바꿀까 하는 생각에 다리를 들어 채하의 허리에 감았다. 내 종아리를 감싸 쥔 그가 나를 눕히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원아…. 윽.”

“하읏… 응, 으응. 안에, 안에. 흐.”

채하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사정 직전의 신호였다. 채하의 허리에 올린 다리에 단단하게 힘을 주었다. 나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면서 내 목덜미에 더운 숨이 뿜어졌다.

“으윽! 아, 아파아.”

사정의 여운을 즐기기도 전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노팅이었다. 내가 아파하는 것을 싫어하는 채하는 노팅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몇 번 겪어 본 적 없는 낯선 고통에 채하의 밑에 깔려 아파하는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아, 몸에 힘 빼.”

채하가 눈물이 고인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아무리 달래 주어도 아픈 건 똑같았다.

“벌써부터 울면 어떡해. 설우 만들 때 몇 번 했는지 기억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기억 안 날 만큼 해야 설우랑 약속을 지키지. 그렇지?”

“으응.”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채하는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길게 입을 맞췄다.

빈말이 아니었는 듯 나는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채하의 밑에 깔려 울었다. 이번에는 침대에 엎드린 채 내 허리를 잡은 채하가 박아 대는 대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흐윽, 아, 하아, 흐, 으…!”

체력을 쌓겠다고 식사와 수면을 늘린 것이 그리 헛된 일은 아니었는지 평소였으면 기절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직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뿐이었다. 러트가 온 데다가 아기를 만들겠다는 목표까지 생긴 그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후, 자기야, 힘들어?”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고개만 저었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엎드려 있는 나를 뒤에서 안고 있는 채하가 내 아랫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손을 잡아끌어 내 아랫배를 만지게 했다.

“여기 내 좆 튀어나온 거 느껴져?”

내 귀를 의심했다. 채하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그런 말, 흣, 하지 마.”

“왜, 부끄러워? 지금 이런 짓도 하는데?”

평소의 채하 같지 않은 언행이 낯설게 느껴졌다. 한 손으로는 내 골반을 잡고 남은 손으로 내 성기를 잡고 흔드니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이 참지 못하고 사정을 시작했다. 여러 번 사정한 내 성기는 투명해서 거의 물 같은 정액을 뿜어냈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박고 엉덩이를 쳐든 상태로 기절해 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채하의 품에 안겨 있었다.

“…물.”

채하가 옆에 있던 물컵을 들어 빨대를 내 입에 물려 주었다. 빨대를 문 입술에 힘을 줘 입 안 가득 물을 머금고 삼켰다.

“아, 힘들어.”

“많이 힘들어? 어떡해, 우리 지원이.”

다정한 말투와는 다르게 채하는 끈적끈적한 손길로 내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아랫배에 닿는 그의 성기가 느껴지자 도망쳐야 된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발로 기어 침대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채하에게 발목이 잡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게 왜 복분자까지 먹였어.”

“채, 채하야, 그만.”

“자기야, 노팅 몇 번 했는지 기억나?”

“어, 네… 네 번?”

“아이구, 어떡해. 내가 기억 못 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몇 번 했는지 세는 거 보면 아직 멀었네.” 하고 중얼거리는 채하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아, 그만. 흐으.”

나는 팔다리를 축 늘어트리고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이미 히트 사이클이 끝난 것 같은 나와 달리 채하의 러트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섹스를 시작했을 때는 세 시가 채 되지 않았었는데 벌써 창밖은 어둑어둑해지다 못해 깜깜해져 있었다.

“채, 채하야. 나 화장실… 하으. 그마안.”

배뇨감이 느껴졌지만 계속해서 내 몸을 파고드는 채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랫배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지원아, 지원…. 후우.”

채하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더니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사정했다. 그와 동시에 내 성기에서 투명한 물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액 대신 나오는 투명한 액체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좋았어?”

채하는 눈치도 없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밀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채하의 성기가 느껴졌다. 연속된 노팅은 이제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부끄러워서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채하야, 그동안 행복했어. 우리 설우 잘 키워 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이 나이 먹고…. 진짜 죽고 싶다.”

채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아직 어린 설우 때문에 침대에 방수 시트를 깔아 놨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참을 나를 안고 있던 채하가 노팅이 끝나자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그와 동시에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정액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깝게 흘리면 어떡해.”

정말 아깝다는 어투로 말하며 흘러나온 정액을 다시 내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헛수고였는지 채하의 손가락이 내 안을 드나들 때마다 정액이 더 밀려 나왔다.

“하지 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그와 달리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채하가 목욕물을 받는 동안 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곤 배에 손을 얹고 어떤 아이일지 눈을 감은 채 상상했다.

“압빠!”

설우는 내가 눈을 뜰 때까지 내 볼에 입을 맞췄다. 나는 설우를 품 안에 가두고 똑같이 볼에 입을 맞췄다.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설우가 웃는 모습을 보자 나도 웃음이 나왔다.

“나 빼놓고 둘이 뭐가 그렇게 재밌어.”

침실로 베드 트레이를 들고 들어오던 채하가 우리에게 물었다.

“비밀.”

“삐밀.”

설우가 내 말을 따라 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다시 웃었다. 채하가 침대 위에 트레이를 올려놓고 내 앞에 앉았다. 나는 무릎 위에 설우를 앉히고 식기를 들었다.

“설우, 아.”

작게 자른 소시지를 찍은 포크를 가져가자 설우는 참새처럼 입을 벌렸다. 그 안으로 소시지를 넣어 주자 오물오물하면서 씹기 시작했다.

“우리 설우, 맛있어?”

“웅. 또 줘.”

“설우, 혼자 먹을 수 있지? 자기도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채하가 설우의 손에 포크를 들려 주었다. 나는 설우가 혼자 먹는 것을 보고 식사를 시작했다.

“채하, 너는 안 먹어?”

“응. 난 지원이랑 설우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아직 채하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설우는 “진짜?” 하고 되물었다. 우리는 그런 설우를 보며 함께 웃었다. 설우는 나와 채하가 왜 웃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웃자 함께 웃었다.

***

채하가 내 몸에 새긴 붉은 키스 마크가 노란색으로 변하고 결국 없어질 때쯤 나는 손에 임신 테스트기를 들었다. 이제는 설명서를 읽지 않아도 사용법을 잘 알았다.

“후우.”

테스트기 결과 창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이자 진한 붉은색의 대조선이 보였다. 천천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완전히 떨어지자 흐린 붉은색이 한 줄 더 나타났다. 결과 창에 두 줄이 보이자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아직 좋아하기는 일렀다. 새 테스트기를 뜯어 한 번 더 확인했다. 두 개의 테스트기에 모두 두 줄이 뜨자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채하야, 채하야. 이거 봐!”

아직 잠들어 있는 채하를 흔들어 깨워 테스트기를 보여 주었다. 잠에 취해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하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게 뭔데?”

내가 건네준 것을 받아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멍한 얼굴로 스틱을 쥐고 있던 채하는 두 줄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진짜야? 이거 꿈 아니지?”

그의 볼을 꼬집고 “아프지?”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내 배를 쓰다듬던 채하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 너무 행복해. 지원아.”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을 때 잠에서 깬 설우가 우리 사이에 파고들었다. 나는 설우를 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우리는 병원 대기실에 앉아 진료 순서를 기다렸다. 채하와 함께 대기실에 앉아 있으니 설우를 가지고 처음 병원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나 여기 처음 왔을 때 고개도 못 들고 앉아 있었는데.”

“왜?”

“무서워서. 그땐 발현한 것도 실감 안 났는데 임신 테스트기는 다섯 개나 두 줄 나오고 몸은 이상하고.”

이제는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말을 들은 채하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우리는 손을 잡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는 초음파 검사용 침대에 누워 상의를 걷었다. 절대 임신이 아니기를 바랐던 설우 때와는 정반대의 마음이었다. 검은 화면에 무언가 비치고 의사가 잘 착상되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채하와 나는 기쁜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안정기 접어들 때까지 너무 좋아하지도 말고 주위에 알리지도 말자.”

그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나도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지만 채하가 나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하는 채하를 보자 설우가 배 속에 있을 때가 다시 떠올랐다.

“너무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대.”

“그래도.”

“계속 침대에만 갇혀 있으니까 설우 임신했을 때 생각난다.”

“우리 아가도 설우처럼 아빠한테 딱 붙어 있자.”

채하가 배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너무 좋아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나와 채하 모두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채하는 두 줄이 나온 임신 테스트기를 어디에 보관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버려. 더러울 것 같아.”

“안 더러워.”

“설우 거는 버렸는데 동생 것만 갖고 있으면 설우가 얼마나 서운하겠어. 공평하게 버리자.”

내 말에 채하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버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결국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주위에 비밀로 하자는 우리의 계획은 어그러지는 듯했다. 아기 심장 소리를 들은 두 번째 검진 다음 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처럼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던 중 엄마가 좋은 소식이 없는지 물었다.

“좋은 소식? 아, 설우가 오늘 아침밥 세 그릇 먹었어.”

- 아니, 그런 거 말고.

“이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딨어.”

- 엄마가 어제 꿈을 꿨는데.

엄마의 입에서 곧 나올 소리를 기다리며 나는 긴장했다. 설우를 임신했을 때도 엄마가 태몽을 꿨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 너랑 채하가 바나나 한 송이 꼭 끌어안고 있더라.

“엄마, 바나나 먹고 싶어? 왜 그런 꿈을 꿨대. 설우야, 할머니 전화 왔어. 할머니랑 인사하자.”

내 예상이 맞았다.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설우를 불렀다. 설우에게 핸드폰을 들려 주자 신난 목소리로 “함무니!” 하고 불렀다. 엄마와 설우가 통화를 하는 동안 아직 평평한 배에 손을 얹었다. 엄마와 통화를 마친 설우가 내 허벅지 위에 앉았다.

“압빠.”

“왜, 우리 설우?”

“함무니한테 가자.”

“할머니 보고 싶어?”

“응!”

“할머니 생신날 가자. 알겠지?”

내 말에 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생일이면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낮잠을 자는 설우의 얼굴을 보면서 핸드폰으로 바나나 태몽을 검색했다. 인터넷에서는 아들 태몽이라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 나는 성별 상관없이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바랐다.

“채하야, 엄마랑 통화했는데 엄마가 태몽 꿨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채하에게 태몽 소식을 알렸다.

“진짜? 어머니한테 꿈 사야겠네. 이번엔 무슨 꿈이래?”

“바나나.”

채하가 내 배에 손을 얹고 “바나나야.” 하고 불렀다. 바나나라고 부르는 채하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게 뭐야. 이상해.”

“바나나라고 부르는 건 좀 그런가?”

“태명은 다음 검진 다녀와서 짓자.”

아직 배 속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완전한 사랑을 주기엔 무서웠다.

“좋아?”

8주 차 검진을 함께 다녀온 채하는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빨개진 눈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채하는 설우 때와 마찬가지로 아기 심장 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응. 우리 아기, 너무 귀여워.”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너무 좋아하지 말자는 약속은 잊어버린 지 오래인 듯했다.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듣자 나 또한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채하야, 태명 생각해 놓은 거 있어?”

“나나 어때?”

“나나?”

“바나나라고 부르는 것보단 나나가 더 귀엽잖아.”

“설우는 피치, 얘는 나나. 과일 형제네.”

여전히 유치한 채하의 작명 센스에 한참을 웃었다.

“근데 형제가 아니라 남매일 수도 있잖아.”

“그러네. 설우는 남동생 갖고 싶다고 했는데 여동생이면 어쩌지?”

“나는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지원이 너 닮은 딸.”

남동생이 갖고 싶다는 설우의 말에 막연히 나나가 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나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성별 상관없이 건강하기만을 바랐던 며칠 전을 떠올렸다.

“우욱.”

아기 태명을 정한 다음 날, 나를 깨우는 채하의 몸에서 나는 음식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급하게 화장실로 뛰쳐 들어가 변기를 잡고 구역질을 해 댔지만 나오는 것은 없었다.

“지원아, 괜찮아?”

채하가 화장실로 따라 들어와 내 등을 두드리며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채하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손을 휘젓는 것뿐이었다.

“나… 나가. 우웩. 냄새.”

그가 화장실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속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나는 물로 입을 대충 헹구고 양치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또다시 구역질이 올라와 칫솔질을 멈춰야 했다. 물로만 입을 헹구고 밖으로 나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지원아.”

“채하야, 나 왜 이러지? 속이 너무 울렁거려.”

나는 채하가 옆에 오자 코를 틀어막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소주와 맥주를 5대 5로 섞어 토할 때까지 마시고 토한 후 또 술을 먹은 날의 다음 날 같았다.

“자기, 입덧하는 거 아니야?”

“어? 입덧?”

설우가 배 속에 있을 때 고기 냄새만 맡으면 토하러 달려가던 채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겪어 보는 입덧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빠, 설우 배고파!”

빨리 식사를 하자고 재촉하는 설우 때문에 채하를 밖으로 내보냈다.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입덧은 전혀 없고 뒤돌아서면 배가 고팠던 설우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채하가 오렌지주스를 가득 담은 컵에 빨대를 꽂아 가져왔다.

“이거 마실 수 있겠어?”

주스를 한 모금 머금으니 시큼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오렌지주스 한 컵을 전부 다 마시자 채하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얼굴이었다.

“입덧이 이런 거라고 왜 말 안 해 줬어?”

원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채하에게 물었다. 채하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를 지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당연히 이번에도 내가 할 줄 알았지.”

침실 밖에서 나를 불러 대는 설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하의 만류에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리 설우, 왜 불러?”

“아빠, 과자 사러 가자.”

“과자? 집에 있는데. 그거 먹자.”

음식 냄새 때문에 입으로만 숨을 쉬고 있었다.

“으으응! 그거 말고!”

“유설우.”

채하가 성까지 붙여 설우를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에 놀란 눈으로 채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떼쓰면 돼, 안 돼?”

“…….”

설우는 입을 앙다문 채로 대답이 없었다.

“돼, 안 돼?”

“안 대.”

다시 한번 묻자 설우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안 그럴…. 으으, 흐어엉.”

처음 겪어 보는 단호한 채하의 태도에 설우는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설우를 달래 주려 했지만 채하가 내 행동을 저지했다. 설우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채하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도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아빠….”

침대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자니 채하와 설우가 함께 침실로 들어왔다. 설우는 훌쩍거리며 내 앞에 섰다.

“잘못해떠요.”

나는 설우를 무릎 위에 앉히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토닥였다.

“설우, 다 울었어?”

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훌쩍임은 여전했다.

“다음엔 또 안 그럴 거지?”

“응.”

“아빠랑 과자 사러 갈까?”

내 옷자락을 잡은 설우는 고개를 저었다. 잔뜩 풀이 죽어 울고 있는 설우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한참 동안 등을 토닥이자 설우가 눈물 젖은 얼굴로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채하가 설우를 침대 위에 눕혔다.

“설우 방에 데리고 가서 많이 혼냈어?”

“안 혼냈어. 내가 단호하게 말하는 게 처음이라 많이 놀랐나 봐.”

흐트러진 설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채하의 표정도 영 좋지 않았다. 오늘 일을 겪기 전까지 나는 채하가 설우를 훈육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우의 옆에 누워 눈물 젖은 얼굴로 잠든 아이를 토닥였다.

***

“우리 설우, 잘할 수 있지?”

“웅!”

3월 첫째 주, 설우의 어린이집 입학식 날이었다. 입덧으로 속이 울렁거려 조금이라도 냄새를 막아 볼 목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채하야, 저기 봐 봐. 우리 설우가 제일 크다. 그치?”

같은 반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설우는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엄마가 그러는데 나도 그랬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친구들 중 채하가 제일 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채하가 우리 반에서 제일 컸었다. 핸드폰을 꺼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스피커를 손가락으로 세게 누르고 설우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입학식이 끝나고 설우는 양손으로 우리 손을 하나씩 잡고 씩씩하게 걸었다. 잔뜩 신이 난 설우는 거의 방방 뛰다시피 했다.

“설우야, 어린이집 잘 다닐 수 있겠어?”

“당연하지!”

“정말? 아빠 없다고 우는 거 아니지?”

“안 우러.”

이제 겨우 한국 나이로 3살이 된 설우가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있는 것을 보자 대견하기보단 걱정이 더 되었다. 그에 비해 설우는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서 그런지 잔뜩 들뜬 듯했다.

“설우야, 삼촌들이 설우 맛있는 거 사 준다는데 갈까?”

“맛있는 거? 조아!”

설우는 식당으로 가는 차 안에서 신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나는 노래 부르는 설우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양가 부모님들께 보냈다.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은 우리 엄마였다. 전화를 건 엄마는 노래도 잘한다며 설우를 칭찬하다가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어린이집을 보내야 했냐고 나를 타박했다.

“괜찮아. 가 보니까 설우보다 어린 아기들도 있던데 뭐.”

- 괜찮기는. 너는 5살 때 유치원 처음 갈 때도 안 간다고 얼마나 울었는데.

“우리 설우는 안 울어. 걱정하지 마.”

- 걱정이다. 걱정이야.

“엄마, 설우 밥 먹여야 돼. 끊어. 엄마도 점심 맛있게 먹어.”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자 설우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가 설우 어린이집 다닌다고 하니까 걱정하셔?”

“응. 아직 어린데 집에서 더 데리고 있으라고 하네.”

나도 어린 설우가 걱정되었지만 이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도 입덧과 쏟아지는 잠 때문에 죽을 것 같은데 설우까지 데리고 있는 것은 무리였다.

“설우!”

“삼촌, 안녕.”

식당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윤호가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설우도 그의 정신 연령이 자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아는지 세 친구 중 윤호를 제일 좋아했다.

“감기 걸렸냐? 웬 마스크?”

“아, 아니. 그냥.”

나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테이블 위에는 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냄새가 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속도 잠잠했다. 그러나 얼마 후 직원이 테이블 위로 음식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하자 다시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우욱.”

입을 가리고 구역질을 하자 채하가 직원에게 생선을 치워 달라고 했다. 비린내가 사라지자 나는 다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아, 밥상 앞에서 더럽게 뭐야. 체했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하는 눈치인 윤호나 선준이와 달리 희주는 뭔가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너 임신했지?”

“아닌데.”

“맞는 것 같은데. 음식 냄새 맡고 입 가리고 구역질하는 거 설채하가 하던 짓인데.”

기억력도 더럽게 좋고 눈치도 더럽게 빨랐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너네 둘째 가졌어?”

“응. 아직 얘는 모르니까 비밀.”

나는 눈짓으로 채하 옆에 앉아 있는 설우를 가리켰다. 설우는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비밀!” 하고 내 말을 따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채하는 회사로, 나와 설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설우를 옆에 눕히고 토닥이다가 먼저 잠들어 버렸다.

“…원아, 지원아.”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채하와 설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우야, 아빠 뽀뽀.”

설우가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자 그다음은 채하였다. 채하가 입을 맞추고 나를 안아 침대에서 일으켰다.

“케이크 사 왔어. 저녁 먹고 설우 어린이집 입학 파티 하자.”

“이야, 우리 설우는 좋겠네.”

나는 설우를 끌어안고 계속해서 볼에 입을 맞췄다.

“난 안 해 줘?”

채하에게는 짧게 한 번 입을 맞추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채하가 케이크에 빨간색 하트 모양 초를 꽂았다.

“우리 설우, 촛불 후- 하고 불 수 있지?”

설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촛불을 불었다. 나와 채하는 촛불이 꺼지자 크게 박수를 쳤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가방을 멘 설우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우리 설우, 왜 울어? 어린이집 가야지.”

“으으응, 아니야.”

“새싹반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설우 기다리고 있대. 얼른 가자.”

“압빠랑 있을래.”

현관에 서서 등원거부를 하는 설우에게서 어제의 씩씩했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채하가 설우를 어르고 달래 어린이집 앞까지 데리고 가는 데 성공했다.

“설우, 채아빠 안녕 하자.”

설우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채하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러운 표정의 설우를 보는 채하의 얼굴도 금방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서둘러 채하를 돌려보냈다. 지금 상황에서 울보는 설우 하나로 충분했다.

“아빠, 이거 봐.”

“우와, 우리 설우 너무 대단하다. 너무 잘 만들었는데?”

교실 안으로 들어온 설우는 방금까지 울었던 것은 없던 일인 듯 처음 보는 장난감에 관심을 빼앗겨 버렸다. 하지만 호기심보단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지 손에 블록을 쥐고 내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설우야, 내일은 안 울고 어린이집 올 수 있어?”

“웅.”

짧은 적응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설우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흐어어엉, 흐으읍, 으응, 압빠, 으흐으으흡.”

한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다른 아이들까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설우가 내게 안겨 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제일 서럽고 큰 소리로 우는 설우를 들쳐 안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었던 설우의 어린이집 적응이 끝날 무렵, 나나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 그에 비해 내 입덧은 여전했다. 심지어 채하마저 함께 입덧을 하고 있었다.

“설우야, 설우 동생 갖고 싶다고 했잖아.”

“웅.”

“아빠 배 속에 설우 동생이 있어.”

“정말?”

동생이 생겼다는 말을 해 주자 설우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럼 설우 형아야?”

“음, 그건 아직 몰라. 설우가 형아가 될 수도 있고 오빠가 될 수도 있어. 설우는 형아가 되고 싶어?”

“응. 형아.”

“근데 여동생이 태어나서 오빠가 되면 어떡하지?”

아직 나나의 성별을 모르는 나는 조심스럽게 설우에게 물었다.

“갠차나. 오빠도 조아.”

여동생도 좋다는 설우의 말에 그제야 걱정을 조금 덜었다. 설우는 빨리 동생을 만나고 싶은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엄마의 생일을 며칠 앞둔 주말, 우리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우야, 아빠랑 저기 가서 기차에서 먹고 싶은 거 사 와.”

벤치에 앉아 있던 설우는 간식을 사 오라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채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채하는 사람이 많은 주말의 기차역에서 혹시라도 손을 놓칠까 설우를 품에 안았다.

“지원아, 너는 필요한 거 없어?”

“난 레모네이드.”

채하에게 안긴 설우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얼른 다녀오라며 채하와 설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얼마 후 채하는 묵직해 보이는 봉투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설우, 뭐 샀어?”

“빵!”

“빵 샀어? 맛있겠네.”

우리는 설우의 손을 잡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기차를 타 본 적이 없는 설우에게는 온통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설우야, 아빠가 기차 안에서 조용히 해야 된다고 했지?”

“응. 쉿!”

기차를 타기로 한 이후 설우에게 매일같이 기차 안에서 조용히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로 대답을 하는 설우를 보니 교육의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와, 움직여.”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올 때부터 눈을 반짝이던 설우는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채하의 무릎에 올라앉아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설우야, 기차 타니까 어때?”

“신기해.”

나는 연신 감탄을 내뱉는 설우를 보면서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병뚜껑을 닫고 테이블을 펼쳐 그 위에 채하와 설우가 사 온 것들을 올려놓았다.

“설우야, 빵 먹자.”

손에 빵을 들려 주니 설우는 그제야 창밖에서 시선을 돌렸다. 기차에서 내릴 때가 되자 설우의 얼굴에 아쉬운 티가 잔뜩 났다.

“아빠, 설우 또 기차.”

“설우, 기차 또 타고 싶어?”

설우가 내 옷을 잡으며 “안 돼?” 하고 물었다. 집까지 택시를 탈 생각이었던 우리는 결국 설우를 위해 지하철을 선택했다.

“설우야, 이번에 탈 기차는 땅 밑에서 달려.”

“징짜?”

“응. 아까는 땅 위로 갔지? 이번엔 땅 밑이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 타는 곳으로 내려가는 동안 설우는 기차를 처음 탈 때처럼 신기하다는 얼굴로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철에 타자 아까와 다른 내부에 다시 한번 놀랐다.

“지원아, 힘들진 않아?”

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1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채하는 한 손으로는 우리 셋의 짐이 담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한 손으로는 설우를 안고 있었다.

“난 괜찮은데. 설우야, 아빠 힘들어. 걸어가자.”

“으응. 시러. 설우 안아.”

채하의 목에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설우 때문에 그대로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집에 도착하니 채하의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함무니!”

“우리 아가!”

설우는 우리 엄마와 아빠에게 달려가 안겼다. 우리 부모님께 짧은 인사를 하고 설우와 함께 채하의 집으로 건너갔다.

“꼬꼬!”

채하의 집에 가니 설우는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코코를 먼저 찾았다. 그러나 코코는 설우를 피해 저 멀리 도망을 가 버렸다.

“우리 설우 왔어?”

채하의 집에는 어머니만 계셨다. 설우는 어머니에게 안겨 있으면서도 눈으로는 코코를 찾았다.

“설우야, 코코 힘들게 하면 안 돼.”

“왜에?”

“코코는 설우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코코는 할아버지라 설우랑 놀아 주기 힘들대.”

이미 열 살이 훌쩍 넘은 노견인 코코의 체력은 어린 설우와 놀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설우는 강아지와 놀고 싶은지 계속해서 코코를 불렀다.

“설우, 그럼 코코한테 손대지 말고 눈으로만 보는 거야. 알겠지?”

채하의 말에 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하가 안방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코를 안고 나왔다. 소파에 앉아 코코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옆자리를 두드리자 설우가 달려왔다. 설우는 약속대로 채하의 옆에 앉아 코코를 바라보기만 했다.

“꼬꼬.”

코코는 설우가 손도 대지 않자 경계를 조금 풀었는지 무릎에서 내려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설우는 강아지가 냄새를 맡자 긴장했는지 얼어 버렸다.

“설우야, 왜 이렇게 긴장했어. 괜찮아.”

“갠차나?”

“응. 코코가 설우 냄새 맡는 거야.”

탐색을 마친 코코가 설우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리고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러곤 천천히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설우야, 코코 자니까 살살 쓰다듬어 봐.”

“살살?”

고개를 끄덕이자 설우가 잠든 코코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혹시라도 강아지가 깰까 봐 손도 닿지 않을 정도로 살살 쓰다듬으며 설우는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며칠 이른 엄마의 생일맞이 식사를 했다. 설우는 나와 며칠 동안 연습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함무니, 생신 축하해요.”

“우리 설우가 할머니 선물이야.”

노래를 마친 설우가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러고는 엄마의 품에 안겨 함께 촛불을 껐다. 설우가 다시 우리 사이에 앉자 채하가 준비해 온 선물과 봉투를 함께 건넸다.

“아이고, 이게 뭐야. 둘 중에 하나만 하지 그랬어.”

봉투의 두께를 확인한 엄마는 놀란 얼굴이었다.

“뭘 이렇게 많이 넣었어?”

“그건 생신 선물 아니고 꿈값이예요.”

“꿈값?”

“네. 예전에 꾸신 바나나 꿈 저한테 파세요.”

“팔아?” 하고 되묻던 엄마는 뜻을 눈치챘는지 바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어봤을 땐 아니라며?”

“그때는 너무 초기라 나중에 말하려고 했어.”

채하의 부모님까지 모인 생일 축하 자리는 곧바로 우리의 임신 축하 자리로 변했다. 엄마가 주인공인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엄마가 제일 좋아하고 있었다.

“우리 설우는 좋겠네. 동생 생겨서.”

“웅. 나나는 설우 동생.”

내 배를 끌어안고 자기 동생이라고 하는 설우를 보자 부모님들은 벌써부터 동생을 챙긴다며 기특해하셨다.

“설우야, 많이 먹어.”

“녜!”

아빠의 말에 설우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잘 구워진 소고기를 작게 잘라 설우의 밥 위에 하나씩 놓아 주었다.

“지원이 너는 안 먹니?”

“저는 설우 다 먹이고 먹을게요.”

요즘 통 입맛이 없었다. 그나마 음식 냄새를 맡고 구역질하는 횟수가 줄어들어 다행이었다.

“압빠, 꼬기.”

“설우야, 이리 와. 할머니랑 맘마 먹자. 아빠도 밥 먹어야지.”

설우가 식사를 마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채하의 어머니가 설우를 불렀다.

“압빠 밥 안 머거. 과자만 머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 밥 안 먹고 과자만 먹어?”

어머니가 되묻자 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우야, 아빠가 언제 과자만 먹었다고 그래.”

“채압빠가 압빠만 과자 줘.”

설우 모르게 과자를 먹었다고 생각했지만 설우는 다 알고 있었다.

“지원이 너, 밥 대신 과자만 먹고 그러는 거야?”

이번엔 우리 엄마가 물었다.

“아니야, 딱 한 번 그랬어.”

“아닌데.”

어떻게든 변명해 보려 했지만 쫑알쫑알 일러바치는 설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밥 대신 과자만 먹는다는 말에 엄마의 잔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에게만 과자를 준다는 설우의 말에 채하도 덩달아 잔소리를 들었다.

“먹기 싫어도 밥 잘 챙겨 먹어. 채하 너도 지원이가 밥 안 먹는다고 과자만 주지 말고.”

우리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는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밥 한 그릇을 전부 비워야 했다.

“설우야, 아빠 졸려.”

“설우가 토닥토닥해 줄게.”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배가 부르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잠이 몰려왔다. 팔을 베고 누운 설우가 내 가슴을 느리게 두드렸다. 나는 설우의 체향을 맡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와 아빠가 보였다.

“채하랑 설우는?”

“설우가 눈 뜨자마자 강아지 보러 가야 된다고 해서 갔어.”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배를 내려다보자 요즘 들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아랫배가 보였다. 배를 한 번 쓰다듬고 샤워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길게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채하네 집 초인종을 누르니 누구냐고 묻는 설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우야, 아빠야. 문 열어 줘.”

얼마 지나지 않아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열어 주는 채하의 어깨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민 설우가 보였다. 분홍색 포대기로 설우를 업고 있는 채하의 모습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 포대기는 뭐야?”

“설우가 울어서 달래느라고 업고 있었는데 엄마가 해 줬어.”

“설우 울었어? 왜?”

“코코가 자꾸 도망 다녀서.”

설우의 얼굴을 자세히 보자 눈가가 조금 빨개져 있었다.

“설우야, 아빠 힘드니까 이제 내려올까?”

설우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코코는 채하에게 업힌 설우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고서야 밖으로 나와 돌아다녔다.

“지원이 왔니? 아침 먹었어?”

“네. 먹고 왔어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과일 먹자.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기다리라는 어머니의 말에 소파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으니 코코가 강아지용 계단을 밟고 소파 위로 올라왔다.

“채아빠, 설우 내려 줘.”

코코가 내 옆에 와서 앉는 것을 본 설우가 내려 달라며 채하를 재촉했다. 하지만 채하는 설우를 바로 내려 주지 않고 코코를 만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설우, 코코 안 만지기로 약속하는 거야.”

“응. 약속.”

설우를 본 코코의 몸이 잔뜩 긴장해 있었다. 나는 코코를 품에 안고 괜찮다며 쓰다듬었다.

“코코는 쉬고 싶대. 설우도 여기 얌전히 앉아 있자.”

결국 설우는 코코와 약간 떨어져 나란히 앉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설우야, 나나 태어나면 코코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해 줄 거야?”

“웅. 동생이니까.”

아직 어린 설우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을 예뻐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나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설우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러자 설우가 까르르 웃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나나의 성별을 확인할 수 있는 날이 되었다. 우리는 병원에 가기 전 어린이집에 가는 설우를 배웅했다.

“압빠, 안녕.”

“설우야, 잘 갔다 와.”

설우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가만히 서서 선생님의 손을 잡고 씩씩하게 교실로 들어가는 설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나나는 지원이 너 닮았으면 좋겠어.”

“나는 채하 너 닮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우리는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나나의 성별은 무엇일지, 누구를 닮았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료실로 들어가 배를 걷고 눕자 채하는 누가 봐도 긴장했다고 할 만한 얼굴을 했다.

“자, 그럼 한번 볼까요?”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 프로브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화면에 집중했다. 한참을 화면을 보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잘 크고 있고, 음, 아기가 예쁘게 생겼네요.”

예쁘다는 말로 아기의 성별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었다. 나나가 딸이라는 걸 알게 된 채하는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

“응. 이제 매일 기도하자. 지원이 너 닮게 해 달라고.”

병원을 나선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쇼핑몰이었다. 며칠 남지 않은 어린이날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설우가 뭘 받으면 좋아하려나.”

“그러게. 작년엔 그냥 아무거나 줘도 좋아했는데 올해는 안 그럴 것 같아.”

설우가 태어난 첫해는 따로 기념일 선물 없이 넘어갔었고, 두 번째 해인 작년은 말 그대로 아무거나 줘도 좋아했었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포스트잇 하나를 손에 쥐여 주어도 큰 선물을 받은 듯 좋아하면서 하루 종일 온 집 안에 붙이며 놀았다.

“자기야, 저거 어때?”

쇼핑몰 안은 어린이날을 맞이해 선물을 사러 온 부모와 아이들을 겨냥한 듯 다양한 장난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채하가 가리킨 것은 알록달록한 색깔의 세발자전거였다.

“자전거? 설우가 탈 수 있을까?”

설우는 덩치 때문인지 사람들이 원래 나이보다 더 많게 보곤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계속 아기 같았다.

“아직 못 타면 뒤에서 밀어 주면 되지. 손잡이도 달려 있으니까.”

“그래. 그럼 자전거 사 주자.”

우리는 설우의 어린이날 선물로 예쁜 연두색 자전거를 골랐다. 설우의 선물을 고르고 나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는지 채하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저건 왜?”

“우리 나나 꺼.”

액세서리를 파는 매장으로 나를 데리고 간 채하가 리본 핀을 집어 들고 내 머리에 하나씩 대 보기 시작했다.

“근데 왜 그걸 내 머리에 대 보는데?”

“나한테 어울릴 만한 걸로 사야지.”

“그니까 그걸 왜 나한테 그러냐고.”

“나나는 지원이 너 닮았을 테니까.”

수줍게 웃는 채하는 누가 봐도 팔불출 아빠였다. 머리띠와 머리끈, 머리핀까지 잔뜩 골라 담은 그는 얼마 전까지 둘째 이야기를 피하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벌써 옷을 사?”나

나나를 위한 액세서리를 산 채하가 내 손을 잡고 아기 옷 매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설우가 입던 옷을 물려 입히면 된다고 했지만 채하는 서운하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다.

“둘째라고 물려받은 옷만 입히면 나나가 얼마나 서럽겠어.”

“그런가.”

“응. 난 형 옷 물려 입을 때가 제일 서러웠어. 그러니까 저 원피스 사자.”

서러웠다는 말에 넘어갈 뻔했지만 나나가 입으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원피스를 집어 드는 채하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내려놔.”

정색을 하고 내려놓으라는 말에 결국 채하는 원피스를 포기해야 했다.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채하에게 물었다.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왜 설우 동생 만들자고 했을 땐 자꾸 도망 다녔어?”

“좋긴 좋은데 지원이 너 힘든 건 보기 싫으니까 그렇지.”

“괜찮대도.”

채하가 알파가 아이를 낳는 방법이 빨리 개발되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그럼 알파가 아기 낳을 수 있으면 채하 네가 셋째 낳을 거야?”

“셋째가 뭐야. 축구단 만들어야지.”

축구단 소리에 한참 동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자고 있어. 설우 데리고 올게.”

집으로 돌아온 내가 침대에 눕자 채하는 목 끝까지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간식 챙겨서 설우랑 놀이터에서 놀다가 들어와.”

채하는 내 입술에 입을 맞춘 후 침실 문을 닫고 나갔다. 집 안이 완전히 조용해지고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뿔 두 개가 난 것처럼 머리를 묶고 있는 설우가 보였다.

“설우, 머리 묶었네?”

“웅. 채압빠가 해 줘떠.”

설우의 귀여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옆에 놓아둔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그러나 검은색 화면에 비치는 내 얼굴에 곧바로 소리를 질러야 했다.

“설채하!”

“왜 불러. 지원아?”

“몰라서 물어?”

나는 머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잠든 사이, 채하가 빨간색 리본이 달린 머리끈으로 이마가 드러나도록 내 앞머리를 올려 묶어 놓았다.

“압빠는 빨강, 설우는 갈색.”

“어이구, 우리 설우, 이제 갈색도 알아요?”

설우가 갈색이라는 단어를 말하자 나는 방금까지 화를 내던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좋아했다. 설우가 대견해 끌어안고 쪽쪽 볼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본 채하가 “나는?” 하고 물었지만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

여름 무렵이 되자 입덧이 사라지고 누가 봐도 임산부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새로운 게임 출시를 앞두고 바빠진 채하는 여름 내내 얼굴만 겨우 보고 살았다.

“아빠, 채아빠는 언제 와?”

“채아빠는 설우 자고 있을 때 올 거야.”

채하는 설우가 잠들기 전 퇴근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더 늦어지고 있었다. 나는 설우를 안고 토닥였다. 하지만 설우는 내 토닥임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설우가 완전히 잠들고 나도 잠이 들 무렵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채하의 발걸음 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잘 다녀왔어?”

“지원아.”

“설우가 너 기다리다가 방금 잠들었어.”

나는 채하의 품에 안겼다. 채하에게 안기자 포근한 페로몬 향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한참 동안 페로몬을 느끼고 있다가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지고 혀가 밀려들어 왔다. 등허리를 매만지던 손이 점점 움직여 배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목덜미에 닿았다.

“후으, 채하야아.”

채하가 나를 천천히 소파에 앉혔다. 커다란 티셔츠 하나만 입은 내 허벅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하루 종일 지원이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허벅지를 만지던 손이 속옷을 끌어 내렸다.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채하의 페로몬에 내 성기는 이미 발기해 있었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채하가 손을 겹쳐 쥐고 내 성기를 직접 만지게 했다.

“소리 크게 내면 설우 깨는 거 알지?”

채하가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술을 꽉 깨물어 소리를 참았다. 임신 후 더 예민해진 몸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흥분해 버렸다. 커다란 채하의 손은 내 손을 전부 덮고도 손가락 반 마디가 남았다.

“흐응, 응, 으응.”

채하는 내 손으로 성기 기둥을 만지게 하면서 손끝으로 귀두를 살살 쓸어내렸다. 나는 그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는 것으로 의사 표현을 대신했다. 채하는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손을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하읏, 그, 그만. 아.”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에 채하의 치아가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하얀 정액을 뿜어냈다. 가쁜 숨을 내쉬는 동안 채하는 몸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내고 옷을 추슬러 주었다.

“채하, 너는?”

닿아 있는 등 뒤로 묵직한 채하의 성기가 느껴졌다.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젓는 채하를 만류하고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려 단단하게 서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윽.”

나에게 했던 것처럼 채하의 손을 끌어와 스스로 성기를 잡게 했다.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잡고 움직이자 곧바로 신음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손 크기 차이 때문에 채하가 했던 것처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 안 돼. 후우.”

결국 나는 손 밖으로 삐져나온 채하의 귀두를 입에 물었다. 사탕을 빠는 것처럼 혀를 움직여 핥자 짭짜름한 쿠퍼액 맛이 느껴졌다. 손을 움직이면서 귀두 밑 움푹 팬 곳을 혀로 어루만지고 그 위로 길게 쓸어 올렸다.

“지원아, 그, 그만.”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귀두의 갈라진 틈을 파고들자 그가 내 머리를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 흩뿌려지는 정액이 느껴졌다. 채하가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에 묻은 정액을 손으로 훑어 냈다.

“지원아, 세수하자.”

눈가에 묻은 정액 때문인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채하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내 목에 수건을 둘러 주고 물을 묻혀 얼굴에 묻은 정액을 깨끗하게 씻어 냈다.

“목에 수건은 왜 둘렀어. 다른 곳이 젖었는데.”

턱을 타고 흐른 물이 배 위로 떨어져 옷이 젖어 버렸다. 채하가 드레스 룸에서 옷 한 벌을 꺼내 와 갈아입혔다.

“자고 있어. 나 씻고 올게.”

옷을 갈아입힌 채하가 나를 침대에 눕히고 설우와 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나는 채하가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다가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내 품에 안긴 설우의 몸은 평소보다 뜨거웠다.

“설우야, 설우, 아파?”

설우가 고개를 저었지만 손바닥에 닿는 이마는 뜨거웠다. 체온을 재자 미열이 있었다.

“설우, 밥 먹고 병원 가자.”

“으으응. 주사 시러.”

“주사 안 맞을 거야. 약만 받아서 오자. 알겠지?”

싫다는 설우를 설득해 병원에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영 미심쩍어하는 얼굴이었지만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 주겠다는 말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설우야, 맘마 먹자.”

식사 준비를 마친 채하가 우리를 불렀다. 식탁에 앉은 설우는 식사를 시작했다.

“설우야, 더 안 먹어도 되겠어?”

식빵 한 장으로 만족할 리 없는 설우가 겨우 식빵 하나를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계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채하도 나와 마찬가지로 설우의 식사량을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설우 데리고 병원 갈 테니까 얼른 출근해.”

“내가 조금 늦게 출근하면 되니까 같이 가.”

“아니야. 너 바쁘잖아. 얼른 가.”

채하를 출근시키고 설우와 함께 집을 나섰다. 소아과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설우야, 많이 아파?”

고개를 저었지만 설우는 나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료 순서가 돌아올 때까지 설우를 안고 토닥였다.

“감기네요. 약 처방해 드릴 테니까 이틀 후에 다시 오세요.”

긴 대기 시간과 다르게 진료는 짧았다. 설우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와 제일 가까운 약국으로 들어갔다. 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처방전을 내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약이 나올 때까지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설우가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진열된 어린이용 비타민에 관심을 가졌다.

“설우야, 저거 사 줄까?”

“웅. 사 줘.”

평소 무언가를 사 달라고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설우가 사 달라고 하는 것은 전부 사 주고 싶었다. 나는 설우가 고른 것 외에도 여러 개를 집어 함께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요즘 들어 피곤해하는 채하의 영양제까지 사니 손에 들린 약국 봉투가 묵직했다.

“설우,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압빠, 케이크 두 개 사 줘.”

“세 개 골라. 세 개. 알겠지?”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 두 조각을 사 달라고 하는 설우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똑같이 손가락을 펼친 설우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먹고 싶은 케이크를 골랐다. 집으로 돌아와 설우에게 약을 먹이고 침대에 눕혔다.

“압빠, 나 안아 줘.”

설우를 안고 약 기운이 돌아 잠이 들 때까지 아이를 토닥였다. 설우는 나와 떨어지기 싫은지 잠들어서도 내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설우가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옷을 빼낸 후 이불을 덮어 주었다.

설우가 깨면 알 수 있게 침실 문을 살짝 열어 둔 채 점심으로 먹일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야채와 소고기를 잘게 다져 넣고 끓이자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먹성이 좋은 설우를 위해 넉넉하게 만들었지만 아침에도 입맛이 없어 부실하게 먹은 설우가 다 먹어 줄지는 미지수였다.

“압빠, 압빠.”

“우리 설우, 깼어? 맘마 먹을까?”

설우는 먹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약을 먹이기 위해서 꼭 먹여야 했다.

“조금만 먹자. 조금만. 응? 맘마 먹고 케이크도 먹자.”

설우를 다독여 죽 한 그릇을 겨우 먹이고 약을 먹였다. 다시 열을 재니 아침보다 체온이 더 올라가 있었다. 채하를 닮아 더위를 잘 타는 설우는 잘 때 자주 이불을 차 냈는데, 그 때문에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우리 설우, 씩씩하게 약 먹었으니까 케이크 먹을까?”

“쪼꼬 맛 머글래.”

“초코? 알겠어.”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꺼내 오자 설우는 참새처럼 입을 벌렸다.

“설우, 혼자 먹을 수 있잖아.”

손에 포크를 쥐여 주어도 설우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먹을 때만큼은 항상 씩씩하게 혼자 먹던 설우답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앞에 앉아 케이크를 한 입씩 먹여 주기 시작했다.

“맛있어?”

“응. 압빠도 먹어.”

“아빠는 설우 다 먹고 먹을게.”

내가 주는 대로 케이크를 받아먹던 설우는 반쯤 먹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파서 그런지 어리광이 잔뜩 늘어 있었다.

“우리 설우, 아파서 그런가 아기가 됐네.”

설우가 다시 잠들 때까지 품에 안고 토닥거리던 중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설우 아기 아냐. 아기는 나나야.”

설우가 내 배에 뺨을 대고 “나나야.” 하고 불렀다. 나는 품에 안겨 잠든 설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날 저녁, 채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역시 원래의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설우는 괜찮아?”

“너 오기 바로 전에 약 먹고 잠들었어.”

“우리 지원이 힘들었겠네. 이번 주면 다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채하가 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품에 안기자 느껴지는 페로몬에 오늘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전부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제보다 감기가 더 심해진 설우는 어리광도 함께 심해졌다.

“압빠, 어디 가?”

“아빠, 잠깐만 일 좀 하고 올게.”

설우가 내 팔을 붙잡고 가지 못하게 막았다. 결국 나는 설우를 안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작업실 위 침대에 설우를 눕히고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금방 끝낼게. 조금만 기다려.”

고개를 끄덕인 설우는 심심한지 온몸에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설우에게 먹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복숭아.”

“복숭아 먹고 싶어?”

“사과도.”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이것만 하고 사러 가자.”

“응. 빤니 해.”

설우의 재촉에 손가락을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설우의 옷을 갈아입혀 외출 준비를 했다.

“설우 업어 줘.”

“업어? 아빠 힘든데 손잡고 가면 안 될까?”

현관문 앞에 선 설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한숨을 한 번 쉬고 설우를 등에 업었다. 설우의 무게 때문인지 현관문을 열고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등에 땀이 맺혔다.

“설우야, 아빠 출발할게.”

설우를 차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마트에 도착해서도 업어 달라는 설우를 겨우 설득해 카트에 태웠다. 평소였으면 잘 사 주지 않았을 간식들도 관심을 보이는 족족 전부 카트에 담았다.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이제 집에 갈까?”

설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복숭아를 달라는 재촉에 짐을 정리하기도 전에 과도를 들었다.

“설우, 맛있어?”

“웅. 압빠도 먹어.”

작게 자른 과일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설우가 내 입에도 복숭아를 넣어 주었다. 이로 씹자 달콤한 과즙이 입 안 전체를 적셨다. 복숭아를 삼키니 설우가 “맛있어?” 하고 물었다.

“설우가 줘서 더 맛있어.”

설우의 볼에 입을 맞췄다. 저녁을 먹은 설우는 컨디션이 좋아졌는지 혼자 놀다가 잠이 들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이었는지 다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픈 설우를 들쳐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가는 동안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응급실로 들어가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 동안 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채하야.”

- 지원아,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채하는 단박에 내 목소리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떨리는 목소리로 설우가 아파 응급실에 있다고 알렸다. 그는 얼른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채하가 올 때까지 설우를 안고 달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원아!”

“채하야.”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는 채하를 보자 한순간에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많이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채하가 내 품에 안겨 있던 설우를 받아 안고 나를 달랬다. 설우의 진료 순서가 돌아올 때쯤에야 눈물이 멈추었다.

“설우야, 이제 괜찮아?”

채하의 품에 안겨 있는 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의 손등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보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설우의 열이 내린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채하는 침대 밑에 이불을 깔고 설우를 눕혔다.

“오늘 많이 놀랐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병치레 한번 없던 설우였기에 한밤중에 응급실에 갈 정도로 아팠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채하가 나를 안고 누워 토닥였다. 정말 오랜만에 채하에게 안겨 잠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우와 함께 자게 된 후 항상 설우에게 채하의 품을 양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일부턴 내가 설우 볼 테니까 푹 쉬어.”

“내일 설우 안 아프면 밖에 데리고 나가서 놀아 줘. 내가 제대로 못 놀아 주니까 설우도 심심해하는 것 같아.”

나나가 생기기 전까진 채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열심히 몸으로 놀아 줬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알겠어. 설우 데리고 나갈 테니까 나나랑 푹 쉬어. 우리 나나도 오늘 힘들었지?”

채하가 배에 손을 얹고 말을 걸자 나나가 움직였다. 배가 아플 정도로 발길질을 하던 설우에 비해 나나는 얌전히 노는 편이었다.

“설우 때는 태교한다고 이것저것 많이 하고 그랬는데 나나는 제대로 신경도 못 써 주네.”

“너무 신경 쓰지 마. 설우 봐 봐. 배 속에 있을 때 내가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 줬는데 지금 책 싫어하잖아.”

채하의 말에 소리를 죽여 웃었다. 설우를 임신 중일 때 매일같이 동화책을 사 들고 와 읽어 줬던 노력은 헛수고가 된 듯, 설우는 채하가 책을 펼칠 때마다 그 작은 손으로 책을 덮어 버렸다.

“얼른 자. 피곤하겠다.”

채하가 방 안 가득 페로몬을 풀고 내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워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방 밖에서 조잘거리는 채하와 설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지원아!”

방문이 열리고 설우와 채하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잔뜩 신이 난 목소리와 달리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다 죽어 가는 것 같았다.

“채하야, 나 몸살 난 것 같아.”

지난 며칠 동안 설우를 간호하느라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목이 부었는지 침을 삼킬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 가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 가지 않으려는 날 설득하는 채하를 보자 며칠 전 설우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애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인터넷 찾아보니까 계속 열나고 그러면 아기한테도 안 좋대.”

채하의 말에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목 아파. 안 먹을래.”

설우가 하던 행동을 내가 그대로 하고 있었다. 채하가 부드럽게 끓인 수프를 한 숟가락씩 떠먹였다. 나는 채하가 숟가락을 들 때마다 하는 애원에 결국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채하야, 나도 케이크 사 줘.”

병원과 약국까지 들른 후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케이크가 생각났다.

“케이크? 알겠어.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없어. 케이크만 있으면 돼.”

우리는 차를 세우고 디저트 카페에 들어갔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케이크를 사러 온 설우는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설우야, 뭐 먹고 싶어?”

채하의 품에 안겨 있는 설우에게 물었다. 설우는 손가락으로 쇼케이스에 진열된 케이크를 가리켰다. 나는 설우가 고르는 것을 손에 든 트레이 위에 올렸다.

“지원아, 너 먹고 싶은 거 골라.”

계속해서 설우가 고르는 것만 집어 드니 채하가 나를 말렸다. 가득 찬 트레이를 보다가 그 위에 케이크 한 조각을 더 올리고 카운터로 가져갔다.

“이거 먹고 약 먹자.”

집으로 돌아온 채하가 접시에 케이크 한 조각을 올려 침대 위로 가져왔다.

“이따 설우 점심 먹이고 간식으로 케이크 줘. 한 조각 다 주지 말고 반으로 잘라서.”

“내가 알아서 할게. 설우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준 채하는 설우와 거실에서 놀고 있을 테니 시킬 것이 있으면 부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채하와 설우가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가 잠들어 버렸다.

채하는 삼 일 내내 내 수발을 들었다. 나는 혹여나 채하도 몸살이 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빠, 이제 안 아파?”

“응. 설우 덕분에 이제 괜찮아.”

설우가 아프고 내가 아팠던 동안 설우는 더 성장한 것 같았다. 압빠, 하고 부르던 설우의 입에서는 ‘아빠’라는 더 명확한 발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나도 안 아파?”

“응. 나나도 오빠가 걱정해 줘서 이제 안 아프대.”

설우는 내 배를 끌어안고 “다행이다.”라고 속삭였다.

***

나와 채하의 결혼기념일,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웠던 날 우리는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에 탄 설우는 기차를 처음 탔을 때처럼 모든 것을 신기해했다.

“아빠, 우리 어디 가?”

“우리는 지금 제주도 가는 거야.”

“제주도?”

“응, 제주도. 설우가 아빠 배 속에 있을 때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 봤는데. 기억나?”

“기억나.”

농담이었지만 기억이 난다는 설우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말?”

“응. 채아빠 울었어.”

신혼여행에서 채하가 울었던 것은 나와 채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우의 말에 채하도 놀란 표정이었다.

“설우야, 아빠 배 속에 있을 때 더 생각나는 거 있어?”

설우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더 기억나는 것이 없는지 물었다.

“채아빠가 매일 말 걸었어.”

“무슨 말 했는지 기억나?”

설우는 성의 없이 “몰라.” 하고는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배 속에 있을 때를 기억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설우가 기억을 하는 것 같아 놀라웠다.

제주도에 도착해 공항을 빠져나온 우리는 제일 먼저 숙소로 향했다.

“우와, 수영장.”

도착한 곳은 우리가 신혼여행 때 묵었던 그 숙소였다. 수영장을 본 설우는 곧바로 뛰어 들어갈 기세였다. 나는 짐가방을 열고 채하와 설우의 수영복을 꺼냈다.

“설우야, 옷 갈아입고 들어가자.”

설우의 옷을 갈아입히는 사이 채하는 집에서 챙겨 온 튜브에 바람을 넣었다.

“채아빠, 빨리.”

“응.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설우의 재촉에 채하의 손이 더 빨라졌다. 우리는 채하를 기다리면서 수영장에 발을 담갔다. 나는 손으로 물을 퍼 설우의 얼굴에 뿌렸다. 설우는 신이 났는지 물을 맞으면서도 까르르 웃었다.

“설우야.”

설우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채하가 커다란 튜브를 손에 들고 있었다. 채하는 물 위에 튜브를 띄우고 설우를 태웠다.

“아빠! 더 빨리.”

설우가 탄 튜브를 밀어 주자 더 빨리 하라며 재촉했다. 채하와 설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동영상으로 그 모습을 남겼다.

“설우야, 그만 놀고 나와.”

햇볕이 점점 뜨거워지는 탓에 설우를 불렀다. 하지만 설우는 물 밖으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결국 채하가 설우를 번쩍 안아 들고 실내로 들어와야 했다.

“으으으응, 설우 더 놀 거야.”

“지금은 너무 더워서 안 돼. 조금 이따가 다시 놀자.”

설우가 더 놀겠다고 떼를 썼지만 간식을 먹이니 금세 잠이 들었다. 설우가 잠들자 나와 채하는 수영장에 놓여 있는 둥그런 선 베드에 함께 누웠다.

“나나도 여행 와서 신났나 봐.”

채하의 손을 잡아끌어 배 위에 올려놓았다. 평소보다 강한 태동이 느껴졌다.

“나나야, 나나도 태어나면 같이 오자. 아빠랑 오빠랑 같이 수영장에서 놀고 바다도 보고. 재미있겠다. 그치?”

“이제 나나도 두 달 후면 만나겠네. 시간 정말 빠르다.”

나는 채하의 팔을 베고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바다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애인 생기면 이런 데로 여행 오는 게 소원이었는데.”

“우리 지원이, 소원 이뤘네. 나랑 두 번이나 왔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애인이랑 오고 싶었다고. 남편 아니고 애인.”

내 말에 누워 있던 채하가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연애 제대로 못 해 본 게 좀 아쉬워서. 대학교 때 연애 좀 해 보려고 하면 채하 네가 다 방해했잖아.”

“그럼 우리 연애할까?”

채하가 내 손을 잡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하의 목소리는 진지했지만 나는 웃음이 나왔다.

“연애? 결혼하고 애도 둘이나 있는데?”

“우리가 언제는 순서대로 했나. 아기부터 만들고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연애하는 게 안 될 건 없잖아.”

채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연애하자.”

나와 채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입을 맞췄다. 입술이 퉁퉁 부르틀 때까지 입을 맞추다가 다시 선 베드에 누웠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음, 예전에 연애했던 날짜도 합쳐야 하지 않나?”

오늘부터 1일이냐는 유치한 채하의 물음에 나는 더 유치해지기로 했다. 나는 우리가 결혼 전 연애라고 부를 만한 것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럼 4월 1일부터 세는 거야?”

“그날은 연애라고 부르기 힘들지 않아?”

오랫동안의 대화에도 우리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연애 1일은 오늘이 되었다. 결혼기념일이자 연애의 시작일이었다.

“난 아직도 집 앞에서 뽀뽀하다가 걸렸던 날 기억이 생생해.”

채하의 말에 나는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그다음 날 우리 아빠가 너 계속 째려봤잖아.”

“이제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아. 나도 설우나 나나가 친구랑 집 앞에서 뽀뽀하다가 걸리고 혼전 임신까지 했다고 하면 아버지랑 똑같이 할 것 같아.”

채하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그 당시의 아빠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듯했다.

“설우가 조금만 더 천천히 커 줬으면 좋겠어. 갓난아기 때는 빨리 컸으면 했는데.”

채하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너 처음 이사 온 날 같이 밥 먹었을 때?”

“그날은 맞는데, 난 그 전에 지원이 너 봤어.”

“정말?”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응. 그날 이사 오자마자 심부름으로 밖에 나갔었는데 엄청 예쁜 애가 지나가는 거야. 그게 지원이 너였어.”

“내가 그렇게 예뻤어?”

“응. 엄청.”

채하는 나에게 입을 맞췄다. 설우가 깰 때까지 우리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

나나가 생긴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한 달 후면 나나를 만나는 날이었다. 설우의 이름을 지을 때처럼 이번에도 직접 이름을 짓기로 했다.

“어렵다, 어려워. 한 글자만 정하면 되는데 설우 이름 지을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

나나의 이름 세 글자 중 두 글자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겨우 한 글자만 정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서인지 더 어렵게 느껴졌다.

“은설이 어때?”

“유은설? 설우랑 남매 느낌이 안 나.”

나는 채하와 채민 형처럼 형제 느낌이 나는 이름을 원했다.

“유설영, 유설희, 유설아, 유설빈.”

채하는 여러 개를 생각해 둔 듯 이름들을 줄줄 읊었다. 채하가 말한 이름들을 하나씩 곱씹어 보다가 설아라는 이름을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설아. 유설우, 유설아. 설우, 설아.”

설아라는 이름만 불러 보기도 하고 설우의 이름과 붙여서 함께 불러 보기도 했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나도 그게 제일 마음에 들긴 하는데.”

“정말? 나도 설아가 마음에 드는데.”

나나의 이름은 설아가 되었다. 채하가 배에 대고 “설아야.” 하고 이름을 불러 주었다. 나나는 그게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아는지 꿈틀거리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설우야, 아빠가 책 읽어 준대.”

“설우 책 시러.”

나와 설우가 침대에 눕자 채하가 동화책 한 권을 들고 왔다. 내가 설우에게 “재미있겠지?” 하고 묻자 설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설우는 듣지 마. 아빠랑 나나만 들으면 되지.”

나는 일부러 채하의 옆구리로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채하는 설우의 궁금증을 유발하려는 듯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의 발치께에서 뒹굴뒹굴하던 설우는 내용이 궁금한지 조금씩 우리의 곁으로 오고 있었다.

“아빠, 여기 설우 자리.”

“여기 아빠 자린데.”

평소 나와 채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설우는 오늘도 가운데를 파고들려고 했지만, 우리가 딱 붙어 있는 탓에 여의치 않았다. 나는 설우에게 여긴 내 자리라고 장난을 쳤다.

“아니야. 설우 자리.”

“아니야. 아빠 자리 맞아. 설우 자리 아니야.”

설우에게는 장난같이 들리지 않았는지 설우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설, 설우. 흐으으엉, 설우, 끄으읍, 자리.”

설우가 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나는 당황해 설우를 달랬다.

“설우야, 아빠가 미안해. 여기 설우 자리야.”

아무리 달래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채하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던 설우가 고개를 들어 속쌍꺼풀이 진 동그란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아빠, 진짜 미어.”

설우의 입에서 나온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설우가 누군가가 밉다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 미움의 대상이 내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지원아, 울어?”

갑자기 뜨거워지는 눈가에 말없이 고개를 젓고 방을 나가 작업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자 눈가에 고인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머리로는 설우가 진짜 나를 미워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지원아.”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이고 있을 때 채하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설우는?”

내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잔뜩 섞여 있었다.

“잠들었어. 설우가 밉다고 해서 속상했어?”

“아니이, 설우가 진심으로 한 말 아닌 건 아는데….”

결국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아까의 설우처럼 채하에게 안겨 눈물을 흘렸다. 나나를 만날 날이 다가올수록 감정 기복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걸 아는 채하는 말없이 나를 토닥였다.

“나 요즘 감정 조절이 더 안 되는 것 같아.”

“괜찮아. 나나 때문에 그런 거잖아.”

눈물이 잦아들자 채하는 “여기서 잘래?”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채하와 함께 침실로 돌아갔다. 아직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설우의 얼굴을 보니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채하가 걱정할까 봐 눈물을 꾹 참고 설우의 옆에 누웠다.

“설우야, 아빠가 미안해.”

잠든 설우를 끌어안고 속삭이다 보니 다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을 본 채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이불을 깔고 내 품에 안겨 있던 설우를 그 위로 옮겼다.

“지원아, 괜찮아. 그만 울어.”

채하가 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설우도 많이 속상해서 그랬겠지?”

“설우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다 잊어버릴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날 밤, 나는 채하의 품에 안겨 눈물을 훌쩍이다가 잠들었다.

“설우야, 아빠랑 떨어져 있을 수 있어?”

“웅.”

“정말? 아빠랑 열 밤 넘게 못 보는데?”

숫자 10은 설우가 아는 가장 큰 숫자였다. 나나를 낳고 조리원에 있는 동안 부모님들께서 설우를 맡아 주기로 하셨다. 열 밤 넘게 못 본다는 말에도 씩씩하게 괜찮다고 대답하는 설우 때문에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닌가 더 걱정이 되었다.

“채하야,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저번에 형한테 맡겼을 때도 안 울고 잘 놀았잖아.”

“그땐 하루였잖아. 우리 찾으면 바로 데리러 갈 수도 있었고.”

“설우 봐봐. 코코 본다고 신났잖아.”

설우는 채하와 함께 사 온 강아지 간식을 가방 가득 챙기고 있었다. 나는 설우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설우가 계속 우리 찾으면 어머니들이 설우 데리고 우리 집에 와 계신다고 했잖아.”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가방을 들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짐을 챙기는 설우의 옆에서 함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설우의 옷과 속옷을 넉넉하게 챙기고 다른 가방을 꺼내 장난감을 넣었다.

“지원아, 설우 베개랑 이불도 챙길까?”

“응. 혹시 모르니까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서 보내자.”

현관 앞에 쌓아 둔 짐은 이삿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설우의 인형까지 올려놓자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우야, 이제 내일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랑 자야 되는 거 알지?”

“응. 할머니, 할아버지랑 코코랑.”

“설우랑 아빠는 나나 태어나면 다시 만나는 거야.”

당분간은 설우를 못 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설우는 평소처럼 채하의 가슴 위로 올라가 눈을 감았다. 채하는 평소보다 더 오래 설우의 등을 토닥였다.

“함무니!”

엄마가 오기로 한 날, 설우는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다. 당분간 어린이집에 가지않고 가족들과 있어도 된다는 생각에서인지 평소보다 기분이 더 좋아 보였다.

“우리 설우, 못 본 사이에 또 컸네!”

점심 무렵, 우리 집에 도착한 엄마는 나보다 설우를 더 반겼다. 한참 동안 설우를 끌어안은 후에야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있었어?”

“설우한테 하는 말투랑 나한테 하는 말투가 너무 다른 것 같지 않아?”

“모르겠는데. 우리 설우 방에 들어갔어?”

엄마의 관심사는 온통 설우였다. 설우가 자신의 방에 가자며 호들갑을 떨자 엄마가 과장된 몸짓으로 그 뒤를 따랐다.

“함무니! 아빠가 침대 사 줘떠.”

“아빠가 침대 사 줬어? 우리 설우는 좋겠네.”

아이의 자랑에 대꾸하는 목소리도 과장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도 누워 보라는 말에 감동했다는 듯한 표정까지 지었다.

“엄마, 설우야, 밥 먹자.”

“벌써 점심때네.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금방 차려 줄게. 집에서 반찬 해 왔어.”

“아니야. 채하가 엄마 맛있는 거 사 드리라고 했어.”

무엇이 먹고 싶냐는 물음에 엄마는 설우가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었다.

“설우는 쪼꼬!”

“우리 설우, 초콜릿 먹고 싶어? 밥 먹고 할머니가 사 줄게. 점심으로 뭐 먹고 싶어?”

“아니야. 엄마 먹고 싶은 거 먹자.”

“설우가 먹고 싶은 게 엄마 먹고 싶은 거야.”

“엄마, 앞으로 설우 보려면 몸보신해야지. 설우랑 노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걸.”

내 말에 엄마가 코웃음을 쳤다.

“뭐가 힘들어. 설우가 얼마나 순한데. 저런 순둥이는 열 명도 키우겠다.”

“그래. 설우 보다가 몸살 나면 연락해. 채하가 병원비는 주겠지.”

항상 설우의 순한 모습만 보았던 엄마는 힘들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평소 순한 편이기는 했지만 울면서 고집을 부릴 때는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설우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머거?”

“우리 설우 좋아하는 고기 먹자. 고기.”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설우가 엄마의 말에 신이 났는지 다리를 흔들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설우도 옷 갈아입자.”

설우의 옷장 문을 열었다. 옷을 고르는 동안 설우가 스스로 잠옷을 벗었다.

“설우, 곰돌이 옷 입을까?”

가슴에 커다란 곰돌이가 그려진 티셔츠를 보여 주니 고개를 끄덕였다. 티셔츠와 바지를 입히고 청재킷까지 챙겨 입히자 외출 준비가 끝났다.

“함무니, 가자.”

“우리 아가, 할머니가 안아 줄게.”

설우가 손을 잡아끌자 엄마는 설우를 안아 올렸다. 하지만 내 만류에 금세 설우를 내려놓아야 했다.

“설우 무거워서 힘들어. 내려놔.”

“조금 무겁긴 하네. 지원이 너 설우 나이였을 때랑 비교해 보면 설우가 훨씬 큰 것 같아.”

설우를 내려놓은 엄마는 설우가 무겁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설우가 어린이집 같은 반 친구들 중에 제일 커.”

엄마도 설우가 기특한지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설우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빨리 나가자며 우리를 재촉했다.

“잘 먹겠뜹니다.”

“많이 먹어. 우리 설우. 지원이 너도 얼른 먹고.”

엄마는 집게를 들고 고기가 구워지는 대로 우리에게 먹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 다 먹었어. 엄마도 얼른 먹어.”

“다 먹긴 뭘 다 먹어. 더 먹어.”

다 먹었다는 말에도 엄마는 계속해서 내 앞접시에 고기를 올렸다. 나는 앞접시에 있던 고기를 엄마의 앞으로 옮겨 놓았다.

“많이 먹었어. 이제 배불러서 더 못 먹어.”

부푼 배 위로 손을 얹었다. 배를 쓰다듬자 나나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수술 날짜가 언제라고 했지?”

엄마가 식사를 하며 물었다.

“다음 주 월요일. 설우 때처럼 일찍 나올 수도 있지만.”

“엄마가 월요일에 설우 데리고 올게.”

“아니야. 월요일에 바로 오지 말고 한 수요일쯤 와. 수술한 날은 제대로 못 움직이니까.”

“그래. 설우 낳았을 때도 아파서 끙끙거리는 거 보니까 마음이 좀 그렇더라.”

마음이 안 좋았다는 엄마의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채하는 이번에도 일 년 동안 집에서 일한대?”

“아니. 이번엔 육 개월.”

설우 때도 시작은 6개월이었지만 결국 1년의 재택근무를 받아 냈었다. 채하는 이번에도 그럴 눈치였다.

“아기 낳으면 예쁘게 머리 길러 줘.”

“왜? 엄마가 머리 묶어 주게?”

“응. 이제 손녀 있으니까 머리 묶어 줘야지.”

엄마의 말에 핸드폰을 꺼내 설우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갈색 리본으로 앞머리를 묶고 있는 설우의 모습에 엄마는 크게 웃었다.

“누가 해 준 거야?”

“채하가. 성별 확인 한 날 바로 머리끈이랑 이것저것 사 와서 설우한테 머리 묶는 거 연습하더라고.”

“그 사진 엄마 보내 줘. 핸드폰 배경 화면 하게.”

나와 마찬가지로 엄마와 아빠의 핸드폰 배경 화면과 메신저 프로필에도 설우의 사진이 가득했다. 머리를 묶은 사진을 포함해 여러 장을 엄마에게 보냈다.

“이렇게 예쁜 사진이 많은데 넌 보내 달라고 해야 보내 주니?”

엄마는 숟가락도 내려놓고 설우의 사진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우가 그렇게 좋아?”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하지.”

“그럼 내가 좋아, 설우가 좋아?”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궁금해졌다.

“너는 왜 그런 걸 묻고 그래.”

“나야, 설우야. 말해 봐.”

“넌 엄마가 좋아, 설우가 좋아?”

엄마의 역공격에 나는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함무니, 설우 쪼꼬 사 주세요.”

“설우, 초콜릿 먹고 싶어요?”

“네!”

“그래. 초콜릿 사러 가자.”

집에 가기 전 들린 마트에서 엄마는 설우를 카트에 태워 설우가 고르는 것을 전부 쓸어 담았다.

“조금만 사.”

“이거 뭐 얼마나 된다고 그래. 내일 갈 때 챙겨 가면 되지.”

“설우 먹을 거 너무 많이 주지 마. 먹성이 좋아서 주는 대로 다 먹어서 안 돼.”

“알았어. 알았어.”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저녁 뭐 먹고 싶어? 엄마가 해 줄게.”

“괜찮아. 우리 집에서는 밥하지 말고 쉬다가 가.”

내 만류에도 엄마는 카트 안으로 저녁거리를 하나씩 집어넣었다. 더 말리지 못하고 허리를 한 손으로 받친 채 엄마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집으로 돌아오자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걱정할까 봐 티를 내지 않았다.

“설우, 졸리지? 치카치카 하고 낮잠 자자.”

“으으응. 치카치카 시러.”

“치카치카 안 하면 벌레가 설우 입 속을 막 기어 다녀서 아프게 할 텐데?”

설우는 그제야 순순히 입을 벌렸다. 표정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양치질을 마치고 침대에 눕히자 피곤했는지 빠르게 눈을 감았다. 설우를 재우는 사이 마트에서 배달이 왔는지 밖으로 나오자 엄마가 오늘 산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 커피 마실래?”

“응. 한 잔 줘.”

물을 끓이면서 커피를 내리기 위한 준비물을 하나씩 꺼냈다. 커피 필터 안에 원두 가루를 넣고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붓자 커피 서버 안으로 갈색 액체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걸로 줄까? 아니면 뜨거운 거?”

“엄마는 뜨거운 걸로.”

엄마의 말에 앞에 놓인 두 개의 컵 중 하나에만 얼음을 가득 담았다. 커피 두 잔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컵 하나를 맞은편으로 밀어 놓고 내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이는데 엄마는 금방이라도 잔소리를 쏟아 낼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너 지금 커피 마시는 거야?”

“응.”

“아기한테….”

“하루에 한 잔 정도는 괜찮대. 설우 때도 커피 마셨는데 괜찮았어. 그러니까 잔소리 안 해도 돼.”

엄마는 네 마음대로 하라며 한숨을 쉬고는 컵을 들었다. 커피를 마시는 엄마를 보다가 냉장고에 넣어 둔 마카롱이 떠올랐다.

“엄마, 이것도 같이 먹어. 채하가 사 왔는데 커피랑 먹으면 맛있어.”

“채하는 이런 것도 사 올 줄 알아? 너희 아빠는 맛있는 거 사 오라고 하면 단팥빵만 사 오던데.”

한숨이 섞인 엄마의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다.

“맞아. 어렸을 때 아빠한테 과자 사 오라고 하면 아빠가 좋아하는 것만 사 왔잖아.”

“그거 싫다고 바닥에 드러누워서 떼쓰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엄마의 모습이 설우가 조금 천천히 커 주길 바라는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채하가 아직도 잘해 줘?”

“응. 잘해 줘. 걱정 안 해도 돼.”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싱크대에 넣고 마카롱 상자를 접어 분리수거 통으로 가져갔다.

“엄마도 좀 쉬어. 피곤하면 작은방에 들어가서 좀 자고.”

설우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하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이제 출산까지 며칠 남지 않은 배 때문에 바로 눕지 못하고 옆으로 누워 곤히 잠든 설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빠.”

“설우, 깼어? 조금 더 자.”

이불을 목 밑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고 가슴을 토닥거리자 금세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설우의 숨소리를 듣다가 잠들었다. 잠들기 전 마셨던 커피 때문에 요의를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아빠!”

손의 물기를 닦으면서 침실 밖으로 나오니 나를 반기는 설우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설우, 잘 잤어?”

“응. 아빠랑 나나는?”

“아빠랑 나나도 잘 잤지. 할머니는 설우 방에 계셔?”

“아니. 함무니 업떠.”

설우의 말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이 여러 번 가고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안내 음성이 나올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엄마에게 어디 갔냐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나나는 몇 밤 자면 나와?”

배가 눈에 띄게 불러 오기 시작할 때부터 하던 질문이었다. 설우는 내 배를 끌어안고 그 위에 귀를 댔다.

“이제 다섯 밤만 자면 돼.”

손가락 다섯 개를 보여 주니 설우가 나를 따라 손을 펼쳤다. 그러고는 하나씩 천천히 접으면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우리 설우 잘하네.”

“그리고 나나랑 설우는 일곱 밤 자고 만나는 거야.”

손가락 두 개를 더 펼쳐 보여 주었다. 손가락으로 한창 숫자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내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 어디야?”

- 엄마 지금 마트 왔어.

“왜? 아까 갔다 왔잖아.”

- 너 몸에 좋은 거 해 주려고 그러지. 금방 갈게. 끊어.

엄마가 빠르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내 무릎을 벤 채 애니메이션에 집중하고 있는 설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설우야, 재미있어?”

“웅. 재미떠.”

나는 설우와 함께 펭귄과 공룡의 모험 이야기에 집중했다. 우리가 한창 텔레비전에 빠져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인터폰 화면에는 엄마의 얼굴이 비쳤다.

“엄마, 내가 우리 집에서는 밥하지 말라고 했잖아.”

“저녁에 전복 넣고 삼계탕 해 줄게. 너 삼계탕 좋아하잖아.”

엄마는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갈 거면 나 깨워서 같이 가지 왜 혼자 갔어.”

싱크대 앞에 서서 닭과 전복을 손질하는 엄마에게 물었다.

“혼자 안 갔어.”

“그럼 누구랑 갔는데?”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곳에서 엄마가 혼자 다녀오지 않았다는 말에 의문이 들었다.

“옆집 아줌마랑.”

“옆집 아줌마?”

가끔 집 앞에서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했지만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적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함께 마트에 다녀왔다는 소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쩌다가? 옆집 아줌마랑 처음 본 거 아니야?”

“잠깐 나갔다가 마주쳐서 얘기하다가 장 보러 간다길래 같이 가자고 했지.”

“붙임성도 좋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옆집 아줌마가 너랑 채하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하더라.”

채하와 내가 친구였던 시절에 이곳으로 이사를 온 날, 옆집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는 우리를 친구라고 소개했지만 내 배가 점점 불러 오고 채하와 똑같이 생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 충분히 궁금증이 들었을 법했다.

“하긴, 여기 처음 이사 왔을 땐 채하랑 친구라고 했거든. 근데 이렇게 됐으니까 당연히 궁금하겠지.”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냄비를 꺼내와 삼계탕 재료를 하나씩 넣었다.

“근데 닭을 왜 다섯 마리나 샀어?”

“닭이 작아서. 채하도 한 마리로 부족할 것 같고 설우도 잘 먹잖아. 모자란 것보단 남는 게 낫지.”

“내가 도와줄 건 없어?”

“없어. 가서 앉아 있어.”

엄마는 내가 귀찮은지 나가 있으라며 손을 휘저었다. 나는 다시 설우의 옆에 앉았다.

“아빠, 채아빠 언제 와?”

“왜? 아빠 보고 싶어?”

“응. 채아빠 빨리 오라고 해.”

“저기 시계 봐 봐. 짧은 바늘이 육에 오면 아빠 올 거야.”

이제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설우는 내 말에 텔레비전 대신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들어 시계 앞에 선 설우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채하에게 보냈다. 사진을 보내자 채하가 바로 확인했는지 전화를 걸었다.

“설우야, 전화 받아 봐.”

“여보떼요.”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는 것을 알려 주니 설우가 신난 목소리로 핸드폰을 받았다. 전화기를 붙잡고 대답을 몇 번 하더니 내 손에 핸드폰을 다시 들려 주었다.

“여보세요?”

- 지원아, 어머니 저녁 뭐 드시고 싶으시대?

“엄마가 전복삼계탕 해 준대. 아까 나 설우랑 자고 있을 때 옆집 아줌마랑 같이 마트 다녀왔대.”

내 말에 채하도 놀란 눈치였다. 설우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채아빠!”

시계를 보고 있던 설우가 채하를 부르며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채하는 설우를 번쩍 들어 안고 주방으로 가 엄마에게 인사했다.

“채하 왔어?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됐으니까 저녁 먹자.”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리려고 했는데.”

“지원이가 점심때 맛있는 거 사 줬어. 얼른 손 씻고 와.”

엄마의 재촉에 채하가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그릇을 꺼내 닭과 전복을 옮겨 담는 모습을 보다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

“설우야, 설우도 아빠한테 가서 손 씻고 와.”

내 말에 설우가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흔들며 방으로 들어갔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채하는 잘 먹겠다는 말과 달리 비닐장갑을 끼고 살을 발라내느라 바빴다. 내 앞에 닭고기를 잔뜩 올려놓은 뒤에는 아기 참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설우의 입으로 고기를 날랐다.

“설우야, 맛있어?”

“웅. 마시쪄.”

설우는 입 안에 들어온 고기를 씹어 삼키자마자 바로 입을 벌렸다.

“설우, 혼자 먹을 수 있지? 아빠도 밥 먹어야 되니까 설우도 혼자 먹자.”

내 말에 설우가 자기 앞에 놓인 포크를 손에 들었다. 채하는 전복과 가위를 손에 들고 한입 크기로 자르고 있었다.

“채하, 너도 얼른 먹어. 다 식겠다.”

“네. 이것만 하고요.”

채하가 한입 크기로 잘린 전복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와 설우의 뒤치다꺼리를 끝낸 후에야 채하가 숟가락을 들었다.

“입에는 맞니?”

“네. 맛있어요. 어머니.”

나는 잘게 잘린 전복을 하나 집어 먹고는 전부 채하의 그릇 위로 옮겨 놓았다.

“왜? 전복 안 먹어?”

“응. 그냥 닭만 먹을래.”

“몸에 좋은 거니까 먹어.”

단호한 엄마의 말에 채하를 보며 입 모양으로 먹기 싫다고 말했다. 그러자 채하는 한 번 웃더니 접시 위의 전복을 전부 입 안으로 넣었다.

“대신 이거 다 먹어.”

전복을 전부 씹어 삼킨 채하가 내 접시 위로 닭 다리 하나를 더 올려놓았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살을 발라내 설우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고기가 오자 설우는 자동적으로 입을 벌렸다.

“설우야, 할머니가 해 줘서 더 맛있다. 그치?”

나에게 고정되어 있는 엄마와 채하의 시선 때문에 작게 찢은 닭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씹었다. 겨우 떡볶이 하나로 한밤중에 눈물을 흘리곤 했던 설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영 입맛이 없었다.

“엄마, 잘 먹었어.”

“제대로 먹어 놓지도 않고 뭘 잘 먹었대. 엄마가 다른 거 해 줄까?”

“아니야. 많이 먹었어.”

닭죽을 먹기 좋은 정도로 식혀 설우의 앞에 놓아 주었다. 엄마는 닭죽 한 그릇을 더 퍼 와 내 앞에 내밀었다.

“이거라도 먹어. 설우 때는 살도 많이 찌더니 이번에는 하나도 안 찐 것 같네.”

“나나는 나 닮아서 입이 짧나 봐.”

병원에 갈 때마다 체중 조절에 신경 쓰라는 소리를 들었던 설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체중이 거의 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감시 아래에 죽 한 그릇을 전부 비워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 채하의 옆에서 과일을 깎았다.

“설우야, 이거 할머니 드려.”

예쁘게 깎인 사과 하나를 포크로 찍어 설우의 손에 들려 주고 바나나 껍질을 까 한입 베어 물었다. 나나가 태명처럼 바나나를 좋아하는지 하루에 두세 개씩은 먹곤 했다.

“설우 한복 있지?”

“응. 추석 때 입히려고?”

엄마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채하가 한복을 꺼내 왔다. 설우에게 입혀 보니 저번 설에 산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바지 짧아!”

바지 밑단 아래로 설우의 발목이 쑥 드러나 있었다.

“우리 설우, 할머니가 한복 새로 사 줄게.”

“큰 걸로 사 줘. 예쁘게 입힌다고 딱 맞는 거 샀더니 금방 작아지네.”

채하가 설우의 한복을 벗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설우, 이제 자야지. 아빠랑 가서 씻고 와.”

엉덩이를 토닥였으나 설우는 씻기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바닥에 드러누운 설우를 채하가 번쩍 들어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봤지? 설우 고집 엄청 세. 한번 울면 잘 그치지도 않고.”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넌 안 그랬는 줄 알아?”

“난 말 잘 들었다며.”

내 말에 엄마가 코웃음을 쳤다.

“너 밥 안 먹는다고 드러누워서 떼쓰던 게 설우가 씻기 싫다고 드러눕는 거랑 똑같아.”

“난 그런 기억 없는데.”

졸리다는 핑계로 말꼬리를 돌렸다. 때마침 설우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우리 아가, 씻으니까 예쁘네.”

엄마가 설우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한참을 엄마에게 안겨 있던 설우는 엄마의 품을 빠져나와 내 무릎에 앉았다.

“설우, 졸려?”

내 물음에 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재우라는 엄마의 말에 설우를 안아 들었다.

“엄마도 얼른 자. 피곤하겠다.”

“그래. 잘 자.”

“응. 엄마도 잘 자. 설우도 할머니한테 인사해야지.”

나에게 안긴 설우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방으로 들어와 설우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니 금세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살짝 열린 문틈으로 맛있는 냄새가 흘러들어 왔다.

“아침 먹어?”

밖으로 나오니 식탁에 앉아 있는 엄마와 채하, 설우의 모습이 보였다.

“바나나는 간식으로 먹고 밥 먹어.”

“아침이라 입맛 없어. 이걸로도 충분해.”

엄마가 바나나 두 개로 아침을 해결하려는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엄마, 언제 갈 거야? 점심 먹고?”

“응. 점심 먹고 가야지.”

설우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채하가 엄마 차에 설우의 짐을 옮겨 놓았다.

“설우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설우와 떨어져 지낼 생각에 걱정이 끊이지 않는 나와 달리 채하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카 시트 설치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설우가 벌써부터 등에 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 앉아 있었다.

“설우야, 거기서 뭐 해?”

“함무니 집 가야 돼. 코코 기다려.”

“지금 안 갈 거야. 점심 먹고 갈 거니까 들어와.”

다시 거실 소파에 앉은 설우는 여전히 가방을 멘 채였다. 엄마는 그런 설우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었다.

“설우는 할머니 집에 빨리 가고 싶어?”

“웅. 코코가 기다려.”

내가 보기에 코코는 설우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설우는 그런 생각을 전혀 못 하는 것 같았다.

“설우야, 코코랑 하루에 한 번만 노는 거야. 알겠지?”

“왜에?”

“코코가 힘들어서 설우랑 놀기가 힘들대.”

“아빠가 어떻게 알아?”

설우의 물음에 채하의 말문이 막혔다.

“코코가 아빠한테 전화했대. 피곤해서 설우랑 오래 놀아 주기가 힘들다고.”

내가 끼어들자 채하는 한시름 놓은 눈치였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설우의 말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코코가 아빠한테 전화했어?”

“응. 했어.”

“그럼 코코가 설우한테는 왜 전화 안 해?”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하는 생각과 내 새끼가 똑똑한 것 같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어린애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어버버 하는 우리가 웃겼는지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보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설우가 이따 코코한테 가서 물어보자. 알겠지?”

“코코는 말 못 하는데.”

“그치? 코코는 말 못 하지? 근데 어른들은 코코가 무슨 말 하는지 들을 수 있어.”

그 말에 설우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점심 식사까지 마치고 설우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설우야,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아빠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알게떠.”

“여섯 밤 자고 아빠랑 나나랑 만나는 거야. 알겠지?”

채하에게 안겨 고개를 끄덕이는 설우의 볼에 입을 맞췄다. 채하가 설우를 카 시트에 태우고 벨트를 채웠다.

“엄마, 잘 가. 설우도 잘 가고.”

“너도 얼른 들어가서 쉬어. 채하도 쉬고.”

“네. 어머니. 조심해서 가세요.”

우리는 엄마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텅 빈 집 안에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을 때 채하가 무언가를 꺼내 왔다.

“뜨개질하려고?”

“응. 나나도 목도리랑 모자 만들어 줘야지.”

실과 바늘을 손에 든 채하를 보고 나도 배냇저고리 재료를 꺼내 왔다. 바늘에 실을 꿰어 배냇저고리를 꿰매다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지금 시험 전에 벼락치기 하는 것 같아.”

“태교도 벼락치기로 할까?”

채하가 배를 안고 있는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남은 한쪽 손으로 채하의 얼굴을 당겨 입을 맞췄다. 짧게 입술이 맞붙었다 떨어지고 그가 천천히 나를 뒤로 눕혔다. 등 뒤로 소파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티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만지기만 할게.”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천천히 배를 어루만지던 채하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가 가슴에 닿았다. 살짝 부풀어 오른 가슴을 만지던 손은 내 생각보다 빠르게 옷 밖으로 빠져나갔다. 채하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흐트러진 내 옷을 정리해 주었다.

“뽀뽀.”

나를 일으킨 채하가 입술을 내밀었다. 한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짚고 입을 맞추던 중 묵직한 것에 손이 닿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채하의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 화장실 다녀올게.”

시선을 눈치챈 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나는 그를 잡았다.

“내가 해 줄게.”

“뭘?”

채하의 반바지 밑단으로 손을 밀어 넣자 곧바로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채하가 내 손목을 잡았지만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발기한 성기를 살살 쓰다듬었다.

“지원아, 하지 마.”

“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래도 하지 마.”

그의 만류에도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결국 포기한 듯 바지를 끌어 내리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입으로는 안 돼.”

고개를 끄덕이고 손바닥 전체로 기둥을 감싸 쥔 뒤 움직이는 속도를 조금씩 높였다. 채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신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그런 채하의 모습을 보고 손아귀에 힘을 더 실었다.

“흐윽.”

짧은 신음과 함께 손을 타고 하얀 정액이 흘렀다. 가쁜 숨을 내쉰 채하가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내 손을 닦아 주었다.

“화장실 가서 손 씻자.”

그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을 틀고 온도를 확인한 채하가 내 손에 물을 묻히고 비누칠을 했다.

“나 씻고 나올 테니까 좀 쉬고 있어.”

그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고 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거실에 있던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니 때마침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집에 잘 도착했다는 엄마의 전화였다.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 앨범 속 설우의 사진을 보았다.

“뭐 보고 있어?”

샤워를 마치고 바지만 입은 채 밖으로 나온 그가 물었다.

“설우 사진. 떨어진 지 세 시간도 안 지났는데 벌써 보고 싶어.”

“며칠만 참자.”

채하는 나를 끌어안고 며칠만 참자며 다독였다.

“이제 설우가 없는 게 상상이 안 가.”

“나도 그래. 지원이 너랑 설우, 그리고 이제 나나까지.”

“근데 너 이렇게 바지만 입고 누워 있는 거 보니까 설우 태어나기 전 같아.”

항상 바지만 입고 자던 채하는 설우가 우리와 함께 자기 시작한 이후 잠옷을 제대로 갖춰 입기 시작했다.

“설우가 몇 살쯤 돼야 혼자 자려나.”

“설우가 아니라 나나가 언제부터 혼자 잘 수 있을지 생각해야지.”

채하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나나는 씩씩하게 혼자 잘 수 있지?”

진지한 목소리로 배 속 아기에게 묻고 있는 채하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아직 설우도 혼자 못 자는데 태어나지도 못한 아기한테 물어보는 게 말이 돼?”

“나나는 할 수 있지? 아빠는 나나 믿어.”

채하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나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대답하는 것처럼 발길질을 했다.

***

“지원아.”

“표정 풀어.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니라니까.”

“그래도 걱정된단 말이야.”

“걱정 그만하고 아기 태어났을 때 사진 잘 찍어 줘. 설우 때처럼 흔들리게 찍지 말고.”

채하는 지난번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두 번째여서 그런지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다만 걱정인 것은 채하가 갓 태어난 나나의 사진을 제대로 못 찍을 듯하다는 점뿐이었다.

“채하야, 이번엔 나한테 말해 줄 비밀 없어?”

“비밀?”

“응. 설우 낳으러 가기 전엔 네 비밀 다 말해 줬잖아. 이번에도 나한테 숨기는 거 있으면 다 말해.”

내 말에 채하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입을 열었어도 어두를 떼기가 쉽지 않은지 계속해서 뜸만 들였다. 나는 그를 재촉했다. 채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귓속말로 비밀을 고백했다. 비밀 한 가지를 더 알게 된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아기 사진이나 잘 찍어 줘.”

“알았어. 사진 잘 찍어 놓을게.”

나는 그의 비밀을 간직한 채 수술실로 들어갔다.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마지막으로 본 채하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등 뒤로 차가운 수술대가 느껴지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세상이 온통 뿌옇게 보였다.

“지원아, 괜찮아?”

설우 때와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채하가 보였다.

“…나나는?”

“나나도 건강하대.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 다 있고 너무 예쁘게 생겼어.”

“예뻐?”

“응. 지원이 너랑 똑같이 생겼어.”

나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자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도 설우 때처럼 아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진을 볼 생각이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채하의 손을 잡고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신생아실까지의 짧은 거리는 몸 상태 때문에 전혀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후, 얼마나 더 가야 돼?”

“딱 열 걸음만 더 걸으면 돼.”

채하가 열 걸음이라며 나를 달랬지만 복도 끝 신생아실까지는 최소 스무 걸음은 되어 보였다. 나나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발을 움직였다.

“나나야.”

손을 씻고 나나를 품에 안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내가 낳은 아이와 처음 만나는 순간은 몇 번을 겪어도 감동적일 것 같았다. 아기를 안고 있는 나를 보는 채하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였다. 짧은 면회 시간이 끝나고 함께 병실로 돌아가는 우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넌 왜 울어. 나나랑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지원이 네가 나나 안고 있는 거 보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

눈물을 닦고 채하에게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다.

“여기.”

갓 태어난 나나의 사진을 보자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울보 채하와 함께 산 날이 늘어 갈수록 내 눈물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았다.

“지원아, 울지 마. 아기 낳고 울면 눈 나빠진대.”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근데 나나 보니까 눈물이 안 멈춰.”

채하가 티슈로 내 눈가를 살살 눌러 눈물을 닦아 냈다.

“설우가 나나 보면 좋아하겠지?”

“응. 어제 통화했을 때 동생 태어났다고 하니까 좋아했어.”

“나도 설우랑 통화하고 싶은데 설우 목소리 들으면 또 눈물 날 것 같아.”

설우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 불안해하는 나와 달리 설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다음 날 오전, 설우가 어머니들과 함께 병원으로 왔다.

“설우야!”

나에게 달려오는 설우를 보고 팔을 벌렸지만 설우는 내 품에 안기지 못했다.

“설우야, 아빠한테 뛰어가면 안 돼.”

채하가 설우를 중간에서 낚아챘다. 그러고는 침대에 앉아 있는 내 옆에 설우를 얌전히 앉혔다. 내가 설우를 끌어안자 설우도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있었어?”

“응. 잘 들었어.”

“아빠가 설우 많이 많이 보고 싶었어.”

“설우도 보고 싶었어.”

뽀뽀를 해 달라는 말에 설우가 짧게 입을 맞추고 빨리 나나를 보러 가자며 재촉했다.

“설우, 동생 보러 가고 싶어?”

“응. 빨리빨리.”

채하는 내 손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 설우를 안았다. 채하에게 안긴 설우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설우야, 저기 봐 봐. 저기 자고 있는 아기가 설우 동생이야.”

설우는 채하에게 안긴 채 신생아실 유리에 바싹 붙어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우리 설우가 동생한테 눈을 못 떼네.”

“그렇게 좋아?”

할머니들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이고 시선은 설아에게 고정했다.

“설우야, 동생 예쁘지?”

“응. 예뻐. 설우랑 아가랑 같이 살아?”

“지금 바로는 아니고 열 밤 넘게 자면 설우랑 설아랑 같이 사는 거야.”

내 말에 설우는 아쉬운 얼굴이었다.

“설아랑 지원이랑 많이 닮았죠?”

“지원이 갓난아기 때랑 똑같이 생겼어.”

“맞아. 엄마도 지원이 아기 때 봤는데 설아랑 똑같았어.”

병실로 돌아온 나는 설우와 함께 누웠다. 내 팔을 베고 누운 설우는 꼼지락거리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채하는 어머니들과 설아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엄마는 지원이 아기 때 봤어?”

“당연히 봤지. 너희 설우보다 조금 어릴 때였나? 그때 같이 논 적도 있었어.”

“맞아, 맞아. 그때 지원이가 채하가 형인 줄 알고 형이라고 불렀잖아.”

어머니들의 말을 들은 채하는 그 시절의 기억이 없는 것을 퍽 억울해했다. 함께 점심을 먹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지만 설우가 채하에게 안겨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우야, 할머니랑 가야지.”

“시러. 아빠랑 있을래.”

“오늘은 할머니랑 가고 세 밤 자고 다시 오자.”

삼 일 후에 다시 만나자는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결국 채하가 설우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 설우 괜히 데리고 왔나 보다. 집에 있을 땐 너희 안 찾더니 오늘 보니까 안 떨어지려고 하네.”

“설우 집에 보내지 말고 우리가 데리고 있을까?”

“일단 오늘은 데리고 가 보고 정 안 되면 엄마가 다시 설우 데려올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채하와 설우가 병실로 들어왔다. 채하에게 안겨 들어온 설우의 손에는 빨간색 풍선 하나와 작은 토끼 인형이 들려 있었다.

“함무니, 가자.”

빨리 가자고 할머니들을 재촉하는 설우와 그 손에 들린 것들을 보자 어떻게 설득을 했는지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 그래. 얼른 가자.”

어머니들은 설우의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설우와 어머니들이 돌아가고 나와 채하만 남자 병실이 조용해졌다.

“설우 선물 공세로 설득한 거야?”

“우리만의 비밀이야.”

“나도 알려 줘. 수술하러 들어가기 전에는 다른 비밀도 술술 말해 주더니 왜 지금은 말 안 해 줘?”

“안 돼. 비밀이야.”

“근데 그 이후로 나 때문에 몽정한 적 있어?”

내 물음에 채하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채하를 보고 다시 한번 물었다.

“있어? 지금 반응 보니까 있는 것 같은데.”

채하의 반응을 보니 내 예상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기야, 형이라고 한 번만 불러 주면 안 돼?”

“형? 갑자기?”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채하가 뜬금없이 형 소리를 꺼냈다. 몽정 이야기로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인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응. 아까 어머니들 얘기 들으니까 형이라고 부르면 어떨지 궁금해졌어.”

“형이라고 부르는 건 채하 네가 해야지. 따지고 보면 내가 생일도 더 빠른데.”

“어릴 때는 나한테 형이라고 불렀다며.”

“그렇게 형 소리가 듣고 싶으셨어요, 채하 형아?”

선심 쓰듯 불러 준 형 소리에 기분이 좋은지 한 번 더 해 달라며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입을 꽉 다물고 텔레비전만 쳐다보았다.

***

“우리 설아, 맘마 먹자.”

상의 단추를 풀고 설아를 안았다. 이제 막 50일을 넘긴 아기는 젖 냄새를 맡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설아야, 다 먹었어?”

설아는 나를 닮아서인지 입이 짧았다. 이 시기의 설우가 엄청난 먹성을 자랑했던 것과 달리 설아는 도통 먹지를 않았다.

“설아야, 잘 먹어야 오빠처럼 쑥쑥 크지.”

채하에게 설아를 안겨 주고 단추를 도로 잠갔다. 채하는 설우를 재울 때처럼 설아를 가슴 위에 올리고 등을 토닥였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얇은 담요를 끌어와 조심스럽게 덮어 주었다.

“설우도 아기 때 작아서 만지기 무서웠는데 설아는 더 작아서 진짜 무서워.”

“그러니까. 난 설아도 설우처럼 크게 태어날 줄 알았는데.”

태어날 당시 4킬로그램에 가까웠던 설우와 달리 설아는 3킬로그램도 채 되지 않는 무게로 태어났다.

“채하야, 설아도 이제 분유 먹일까?”

잠든 설아를 아기 침대에 눕히고 채하의 팔을 베고 누워 있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수유하는 거 많이 힘들어?”

“아니. 엄청 힘들지는 않은데 그냥 분유 먹여도 괜찮을 것 같아서. 분유 먹이면 얼마나 먹었는지 확인도 가능하고.”

“그럼 분유 먹이자.”

채하는 이제 자기가 설아의 맘마를 먹일 수 있다며 좋아했다. 분유 수유를 결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 젖몸살이었다.

“지원아, 차가워도 조금만 참아.”

채하는 가슴 위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계속해서 물수건을 갈아 주던 그가 괜찮냐고 물었다.

“아니. 너무 아파.”

끙끙 앓는 나를 보던 채하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는 것 같더니 가슴을 덮은 수건을 걷어 냈다. 그러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뭐 하려고?”

“가슴 마사지.”

손에 힘을 주자 비명이 나올 정도로 통증이 몰려왔다.

“아악! 그만, 너무 아파.”

“이거 안 하면 더 아프대. 조금만 참아 봐.”

애원에도 채하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고통을 참고 있을 때 가슴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그것은 채하의 입술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까워서.”

그는 한 방울도 흘리기 싫다는 듯 집요하게 가슴을 빨아 댔다. 설아에게 수유를 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하, 하지 마.”

가슴을 빨다가 뾰족하게 세운 혀로 유두 끝을 찔러 대자 발끝으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에서 더 나오는 것이 없는지 채하의 입술이 반대쪽으로 옮겨 갔다.

“아흣, 그, 그만. 으응.”

채하의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완전히 내 위에 올라탄 채하가 양손으로 모유를 빨아낸 쪽 가슴을 넓게 쥐고 느리지만 강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옆에 놓인 수건으로 가슴을 대충 훑어낸 채하가 방금처럼 입술을 가져다 댔다.

“흐윽, 아, 아읏.”

“지원아, 소리 크게 내면 밖에 다 들려.”

거실에서 낮잠을 자는 설아가 깰 거라고 덧붙이는 채하의 말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양손으로 입을 가리니 아까처럼 채하를 밀어낼 수 없었다. 자신의 행동을 말리지 못한다는 걸 눈치챈 그가 내 잠옷 단추를 전부 풀어냈다. 몸을 가리고 있던 옷은 이제 그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지원아, 여기는 왜 이래?”

채하의 손이 내 속옷 위에 닿았다. 아까의 자극으로 내 성기는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발기해 있었다. 나머지 한쪽 가슴마저 빨아 대는 채하 때문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막은 손에 힘을 줘야만 했다.

“채하야아, 제발. 흐읏. 읏.”

가슴에서 더 나오는 것이 없자 그제야 입술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내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는 대신 속옷을 끌어 내렸다.

“내가 이것까지 해결해 줄게.”

말을 마친 채하가 꼿꼿하게 서 있는 내 성기를 입에 물었다. 출산 이후 처음 겪는 자극에 예민해진 몸은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만 같았다. 채하는 내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게 허벅지를 잡고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아, 으, 으읍, 흐, 아, 아응.”

귀두를 넓게 핥고 그 둘레를 따라 귀두 아래 움푹 팬 곳을 혀끝으로 살살 건드리니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아까처럼 그의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이번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흐으, 으, 으응.”

입 안 가득 내 성기를 머금은 채하의 움직임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정해 버렸다. 그러고는 빠르게 몰려오는 수치심과 피로에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지원아, 옷 갈아입자.”

“…….”

“지원아.”

채하가 천천히 이불을 걷어 내고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몸을 다 닦고 옷을 입혀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나는 또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지원아.”

채하가 이름을 불렀지만 등을 돌렸다. 젖몸살을 해결해준다던 그의 손은 결국 내가 위아래로 하얀 액체를 뿜어내게 만들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죽고 싶었다.

“지원아아.”

채하는 이불로 온몸을 감싼 나를 끌어안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애교에 약하다는 것을 아는 채하다운 행동이었다.

“화 풀어, 자기야. 내가 잘못했어.”

“우리 앞으로 손만 잡고 자자.”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손만 잡고 자?”

“내 마음이야.”

당연히 손만 잡고 잘 생각은 없었지만 채하는 한동안 내 기분을 풀어 주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

“설우야, 얼른 가방 메야지.”

“설우 어린이집 안 가.”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 몇 달째 매일 빠지지 않는 일과였다. 설우는 오늘도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며 설아의 옆에 드러누웠다.

“왜 안가? 어린이집 가야지.”

“설아랑 놀 거야.”

“설아랑 노는 건 어린이집 갔다 와서도 할 수 있잖아. 빨리 일어나.”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설우를 볼 때마다 처음 조카가 생겼을 때의 채하를 보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설우를 어르고 달래 어린이집에 보내고 온 채하는 급속도로 피곤해진 얼굴이었다.

“누굴 닮아서 고집이 저렇게 센지 모르겠어.”

손을 씻고 설아를 안은 채하가 한숨을 쉬는 것처럼 말했다. 설우가 누구를 닮은 건지 모르겠다는 말에 웃음만 나왔다.

“누굴 닮긴. 당연히 채하 너 닮았지. 너 고등학교 때 집에서 아기 본다고 학교 안 간다고하던 거랑 지금 설우랑 똑같아.”

내 말에 채하가 한참을 웃었다. 내게 안겨 있던 설아는 채하가 웃자 따라 웃었다.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채하가 나와 설아에게 번갈아 가며 입을 맞췄다. 입맞춤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우리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

“압빠!”

“설우, 설아, 뛰지 마. 넘어지면 아야 해.”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끝을 알 수 없는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이유 하나로 들떠 있었던 수학여행에서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술을 마시고 우리는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지원이는 기절하듯 내게 안겨 눈을 감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던 첫 입맞춤이었지만 다음 날 내 품에서 눈을 뜬 지원이는 전혀 기억을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다를 보며 연신 감탄만 해 댔다.

그 이후로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오랜 짝사랑의 상대는 지금 우리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하야, 빨리 와!”

“아빠, 빨리!”

우리를 닮은 아이들과 함께 나를 부르는 지원이의 모습을 보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나는 지원이와 아이들에게 달려가 품에 안고 입을 맞췄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랄 정도로 완벽하게 행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