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연애사 3권
10
채하의 생일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을 때 내 정신은 온통 생일 준비에 쏠려 있었다. 며칠 전부터 선물을 고민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채하가 내 생일에 시계를 선물했으니 나도 시계를 선물할까 했다. 하지만 채하는 시계를 비롯한 액세서리를 자주 착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피치야, 아니, 설우야. 아빠가 뭘 받으면 좋아할까?”
아직은 피치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설우에게도 물어보았지만 자고 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선물 고민은 의외로 빠르게 끝났다. 그날 저녁, 퇴근한 채하의 모습을 보자 무엇을 선물해야 할지 정할 수 있었다.
채하의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은 유독 날씨가 추웠다. 두꺼운 옷과 목도리로 온몸을 칭칭 감고 집을 나섰다. 백화점에 온 나는 제일 먼저 보이는 남성복 매장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네. 겨울 코트요.”
직원이 나를 코트가 걸려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채하에게 어울릴 것 같은 코트는 없었다. 백화점에 있는 거의 모든 남성복 매장을 둘러보고서야 겨우 마음에 드는 코트 한 벌을 골랐다.
“이걸로 주세요.”
“네.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더 필요한 건 없냐는 물음에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매장 입구에 서 있는 마네킹이 입은 크림색 니트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도 주세요. 코트랑 같은 사이즈로.”
매장을 나오는 내 손에 들린 쇼핑백이 묵직했다.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가지 않고 아기 용품 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채하 선물을 산 김에 피치의 옷도 한 벌 사기로 했다.
“어서 오세요.”
아기 옷을 찾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신생아 우주복을 보여 달라고 했다. 내 말에 직원이 다양한 디자인의 우주복을 꺼내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추천해 주는 것마다 퇴짜를 놓았다.
“이건 어떠세요?”
“너무 귀엽다.”
“그렇죠? 이게 귀여워서 인기가 많아요.”
직원이 마지막으로 보여 준 것은 모자에 곰돌이 귀가 달린 갈색 우주복이었다. 채하를 닮은 갓난아기가 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상상하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저걸로 주세요.”
“네. 여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이 새 옷을 꺼내러 창고로 들어간 사이 의자에 앉아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핸드폰 배경 화면의 디데이 앱이 피치를 만날 날이 3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피치와의 첫 만남을 상상하고 있을 때 직원이 창고에서 돌아왔다.
“예쁜 아기 낳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직원의 인사를 받으면서 매장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 손에는 쇼핑백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피치의 방으로 들어가 벽장에 채하 선물을 숨겼다. 피치의 옷은 손빨래를 해 건조대에 널어 두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채하의 생일이 되었다. 짧은 외출이었지만 어제의 여파로 출근하는 채하를 배웅하지도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들어 버렸다. 눈을 뜨자마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야ㅜㅜ 왜 안 깨우고 갔어ㅜㅜ
오전 11:13
채하 : 너무 잘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 그래도 지원이 입술에 뽀뽀하고 출근했어ㅎㅎ
오전 11:15
마지막 출근이니까 일 열심히 하고 이따가 봐
오전 11:16
채하 : 웅♥
오전 11:17
핸드폰을 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늦은 아침 식사를 대충 해결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 검은 봉지에 숨겨 둔 것들을 꺼냈다. 채하의 생일상을 차려 주기 위해 미리 준비한 재료였다.
“피치, 아빠 생일 파티 준비하자.”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를 보고 미역부터 물에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소고기를 꺼내 들기름을 두르고 볶았다. 고소한 냄새를 내면서 고기가 점점 갈색으로 익어 갔다.
“미역이 너무 많은가?”
미역국을 처음 끓이다 보니 양 조절에 실패해 불은 미역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가위로 미역을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냄비에 담아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국물 색이 어느 정도 우러났을 때 맛을 보니 엄마가 끓여 준 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
오래 끓이면 맛있다는 말에 불을 약하게 줄이고 피치의 방으로 들어갔다. 벽장 안에는 채하의 생일 선물이 내가 넣어 둔 모습 그대로 들어 있었다. 선물을 들고 밖으로 나오니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케이크 배달 왔습니다.”
며칠 전 주문한 채하의 생일 케이크였다. 주문한 대로 케이크가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고 바로 냉장고에 넣었다. 가스 불을 끄고 미역국 냄비를 내렸다. 시계를 보자 채하가 퇴근하기까지 꽤 남아 있었다.
“피치, 우리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아빠 생일 파티 준비하자.”
퇴근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조금 쉬기로 했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결국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핸드폰 알람을 맞춰 둔 채 잠을 청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피곤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억지로 잠을 떨쳐 냈다. 냉장고에 넣어 둔 밀 키트를 꺼내 조리법을 하나하나 읽었다. 조리법에 따라 요리 순서를 정한 후 포장을 뜯어 요리를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채하의 퇴근 시간에 맞춰 음식 준비를 끝내고 예쁜 접시에 하나씩 옮겨 담았다.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 초를 꽂고 손에 폭죽을 들자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들어온 채하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폭죽의 실을 잡고 터트릴 준비를 했다.
“생일 축하해!”
실을 잡아당겨 폭죽을 터트렸다. 채하는 식탁 위를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그를 식탁에 앉히고 촛불에 불을 붙였다. 케이크 위에는 ‘채하야, 생일 축하해. 사랑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채하는 여전히 놀란 얼굴을 했다.
“빨리 소원 빌고 촛불 꺼.”
내 말에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잠시 후 눈을 뜬 채하가 후, 하고 촛불을 껐다.
“무슨 소원 빌었어?”
“지원이랑 설우랑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했어.”
우리는 짧게 입을 맞추고 식사를 시작했다. 채하는 내가 밀 키트를 사용한 줄도 모르고 한 입 먹을 때마다 감탄을 내뱉었다. 나는 채하가 계속 오해하도록 두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선물까지 본 채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마음에 들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바꿔 오자.”
“아니야. 너무 마음에 들어.”
“그럼 한번 입어 봐.”
채하는 크림색 니트로 갈아입고 그 위에 코트를 걸쳤다.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기장의 코트를 입은 채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근사했다. 좋아하는 채하를 보자 몰래 준비한 채하의 생일 파티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정이 몇 분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제 몇 분 후면 채하의 생일이 끝나고 우리는 27살이 되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하루가 더 지나면 부모가 된다는 것도 꿈같았다.
“올해 진짜 별일이 다 있었네. 그치?”
“난 지원이 너랑 결혼한 것도 배 속에 우리 아기가 있는 것도 아직도 꿈같아.”
“꿈 아닌데.”
채하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꿈 아니지?” 하고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맞췄다. 서로의 입술을 파고들던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입을 떼지 않았다.
“이제 자러 갈까?”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
천천히 고개를 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티셔츠 하나만 입어 드러난 내 다리를 타고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리를 타고 흐르는 액체 때문에 신고 있던 연보라색 양말이 진한 보라색으로 변했다. 내 허벅지에서 발목으로 천천히 시선을 내리는 채하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채하야, 병원 가자.”
“어? 어, 병원.”
병원에 가자는 말에도 채하의 시선은 젖어 버린 양말에 고정되어 있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채하는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바로 뒤따라 들어왔다.
“채하야, 양말 좀 꺼내 줘.”
갈아입을 옷을 찾으면서 채하에게 양말을 찾아 달라고 했다. 양말을 찾은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양말 신겨 줘.”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 룸에서 나와 침대에 앉았다. 나를 따라 나온 채하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내 발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리고 양말을 신겨 주었다.
“채하, 너도 빨리 옷 입어.”
갑작스럽게 터진 양수를 본 채하는 나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지 않으면 동작을 정지할 정도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는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문단속을 했다. 주방 창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돌릴 때 채하가 방에서 나왔다. 방에서 나오는 그의 손에는 며칠 전 미리 싸 둔 출산 가방이 들려 있었다.
“지원아, 빨리 가자.”
“잠깐만 기다려 봐. 창문 다 잠갔고, 가스 밸브도 잠갔고. 뭐 빠트린 거 없겠지?”
“지금 그게 중요해? 빨리 병원 가야지.”
금방이라도 애가 나올 것처럼 나를 재촉했다. 나는 채하를 달래며 다시 한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피치 방의 문을 열고 방 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채하야, 가자.”
집을 나서면서 병원에 전화를 걸어 양수가 터져 지금 가고 있다고 전했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마저 답답해하며 다리를 덜덜 떨어 대던 채하는 마음이 급한지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속도 좀 줄여. 천천히 가도 돼.”
“아프진 않아?”
“아직 안 아파. 그러니까 천천히 가.”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한 후에야 속도계의 바늘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1월 1일 자정을 조금 지난 시간, 병원으로 가는 도로 위는 텅텅 비어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입원 수속을 밟으면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간호사의 설명을 들었다. 병실에 단둘이 남게 되자 이제 곧 피치를 만난다는 것이 실감 났다.
“피치, 뭐가 그렇게 급했어. 아직 아빠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됐는데.”
아직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여유를 가진 나와 다르게 채하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 새벽 1시가 막 넘었는데 수술 시간인 아침 9시까지 저 상태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애는 내가 낳는데 왜 이렇게 긴장했어. 누가 보면 네가 낳는 줄 알겠다.”
“마음 같아선 내가 대신 낳아 주고 싶어.”
내 손을 잡고 있는 채하의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다. 티슈를 뽑아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니거든? 긴장 풀어.”
“지원아, 나는 너 없으면 못 살아.”
“갑자기 그 소리가 왜 나와?”
“난 의사 선생님이 너랑 피치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널 고를 거야.”
채하의 머릿속에선 이미 비극적인 결말의 소설 한 편이 완성된 것 같았다. 나는 성의 없이 “그래, 그래. 나부터 살려 달라고 해.” 하며 그를 달랬다.
“집에는 이따 아침에 연락드리자. 지금 전화하면 우리 아빠 걱정하느라 잠도 못 잘 거야.”
“응. 알겠어. 얼른 자.”
채하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고 나를 토닥였다. 채하를 달래려 담담한 척했지만 처음 겪어 보는 일이 무서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채하, 너도 얼른 자.”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내가 잠들 때까지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큰일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채하야.”
“응?”
“우리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아마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할 수 있을 거야.”
잔뜩 긴장한 목소리와 다르게 채하의 말에는 단단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천천히 나를 감싸는 페로몬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침이었지만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아 바깥은 어슴푸레했다.
“일어났어?”
채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듯했다.
“한숨도 안 잤어?”
“아니야, 나도 방금 일어났어.”
잔뜩 충혈된 눈을 보면 누구라도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수술 시간까지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여러 번 들리고 “여보세요?”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자고 있었네?”
- 지금 아빠랑 해 뜨는 거 보러 왔어.
“거기는 눈 안 와? 여긴 눈 오는데.”
- 응. 여기는 안 와. 아까 일기 예보 보니까 이따 오후에나 온다더라.
“엄마, 나 아기 낳으러 왔어.”
- 뭐? 내일 수술한다며?
날씨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아기를 낳으러 왔다고 하자 당연하게도 놀란 목소리가 돌아왔다.
“새벽에 양수 터져서 이따 9시에 수술해.”
- 엄마가 지금 갈게.
“해 뜨는 거 보고 천천히 와. 아니면 눈 오니까 내일 와도 되고.”
내일 와도 된다는 말에도 조금만 기다리라며 전화를 끊었다. 채하도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지금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양치와 세수를 하고 나왔다. 다시 침대에 눕자 채하가 옆에 와서 앉았다.
“지원아, 나 너무 긴장돼.”
“피치 탯줄 잘라 줄 수 있겠어? 못 한다고 얘기할까?”
채하는 수술을 앞둔 나보다 더 떨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긴장을 했어도 피치의 탯줄은 직접 잘라 주고 싶은지 고개를 저었다.
“지원아, 있잖아. 네가 내 첫사랑이야.”
“어…. 그래? 나도 그런 것 같아. 근데 지금 이 상황에 할 얘기는 아니지 않아?”
“그리고 첫눈에 반한 거 맞아.”
“전에 물어봤을 땐 말 안 하더니 뜬금없이 지금 말하는 이유가 뭐야?”
“나도 모르겠어. 이제 지원이 너한테 비밀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 나한테 비밀로 한 거 있으면 빨리 다 말해.”
대학 시절 내가 연애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까지 듣고 나자 채하가 나를 정말 좋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고백을 경청하다 보니 어느새 수술실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잘하고 와.”
“응. 울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채하에게 손을 흔들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천천히 닫히는 수술실 문 사이로 걱정 어린 채하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곤 차가운 수술대에 누운 것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가가 붉게 짓무른 채하의 얼굴이 보였다.
“지원아, 괜찮아?”
머리가 핑핑 돌고 몸에 감각이 둔하게 느껴졌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몸 상태보다 피치가 어떤지 궁금했다. 머릿속에 내 걱정만 가득한 채하는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들썩였다.
“아기. 봤어?”
채하는 내가 아기를 봤냐고 묻자 그제야 피치 이야기를 했다.
“응. 손가락, 발가락 10개씩 다 있고 너무 예뻐.”
“누구 닮았어?”
“모르겠어. 나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지원이 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사진 보여 줄까?” 하고 묻는 채하에게 고개를 저었다. 사진보단 실물을 보고 싶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회복실에서 병실로 옮겨졌다. 병실로 돌아와 배 위에 손을 얹어 보았지만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통증이 없었다면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채하야, 나 진짜 아기 낳은 거 맞아? 아직 배가 나와 있어서 그런가 꿈꾼 것 같아.”
“진짜야. 내가 탯줄도 잘라 줬어.”
채하는 피치와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 열성적으로 이야기했다. 갓 태어난 피치는 울다가 채하가 태명을 불러 주자 울음을 뚝 그쳤다고 했다. 여전히 멍한 정신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부모님들이 병원에 도착하셨다. 나는 침대에 축 늘어진 채 고개만 겨우 돌려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몸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내 상태는 괜찮지 않았다. 부모님은 걱정스러워하며 나를 살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피치를 보고 오라는 말로 부모님들을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나도 피치 보러 가고 싶어.”
마음 같아서는 벌써 신생아실로 달려갔겠지만 내 몸은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징징거리는 사이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다시 병실 문이 열렸다.
“엄마, 아기 보고 왔어?”
“응. 채하랑 똑 닮았더라.”
“맞아. 채하 태어났을 때랑 똑같이 생겼어.”
채하 판박이라는 소리를 듣자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우리 아기가 신생아실 아기들 중에 제일 크더라.”
“정말? 검진 때도 평균보다 크다고 했는데.”
“지원이 너는 태어났을 때 진짜 작았는데. 덩치도 채하 닮았나 봐.”
채하의 얼굴뿐 아니라 평균 이상인 체격까지 닮은 모양이었다. 설우가 우리 중 누구를 닮았는지 이야기하던 부모님들은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푹 쉬어. 며칠 있다가 다시 올게.”
“응. 조심히 가.”
나는 손을 흔들며 부모님을 배웅했다. 시끌시끌했던 병실 안이 나와 채하만 남으니 조용해졌다.
“지원아, 앞으로 둘째 낳자고 절대 안 할게.”
수술 직후 아파하는 내 모습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원래도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울 생각이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하야, 우리 앞으로 1월 1일에 떡국 대신 미역국 먹겠다.”
“그러게. 그 전날도 미역국 먹을 텐데.”
채하의 생일은 12월 31일, 설우의 생일은 1월 1일. 단 하루 차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하루 일찍 낳을걸. 생일상 한 번에 차리게.”
농담을 하면서 웃으니 수술 부위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배를 부여잡고 낑낑거렸다. 방금까지 함께 웃던 채하는 내가 아파하자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굳혔다.
“많이 아프지?”
“그래도 아까보단 덜 아파.”
어쨌든 아프다는 말에 채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채하가 울먹일 때 간호사가 아기 침대를 끌고 병실로 들어왔다. 간호사는 누워 있는 내 품에 아기를 안겨 주고 20분 후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피치.”
태명을 부르자 피치는 눈을 떴다. 내 눈으로 피치를 보자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만약 끝까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더래도 얼굴을 보면 바로 아빠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피치는 채하를 쏙 빼닮았다.
“어떡해. 너무 예뻐. 채하 너랑 너무 똑같이 생겼어.”
태어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빨갛고 쪼글쪼글했지만 그 자체로도 사랑스러웠다. 채하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피치를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이 가득했다. 피치를 보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기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 우리 설우.”
<‘동상이몽 연애사’ 끝, 외전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