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다들 줄 서.”
친구들은 내가 앉은 책상 앞에 한 줄로 서기 시작했다. 손에는 연분홍색 표지의 소설책이 한 권씩 들려 있었다. 채하의 손길이 닿은 표지는 항상 어두운색이었지만 이번에는 밝은색이었다. 나는 가장 앞에 서 있는 선준이의 손에서 책을 받아 맨 앞장을 펼쳤다.
“성함이요.”
“이선준이요. 이름 뒤에 하트 그려 주세요.”
“하트는 맨 뒤에 서 있는 분한테 허락받아 오세요.”
하트를 그려 달라는 말에 채하가 도끼눈을 뜨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던 매직의 뚜껑을 열어 ‘이선준 님’이라고 쓰고 이름 뒤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작가님, 팬이에요.”
“아, 진짜요?”
이름 밑에 사인을 하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책이 나올 때마다 우리끼리 하는 사인회 놀이였다.
“네. 진짜요. ‘부자 되세요’라고 적어 주세요.”
선준이의 말에 ‘로또 사세요’라고 적어 넣고 책 표지를 덮어 선준이에게 돌려주었다. “다음!” 하고 외치자 윤호가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성함이요.”
“우주 최고 미남 김윤호요.”
윤호의 말에 피식 웃고 ‘그냥 김윤호 님’으로 적어 넣었다.
“팬서비스가 날이 갈수록 구려져.”
성의 없이 사인을 하는 나를 보고 말했다. 사인 밑으로 ‘행복하세요^^’까지 쓰고 펜 뚜껑을 닫았다.
“악수해 드릴까요?”
“안 돼!”
내 물음에 대답한 것은 윤호가 아닌 채하였다. 도끼눈을 뜨고 있는 채하를 보고 윤호가 악수는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윤호의 다음 차례는 희주였다.
“빨리빨리 해. 설채하가 자꾸 째려봐서 뒤통수 뚫리겠다.”
그 말에 빠르게 이름과 사인,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희주가 책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채하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앞에 섰다.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은 그가 무릎을 굽혀 나를 올려다보았다.
“성함이요.”
“설채하요.”
‘설채하 님’ 하고 적자 채하는 ‘이름 뒤에 하트 그려 주세요’라고 덧붙였다. 나는 채하의 이름 뒤로 하트 세 개를 그렸다. 그리고 채하의 이름 앞에 ‘사랑하는’이라고 추가로 써넣었다.
사랑하는 설채하 님♡♡♡
완성된 문구가 마음에 드는지 채하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이름 밑에 사인을 그려 넣고 무슨 메시지를 써 줄지 물었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써 주세요.”
“하고 싶은 말?”
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하고 있을 때 채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한 손으로 책을 가리고 펜을 잡은 손을 움직였다. ‘사랑해 채하야. 평생 행복하게 살자’. 짧은 문장을 쓰고 마침표를 찍어 표지를 덮었다.
“혼자 있을 때 확인하세요.”
채하에게 책을 돌려주며 말했다. 채하는 새끼손가락까지 걸면서 혼자 있을 때 보겠다고 약속했다. 친구들의 사무실에서 열린 사인회 놀이를 끝내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지원아, 내일 베이비 페어 갈까?”
집에 돌아온 채하가 베이비 페어 이야기를 꺼냈다.
“베이비 페어? 그게 뭔데?”
“아기용품 같은 거 팔고 그런 곳인가 봐.”
지금 우리 집에는 아기용품이 거의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아기 침대와 신발 한 켤레, 손 싸개, 발싸개 한 세트뿐이었다.
“그럼 가서 필요한 거 사 올까?”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사야 할 물건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리스트의 가장 위에 유아차와 아기 띠, 젖병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또 뭐 필요하지?”
육아 경험이 없는 우리 둘의 발상은 저 세 가지가 한계였다.
“아, 카 시트!”
곰곰이 생각하다가 카 시트를 외치는 채하의 말에 젖병 밑에 카 시트를 적었다. 이제 채하는 핸드폰을 들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채하가 말하는 것을 전부 받아 적었다. 종이가 글자로 빽빽해지고 나서야 펜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많이 필요해?”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는 것도 있어서 다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정보가 부족하니 내일 바로 필요한 물건을 사기보단 구경에 조금 더 무게를 두기로 했다.
잠들기 전 피치에게 동화책을 읽어 줄 생각인지 채하가 손에 책을 들고 왔다.
“새로 사 왔어?”
“응. 어제 샀는데 어제는 자기가 바로 자길래 깰까 봐 안 읽었지.”
“<홍길동전>은? 그건 안 읽어 줄 거야?”
“응. 안 읽어. 그거 버릴 거야.”
계속 “왜?” 하고 묻자 결국 책을 내려놓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누가 봐도 삐친 모습이었다.
“이제 우리 피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 읽어 줘.”
“싫어!”
단호한 채하의 태도에 일부러 불쌍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냈다.
“채하야, 삐쳤어? 나는 장난이었는데….”
불쌍한 목소리에도 반응이 없던 채하는 “미안….” 하고 울먹이는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는 척 어깨를 조금씩 들썩였다.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에 그는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이불을 걷어 내고 나를 끌어당겼다.
“재밌어?”
품에 안긴 내가 킥킥거리자 채하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웃었다. 내가 웃자 피치도 기분이 좋은지 꼼지락거리던 배 속 움직임이 점점 거세졌다. 나와 딱 붙어 있는 채하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발길질이었다.
“피치가 항상 이 정도로 차는 거야?”
간접적이었지만 피치의 발차기를 제대로 느껴 본 게 처음인 채하는 놀란 얼굴이었다.
“계속 이 정도는 아니고 가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우리 피치, 축구 선수 시킬까?” 하고 묻는 나와는 달리 여전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피치, 세게 차지 마. 아빠 아파.”
채하가 배에 대고 속삭였다.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웃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피치에게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제 만삭에 가까워지는 배 때문에 채하의 옷을 빌려 입었다.
“소매 접어 줘.”
검은색 목폴라 니트를 입고 양팔을 내밀었다. 채하가 내 손이 옷 밖으로 나오도록 소매를 접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거울 앞에 서자 품이 넉넉한 채하의 옷이 배 부분만 팽팽하게 늘어나 있었다.
“우리 피치, 잘 크네.”
이제 배를 보고 우울해하는 대신 피치가 잘 크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채하가 한 손에 내 코트를 들었다. 채하는 내 뒤에 서서 코트를 입혀 주었다.
“일부러 비슷한 색으로 골라서 꺼내 온 거지?”
“응. 우리 데이트하는 거니까.”
내가 입은 코트와 지금 채하가 입고 있는 코트는 자세히 보면 다른 색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같아 보일 정도로 비슷한 색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아침 뭐 먹을지 생각해 뒀어?”
“응. 핫케이크 먹고 싶어.”
나와 채하는 집에서 아침을 먹는 대신 맥도날드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주말 아침의 패스트푸드 매장 안은 생각보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학교 때 밤새 술 먹고 맥모닝으로 해장하고 그랬었는데.”
핫케이크를 앞에 두고 또다시 추억에 빠져들었다. 겨우 몇 년 전의 일이었지만 아주 예전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채하가 나 대신 핫케이크에 버터와 시럽을 잔뜩 바르고 칼질까지 해서 먹기 좋은 상태로 만들었다.
“얼른 먹어.”
그는 추억에 젖어 있는 내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포크로 핫케이크 한 조각을 찍어 채하의 입으로 먼저 가져갔다. 가득 뿌린 시럽 때문인지 채하가 표정을 조금 찌푸렸다.
“왜? 너무 달아?”
“응. 시럽을 너무 많이 뿌렸나 봐.”
나는 채하의 말을 들으며 핫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달긴 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베이비 페어 시작 시간에 맞춰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와, 별게 다 있네.”
아기용품을 사러 나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많은 종류의 물건들이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경을 하던 중 채하가 아기 슬링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저게 마음에 들어?”
“응. 저걸로 피치 안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아.”
우리가 슬링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눈치챈 직원이 시착을 권했다. 채하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슬링을 착용하고 그 안에 아기 인형을 넣었다. 그는 어설픈 자세로 인형의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아기가 아니라 핫도그 안고 있는 것 같아.”
그 모습을 보자 웃음부터 나왔다. 커다란 덩치의 채하가 작은 아기 인형을 안고 있자 잘 포장된 핫도그를 소중하게 안은 것처럼 보였다. 직원도 비슷한 생각인지 함께 웃음을 지었다.
“이거 살까?”
채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슬링 안에 피치를 넣어서 안고 다니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걸로 피치 매일 안고 다녀.”
“당연하지. 내가 우리 피치 맨날 끼고 다닐 거야.”
계산을 마치고 매장을 나온 채하의 눈에 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교육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채하는 IQ와 EQ를 들먹이며 조기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직원의 말에 반쯤 넘어가 있었다.
“지원아, 지원아. 우리 저것도 해야겠다.”
“아니야. 안 돼.”
“조기 교육이 중요하대.”
“아직 우리 피치 세상 구경도 못 했어.”
그제야 조금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채하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속 그곳에 있으면 채하가 직원의 화술에 넘어갈 게 뻔했다.
“채하야, 너 귀 진짜 얇다.”
“아닌데? 나 귀 안 얇아.”
채하가 부정했지만 직원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전부 사들이려고 하는 모습 때문에 그 말에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결국 우리는 충동적인 소비를 막기 위해 행사장 밖으로 나왔다. 행사장 밖으로 나올 때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슬링과 아기 이불 한 세트뿐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채하의 몸에 슬링을 둘렀다. 그리고 피치의 방에 있던 인형을 꺼내 와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저쪽에 서 봐. 사진 찍게.”
내 말에 채하는 인형을 받쳐 안고 자세를 잡았다. 핸드폰 화면 안에는 복숭아 인형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비쳤다.
“이 사진 부모님들한테 보내 드릴까?”
“아니, 안 돼.”
“왜에. 보내 드리자.”
내 애교에도 채하는 단호했다. 안 된다고 했지만 부모님께 보여 드릴 생각으로 사진을 저장했다. 옆에 앉은 채하는 여전히 인형을 안고 있었다. 채하를 닮은 조그마한 아기가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요즘 나는 채하가 출근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아기 물건을 만들면서 보냈다. 아기방에 달아 놓은 모빌도 내가 직접 손바느질을 해 만든 것이었다. 뜨개질에는 영 재주가 없었지만 바느질은 그나마 봐줄 만한 것 같았다.
“피치, 아빠가 배냇저고리 만들어 줄게.”
이미 아기 옷장에 선물 받은 배냇저고리가 가득했지만 처음 입는 옷은 내가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구매한 아기용품 DIY 세트 중 배냇저고리를 꺼냈다.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고 바늘에 실을 꿰었다. 서툰 실력으로 꼼꼼하게 바느질을 하다 보니 겨우 절반을 꿰맸을 뿐인데 채하의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현관 쪽으로 걸어가니 채하가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나는 채하를 보고 발길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서서 채하처럼 가만히 팔을 벌렸다.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는 나를 보고 웃은 그가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왔다.
“잘 있었어?”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후 나를 품에 안은 채하가 물었다.
“응. 잘 다녀왔어?”
이제는 우리의 일상이 된 인사법이었다. 채하는 집에 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저녁 준비를시작했다. 나는 식사 준비를 하는 채하의 옆에 서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지금 피치 배냇저고리 만들고 있어.”
“배냇저고리? 선물 받은 거 많잖아.”
“제일 처음 입는 건 내가 만든 걸로 입혀 주고 싶어서.”
“피치는 좋겠네. 아빠가 옷도 만들어 주고.”
우리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채하는 털실과 대바늘을 들고 왔다. 이미 목도리 하나를 완성한 채하는 모자를 뜨기 위해 코를 만들고 있었다.
“이 색도 섞어서 떠 줘.”
“분홍색? 알겠어.”
연한 크림색 털실을 손에 든 채하에게 분홍색을 넣어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실을 이리저리 움직여 작은 모자를 짰다. 그러곤 털실을 잘라 내고 그 끝에 분홍색 털실을 묶어 다시 손을 움직였다. 나는 채하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배냇저고리를 꿰매기 시작했다.
“자기야.”
배냇저고리의 몸통 부분을 완성했을 때 채하가 나를 불렀다.
“응?”
“아기 이름 생각해 봤어?”
추석 때 아기 이름으로 싸우는 아버지들께 우리끼리 정하겠다고 선언한 후 이런저런 이름을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아직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너는?”
“나도.”
“우리도 작명소 가서 지을까?”
“음,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채하는 다른 사람에게 피치 이름을 맡기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내 성을 따르기로 했으니 채하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따와 짓고 싶었지만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
만삭 사진을 찍기 위해 스튜디오를 예약해 둔 날, 우리는 직접 만든 배냇저고리와 모자, 목도리를 챙겨 집을 나섰다.
“아, 너무 긴장돼.”
스튜디오로 가는 차 안에서 거울을 보며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 보았다. 하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은 무슨 표정을 짓든 전부 어색하게 느껴졌다.
“채하야, 너는 긴장 안 돼?”
“그냥 찍으면 되지 뭐.”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나와 달리 채하는 태연해 보였다.
“우리 지원이는 그냥 아무렇게나 찍어도 예뻐. 편하게 찍어.”
“콩깍지.”
“콩깍지 아닌데.”
“맞는데.”
우리는 도착할 때까지 콩깍지가 맞는지 아닌지 정말 쓸데없는 설전을 이어 갔다. 나와 채하는 스튜디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의상은 똑같은 흰색 셔츠였다.
나는 포토그래퍼가 시키는 대로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뒤에서 나를 껴안은 채하는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없는지 포토그래퍼는 계속해서 셔터를 눌렀다.
“지원 씨, 조금만 더 웃어 주세요.”
웨딩 촬영 때와 마찬가지로 표정 지적을 받았다. 셀카는 꽤 잘 찍는 편이었지만 이런 스튜디오 촬영엔 약했다. 억지로 입꼬리에 힘을 주고 살짝 위로 올렸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진을 건졌는지 다음 사진을 찍자는 말에 채하와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냥 우리 둘이 찍을 걸 그랬나 봐.”
겨우 첫 번째 사진을 찍어 놓고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채하는 그런 나를 달래서 셔츠 위로 베이지색 니트를 입혔다. 이번에도 똑같은 니트를 입은 우리는 내가 만든 배냇저고리를 함께 들었다. 나와 채하는 소품과 포즈를 바꿔 가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후에야 스튜디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 이것도 두 번은 못 하겠다. 너무 힘들어.”
웨딩 촬영 때보다 의상 수도 훨씬 적고 시간도 덜 걸렸지만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피치 동생 때는 우리끼리 찍자.”
“뭔 소리야.”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해 버렸다. 나는 피치 동생을 만들 생각도 없는데 채하 혼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우리 피치 하나만 낳기로 했잖아.”
“아니…. 추석 때 어머니가 우리 아들, 딸 하나씩 낳는다고 하셨잖아…. 그래서….”
“그걸 믿어? 우리 엄마랑 너희 어머니 사기당하고 온 거라니까.”
피치가 생긴 일은 사고에 가까웠고 이왕 생긴 거 한 명만 낳아서 잘 키우자고 생각하고 있는 나와 달리 채하는 둘째까지 바라는 것 같았다. 쇼핑몰에 도착할 때까지 둘째는 꿈도 꾸지 말라며 그를 타박했다. 잔뜩 풀이 죽은 채하는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이리 와. 손잡아.”
채하를 보다가 한숨을 한 번 쉬고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잔뜩 처진 눈썹에 힘을 풀고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예전 같았으면 소설 코너만 둘러봤겠지만 아동 도서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거 봐 봐. 신기하지?”
아동용 베스트셀러를 모아 둔 진열대에서 알록달록한 책 한 권을 펼쳤다. 책은 모든 페이지가 다른 소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채하의 손을 잡고 꺼끌꺼끌한 표면을 문질렀다. 채하도 신기한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 이거 살래.”
들고 있던 책을 품에 안고 육아에 대한 책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도 베스트셀러 중 한 권을 뽑아 펼쳤다.
“채하야, 너는 피치가 잘못하면 어떻게 혼낼 거야?”
“혼내? 아기를 어떻게 혼내.”
채하 머릿속의 피치는 영원히 아기인 것 같았다.
“피치가 평생 아기는 아니잖아. 키우다 보면 혼낼 일도 생길 텐데.”
“말로 잘 타이르면 듣지 않을까?”
그 말을 듣자 피치의 훈육 담당은 내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훈육과 관련된 책을 종류별로 꺼내 채하의 손에 들려 주었다. 그리고 피치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는 책도 전부 집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오늘 사 온 책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내 옆에 앉은 채하는 오래 걸어 다녀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이거 봐봐. 권위 있는 부모가 이상적인 부모래.”
“나는 친구 같은 아빠 하고 싶은데.”
채하기 배에 대고 “그치? 피치도 아빠랑 친구처럼 지내고 싶지?” 하고 물었다. 그 모습을 보자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빨리 이름부터 정하자. 이러다 태어난 후에도 피치라고 부르겠어.”
채하가 종이와 펜, 옥편을 꺼내 왔다. 옥편을 보자 피치의 태명을 정할 때가 생각났다.
“‘명, 대, 광’ 이런 글자 금지.”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우리 피치 이름 예쁘게 지어 줄 거야.”
“몰라서 물어? 피치 태명 정할 때 태명 후보 듣고 장난치는 줄 알았잖아.”
그는 밉지 않게 나를 흘겨보고 옥편을 폈다. 나는 손에 펜을 들고 종이 위에 ‘설, 채, 하’ 세 글자를 썼다. 그리고 각 글자를 따와 생각나는 이름을 하나씩 말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설민이, 채현이.”
“하준이, 하겸이, 은채.”
하얀 종이 위에 이름 후보들이 하나씩 늘어 갔다. 이름에 성을 붙여 써 보기도 하고 다시 발음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 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는 이름은 없었다.
“채하야, 빨리 더 생각해 봐.”
채하를 닦달하면서 핸드폰으로 ‘인기 아기 이름’을 검색했다. 1위부터 20위까지 쭉 나열돼 있는 이름 중에서도 시선을 끄는 것은 없었다.
“설우, 유설우.”
“설우?”
뚫어져라 옥편을 쳐다보던 채하가 설우라는 이름을 말했다. “설우?” 하고 되묻자 갑자기 조용했던 피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우라는 이름 들으니까 피치가 움직여.”
“정말? 피치, 설우가 마음에 들어?”
대답이라도 하듯이 피치는 다시 한번 움직였다. 꼬물거리면서 의사 표현을 하는 것 같은 피치가 귀엽게 느껴졌다.
“설우야.”
채하가 내 배에 손을 얹고 이름을 불렀다. 피치는 대답하는 것처럼 배를 한 번 찼다. 채하도 피치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피치 이름은 설우로 할까?”
“응. 그러자. 피치도 그게 마음에 드나 봐.”
이름 주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피치는 유설우가 되었다. 나는 배를 끌어안고 “설우야.” 하고 불러 보았다. 이제 설우라는 이름을 갖게 된 피치와 만날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병원 검진 날, 채하와 함께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혼자 벌벌 떨면서 병원에 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피치를 만나기 전 마지막 검진이었다.
“시간 빠르다. 이제 진짜 얼마 후면 피치 보겠네.”
“그러니까. 1월 2일이면 이제 2주 조금 넘게 남은 거네.”
지난번 병원에 왔을 때 수술 날짜를 생각해 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우리는 1월 2일을 피치의 생일로 정했다. 피치를 만나는 날짜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있을 때 직원이 나와 채하를 진료실로 들여보냈다.
“아기가 잘 놀고 있네요. 그런데 평균보다 약간 큰 편이에요.”
“문제가 되는 건 아니죠?”
“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수술 날짜는 정해 오셨나요?”
“1월 2일이요.”
내 말에 선생님은 달력을 넘겨 일정을 살펴보았다.
“그럼 1월 2일 오전 10시로 잡을게요.”
우리는 입원과 관련된 추가적인 설명까지 듣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피치, 우리 날짜 맞춰서 보자. 일찍 나오면 안 돼.”
이전에는 아기가 예정일에 딱 맞춰서 나오는 줄 알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집으로 가는 내내 배를 끌어안고 피치에게 꼭 내년에 보자며 세뇌에 가깝게 말했다.
“채하야, 너 이번 달까지만 출근하는 거지?”
“응. 일단 6개월 재택근무.”
채하는 출산일이 다가오자 피치를 직접 키우겠다며 1년의 육아 휴직을 요구했다. 하지만 휴직 대신 6개월 재택근무로 만족해야 했다.
“너 6개월 지나고 출근 못 하겠다고 우는 거 아니야? 피치랑 떨어지기 싫다고.”
“그러게…. 내가 피치 데리고 출근할까?”
채하의 표정은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하고 물었다.
“응. 진짜. 6개월 끝나고 6개월 더 재택 안 시켜 주면 피치 업고 회사 갈 거야.”
채하는 어떻게든 피치가 돌이 될 때까지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우리는 집에 가기 전 마트에 들렸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마트 입구에는 트리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품들도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자기야, 우리도 집에 트리 놓을까?”
“크리스마스트리?”
“응. 우리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채하는 진열되어 있는 트리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카트 안으로 넣었다.
“너무 크잖아. 제일 작은 걸로 사.”
“싫어. 제일 큰 걸로 사서 올해도 쓰고 내년에도 쓸래.”
“피치도 커다란 트리 보면 좋아할 거야.” 하고 덧붙인 채하는 장식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트리의 크기를 바꿀 생각이 없는 채하를 보고 그냥 나도 함께 장식품을 고르기로 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품으로 카트를 가득 채웠다.
집으로 돌아온 채하는 거실 소파 옆에 트리를 설치하고 장식품을 하나씩 꺼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채하가 앞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구경했다.
“어떻게 꾸밀지 생각했어?”
“응. 대충.”
채하는 장식품을 하나씩 들어 트리에 걸었다. 나는 그가 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거 빨간색, 조금만 더 옆으로 걸어 줘.”
“이렇게?”
채하가 빨간색 방울 모양의 오너먼트를 옆으로 옮겨 달았다. 만족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채하는 다른 오너먼트를 손에 들었다.
“그건 빨간색 옆에 달아 줘.”
그는 내가 시키는 대로 트리를 장식했다. 모든 장식품을 트리에 걸고 마지막으로 전구를 감았다. 마지막 남은 커다란 별 하나를 내 손에 들려 주었다. 나는 별을 받아 트리의 가장 꼭대기에 올렸다.
“우와, 너무 예쁘다.”
트리가 완성되자 채하가 조명을 켜고 형광등을 껐다. 거실이 어두워지고 트리의 조명이 은은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앞에 앉아 트리를 올려다보았다. 옆에 앉은 채하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원아.”
채하가 나를 부르자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내 볼을 감싸 쥔 채하가 배를 누르지 않으려는 듯 조금 떨어져 천천히 입 안을 헤집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사랑해.”
입술이 잠시 떨어졌을 때 채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도 사랑해. 지원아.”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