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10/14)

08

“지원아, 나 대학 동기 모임 다녀와도 돼?”

잠들기 전 팔베개를 해 준 채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내일 저녁때.”

“가도 돼?” 하고 묻는 채하에게 나는 다녀오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낑낑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채하♥’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며칠 전 ‘채하’ 단 두 글자로 저장된 것을 본 채하가 “내가 그냥 채하야?” 하고 삐치는 바람에 빨간 하트를 붙여 놓았다.

“여보세요.”

- 네, 여보예요.

“재미없어.”

- 에이, 목소리는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채하의 말에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내가 웃자 채하도 함께 웃었다.

- 지원이 저녁 뭐 먹을 거야?

“아직 고민 중이야. 피치가 먹고 싶은 게 없대.”

- 그래도 밥 꼭 챙겨 먹고, 먹고 싶은 거 생기면 전화해.

“알겠어.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

-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한다는 채하의 말에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이제는 나도 자연스럽게 사랑한다는 대답이 나왔다. 전화를 끊고 다시 소파에 누웠다. 배에 손을 얹고 피치에게 말을 걸었다. 피치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도 어색해서 자주 하지 않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아빠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치?”

피치는 나와 같은 마음인지 열심히 움직여 댔다.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다가 허기가 느껴져 “피치, 밥 먹자.” 하고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에서 계란 두 개를 꺼내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 안으로 깨 넣었다. 투명한 계란 흰자가 서서히 흰색으로 변해 갔다. 뒤집개를 꺼내 계란을 뒤집고 노른자가 완전히 익기 전에 그릇으로 옮겨 담았다.

“피치야, 이게 간장 계란밥이야.”

요즘 들어 혼잣말 아닌 혼잣말이 부쩍 늘었다. 나는 그릇 안에 밥과 간장, 참기름을 넣고 비비기 시작했다. 잘 비벼진 밥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채하 없이 밥을 먹다 보니 평소보다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피치, 설거지를 아빠가 할까? 아니면 채하 아빠 오면 시킬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고무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설거지를 했다. 그릇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설거지통은 5분도 지나지 않아 텅 비었다. 빠르게 설거지를 마쳤지만 그사이 배 부분이 푹 젖어 버렸다.

젖어 버린 티셔츠를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틀고 그 아래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씻어 내렸다. 몸에 비누칠을 하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자 배 때문에 발가락 끝만 겨우 보였다.

갑자기 그 모습에 기분이 우울해졌다. 나는 서둘러 비누 거품을 흘려보내고 샤워를 마쳤다. 옷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오자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나를 기다리는 채하가 없었다. 나는 드라이기를 꺼내 혼자 머리를 말렸다.

머리를 다 말리고 침대로 가니 침대 발치에 채하가 입고 잤던 옷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옷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옷에는 채하의 냄새가 가득했다. 한참 그것을 껴안고 누워 있다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있는 채하를 재촉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음이 한참 이어지고 나서야 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응, 지원아. 왜?

스피커를 통해 그의 목소리와 시끄러운 주위의 소음이 함께 넘어왔다.

“채하야, 언제 와?”

-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 지금 갈게. 조금만 기다려.

내 목소리가 조금 이상한 것을 눈치챘는지 바로 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잘 노는 채하를 방해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오겠다는 말에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채하의 옷을 끌어안고 누워 있을 때 빠르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실 밖으로 나갔다.

“지원아.”

채하가 나를 보고 팔을 벌렸다. 나는 그대로 채하에게 안겼다. 그의 품에 안기자 술 냄새와 페로몬 향이 함께 느껴졌다. 배를 누르지 않도록 나를 살짝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술 많이 먹었어?”

“아니, 많이 안 먹었어.”

그러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쭉 내밀고 있는 채하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술 냄새. 얼른 가서 씻고 와.”

욕실로 채하의 등을 떠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욕실 문 너머로 들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들기 직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뜨니 옷 대신 수건을 두른 채하가 보였다. 그가 내 옆으로 와 입을 맞췄다.

“나 보고 싶었어?”

입술이 떨어진 후 채하가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채하는 숙취 때문인지 평소보다 눈을 뜨는 것을 더 힘들어했다.

“이따가 내가 알아서 아침 챙겨 먹을게. 조금 더 자.”

하지만 채하는 내 만류에도 바닥에 떨어진 티셔츠를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런 채하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는 그를 보고 냉장고에서 딸기 잼과 주스를 꺼내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머리 많이 아파?”

“아니야. 괜찮아.”

그는 빵에는 손도 대지 않고 큰 컵에 담긴 주스를 한 번에 마셔 버렸다. 나는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식빵에 딸기 잼을 발라 한입 베어 물었다. 어젯밤 채하에게 오래도록 시달린 탓에 얼른 식사를 마치고 한숨 더 자고 싶었다.

“많이 피곤해 보여. 밥 먹고 조금 더 자.”

채하의 눈에도 내가 피곤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빵을 한입에 넣었다. 컵에 남은 주스도 전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릇을 치운 채하는 곧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바로 침대에 눕지 않고 채하가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왜 거기 앉아 있어.”

욕실에서 나온 채하는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나를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침대에 누운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출근 준비를 하는 채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다녀올게. 피치도 잘 있어.”

준비를 마친 채하가 나와 피치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 후 눈을 감았지만 피치가 심하게 움직이는 통에 잠들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자자. 피치.”

피치는 채하가 살살 움직이라고 하면 금세 조용해졌지만 내 말은 잘 듣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잠을 포기하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채하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피치야, 아빠가 핸드폰 놓고 갔나 보다.”

희주에게 채하가 핸드폰을 집에 놓고 갔다고 전해 달라는 메시지를 작성하고 전송 버튼을 누르기 바로 직전 채하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진동이 울리자 켜진 핸드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김수철?”

대학 시절 채하를 좋아하던 오메가였다. 채하의 같은 과 동기였던 김수철은 채하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던 애였다. 심지어 채하가 나와 붙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노려보는 탓에 내 얼굴이 뚫리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용까지는 확인할 마음이 없었지만 발신자명을 보자 나도 모르게 메시지를 읽어 버렸다.

김수철 : 채하야 어제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반가웠어. 근데 결혼식 초대도 안 해 주고 너무 서운하다ㅠㅠ 그리고 분위기 좋았는데 전화 오자마자 가 버리고ㅠㅠㅠㅠㅠ 우리 조만간 다시 한번 만나자! 언제가 괜찮아? 다음 주 중에 시간 돼?ㅎㅎㅎ

“허, 얘 뭐야? 글자로 질질 짜다가 처웃다가, 난리도 아니네.”

김수철은 궁금하지도 않은 본인 생각을 가득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심지어 설채하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면서도 단둘이 만나자는 소리를 해 댔다. 김수철의 메시지를 읽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화가 끓어올랐다. 핸드폰을 던지듯이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침실로 들어갔다.

“설채하는 행동거지를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쟤가 저런 말을 해?”

가만히 누워 있던 나는 가슴속에서 부글거리는 화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레스 룸 한구석에 놓았던 가방을 꺼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옷과 물건들로 캐리어를 꽉 채우고 지퍼를 닫아 거실로 가지고 나왔다. 그와 동시에 채하의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김수철 : 바빠? 읽었는데 답장이 없네ㅜㅜㅜ

두 번째 메시지를 읽고 내 왼손 약지를 조이고 있던 반지를 빼냈다. 냉장고에 붙어 있던 우리가 함께 정한 규칙 종이를 찢어 버렸다. 이제는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 종이와 반지를 채하의 핸드폰 옆에 올려 두었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한 손에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가방을 가지고 천천히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현관 앞에 서서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을 열고 나갔다.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메시지를 읽고 현관문 밖으로 나오기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집을 나와 정처 없이 걷다가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타긴 했지만 분명한 목적지가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도착역을 알리는 방송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내린 곳은 서울역이었다.

“부산 가는 KTX 한 장이요. 제일 빨리 출발하는 걸로요.”

오늘의 두 번째 충동이었다.

“네, 부산 한 분, 10분 후에 출발하는 거예요.”

직원에게 카드를 주고 비밀번호 두 자리를 누르자 기계에서 표가 인쇄되어 나왔다. 직원은 카드와 표를 함께 주면서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에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표를 받아 들었다. 표에 쓰여 있는 플랫폼 번호를 확인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플랫폼에는 이미 기차가 도착했고, 사람들이 하나둘 타는 중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출발까지는 5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저기, 아기 아빠.”

가방을 가지고 기차에 올라타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리 엄마 또래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가방 줘요. 들어 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도 아주머니는 내 가방을 들어 짐을 보관하는 곳에 넣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로. 아기 아빠는 어디까지 가요?”

우연히도 아주머니의 자리는 바로 내 옆이었다. 자연스럽게 어디에 가냐고 묻는 아주머니께 부산에 간다고 대답했다.

“부산? 멀리 가네. 그럼 나 천안 도착하면 깨워 줘요.”

알겠다는 내 대답에 아주머니는 좌석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기차가 곧 출발하는지 철컹,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테이블을 꺼내 턱을 괴고 바깥을 쳐다보았다.

희주 : 채하가 자기 핸드폰 집에 있냐고 물어봐 달래.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희주에게 메시지가 왔다. 나는 미리보기 화면으로 내용을 읽고 전원 버튼을 짧게 눌러 화면을 껐다.

기차는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려 마지막 역인 부산에 도착했다. 기차가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나 대전역에 정차했을 때 내릴까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부모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 마음은 금방 접어 버렸다.

부산역에 내려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바로 택시에 탔다. 예약한 숙소 이름을 말하자 택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였다.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번의 망설임을 거친 나와는 정반대였다.

택시는 30분 정도를 달려 나를 해운대 근처의 호텔에 내려 주었다. 나는 호텔 안으로 들어가 프런트에 이름을 말했다. 하지만 아직 체크인 시간이 아니라는 직원의 말에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가방만 맡긴 뒤 밖으로 나왔다.

“피치야, 우리 점심 뭐 먹을까?”

오늘 내가 먹은 것은 아침으로 먹은 식빵 한 장과 기차에서 마신 오렌지주스 한 병이 전부였다. 늦은 점심에 허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호텔에서 나와 조금 걷다가 눈에 보인 샌드위치 가게로 들어갔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프랜차이즈였다. 조금만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해운대 근처의 맛집을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평소 먹던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쿠키와 음료수까지 계산했다. 그러곤 음료 컵에 콜라를 가득 따라 자리에 앉았다. 희주에게 메시지가 한 번 더 왔지만 이후로 내 핸드폰에는 아무 알림이 없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샌드위치 포장지를 찢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부산으로 달라졌을 뿐 샌드위치 맛은 서울에서 먹던 것과 똑같았다. 샌드위치를 전부 먹고 콜라를 마셨다. 반쯤 남은 쿠키를 버리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가게 문을 열자 바로 바다가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파란 바다를 보니 오히려 가슴이 더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바닷가를 걷는 대신 호텔로 돌아갔다. 체크인을 하고 캐리어를 챙겨 방으로 올라가자 침대 옆 창문을 통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피치야, 바다야. 예쁘지?”

바다를 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피치는 낯선 곳에 왔다는 것을 아는지 평소보다 움직임이줄었다.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대충 치워 놓고 침대에 옆으로 누웠다.

“피치, 채하 아빠 버리고 아빠랑 둘이서 살까?”

부산으로 오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드라마 10편은 족히 찍은 것 같았다. 충동적으로 집을 나오긴 했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전무했다. 시계를 확인하자 4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퇴근한 채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바로 볼 수 있게 거실 테이블 위에 찢은 종이와 반지를 올려 두고 나왔다.

잠들었던 내가 눈을 뜬 것은 핸드폰 진동 때문이었다. 내 예상대로 발신자는 채하였다. 볼륨 키를 눌러 진동을 꺼 버리고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불을 켰다. 내가 잠든 사이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불을 켜고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 사이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전화가 끊어지고 채하가 다시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이번엔 진동이 울리도록 그대로 두었다. 내 핸드폰은 여러 번 울렸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다섯 번째 전화가 끊기기 직전 핸드폰을 들었다.

- 지원아, 어디야?

전화를 여러 번 건 사람답지 않게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채하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알아서 뭐 하게.”

- 지원아, 지금 어디에 있어? 거실에 있는 거 뭐야?

“보면 몰라?”

일부러 듣는 사람이 짜증이 날 것 같은 말투로 말했지만 채하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 집에 와서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말해 주면 안 될까? 우리 그러기로 했잖아. 응?

“잘못한 거? 몰라서 물어? 김수철 걔 뭐야? 너 밖에서 행동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걔가 그런 메시지를 보내?”

- 그게 무슨 소리야?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그제야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채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오해야 지원아. 알잖아. 수철이가 학교 다닐 때 나 좋아했던 거.

“알면? 내가 그거 보고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라는 거야?”

- 그런 말이 아니잖아. 조금만 진정하고 내 얘기 좀 들어 줘.

“난 들을 말 없어. 연락하지 마.”

채하가 전화기 너머 내 목소리가 커진 것을 알고 나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를 끊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을 시작으로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채하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 왔지만 이번에는 거절을 눌렀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채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 : 지원아, 제발 어디 있는지만 알려 줘. 내가 갈게.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나는 지원이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메시지를 읽은 것을 확인했는지 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울고 있는 것을 채하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연락하지 마

채하에게 답장을 보냈다. 내가 없을 때 헛짓을 하고 다녔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메시지를 보고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채하 : 기다리고 있을게. 마음 정리하고 와. 기분 안 좋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고. 그리고 집에 오고 싶으면 아무 때나 연락해. 데리러 갈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일방적인 짜증에 언성 한 번 높이지 않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너무 충동적이었나 하는 후회가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채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는 빨개진 눈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비쳤다. 세면대의 물을 틀고 오래도록 세수를 했다. 열이 오른 얼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훔치고 밖으로 나왔다.

“피치, 저녁 뭐 먹고 싶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런다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배달 앱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아무거나 골라 주문했다. 부산까지 왔지만 집에서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배달 음식이었다.

배달 온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치워 버리고 양치를 했다.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누워 배에 손을 얹었다.

“집에 갈까? 넌 어떻게 하고 싶어?”

피치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신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들고 싶었지만 계속되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채하의 옷이라도 하나 훔쳐 왔어야 했다고 후회가 되었다.

“피치, 설채하 보고 싶어도 참아.”

내 말에 피치는 배를 세게 한 번 찼다. 배를 한 번 문지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선잠에서 깨어 눈을 뜰 때마다 창밖이 서서히 밝아졌다. 7시가 넘어가자 짧은 잠도 더는 오지 않았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옷을 갈아입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일부러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나왔지만 바닷가의 바람은 차가웠다. 결국 10분 정도 바닷가를 걷다가 모래사장에 떨어져 있던 모서리가 깨진 조개껍질 하나를 주워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채하 : 지원아, 아침 먹었어? 난 이제 출근해. 오늘은 꼭 얼굴 봤으면 좋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호텔방으로 돌아와 멀뚱히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 메시지가 왔다. 오늘도 채하는 내 걱정이 가득 담긴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메시지를 읽고 잠시 눈을 감았다. 채하를 보고 싶은 마음과 보기 싫은 마음이 공존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보기 싫다는 마음이 조금은 더 크게 느껴졌다.

체크아웃 시간이 되고 짐을 챙겨 호텔을 나왔다. 아침과 점심 사이의 애매한 시간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길을 걷다가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판에는 국밥과 수육만 있는 돼지국밥집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돼지국밥 하나를 시켰다.

“맛있게 드세요.”

식당이 한산해 주문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새우젓을 넣어 간을 맞추고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부산에 온 후 처음 먹는 먹는 부산 음식이었다.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나와도 겨우 11시가 넘었을 뿐이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때우고 싶어서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자몽에이드와 마카롱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음료를 반쯤 마셨을 때 핸드폰을 들어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표를 검색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어 서울에 도착하는 표를 끊었다. 아직 기차를 탈 때까지 3시간 넘게 남았다. 내 앞에 놓인 컵이 텅 비어 버린 후에도 한참을 카페에 앉아 있었다.

빈 컵을 반납하고 카페를 나와 조금 이르게 택시에 탔다. 부산역에 도착해서 캐리어를 끌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나도 모르게 부산 어묵을 파는 매장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에 어묵 쇼핑백이 들려 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직 집에 갈지 말지 결정하지도 못했으면서 부산에 다녀왔다는 티는 전부 내고 있었다.

기차에 타서 2시간 반을 멍하니 보내니 어느새 서울이었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 모래사장에서 주운 조개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곤 역을 빠져나와 버스를 탔다. 퇴근 시간의 도로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로 빼곡했다. 내가 탄 버스는 나와 채하가 사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었다.

정류장에 내려 캐리어 바퀴가 보도블록 위를 굴러가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어느 오피스텔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곧바로 누구냐고 묻는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나가 누군데.”

집주인이 그러면서도 현관문을 열었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나와 눈이 마주친 집주인은 놀란 표정이었다.

“희주, 안녕.”

“야, 너 뭐야?”

“놀러 왔어. 오늘 자고 갈게.”

나는 희주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현관에 캐리어를 세워 두고 희주의 손에 부산 어묵 쇼핑백을 들려 주었다.

“선물.”

“이게 뭔데? 너 부산 갔다 왔어?”

쇼핑백에 쓰인 글씨를 읽은 희주가 물었다.

“응. 채하한테는 나 여기 있다고 말하지 마.”

희주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말을 안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밥은 먹었어?”

“아니, 나 배고파.”

희주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윤호였다. 희주는 윤호에게 내가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알리더니 저녁을 사 오라는 말과 채하에게는 비밀로 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말 좀 하고 오지. 오늘 저녁때 김윤호랑 게임하기로 했단 말이야.”

“아무 버스나 타고 내리니까 너희 집 앞이더라고.”

“너 가출했다며? 설채하 오늘 하루 종일 죽상으로 앉아 있어서 물어보니까 너 집 나갔다던데.”

“아니야. 내가 애도 아니고 무슨 가출이야.”

내가 한 것이 가출인지 아닌지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윤호와 선준이가 들어왔다.

“야, 유지원! 너 가출했다며?”

“가출 아니라고!”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가출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근데 왜 가출한 거야?”

“가출 아니라니까….”라고 하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수철 알지? 채하랑 같은 과였던.” 하고 운을 띄우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채하가 대학 동기 모임 다녀와도 되냐길래 내가 갔다 오라고 했거든?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김수철이 채하한테 메시지를 보냈더라고.”

“뭐라고 보냈는데?”

윤호의 재촉에도 나는 천천히 밥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고 씹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보다 밥을 먹는 것이 중요한 나와는 달리 친구들은 호기심에 숟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다, 결혼식 초대 안 해 줘서 서운하다, 이러더라고. 근데 더 짜증 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말 끊지 말고 한 번에 말해.”

윤호를 한 번 흘겨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김수철이 채하한테 둘이 만나자고, 언제 시간 되냐고 물어보잖아. 짜증 나게.”

“그래서 가출한 거야?”

“가출 아니고 바람 쐬러 갔다 온 거야. 유부남이 밖에서 행동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그런 거머리 새끼가 붙어.”

그 메시지를 떠오르자 다시 가슴 깊숙한 곳에서 화가 끓어올랐다. 그 모습에 희주가 진정하라며 물 한 잔을 떠다 주었다. 나는 물을 마시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야, 이선준. 너 지금 설채하한테 고자질하고 있지?”

선준이는 내가 이야기를 하는 내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아, 아니야. 나 친구랑 연락했어.”

“웃기고 있네. 내가 믿을 것 같냐? 너 우리 빼고 친구 없잖아.”

선준이가 채하에게 고자질한 것이 맞았는지 우리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함께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어? 누구지?”

현관으로 향하는 선준이의 발걸음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현관문을 열고 “채하야, 무슨 일이야?”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국어책을 읽는 것 같았다.

“지원아.”

채하의 얼굴은 하루 새에 핼쑥해져 있었다. 나는 내 손을 잡는 채하를 뿌리치고 고개를 돌렸다.

“지원아, 집에 가자. 응?”

“안 가. 지금 네 얼굴 보기 싫어.”

단호한 내 말에도 채하는 다시 손을 잡았다.

“너 집에 안 가? 안 가면 내가 또 나가면 되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를 끌어다 앉혔다.

“그럼 내가 갈게. 혹시라도 마음 바뀌면 연락해 줘.”

내 손을 놓고 친구들에게 나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슬퍼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부부 싸움 한번 거하게 하네.”

“그래, 너 집에 가라. 고집부리지 말고.”

친구들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집을 나온 지 겨우 하루 만에 다시 돌아가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고집이었다.

“오늘은 재워 줄 테니까 내일은 꼭 집에 가라. 알겠지?”

고집에 희주는 나를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을 접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다시 채하가 오기 전처럼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너 아기 언제 낳는다고?”

“1월 초. 얘 이제 엄청 잘 움직여. 만져 볼래?”

내 말에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명씩 차례대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피치, 안녕. 희주 삼촌이야.”

방금까지 열심히 움직이던 피치가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한참을 기다리던 희주는 아무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자 다시 손을 뗐다.

“안 움직이는데?”

“이상하네. 나랑 채하가 만지면 잘 움직이는데.”

피치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우리의 대화 주제는 피치에서 다시 어제와 오늘의 내 행적으로 변했다.

“너 부산 가서 혼자 청승 떨다가 왔냐?”

“청승 안 떨었어. 새끼야.”

“말 좀 예쁘게 해라. 새끼가 뭐냐, 새끼가.”

“너나 잘해. 나 부산에서 혼자 잘 놀다 왔거든?”

“쟤 부산 가서 쇼핑까지 하고 왔어. 우리 집 들어오자마자 나한테 부산 어묵 줬잖아.”

어묵을 사 왔다는 희주의 말에 다른 친구들은 숨겨 놓고 너 혼자 먹을 생각이었냐며 빨리 꺼내 오라고 아우성이었다.

“맥주 없어?”

“없는데.”

친구들은 어묵을 먹으면서 술을 찾았다. 술이 없다는 희주의 말에 선준이가 지갑을 챙겨 일어났다.

“내가 편의점 가서 사 올 테니까 먹지 말고 기다려.”

편의점에 다녀온다며 나간 선준이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봉투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그 안은 맥주와 소주, 음료수, 각종 안주로 가득했다.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너희 내일 출근 안 해?”

어마어마한 술의 양을 보고 물었다.

“이게 뭐가 많아. 내일 금요일인데 당연히 출근하지.”

윤호가 자연스럽게 부엌 찬장에서 술잔을 꺼내더니 소주와 맥주를 섞었다. 내 앞에는 요구르트 한 줄이 놓였다. 건배하는 술잔들 사이에 껴서 요구르트병을 부딪쳤다. 시원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빨대로 요구르트를 쪽쪽 빨았다.

“오늘 채하 어땠어?”

빈 술병이 늘어 가고 친구들의 혀가 반쯤 꼬이기 시작했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오늘? 막 한숨을 쉬는데 나 땅 꺼지는 줄 알았잖아.”

“맞아. 오늘 설채하 밥도 안 먹었어.”

“그래. 어지간하면 용서해 줘라. 얘기 들어 보니까 채하가 잘못한 것도 아니더라.”

희주가 “김수철 그 새끼 또라이인 거 다 아는데.” 하고 중얼거리자 모두 맞장구를 쳤다. 나를 포함해 여기 있는 모두가 최소 한 번씩은 김수철의 견제를 받아 보았다.

“그 새끼, 자기가 채하 애인인 척 맨날 우리 째려보고 다녔잖아. 그때 개웃겼는데.”

“맞아. 걔가 째려볼 때마다 우리가 수철 빔 쏜다고 했잖아. 이제 설채하 애 딸린 유부남인데 아직도 포기가 안 되나 보네.”

“야, 지원아. 나중에 채하 모임 할 때 애 업고 찾아가 봐. 김수철 표정 어떨지 궁금하다.”

친구들은 윤호의 말에 박수를 치며 큰소리로 웃었다. 술에 취한 친구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쉽사리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웃고 있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희주의 보디 워시와 샴푸를 사용하니 내 몸에서 낯선 향기가 풍겼다. 내가 씻고 나왔을 때도 친구들은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아니, 어묵에 깻잎이 붙어 있잖아.”

“그게 뭐?”

“쟤도 옷 입고 있는 것 같아서 웃기잖아. 옷 대신 깻잎 옷.”

윤호의 말에 선준이와 희주는 다시 웃었다. 이 중에서 무표정인 것은 나밖에 없었다. 맨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개그인 듯했다.

“나 잔다.”

“어, 방에 들어가서 자.”

혀가 완전히 꼬여 버린 희주가 말했다. 나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친구들은 목소리를 낮췄다.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몸이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제 나는 채하의 페로몬이 없으면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래도 눈을 감고 기다리자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현실과 꿈을 짧게 반복했다. 어느 순간 눈을 뜨자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잠결에 더 짙은 페로몬을 갈구하면서 채하에게 파고들었다. 내가 몸을 돌려 안기자 자연스럽게 큰 손이 나를 토닥였다. 나는 어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을 보상받으려는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침대 위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하지만 채하가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옆자리에는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밖에서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죽겠다. 이선준 저 새끼가 괜히 소맥 먹자고 해서.”

밖으로 나오니 겨우 눈을 뜬 희주와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잠들어 있는 선준이와 윤호가 보였다.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의 주인공은 채하였다.

“야, 설채하 누가 불렀어?”

“몰라. 기억 안 나. 그래도 어제 보니까 둘이 꼭 껴안고 자던데 화해해라.”

나는 희주를 노려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곧 씻고 나올 채하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잔뜩 화를 내 놓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그에게 안겨 깊게 잠들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안은 밤새 채하가 풀어 놓은 페로몬이 가득했다.

“유지원, 라면 먹을래?”

희주가 방문을 열고 물었다. 안 먹는다고 대답하자 희주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문이 열렸다.

“아, 안 먹는다고!”

“지원아.”

이번에는 채하였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불을 더 단단하게 뒤집어썼다. 누가 봐도 유치한 행동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채하가 걸어오는 소리와 침대에 걸터앉는 것이 느껴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하가 내 등에 손을 올렸다.

“지원아, 내 얼굴 안 볼 거야?”

“…….”

하지만 피치는 채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기분이 좋은지 배를 세게 차기 시작했다. 강한 발길질에 나도 모르게 신음했다. 내가 움찔하자 채하가 손을 배로 옮겼다.

“피치야, 아빠 아프대. 조금만 살살 움직이자.”

채하의 말에 거짓말처럼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지원아, 나 퇴근하고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꼭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나 수철이 차단했어. 앞으로 연락 올 일 없을 거야. 만나지도 않을 거고.”

채하가 다시 방을 나갔다. 얼마 후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방금까지 시끌벅적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집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피치야, 아빠 어떻게 해야 돼? 채하 아빠랑 그냥 화해할까?”

피치는 대답이 없었다. 채하와 부부가 된 지 겨우 몇 달 만에 생긴 갈등이었다. 우리는 친구일 때도 흔한 말다툼 한번 한 적이 없었다. 그와 대화를 하고 싶어도 울컥 차오르는 화 때문에 나도 모르게 채하에게 나쁜 말을 할까 봐 무서웠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던 중 갑자기 배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느껴 본 적 없는 통증에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점점 통증이 강해져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겨우 손만 움직여 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왜 전화를 안 받아.”

신호음이 여러 번 이어지고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안내가 나올 때까지 채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첫 번째 전화가 끊어지자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두 번째 전화는 신호음이 여러 번 가기 전에 연결되었다. 스피커를 통해 “지원아.” 하고 부르는 채하의 목소리를 듣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채, 채하야…. 나 배가, 배가 너무 아파.”

- 지금 갈게. 조금만 기다려.

“우리 피치 어떡해.”

- 지원아, 나 지금 갈 거니까 조금만 진정해.

채하는 금방 가겠다며 울고 있는 나를 달랬다. 스피커 너머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친구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친구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그는 나를 달랠 때와는 다르게 짧은 문장마저 제대로 완성하지 못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 지원아, 울지 말고 숨 천천히 쉬어.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동안 전화를 끊지 않았다.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나를 진정시키려는 채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놀란 나의 호흡은 점점 빨라졌고, 손발이 저려 왔다.

채하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다급한 발소리가 함께 들렸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형태가 보였지만 과호흡 증상으로 시야가 어두워져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익숙한 페로몬에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정신을 놓아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내 손을 잡고 울고 있는 채하의 얼굴이 보였다. 몇 달 전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지원아, 정신이 들어?”

“…우리 피치….”

“피치는 괜찮대.”

채하는 눈을 뜨자마자 피치부터 찾는 나를 진정시키고 곧바로 호출 벨을 눌러 간호사에게 내가 깨어난 것을 알렸다.

“검사 결과 아기는 무사합니다. 최근에 스트레스받을 일이 많으셨나요?”

“…….”

의사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린 의사 선생님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스트레스 조절에 신경 쓰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괜찮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네.”

“평소보다 더 높은 농도의 알파 페로몬이 필요합니다. 이건 아기 아빠가 신경 써 주세요. 며칠 입원해서 경과 지켜보도록 하죠.”

“네. 감사합니다.”

채하는 병실을 나가는 의사에게 인사를 했다. 다시 침대 옆으로 돌아와 내 손을 잡았다. 손을 잡은 그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미안해.”

채하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흘러나오는 눈물이 점점 늘어 갔다.

“지원이 너 스트레스 받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 나 보는 것만으로도 화나겠지만 그래도 조금만 참아 줘.”

채하는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개질 정도로 우는 채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 좀 일으켜 줘.”

내 말에 채하가 벌떡 일어나 나를 일으키고 침대 등받이를 세워 기대어 앉을 수 있게 했다. 다시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채하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억지로 눈물을 참는지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였다. 티슈 한 장을 뽑아 그에게 건넸다. 티슈를 받아 든 채하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만 울어.”

“미, 미안해. 나 때문에 머리 아프지?”

그만 울라는 말에 채하가 다시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그러나 훌쩍이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어떤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채하와 싸워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관계를 회복시켜야 하는지도 몰랐다. 채하가 내 눈치를 보는 것처럼 나도 채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엄마였다.

“여보세요.”

- 아들, 엄마 지금 아빠랑 서울 왔어. 지금 너희 집 근처인데 집에 있어?

“뭐? 집 근처라고?”

- 응, 지금 너희 집 근처 마트 보이네.

“나 지금 집에 없는데….”

- 언제 오는데? 기다릴게.

“나 병원에 있어. 입원했어.”

기다린다는 엄마의 말에 결국 입원 사실을 고백했다. 괜찮다고 안심시키려 했지만 부모님은 입원했다는 말만으로도 놀란 것 같았다. 병원 이름을 물어본 엄마는 금방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엄마랑 아빠, 병원으로 온대.”

“지금?”

고개를 끄덕이자 채하는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부모님이 온다는 말에 눈물을 흘린 흔적을 지우려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부모님이 올 때까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지원아!”

병실 문이 열리고 아빠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들어왔다. 아빠는 채하의 인사에 대꾸도 하지 않고 내 몸 상태를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빠, 좀 진정해. 이제 괜찮다고 했어.”

“지원이 말이 맞아요. 진정하세요.”

“괜찮기는! 안 되겠다. 퇴원하면 같이 집으로 내려가자. 집에 가서 푹 쉬자.”

함께 집에 가자는 아빠의 말을 거절했다. 하지만 아빠는 바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더 나를 설득했다.

“안 돼. 선생님이 알파가 꼭 있어야 한다고 했어.”

채하의 페로몬이 필요하다는 말에 나를 설득하는 것이 멈췄다. 내가 부모님을 따라갈까 봐 걱정하던 채하도 그제야 한시름 놓은 얼굴이었다. 부모님이 병실을 지키자 채하는 집에 가서 짐을 챙겨 오겠다며 나갔다.

“나 이제 괜찮다니까. 표정 좀 풀어.”

“정말 괜찮은 거 맞대?”

“응. 이제 아프지도 않아.”

“도대체 어떤 애가 나오려고 낳기도 전에 이렇게 고생을 시켜.”

엄마의 말에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피치를 고생시킨 것이었지만 모든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한창 부모님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듣고 있을 때 채하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엄마, 피곤하지? 채하 왔으니까 얼른 집에 가.”

채하와 냉전 중인 것을 들킬까 서둘러 부모님을 돌려보내려 했다. 채하도 나를 거들어 부모님을 설득했다.

“알았어. 간다 가.”

가방을 챙기는 부모님을 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채하가 나를 저지했다. 그 모습에 엄마와 아빠도 가만히 누워 있으라며 나를 말렸다.

“내가 배웅해 드리고 올게. 누워 있어.”

채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부모님과 채하가 밖으로 나가고 병실 안에 적막만 맴돌았다. 배에 손을 얹었지만 피치는 자고 있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병원에서의 첫날 밤이 어색하게 지나가고 다음 날 오전, 채민 형이 큰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병문안을 왔다.

“어? 형, 어떻게 알고 왔어요?”

“엄마가 말해 줬어. 몸은 괜찮대?”

집으로 돌아간 엄마가 채하 어머니께도 말씀드린 모양이었다. 형의 물음에 아기와 나 모두 괜찮다고 했다.

“채하야, 가서 점심 먹고 와.”

“아니야. 생각 없어.”

병실에 계속 있겠다던 채하는 채민 형까지 설득하는 데 말을 보태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하가 나가자마자 채민 형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너희 뭔 일 있었지? 싸웠어?”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긴. 설채하가 저쪽에서 네 눈치만 살살 보고 있는데 뻔하지 뭐.”

채민 형의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형은 부부 싸움 해 본 적 있어요?”

“부부 싸움? 당연하지. 20살 때부터 형이랑 살았는데 한 번도 안 싸워 본 게 이상한 거지.”

왜 당연한 걸 묻냐는 말투였다. 그 말에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럼 어떻게 화해해요?”

“먼저 사과할 때도 있고 자연스럽게 풀릴 때도 있고 그렇지.”

오래된 부부의 연륜이 느껴지는 채민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철없다고 생각했던 형이 갑자기 어른처럼 느껴졌다.

“왜? 채하랑 싸웠어?”

“아니, 싸운 건 아니고….” 하고 말을 시작했다. 집을 나갔던 이야기를 빼고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자 채민 형은 채하가 잘못했다며 내 편을 들었다.

“설채하가 완전 잘못했네. 내가 채하 혼내 줄까?”

“아, 아니요. 괜찮아요.”

“왜? 설채하 정신 교육 제대로 시켜 줄게.”

“채하도 이제 아빠 되는데 형한테 혼나면 좀 그렇잖아요….”

내 말에 채민 형은 혀를 찼다.

“같이 살다 보면 싸우기도 하는 거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네.”

식사를 마쳤는지 채하가 병실로 돌아왔다. 채하를 본 채민 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오후에 수업 있어서 가야겠다. 몸조리 잘해. 설채하 너는 지원이 말 잘 듣고.”

“네. 형, 조심히 가세요.”

“조심히 가.”

우리의 배웅을 받은 채민 형은 가방을 메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채하와 단둘이 남자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눈치를 보는 채하를 응시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밥 잘 먹고 왔어?”

“어? 응.”

이렇게 사소한 것을 물어볼지 몰랐던 듯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뭐 먹었어?”

“샌드위치 먹었어.”

“맛있었겠네.” 하는 내 말에 채하가 바로 사 오겠다며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런 채하를 잡았다.

“괜찮아. 조금 있으면 밥 주잖아.”

채하가 자리에 앉고 우리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깍지를 끼고 있는 그의 손등에 선 푸른 핏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식사 시간이 되었다. 채하는 침대에 달린 테이블을 꺼내고 밥과 반찬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마주 보고 앉아 밥 위로 반찬을 올려 주기 시작했다.

“먹을 만해?”

채하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먹어 본 병원 밥 중에 가장 별로였다. 반 공기도 비우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진짜 맛없어. 최악이야.”

“그럼 다른 거 사 올까?”

“아니, 그만 먹을래.”

식사를 멈추자 채하가 곧바로 식판을 병실 밖으로 내놓았다.

“피치는 다른 병원 가서 낳을까?”

“갑자기? 왜?”

“밥이 맛없어서.”

내 농담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하고 웃었다. 나도 내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우리 사이는 병원에 있는 동안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풀릴 수도 있다는 채민 형의 말처럼 천천히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깨끗해진 거실 테이블 위를 제외하고 달라진 것이 없었다. 혹여나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내가 빼놓고 간 반지 이야기는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다.

자기 전 채하는 늘 하던 것처럼 튼 살 크림을 발라 주고 피치와 태담을 나눴다.

“피치, 집에 와서 좋지? 아빠도 피치랑 집에 와서 좋아.”

눈을 감고 채하의 목소리를 들었다. 꿈과 현실의 중간 정도에 서 있을 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채하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차가운 금속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천천히 통과했다. 그의 손이 떨어진 후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지금 눈을 떠 채하를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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