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다 울었어?”
내 물음에 채하가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채하는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울고 싶은 만큼 울어.”
나는 채하를 안고 토닥였다. 그는 내가 기억을 잃은 시간 동안 참아 왔던 눈물을 한 번에 흘려보내려는 것처럼 울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훌쩍임이 잦아들었다.
“우리 채하 그동안 마음고생 많이 했네.”
“이거 꿈 아니지?”
“나 꿈꾸는 것 같아.”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엔 눈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꿈인 것 같아?”
“아직 모르겠어. 한 번만 더.”
채하의 말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진짜 한 번만 더 해 주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
핑계 같아 보였지만 오늘만은 채하의 말을 모두 들어주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길게 입을 맞췄다. 그날 우리는 오랫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조금 이른 점심 식사를 하고 수영장 모서리에 앉았다. 물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는 나와 달리 채하는 수영복을 입은 상태였다. 나란히 앉아 발만 담그고 있던 채하는 어느새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보면서 첨벙첨벙 소리가 나도록 발을 움직였다. 장난을 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손에 발목을 붙잡혔다. 저 멀리 갔던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여 채하에게 입을 맞췄다. 나는 그대로 채하의 손에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다.
수영을 못 하는 나는 채하에게 업혀 손발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신혼여행의 둘째 날, 우리는 숙소에서 하루 종일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에 비해 셋째 날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불려도 무방할 일정이었다.
“얼씨구, 한라산도 넣지 그랬어?”
“등산은 지원이 너 힘들까 봐….”
핸드폰 메모 앱에는 오늘 가야 할 곳과 시간이 분 단위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박물관? 수학여행 온 거야? 나만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했구나.”
손가락을 움직여 박물관 일정을 모두 지워 버렸다. 그러곤 장소별로 적은 시간까지 지웠다.
“별로야? 마음에 안 들어?”
일정에 손을 대자 채하는 금세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맛집과 관광지 몇 곳을 남기고 전부 일정표에서 없애 버렸다. 우리는 내가 바꿔 버린 일정에 따라 점심부터 먹었다. 입덧으로 고기를 못 먹는 채하 때문에 조금 고민했지만 고기국수가 먹고 싶어 고른 곳이었다.
“채하야, 먹을 만해?”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는 채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이제 고기 냄새 맡아도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다.”
채하가 잘 먹는 것을 확인한 후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오션 뷰 테라스가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방금 식사를 했지만 쇼케이스 안의 치즈케이크까지 주문했다.
“맛있어?”
테라스 바깥에 펼쳐진 바다를 보는 데 정신이 팔린 나에게 채하가 케이크를 먹여 주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포크를 들어 채하의 입에도 케이크를 넣어 주었다. 이제야 수학여행에서 신혼여행이 된 것 같았다.
“저 해수욕장, 우리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갔던 곳이네.”
내 말에 채하는 “기억나?” 하고 물었다.
“응. 너 저기서 핸드폰 물에 빠트렸잖아.”
“나 그때 수학여행 내내 찍은 사진 다 날린 줄 알고 울 뻔했어.”
채하는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수리 센터로 달려갔지만 수리비보다 새로 사는 편이 더 저렴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울 듯한 표정을 지었었다. 다행히 자동으로 클라우드에 저장이 되도록 설정되어 있어 사진은 건졌다.
“그때 찍은 사진 아직도 있어?”
“응. 보여 줄까?”
고개를 끄덕이자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진을 찾았는지 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우와, 완전 어리다.”
사진 속에는 18살인 나와 채하가 있었다. 사진을 넘길수록 풋풋한 우리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나 이때 전날 먹은 술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
유독 얼굴빛이 나쁜 사진을 보자 처음으로 술을 먹었던 수학여행 둘째 날 밤이 떠올랐다.
“아, 그때 반장이 집에서 인삼주 훔쳐 와서 소주랑 섞어 마셨잖아.”
“근데 나 그거 먹고 그날 밤에 너랑 뽀뽀하는 꿈 꿨어.”
지금까지 나 혼자 간직하고 있던 비밀이었다. 내 말을 들은 채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거 꿈 아닌데.”
채하의 말에 나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꿈이 아니라니? 설마….”
“지원이 네가 술 취해서 나 보고 웃는데 너무 예쁘더라고.”
내가 너무 예뻐서 어쩔 수 없었다는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내가 그 꿈 꾸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는 그날 가슴이 너무 콩닥거려서 잠도 못 잤어.”
이로써 채하가 나를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 생각에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만약에 우리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으면 어땠을까?”
내 물음에 그는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랬으면 스무 살 되자마자 내가 결혼하자고 쫓아다녔을걸.”
“스무 살? 그땐 너무 이르지 않아?”
“음, 그런가? 근데 그 전에 아기부터 생겨서 결혼했을 수도 있겠다.”
“나 고등학교 땐 베타였는데.”
“피치도 한 번에 만들었는데 불가능한 일은 아닐걸.”
“야, 무슨 한 번이야. 그날 몇 번….”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다가 입을 닫았다. 그날의 일은 공공장소에서 이야기하기엔 너무 부적절한 이야기였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그날 뭐?”
꼬치꼬치 캐묻는 채하의 입에 남은 케이크를 싹싹 긁어 넣었다. 케이크 접시가 비자 카페를 나왔다. 우리는 발을 맞춰 모래사장을 걸었다. 한여름의 햇볕이 따갑게 내 위로 내리쬐자 채하는 손을 뻗어 내 머리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우리 피치 낳으면 셋이서 또 오자.”
내 말에 채하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웃고 있는 채하의 눈을 마주 보고 함께 미소 지었다.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너무 행복했다.
***
신혼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채하의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매일같이 보았던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이사 올 때 신혼부부에게 인기가 많은 아파트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여기에 살다가 채하와 정말 부부가 되어 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채하가 캐리어 두 개를 현관에 세워 두었다.
채하는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나는 그 옆에 앉는 대신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피곤해.”
“잘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늦게 들어왔던 날 우리 아빠 만나고 왔던 거였어?”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말해 줬어. 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
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자 장난스러운 말투로 “아드님을 제게 주십쇼! 이랬지.” 하고 대답했다. 아빠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말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앉아 있던 채하는 소파에서 일어나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우리 앞으로 규칙 정하자.”
“규칙? 정했잖아. 청소는 내가, 쓰레기 버리기랑 빨래는 네가. 집에 누구 데리고 올 때 물어보고 데리고 오기.”
우리가 함께 살기 시작한 20살 때 만들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규칙이었다. 피치가 생긴 이후로 대부분의 집안일은 채하가 맡았지만.
“아니이, 그런 거 말고.”
“그럼?”
“나 출근할 때 뽀뽀해 주기 같은 거.”
“지금도 해 주는데?”
지금도 아침마다 키스를 하지만 규칙으로까지 만들어서 꼭 지속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도오.”
나는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내가 못 일어나면 어떡해?”
종이에 ‘출근할 때 뽀뽀하면서 배웅하기’라고 쓰고 있는 채하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알아서 뽀뽀하고 출근할게.”
작은 글씨로 ‘지원이 못 일어나면 혼자 뽀뽀하고 출근하기!’라고 덧붙여 써넣었다.
“자기는 넣고 싶은 규칙 있어?”
“음…. 화나는 일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하기?”
채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화나는 일 있으면 바로 이야기하기’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 밑에 ‘싸워도 각방 쓰지 않기’를 추가로 썼다.
“각방 쓰지 않기?”
“응. 나는 각방 싫어. 싸우고 등 돌리고 자더라도 같이 자.”
채하와 친구로 지낼 때에도 한 번도 싸운 적 없었다. 나는 앞으로도 채하와 싸울 일이 없을 것 같아 그 말에 동의했다. 우리가 함께 정한 규칙이 적힌 종이는 자석으로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 여기에 붙여 두면 자주 볼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늘도 채하는 잠자리에 들기 전 내 머리를 말려 주었다. 머리카락이 보송보송하게 마르자 나를 안고 침대로 갔다. 나를 침대에 눕히고 배에 손을 얹고 피치에게 말을 걸었다.
“피치야, 제주도 어땠어?”
“좋았대.”
피치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았으니 피치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답해 주었다.
“좋았어? 나중에 아빠들이랑 또 가자.”
낮은 목소리로 배에 대고 말했다. 나는 채하의 귀에 “피치가 일정은 전부 나한테 맡기래.”라고 속닥거렸다. 내 말에 채하가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생각했다.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것이 4월 초였고 지금이 8월 초이니 4개월 만에 친구에서 부부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3개월의 기억을 전부 잃어버렸는데도 다시 채하와 연애를 했다.
“채하야.”
“응?”
이름을 부르자 채하가 곧바로 대답했다.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봐.”
채하는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없는데도 너 좋아하고 결혼까지 했잖아.”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로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 두려움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온 후에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사랑해. 채하야.”
내 입으로 처음 해 보는 말이었다.
“지원아, 나 너한테 그 말 처음 들어.”
채하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내 품에 파고들었다.
“한 번 더 말해 줘.”
“사랑해.”
나는 채하를 안고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 보았다. 임신 18주가 넘어가자 누가 봐도 임산부였다.
“배 나온 거 봐.”
“괜찮아. 예뻐.”
한숨을 푹푹 쉬자 침대 아래에 앉아 있던 채하가 나를 달랬다. 괜찮다는 말에도 다른 옷을 들어 얼굴 아래에 가져다 댔다.
“이거 입을까?”
“방금 전에 입은 게 더 예쁜데.”
“그래? 그럼 나 저거 입고 갈래.”
어차피 뭘 입어도 배는 못 가릴 것 같다는 생각에 예뻐 보인다는 말을 듣기로 했다.
“아니다. 그거 입지 마. 딴 사람도 지원이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면 안 돼.”
채하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내일 입고 갈 옷을 골라 주름이 지지 않도록 옷걸이에 걸었다. 채하는 선택을 받지 못하고 침대 위에 널려 있는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 방에 옷을 가져다 두러 간 사이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침실로 돌아온 채하는 튼 살 크림을 손에 들었다. 신혼여행 이후 갑자기 배가 나오기 시작해서 채하가 사 온 것이었다.
“아, 차가워.”
옷을 걷고 크림을 푹 떠서 배 위에 올리자 놀라 움찔했다.
“미안, 미안. 많이 놀랐어?”
채하는 배 위에 올렸던 크림을 다시 손바닥 위로 옮겨 문지르며 온도를 높이기 시작했다.크림이 미지근한 온도로 변하자 채하는 조심스럽게 내 배에 손을 가져갔다.
“이제 괜찮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치야, 오늘은 지원 아빠랑 뭐 하고 놀았어?”
매일 튼 살 크림을 발라 주면서 피치와 태담을 나눴다. 대부분인 일방적인 말이 아닌 질문이라 내가 대신 대답해야 했다.
“드라마 봤대.”
“무슨 드라마?”
“좀비 나오는 거.”
얼마 전 채하는 내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궁금했는지 옆에 앉아서 함께 보다가 피가 난무하는 화면에 고개를 돌렸다. 그 이후 피치의 태교가 걱정되는지 매일 무엇을 했는지 슬쩍 물어보곤 했다.
“걱정 마. 내가 재미있으면 피치도 재미있어해.”
단호한 말에 채하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크림이 다 흡수되자 걷어 올린 옷을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
“한 번 더. 오늘은 옷도 골라 줬잖아.”
“눈 감아 봐.”
내가 무엇을 할지 기대되는지 눈을 감은 채하의 입꼬리가 씰룩씰룩했다. 겨우겨우 웃음을 참으며 한껏 기대하고 있는 얼굴을 구경했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자 눈을 뜬 채하는 내 얼굴을 보고 심통이 났다.
“지원이, 진짜 양아치.”
“이리 와.”
잔뜩 삐쳤으면서도 팔을 벌려 안기라고 하자 내게 안겼다.
“삐쳤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채하는 여전히 삐친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채하가 귀여워 입을 맞췄다. 짧게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이 아쉬웠는지 그는 다시 나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기억이 돌아온 이후 다시 일을 시작했다. 기억을 잃기 전 써 놓은 소설의 출간을 위해 출판사와 약속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어제 채하와 함께 고른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첫 작품부터 함께 일한 편집자님이 마중 나와 계셨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네. 저는 잘 있었죠. 많이 더우시죠? 얼른 들어가요.”
편집자님은 아직 내 배를 못 본 모양이었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제야 배를 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작가님, 결혼하셨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요?”
“아직 한 달도 안 됐어요.”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임산부 티가 잔뜩 나는 배를 보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우리는 짧게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미 메일로 대부분의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지만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도 표지는 친구분이 해 주시는 건가요?”
채하는 처음 책을 냈을 때부터 직접 표지를 만들어 주었다. 원하는 것을 얼마나 추상적인 말로 표현하든 시각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내는 채하에게 익숙해져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게 되었다.
“네. 대충 어떤 식으로 할지 정하긴 했는데 집에 가서 둘이 고민 좀 더 해 보려구요.”
“두 분 같이 사신다고 했죠? 어, 근데 작가님 결혼….”
“네. 그 친구랑….”
내 말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손뼉을 쳤다.
“그럴 줄 알았다니요?”
“우리 직원들 중에 친구분이 작가님 좋아하는 거 모르는 사람 없을걸요. 대충 봐도 좋아하는 티 엄청 났는데.”
뭘 그런 걸 묻냐는 말투로 대답했다. 채하를 몇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채하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당사자인 나만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일을 마치고 나오니 채하의 퇴근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있었다. 간식을 사서 채하를 보러 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사무실 근처에 도착해 디저트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 진열되어 있는 타르트들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모양이었다. 트레이를 꺼내 종류별로 하나씩 담았다. 타르트로 가득 찬 트레이를 카운터에 올리고 커피 5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 준비가 다 되었다는 직원의 말에 포장된 디저트를 들고 가게를 나왔다.
나는 채하를 놀라게 하고 싶어 아무 연락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채하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친구들은 말도 없이 찾아온 나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친구들도 나를 환영하는 얼굴이 되었다.
“야, 이제 누가 봐도 임산부다.”
타르트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선준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후 갑자기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근데 너네는 채하가 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그걸 누가 눈치 못 채.”
윤호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전부 알았다는 말을 듣자 정말 나만 몰랐다는 것이 실감 났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채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표정했던 채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웃는 얼굴로 변했다.
“자기야!”
나에게 달려와 뽀뽀를 하는 모습에 친구들은 전부 포크를 내려놓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우리가 애정 행각을 할 때마다 못 볼 꼴을 본 듯이 기겁하는 친구들을 놀려 주려고 채하에게 타르트를 먹여 주었다.
“맛있어?”
채하가 타르트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말도 안 하고 왔어?”
“그냥, 보고 싶어서.”
내 말에 채하는 수줍게 웃었고 친구들은 커퀴벌레 새끼들이라고 중얼거렸다. 간식 시간이 끝나고 채하가 지금 하는 것만 마무리 짓고 집에 가자기에 의자를 끌어와 그의 옆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작게 인화된 결혼사진과 가장 최근에 받은 피치의 초음파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오랫동안 액자 속 사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집중 중인 채하의 옆모습을 보았다.
평소엔 안경을 쓰지 않지만 일할 땐 안경을 썼다. 반듯한 이마부터 옅은 속쌍꺼풀이 진 눈, 높은 콧대부터 붉은 입술까지 눈으로 그리듯 천천히 훑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렸다. 짧게 입을 맞춘 채하가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퇴근 전 함께 저녁을 먹자는 친구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자는 말은 친구들이 먼저 했지만 메뉴 선택권은 나에게 있었다.
“채하야, 막창 먹을 수 있겠어?”
“응. 나 이제 고기 먹어도 괜찮다니까.”
결혼식 이후로 입덧이 나아진 채하는 이제 고기 냄새에 역하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막창 먹으러 가자. 나 막창 먹고 싶어.”
내 말에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식당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전화를 해 둔 덕에 테이블 세팅이 완료되어 있었다.
“빨리 구워 줄게. 조금만 기다려.”
자리에 앉자마자 채하가 집게를 손에 들었다. 불판 위에 막창을 올리고 구워지는 대로 내 앞접시 위로 올려 주었다.
“야, 설채하. 나도 입 있어.”
윤호가 채하에게 앞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네가 알아서 먹어.”
“유지원 쟤도 손발 다 있거든?”
“우리 지원이는 피치 것까지 먹으려면 바빠서 내가 챙겨 줘야 돼.”
그 말에 윤호는 직원을 불러 소주를 시켰다. 그리고는 혼자 한 잔 가득 따라 마시더니 “결혼 안 한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하고 중얼거렸다. 한 잔 마신 윤호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술을 따라 주기 시작했다.
“야, 채하는 왜 안 줘.”
친구들은 채하를 빼고 자기들끼리 잔을 맞댔다. 내가 따지자 선준이가 큰 소리가 나게 소주병을 채하 앞에 내려놓았다. 선준이를 한 번 노려보고 병을 들어 채하에게 따라 주었다.
“얼른 마셔.”
소주잔에 물을 채워 채하와 잔을 부딪쳤다. 채하는 내가 마시는 것을 본 후에야 술잔을 비웠다. 나는 채하의 입에 잘 구워진 막창 하나를 넣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그가 나에게 해 주던 것이었다. 오늘은 내가 챙겨 주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채하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갑자기 배가 꾸르륵거리는 느낌이 났다.
“아.”
“왜 그래? 배 아파?”
배에 손을 얹고 멈칫하자 채하는 놀란 표정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괜찮아. 안 아파.”
채하는 괜찮다는 말에도 여전히 걱정스러워했다. 나는 배 속이 꾸르륵거리는 느낌에 ‘벌써 먹은 것이 소화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요즘 우리는 매일 저녁 식사 후 산책을 했다. 오늘도 해가 완전히 지자 채하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가로등이 켜진 산책로를 걷다가 갑자기 먹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채하야, 나 떡볶이 먹고 싶어.”
“집에 갈 때 재료 사 가자. 내일 해 줄게.”
채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또 갑자기 배가 꿀렁거렸다.
“아, 왜 자꾸 배가 꿀렁거리는 것 같지.”
“태동 아니야?”
“태동은 막 발로 차고 그러지 않나? 꾸르륵거리는 느낌이야.”
채하가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기 시작했다.
“맘 카페 찾아봤는데 그거 태동 맞는 것 같대.”
등업 조건을 보고 가입을 포기한 나와는 달리 채하는 맘카페 정회원이었다. 태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꼼지락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피치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다. 채하는 평소처럼 내 배에 튼 살 크림을 발라 주고 피치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지원아, 나 피곤해서 먼저 잘게.”
동화책을 다 읽은 채하가 나에게 입을 맞추고 먼저 눈을 감았다. 채하는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지만 나는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잠든 채하가 깰까 화면의 밝기를 낮추고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조금만 보다가 자려고 했지만 어느새 유료 결제까지 하고 있었다. 웹툰을 전부 보고 나자 12시가 가까웠다. 나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자 떡볶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내일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잠은 안 오고 머릿속은 온통 떡볶이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세상모르고 자는 그를 깨웠다.
“채하야, 채하야….”
“…으응….”
대답은 했지만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한번 채하를 불렀다.
“채하야.”
“…….”
이번에는 대답도 없었다. 나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곤히 자던 채하는 내가 깨우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왜 그래? 왜?”
“나 떡볶이 먹고 싶은데…. 내가 불렀는데 왜 안 일어나….”
울먹거리는 내 목소리에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얼른 해 줄게.”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스 불을 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주방 불만 켠 채로 칼질을 하고 있는 채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밖으로 나오는 소리에 채하가 뒤를 돌았다. 여전히 울먹이는 나를 보는 채하는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지원이가 부르는지도 모르고 잤어.”
채하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나에게 사과했다. 나는 뒤에서 채하를 껴안고 등에 얼굴을 기댔다.
“아니야. 네가 왜 미안해.”
허리를 안은 내 손을 토닥거리다가 “뒤에서 껴안고 또 도망가는 거 아니지?” 하고 농담을 했다.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아니야.” 하고 웅얼거렸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떡볶이가 완성될 때까지 등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채하도 내가 안고 있는 것이 좋은지 조심하라는 말만 하고 나를 떼어 놓지 않았다.
“얼른 먹어.”
접시에 떡볶이를 덜어 내 앞에 놔 주고 포크까지 손에 들려 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한 뒤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떡을 씹자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떡의 식감도 자극적인 맛도 아니었다.
“맛있어?”
맛있냐고 묻는 채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크로 떡을 하나 더 찍어 입에 넣었다. 나를 울게 만들 정도로 떡볶이가 먹고 싶던 마음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싹 사라졌다.
“맛없어?”
괜찮다고 했어도 표정에서 티가 났는지 채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니이…. 맛있는데…. 내가 먹고 싶은 맛이 아니야.”
울면서 이게 아니라고 하자 그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맛이 아니야? 그럼 다시 만들어 줄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대답에 채하는 “배달시킬까?” 하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채하가 핸드폰을 들고 배달 앱을 켰다. 하지만 12시가 넘은 시간에 문을 연 떡볶이집은 없었다.
“지원아…. 다 문 닫은 것 같은데….”
내 눈치를 보며 채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잘못이 아닌 걸 알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까 먹고 싶다고 할 때 바로 사 줄 걸 그랬다.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채하는 서럽게 우는 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겨우 떡볶이 하나로 엉엉 울고 있는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채하에게 안겨 한참을 울고서야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채하야…. 미안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눈물이 멈추자 겨우 떡볶이 하나로 울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우리 피치가 나 닮아서 울보인가 봐.”
채하는 내 탓이 아닌 자신과 피치에게 그 이유를 돌렸다. 나는 다시 포크를 들고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채하가 내일 먹고 싶은 걸로 사 주겠다며 말렸지만 나는 포크를 내려놓지 않았다. 처음 먹어 보는 눈물 젖은 떡볶이였다.
“먼저 들어가서 자.”
“아니야. 괜찮아.”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얼굴엔 피곤이 잔뜩 묻어 있었다. 채하를 얼른 재우기 위해 포크를 내려놓았다.
“더 안 먹어도 되겠어?”
“응. 배불러.”
배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채하를 위해 거짓말을 했다. 양치를 하고 침대로 돌아오자 채하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나는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러나 침대에 눕자 채하는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익숙한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나는 채하보다 먼저 눈을 떴다. 지난밤의 야식과 눈물 때문에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채하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왔다.
시계를 보니 그가 일어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침실 문을 닫고 주방으로 갔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어제 떡볶이를 만들고 남은 어묵을 볶았다. 미리 끓여 놓은 국을 데워 상을 차리자 채하가 일어날 시간에 맞춰 그럴듯한 아침상이 완성되었다. 나는 침실로 들어가 채하를 깨웠다.
“채하야, 아침 먹자.”
눈을 비비고 일어난 채하는 “배고파? 조금만 기다려. 금방 차려 줄게.” 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내가 아침 차렸으니까 밥 먹자고.”
그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 위를 보자 채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원이가 차린 거야?”
“응. 내가 했지.”
밥과 어묵볶음 외에는 모두 채하가 만들어 둔 것이지만 내가 자신을 위해 상을 차렸다는 것 자체로 기분이 좋은 듯했다.
“이거 내가 만들었어.”
어묵볶음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말에 어묵부터 입에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온갖 감탄사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그 반응에 어깨가 으쓱해진 나는 내가 만든 어묵볶음을 하나 집어 먹었다.
“윽, 짜.”
만들 때 간 보는 것을 깜박했더니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도 짠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괜찮냐고 묻자 채하가 밥과 함께 먹으면 된다고 했다. 그는 내가 만든 어묵볶음을 남기지 않고 전부 먹어 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채하가 바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는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지원아.”
“응?”
“다음부터 아침 차리지 말고 푹 자.”
그 말에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어묵이 맛이 없었구나….” 하고 중얼거리자 채하는 화들짝 놀랬다.
“아, 아니야. 나는 지원이 힘든 거 싫어서 그런 거야.”
“농담이야.”
내 말에 채하는 그제야 안심한 듯했다. 설거지를 마치자 채하에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밥값.”
채하가 평소에 나에게 하던 것이었다. 그는 내 행동에 크게 웃고 입을 맞췄다.
“거스름돈.”
나는 그의 얼굴을 잡고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채하는 “오늘 출근하지 말까?” 하고 물었다. 그의 손을 잡아끌어 욕실로 밀어 넣었다.
“빨리 씻고 회사 가.”
“자기야, 문 열어 줘.”
문을 닫아 버리자 채하가 욕실 안에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나는 열어 줄 생각이 없었다. 물소리가 들리자 문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발걸음을 돌렸다. 양치와 세수를 하고 다시 침대에 눕자 채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잘 거야?”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채하는 내가 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리에 두른 수건을 풀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채하의 뒷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잘 봤어?”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옷을 다 입은 채하가 물었다. 나는 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로 다가온 그가 내 몸을 덮은 이불을 끌어 내렸다.
“자기도 내 몸 봤으니까 나도 볼래.”
채하가 잠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야, 맨날 보면서 무슨.”
단추를 풀고 있는 채하의 양손을 잡았다. 손목을 잡자 그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빨리 원래대로 해 놔.”
채하는 입을 잔뜩 내밀고 투덜거리며 단추를 하나씩 잠그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채하의 손을 잡고 현관까지 걸어갔다.
“잘 갔다 와.”
“응.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바로 전화해. 울지 말고.”
“안 울어!”
채하는 내게 입을 맞추고 허리를 숙여 피치에게도 인사했다.
“피치, 아빠 돈 벌어 올게. 먹고 싶은 거 있다고 지원 아빠 울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겠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자 다시 침실로 돌아와 누웠다. 배에 손을 얹고 속으로 피치에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밤 9시 전에 얘기해’ 하고.
피치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배 속이 한 번 더 꿀렁거렸다. 몇 번을 겪어도 적응이 안 되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
평소 피치를 만나러 병원에 가면 기분이 좋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체중이 너무 많이 늘었네요. 몸무게가 갑자기 늘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어요.”
식단에 신경 쓰라는 선생님의 말을 마지막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하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 같은 나와 달리 피치가 잘 크고 있다는 말에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었다.
“너는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는다는데 웃음이 나와?”
결국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채하에게 짜증을 냈다. 한껏 가시가 돋아 있는 내 말에 그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식욕이 늘고 감정 기복이 심해진 이후로 채하는 내 비위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에도 짜증을 낼 일이 아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그에게 화풀이를 해 버린 후였다.
“짜증 내서 미안해.”
곧바로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아니야. 나도 미안해. 지원이 기분 안 좋을 텐데 내가 눈치 없이 좋아하기만 했어.”
내가 짜증을 내고 사과하면 채하도 항상 미안하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채하가 잘못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사과를 하곤 했다. 나는 머쓱함에 말없이 오늘 받아 온 초음파 사진만 들여다보았다.
집에 오자마자 찬장을 가득 채운 과자를 모두 꺼내 빈 상자에 담았다.
“뭐 하는 거야?”
내 행동을 지켜보던 채하가 물었다.
“나 이제 군것질 안 하고 밥만 먹을 거야.”
“진짜?”
“체중 조절 별거 아니지 뭐.”
마음만 먹으면 체중 조절 정도는 쉽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나는 채하에게 과자로 가득 찬 상자를 들려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앞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못 찾는 곳에 잘 숨겨 놔.”
나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그 말을 후회했다. 군것질 생각이 나서 잠든 채하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채하가 과자 상자를 둔 다용도실로 들어갔지만 아무리 찾아도 내가 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과자 대신 냉장고 구석에 있던 사과 하나와 바나나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배를 채운 내가 침대로 돌아가자 채하가 잠에서 깨 부스스 눈을 떴다.
“어디 갔다 왔어?”
“화장실.”
“얼른 자.”
채하는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 누워 배를 토닥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든 듯 배 위에 올려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 그냥 앞으로 6시 전에는 먹고 싶은 거 먹고 운동할래.”
다음 날 아침, 군것질 생각에 잠 못 이룬 나는 24시간도 되지 않아 내 결정을 번복했다.
“그래. 같이 운동하자.”
채하는 다용도실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왔다. 그 안에는 과자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뭐야? 어제 내가 준 상자 아니잖아.”
“못 찾게 숨겨 놓으라고 해서 다른 상자에 넣어 뒀지.”
다시 찬장 안으로 과자를 정리해 넣는 채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려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어제 시킨 택배가 와 있었다.
“너무 큰 걸 샀나.”
심신 안정과 태교, 아기방 인테리어.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으려는 욕심에 산 피포 페인팅이었다. 이왕 하는 거 제일 예쁜 작품을 피치 방에 걸어 주고 싶어서 가장 크고 복잡해 보이는 그림을 샀지만 도안을 보자마자 후회가 되었다.
“칸이 너무 작은데.”
빽빽하게 나눠진 칸에 한숨을 한 번 쉬고 설명서를 펼쳐 읽었다. 설명서대로 제일 작은 붓을 꺼내 물을 조금 묻히고 1번이라고 쓰여 있는 칸부터 칠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 깜빡이는 것을 잊을 정도로 색칠에 집중했다.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달리 물감은 선을 벗어나 삐뚤빼뚤하게 칸을 채우고 있었다.
“아, 힘들다. 피치야, 아빠가 너 주려고 지금 뭐 하는지 알아?”
당연한 일이었지만 피치는 대답이 없었다. 첫 번째 색을 다 칠한 후에야 눈이 시릴 정도로 말라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지로 하품을 해서 눈물이 나오게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직 남은 부분이 훨씬 많은 캔버스를 보자 막막했지만 다시 붓을 움직였다. 그러나 네 번째 물감의 뚜껑을 열기도 전에 붓을 내던졌다.
“심신 안정은 무슨. 하고 있으면 속에서 열불만 나는데.”
내가 짜증이 나면 피치도 짜증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색칠을 멈추고 태블릿 PC를 꺼내 드라마를 이어 보기 시작했다. 곧바로 주인공이 좀비 떼에 쫓기고 있는 장면에 집중했다. 퇴근한 채하가 돌아올 때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피치랑 잘 놀고 있었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온 나에게 채하가 물었다.
“응. 잘 다녀왔어?”
거실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채하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걸었다.
“저건 뭐야?”
거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물감과 캔버스를 본 채하가 물었다.
“피포 페인팅. 피치 방에 걸어 주려고 샀는데 저거 하니까 눈도 아프고 몸도 뻐근해.”
“아이고, 오늘 하루 종일 저거 했어?”
“응. 이따 자기가 해 줘.”
조금 하다가 붓을 던져 버린 것은 숨기고 평소 쓰지 않는 호칭까지 붙여 가며 애교를 부렸다.
“알겠어. 저녁 먹고 같이하자.”
채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입이 귀에 걸려 함께하자고 했다. 그에게 전부 시킬 생각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얼른 저녁 차려 줄게.”
평소였으면 채하 혼자 식사 준비를 했겠지만 오늘은 나도 거들었다. 칼을 들고 채소를 써는 채하 옆에 서서 그릇에 계란을 깼다.
“계란 다 깼어.”
계란이 담긴 그릇을 보여 주며 말하자 그는 양념통을 꺼내 그 위에 설탕과 소금을 뿌렸다.
“이제 저어 줘.”
그 말에 포크로 노른자를 톡톡 터트리고 흰자와 잘 섞이게 휘저었다. 완전히 노란색으로 변하자 채하는 물이 끓고 있는 뚝배기에 계란 물을 전부 부었다. 계란찜이 익을 동안 밥솥에서 밥을 푸는 채하를 보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
“잘 먹겠습니다.”
“꼭꼭 씹어 먹어.”
계란찜을 한 숟가락 떠 후후 불고 입에 넣었다. 몽글몽글한 식감의 계란찜이 입 안에서 사르르 부서졌다. 뚝배기 설거지가 귀찮다고 우리 엄마도 별로 해 주지 않는 것이었지만 채하는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주 만들곤 하는 메뉴였다.
“맛있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숟가락을 들었다. 채하가 식사 준비를 하는 날엔 내가 먼저 한 숟가락 떠먹은 후에야 식사가 시작됐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 사이 나는 커피를 내렸다. 우리는 연하게 내린 커피를 한 잔씩 들고 거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캔버스를 자세히 본 채하도 막막한지 혀를 내둘렀다.
“왜 이렇게 큰 걸 샀어?”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서. 태교도 하고 피치 방에 걸어 주려고 그랬지.”
심신 안정의 효과가 요즘 부쩍 짜증이 늘어난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는 것은 비밀로 했다. 캔버스를 꼼꼼하게 살펴본 채하가 제일 작은 크기의 붓을 들고 빈칸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나와 다르게 그는 완벽하게 선 안을 채웠다.
“우와.”
내 감탄에 채하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버린 채하는 한 칸을 칠할 때마다 뽀뽀 한 번을 요구했다.
“한 칸에 한 번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뭐가 많아. 원래 세 번 하려다가 깎아 준 거야.”
한 번에 후불로 받겠다는 말을 하고 다시 붓을 잡는 채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제일 큰 붓을 들어 성의 없이 쓱쓱 칠했다.
“채하야.”
“응?”
채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열심히 하라고.”
그에 비해 나는 붓을 든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었다. 턱을 괴고 대충대충 색칠하다가 빨간 물감이 눈에 들어왔다. 붓에 묻은 파란 물감을 대충 훑어 내고 빨간 물감을 붓에 묻혔다. 그리고 물감통을 든 채하의 왼쪽 손등으로 붓을 가져갔다.
“…….”
손등 위로 한 획을 긋고 지나갈 때까지 채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붓을 움직여 한 획을 더 긋자 그의 손등 위에 찌그러진 빨간 하트가 완성됐다.
못생긴 하트였지만 마음에 들었는지 채하가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미소를 지었다.
***
9월에 접어들자 우리는 피치를 만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요즘 채하의 관심사는 피치 방 꾸미기였다. 내가 쓰던 방을 피치 방으로 만들기로 한 이후 벽의 색부터 커튼과 가구까지 하나하나 직접 고르고 있었다.
“지원아, 이것 중에 골라 봐.”
채하가 페인트 색상표를 내 앞에 내밀었다.
“전부 다 똑같은 하늘색인데 뭘 골라?”
“아니야. 잘 봐 봐. 조금씩 다 달라.”
자세히 보자 조금씩 다른 색이었지만 큰 차이가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색상표를 쳐다보며 곰곰이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러곤 손으로 아무거나 하나를 찍었다.
“이게 제일 낫지 않을까?”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내가 어떻게 고른 줄도 모르고 마음이 통했다며 좋아했다. 페인트 색을 결정한 채하는 곧바로 커튼과 러그를 고르기 시작했다.
“지원아, 러그는 무슨 색으로 할까? 커튼이랑 같은 색으로 사는 게 좋겠지?”
“응. 어두운색으로 사.”
“왜?”
“밝은색은 빨기 힘들어. 아기가 놀다가 뭐 흘리면 어떡해.”
“그래도….”
나와 생각이 다른지 아쉬운 목소리였다. 결국 우리는 밝은 회색으로 합의했다. 채하가 고른 색과 내가 고른 색의 중간 지점이었다. 나는 저 결정을 마지막으로 아기방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그에게 일임했다.
며칠 후, 피치의 방에 들어갈 물건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그 주 주말, 우리는 내가 쓰던 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내 침대는 미리 작업실로 옮겨 놓은 상태였다.
“지원아, 작업실에 침대 있어도 나랑 같이 자야 하는 거 알지?”
“너 하는 거 봐서.”
농담 같은 내 대답에 채하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옷장 문을 열고 안에 든 것을 전부 꺼내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옮겼다. 옷을 정리하는 사이 채하가 벽장 안을 청소했다.
“지원아, 지원아. 자기야!”
다급하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채하의 급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방 안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이거.”
채하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지난번에 숨겨 뒀던 앞치마가 있었다.
“저거 어디 갔나 했더니 우리 자기가 숨겨 놨구나. 서프라이즈 이벤트 해 주려고 그랬어?”
“아니야! 버려.”
“한 번만 입어 줘. 제발, 내 소원.”
채하는 소원이라며 앞치마를 들고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드레스 룸의 옷을 정리하고 있는 내 뒤에서 한 번만 입어 달라며 계속 징징거렸다.
“네가 입어.”
“나는 입어 봤잖아. 그러니까 지원이도 한 번 입는 게 공평하지.”
“야, 내가 입으라고 했냐? 넌 네가 입고 싶어서 입은 거잖아.”
나는 바닥에 벌러덩 누워 소리쳤다. 바닥에 눕자 채하는 나를 번쩍 안아 침대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는 내 목에 앞치마를 걸어 버렸다. 몸을 일으켜 앞치마를 벗으려고 하자 채하는 나를 꽉 끌어안고 등 뒤에서 허리끈을 묶었다.
“와, 자기야. 우리 그거 입고 한 번만 할까?”
채하가 내 바지를 끌어 내렸다.
“설채하 진짜 변태 같아.”
“응응, 나 변태 할게.”
갑자기 배 속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나와 동시에 배에 손을 얹고 있던 채하도 함께 놀랐다. 지금까지 꾸물거리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채하야, 너도 느꼈지?”
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울더라도 못 이긴 척 받아 줄 생각이었던 나는 생각을 바꿨다. 그도 비슷한 생각인지 내게 바지를 다시 입혀 주었다.
“피치, 아빠들끼리 노는 거 방해하는 거야?”
채하가 배에 대고 물었다.
“피치가 나 일으켜 주고 빨리 가서 청소하래.”
그 말에 채하는 나를 일으켜 주고 입을 맞췄다. 우리는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방 안의 물건이 정리되자 채하가 페인트 통과 도구를 들고 왔다.
“이제 내가 할 테니까 가서 쉬어.”
“아니야. 같이해.”
“페인트 냄새 나서 안 돼.”
채하의 손에 방 밖으로 밀려났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나는 다시 방 앞을 서성거렸다. 결국 나는 방 문턱에 앉아 채하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페인트 롤러가 지나갈 때마다 밝은 아이보리색이었던 벽이 하늘색으로 변해 갔다.
“일단 한 번 다 칠했으니까 점심 먹고 한 번 더 해야겠다.”
“쉬고 있어. 내가 점심 차려 줄게.”
채하를 소파에 앉혀 놓고 주방으로 갔다.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 냉장고에서 꺼낸 채소를 다지고 있을 때 채하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쉬고 있으라니까?”
“이거 입고 해. 옷에 묻으면 어떡해.”
그의 손에는 내가 벗어 버린 분홍색 앞치마가 들려 있었다. 내가 앞치마를 입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앞치마를 낚아챘다.
“뒤에 끈 묶어 줘.”
등 뒤에 선 채하가 끈을 다 묶을 때까지 한숨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칼질 한 번에 설채하 변태를 중얼거리며 채소를 다졌다. 도마 위의 당근이 작은 크기로 변했을 때 그가 나를 불렀다.
“자기야, 밥 먹기 전에 할래, 먹고 할래?”
“뭘?”
“알면서.”
수줍은 척 옆구리를 찌르는 모습을 보자 할 말이 없어졌다. 채하를 무시하고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다진 야채를 넣고 볶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와 함께 야채가 익어 가는 동안 채하는 내 옆에 서서 풀이 죽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힐끔힐끔 나를 훔쳐보았다.
“소금.”
채하가 소금을 꺼내 팬 안으로 톡톡 뿌렸다. 밥이 어느 정도 볶아지자 한 숟가락 떠 후후 불었다.
“아-.”
먹기 좋을 정도로 식은 볶음밥이 올려진 숟가락을 그의 입 안으로 넣었다. 우물거리는 채하에게 맛있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 불을 끄고 그릇에 볶음밥을 나눠 담았다.
“잘 먹을게.”
“맛있게 먹어.”
오늘은 채하와 내 말이 평소와 반대였다. 나는 채하가 한 숟가락 떠먹는 것을 보고 숟가락을 들었다.
“이따 저녁 뭐 먹을까?”
입이 짧은 편이었던 나는 이제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얼마 전의 떡볶이 소동 이후 채하는 내가 먹고 싶다는 것은 다음 날 메뉴로 미루지 않았다. 눈에 띄게 고민하자 채하는 생각해 보고 말해 달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앞치마를 벗어 설거지를 하는 채하에게 입혀 주었다.
“이따 쓰레기 버릴 때 그 앞치마도 버려.”
“싫어. 안 버릴 거야.”
앞치마를 입고 한 번만 하자며 여전히 떼를 썼다. 알몸 앞치마라는 변태 같은 걸 누가 먼저 생각해 냈는지 알게 된다면 얼굴에 대고 쌍욕을 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설거지를 끝낸 채하는 앞치마에 손에 묻은 물기를 쓱쓱 닦았다. 그러곤 진한 분홍색으로 변해 버린 앞치마를 벗었다.
“지원아, 자기야. 가자.”
식탁에 앉아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여전히 손에는 앞치마를 들고 있었다.
“나 그거 입히면 안 할 거야.”
“제발 한 번만. 응?”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채하는 손에 든 앞치마를 저 멀리로 던져 버렸다. 시야에서 앞치마가 사라지자 입고 있던 바지를 벗었다. 내가 먼저 바지를 벗자 채하는 놀란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바지마저 내려 버리고 이미 단단하게 선 성기를 입에 물었다.
이미 쿠퍼액으로 젖은 성기는 혀가 닿자 짭짤한 맛이 났다. 나는 그 맛에 인상을 찌푸리고 성기를 입 안 깊숙이 삼켰다. 목구멍 안을 찌르는 느낌에 자동적으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멈추지 않고 가득 머금었다.
치아를 세우지 않고 움직이려니 보통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아니었다. 결국 숨이 턱턱 막혀 입에서 그의 성기를 빼냈다. 채하는 협탁 서랍에서 필요한 것들을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놨다.
나는 채하에게 빠르게 콘돔을 씌우고 실리콘 링까지 끼워 준비를 마쳤다. 그러고는 젤을 쭉 짜내 채하의 성기와 내 엉덩이 사이에 치덕치덕 발랐다. 숨을 한 번 고르고 그의 위에 천천히 앉았다.
“흐읏, 으응, 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크기였지만 끝까지 들어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채하의 목을 끌어안고 천천히 하체를 움직였다. 남은 옷을 전부 벗기려는 듯 채하는 내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으응, 벗기지 마. 싫어.”
꽤 많이 나온 배 때문에 일부러 티셔츠를 벗지 않았는데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결국 나를 완전히 알몸으로 만든 채하는 내 한쪽 유두를 혀끝으로 찔러 댔다.
“흐읏, 아흑, 으…. 흐… 으응.”
말캉한 혀의 촉감이 닿자 가슴의 돌기가 바짝 서 버린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채하는 아예 가슴 한쪽의 살을 끌어모아 츄읍, 하는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였다. 입술을 점점 옆으로 움직이면서 하얀 피부 위로 붉은 자국을 만들어 냈다.
나는 이제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고 채하의 목에 매달려 신음만 했다. 그는 내 엉덩이를 받쳐 안고 나를 억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흐윽…! 으응…! 아, 채하야아, 으, 너무….”
계속 아래를 자극하는 느낌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채하가 움직이는 대로 신음하는 수밖에 없었다. 3분의 2 정도 들어왔을 뿐인 저게 전부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지원아, 힘, 후, 힘 풀어.”
예민한 내벽 안을 긁어 대는 느낌에 내 마음대로 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몰려오는 쾌감에 나도 모르게 채하의 어깨를 물어 버렸다. 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만큼 세게 물려 아플 만도 한데 전혀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으흣…. 천천히. 아, 흐으.”
애원에도 속도는 늦춰지지 않았다. 심지어 한 손으로는 내 성기를 주물러 댔다. 앞과 뒤를 동시에 자극하자 몸이 부르르 떠는 것과 동시에 하얀 정액을 토해 냈다. 사정한 것을 본 채하가 내 안에서 성기를 빼냈다. 성기가 빠져나가면서 주는 자극에 나는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아직 사정하지 못한 채하의 성기는 여전히 흉흉한 모양새를 뽐내며 서 있었다. 채하는 링과 콘돔을 벗겨 내고 성기 위로 젤을 쭉 짜냈다. 그러곤 헐떡거리고 있는 나를 옆으로 눕혀 허벅지 사이로 단단하게 선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흣, 으으응. 이거 이상해애.”
젤이 잔뜩 발라져 미끄덩한 성기가 내 회음부와 고환을 한 번에 훑고 지나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옆으로 누운 나를 뒤에서 껴안은 채하가 움직이는 속도를 점점 높이기 시작했다.
“흐응, 읏, 하아…. 아, 흐.”
채하는 내 배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채하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렸다. 다행히 피치는 자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있던 그가 내 귓불을 깨물었다. 귓불부터 귓바퀴까지 잘근잘근 씹으며 올라가는 느낌에 온몸이 전율했다.
“후우, 지원아,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답 대신 겹쳐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젤이 가득 묻은 살들이 부딪히면서 나는 야한 소리가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소리가 들리는 간격이 줄었다. 그와 동시에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하, 아… 으응…!”
나보다 먼저 사정한 채하가 내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어느 부분을 만지면 빨리 사정하는지 잘 알고 있는 그는 손짓 몇 번으로 나를 사정하게 만들었다. 두 번의 사정을 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돌려 채하에게 안겼다. 강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에 기절하는 것처럼 잠들어 버렸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채하는 잠들어 있었다. 침대 밖으로 발을 딛자 나도 모르게 곡소리가 나왔다. 잠든 사이에 채하가 닦아 준 것인지 몸 이곳저곳에 묻었던 젤은 모두 사라지고 보송보송한 느낌만 남았다.
“아, 죽겠다 진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채하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닫고 침실을 나왔다. 그리고 이제 내 것이 아니라 피치의 것이 되어 버린 방의 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어 놓았지만 방 안에는 아직 페인트 냄새가 강하게 났다.
배에 손을 얹고 ‘피치야, 채하 아빠가 피치 방 만들어 주고 있어. 기대되지?’ 하고 속으로 말을 걸었다. 피치의 방에 놓을 물건들을 생각해 보며 완성된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둘만 살던 집이 세 명이 사는 집으로 변해 가는 것이 실감이 났다.
다시 방을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우리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언젠간 그 옆을 차지하게 될 가족사진을 상상했다.
“지원아.”
우리의 미래를 그려 보고 있을 때 채하가 침실에서 나왔다.
“잘 잤어?”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다시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내 허벅지에 머리를 비비는 모습을 보자 피치도 채하를 닮아 애교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하야, 너는 피치가 누구 닮았으면 좋겠어?”
“난 지원이 닮았으면 좋겠어.”
손끝으로 느리게 채하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마에서 코로, 코에서 입술로. 그리고 다시 눈가로. 손가락으로 이목구비를 따라 그리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난 눈은 너 닮았으면 좋겠어.”
“왜?”
“나 닮으면 눈꼬리 올라가서 사나워 보일까 봐.”
“나는 피치가 눈, 코, 입 다 지원이 닮았으면 좋겠어.”
채하는 내 눈가에서 코로, 코에서 입술로 천천히 입을 맞췄다. 눈, 코에는 짧게 입을 맞췄으나 입술에 입을 맞췄을 때는 그 안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떨어졌다. 채하가 부리로 쪼듯 내 입술에 쪽쪽 소리가 나는 입맞춤을 남기고 다시 피치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피치가 누구의 얼굴을 닮든 상관없지만 피지컬은 채하를 닮기를 바랬다. 나도 평균 이상의 키였지만 180센티미터를 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채하의 계획대로 완성된 피치의 방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놓인 인디언 텐트 안에 인형 세 개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강아지 인형과 사막여우 인형 사이에 놓인 복숭아 캐릭터 인형의 모습이 우리 가족 같았다.
***
“어? 이게 뭐야.”
택배 상자를 열자 빨간색 립밤이 들어 있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주문 내역을 다시 확인했다. 주문 목록에는 무료 배송을 위해 끼워 넣은 무색 립밤이 아니라 빨간색 립밤이 있었다.
“아, 내가 잘못 주문한 거네.”
주문 과정에서 무색이 아닌 빨간색을 고른 모양이었다. 3천 원짜리 립밤을 교환하자고 왕복 배송비 5천 원을 내기엔 아까웠다. 포장을 뜯어 뚜껑을 열었다. 발색을 확인하기 전 냄새를 맡았다. 달콤한 딸기 향이었다. 손잡이를 돌려 내용물을 손등에 한 번 긋자 진한 빨간색 뚜껑과 다르게 옅은 분홍색이 나왔다.
색을 확인하고 립밤을 쓱쓱 발랐다. 입술에 고르게 퍼지도록 몇 번 뻐끔뻐끔한 후 거울을 보자 전보다 붉어진 입술 때문에 얼굴이 조금 화사해 보이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는 것 같아.”
채하가 보기에도 비슷한 생각인지 퇴근한 이후로 내 옆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입술에서 딸기 향이 난다며 계속해서 입술을 빨아 댔다. 립밤을 전부 빨아 먹은 다음에야 아쉬운 얼굴로 떨어졌다. 내 입술은 퉁퉁 부어 있었다.
“입술 통통해지니까 더 예뻐 보여.”
다시 나를 끌어당기는 채하를 밀어냈다.
“피치가 배고프대. 밥 달래.”
채하는 “아빠가 미안해. 얼른 밥 줄게.”라고 말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피치에게 속으로 말을 걸기는 했지만 육성으로 말해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에 비해 채하는 피치와 자주 태담을 나눴다.
식사를 마친 후 채하는 털실과 대바늘을 꺼내 왔다.
“그게 뭐야?”
“우리 피치 모자랑 목도리 떠 주려고.”
“뜨개질할 줄 알아?”
“아니, 동영상 보고 배우면 금방 할 수 있대.”
그 말에 태블릿 PC로 뜨개질 동영상을 찾아서 틀었다. 나와 함께할 생각이었는지 바늘을 두 개나 사 왔다.
“같이하자고 바늘 두 개 사 온 거야?”
채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해 줄 거지?” 하고 물었다. 우리는 한 손으로 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늘을 잡은 채 동영상에 집중했다. 영상 속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그럴싸한 매듭이 지어지는 그의 바늘과는 다르게 내 손에 들린 실과 바늘은 엉망진창으로 꼬여 버렸다.
“아무리 봐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어려워.”
내가 징징거리자 채하가 나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혔다. 실과 바늘을 잡고 있는 내 손을 감싸 쥐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하가 움직이는 대로 바늘에 실을 걸어서 당기자 매듭이 하나 완성되었다.
완성된 코를 보고 감탄하자 뒤에서 나를 안은 그가 내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도리의 너비만큼 코의 개수가 늘어나자 손을 멈췄다.
대바늘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채하에게 입을 맞췄다. 한참을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채하가 테이블 위에 있던 립밤을 들어 내 입술에 발랐다. 립밤의 뚜껑을 닫고 다시 입을 맞추자 방금과는 다르게 끈적끈적했다.
한참 입술을 맞대고 장난치던 우리는 다시 뜨개질에 집중했다. 채하는 몇 번 시행착오를 겪는 것 같더니 목도리를 쭉쭉 떠 내려갔다. 그에 비해 내 손에 들린 것은 목도리라고 부르기엔 조금 어려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나 안 할래.”
결국 나는 뜨개질을 포기했다. 바늘에서 이상하게 엮여 버린 실 덩어리를 빼내 다시 실타래에 감았다. 나는 잠자리에 들 생각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새로 산 목욕용품은 전부 복숭아 향이 나는 것들이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자 몸에 복숭아 향이 가득했다. 속옷만 입고 밖으로 나와 잠옷을 꺼내 입고 단추를 하나씩 잠그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운데 단추부터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잠기지 않았다.
“채하야….”
머리를 말려 주러 들어온 채하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잔뜩 침울해져 있었다.
“왜 그래? 왜 옷 안 입고 그러고 있어?”
채하가 잠옷 상의의 단추를 잠그다 말고 멍하니 선 나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단추가 안 잠겨.”
“어?”
그제야 팽팽하게 벌어진 잠옷이 보인 모양이었다. 채하는 잠시 기다리라더니 드레스룸에서 자신의 티셔츠 하나를 꺼내 왔다. 내 잠옷을 벗기고 머리 위로 티셔츠를 끼워 넣었다.
“내일 잠옷 새로 사 올 테니까 오늘은 이거 입고 자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하가 나를 화장대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말려 주었다. 뜨거운 바람에 머리가 날리자 복숭아 향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함께 침대에 눕자 채하는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었다.
“채하야, 나 이거 발라 줘.”
채하에게 협탁 위에 놓아둔 보디로션을 발라 달라고 했다. 내 손에서 로션 통을 받아 뚜껑을 열고 내 팔에 쭉 짰다. 팔뚝 안쪽의 여린 살을 문지르고 지나간 손은 천천히 팔 전체를 쓸어내렸다.
그러곤 손바닥 가득 로션을 덜어 내 발목부터 꼼꼼하게 발랐다. 발목에서 점점 올라간 손은 내 무릎 안쪽을 간지럽히듯 움직였다.
“아, 채하야…!”
허벅지를 만지는 손에 나도 움찔하고 놀라 버렸다. 그러나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허벅지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손바닥 위로 가득 짜낸 로션이 전부 흡수되자 채하는 내가 입고 있는 속옷을 끌어 내렸다.
요즘 우리는 섹스 대신 가벼운 손장난을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혀끼리 비벼지는 소리가 나면서 채하는 흥분이 잔뜩 섞인 한숨을 뱉었다.
“후우.”
채하는 내 배를 누르지 않으려 온 신경을 기울였다. 나는 채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쇄골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언저리, 페로몬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에 입술을 묻고 힘을 줘 빨아들였다. 붉은 자국이 남자 그 옆에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의 오른쪽 쇄골과 가슴 부근에 붉은 자국이 여러 개 남은 후에야 나는 입을 뗐다.
***
“지원아, 일어나.”
채하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아침에 나를 깨웠다.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안아서 일으키는 채하의 손을 잡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로 밖으로 나오자 식탁 위가 미역국과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가득했다.
“생일 축하해.”
새벽같이 일어난 채하가 차린 내 생일상이었다. 식탁 의자를 빼서 나를 앉히고 손에 숟가락을 들려 주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맛있어?”
“응. 우리 엄마가 해 주는 거랑 똑같아.”
“다행이다. 다른 것도 같이 먹어.”
고개를 끄덕이고 식사를 시작했다. 채하는 내가 밥 한 술을 뜰 때마다 반찬을 올려 주느라 바빴다.
“반찬 올려 주니까 예전 생각난다.”
“예전?”
“응. 나 기억 잃었을 때 자주 해 줬잖아.”
“앞으로도 평생 해 줄게.”
채하가 나에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나는 출근하는 채하를 배웅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간의 신호음 끝에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엄마.”
- 미역국은 먹었어?
“응. 채하가 끓여 줬어.”
- 맛있게 먹었어? 채하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미역국이랑 너 좋아하는 반찬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던데 제대로 해 줬는지 모르겠네.
“맛있게 먹었어. 엄마, 나 낳느라 고생했어.”
내 말에 엄마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생일마다 축하만 받아 봤지 엄마한테 저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 우리 아들, 철들었네.
“나 낳을 때 많이 아팠지?”
- 그걸 말이라고 해? 처음 겪는 일이라 무서운데 배는 아프고 넌 나올 기미도 안 보이지.
엄마가 나를 낳을 때의 이야기를 듣다가 낳아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몰려오는 두려움에 눈가에 눈물이 조금 고였다.
최희주 : 우리 오늘 너네 집 놀러 간다.
오전 10:58
메시지는 집주인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닌 통보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좋은 날이니 내가 선심을 쓰기로 했다. 올 때 맛있는 것을 사 오라는 답장으로 친구들의 방문을 허락했다.
“오랜만이다.”
채하와 친구들은 평소 퇴근 시간보다 이르게 집에 도착했다.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는지 친구들의 양손 가득 음식이 들려 있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는 채하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잘 있었어?”
입을 맞춘 채하가 물었다. 나는 그에게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친구들은 케이크에 초를 꽂고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안에서 뭘 했길래 이렇게 안 나와?”
“알 거 없잖아. 비켜. 나 거기 앉게.”
소파 밑에 등을 기대고 앉은 윤호에게 비키라고 하자 투덜거림이 돌아왔다.
“저기 앉으면 되잖아.”
“나 허리 아파서 저기에 등 기대게.”
윤호는 말을 멈추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앉는 것을 본 선준이가 촛불에 불을 붙였다. 거실 불을 끄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채하를 제외한 전원이 입을 맞춘 것처럼 ‘사랑하는’이라는 부분에서 입을 다물었다.
“소원!”
“소원 빌어, 빨리!”
노래가 끝나고 촛불을 끄기 전 눈을 감고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후- 하고 촛불을 끄자 집 안이 완전히 깜깜해졌다. 초가 꺼지고 나는 매캐한 냄새가 전부 없어지기도 전에 채하가 형광등을 켰다.
“소원 뭐 빌었어?”
다시 내 옆에 앉은 채하가 물었다.
“피치 나올 때 나 고생시키지 말라고 빌었어.”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배에 손을 얹고 말했으나 채하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밥을 먹던 중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겨 친구들에게 물었다.
“근데 너네 왜 노래 부를 때 ‘사랑하는’ 이건 뺐어?”
“노래 가사라도 사랑한다고 했다가 설채하 삐칠까 봐.”
친구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이유를 듣자 웃음이 나왔다.
“채하야, 진짜 사랑한다고 했으면 삐칠 거였어?”
채하는 열을 내며 부정했지만 나 역시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여전히 아니라며 부정하고 있는 그의 입 안으로 닭발 하나를 밀어 넣었다.
“맛있어?”
채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닭발을 씹었다. 친구들이 검은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던 술을 꺼내 잔을 채웠다. 나는 그 모습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벚꽃 구경을 갔던 날 피치가 생긴 줄도 모르고 마신 소주 한 잔이 내 마지막 술이었다.
“우리 술 마실 땐 저쪽 쳐다보고 있어. 부담스러워서 사레 걸리겠다.”
윤호가 내 눈빛을 읽었는지 컵에 콜라를 가득 따라 주었다.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피치 낳으면 바로 맥주부터 마실 거야.”
“그래. 내가 맥주 한 박스 사 줄게.”
채하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오늘의 두 번째 약속이었다. 소주를 한 잔 마신 채하의 앞접시에 치킨 한 조각을 올렸다.
“근데 선물은 없어?”
“당연히 있지.”
친구들은 함께 산 것이라며 선물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지금 뜯어봐도 돼?”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장지를 뜯자 브랜드 로고가 박힌 상자가 나왔다. 상자 안에는 깔끔한 디자인의 검은색 지갑이 들어 있었다.
“고마워. 잘 쓸게.”
다시 뚜껑을 덮어 옆에 내려놓았다. 방으로 들어간 채하가 작은 쇼핑백 하나를 들고 나왔다.
“뭐야? 언제 준비한 거야?”
쇼핑백 안에는 편지와 상자가 들어 있었다. 편지는 혼자 있을 때 읽어 보기로 하고 우선 상자를 열었다. 뚜껑이 열리자 형광등 불빛을 받아 시계 다이얼의 유리가 반짝거렸다. 손목 위에 올리자 채하가 밴드를 채워 주었다. 며칠 동안 고심해서 골랐을 연갈색 가죽 밴드의 시계였다.
“고마워. 채하야.”
친구들이 보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채하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내가 앞으로 매일매일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내 눈을 바라보며 약속하는 채하에게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 주었고 친구들은 야유를 했다.
***
“채하야, 피치가 감자 먹고 싶대.”
“우리 피치 감자가 먹고 싶어요? 아빠가 사 줄게. 조금만 기다려.”
추석을 하루 앞두고 집에 가던 우리는 감자가 먹고 싶다는 내 말에 휴게소로 들어갔다.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없어. 나 화장실 다녀올게.”
화장실에서 나오자 채하가 한 손에는 알감자를, 한 손에는 음료 캐리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감자를 받아 들고 남은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피치가 정말 더 먹고 싶은 거 없대?”
채하는 보조석의 차 문을 열어 주면서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탔다.
“소금이랑 설탕 뿌렸어?”
“응. 한 스푼씩.”
채하의 입에 감자 하나를 넣어 주고 먹기 시작했다.
“딸기주스도 마시면서 먹어.”
“알았어.”
이번에도 컵에 빨대를 꽂아 채하의 입가에 대 주었다. 딸기주스를 한 모금 마신 채하는 활짝 웃고 있었다.
“지원이가 먹여 주니까 너무 좋아.”
“내가 그렇게 좋아?”
채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응.” 하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듣자 가슴이 간질거리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원아, 일어나. 도착했어.”
“으음, 벌써?”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아파트 앞이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굳은 몸을 풀고 있을 때 채하가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집에 오니까 우리 뽀뽀하다가 걸렸던 날 생각난다.”
꼭대기 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집 앞에서 뽀뽀 한 번 하고 들어갈까?”
“어후, 됐어.”
우리가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공동 현관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채하랑 지원이 아니니?”
“어, 안녕하세요.”
나와 채하를 부른 사람은 우리 집 아래층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우리는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엄마가 결혼식 오라고 했는데 아줌마가 그날 일이 있어서 못 갔잖아. 늦었지만 축하해. 행복하게 살아.”
“감사합니다.”
“둘이 고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니더니 이제 평생 붙어 살겠네.”
아주머니의 말씀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화의 주제는 금세 내 배로 옮겨졌다.
“배 많이 나왔네. 아기 언제 낳아?”
“내년 1월 초요.”
대화를 하는 동안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17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아주머니는 배 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할 때라는 말을 하시고 집으로 가셨다. 이제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채하가 무엇을 했는지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웠다. 내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곧바로 18층으로 올라갔다.
“엄마, 우리 왔어.”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 어디 갔지? 전화도 안 받는데.”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
그러나 채하의 집도 텅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코코가 달려 나왔다는 것뿐이었다.
“코코 잘 있었어?”
채하가 강아지를 안아 들고 “엄마 어디 갔는지 코코는 알아?” 하고 물었지만 코코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어머니한테 전화해 봐. 우리 엄마랑 같이 계실 수도 있잖아.”
“알겠어.”
우리 엄마와 달리 채하 어머니는 곧바로 전화를 받으셨다. 길지 않게 통화를 한 후 채하는 전화를 끊었다.
“같이 계신다고 밥 먹고 있으래.”
“그래? 어디 가셨대?”
“그건 말 안 해 주던데. 조금만 기다려. 냉장고에 불고기 있대.”
채하는 소파에 앉은 내 옆에 코코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코코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엄지와 검지로 귀 뒤를 살살 긁었다. 코코는 내가 만져 주는 것이 좋은지 눈을 감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여보, 식사하세요.”
강아지가 내 무릎 위에서 코를 골고 있을 때 채하가 나를 불렀다. 이제 자기야 소리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됐지만 여보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코코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갔다. 잠에서 깬 코코도 내 뒤를 졸졸 따라와 식탁 밑에 앉았다.
“채하야, 우리 밥 먹고 산책 가자.”
“산책? 어디로 갈까?”
“음, 일단 나가서 결정하자.”
채하는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하던 대로 채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등에 뺨을 대고 있었다. 이제는 잔뜩 나온 배 때문에 예전처럼 가슴이 닿을 정도로 달라붙을 수 없었다. 우리가 붙어 있는 것을 본 코코가 자신도 안아 달라는 것인지 내 종아리를 긁어 댔다.
“코코, 눈치 챙겨.”
내가 채하에게 떨어져 코코를 안아 올리자 그가 강아지를 흘겨보며 말했다.
“이제 강아지한테도 질투해?”
“응. 그러니까 빨리 코코 내려놓고 나 안아 줘.”
설거지를 마친 채하가 손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고 팔을 벌렸다. 나는 코코를 안은 채로 채하에게 안겼다. 그는 내 품에서 코코를 뺏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중에 피치한테도 질투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에 채하는 허리를 숙여 배에 대고 속닥거렸다.
“아빠는 피치도 사랑하는데 그래도 지원 아빠가 1순위야. 알겠지?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건 네가 이해해야 하는 거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1순위야?”
“당연하지.”
우리는 코코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밖에 나오자 코코는 기분이 좋은지 이곳저곳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돌아다녔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나왔기에 코코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내일 아침에 할머니 댁으로 가는 거야?”
“응. 가서 전 부치고 송편 만들어야지.”
채하네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나를 따라 우리 할머니 댁에 가기로 했다. 몸이 무거운 나 대신 채하가 차례 음식을 해야 할 텐데, 어마어마한 양에 놀라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오늘 푹 쉬어 둬.”
내 말에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말없이 코코의 뒤만 쫓아갔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채하네 집으로 가자 어머니들이 커피를 마시고 계셨다.
“엄마!”
“아들!”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원래도 엄마와 사이가 좋은 편이었지만 피치가 생긴 이후로 엄마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내가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는 것을 본 채하의 어머니는 채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지원이는 엄마한테 가서 안기고 코코도 엄마한테 달려오는데 넌 거기 멀뚱히 서 있기만 하니?”
그 말에 채하도 어머니를 안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곧바로 채하를 밀어냈다.
“됐어.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어릴 땐 엄마 껌딱지더니.”
자식 키워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어머니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채하도 기억 못 하는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다.
“채하 어릴 땐 어땠어요?”
“채하? 엄청 울었지. 채민이 잘 울지, 채하도 잘 울지. 하루는 둘 다 우는데 나도 같이 울었다니까?”
채하가 당황해서 어머니를 말렸지만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데 재미가 들린 어머니는 멈추지 않았다.
“맨날 업어 달라고 징징거려서 아직도 그때 쓰던 포대기 안 버리고 가지고 있잖아.”
계속되는 어머니의 폭로에 채하는 포기한 얼굴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내 어릴 때가 궁금해졌다.
“엄마, 나는 어땠어?”
“지원이 너는 잠도 잘 자고 많이 울지도 않고 편했지. 입 짧은 것만 빼면.”
“채하는 징징거려도 밥은 잘 먹었어.”
어느새 어머니들은 피치가 나와 채하의 어떤 점을 각각 닮아야 하는지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셨다. 이야기를 나누던 어머니들은 키와 눈매, 식성은 채하를, 눈을 제외한 얼굴과 눈물, 잠투정이 없는 점은 나를 닮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셨다.
“그게 마음처럼 쉽나. 반대로 닮으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태교를 열심히 해야지. 어떤 사람들은 연예인 사진 보고 이미지 태교도 한다더라.”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우리의 가족계획으로 흘러갔다.
“우리는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기로 했어.”
“왜? 아기가 혼자 외로우면 어떡해.”
“엄마, 난 크면서 외로움 느껴 본 적 없어.”
엄마는 손주 욕심을 쉬이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채하 어머니도 같은 마음인지 엄마의 말에 힘을 보탰다.
“채민이네 애들 봐 봐. 나중에 삼 남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겠어. 채하, 너도 형이 있으니까 의지 되고 얼마나 좋아.”
“의지는 무슨. 나 아직 형 가출할 때 훔쳐 간 돼지 저금통 못 받았어.”
채하의 말에 어머니는 얼마간 말이 없으셨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고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아까 채하 엄마랑 너희 둘 궁합 보고 왔는데 거기서는 자식 두 명이라고 했다니까? 아들 하나, 딸 하나.”
“돈 버렸네. 그런 거 믿지 말라니까.”
“거기 유명한 데야. 너희가 전생부터 부부였대.”
“맞아. 거기서 우리 채민이 재수할 때 그해에 대학 절대 못 간다고 했는데 맞췄잖아.”
채하의 어머니가 거들었지만 전생까지 들먹이는 통에 더 사기 같았다. 하지만 채하는 전생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들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정말요? 전생에도 부부였대요?”
“응, 채하는 왕이었고 지원이는 왕비였대.”
이번 생이 세 번째 만나는 것이라는 소리까지 듣자 나는 사기라고 확신했다. 그에 비해 채하는 사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좋아하기만 했다. 나는 언젠간 채하가 사기를 당해 옥장판을 사 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채하 어머니와 더 놀다가 오겠다는 엄마를 뒤로하고 낮잠을 잔다며 채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전생에 왕이었다는 소리를 믿냐? 그런 데서 전생에 노비였다고 하겠냐고.”
우리는 좁은 내 침대에 딱 붙어 누웠다. 채하의 팔을 베고 타박했다.
“응, 난 지원이랑 전생에도 부부였고 이번이 세 번째라고 하니까 믿을 거야.”
“그래. 믿는 건 네 마음대로 하고 나중에 어디 가서 사기당해서 옥장판이나 사 오지 마.”
채하는 잔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자신의 입술로 내 입을 막았다. 채하의 입술이 쪽 소리를 내고 떨어지자 엄지와 검지로 그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너 잔소리하지 말라고 일부러 그런 거지?”
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잡힌 채로 고개만 움직이는 그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자 채하도 소리를 내 웃었다.
“피곤하다며, 얼른 자.”
“너도 좀 자.”
채하는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나를 토닥였다. 나는 채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눈이 더 안 떠지는 탓에 겨우 씻기만 하고 할머니 댁으로 갔다. 이것도 채하가 침대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내 입 안으로 치약 묻은 칫솔을 밀어 넣은 탓에 억지로 일어난 것이었다.
“엄마, 나 배고파.”
“그러게 아까 깨울 때 밥 먹었어야지. 참아.”
차에 타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징징거리는 나에게 엄마는 타박만 했다.
“눈이 안 떠지는 걸 어떡해.”
차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였지만 할머니 댁에 도착할 때까지 칭얼거렸다. 엄마와 아빠는 완벽하게 나를 무시했고 옆에 앉은 채하만 내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했다.
“할머니!”
“우리 아가, 밥은 먹고 온 거야?”
집 앞에 도착하자 차 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 나온 할머니가 나를 끌어안았다. 할머니는 모든 할머니들이 그렇듯 내 식사 여부부터 물으셨다. “배고파요.” 하고 대답하니 화들짝 놀라 내 손을 잡고 빨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하셨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관심 밖이었다.
“지원이, 빵 줄까? 아니면 할머니가 햄버거 사 줄까?”
“빵 먹을게요.”
“그래, 그래. 우유랑 같이 먹어.”
할머니는 빵과 딸기우유를 꺼내 주셨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지 채하에게 오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셨다. 엄마와 아빠에게 식사 여부를 물으시더니 나를 굶겼다며 모두를 타박하셨다.
“아니에요. 할머니. 제가 늦게 일어나서 안 먹은 거예요.”
채하에게 불똥이 튈까 봐 말을 덧붙였다.
“그랬어? 졸리더라도 밥은 꼭 먹어야 돼. 알겠지?”
피치 것까지 먹으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는 말씀에 빵을 입 안 가득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의 옆에 앉아 있던 엄마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의 시선을 피했다.
빵을 다 먹고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큰아버지의 가족들도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가족들이 전부 모이자 할머니는 차례 음식을 만들 재료들을 꺼내 오셨다.
“내가 어제 푹 쉬라고 했지?”
손이 큰 할머니에게 익숙한 나와 달리 채하는 어마어마한 양에 놀란 표정이었다.
“재료가 좀 부족한가? 이번엔 손주 사위까지 있는데 그 생각을 못 하고 지난번이랑 똑같이 샀어.”
아빠는 당장이라도 다시 마트로 갈 기세인 할머니를 말렸다. 가족들의 만류에 할머니는 장바구니를 내려놓았지만, 음식이 모자라면 어쩌나 계속 걱정하셨다.
기름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고소한 전 냄새를 맡자 금세 허기가 몰려왔다. 빵과 우유를 먹은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뒤집개를 들고 있는 채하의 옆에 앉았다.
“야, 유지원. 네가 그거 다 먹으면 차례상엔 뭐 올리라고.”
“누나, 나 먹는데 눈치 주지 마.”
채하의 앞에 앉아 전을 부치던 지수 누나가 그만 먹으라며 타박했다.
“그리고 나만 먹냐? 누나도 먹잖아.”
누나는 기름 냄새를 맡자 속이 느글거린다는 핑계로 아침부터 캔 맥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저번 설까지만 해도 나도 함께 맥주를 마셔 댔지만 이제는 그림의 떡이었다.
“채하도 하나 마실래?”
갓 구워진 전을 호호 불어 내 입에 넣어 주는 채하에게 누나가 물었다. 채하가 “그럴까요?” 하고 대꾸하자 갑자기 짜증이 났다.
“무슨 아침부터 술이야. 먹지 마!”
“야, 넌 아침부터 술 마신 적 없는 것처럼 말한다?”
“난 이제 안 마시잖아!”
“안 마시는 거냐? 못 마시는 거지.”
우리가 티격태격하는 걸 본 엄마는 누나한테 큰소리를 낸다며 나를 혼냈다. 나는 눈을 한 번 흘기고 다시 전을 집어 먹었다.
“채하야, 뒤집개 엄마한테 주고 지원이랑 나가서 간장 한 병만 사 와.”
엄마의 말에 나는 벗어 둔 카디건을 입었다. 대학 시절, 데이트 교양 수업을 들을 때 채하와 커플룩으로 입으려고 샀던 분홍색 카디건이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지만 엄마가 옷장 정리를 하다가 찾았다며 꺼내 주었다.
“안 힘들어?”
“응. 괜찮아.”
손을 잡고 마트까지 걸어가며 힘들지 않냐고 묻자 채하는 괜찮다고 했다.
“우리 좀 놀다가 들어갈까?”
“안 돼. 어머니 힘들어.”
내 꾐에도 채하는 쉽사리 넘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팔짱을 끼고 “정말 안 돼?” 하고 물으니 “안 되는데….”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시간 때울 곳이 있어?”
“없을걸.”
카페 하나 없는 주택가는 딴짓을 하기에 적절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마트에서 간장 한 병과 음료수 두 병을 사서 근처 초등학교로 들어갔다. 휴일을 맞은 학교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운동장 한구석의 그네에 앉았다.
“피치야, 여기가 아빠가 다녔던 학교야.”
그네에 앉아 배에 손을 얹고 피치에게 말했다. 피치는 대답을 하듯 배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자기는 초등학교 때 어떤 애였어?”
“나?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인기도 많은 애였지.”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라니까. 넌 어땠는데?”
“나도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인기도 많았지.”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물어보면 금방 진실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손에 든 음료수를 다 마시고 우리는 그네에서 일어났다.
“하도 안 오길래 간장 만들러 간장 공장 간 줄 알았네.”
“직접 만들지는 않았고 간장 공장에서 갓 만든 걸로 사 왔어.”
늦게 왔다고 비꼬는 엄마에게 나는 한술 더 떠 대답했다. 내 대답에 엄마는 “으휴, 저거 한 대 때리지도 못하고.” 할 뿐이었다. 간장을 건네고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 무렵이었다. 점심으로 짜장면을 시켰다는 말에 “탕수육은?” 하고 물었다.
“탕수육 같은 소리 하네. 부침개나 먹어.”
“지원이 탕수육 먹고 싶어? 할머니가 사 줄게.”
부침개나 먹으라는 엄마와 달리 할머니는 바로 전화기를 들어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탕수육 하나를 추가한 할머니는 나에게 점심을 먹을 때까지 좀 쉬라며 성화였다.
“괜찮아요. 지금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요.”
내가 채하 옆에서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편하게 앉아 있으라며 방석을 가져다주셨다. 채하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것마다 내 입으로 넣어 주느라 바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는 송편을 만든다며 떡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아 하얀 쌀가루가 점점 한 덩어리로 뭉쳐지는 것을 구경했다.
“송편 예쁘게 만들어야 예쁜 아기 낳는다는 말 알지?”
“네. 알아요.”
“예쁘게 만들 수 있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다. 손을 씻고 오자 채하와 엄마가 할머니 옆에 앉아 송편을 빚고 있었다. 나는 작게 떼어 놓은 반죽을 하나 들어 주물럭거렸다.
“엄마, 속 얼마나 넣어?”
“적당히.”
“이만큼?”
적당히 넣으라는 말에 속을 적당히 넣고 엄마에게 보여 주었다.
“너무 적어. 조금 더 넣어.”
“이만큼?”
송편 속을 더 넣고 보여 주자 엄마가 한숨을 쉬고 반죽을 가져가더니 속을 덜어 내고 다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만큼씩 넣고 만들어.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손끝에 힘을 줘 모양을 만들었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어야 예쁜 아기를 낳는다는 말은 다들 아는 미신이었지만 무시하기엔 찝찝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내 손 위에 올려진 송편은 누가 봐도 못생겼다.
“아이고, 왜 이렇게 못생겼어.”
심지어 할머니마저 못생겼다고 할 정도였다. 그에 비해 채하의 손에서 만들어진 송편은 누가 봐도 감탄사가 나오는 모양새였다. 내가 만든 송편을 채하에게 넘겨주고 물티슈로 손을 빡빡 닦았다.
“예쁜 송편 만들어야 예쁜 아기 낳는대. 이거 잘 살려 봐.”
채하는 열심히 못생긴 송편을 다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망쳐 버린 건 어쩔 수 없는지, 계속 주물럭거린 탓에 옆구리가 터져 하얀 반죽이 갈색 소로 엉망이 되었다.
“괜찮아, 괜찮아. 둘 중에 하나만 잘 만들면 되지.”
터져 버린 송편을 보고 울상이 된 나를 할머니가 달래 주셨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뻘건 얼굴로 소파에 누워 있는 누나의 머리 아래에서 베개를 빼냈다.
“뒤지고 싶냐?”
“말 좀 예쁘게 해. 우리 아기 들어.”
누나는 “그래. 미안하다.”라고 했지만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베개를 등 뒤에 대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러곤 손에 들려 있던 리모컨까지 빼앗았다. 예전 같았으면 뒤통수를 맞아도 열 번은 맞았을 일이었지만 누나는 주먹만 쥘 뿐 때리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다음 내용을 외워 버린 지 오래인 추석 특선 영화가 방영 중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기절을 앞두고 있을 때 채하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송편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누나, 이거 드세요.”
채하가 포크로 송편 하나를 찍어 지수 누나에게 건넸다. 뒤이어 남은 포크로 송편을 찍어 호호 불어 내 입가로 가져왔다.
“맛있어?”
“응. 맛있어.”
영화를 보는 내내 채하가 먹여 주는 대로 입을 벌렸다.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갈 무렵 엄마가 집에 가자며 부엌 밖으로 나왔다. 나는 채하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할머니께 내일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엄마, 아빠는?”
“몰라. 놓고 가.”
아빠는 마당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큰아빠와 함께 잡초를 뽑고 있었다. 나는 아빠를 놓고 가자는 엄마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차에 탔다.
“아빠 삐치면 어떡해?”
“자기 엄마 집이니까 엄마한테 이르라고 해.”
엄마의 말에 우리는 모두 웃었다. 집에 도착하니 몸에서 나는 기름 냄새가 더 심하게 느껴졌다. 채하가 먼저 씻고 내가 다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내가 씻고 나오자 채하는 짐 가방에서 보디로션과 튼 살 크림을 꺼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거 다 챙겨 온 거야?”
“응. 빨리 누워 봐.”
팔다리에 로션을 발라 준 채하가 내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손바닥에 올려진 튼 살 크림을 비벼 차갑지 않게 만든 후 내 배에 바르기 시작했다.
“오늘 힘들었지?”
“괜찮아. 피치, 재미있어?”
피치가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는지 채하가 고개를 숙여 말을 걸었다. 아빠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인지 피치는 더 강하게 움직였다. 그가 “피치, 조금만 살살 놀자.” 하고 속삭이자 거짓말처럼 피치의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튼 살 크림이 전부 흡수되자 걷어 올린 티셔츠를 밑으로 내려 주었다. 그때 현관문이 큰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야! 너희는 사람이 어떻게 이러냐?”
방문을 열고 나가니 열을 내는 아빠가 현관에 서 있었다.
“아빠, 어떻게 왔어?”
“버스 타고 왔다. 왜!”
명절 때 엄마가 아빠를 버리고 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빠는 항상 삐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엄마를 한 번 노려보고 쿵쾅거리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화나신 거 아니야?”
“괜찮아. 저러다 저녁 먹을 때쯤 되면 풀려.”
엄마와 나에게는 익숙했지만 이 상황을 처음 겪는 채하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채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 말대로 식사를 할 때쯤이 되자 슬금슬금 방에서 나온 아빠는 저녁 메뉴를 물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할머니 댁으로 가서 차례를 지내고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할머니 댁에 더 있겠다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나와 채하만 집으로 돌아왔다. 채하네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소한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져 있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코코가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왔어? 채민이네도 곧 도착한대.”
오늘 점심 메뉴는 김밥인지 식탁 위에는 김밥 재료가 가득했다.
“엄마, 점심때 김밥 싸려고?”
“응. 아가들이 김밥 먹고 싶대.”
나는 당근을 볶고 계시는 어머니의 옆으로 가 도와드릴 것은 없는지 물었다.
“없어, 없어. 몸도 무거운데 가서 앉아 있어.”
“근데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아가들 준다고 과자 사러 갔어.”
그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우리 서영이! 배고프지? 할머니가 금방 김밥 싸 줄게.”
할머니를 부르며 달려온 서영이 뒤로 채민 형의 가족들과 채하의 아버지가 보였다.
“지원이, 안녕.”
“안녕하세요. 형.”
인사를 하는 사이 준비를 마치셨는지 어머니는 김밥 재료를 모두 거실 테이블 위로 옮겼다.
“금방 해 줄게. 얼른 와서 앉아.”
거실에 앉은 어머니가 빠른 속도로 김 위에 재료를 올리고 말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옆에 칼을 들고 앉아 완성된 김밥을 썰었다.
“아빠, 아.”
아버지께서 아이들 앞에 있는 접시에 김밥을 놓아 주자 서현이가 채민 형의 입 안에 그것을 쏙 넣었다.
“아빠, 맛있어?”
“응. 맛있어.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하나씩 입에 넣어 드려.”
채민 형의 말에 서현이가 어머니, 아버지의 입에도 김밥을 넣어 드렸다. 그 모습을 본 채하가 김밥을 들어 내 입 앞으로 가져왔다.
“지원이도 아.”
“내가 먹을게.”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채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의 옆구리를 한 번 꼬집고 입을 벌렸다. 우리가 실랑이를 하는 사이 채민 형은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렸다. 형은 영화 채널에서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와, 저 영화 아직도 하네.”
아이돌 가수가 되겠다며 가출한 채민 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특별 출연을 했던 영화였다.
“얘들아, 조금 있으면 저기에 채민 아빠 나와.”
주헌 형의 말에 아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정말?” 하고 물었다. 주헌 형의 말대로 5분도 지나지 않아 화면 속에 꼬질꼬질한 모습의 채민 형이 나왔다. 화면 속 21살의 형은 지금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다.
“우와, 진짜 아빠다.”
“아빠가 어려 보여!”
아이들은 텔레비전 속 아빠의 모습에 화면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집중했다. 채민 형이 나오는 짧은 장면이 끝나자 아이들이 질문을 쏟아 냈다.
“아빠, 저거 몇 살 때야?”
“21살 때.”
“아빠, 영화배우야? 근데 왜 지금은 영화에 안 나와?”
“서영이 아빠 하는 게 더 좋아서.”
채민 형의 말을 들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크게 웃으셨다.
“아이고, 설채민 철들었네. 연예인 할 거라고 편지 한 장 써 놓고 가출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엄마는 애들 듣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
“엄마가 없는 소리 했어? 그때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어머니의 말을 들은 서영이가 “아빠 가출했어?” 하고 물었다. 서영이의 물음에 당황한 채민 형은 “아니, 그게….” 하며 말을 더듬다가 결국 가만히 있던 주헌 형에게 짜증을 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 충격을 받은 부모님은 채민 형을 없는 자식으로 치겠다고 선언하셨다. 물론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돌아온 채민 형을 내치지는 않았다. 심지어 아기까지 가진 채로 돌아왔지만 몸 건강하니 괜찮다고 하셨었다.
“오늘 차례 안 지냈지? 요새는 교회 안 다녀?”
말없이 김밥만 집어 먹던 채민 형이 명절 음식은 없냐며 어머니께 물었다.
“응. 너 대학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러 다녔던 거라 가출한 이후로는 안 갔지.”
어머니의 말에 또다시 정적만 맴돌았다. 어머니는 채민 형이 재수를 시작했을 때부터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셨지만, 교회에 출석한 지 6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 채민 형은 대학생 대신 가수가 되겠다며 가출을 해 버렸다.
“나 그래도 대학 갔잖아.”
“너 서른 전에 졸업은 하는 거야? 누가 보면 의대 다니는 줄 알겠어.”
“나도 내가 이 나이까지 졸업 못 할 줄은 몰랐어.”
어머니와 채민 형의 대화는 한 편의 시트콤 같았다.
“채민이 너, 가출할 때 채하 저금통 훔쳐 간 거 아직도 안 돌려줬다며?”
“맞아. 가출할 때 쓴 편지에 성공해서 10배로 갚는다고 써 놨잖아.”
“주면 되잖아! 형, 지갑 줘 봐.”
당당하게 요구하는 채민 형의 말에 눈치만 보고 있던 주헌 형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낚아챈 채민 형은 그 안에 있던 지폐를 꺼냈다.
“야, 10만 원이면 되지?”
“그 돼지 내가 3년 동안 키운 거야.”
형은 결국 채하의 손에 20만 원을 들려 주었다. 500원짜리 동전은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던 저금통이 5만 원짜리 지폐 4장으로 돌아왔으니 누가 봐도 남는 장사였다. 채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신난 목소리로 “잘 쓸게.” 하고 지폐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우리 지원이랑 피치, 이걸로 맛있는 거 사 줄게.”
채하가 내 귀에 속삭였다.
“저금통에 들어 있던 돈으로 산 사탕, 형도 같이 먹었으니까 아깝다고 생각하지 마.”
채민 형이 지갑을 돌려주며 말했다. 주헌 형이 다시 지갑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다시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사탕이요?”
뜬금없이 나온 사탕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져 물었다.
“응. 나 연습생 때 돼지 배에서 나온 돈으로 매일 막대 사탕 하나씩 사 먹었는데 어느 날부터 형이 자기 건 없냐면서 하루에 하나씩 꼬박꼬박 받아 가더라고.”
“연습생 나부랭이가 대표님이 달라는데 안 줄 수도 없고….” 하고 덧붙이는 채민 형의 목소리는 추억에 잠겨 있었다.
저녁 무렵 우리 부모님이 채하네 집으로 오셨다. 어른들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술잔을 주고받으셨다. 나와 채민 형, 아이들을 제외한 자리에 술잔이 하나씩 놓였다. 채하는 우리 아빠가 주는 술을 받아 입술만 적시고 다시 내려놓았다.
“근데 아기 이름은 정했어?”
아빠가 나와 채하에게 물었다.
“아니. 아직.”
태명으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럴 줄 알고 아빠가 우리 손자 이름 지어 놨지.”
“벌써? 뭔데?”
“연준이. 유연준.”
내가 ‘연준이?’ 하고 되묻기도 전에 채하 아버지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큰소리를 내셨다.
“내 손자 이름 내가 짓겠다는데 뭐.”
“불만 있냐?” 하고 채하 아버지를 약 올리는 아빠를 보자 한숨이 나왔다.
“설지훈.”
“네?”
“우리 손자 이름은 설지훈으로 해.”
연준이와 지훈이로 언성을 높이는 아버지들은 절대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막상 부모인 우리의 의견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이름이었다.
“채하야, 네가 좀 말려 봐.”
이 언쟁을 진정시켜 보라며 채하의 옆구리를 찔러 댔다. 그러나 채하도 아버지들말리지 못했다.
“잠깐!”
결국 내가 숟가락을 들고 테이블을 내리쳐 큰 소리를 낸 후에야 아버지들이 조용해졌다.
“아기 이름은 저희가 정할게요.”
“지원아….”
단호한 내 말에도 아버지들은 포기할 수 없는지 연준이와 지훈이를 연신 외쳐 댔다. 나는 못 들은 척 채민 형에게 말을 걸었다.
“형은 애들 이름 어떻게 지었어요?”
“우리는 세 명 다 작명소.”
채하에게 “우리도 작명소 가서 지을까?” 하고 물었다. 하지만 채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우리가 지어 줬으면 좋겠는데.”
“너 작명 센스 구리잖아.”
내 말에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형, 태명 지을 때 채하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요?”
나는 신이 나서 채하가 생각했던 웃긴 태명들을 전부 이야기했다.
“미친, 무럭이래.”
단단이부터 웃기 시작한 채민 형은 무럭이라는 태명을 듣자 거의 배를 잡고 굴러다닐 지경이었다. 말도 안 되는 한자 태명을 들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웃지 마. 나는 진지했다고.”
“웃기려고 지은 게 아니라 진지하게 지은 게 광채야? 설채하 개그에 소질 있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아이들을 재우고 온 주헌 형이 물었다. 피치의 태명이 될 뻔했던 이름들을 말해 주자 주헌 형도 채민 형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채하가 입을 삐쭉 내밀고 말없이 눈을 흘겼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채하와 나는 침대에 함께 누웠다. 채하는 배에 손을 얹고 피치에게 말을 걸었다.
“피치야, 아빠가 예쁜 이름 지어 줄게. 조금만 기다려.”
“우리 피치, 성은 누구 걸로 해?”
“지원이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글쎄.”
이름도 그렇지만 성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나는 채하의 의견을 물었다.
“난 자기 성 따랐으면 좋겠어. 지원이가 고생해서 낳은 거니까.”
채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