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8/14)

06

그날은 잠에서 깨어 눈을 뜨기 전부터 몸이 이상했다.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감기 기운이 있는 듯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감기약을 찾기 시작했다.

약을 보관해 두는 작은 수납함을 열자 감기약과 체온계가 보였다. 일단 체온계를 꺼내 전원을 켜고 겨드랑이 사이에 끼웠다. 차가운 체온계 끝이 예민한 피부에 닿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잠시 후 체온계가 삐삐거리는 소리로 체온 측정이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37.3도.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미열에는 조금 못 미쳤다. 그래도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감기약 하나를 뜯어 물과 함께 삼켰다. 식사를 마친 그릇은 점심때 생길 설거짓거리와 함께 닦기 위해 바로 씻지 않고 물을 뿌려 싱크대에 넣어 두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 채하가 선물해 준 핸드 드립 세트와 커피 원두를 꺼냈다. 물을 끓여 커피 서버가 가득 찰 정도로 커피를 내렸다. 평소였으면 얼음을 잔뜩 넣고 차갑게 마셨겠지만 오늘은 감기 기운이 있으니 따뜻하게 마시기로 했다.

작업실로 들어가 책상 위에 커피 서버와 머그 컵을 올려 두고 의자에 앉았다. 오늘따라 책상 위의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물티슈 한 장을 뽑아 책상 위를 닦았다. 책상 위가 깨끗해지니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몸을 숙여 하나씩 줍다가 포기하고 청소기를 꺼냈다.

작업실 바닥 청소를 마치자 이왕 청소기를 꺼낸 김에 다른 곳도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침실로 들어가 창문을 열고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했다. 침대 다음으로는 아까 감기약을 꺼냈던 수납함을 전부 뒤집어엎어 다시 정리했다.

방 청소를 마치고 거실로 나가 청소기를 밀었다. 거실 바닥이 깨끗해지자 건조대에 걸려 있는 빨래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빨래는 개고 싶지 않았다. 다시 펼쳐서 쓸 수건이나 옷 따위를 하나하나 접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청소기 코드를 뽑아 정리하고 다용도실에 넣어 두고 나오자 벌써 점심때였다. 열심히 몸을 움직였더니 몸에서 열이 더 나는 것 같았다. 다시 체온계를 꺼내 열을 재 보니 이번엔 37.6도였다. 식빵 한 장을 꺼내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로 우걱우걱 씹어 먹고 감기약을 하나 더 삼켰다.

이제 다시 책상 앞에 앉아야 할 시간이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컴퓨터를 켜고 의자에 앉아 조금이라도 몸에 무리가 덜 가는 자세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커피 서버에 담겨 있던 커피를 머그 컵에 따르자 내가 딴짓을 하는 사이 차갑게 식은 커피가 차올랐다.

“누가 내 머릿속에 있는 거 뽑아서 대신 써 줬으면 좋겠다.”

억지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쓰고 있는 장면은 소설의 주인공이 형이 원래 가지고 다니던 히트 사이클 억제제 통을 찾아내는 부분이었다. 주인공은 범인의 회사에 청소부로 잠입해 약통을 몰래 빼돌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가지고 나오려다 들킬 위기에 처했기에 주인공의 조력자가 필요했다.

이 부분에서 다시 손을 멈추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뒤집어 놓은 핸드폰을 들어 확인해 보니 벌써 3시였다. 아까보다 몸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화면에 켜진 한글 파일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껐다.

조금만 쉬면 나아질 것 같아 책상 위에 올려 둔 커피는 그대로 놓고 작업실을 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청소를 하고 창문을 닫지 않아 방 안이 조금 춥게 느껴졌다. 창문을 닫고 보일러 온도를 조금 높였다.

쿨 시트까지 찾아내 이마에 붙이고 침대에 누웠다. 열 오른 몸에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이 좋아 양쪽 손바닥까지 이마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달았다.

체온을 재지 않아도 아까보다 열이 훨씬 올라간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겨우 손을 들어 냉기를 다 빼앗겨 버린 쿨 시트를 떼어 내 침대 밑으로 떨어트렸다. 평소의 감기 증상과는 달랐다.

“흐으, 아… 아흐.”

몸속 깊은 곳에서 들끓는 열기와 함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성욕이 타올랐다. 입고 있는 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성기를 쥐었다. 한 손으로 성기를 잡고 성의 없이 위아래로 몇 번 문지른 것만으로 사정했다.

한 번의 사정으로 내 몸 안에 가득 찬 성욕을 빼내기란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자위를 할 때 전혀 건드려 본 적 없는 곳이 뜨겁게 느껴졌다. 엉덩이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베타인 내 몸에서 절대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뒤에 무언가를 넣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26년을 베타로 살아온 나로서는 쉽사리 실행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성기를 손에 쥐었다. 이미 한 번 정액을 토해 낸 성기는 내가 만지지 않아도 벌써 피가 몰려 빳빳하게 서 있었다.

“아… 응, 흐읏, 으응.”

손가락 끝으로 귀두의 갈라진 틈을 쓸어내리자 입에서 새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앙다물었다. 귀두를 만진 손끝은 쿠퍼액이 묻어 미끈거렸다. 한 손으로 성기 전체를 쥐는 대신 쿠퍼액이 묻은 손가락으로 기둥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응, 흐응…, 아…. …아읏!”

성기를 자극할수록 뒤가 더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곧바로 두 번째 정액을 토해 냈다. 그리고 방 안 가득한 레몬 향이 느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내 페로몬이었다.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는 사이 집에 온 채하의 인기척이 났다. 이 모습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였다. 채하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작업실 문을 열어 보고는 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문을 닫는 것 같았다.

그러곤 이제 내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멈칫하더니 문을 열고 채하가 들어왔다.

“지원아.”

환하게 형광등이 켜졌다. 지금 채하의 눈에 내가 어떤 상태인지 훤히 보일 것이었다.

“채… 채하야…. 나 몸이 이상해….”

“지원아, 너 괜찮아?”

“몸이… 흐… 너무….”

채하의 체취를 맡자 열기가 조금씩이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목을 안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내 몸은 이제 본능적으로 알파를 끌어당기기 위해 폭발적으로 페로몬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채하의 페로몬이 온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채하의 얼굴을 잡아당겨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이제는 피부에 느껴지는 페로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내 몸은 더 짙은 페로몬을 갈구했다.

“좋아해…. 좋아해…. 정말 많이.”

채하와의 첫 번째 관계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상태로 치러졌다. 하지만 드문드문 남은 기억의 파편 중 무너지듯 고백하는 채하의 모습이 있었다. 그는 나를 안으면서 몇 번인지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한다고 속삭였다.

첫 관계 후 기절하듯 잠들었던 나는 눈을 떴을 때, 또다시 들끓는 성욕에 끙끙댔다. 결국 나는 페로몬의 노예가 되어 잠들어 있는 채하의 성기를 입에 넣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관계는 해가 뜰 무렵에야 마무리됐다. 마무리라기보단 둘 다 기절했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다음 날 나보다 먼저 일어난 채하가 씻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지난밤 있었던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터질 정도의 일에 나는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잠든 척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채하가 방을 나가고, 발자국 소리와 함께 현관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나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혹시라도 채하가 다시 돌아올까 봐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30분 정도 지나도 현관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채하가 회사에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밤새 혹사당한 몸에는 의지와는 다르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침대 밑에 주저앉아 버린 나는 침대 모서리를 잡고 겨우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다리 사이를 타고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샤워 가운을 들춰 허벅지를 보자 하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운을 다시 여미고 욕실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가운의 허리끈을 풀고 거울에 몸을 비춰 보자 내 몸 이곳저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욕조의 물이 찰랑찰랑하게 차오를 때까지 거울만 보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욕실 수납장 안에 있던 배스 밤 하나를 꺼내 욕조 안으로 던져 넣었다. 배스 밤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수록 사방이 꽉 막힌 욕실 안에 레몬 향이 가득 퍼졌다.

“아… 씨….”

레몬 향을 맡으니 지난밤이 다시 떠올라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 안의 물이 밖으로 흘러넘쳤다. 내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옆으로 기댔다.

“어떡해…. 앞으로 채하 얼굴 어떻게 봐….”

기억이라도 나지 않으면 뻔뻔하게 채하를 대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가장 부끄러운 기억들은 너무나 선명했다. 그의 목에 매달려 제정신이었으면 하지도 못했을 말을 잘도 뱉어 냈었다.

“근데 채하가 나 좋아하나?”

무수히 쏟아졌던 채하의 고백도 여전히 선명했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채하를 대해야 할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욕조의 물은 차갑게 식어 버렸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만 닦아 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채하가 벗겨 낸 것인지 내 침대 시트는 사라지고 흰 매트리스만 덜렁 남아 있었다. 옷을 꺼내 입고 벽장에서 새 침구를 꺼내 침대 위에 깔았다.

채하 방으로 들어가자 엉망이 되어 버린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침대 시트마저 벗겨 내고 새것을 꺼내 교체했다. 온갖 체액으로 더러워진 침구를 넣고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세탁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돌아가는 이불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멍하니 앉아 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작업실로, 작업실에서 다시 거실로. 한 군데에 오래 있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면서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 다녔다.

거실로 다시 나오자 세탁이 완료되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세탁기 문을 열고 이불을 꺼내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우연히 본 창밖에 채하가 보였다. 채하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깜짝 놀라 방으로 뛰어들어 갔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채하를 보자 지난밤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집에 온 그가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채하도 나처럼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조용히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였으면 출근하는 채하를 배웅했겠지만 일부러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채하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병원이었다.

카운터에서 접수를 하고 대기실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대충 예상하고는 있지만 제대로 확인받기 위해 병원에 온 것이었다. 평일 오전이었으나 병원 대기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접수를 하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 겨우 의사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가 채하와 있었던 일을 제외하고 엊그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내 설명을 들은 의사 선생님은 검지 끝을 알코올 솜으로 닦고 채혈침으로 찔렀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피가 나오자 형질 검사용 키트에 그것을 묻혔다.

피를 묻히고 채 30초도 지나지 않아 길쭉한 키트 끝에 뜬 플러스 표시 두 개가 보였다.

“오메가로 발현하신 거 맞네요.”

검사 키트의 표시를 본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저, 정말이에요?”

“네. 억제제 처방해 드릴 테니까 다음 히트 사이클 전에 챙겨 드시구요. 히트 사이클 기간에 알파가 노팅하면 임신 확률이 대략 50퍼센트 정도 되니까 임신 계획이 없으시면 조심하셔야 해요.”

나는 떨떠름하게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카운터에서 진료비를 수납하고 억제제 처방전을 받아 병원을 나왔다. 병원 옆에 있는 약국에서 억제제를 받아 들자 이제 정말 오메가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마지막으로 받았던 형질 검사에서 오메가 발현 확률이 27.8%로 나왔었다. 워낙 낮은 확률이었기 때문에 거의 0%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메가가 되어 버렸다. 집으로 가는 내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집으로 돌아와 약국에서 받아 온 억제제를 꺼내 보지도 않고 약을 넣어 두는 수납함에 통째로 처박았다. 그러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지금이 점심때니 여섯 시간 후면 채하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엊그제 있던 일을 내 의지가 아닌 페로몬 때문에 일어난 사고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일에 의미를 갖다 붙인다면 제일 좋아하는 친구인 채하와 멀어질 것 같았다. 나는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어제처럼 채하를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술과 안주를 거실 테이블 위가 가득 찰 정도로 준비했다. 술을 마시고 채하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듯했다.

준비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채하를 기다렸다. 채하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에 왔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살짝 긴장했다. 숨을 고르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했다.

“일찍 왔네?”

“어? 어….”

채하는 내가 거실에 나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저녁 안 먹었지? 얼른 와서 앉아.”

채하는 옷만 갈아입고 나오겠다며 얼떨떨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대하느라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바지에 땀을 대충 닦아 내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채하도 나처럼 마음을 가다듬는 것인지 옷만 갈아입고 나온다는 사람치고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채하가 천천히 방에서 나왔다. 방에서 나온 그는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조용한 분위기보다는 조금의 소음이 필요할 것 같아 텔레비전을 켰다. 우리 사이의 적막을 영화 채널에서 나오는 소리로 채웠다.

소주병의 뚜껑을 따고 채하의 앞에 놓인 잔에 3분의 2 정도 채웠다. 채하가 소주병을 건네받아 내 잔에 절반을 채웠다. 우리는 말없이 술잔을 맞댄 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으, 쓰다.”

소주를 마시자 자동적으로 나오는 내 반응에 채하는 평소처럼 몸을 일으켜 주방에서 물 한 잔을 떠 와 내 앞에 놓았다.

“고마워.”

채하가 떠다 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우리는 소주 한 병을 비울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나 오늘 병원 갔다 왔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소주병의 뚜껑을 열어 스스로 잔을 채웠다.

“나 이제 오메가 된 거래. 웃기지?”

하나도 웃기지 않았지만 술을 마시고 억지로 웃는 척을 했다. 채하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비웠다.

“몸은 괜찮대?”

채하가 말없이 술 한 잔을 더 마시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한 말이 내 걱정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웃음이 나왔다. 술에 취해 웃음이 헤퍼진 것 같았다.

“응. 아무 문제 없대.”

“다행이네.”

우리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건 그냥 사고로 생각하자. 페로몬 때문에 일어난 사고.”

채하는 한동안 술잔만 비웠다. 그러곤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자. 사고.”

슬픈 표정으로 사고, 사고, 하고 중얼거리는 그를 애써 무시했다. 잔뜩 차려 놓은 안주가 무색하게 술잔만 비우자 빠르게 취기가 돌았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물컵을 들고 일어났을 때, 채하는 내 손에서 컵을 빼내 대신 물을 떠다 주었다.

이제 소주가 쓴지 단지 구별조차 어려웠다. 그래도 오늘은 더 취하고 싶었다. 채하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빠른 속도로 술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손에 쥔 소주병도 바닥이 났다.

또 한 병을 들어 뚜껑을 돌렸다. 그러나 술에 취한 내 몸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

내 손 안에서 헛돌던 술병은 결국 내 허벅지 위로 떨어져 입고 있던 바지를 적셨다.

“괜찮아? 안 다쳤어?”

채하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내 손목을 잡고 물었다. 바지가 푹 젖었지만 나는 술에 취해 상황 파악이 더딘 상태였다. 나는 말없이 오랫동안 바지를 쳐다본 후에야 옷이 젖은 것을 알았다.

“어, 괜찮아.”

나는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괜찮다고 웅얼거렸다. 채하는 그제야 내 손을 놓고 티슈를 뽑아 술에 젖은 다리를 닦아 주기 시작했다.

“내가 닦을게.”

종아리를 닦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잡힌 채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혼자 떠들고 있던 텔레비전은 어느새 꺼졌고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렸다.

눈이 마주치자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할 정도로 굳어 버렸다. 채하도 나와 마찬가지인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마주 보고 있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채하가 내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우리는 혀를 쓰지 않고 서로의 입술만 빨아들였다. 내가 먼저 그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두 번째 충동이었다.

“지… 지원아.”

채하에게 키스를 하며 천천히 밀었다. 바닥에 등이 완전히 닿자 채하가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입을 막으려고 다시 입을 맞췄다. 초침 소리만 나던 거실에 혀와 혀가 얽히면서 나는 소리가 더해졌다.

채하의 위에 올라탄 내 허벅지에 단단하게 서 버린 채하의 성기가 느껴졌다. 그 느낌에 흠칫 놀라다가 테이블 밑에 내려놓은 빈 술병을 발로 찼다. 술병이 쓰러지는 소리에 우리는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나를 번쩍 들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엊그제 있었던 일을 그냥 사고로 생각하자고 이야기한 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채하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한 번에 벗어 버렸다. 그러곤 축축하게 젖은 내 바지를 벗겨 침대 밑으로 떨어트렸다.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를 쓰다듬던 채하의 손은 점점 위로 올라와 속옷 안으로 들어왔다.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핑계로 다시 한번 그에게 안겼다.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채하의 밑에 깔려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흐으… 응, 아흣… 으.”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내 안에서 움직였다. 은밀한 곳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에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억눌렀다. 하지만 입술 새로 빠져나오는 소리는 완벽하게 막을 수 없었다.

“입술 깨물지 마.”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본 채하가 입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키스를 할 때 혀가 움직이는 것처럼 입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채하의 손가락이 입천장의 울퉁불퉁한 곳을 느리게 쓰다듬자 손목을 잡고 혀로 손가락을 훑었다.

쪽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빨고 입에서 빼내자 놀란 표정을 했다. 채하의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맨정신으로는 절대 못 할 일이었다. 혀가 얽히는 동안 그는 아까 거실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천천히 뒤로 눕혔다.

“채하야, 빨리이.”

채하를 재촉했다. 하지만 내 뒤가 완전히 풀어지지 않아서인지 그는 행동을 서두르지 않았다. 채하가 다시 천천히 내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불빛 외에는 광원이 없는 어두운 방 안에 질컥거리는 소리와 내 신음 소리만 들렸다.

“으읏, 아으… 흡.”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려 입을 틀어막았다. 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채하가 내 손을 자신의 목에 둘렀다. 무언가가 다리 사이에 닿는 것이 느껴지더니 곧바로 통증이 몰려왔다.

“아, 아파아….”

충분히 풀었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손가락 한 마디 남짓한 삽입에 몸이 반쪽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내가 아파하자 몸을 뒤로 물리려는 채하를 잡았다.

“으응, 그냥 해.”

내 말에 그는 다시 천천히 움직여 남은 부분을 전부 밀어 넣었다. 커다란 성기가 전부 내 안으로 들어오자 배 속을 가득 채운 느낌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흐으, 으.”

“지원아, 힘 빼.”

채하가 눈물이 고인 눈가에 입을 맞추며 나를 달랬다. 아무리 술에 취해 감각이 흐려졌어도 통증은 선명했다. 히트 사이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움직여도 돼?”

헐떡이던 호흡이 가라앉자 채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겨우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다. 천천히 움직이라고 덧붙이자 그가 느리게 허리를 뒤로 물렸다. 내벽을 쓸고 나가는 느낌에 채하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읏, 으으… 읏.”

짧게 한숨을 뱉고 다시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까지는 쾌감 대신 고통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나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향기. 채하의 페로몬이었다.

“채하야, 더어… 더 해 줘.”

“페로몬?”

고개를 끄덕이자 방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농도의 페로몬이 쏟아졌다. 이미 술에 취한 상태에서 페로몬을 느끼자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하아, 아아… 아읏.”

“지원아, 힘, 좀 빼.”

천천히 속도를 높이는 채하가 내 몸 이곳저곳에 빨간 자국을 남겼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가슴의 돌기를 건드리니 바짝 서 버린 것이 느껴졌다. 채하가 츄웁 소리를 내며 가슴 한쪽을 퉁퉁 부을 정도로 빨아들였다.

“아아, 하지 마. 그거 싫어.”

채하는 “싫어?” 하고 물으면서도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양쪽 가슴이 비슷한 정도로 부은 후에야 그가 입을 뗐다. 그리고는 얕게 움직이던 전과는 다르게 더 깊이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하윽…! 아, 아, 흐, 으읏, 아.”

깊은 곳을 건드리는 느낌에 채하의 등을 껴안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내 반응을 알아챈 채하가 묵직하고 집요하게 그곳을 짓눌렀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동시에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발기한 성기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읏, 읏! 흐읏.”

채하가 움직이는 대로 신음하다가 그의 배 위로 사정해 버렸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내 몸은 방금 사정한 것을 잊은 듯 계속되는 자극에 충실하게 반응했다.

“지원아… 후, 지원아.”

채하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앞으로의 일을 머릿속에서 날려 버리고 채하에게 매달렸다.

다음 날 새벽,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에 눈을 떴다. 침대 옆 협탁에는 그가 떠다 놓은 것인지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물컵을 들어 담긴 물을 전부 마셔 버렸다. 아직 전날 마신 술이 전부 깨지 않은 것 같았다.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오기 위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디가.”

그 순간 잠든 줄 알았던 채하가 내 손목을 잡았다.

“지원이 너, 나 먹고 버리는 거야?”

채하는 울먹이고 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 내가 쓰레기가 된 것 같았다.

“아, 아니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근데 왜 도망가려고 해?”

“아… 그게 그러니까….”

“저번엔 페로몬에 취해서 난 사고라고 하고, 이번엔 술에 취해서 난 사고라고 할 거야?”

채하의 말에 할 말이 없어져 고개를 숙였다. 훌쩍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수면 등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채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내가 좋아하는 거… 알면서 어떻게 이래.”

채하를 안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하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제 너 안 좋아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돼.”

웅얼거리던 채하는 울다 지쳐 잠들어 버렸다. 내 품에 안겨 잠들어 버린 채하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해 주고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의 옆에 누웠다.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고 눈물에 젖은 채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확실해졌다. 설채하는 나를 좋아한다. 나는 설채하를 그냥 친구로 생각하는 건가? 이 질문의 답은 아무리 생각해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채하와 그냥 친구로 지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채하에게 안긴 상태였다. 억지로 빠져나가려다가 채하를 다시 울릴까 봐 계속 안겨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안은 팔이 조금씩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간 그는 내가 했던 것처럼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자는 척하는 내 얼굴 위로 기척이 느껴지고 말캉한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

도둑 키스를 하던 채하는 갑자기 눈을 뜬 나 때문에 놀라 주저앉아 버렸다. 훌쩍거리는 소리에 아까처럼 등을 토닥거렸다. 눈물범벅이 된 채하를 달래 욕실로 들여보내고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나 너 먹고 버리는 거 아니야.”

어색하게 흐르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럼 뭔데?”

채하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정말 흔히 말하는 먹버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 뭐냐고 묻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말문이 막혀 그대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나를 응시하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또 입을 맞췄다. 지금은 페로몬에 취해서도, 술에 취해서도 아니었다.

***

그날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친구와 모닝 키스를 하고 밤마다 섹스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와 채하는 우리 관계를 명확히 정의 내리지 않고 있었다.

“잘 갔다 와.”

이전에도 자주 출근하는 채하를 배웅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이제는 손을 흔드는 대신 입을 맞추며 배웅했다.

“으응, 안 돼.”

현관 앞에서 키스를 하다가 불이 붙어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일도 종종 생겼다. 오늘도 채하는 키스에 잔뜩 흥분했는지 나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심지어 자기 방까지 갈 정신도 없는지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내 방으로 들어갔다.

“채하야, 전화.”

채하의 핸드폰이 쉬지 않고 울렸다.

“안 받아도 돼.”

채하는 방해받기 싫은지 전화를 무시하고 내 옷을 벗기고 이곳저곳 빨아 대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의 핸드폰이 조용해지자 이제 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채하를 밀어내고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 여보세요?”

- 야, 지원아, 설채하 이 새끼 왜 전화를 안 받아?

전화를 건 사람은 희주였다.

“어? 어, 글쎄….”

- 걔 집에 없어?

“응. 없는데.”

집에 있다고 하면 뭘 하길래 출근도 안 하는 거냐고 물을 것 같아 거짓말을 했다. 희주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너 빨리 회사 가.”

내 말에 채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한 번만 하고 출근하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나는 채하의 얼굴을 당겨 진하게 입을 맞추고 얼른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어쩔 수 없이 현관 앞에 선 얼굴에는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채하를 회사로 보내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에 손을 얹자 빠르게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이전보다 글이 더 수월하게 써지고 있었다. 그가 회사에서 돌아오면 물고 빨고 하다가 기절하듯 잠들어 버려 이전처럼 밤늦게까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써 놔야만 했다.

우리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돌기 시작한 것이 나 몰래 글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주인공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조력자와 연애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근데 얘네도 무슨 사이인지 서로 말을 안 했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채하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이 좋았다. 이 감정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도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단지 용기가 없어 직면하지 않고 숨어 버렸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채하가 퇴근길에 치킨과 맥주를 사 들고 왔다. 우리는 거실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 희주가 뭐라고 안 했어?”

맥주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고 채하에게 물었다.

“응. 차 막혀서 늦었다고 했어.”

그가 내 앞접시에 닭 다리를 전부 올려 주면서 말했다. 나는 닭 다리 네 개 중 두 개를 채하의 앞으로 옮겨 놓았다.

“앞으로 아침엔 안 돼.”

단호한 말에 그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입을 쪽 맞추고 “알겠지?” 하고 물었다.

“웅. 알겠어.”

말과는 달리 채하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우리 내일 벚꽃 보러 갈까?”

“벚꽃? 갑자기?”

“응. 이제 벚꽃 질 것 같은데, 다 지기 전에 너랑 보러 가고 싶어서.”

함께 꽃구경을 하고 싶다는 채하의 말에 주책없이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하여 알겠다고 대답했다.

“우리 대학교 때도 같이 벚꽃 봤는데…, 그때 기억나?”

“당연하지. 내가 그때 분홍색 카디건 선물해 줬잖아.”

“그럼 우리 그때랑 같은 옷 입고 갈까?”

“나 그 카디건 잃어버렸는데.”

무심한 내 말에 또다시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얼굴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채하는 내가 선물해 준 분홍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나는 비슷한 색의 맨투맨을 꺼내 입었다.

집을 나선 우리는 손을 잡고 벚나무가 심긴 산책로를 함께 걸었다. 대학 시절 벚꽃 구경을 했던 그곳이었다.

“와, 예쁘다. 이제 벚꽃 필 때 시험 안 보니까 너무 좋다.”

“나는 너랑 있어서 그냥 좋아.”

낯부끄러운 말을 한 채하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나는 금세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우리가 손을 잡고 한창 걷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지원!”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자동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최희주, 김윤호, 이선준이 보였다.

“옆에 누구냐?”

김윤호의 말에 채하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맞잡은 손을 본 세 명의 눈이 커졌다.

“야, 너네 뭐야?”

“왜 손잡고 있어?”

“설마….”

친구들은 내가 말할 틈도 없이 쏘아붙였다.

“보면 몰라?”

채하가 마지막 벚꽃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에 부딪히지 않도록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그 대답에 친구들은 말 대신 감탄사만 뱉었다.

“그치, 쟤네 사귈 줄 알았어.”

“학교 다닐 때도 그냥 친구라고 하던 애들이 제일 먼저 사귀더라니까.”

“맞아, 맞아.”

친구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맞았다며 서로 맞장구를 쳤다. 채하와 친구들의 말을 듣자 우리 관계가 확실하게 정의된 기분이었다.

사진을 찍어 주겠다는 선준이의 말에 핸드폰을 넘겨주고 가장 큰 벚나무 아래에 섰다. 우리는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날 때마다 채하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의 마지막 사진엔 내 볼에 입을 맞추는 채하와 수줍게 웃는 내 모습이 담겼다.

“우웩.”

나에게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부럽냐?”

나는 채하의 팔짱을 끼고 얄미운 말투로 물었다. 곧바로 친구들의 야유가 돌아오고 우리는 모두 크게 웃었다.

벚꽃 구경을 마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나와 채하의 앞에 앉은 친구들은 식사를 하는 내내 우리 사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느라 바빴다.

“누가 사귀자고 한 거야?”

사귀자고 말한 적도, 사귀는 사이라고 확실히 못 박은 적도 없었다. 나는 희주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반찬만 뒤적거렸다.

“그런 걸 말해야 알아? 지원아. 맛있게 먹어.”

채하는 친구들의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삼겹살을 내 앞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마딛게 머겅.”

김윤호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나는 윤호를 한번 흘겨보고 삼겹살을 입에 넣었다. 우리는 소주잔을 가득 채워 건배했다. 잔을 비우자 채하가 평소처럼 물과 안주를 챙겨 주기 시작했다.

평소였으면 친구들과 속도를 맞춰 빠르게 술잔을 비웠겠지만 오늘따라 술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소주 한 잔을 마시고 테이블 위에 술잔을 뒤집어 놓았다. 오늘은 술을 그만 마시겠다는 우리들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술 더 안 먹어?”

“응. 오늘따라 술이 안 넘어가네.”

벨을 눌러 사이다를 한 병 주문했다. 술 마시는 분위기라도 내자는 생각에서였다. 채하가 사이다 뚜껑을 따고 컵에 가득 따라 내 앞에 놓아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사이다를 한 모금 마셨다.

빈 술병이 늘어갈수록 친구들의 얼굴은 점점 빨개져 갔다. 그에 비해 채하의 얼굴색은 그대로였다.

“채하야, 너 괜찮아?”

얼굴은 멀쩡했지만 괜찮다고 대답하는 그의 혀는 조금 풀려 있었다.

“우리, 집에 갈까?”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친구들은 우리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우리 버리고 집에 가서 뭐 하려고? 가지 마.”

“알 거 없잖아.”

가지 말라는 친구들에게 채하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윤호는 노래방에 가야 한다며 채하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우리는 윤호를 떼어 놓고 식당을 나왔다.

“채하야.”

“응?”

“그냥.”

채하의 손을 잡고 집까지 걷던 중 아무 이유 없이 채하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우리는 잠시 멈춰 짧게 입을 맞췄다. 숨결에서 옅은 술 냄새가 느껴졌다.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갔을 때 채하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채하에게 등을 보이고 앉자 그가 따뜻한 바람으로 내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머리가 다 마르자 헤어드라이어의 전원을 끄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나는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손님, 계산하셔야죠.”

그제야 채하의 뜻을 읽고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이 아쉬웠는지 여전히 입을 내민 채였다.

“아직 모자라?”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침대에 나를 내려놓은 채하가 협탁에서 콘돔을 꺼냈다. 속옷만 입고 있는 하체는 누가 봐도 잔뜩 흥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흉흉하게 서 있는 성기를 입에 물자 귀두만으로도 입 안이 가득 찼다.

“우읍.”

기둥을 잡고 입 안 깊숙이 삼키자 목구멍을 찔러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준 채하가 내 입에서 성기를 빼냈다. 성기를 전부 삼키는 건 아직 무리였다. 나는 콘돔을 가져와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꺼냈다.

“거기 앞에 비틀어서 공기 빼고.”

그가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여 돌돌 말린 얇은 라텍스 막을 기둥 끝까지 끌어 내렸다. 손바닥 가득 젤을 짜낸 채하가 내 엉덩이 사이에 치덕치덕 발랐다.

“손가락 넣어도 돼?”

관계를 시작할 때의 채하는 항상 먼저 나에게 무언가를 해도 되냐고 동의를 구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검지부터 천천히 밀어 넣었다. 여러 번 겪는 일이었지만 영원히 적응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었다.

“으응, 그거 진짜 싫어….”

채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손가락 세 개가 무리 없이 내 안에서 움직이자 손을 빼내고 내 허리를 안았다.

“으윽, 응… 으응.”

한 손으로 채하의 성기를 잡고 천천히 그 위로 앉았다. 겨우 귀두만 들어갔을 뿐인데 뻐근함이 느껴졌다. 숨을 한번 고르고 다시 느리게 움직였다.

“후으, 흐읏, 너무… 커.”

채하의 성기를 완전히 삼킨 후에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내 입에서 목덜미까지 천천히 입술 도장을 찍었다.

“숨 천천히 내쉬어.”

호흡을 가다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조금씩 들썩일 때마다 성기가 내벽을 문지르고 지나가는 느낌에 움찔거렸다. 내 움직임에 채하도 영향을 받는지 간간이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지원아, 후우.”

“으응, 좋아.”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야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내 움직임이 성에 차지 않는지 채하가 나를 들어 침대에 눕혔다. 여전히 성기가 내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는 나를 바로 눕히고 점점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다리를 들어 채하의 허리를 감쌌다. 까슬한 그의 음모가 느껴질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평소 채하는 내가 너무 느껴서 눈물을 보일 정도로 밀어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하읏! 아흣! 하아, 조금만, 으응… 천천히…, 흐.”

내 말에도 그는 속도를 낮추지 않았다. 채하가 어느 부분을 건드리자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쾌감이 느껴졌다.

“흐읏…! 아, 거, 거기.”

“여기?”

등을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알았는지 계속해서 그 부분을 찔러 댔다.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하얀 정액을 토해 냈다. 채하는 내가 사정한 것을 봤음에도 성기를 쥐고 흔들어 다시 피가 몰리게 만들었다.

“아, 아아, 그만, 흐으.”

내 애원에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정력에 나쁘다는 음식을 찾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채하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사정했다. 사정 후 바로 성기를 빼낸 그가 콘돔을 벗겨 매듭 짓고 침대 밑으로 던졌다.

“지원아.”

“응?”

채하에게 안겨 축 늘어진 채로 겨우 대답했다.

“한 번만 더 하자.”

그 말을 듣자마자 도망을 가려 했지만 채하가 한발 더 빨랐다. 발목을 움켜쥐고 나를 잡아당겨 자신의 아래에 가뒀다.

“제발….”

“딱 한 번만. 응?”

그 후의 일을 알면서도 채하의 애원에 넘어가 버렸다. 너무 느낀 나머지 그에게 안겨 엉엉 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관계가 끝나고 채하에게 안겨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들어갔다.

“지원아, 괜찮아?”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채하는 그제야 걱정이 되는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욕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원아….”

채하가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등을 돌리고 누운 나를 뒤에서 껴안은 채였다.

“왜 불러.”

“미안해….”

몸을 돌려 채하에게 안겼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나를 끌어안고 머리에 입을 맞췄다. 지난 일주일 동안 끝은 항상 이랬다. 눈물을 흘리고 삐친 척을 하는 나와 내가 눈물을 흘린 후에야 눈치를 보는 채하.

그에게 안겨 생각했다. 채하가 나를 좋아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채하를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좋아하고 있었다고. 나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애써 외면해 왔던 내 감정을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

오늘도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잠귀가 어두워지고 잠이 늘어 채하가 출근하는 것도 모르고 자는 날이 많아졌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갔다.

채하 : 깊게 자길래 안 깨웠어. 일어나면 밥 꼭 챙겨 먹어

오전 09:03

잠든 사이 채하에게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다음에는 꼭 깨우고 출근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채하 : 안 돼

오전 10:55

채하 : 지원이 너 깨어 있는 거 보면 나 출근 못 해

오전 10:55

지금까지 채하가 지각한 횟수를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일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축 늘어져 채하에게 몸을 맡기는 날이 늘어나자 내 목욕용품이 하나둘 채하의 욕실로 옮겨졌고, 어느새 그곳을 내 물품들이 완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씻고 거실로 나오자 이제 5월 중순이 되었음에도 조금 춥게 느껴졌다. 얇은 카디건을 꺼내 입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커다란 소시지 하나와 계란 두 개를 꺼내 프라이팬 위에 올렸다. 소금을 뿌리지 않은 계란과 소시지가 익어 가는 동안 식빵 두 장을 토스트기에 넣고 전원을 눌렀다.

가스레인지 불을 끔과 동시에 토스트기에서 식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큰 접시를 꺼내 음식을 옮겨 담으니 그럴싸한 브런치가 완성되었다. 접시를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냉장고에서 딸기 잼과 오렌지주스를 꺼냈다.

이전에는 아침 식사로 잼을 바른 식빵 한 장과 물 한 컵이면 충분했지만 요즘 들어 식빵 한 장은 식사를 때우기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접시에 가득 담긴 음식이 모두 내 배 속으로 들어가고도 오렌지주스를 한 컵 더 따라 마셨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더 먹는 대신 아쉬움을 뒤로하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접시를 싱크대에 담가 놓고 커피 한 잔을 내려 작업실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며 메일을 읽고 답장까지 보내고 나자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메일 창을 끄자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컵에 남은 커피를 전부 마셔도 잠은 깨지 않았다. 결국 나는 10분만 눈을 붙이자는 생각에 알람을 맞추고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나 내가 일어났을 때는 10분 후가 아니라 2시간 후였다. 겨우 10분 사이에 완전히 잠들어 버려 잠결에 알람까지 끄고 쭉 기절한 것이었다. 책상 위에 엎드렸던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기지개를 피면서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서인지 금세 허기가 몰려왔다. 핸드폰으로 배달 앱을 보며 늦은 점심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쓱쓱 넘기다가 떡볶이가 눈에 들어왔다. 떡볶이와 사이드 메뉴를 고르고 결제까지 마치자 30분 안에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떡볶이를 기다리는 동안 텔레비전을 켜 영화 채널을 틀었다.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있었다. 추억에 취해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영화를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보던 내용이 지금은 다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훌쩍거리는 사이 떡볶이가 도착했는지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인터폰으로 문 앞에 두고 가라는 말을 전했다. 울고 있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배달원이 음식을 놓는 소리가 들린 후 문을 조금 열어 음식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식탁 대신 테이블 위에 떡볶이를 올려놓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기 시작했다. 떡볶이가 입 안으로 들어가자 언제 울었냐는 듯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요즘 들어서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식욕이 늘었고 감정이 요동쳤다.

“아, 졸려.”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자 또다시 잠이 몰려왔다. 나는 테이블 위를 치우는 대신 소파에 앉았다. 시도 때도 없이 졸린 것이 춘곤증 같았다.

“…원아, 지원아.”

다시 눈을 떴을 때 퇴근한 채하가 내 앞에 있었다.

“채하야아….”

나는 채하의 목에 매달렸다. 그는 나를 안아서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지원아, 어디 아파?”

나를 침대에 눕힌 채하가 이마를 짚어 보면서 물었다.

“으응, 안 아파. 나 졸려.”

“살짝 열나는 것 같은데.”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채하가 이마에 쿨 시트를 붙여 주고 저녁 먹기 전까지 더 자라며 이불을 덮어 주고 나갔다. 방 밖에서 내가 먹은 떡볶이를 치우는 소리와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요 며칠 동안 머리만 닿으면 잠드는 나 때문에 우리는 손만 잡고 잤다. 심지어 엊그제는 분위기를 잡으며 키스를 하던 중 잠들어 버렸다.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도 채하는 이미 출근한 상태였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몰려오는 허기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평소였으면 씻고 아침을 먹었겠지만 오늘은 식사부터 했다.

식사를 마치고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 아래에 오랫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욕실에서 보낸 뒤에야 샤워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옷장 문을 여니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이 가득했다.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벽장에서 여름옷을 넣어 둔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 내고 빈 상자에 옷장에 들어 있던 두꺼운 옷을 꺼내 차곡차곡 담았다. 겨울옷을 정리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옷을 다시 정리해 넣는 것은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아, 이거 작년에 어떻게 입고 다녔지.”

여름옷은 한 철만 입어도 금세 후줄근해져서 외출복과 잠옷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옷장에 넣을 옷과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옷을 구분하는 데만도 꽤 오래 걸렸다. 정리를 마치자 다른 곳도 눈에 들어왔다.

결국 창문을 열고 침대 위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달 넘게 방치되어 있던 내 침대 위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당분간 내 침대를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침구를 아예 걷어 내 버렸다.

세탁기에 이불과 여름옷을 함께 넣고 작동시켰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수납함을 열어 내용물을 전부 꺼냈다. 물건을 다시 정리하고 약이 담긴 맨 아래 칸을 열었다.

“아.”

첫 히트 사이클을 겪고 처방받은 억제제가 약국 봉투에 담긴 상태 그대로 들어 있었다. 억제제를 보고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첫 히트 사이클 이후로 약 한 달 반 정도가 지나 있었다.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히트 사이클이 오는 주기가 불안정할 것이라고 했다. 한 달 안에 다시 히트 사이클이 올 확률이 높으니 항상 억제제를 챙겨 다니라고 당부했었다. 그러나 한 달이 훌쩍 지나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두 번째 히트 사이클은 오지 않았다.

갑자기 히트 사이클 기간에 알파가 노팅을 하면 임신 확률이 50퍼센트 정도 되니 조심하라고 했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천천히 떠올렸다.

“아… 어떡해. 진짜….”

선명하게 기억나는 노팅의 횟수만 3번이 넘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횟수가 3번이니 실제 횟수는 그것보다 많을 것이 분명했다. 50퍼센트 확률의 일이 최소 세 번 일어난 것이다.

핸드폰을 들어 임신 초기 증상을 검색했다. 인터넷에서 설명하는 증상은 지금 내 상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미친 듯이 잠이 쏟아지고 감정 기복이 심해져 별것 아닌 일로 눈물을 흘리던 요즈음이 이제야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겨우 증상 몇 가지로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지갑을 챙겨 들고 집에서 제일 가까운 약국에 갔다. 불량 임신 테스트기가 종종 있으니 여러 개를 사용해 보라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 다섯 개의 테스트기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약국 비닐봉지를 열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침 첫 소변이 가장 정확하다는 약사의 말에 따라 내일 아침에 검사를 하기로 하고 그대로 옷장에 넣은 뒤 방을 나왔다.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감도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채하의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숨만 푹푹 쉬다가 어느새 또 잠들어 버렸다. 다시 눈을 뜨자 평소처럼 퇴근한 채하가 내 앞에 있었다. 일으켜 달라는 뜻으로 팔을 뻗었다. 그는 나를 안아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회사 잘 갔다 왔어?”

“응. 지원이는 오늘도 계속 잔 거야?”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디에 다녀왔는지 아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 채하야….”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채하를 부르자 채하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아이가 있으면 어떨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물어보려 했지만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갑자기 왜?”

“그냥 궁금해서.”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아직은 좀 그렇지.”

“그렇구나.”

“아직 누구를 책임지기엔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채하의 말에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 임신 사실을 확인한 것이 아니니 섣불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채하가 내는 소음에 눈을 떴다. 채하가 방을 나가자 나도 욕실로 들어갔다. 칫솔에 치약을 짜고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 안 가득 찬 치약 거품을 뱉을 때마다 한숨도 함께 뱉어 냈다.

세수까지 하고 욕실 밖으로 나오자 채하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가 옷을 입는채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침대로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잘 잤어?”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앉은 채하가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입술에서 민트 향이 났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여.”

“응? 아,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그래.”

채하가 볼 때 티가 날 정도로 얼굴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대충 얼버무린 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불안한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지원아….”

내 행동이 채하를 자극한 것인지 슬금슬금 움직이던 그의 손이 옷 안으로 들어왔다. 일주일 넘게 손만 잡고 잤더니 누가 봐도 욕구 불만이었다.

“안 돼.”

단호하게 손을 떼어 냈다. 그는 나를 안고 침대로 풀썩 누워 버렸다. 나는 얌전히 채하의 품에 안겼다.

“회사 가야지.”

채하와 한참을 누워 있다가 시간을 일깨워 줬다. 채하는 회사에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를 따라 현관까지 배웅을 나갔다.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고 현관문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내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제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옷장 안에는 어제 넣어 둔 약국 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봉투를 꺼내 침대에 앉았다. 반바지를 입은 허벅지 밑으로 까슬까슬한 매트리스의 촉감이 느껴졌다. 크게 숨을 한번 내쉬고 봉투 안의 것을 모두 꺼냈다. 상자 하나를 열자 불투명한 포장지에 들어 있는 테스트기와 설명서가 침대 위로 떨어졌다.

일단 설명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약국에서 설명을 들어 사용법은 대충 알고 있지만 혹시 모를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꼼꼼하게 읽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쓰인 설명서를 다 읽고 난 후 다섯 개를 전부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포장지를 뜯어 테스트기를 꺼내고 뚜껑을 열었다. 설명서대로 테스트기의 끝에 소변을 묻히고 다시 뚜껑을 닫고 테스트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 테스트기의 결과 창에는 붉은색의 진한 선 한 줄과 흐린 선 한 줄이 나타났다. 일단 세면대 안에 테스트기를 던져 두고 다른 테스트기를 꺼내 다시 검사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다섯 개의 테스트기는 모두 같은 결과를 나타냈다.

떨리는 손으로 테스트기와 포장지를 모두 정리해 약국 비닐봉지에 넣었다. 내용물이 보이지 않도록 검은색 비닐봉지를 찾아 한 번 더 담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검사 결과를 믿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오메가 전문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 오후로 예약해 주겠다는 직원의 말에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제까지 미친 듯이 느껴지던 식욕이 거짓말인 것처럼 입맛이 뚝 떨어졌다.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 한 잔 마시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임신 테스트기의 불량 확률은 5% 정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5개 연속으로 불량일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울 것이다.

채하가 퇴근할 때까지 자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지원아, 나 왔어.”

채하가 방으로 들어와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내일 병원에 가서 제대로 확인을 하기 전까진 괜찮은 척을 하고 싶었지만 생각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

다음 날 억지로 점심을 챙겨 먹고 집을 나섰다. 택시 기사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을 정도로 병원으로 가는 내내 한숨만 쉬었다. 병원 앞에서도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을 서성였다.

예약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금까지 다녔던 병원과 내부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드는 거부감은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접수대로 가 직원에게 이름을 말했다. 잠시 대기해 달라는 직원의 말에 소파에 앉았다.

평일이었지만 병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트너와 손을 잡은 사람도 있고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하며 웃는 사람도 있었다. 병원에 진료를 보러 온 사람 중 나만 혼자 온 것 같았다. 나는 이름이 불릴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새하얀 바닥만 보고 있었다.

“마지막 히트 사이클이 언제셨어요?”

임신 테스트기 5개 모두 두 줄이 나왔다는 말에 의사 선생님은 마지막 히트 사이클 날짜를 물었다.

“4월 1일이요.”

내 대답을 들은 선생님은 6주 정도 됐을 것이라고 했다. 초음파 검사를 해 보자기에 초음파실로 들어가 상의를 걷고 검사용 침대에 누웠다. 초음파 기계의 화면에 무언가 비쳤다.

“여기 잘 자리 잡았네요.”

나는 화면을 가리키는 선생님의 손끝을 보고서야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의사 선생님이 콩콩거리는 심장 소리까지 들려주자 확인 사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처음 아기 심장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보통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았지만 나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각종 주의 사항을 알려 줬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멍한 정신으로 진료실을 나오고 수납까지 마치자 손에는 아기 수첩이 들려 있었다. 집으로 바로 가는 대신 눈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네. 사천 원입니다.”

“아, 아니다. 딸기주스로 주세요.”

습관적으로 커피를 시켰다가 아차 하고 메뉴를 바꿨다. 카드와 진동 벨을 받아 드는데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멍하니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진동 벨이 울리자 기계적으로 음료를 받아 왔다.

빨대로 딸기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아기 수첩을 펼쳤다. 초음파 사진 속 회색 덩어리가 나와 채하의 아기였다. 배 위로 손을 올렸다. 아직 평평한 배 속에 아기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오메가가 되어 버린 것도 아직 완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데 아기까지 생겨 버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첫 히트 사이클 이후 간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의 말을 대충 흘려들은 나를 원망했다.

엊그제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가 있으면 어떨 것 같냐고 묻자 아직 누구를 책임지기엔 부담스럽다던 채하가 생각났다. 그 말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트레이 위에 올려진 냅킨으로 눈가를 눌렀다. 눈물을 닦을 때마다 연갈색 냅킨이 짙은 갈색으로 변해 갔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눈물만 흘리다가 채하의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고 걸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지만 지금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우리 집을 올려다보았다. 집에 불이 켜지지 않은 것을 보니 채하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주머니 속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채하였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꾼 후 아예 가방 안으로 넣어 버렸다. 시간이 흘러 해가 지자 갑자기 찬 바람이 불어 쌀쌀해졌다.

날도 추운데 집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서러움에 다시 눈물이 났다. 그네에 앉아 혼자 청승맞게 훌쩍거리고 있을 때 나를 부르는 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나도 모르게 가방도 버려 놓고 도망쳤다.

“지원아! 지원아!”

뒤를 돌아보자 채하가 쫓아오고 있었다. 곧바로 그에게 손목이 잡혔다.

“이거 놔.”

“지원아, 왜 그래.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손을 뿌리치려 해도 채하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나를 걱정하는 채하의 목소리에 방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흘렀다. 채하는 더 묻지 않고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무슨 일인지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집으로 와서도 나는 소파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울기만 했다. 말없이 나를 안고 토닥거리는 그의 손길에 소리까지 내며 엉엉 울었다. 결국 지쳐 잠들었는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깼어?”

내 옆에는 채하가 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그의 손에는 아기 수첩이 들려 있었다. 나는 아기 수첩을 낚아챘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에 현기증이 느껴졌다.

“윽.”

머리를 잡고 신음하자 채하가 곧바로 나를 다시 눕혔다.

“봤어?”

아기 수첩을 봤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울면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눈물이 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원아?”

내 말을 들은 채하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너는… 흐읍… 책임, 책임지긴… 흡, 부담스럽다면서.”

“아니, 그게 지원아….”

“나도 무섭단 말이야.”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끅끅거리면서 울었다.

“미안해…. 나는 이런 상황인 줄 모르고…. 미안해. 지원아.”

그는 나를 안고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결국 나를 달래던 채하도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는 나와 채하 둘 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채하는 아침 식사를 준비해 침대 위로 가져다주었다. 어제 제대로 먹은 것이 없다 보니 음식을 보자 허기가 몰려왔다. 아침을 먹기 시작하자 그는 내 앞에 앉아 계속 눈치를 보았다.

“지원아, 더 필요한 건 없어?”

고개를 젓고 계속 식사를 했다. 접시 위의 음식이 다 사라지자 채하가 베드 테이블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양치와 세수를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방으로 돌아온 채하는 대화를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아 버렸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는 더 지극정성이었다. 혼자 있으면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을까 봐 점심때마다 집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생활을 일주일 가까이 하고 있었다.

“잘 갔다 와. 그리고 점심때마다 집에 안 와도 돼.”

“아니야. 나는 지원이 더 자주 보니까 좋아.”

채하는 나를 한 번 안아 주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라는 말을 하고 집을 나섰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아기에 대한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다.

나는 채하가 나가자 기계적으로 컴퓨터를 켜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니터에 떠다니는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배 위에 손을 올렸다. 하루는 낳아서 키우자는 생각을, 또 그다음 하루는 아기를 지우자는 생각을 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베타 남성으로 살았던 나로서는 당연한 고민이었다.

“채하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채하와 함께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물었다. 많은 단어를 생략하고 뜬금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그는 단박에 그 의도를 알아챘다.

“나는 지원이가 하자는 대로 하고 싶어.”

“내가 낳고 싶지 않다고 하면?”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채하가 내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대답했다.

“내 의견하고 상관없이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는… 지원이 너랑 우리 아기랑 셋이 살고 싶은데….”

방금보다 더 오래 생각하던 채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렇구나….” 하고 힘없이 대꾸한 뒤 소파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기대앉자 채하도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난 모르겠어. 아직.”

배에 올려놓은 손 위로 채하의 손이 겹쳐졌다.

“괜찮아.”

그가 내 손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나는 채하의 품에 안겼다.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페로몬이 느껴졌다.

“채하야, 나 아기 생긴 줄 모르고 술도 많이 먹었는데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아기도 모르고 먹은 건 봐준다고 하잖아.”

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잘 키울 수 있을까?”

두려움이 섞인 내 물음에 채하가 우리는 잘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채하의 말에 용기를 가져 보기로 했다.

“다음에 병원 갈 땐 같이 가자.”

내 말에 그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지원아… 내가… 내가… 너랑 우리 아기….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행복하게 해 주겠다면서 엉엉 우는 채하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웃는 것이었다.

“잘 다녀와.”

“응. 다녀올게. 우리 아기도 아빠랑 잘 놀고 있어.”

채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아기에게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나는 채하를 배웅하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내 손에는 아기 수첩이 들려 있었다. 의자에 앉아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수첩을 덮고 내 책상 서랍 맨 마지막 칸에 넣었다. 두 달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나와 채하 사이에 일어나 버렸다. 여전히 무섭지만, 채하와 함께라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채하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요즘 나는 잠들기 전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근데 우리 집에는 언제 말씀드려?”

“다음 주에 집에 가서 말씀드릴까?”

“우리 아빠 놀라서 기절하면 어떡해?”

아직 우리 부모님은 내가 오메가가 된 것도 모르고 계셨다. 오메가가 되어 버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텐데 애까지 만들어 왔다고 하면 정말 기절할지도 모른다.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우리 집에서 반대하면 어떻게 하려고?”

“무릎 꿇고 ‘아드님을 주십쇼!’ 해야지.”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채하는 웃고 있는 얼굴 여기저기에 쪽쪽 입을 맞췄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잡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어 입천장을 살짝 긁어내렸다. 도발에 채하는 내 윗입술을 살짝 물고 짧게 입을 맞췄다.

지금 채하는 많이 참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벌써 이런 짓 저런 짓 다 하고 남았겠지만 요즘 그는 키스도 먼저 하지 않았다. 짧게 쪽 소리만 내고 떨어지는 것이 전부였다.

“채하야, 그럼 우리 결혼해?”

“그럼 안 해? 아기는 나랑 만들고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하려고 했어?”

내가 대답하지 않자 채하는 “지원이, 양아치….” 하고 삐친 척을 하며 등을 돌려 누웠다. 삐친 척을 해도 반응이 없자 결국 우는 척까지 했다.

“흐윽… 지원이가 나 먹버한 거 맞았어…. 흑흑.”

“야! 내가 먹버 아니랬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계속해서 우는소리를 했다. 내 입에서 결혼하자는 소리가 나오자 그는 바로 손을 떼고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좋냐?”

“웅. 좋아.”

나를 끌어안은 채하의 입꼬리는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아기를 낳기로 한 이후 나는 생각보다 담담해졌다. 며칠 전까지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울거나 잠만 자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달리 채하는 매일이 걱정이었다. 나를 쉽게 깨지는 유리컵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채하는 요즘 거의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전화를 해 댔다. 나는 전화가 왔을 때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에 걸쳐 알게 되었다. 통화를 하다가 지나가는 말로 무엇이 먹고 싶다고 하자 30분도 지나지 않아 내가 말한 메뉴를 모두 사 들고 집으로 달려온 채하를 맞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 지원아, 밥 먹었어?

“응. 밥도 먹었고 간식도 먹었어.”

- 맛있게 먹었어?

“응. 너는 밥 먹었어?”

식사 여부를 물어본 것만으로도 좋은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나는 채하에게 일 열심히 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평소보다 커피를 연하게 내린 후 작업실로 들어갔다. 몇 달 동안 잡고 있던 소설의 마지막에 완결이라는 글자를 써넣은 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았다. 다시 소설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 문장을 다시 써 보기도 하고 위치를 바꿔 보기도 했다.

“…기묘했다. 기묘하게 느껴졌다. 기묘한….”

갑자기 문장 하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미를 바꾸며 여러 번 읽어 보아도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들 수 없었다. 몇 번을 고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일단 다음 부분으로 넘어갔다. 모니터 속 문장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 지원이 뭐 해요?

전화를 건 사람은 채하였다.

“나? 일하지.”

- 빨리 일어나서 스트레칭 한 번 해.

채하의 말에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나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지금 했어.”

- 목만 대충 움직였지?

내 버릇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성의 있는 스트레칭을 몇 번 더 해야만 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나는 끙끙거리는 소리가 스피커를 넘어간 후에야 만족한 것 같았다.

-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낮잠도 자.

“알겠어.”

사랑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나에게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으응, 나도.” 하고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채하를 좋아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글 파일 하단의 숫자가 벌써 4분의 3 이상 퇴고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제 내일 하루만 더 하면 끝날 것 같았다. 무리해서 일하지 말라는 채하의 말대로 오늘은 이만 쉬기로 했다. 컴퓨터를 끄고 책상 위에 있던 머그 컵을 챙겨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커피를 마셨던 머그 컵을 대충 물로 헹구고 냉장고에서 토마토주스를 꺼내 가득 따랐다. 요즘 우리 집 냉장고에는 과일주스가 종류별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주스를 자주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된 채하가 사다 놓은 것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컵을 들고 한 손은 배 위에 올려 두었다. 임신 사실을 안 지 2주도 되지 않았지만 채하는 아기한테 “아빠가, 아빠가.” 하면서 자주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말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 채하와 함께 집에 가서 임신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릴 생각을 하자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전화로 주말에 집에 간다는 말을 전해야 할 텐데 계속해서 전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일단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뤄 보자고 생각한 나는 금요일 오전에는 꼭 부모님께 전화를 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께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

그날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평소와 조금 달랐다. 평소였으면 채하가 일어난 후에야 겨우 일어나거나 아예 일어나지도 못했을 텐데 채하보다 먼저 눈을 떴다. 곤히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입맞춤에 눈을 뜬 채하가 나를 끌어당겼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숨이 가빠질 때까지 나를 몰아붙였다. 며칠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채하가 먼저 시작한 키스였다.

입을 맞추며 잠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잠옷 상의가 벌어지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 가슴에 닿았다. 채하는 내 가슴에 붉은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흐읏, 간지러워.”

가슴에 닿는 채하의 숨결이 간지러웠다. 자국 여러 개를 남긴 채하는 바지마저 벗겨 버렸다.

“읏…!”

채하는 내 귓가에 “괜찮아.” 하고 중얼거리며 커다란 손으로 귀두부터 기둥뿌리까지 한 번 훑어내렸다. 검지로 귀두의 갈라진 틈과 기둥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살살 어루만지자 내 입에서 한숨 같은 신음이 나왔다.

“흐으, 으응.”

손을 둥글게 말아 쥐어 성기 전체를 잡고 움직였다. 일부러 귀두 부분을 지나갈 때 손아귀에 힘을 주는 탓에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채하야아, 조금만 살살. 흐읏.”

“응. 살살 할게.”

말과 다르게 채하의 손에 들어간 힘은 그대로였다. 계속되는 자극에 채하의 어깨에 올린 손끝이 움찔거렸다. 내가 곧 사정할 것을 눈치챘는지 채하가 갑자기 손을 빼냈다. 자극이 사라지자 눈만 끔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더 할까?”

나는 채하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그는 속옷을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나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채하는 그 행동을 저지하고는 한입에 내 성기를 삼켰다.

“히익…! 아, 하지 마아….”

채하의 머리를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채하가 사탕을 빠는 것처럼 혀를 움직였다. 나는 허벅지를 잡혀 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신음하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사정 직전까지 갔던 몸은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했다.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빨기 시작하자 허리가 들썩였다. 곧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말캉말캉한 채하의 혀 위에 정액이 쏟아졌다.

“흐으, 뱉어. 빨리.”

채하의 입 안에 사정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입 안에 든 것을 뱉는 대신 꿀꺽 삼켜 버렸다.

“그걸 왜 먹어!”

“왜에. 처음 먹는 것도 아닌데.”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내 손을 자신의 아랫도리로 가져갔다. 한 손으로 쥐기도 버거울 정도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크기였다. 채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움직였다. 채하가 했던 것처럼 귀두부터 천천히 쓸어내리자 그가 신음을 억눌렀다.

“윽.”

그 모습을 보자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학심을 느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채하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양손으로 그의 성기를 쥐고 천천히 움직였다.

“후우, 지원아.”

살짝살짝 주어지는 자극이 답답한지 재촉했다. 하지만 채하의 재촉에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손을 놀렸다. 이미 채하의 성기 끝에서는 투명한 쿠퍼액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쿠퍼액을 문지르다가 점점 손가락을 밑으로 내려 귀두 밑 움푹 팬 곳을 건드렸다.

“여기가 좋아?”

움찔하는 채하를 보고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둥글게 만들고 귀두 아래를 조이면서 움직였다. 아기가 생긴 것을 안 이후로 손만 잡고 자서 그런지 그는 오래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잔뜩 흥분한 채하를 보고 나 역시 방금 사정한 적이 없는 것처럼 발기해 버렸다.

결국 우리는 나란히 두 번씩 사정한 후에야 손을 멈췄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인 것이 많았는지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것이 자제력을 건드린 것인지 채하는 오랜만에 회사에 지각했다. 이제 친구들이 지각이 잦아진 이유를 알게 될 것 같았다.

“지원아, 한숨 더 자. 아기야, 아빠 회사 다녀올게.”

채하는 다시 잠옷을 입혀 주고 나와 아기에게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나는 몰려오는 피곤함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주방으로 가 컵에 오렌지주스를 따랐다. 오렌지주스를 조금 마시니 갑자기 채하와 자주 가던 카페의 샌드위치가 생각났다. 점심만 먹고 바로 돌아오려고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먹다 남은 컵은 다시 집에 왔을 때 치울 생각이었다.

택시를 타고 카페에 도착해 샌드위치와 생과일주스를 한 잔 주문했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기다렸다. 음식이 나오고 접시 위에 올려진 샌드위치 2개 중 하나를 다 먹었을 때 채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전화 좀 그만하라고 짜증을 낸 이후 그는 전화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 : 지원이 밥 먹었어?

오후 12:21

응 지금 먹고 있어. 너는?

오후 12:22

무엇을 먹고 있냐는 채하의 질문에는 집밥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혼자 샌드위치를 먹으러 왔다는 것을 알면 사다 줄 수 있는데 왜 말을 안 했냐고 삐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른 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께 주소를 말하고 편하게 시트에 기대자 나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왔다. 룸 미러로 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본 기사님은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 편하게 자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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