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결혼식을 하루 앞둔 금요일, 우리는 집으로 내려갔다. 점심 무렵 도착할 예정이라고 미리 말해 둔 덕인지 채하의 어머니가 한 상 가득 식사를 준비하고 엄마와 함께 나와 채하를 기다리고 계셨다.
평소 같았으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코코가 제일 먼저 달려 나와 우리를 반겨 주었겠지만, 코코는 조용했다. 내 착각이겠으나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코코가 나와 채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어도 코코는 소파 귀퉁이에 엎드려 있기만 할 뿐 우리의 옆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와 엄마는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고 나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엄마가 내 이마를 무의식적으로 쓰다듬더니 이마에서 머리카락으로 손을 옮겨 내 앞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엄마의 머리에 꽂혀 있던 실핀 하나를 빼 땋은 머리를 고정시키고 내 이마를 두 번 톡톡 치는 것으로 미용실 놀이가 끝났음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머리 묶어 주는 거 좋아하는데, 딸 하나 낳지 그랬어?”
땋아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내 어린 시절 앨범을 보면 머리를 묶거나 핀을 꽂은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엄마는 이미 늦었어. 네가 낳아. 손녀 머리 묶어 주게.”
“어우, 됐어.”
엄마와 대화를 하다 보면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머리에 꽂은 실핀을 빼내고 앞머리를 탈탈 털어 땋은 머리카락을 풀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피치 아빠 뭐 해
오후 03:11
채하 : 코코 달래 주는 중ㅜㅜ
오후 03:15
내 예상대로 코코는 화가 난 것이 맞았다.
너 때문에 화난 거니까 잘 풀어 줘
오후 03:16
채하 : 왜 나 때문이야
오후 03:17
채하 : 우리 때문이지
오후 03:17
엥 왜 우리야?
오후 03:18
채하 : 피치는 나 혼자 만들었어?
오후 03:19
그래도 너 때문이야 반박ㄴㄴ
오후 03:20
채하 : 난 아직도 그날 니가 내 목에 매달려서 안에 싸 달라고
오후 03:21
더 하면 차단
오후 03:21
채하 : 울던 거 생각하면 아래가
오후 03:22
채하 : 응 미안…….
오후 03:22
설채하는 낯부끄러운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해 댔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채하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려 방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에 물을 끼얹고 거실에 앉았다. 엄마는 여전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엄마, 아빠 요즘 기분 어때 보여?”
“뭘 어때, 평소랑 다를 거 없지.”
“아니, 저번에 엄청 화난 것처럼 보여서….”
내 말에 엄마는 코웃음을 치더니 얼마 전 채하가 다녀간 이후로 신이 나서 사위 자랑을 한다고 했다.
“채하가 다녀갔다고? 언제?”
“한 열흘쯤 됐나?”
평소 칼퇴근을 하던 채하가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집에 들어왔던 날이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날 저녁, 채하가 술에 취한 아빠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 이후로 아빠가 채하를 사위로 인정한 것 같다고 했다.
나와 엄마는 퇴근한 아빠와 함께 밖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아빠는 고기가 구워지는 대로 나와 엄마의 앞접시 위에 올려 주고 있었다.
“채하가 잘해 줘?”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나에게 물은 아빠가 소주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응. 잘해 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빠는 소주를 한 잔 더 마시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 아빠는 소주를 마시며 나에 대한 걱정도 함께 털어 넘기려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서영이와 코코를 데리고 나온 채하를 마주쳤다.
“오빠!”
삼촌이라고 부르라던 채민 형의 말은 잊어버린 것인지 서영이는 여전히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달려왔다. 나는 “잘 있었어?” 하고 서영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자 채하가 달려와 서영이를 뺏어 안고는 우리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어머니, 아버지, 식사 잘하고 오셨어요?”
“응. 채하는 밥 먹었어?”
“네. 저녁 먹고 서영이랑 아이스크림 사러 나왔어요.”
나는 부모님께 채하와 함께 산책을 하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내 말에 엄마는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들어오라는 말만 남기고 아빠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서영이는 코코의 목줄을 잡고 우리보다 세 걸음 앞에서 걸었다. 우리는 서영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손을 잡고 그 뒤를 따라갔다.
“서영아, 무슨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엄마는 외계인!”
“그래. 삼촌이 사 줄게.”
서영이는 내 말에 “삼촌?”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채하가 다시 한번 설명했다.
“응. 내일 삼촌이랑 결혼하면 지원 오빠가 아니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내 배 속에는 아기가 있어서 달려가서 안기거나 하면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서영이의 눈높이에 맞게 다시 설명을 마치자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도착했다. 채하는 코코와 함께 밖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나는 서영이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서영아, 제일 큰 통으로 살까? 동생들도 먹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드시게.”
“응! 좋아.”
제일 큰 통으로 주문을 하고 계산을 했다. 그사이 서영이는 직원에게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말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보자 나도 하나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하야 아이스크림 먹을래?
오후 07:58
채하 : 나는 민트초코♥
오후 07:59
내 돈으로 민트초코 따위를 사려니 돈이 아까웠지만 채하의 취향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작은 사이즈의 아이스크림을 세 개 더 주문했다. 집에 가는 동안 먹을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고르라는 말에 서영이는 신이 났다.
직원이 건네주는 쇼핑백을 한쪽 손목에 끼고 양손에 아이스크림콘을 하나씩 든 채로 서영이와 함께 매장 밖으로 나왔다. 채하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민트초코 콘과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작은 아이스크림 컵을 들고 숟가락으로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서영이의 관심에서 코코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영아 맛있어?”
“응, 완전 맛있어.”
그 말에 채하는 서영이와 같은 맛인 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네.”
“당연히 치약초코보다 맛있지.”
“민트가 치약 맛이 아니라 치약이 민트 맛이거든!”
“네. 다음 치약초코 좋아하시는 분.”
채하는 민초를 무시하지 말라고 큰소리였다. 우리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내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은 금세 사라지고 콘 부분만 반절쯤 남았다. 채하의 콘은 벌써 서영이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다.
우리는 집 앞에서 내일 보자며 작별 인사를 했다. 서영이의 손에 아이스크림 쇼핑백을 들려 주고 집으로 들여보낸 후 채하는 문 앞에 서서 나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쪽 소리를 내고 떨어지는 입술에서 민트 향이 났다. 채하는 피치에게도 내일 보자며 인사를 하고 우리 집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다음 날, 예상을 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정신이 없었다. 나를 깨우는 엄마의 손길에 억지로 눈을 뜨고 대충 씻은 후 예약해 놓은 숍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나까지 셋이 쪼르르 앉아 메이크업과 머리 손질을 받자 이제 정말 결혼을 한다는 것이 실감 났다.
“엄마, 오늘 예쁘다.”
“엄마가 언제는 안 예쁜 적 있었니?”
엄마는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오늘 나 대신 엄마가 결혼해야겠다는 말에 엄마는 “어리고 잘생긴 새 남편 데리고 결혼식장 들어가는 거면 좋지.” 하고 말했다. 아빠가 들었으면 입이 댓 발 나와서 하루 종일 툴툴거렸겠지만 다행히 아빠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직 거울 앞에 앉은 아빠를 빼놓고 나와 엄마가 셀카를 찍는 사이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채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머니, 지원아.”
웨딩 촬영 때도 느꼈지만 전문가의 손길을 받은 채하는 눈을 떼기 아까울 정도로 잘생겼다. 엄마도 나와 똑같이 생각했는지 연신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와, 채하는 완전 새신랑이네.”
엄마의 말에 채하는 부끄러운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채하의 부모님과 아빠가 준비를 모두 마쳤다. 식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숍을 나와 헤어졌다.
“엄마, 나 청심환 먹으면 안 되지?”
“당연히 안 되지!”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채하의 손을 잡고 걷고 입을 맞출 생각을 하자 손바닥이 땀으로 젖는 것 같았다. 그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상황에 결혼식장에 들어갈 생각까지 하니 이게 잘하는 짓인가 하는 걱정도 함께 들었다. 그러나 이미 도망가기엔 늦어 버렸다.
먼저 도착한 채하가 우리가 탄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엄마가 타고 있는 보조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그는 옆에 서서 불편한 곳은 없는지, 피곤하지는 않은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채하의 부모님은 우리보다 먼저 결혼식장 로비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계셨다. 나는 채하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우리 부모님 옆에 서서 오시는 손님들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창 인사 중일 때 저 멀리서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은 주헌 형과 뚱한 표정의 막내를 안은 채민 형이 보였다.
채민 형 부부와 이제는 내 조카들이 된 삼 남매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채민 형 품에 안긴 서현이는 고개를 홱 돌리고 채민 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나도 어릴 때 그랬다며 웃어 댔다. 어느새 커서 이렇게 됐냐며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울먹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저 멀리서 큰 소리를 내며 오고 있는 최희주와 이선준, 김윤호를 발견함과 동시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 셋은 우리 엄마를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아빠와는 초면이었다. 하지만 능청스럽게 어머니, 아버지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어느새 채하의 손을 잡고 식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행진 리허설을 하긴 했으나 실전을 앞두니 긴장이 되었다.
“채하야, 나 너무 떨려.”
“나도 떨려. 나 넘어지면 어떡하지?”
채하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달래 줘야 했다. 어떻게 걸어가서 주례사 앞에 섰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주례사의 질문에 채하가 큰소리로 대답하자 곧 내가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질문에 기계적으로 “네.”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반지를 나눠 끼자 사회를 맡은 희주가 다음 순서인 축가를 소개했다. 평소의 추레한 차림새와 다르게 잘 차려입고 마이크를 든 채 무대 위로 올라온 이선준과 김윤호는 준비를 많이 한 것처럼 보였다. 매일 연습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축가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다음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잘 살아야 돼.”
엄마가 나를 안아 주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아빠는 채하를 안아 주며 나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양가 부모님 인사를 마칠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평소 잘 울던 채하는 신기하게도 오늘만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예식이 끝나고 부모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하객분들께 인사를 하러 돌아다녔다. 지인들이 대부분 겹치는 탓에 초면인 분들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 친구분들이 모여 계시는 테이블로 가서 인사를 하자 잘 살라는 덕담이 돌아왔다.
“아들이라며?”
껄껄거리면서 묻는 아저씨들에게 “네?” 하고 되물었다.
“벌써 너희 아빠가 할아버지 된다고 다 자랑하고 다녔어.”
뭐가 그렇게 급했냐는 농담에 모두가 웃었지만 나와 채하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저 아저씨들이 알고 있으면 여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서둘러 결혼식을 진행한 이유를 알 터였다.
부모님들이 친구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었다. 나와 달리 여전히 고등학교 동창과 연락을 하는 채하가 결혼 사실을 알린 모양이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네. 너네 고등학교 때부터 이럴 줄 알았어.”
“그래. 쟤네 절대 그냥 친구 아니었다니까.”
채하와 함께 인사를 건네자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대학 친구 세 명과 고등학교 친구들도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 고등학교 때는 친구 맞았어.”
내 말에 전부 입을 모아 야유했다. 고등학교 시절 채하와 꽤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 속도위반이라며?”
“응. 우리 아기 돌잔치 할 때 부를게.”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 채하가 대신 대답했다. 나와 채하는 친구들에게 많이 먹고 가라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다리 안 아파?”
“다리는 괜찮은데 배고파.”
괜찮은지 묻는 채하에게 나는 배가 고프다며 작은 소리로 징징거렸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고 점심까지 거른 상태로 식당 안을 돌아다니려니 죽을 맛이었다.
우리가 다음으로 간 곳은 채민 형의 가족들이 앉은 테이블이었다. 의자에 앉아 열심히 밥을 먹는 서영이, 서진이와 달리 서현이는 여전히 아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번에는 채민 형이 아니라 주헌 형이었다. 아이들에게 약하지만 유독 막내에게 더 약한 주헌 형은 서현이에게 음식을 직접 떠먹이는 중이었다.
“서영아, 서진아. 맛있어?”
“응. 맛있어.”
채하의 물음에 입을 모아 대답했다. 삼 남매 중 유독 낯을 가리는 서현이는 사람이 많은 곳에 온 게 싫은지 아빠의 품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현이와 주헌 형을 지켜보던 채민 형은 애 버릇이 나빠진다며 그 행동을 말렸다.
“행복하게 살고 우리 조카는 낯 안 가리길 바란다.”
채민 형의 한숨 섞인 덕담을 끝으로 우리는 희주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행복하게 살아라.”
윤호가 포크로 접시 위에 있던 육회를 돌돌 말아 입 안에 넣고 씹으면서 말했다.
“너네 노래 좀 하더라?”
“반했냐? 새신랑이 반하면 곤란한데.”
“나랑 결혼했는데 너한테 반하겠냐?”
윤호의 말에 반박하는 채하 때문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 저녁때 제주도로 가는 거야?”
“응. 끝나고 공항으로 가려고.”
윤호는 자기도 신혼여행을 가고 싶다며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너도 결혼해.”
“야, 희주야. 결혼식장 온 김에 나랑 결혼할래?”
내 허리를 안은 채하의 놀림에 윤호는 옆에 앉아 있던 희주에게 물었다.
“난 초콜릿 말고 다른 선물 줘.”
희주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윤호를 완벽하게 무시하고 우리에게 당당히 기념품을 요구했다.
모든 결혼식 일정이 마무리되자 부모님들은 이미 녹초가 되어 계셨다. 하루 종일 번갈아 가며 막내를 안고 다닌 채민 형 부부도 꽤나 지쳐 보였다. 채민 형의 가족들은 바로 서울로 올라가는 대신 하루 더 자고 내일 떠난다고 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챙겨 둔 캐리어를 챙겨 공항으로 갈 준비를 했다.
“조심히 갔다 와.”
“도착하면 연락하고.”
“응. 얼른 쉬세요.”
나와 채하는 부모님들께 인사를 하고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주헌 형의 차에 탔다. 주말이라 차가 조금 막히기는 했지만 기차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채민 형 부부와 작별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지원아, 도착할 때까지 눈 좀 붙여.”
기차에 타자 채하는 피곤할 테니 조금 자 두라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착지까지 그리 멀지 않아서 자는 대신 채하와 손을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채하, 너는 안 피곤해?”
“응. 난 괜찮아.”
그의 손을 잡고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가락 주변을 만지작거렸다.
“아, 맞다. 어제 엄마가 머리 묶어 주게 딸 하나 더 낳으라고 했다?”
“그래? 그럼 우리 피치 여동생 만들어 줄까?”
“됐어. 성별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피치 하나만 잘 키우자.”
채하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다.
기차를 타고 출발해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작은 공항은 넉넉하게 시간을 잡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산했다. 우리는 항공사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공항 내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공항의 식당은 비싼 가격에 비해 맛이 그저 그랬다.
천천히 밥을 먹고 국내선 탑승 구역으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보딩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채하와 나는 탑승 구역에 있는 카페에서 음료를 사서 비행기가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자기야.”
채하에 입에서 나온 말은 난생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오글거려.”
킥킥거리면서 웃는 나에게 채하는 이제 우리가 호칭을 바꿔야 하는 이유에 대한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피치가 말 배울 때 우리한테 지원아, 채하야, 하고 부르면 어떡해.”
“에이, 설마.”
“서영이 말 배울 때 기억 안 나? 채민이 형은 채민아, 하고 부르고 주헌이 형은 대표님이라고 불렀었잖아.”
채하의 말을 듣자 어린 서영이가 지원아, 채하야, 하고 우리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피치가 우리한테 여보, 자기, 하면 어쩌려고?”
그것에 대한 대책은 없는지 채하가 조용해졌다. 말문이 막혀 손에 쥔 음료의 빨대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탑승구 입구에 서 있는 직원이 우리가 예약한 비행기의 탑승을 알렸다.
“가자. 자기야.”
내 말에 채하는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곧 큰 소리로 “응, 자기야! 가자!” 하고 외쳐 버려 주변에 있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쏠렸다. 나는 바로 내 말을 후회했다.
비행기가 제주도에 도착하자 바깥은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채하가 미리 예약해 둔 렌터카를 찾아서 숙소로 향했다.
“우리 내일은 뭐 해?”
“내일은 아무것도 안 해.”
“왜? 제주도까지 왔는데.”
나는 신혼여행 코스를 채하에게 맡겨 두고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가끔 뭐가 먹고 싶다 정도의 의견만 냈을 뿐이었다.
“우리 오늘이 첫날밤인데 너 힘들까 봐 일부러 아무 일정도 안 넣었어.”
“첫날밤은 무슨. 저번에 혼인 신고 하고 온 날도 첫날밤이라며.”
채하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 쳤다.
“그날은 혼인 신고 첫날밤. 오늘은 진짜 결혼 첫날밤.”
“그럼 피치 생긴 날은 뭔데?”
“그건 연애 첫날밤.”
이유도 참 잘 갖다 붙였다. 듣다 보니 어느새 숙소 앞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객실마다 전용 수영장이 있는 풀 빌라 리조트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애정 행각을 해도 될 정도로 사생활 보호 하나는 최고일 듯했다.
나는 커다란 침대 위에 털썩 소리를 내며 누웠다. 등 뒤로 푹신한 침구가 느껴지자 아침부터 쌓인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침대에 누운 것을 본 채하가 캐리어를 아무 데나 던져 놓고 침대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내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뭐 해?”
나는 뭐 하냐고 물으면서도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어느새 셔츠 단추를 다 끄르고 버클까지 풀어 바지를 벗겨 내자 몸을 일으켰다. 채하의 얼굴을 잡아당겨 짧게 입을 맞추고 쪽 소리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한 번 빨았다.
“이제 씻으러 가야겠다. 도와줘서 고마워.”
나는 씩 웃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채하의 표정은 눈앞에서 간식을 뺏긴 강아지의 표정과 비슷했다. 목욕용품의 고급스러운 향기를 맡으며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공들여 씻기 시작했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머리를 탈탈 털며 욕실 밖으로 나갔을 때 채하는 이미 속옷 차림이었다. 나를 노려보던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말릴까 고민했지만 채하에게 말려 달라고 할 생각으로 머리에 덮인 수건을 목에 걸었다. 수영장과 이어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저 너머로 달빛에 반짝이는 밤바다가 보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바깥 구경을 하는 사이 채하가 재빠르게 씻고 나왔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잔뜩 굶주린 사람처럼 내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추는 채하를 겨우겨우 밀어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채하에게 엄마의 전화번호가 떠 있는 화면을 보여 줬다.
“가족들한테 잘 도착했다고 알려 줘야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이 5번 끝나기도 전에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
- 응, 아들. 잘 도착했어?
“이제 숙소 도착해서 씻고 나왔어. 엄마 밥은 먹었어?”
- 지금 채하네랑 같이 먹고 있어.
저녁 식사라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모든 가족들이 모인 탓에 자리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우리 잘 도착했다고 전해 주고, 맛있게 먹어.”
엄마는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내 전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채하는 하던 것을 마저 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채하야. 너 전화 왔는데.”
“안 받아도 돼.”
그는 보지도 않고 딱 잘라 말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채하의 어머니였다.
“얼른 받아. 어머니가 전화하셨네. 안 받으면 내가 받는다?”
내 말에 채하는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 내가 잘 도착했다고 알리는 것을 보고도 느끼는 것이 없냐며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그사이 나는 캐리어를 침대 옆으로 끌고 와 집에서 미리 챙겨 온 것들을 꺼냈다.
콘돔과 젤, 그리고 해외 직구로 구매한 가운데 구멍이 뚫린 실리콘 덩어리였다. 전화를 끊은 채하는 내 가방 속에서 나오는 것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거 써.”
나는 도넛과 모양이 비슷한 실리콘 덩어리를 채하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라고 끼우는 거래.”
인터넷에서는 흔히 ‘과좆 방지턱’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과좆 방지턱’을 손에 든 채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말랑말랑한 질감이 마음에 드는지 손으로는 계속 주물럭거렸다.
“이런 건 도대체 어디서 파는 거야?”
“그거? 인터넷으로 직구 했어.”
“어떻게 쓰는지는 알아?”
“응. 알지.”
구매 사이트에 안내된 사용 방법을 수능 영어 지문보다 더 집중해서 읽었다는 것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채하는 손에 든 것을 나에게 쥐여 주고 내 가운 허리끈을 풀었다. 벌어진 가운 틈새를 보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왜? 어차피 벗을 거라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어.”
저 모습을 보고 싶어 일부러 샤워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나와 달리 달리 채하는 웃지 않았다. 그의 페로몬이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의 페로몬 샤워가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내 몸 어느 한 곳도 남김없이 집어삼키려는 것 같았다.
성적인 의도가 가득 담긴 페로몬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채하와 관계를 할 때 느꼈던 페로몬은 애들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오메가인 내 몸은 알파에게 충실하게 반응해 뒤를 축축하게 적셨다. 아직 내 성기가 완전히 발기하기도 전이었다.
“으응, 채하야.”
한 손으로 내 뒤통수를 끌어당겨 키스를 하는 채하의 목에 팔을 감고 더 매달렸다. 이 행동이 채하를 더 자극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당장은 페로몬에 취해 깊게 생각할 여유 따위 없었다.
숨 막히는 키스가 끝나고 깨달았다. 오늘도 나는 침대 위에서 울게 될 것이라고.
채하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기도 하고 입술에 힘을 줘 빨아들이기도 했다. 아직 페로몬 조절이 미숙한 나는 그가 목을 자극할 때마다 페로몬을 흘려 댔다. 방 안이 채하와 내 페로몬으로 가득 찬 듯했다.
“채하야, 으응, 그거 그만하고. 이제 넣어 줘.”
“안 돼. 지금 바로 하면 너 다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찔거리고 있는 내벽을 그의 것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채하는 단호했다. 채하에게 다시 한번 매달렸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속옷 위로 가져갔다.
“정말 이거 그냥 넣어?”
손을 가득 채우는 묵직한 부피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내가 멈칫하는 것을 본 채하는 “저 링 안 쓰면 우리 피치 아빠 만나겠네.” 하고 장난스럽게 내 배를 만졌다. 채하를 흘깃 노려보고 꺼내 놓은 콘돔 하나를 뜯어 검지에 씌웠다.
“빨리해.”
항상 “그만해.”, “살살 해.”, “천천히 해.” 같은 말만 하던 내가 저런 말을 뱉게 될 줄은 몰랐다. 채하는 손가락으로 구멍 주위만 슬쩍슬쩍 건드리기만 할 뿐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그의 손놀림에 애가 타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멍만 움찔거렸다.
“우리 자기가 직접 할까?”
“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눈만 끔뻑이고 있을 때 채하가 자신의 손에 씌워진 콘돔을 빼 내 손가락에 씌웠다.
“마음이 급해 보여서. 급한 사람이 직접 하는 게 낫잖아.”
채하는 나를 팔과 다리로 엎드리게 만들고 내 손을 뒤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내 손목과 손가락을 한 손으로 잡고 검지 한 마디가 내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곳에 무언가가 들어간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내 손가락이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채하야아, 이거 싫어.”
나는 채하의 앞에 개처럼 엎드려 내 손가락 때문에 헐떡거리고 있다는 수치심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그의 페로몬에 완전히 취해 버린지라 점점 수치심보다 쾌락을 좇고 싶은 욕구가 나를 지배했다. 이제 나는 손가락 한 개를 완전히 삼키고 손목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으, 응, 아흣, 으응.”
손이 움직일수록 억누른 음성은 수치심을 잊은 신음 소리로 변해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채하가 내 손목을 잡고 안에 들어가 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나는 손가락이 빠져나간 후에도 헐떡거렸다. 채하는 내 손가락에 씌운 콘돔마저 빼내 침대 밑으로 떨어트렸다.
“아무리 우리 지원이 혼자 하는 거라지만 내가 안 만졌는데 좋아서 헐떡거리는 건 보기 싫어.”
나는 몸을 겨우 일으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얇은 천 조각에 눌려 있던 성기가 내 볼을 툭 하고 쳤다. 남의 성기로 얼굴을 맞는 기분은 기묘했다.
콘돔 하나를 들어 포장지를 이로 물고 찢었다. 돌돌 말려 있는 얇은 고무 막을 꺼내 끝을 비틀고 채하의 성기에 씌웠다. 성기를 잡고 그것을 천천히 밑으로 쓸어내리자 내 손에 잡힌 채하의 성기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콘돔을 완전히 씌운 후 젤을 넉넉하게 바르고 양 손가락을 하나씩 걸어 죽 늘린 도넛처럼 생긴 링을 그의 성기에 끼웠다.
“이거 불편해.”
채하가 자신의 성기 뿌리를 조인 것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는 참으라고 단호하게 말한 후 링 하나를 더 끼웠다. 내가 하나를 더 끼울까 말까 고민할 때 채하가 나를 뒤로 눕혀 버렸다.
“아직 하나 남았어.”
내 말에 그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손에 들려 있던 링을 낚아채 자신의 성기에 끼웠다.
“후, 진짜. 피치 낳으면 이것부터 갖다 버릴 거야.”
링을 전부 끼운 채하가 내 구멍 입구에 성기 끄트머리를 갖다 대면서 말했다. 채하는 링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줘 성기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채하의 성기가 닫혀 있던 내벽을 천천히 가르고 들어왔다.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오면서 내벽을 지긋하게 누르고 지나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나왔다.
“으응, 채하야, 움직여, 흣, 줘.”
쾌감에 약한 내 몸은 곧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더 큰 쾌락을 원했다. 나는 아까처럼 다시 채하에게 매달려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하는 움직이는 대신 내 입술에 오래도록 입을 맞췄다.
“흐으, 으응, 채하야, 빨리이. 아읏.”
내가 혼자 구멍을 조였다 풀면서 자극하는 것을 눈치챈 그가 입을 떼고 허리를 천천히 움직여 왔다.
“아, 아! 아흣, 응.”
이윽고 점점 속도가 올라갔다. 채하의 성기가 내벽을 쓸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마다 구멍 주위에 부딪히는 실리콘 링 때문에 평소와 다른 자극이 느껴졌다. 나는 채하의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맞닿자 쾌감이 섞인 더운 숨결이 닿았다. 나는 채하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입천장부터 앞니의 뒷부분까지 한 번에 훑어 내렸다. 채하의 혀가 기다렸다는 듯 내 혀를 감았다. 말캉한 혀와 혀가 문질러지자 곧바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에서는 내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비음이 잔뜩 섞인 숨 가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채하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자기야, 좋아?” 하고 물었다. 나는 “으응. 좋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으, 아… 으읏…! 흣.”
나는 한 손으로 내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쾌감이 밀려들면서 금방이라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채하는 성기를 만지지 못하게 내 양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양손이 잡힌 나는 채하가 박아 대는 대로 흔들렸다. 결국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채하의 배 위로 정액을 뿜어냈다. 그러나 채하는 여전히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채하야아, 나 쌌어. 흐읏!”
“응. 하아, 알아.”
채하는 대답을 하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내 안을 꽉 채우면서 움직이는 채하가 어느 부분을 건드리자 눈앞이 새하얘질 정도로 강한 쾌감에 몸이 움찔했다.
“아흣! 아, 거, 거기. 하으.”
방금 사정한 것이 거짓말처럼 내 성기에 금세 피가 몰렸다. 다시 발기한 것을 본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성기를 빼냈다.
나를 안아 들고 자세를 바꾸도록 만들었다. 아까 혼자 뒤를 쑤실 때처럼 엎드린 자세로 만들고는 다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흐으, 흣… 채하야,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겠지?” 하는 나에게 채하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뒤에서 꽉 껴안은 채 한 손으로 내 아랫배를 만지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응, 거기이….”
“왜? 더, 만져 줘?”
“아니, 만지지, 흐읏, 말라고.”
피치가 지금 아빠들이 뭘 하는지 알 리 없지만 섹스 중에 배를 만지는 것은 싫었다. 채하는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배를 만져 대고 있었다. 점점 밑으로 내려간 채하의 손이 성기를 감싸 쥐었다.
“아! 거기, 흐으… 응!”
“여기는 더 만져 줘?”
그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퍼액과 정액으로 더럽혀진 내 성기를 선단에서 뿌리 쪽으로 감싸 쥐고 천천히 흔들었다. 앞과 뒤를 동시에 자극받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쾌감이 느껴졌다.
“읏, 으응, 아, 손 놔줘.”
성기를 잡고 손을 움직이던 채하는 사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갑자기 귀두 끝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나는 저번에도 채하에게 사정을 저지당하고 울었던 것이 기억났다. 이번에도 울 것 같았다.
“‘자기야, 싸게 해 주세요’라고 해 봐.”
채하가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내 귀를 의심했다.
“흐읏, 시러어.”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채하가 원하던 말이 아니었다. 채하는 귀두 끝을 막은 손에 힘을 주고 피스톤 질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한계에 다다랐다.
“하읏! 아, 자, 자기야, 읏! 싸, 싸게 해 주, 으응, 세요.”
울먹임과 신음이 섞인 말에 그는 그제야 성기를 잡고 있던 손을 놔주었다. 나는 눈물과 정액을 동시에 쏟아 냈다. 채하도 사정감을 느꼈는지 더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신음을 뱉으며 움직임을 멈췄다.
채하는 사정 후 내 몸에서 성기를 빼내고 실리콘 링과 정액이 찬 콘돔을 벗겨 냈다. 나는 그의 페로몬과 사정 후의 피로에 절어 있었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찝찝함에 그럴 수 없을 듯했다.
“채하야. 나 씻겨 줘.”
“‘자기야, 씻겨 주세요’ 하면.”
여전히 호칭 바꾸기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채하의 가슴을 찰싹 소리가 나게 한 번 때린 후 기어가는 목소리로 “자기야, 씻겨 주세요.”라고 말했다.
채하는 곧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욕조에 물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얕게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나를 안고 다시 욕실로 들어가는 그의 움직임에 눈을 떴다.
커다란 욕조 안에는 물과 함께 입욕제가 풀어져 있었다. 우리는 욕조에 함께 들어갔다. 나를 뒤에서 껴안은 채하의 가슴에 기대어 앉았다. 그 뒤의 기억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잠들어 버린 내 몸을 씻겨 주던 채하의 손길,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가운을 입혀 주던 것, 내 머리를 말리는 드라이기의 따뜻한 바람.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채하가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내가 잃어버렸던 3개월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 첫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내고 자연스럽게 사이가 발전한 우리, 활짝 핀 벚나무 아래에서 입을 맞추던 우리, 손을 잡고 가로등이 켜진 산책로를 걷던 우리, 두 줄이 나온 임신 테스트기를 보고 혼자 병원에 가서 피치가 생긴 것을 확인했던 나, 피치가 생긴 것을 알게 되자 눈물을 흘리던 채하.
내가 잊고 있던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몸을 돌려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채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잘 잤어…?”
내가 파고드는 바람에 잠에서 깬 채하는 여전히 잠이 가득 묻어 있는 목소리로 잘 잤냐고 물었다.
“나 돌아왔어.”
채하의 물음에 대답 대신 돌아왔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참으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한,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채하의 등을 토닥였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