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

02

한번 설마 하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아야 했다. 일단 제일 먼저 조사해야 할 대상은 내 핸드폰이었다. 잘 때만 빼고 거의 항시 손에 들고 있었던 핸드폰을 털어 보면 작은 단서라도 나올 것이 분명했다.

제일 첫 번째로 살핀 것은 메신저 앱이었다. 채하와 나눈 대화를 3월 내역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3월의 대화 내용은 평범했다. 이전과 비슷하게 함께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잡다한 집안일을 의논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4월의 어느 날부터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대화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채하가 보낸 메시지는 ‘구랭’, ‘아라쪙’, ‘이따 봥’처럼 말끝마다 이응이 붙어 귀여운 척을 한껏 해 댔다. 또한 이모티콘이 굉장히 많았다. 채하가 귀여운 이모티콘을 자주 쓰는 편이기는 했지만 사용 빈도가 엄청나게 늘어난 채였다.

평소 같았으면 토 나온다며 집어치우라고 짜증을 냈을 나도 그 애교를 전부 받아 주고 있었다. 대화 목록을 밑으로 내려 보았지만 우리의 대화는 계속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화 내용도, 채하의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애교도, 그걸 받아 주는 나도.

메시지를 다 훑어본 다음은 사진이었다. 나는 한 달 단위로 사진을 정리해서 클라우드에 업로드하고 핸드폰 앨범에서 사진을 삭제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재 핸드폰 앨범에 남은 사진 중 특별히 의심이 가거나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기에도 그 버릇은 바뀌지 않았는지 클라우드에 로그인하자 연도별, 월별로 정리된 사진들이 보였다. 가장 먼저 3월의 사진 폴더를 눌렀다. 날짜순으로 저장된 폴더에는 전부 내가 찍었겠지만 모르는 사진들뿐이었다. 나는 3월 초의 사진부터 하나씩 살폈다.

채하와 나, 그리고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채하의 옆에 앉아 술에 취해서인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는 내가 있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웃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옆으로 넘기자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다. 3월에 집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 이후의 사진들은 모두 평범했다. 길에서 찍은 고양이 사진, 별 의미 없이 찍은 것 같은 풍경 사진들.

그다음엔 4월 사진 폴더를 눌렀다. 3월보다 많은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사진이 내 시선을 잡아챘다.

누군가 벚나무 아래 선 채하와 내 모습을 찍어 준 사진이었다. 벚꽃 아래에서 찍은 첫 번째 사진의 나와 채하는 나란히,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우리의 거리는 사라지고 눈치를 보는 듯 어색했던 표정은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이 되었다. 채하가 행복한 표정으로 내 볼에 입을 맞추는 사진으로 끝이 났다.

“어… 씨발. 얘랑 뽀뽀를…? 미쳤나 봐. 어후….”

십년지기를 끌어안고 행복한 얼굴로 뽀뽀를 하는 사진 속 설채하와 십년지기에게 안겨 뽀뽀를 받으면서 실실 쪼개고 있는 사진 속 유지원을 보자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팔뚝에는 이미 소름도 돋은 것 같았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사진 속에서 일어났다. 사진이 찍힌 날은 첫 히트 사이클을 보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날로부터 약 열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는 이미 피치가 내 배 속에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의미다.

“피치, 진짜 너네 아빠가 설채하인 거야?”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합쳐 가설을 세웠다.

가설 1번, 모르는 알파와 원나잇으로 히트 사이클을 보낸 지 열흘 만에 설채하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서 설채하가 나와 피치를 책임진다고 한 것이다.

가설 2번, 설채하와 히트 사이클을 보낸 후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서 설채하가 자신이 피치 아빠라고 주장한 것이다.

둘 다 별로였지만 누가 봐도 두 번째 가설이 더 그럴싸했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기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내가 세운 가설을 부정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증거라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앨범 속에는 두 번째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만 가득했다.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채하가 가득한 핸드폰 화면을 꺼 버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십년지기인 설채하와 연애를 하고 심지어 애까지 만든 것 같았다. 지금의 나에게 채하는 그냥 친구로 느껴질 뿐인데. 가슴이 답답했다.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 한가운데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는데 채하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원아, 자?”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요즘 들어 잠이 부쩍 늘어 버린 것을 잘 아는 채하는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똑바로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그러곤 바로 방을 나가는 대신 내 머리를 쓰다듬은 후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바로 기억 못 해도.”

괜찮다는 말을 남긴 채하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채하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나간 후에도 계속 눈을 감은 상태였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제 머리로는 설채하가 피치 아빠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무리였다.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도 모르게 채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채하에게 잠자리를 다시 내 방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집을 나간다고 했을 때처럼 울면서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채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각방을 쓰기로 한 다음 날 아침, 채하는 자신의 방이 아닌 내 방 침대 밑에 잠들어 있었다. 바닥에 이불을 펴고 잠든 그를 보자 불편함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들었다.

“채하야, 네 방 가서 자.”

나는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채하를 깨웠다. 주말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자고 있었다.

“으응, 나 혼자 자기 싫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채하가 웅얼거렸다. ‘싫어’보다 ‘시러어’에 가깝도록 발음하는 게 귀여웠다. 그와 동시에 내가 정말 머리를 다친 게 맞는구나 싶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채하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의 품에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더 자.”

채하가 내 몸 위로 덮어 준 이불 안에는 페로몬이 가득했다. 그의 페로몬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적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한쪽 팔을 내주고 남은 한쪽 손으로는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자 그 손길에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았다. 채하에게 손목을 잡힌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채하의 품 안에서 깊게 잠들어 현실과 꿈을 완벽하게 분간하기 힘들었다.

‘괜찮아.’

그래서일까, 내 귓가에 맴돌던 저 말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보다 먼저 일어나 내 얼굴을 응시하는 채하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눈을 떠도 태연한 채하와 달리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색하게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도망가 버렸다.

“미쳤나 봐. 진짜. 왜 거기서 잠들어.”

수도꼭지를 틀고 차가운 물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빨개진 얼굴은 쉽사리 원래 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았다. 배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배 위에 손을 얹고 있으면 금세 마음이 편해지고는 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화장실에서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채하는 벌써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새 준비한 것인지 프렌치토스트와 오렌지주스가 차려진 상태였다.

“얼른 와서 앉아.”

“응.”

컵을 들고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시큼하고 달콤한 오렌지주스가 입 안을 적시자 금세 식욕이 돌았다. 채하와 마주 보고 앉아서 밥을 먹기엔 방금까지 안긴 채 잠들어 있었다는 점이 나를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도망가기엔 배가 너무 고팠고 앞에 놓인 프렌치토스트가 너무 맛있어 보였다.

“천천히 먹어. 주스도 먹고.”

나는 몰려오는 어색함에 뚝딱거렸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는 채하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채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아니, 내가 도망가면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잘 먹었어.”

컵에 남은 오렌지주스를 다 마시고 식사를 마쳤다.

“맛있게 먹었어?”

“응. 고마워.”

고무장갑을 끼고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릇을 씻는 채하를 보자 어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탁에서 일어나 그의 뒤에 섰다. 물소리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기척이 들리지 않았는지 채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기억 속 모습처럼 채하의 허리에 팔을 감고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와 동시에 뺨 위로 흠칫하고 놀라는 그의 등 근육이 느껴졌다. 싱크대 안으로 떨어지는 그릇 소리와 함께 고무장갑을 벗어 던졌다. 채하는 나에게 허리가 잡힌 상태 그대로 몸을 돌려 나를 꽉 껴안았다.

채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안긴 나는 평소보다 더 강한 페로몬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에 발밑이 붕 떠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얇은 티셔츠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피부 사이로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설채하는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충동적으로 채하를 껴안았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집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슬리퍼를 대충 꿰어 신고 현관문을 열고 나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채하가 곧바로 따라 나와선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 대신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고 한 층 위로 올라가 계단 위에 앉았다. 그는 내가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했는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나는 비상계단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 위만 빼꼼 내밀고 밑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채하가 달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찾아다니는 그와 눈이 마주칠까 봐 재빠르게 창문 밑으로 몸을 낮췄다.

“아 씨, 내가 왜 그랬지.”

다시 계단에 앉은 나는 무릎에 이마를 쿵쿵 박으면서 자책해 댔다. 오늘 하루는 시작부터 잘못된 것 같았다. 아침에 채하의 품에서 잠들었던 것, 그다음은 충동적으로 허리를 껴안은 것. 심지어 채하에게 안겼을 때는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쪽팔려서 집에 어떻게 들어가지.”

갑자기 뛰쳐나오는 바람에 핸드폰도, 지갑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정확히 모르겠고 대충 15분에서 2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비상계단은 약간 서늘하게 느껴졌다. 집에 들어갈까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집에 들어가기엔 내 뻔뻔함이 조금 부족했다.

“아, 몰라. 일단 여기 말고 딴 데로 가자.”

몸을 일으키고 손으로 엉덩이를 털어 냈으나 돈도, 핸드폰도 없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마땅치 않았다. 결국 내가 향한 장소는 놀이터였다. 항상 어린아이들로 북적거리는 놀이터였으나 오늘따라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햇볕이 잘 드는 그네에 앉아 앞뒤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치야, 재미있지?”

26살이나 먹은 성인 남자가 자다 일어난 차림새로 혼잣말을 하면서 그네를 타는 것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나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계속 그네만 탔다. 그때, 누군가 내 옆 빈 그네에 앉았다. 옆에 앉은 사람은 얼마간 말이 없었다.

“지원아.”

채하가 나를 불렀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채하와 눈이 마주친다면 얼굴이 터져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자.”

내 앞에 선 채하는 손을 내밀었다. 그네에서 더 버티고 있어 봤자 무언가 해결되진 않을 것 같기에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보다 한 걸음 앞에서 걷는 채하의 넓은 등이 눈에 들어왔고, 집을 나온 이유가 다시금 떠올랐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바닥에 앉아 다리를 양손으로 감싸 안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채하는 물 한 잔을 떠 와 내 앞으로 밀었다.

“괜찮아.”

채하가 또 괜찮다고 했다. 쟤는 뭐가 괜찮은 걸까.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 내 경험상 계속 괜찮다고 하는 사람치고 정말 괜찮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채하도 괜찮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컵에 가득 담긴 물을 단숨에 마셔 버리고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크게 숨을 한 번 쉬고는 입을 열었다.

“나 이제 머리로는 네가 피치 아빠인 것도 알고 우리가 사귀는 사이였던 것도 알겠는데.”

“…….”

“아직 마음으로는 못 받아들이겠어.”

채하는 말이 없었다. 지금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10년 친구랑 그렇게 된 게… 쉽게 이해가 되는 상황은 아니잖아.”

“그럼. 당연하지.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계속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스트레스받지 마. 나한테는 네가 우선이야.”

채하는 애써 담담한 척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채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이후 가슴 한가운데를 무겁게 짓누르던 돌덩어리의 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그에게 세웠던 마음의 벽도 조금은 낮아진 듯했다.

채하가 잠시 집을 비우자 혼자 남은 나는 거실 오디오에 클래식 cd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조용하고 느린 음악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목도, 작곡가도 모르는 음악이었지만 눈을 감고 들으니 나도 모르게 잠이 쏟아졌다. 아까의 가출 소동 때문이었는지 마음의 짐을 덜어 낸 덕이었는지 절로 고개가 꾸벅꾸벅 움직였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소파에 편하게 누워 버렸다. 귓가에 들려오는 음악이 4번 정도 바뀌었을 무렵 완전히 잠들기까지 했다. 눈을 떴을 때는 얇은 이불이 몸을 덮고 있었다.

“채하야.”

방금 잠에서 깬 내 목소리는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어났어? 더 잘래?”

채하가 물 한 잔을 떠다 주면서 물었다.

“아니. 더 자면 이따 못 잘 것 같아.”

나는 채하가 건네준 물을 전부 마시고 대답했다. 빈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서 잠들어서인지 몸이 뻣뻣한 느낌에 기지개를 켜고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창밖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 많은 일들이 있어서였을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기분이었다.

나는 덮고 잤던 이불을 정리해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잠든 나를 보고 채하가 가져다 덮어 준 모양이었다. 이전까지는 크게 깨닫지 못했던 그의 배려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영화를 보자는 채하의 말에 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업데이트된 영화를 인기순으로 정렬해 놓고 하나씩 넘기다가 고른 것은 포스터 한가운데에 귀여운 강아지가 있는 작품이었다. 채하가 리모컨으로 결제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곧바로 영화가 재생되었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아기였던 강아지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성장하고 노화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끝이 났다. 채하의 눈에는 영화가 끝나기 20분쯤 전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티슈 한 장을 뽑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슬프면 그만 볼까?”

채하는 고개만 도리도리 저어 대답했다. 영화가 끝날 무렵 티슈 상자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말도 못 할 정도로 우는 채하를 보자 피치가 채하를 닮으면 큰일 나겠다 싶었다.

집에 울보가 2명이라니. 그와 동시에 내가 채하와 앞으로도 함께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영화가 끝났을 때 채하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잔뜩 부은 눈과 빨개진 코를 보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만 웃어.”

“거울 봐. 안 웃게 생겼나.”

“조만간 집에 코코 보러 갔다 와야지.”

코를 훌쩍거리며 본가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보러 갈 거라는 채하의 말에, 나도 조만간 부모님을 뵙고 모든 것을 말씀드려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근데 우리 부모님들한테는 언제 말하지?”

지금까지 부모님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싫어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베타인 줄 알았던 아들이 알고 보니 오메가였고, 제일 친한 친구와 아기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그와 별개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이 기절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배가 불러 오기 전에 말하는 것이 그나마 덜 놀라게 할 방법 같았다.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전화로 할 이야기가 아니다 보니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할 텐데 일단 지금 상태로는 장거리 이동은 무리였다. 우리는 병원에서 안정기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양쪽 부모님께 비밀로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씻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각방 선언 하루 만에 다시 채하의 방으로 돌아왔다. 사실 어젯밤도 따지고 보면 각방은 아니었다. 같은 침대에서 잠들지 않았을 뿐 같은 방에서 잤으니까.

형광등을 끄고 수면 등을 평소보다 높은 조도로 조정한 채하는 아까 혼자 외출했을 때 사 온 동화책을 꺼내 들었다. 나는 배 위에 손을 얹고 채하가 읽어 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채하가 골라 온 책은 하늘에 뜬 별을 사랑하는 너구리의 이야기였다.

“…너구리는 매일 밤 같은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바라보았어요. 끝.”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피치에게 말을 걸었다.

“피치야, 재미있었어? 짝사랑이 이렇게 힘든 거야.”

“지원아, 나 배 한 번만 만져 봐도 돼?”

피치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바라보던 채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싫으면 안 할게.”

“아, 아니야. 만져도 돼.”

내 말에 환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배 위로 손을 올렸다. 얇은 잠옷 위로 그의 손이 느껴졌다. 채하는 배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피치야, 아빠야.”

배 위에 손을 얹고 자신이 아빠라고 하는 채하를 보자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었다.

“너 설마 <홍길동전> 일부러 사 온 거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딱 어제까지의 채하와 피치 이야기였다.

“잘 자. 지원아.”

채하는 대답 대신 수면 등의 조도를 낮게 조정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

오늘은 평일이었지만 채하는 회사에 가지 않았다. 오전에 예약되어 있는 병원 진료에 함께 가기 위해서였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창업한 게임 회사에 다니는 채하는 평소 편한 차림으로 출근하는 편이었으나, 회사 대신 병원에 갈 예정인 그는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머리까지 손질한 상태였다. 누가 봐도 평소보다 차림새에 신경을 쓴 티가 났다.

“오늘 신경 좀 썼다?”

“응. 오늘 피치 만나러 가는 거니까.”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며 채하가 머리를 매만졌다. 커다란 덩치로 몸을 배배 꼬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채하가 귀엽다는 생각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준비 다 했어?”

“응, 가자.”

채하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 머리 위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쬈다.

“아, 햇빛.”

눈을 찌푸리는데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옆에 서서 걷던 채하가 팔을 뻗어 내 얼굴로 내리쬐는 햇볕을 손등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그는 나와 친구로 지낸 10년 동안 이런 배려가 몸에 밴 사람처럼 행동했다. 나는 일부러 의식하기 전까지 눈치도 못 챌 정도로 이 다정함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차 옆에 선 채하는 문을 열어 주고 차에 탈 때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기까지 했다. 보통의 친구 사이에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해 주는 채하도, 받는 나도 너무나도 익숙했다.

“이제 출발할게.”

“응.”

보조석의 차 문을 닫은 후 운전석에 탄 채하가 내가 벨트를 맨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병원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은 한산했다. 2주 전 병원 진료 후 첫 외출이었다. 물론 어제 집을 나가긴 했었지만 그건 외출로 치지 않기로 했다.

“채하야, 너 오늘 또 울 거야?”

지난 진료 때 피치의 심장 소리를 듣고 울던 채하가 생각나 물었다. 그때에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채하가 피치 아빠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지금은 눈물을 흘리던 것이 납득되었다.

“아니, 안 울 건데? 넌 내가 맨날 우는 줄 알아?”

“응. 너 맨날 울잖아.”

내 말은 정확한 사실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잘 우는 편이던 채하는 내가 기억을 잃어버린 이후로 더 자주 울게 되었다. 정곡을 찌르는 나의 말에 채하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병원에 도착했다.

내 기억 속에서는 2번째 방문인 오메가 전문 병원은 여전히 낯설었다. 지난번처럼 카운터에서 접수를 하고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진료가 밀려 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 직원의 말에 채하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형아.”

대기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나에게 세 살이나 네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다가왔다.

“이거 먹어.”

아이가 내민 손안에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사탕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이거 형 주는 거야?”

“응. 먹어.”

내가 사탕을 받아 드는 순간 화장실에서 돌아온 채하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간식거리가 있냐고 속삭였다. 채하는 가방을 뒤적거려 젤리 한 봉지를 꺼냈다. 나는 젤리를 받아 아이에게 건넸다.

“고마워. 이건 형이 주는 선물이야.”

아이는 젤리를 손에 들고 반대편 의자에 앉은 부모에게 뛰어가 품에 안겼다.

“형? 혀엉? 저 아기한테 형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지 않나?”

“아기가 먼저 나한테 형이라고 했거든?”

“그래도 형이 아니라 삼촌이지.”

나는 채하의 팔뚝을 꼬집었다. 우리가 서너 살 먹은 어린애한테 형이라는 호칭을 들어도 되는가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진료실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채하에게 말했다.

“오늘은 울지 마. 알겠지?”

“안 울어!”

채하는 울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오늘 있을 검사를 위해 채혈을 하는 동안 팔뚝에 주삿바늘이 꽂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오히려 채하가 더 난리였다.

“안 아파? 아프면 내 손 잡을래? 세게 잡아도 돼.”

“제발 입 좀….”

채혈하는 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떨 수 있는 주접이란 주접은 전부 떨어 댔다. 심지어 겨우 주사기 하나만큼 피를 뽑은 나에게 어지럽지는 않냐고 물어보는 통에 의사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바늘을 빼내고 알코올 솜으로 바늘이 들어갔던 부위를 눌러 주던 의사 선생님이 오늘은 입체 초음파 검사도 진행한다고 했다. 지난번처럼 시키는 대로 상의를 걷고 검사실에 누웠다.

12주가 된 피치는 팔다리도 있고 사람의 모습에 가까웠다. 많은 일들을 겪고도 잘 커 주고 있는 피치를 보자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채하의 마음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대견스러웠는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이번에는 소리 없이 눈물만 고여서 다행이었다.

“자, 그럼 이제 심장 소리 한번 들어 볼까요?”

다행이라는 것이 섣부른 생각이었음은 금세 깨닫게 되었다.

“오늘은 안 운다며.”

“끄흡, 저걸 듣고, 흐읍, 어떻게 안 울어.”

진료실에 피치의 심장 소리와 의사 선생님의 어색한 웃음소리와 내 한숨 소리, 채하의 울음소리가 섞여 울려 퍼졌다.

“아빠 중에 우시는 분들 꽤 있어요.”

의사 선생님은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는 안 괜찮았다. 짧은 시간 병원을 옮길까도 고민했으나, 병원을 옮겨도 설채하가 따라다니면서 울 것이 뻔했다.

진료실을 나온 채하는 빨개진 눈으로 수납을 마치고 초음파 영상까지 야무지게 받아 왔다. 나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안심하고 외출을 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외출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한 달 가까이 집에만 있었더니 죽을 맛이었다.

“우리 쇼핑하고 밥 먹고 집에 들어가자.”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너는?”

“나는 지원이 너 먹고 싶은 거면 다 좋아.”

채하가 저런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그럼 백화점 가서 쇼핑하고 정하자.”

우리는 병원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스포츠 의류를 파는 매장이었다. 나는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맞춰 반소매 티셔츠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름옷은 매년 사들여도 다음 해 여름에 옷장을 열어 보면 입을 옷이 하나도 없어서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원아, 이거 봐 봐.”

나와 조금 떨어져서 구경하던 채하가 옷걸이에 걸린 옷 한 벌을 꺼내 내 앞으로 가져왔다. 어린이용 트레이닝복이었다.

“귀엽네.”

“그치? 이거 살까?”

영혼 없이 말하는 나와는 달리 채하의 목소리는 신이 나 있었다.

“네가 입게?”

“아니. 우리 피치 꺼.”

내 말에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대답했다.

지금 사도 최소 3, 4년은 옷장에 묵혀 두어야 할 옷이었다. 채하에게 원래 있던 곳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 사고 싶으면 사.”

“정말?”

“응. 지금 사서 잘 가지고 있다가 3년 후에 피치 처음 만나면 그거 선물로 주면 되겠다. 아빠와 아이의 첫 만남 선물로 딱 좋을 것 같아.”

채하는 내 말에 놀랐는지 얼른 달려가서 옷을 제자리에 걸어 두고 왔다.

“지원아아….”

그 이후로는 조용히 내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풀이 죽은 채하를 보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말리지 않으면 무엇을 사들일지 몰라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티셔츠 한 벌을 사고 우리는 백화점 식당가에 있는 파스타 집으로 들어갔다.

“음, 알리오 올리오 먹을까, 까르보나라 먹을까.”

“둘 다 시켜. 남는 건 내가 먹을게.”

토마토 소스 외에는 잘 먹지 않는 채하가 일부러 나를 위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파스타를 먹겠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그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이 맞는구나 싶었다.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파스타가 담긴 접시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채하는 앞접시에 음식을 나눠 담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지원아, 맛있게 먹어.”

“너도 맛있게 먹어.”

나는 포크와 숟가락을 들고 채하에게도 얼른 먹으라고 했다.

“응. 먹을게.”

대답만 하고 계속해서 나에게 필요한 게 없나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채하의 모습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말로만 하지 말고 얼른.”

식기를 다시 들 생각이 없다는 듯한 단호한 태도에 채하는 포크에 파스타를 돌돌 말았다. 나는 채하의 입으로 면발이 들어가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던 채하의 시선이 어느 순간부터 다른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채하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기 의자에 앉아 엄마와 함께 밥을 먹는 아이가 보였다.

“왜?”

“어? 귀여워서.”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순간 귀엽게 느껴졌다.

“네가 더 귀여워.”

“응?”

미쳤나 보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내가 귀여워?”

채하가 나를 바라보며 되물어 왔다.

“빨리 밥이나 먹어.”

나는 파스타만 빤히 보며 식사를 마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채하는 피치의 팔다리를 봤으니까 기념 선물을 사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다. 피치 물건을 사고 싶어서 별 핑계를 다 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까 전의 일로 잔뜩 풀이 죽은 그를 위해 기꺼이 그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채하와 함께 아기 용품 매장으로 들어간 순간 가장 먼저 손 싸개가 눈에 들어왔다. 내 한 손 위에 두 개가 전부 올라가는 앙증맞은 크기를 보는 순간 꼭 사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손 싸개에 정신이 팔렸을 때, 채하는 진열대 위에 올려져 있던 인형을 들어 자기 얼굴 옆에 갖다 대고는 씩 웃었다.

“귀엽지?”

“응, 귀엽네. 인형이.”

“나는?”

나는 몸을 돌려 배냇저고리가 놓인 곳으로 가 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번에도 무심코 귀엽다고 할 뻔했다. 우리는 손 싸개와 양말 한 세트를 사서 매장을 나왔다. 매장에 있는 모든 종류의 아기 용품을 살 기세였던 채하를 겨우 말려 얻은 결과였다.

“피곤하지?”

“아니, 괜찮아.”

괜찮다고 말했지만 몸은 피곤했는지 집으로 가는 동안 잠들어 버렸다. 채하가 조심스럽게 벨트를 풀고 깨웠을 때는 어느새 집 앞이었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거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채하의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아기 수첩을 꺼냈다. 수첩을 펼치고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던 펜을 들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아기의 태명을 쓰는 부분에 ‘피치’ 두 글자를 적어 넣었다. 그다음은 보호자 정보였다. 보호자 이름에 ‘설채하’ 세 글자를 썼다. 피치의 이름을 쓸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채하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해 왔다.

“그래. 기대할게. 피치 아빠.”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채하는 자신만 믿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그와 함께할 날들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집에만 갇혀 있던 것을 보상받으려는 사람처럼 매일 밖을 돌아다녔다. 오늘도 출근하는 채하와 함께 집을 나와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표를 발권하고 음료 한 잔을 주문해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채하가 예매해 준 영화는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생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를 그린 하이틴 로맨스 영화는 완벽하게 그의 취향이었다.

채하 : 영화 재밌게 봤어?

오전 11:32

영화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채하가 메시지를 보냈다.

응 재밌더라

오전 11:33

나는 채하에게 거짓말을 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처음 영화가 시작될 때만 해도 친구였던 주인공들이 입을 맞추며 영화가 끝나 버렸다. 답장을 보내자마자 채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 지원아, 희주가 같이 점심 먹자는데….

말끝을 흐리던 채하는 조심스럽게 “괜찮아?” 하고 덧붙였다.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이나 보자는 생각에 회사 앞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영화관 건물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의 사무실 근처였다.

저 멀리 건물 입구에 친구들과 함께 서 있는 채하가 보였다.

“유지원!”

나를 발견한 친구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그러게. 저번에 벚꽃 필 때 보고 처음 보네.”

내 기억 속에서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올해 초 신년회 때였다. 나는 “어, 그러게.” 하면서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희주가 예약해 뒀다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당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채하는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난 너네가 학교 다닐 때부터 그냥 친구라고 했던 거 안 믿었어.”

식당에서도 딱 붙어 앉은 우리를 보고 희주가 말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나와 채하가 그냥 친구라면 자신들은 친구가 없는 거라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앞에 앉은 세 명의 친구는 나와 같은 과 동기들이었고, 대학교 때부터 함께 살던 채하와도 자연스럽게 친해져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 왔다.

“야! 우리가 왜? 우리 친구 맞거든?”

“유지원 씨는 친구랑 뽀뽀도 하시고 애도 만드시나 보네요?”

선준이는 존댓말까지 쓰면서 비꼬아 댔다. 친구들도 지금 이 상황을 전부 아는 모양이었다. 일단 나는 뻔뻔하게 모른 척하기로 했다.

“내가 언제?”

“아, 기억 못 한다고 했지? 벚꽃 보러 가서 우리 다 토할 뻔했잖아.”

최희주와 이선준, 김윤호는 학교 다닐 때부터 나와 채하를 엮어서 놀려 먹는 데 진심인 인간들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그때의 상황을 재현하려는 듯 김윤호가 최희주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해 대고 있었다.

“설채하는 좋아 죽는다는 얼굴이고, 유지원 부끄러운 척 내숭 떨고. 완전 우웩.”

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천천히 한 번씩 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채하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은 물론이고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야, 네가 이러니까 저것들이 더 놀리잖아.”

채하에게 얼굴을 바싹 붙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우리끼리 귓속말을 주고받는 것도 친구들에게는 좋은 놀림거리가 되었다.

“야, 지원아, 좀 떨어져라. 채하 얼굴 터지겠다.”

김윤호가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그와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왔다. 카트에 올려져 있는 음식을 보고 일단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면 저 셋도 조용해질 것 같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테이블 위로 접시가 빼곡하게 채워지고 직원은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우리 조카, 맛있게 먹어. 삼촌이 사 주는 거야.”

희주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 피치가 맛있게 먹겠대.”

나는 대충 대답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피치?”

“응. 아기 태명.”

“누가 지었어? 피치가 뭐냐. 완전 유치해.”

“지원이 어머니가 복숭아 태몽 꿨다고 해서 피치라고 지은 건데.”

“어, 직관적이고 좋네. 귀여워.”

방금까지 유치하다고 하던 김윤호는 채하의 발언에 자신의 말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수습하기엔 늦었다. 나는 발을 뻗어 테이블 밑으로 윤호를 한 번 걷어차고 밥을 한 숟가락 떴다.

“지원아, 맛있게 먹어.”

채하가 내가 들고 있는 숟가락 위로 생선 살을 발라 올려 주었다.

“응. 너도.”

“채하야, 우리는?”

채하를 바라보던 수다쟁이 셋이 그 앞에 숟가락을 들이밀고 입을 모아 외쳤다.

“니들은 그냥 처먹어.”

내가 채하 대신 대답했다. 열심히 먹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내 숟가락이 빌 때마다 반찬을 올려 주느라 거의 먹지 못하고 있었다.

“채하야, 얼른 먹어.”

내 앞에 놓인 밥그릇은 거의 바닥을 보였지만 채하의 밥그릇은 그대로였다. 얼른 먹으라는 내 말에도 여전히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만 신경 썼다. 지켜보던 세 명은 친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면서, 친구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자기들끼리 반찬을 올려 주느라 바빴다. 채하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주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 벨이 울리자 채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픽업 데스크에서 받아 온 트레이 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섯 잔과 쇼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마카롱이 종류별로 올려져 있었다.

“근데 지원이 너 커피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내 앞에 놓인 커피잔을 보고 선준이가 물었다.

“하루에 한 잔 정도는 괜찮대. 그리고 커피보다 스트레스가 더 나쁘니까 그런 거 물어보지 마.”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채하가 빠르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맞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의 반응에 선준이는 “어… 어, 미안. 많이 먹어.” 하고 사과를 했다.

빨대를 물고 컵 안에 담긴 커피를 마시자 입 안 가득 씁쓸하고 고소한 맛이 퍼졌다. 분홍색 마카롱 하나를 들고 포장을 벗겨 한입 베어 물었을 땐 단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으, 너무 달아.”

남은 마카롱 조각을 들고 “아-.” 하자 채하가 입을 벌렸다. 그의 입 안에 남은 마카롱을 넣어 주었다.

“으엑, 유지원이 설채하 마카롱 먹여 줬어.”

“쟤네 학교 다닐 때부터 저랬는데 그냥 친구래.”

“저런 게 친구면 난 친구 없어.”

밥을 먹을 때도 멈추지 않았던 입들은 커피를 마실 때도 어김없었다. 자기들끼리 열심히 떠들어 대던 수다쟁이들의 관심사가 나와 채하에서 피치로 옮겨 갔다.

“이제 몇 주 된 거야?”

“내일이면 13주 돼.”

“딸이래, 아들이래?”

“아직 몰라.”

채하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모든 질문을 예상한 사람 같았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마카롱을 하나씩 집어 먹었다. 트레이 위에 있던 5개의 마카롱 중 4개 반이 차가운 아메리카노와 함께 채하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마카롱 때문인지 피치 이야기 때문인지 채하의 얼굴은 행복에 가득 젖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내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았다.

카페를 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동안 손은 안 잡냐며 깐족거리는 삼인조 때문에 보란 듯이 채하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은 당연하게도 우리를 또 놀려 대기 시작했다.

“워후, 쟤네 친구라면서 손잡고 걷는다!”

“야야, 우리도 손잡아!”

“잡아, 잡아!”

겨우 손 좀 잡았다고 꺅꺅거리면서 놀리는 모습은 26살이 아니라 26개월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채하가 친구들의 눈앞에 맞잡은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승자의 미소를 읽었다. 이번 판은 채하의 승리였다.

친구들은 사무실로 돌아가고 채하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남았다. 우리는 단둘이 남았을 때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차에 탈 때까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쟤네 셋, 회사에서도 저래?”

집으로 가는 길에 채하에게 물었다. 회사에서는 저렇게 심하지 않다고 했다.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유독 심하게 놀리는 것 같다고. 들으면 들을수록 26살이 아니라 26개월 같았다. 그래도 내가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고 불쌍하게 보는 것보단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친구라고 했던 우리가 아기까지 만들었다는 것을 충분히 놀려 먹을 만했다. 나도 친구들이 그랬다면 그에 뒤지지 않게 열심히 놀렸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는 벌써 아파트 단지 입구를 지났다. 채하는 나와 떨어지기 싫은지 집까지 함께 올라갔다. 심지어 손까지 잡은 채로.

“나 갈게.”

“응. 잘 갔다 와.”

“나 그냥 가지 말까?”

현관 앞에 서 있는 채하의 눈에는 미련이 남다 못해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그의 머리 위로 축 처진 강아지 귀가 보이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피치가 돈 많이 벌어 오래. 아빠 안녕.”

나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 채하의 등을 밀어 현관문 밖으로 내보냈다.

채하 : 아빠가 돈 많이 벌어 오겠다고 전해 줘ㅠ

오후 01:11

채하 : 그리고 지원이 너도 푹 쉬어

오후 01:12

현관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채하에게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를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요즘 채하를 보면 나도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고 웃음이 나왔다.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같았다. 나와 채하는 사귀는 사이였다고 하니 그를 좋아하기는 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설채하를 좋아하나?’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설채하를 좋아한다고.

이제 채하에 대한 내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한 달간의 고민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이전까지는 내가 어쩌다 그와 이런 사이가 된 것인지 기억을 찾으려고 조바심을 냈지만 더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나도 여전히 채하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근데 피치야, 너 생긴 날은 궁금하긴 해.”

나는 킥킥거리면서 배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친구였던 우리가 아기까지 만들게 된 것일까. 채하에게 물어보기엔 조금 부끄러운 궁금증이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배 위에 손을 얹고 있자 아랫배가 조금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밥을 먹은 직후여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그 배가 아닌 것 같았다. 티셔츠를 걷고 거울에 비춰 보니 정말 아랫배에 살이 붙어 살짝 볼록했다. 지금까지 병원에서 초음파로 확인할 때 빼고는 피치가 있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새삼 와닿았다.

“지원아….”

오늘 채하의 퇴근은 평소보다 더 이른 편이었다.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채하의 뒤에는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 세 명도 함께 서 있었다.

“피치, 안녕. 점심때도 보고 저녁때도 보니까 반갑다.”

“삼촌들 왔다.”

“맛있는 것도 사 왔어.”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건만, 불청객 셋은 현관에 선 우리를 지나쳐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쟤네 뭐야?”

“나도 몰라. 오늘 일찍 퇴근하자고 하더니 집 앞에 도착하니까 쟤네가 따라와 있었어.”

“야, 빨리 와. 음식 식는다.”

집주인들은 아직 현관에 서 있는데 불청객들은 거실 테이블 위로 양손 가득 사 온 음식들을 풀어 놓고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네 왜 왔냐?”

“우리 조카, 삼촌들이 저녁도 맛있는 거 먹여 주려고 왔지.”

빈말은 아니었는지 테이블 위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식기 전에 먹으라는 윤호의 말에 일단 젓가락을 뜯어 탕수육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채하는 부엌에서 컵과 앞접시를 챙겨 와 내 옆에 앉았다.

“맛은 있네. 잘 먹을게.”

“그래. 많이 먹어. 입덧은 없어?”

“응, 우리 피치가 효자라서.”

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는 모르지만. 탕수육을 먹으면서 말하자 내 앞에 앉은 세 명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긴, 그러니까 채하가 대신 입덧하지.”

채하가 입덧을 한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그동안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밥도 잘 안 먹고 음식 냄새를 맡고 화장실로 뛰어갔던 것,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음식을 찾던 것이 다 입덧의 여파였던 것이다.

“채하야, 너 입덧해? 왜 말 안 했어?”

“너 걱정하게 뭐 하러 그런 말을 해.”

채하의 배려에 가슴이 찡해지는 나와는 다르게 불청객 셋은 야유를 쏟아 냈다. 빨리 저것들을 집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네 집에 안 가?”

“응, 안 가.”

“집에 가도 게임밖에 할 게 없는데 왜 가.”

“그러니까 너네가 애인도 없이 맨날 셋이서만 노는 거야. 특히 김윤호, 이선준.”

정곡을 찌르는 뾰족한 내 말에 친구들이 가슴을 부여잡고 우는 척을 했다. 희주는 애인을 자주 갈아 치우기는 했지만 꾸준히 연애를 했다. 그러나 김윤호와 이선준은 연애한다는 말을 들어 본 것이 이제는 까마득한 대학교 다닐 때가 마지막이었다.

우리의 대학교 시절, 대부분 한숨이 나오게 생긴 컴공과 남학우들 중 저 세 명이 제일 봐줄 만하게 생겼었다. 물론 나는 공대 전체를 통틀어서 잘생긴 것으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세 명의 관심사는 오로지 게임뿐이었다. 나도 새내기 시절 저 셋과 어울려 피시방에 살다시피 할 때가 있었다. 1학년 1학기, 우리는 학교 대신 피시방에 있었고 책 대신 키보드와 마우스를 손에 들었다. 그때 우리 넷의 학점을 합치면 4.5가 채 되지 않았었다.

물론 내 출석에 신경 쓰던 채하 덕분에 결석은 거의 하지 않던 내 학점이 2.5였고 나머지가 저 셋의 학점이었다. 성적표를 받고 정신을 차린 나와 달리 친구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으며, F 학점을 메꾸느라 학교를 5년이나 다녔었다.

“유지원 나쁜 놈. 말하는 꼬라지 봐.”

“피치야, 너는 너네 아빠 말본새 닮으면 큰일 난다.”

친구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남의 자식 말버릇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

“야, 너네 빨리 먹고 집에 가.”

“빨리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 천천히 먹어야지.”

“그래. 천천히 먹고 여기서 자고 내일 채하랑 같이 출근하면 되겠다.”

윤호는 한술 더 떠 내가 쓰던 방에서 자면 되겠다고 했다. 나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대꾸했다.

“근데 너네 결혼식은 언제 해? 내가 사회 볼래.”

“난 축가 부를래.”

“그럼 난 춤 출래.”

최희주, 이선준, 김윤호가 차례대로 말했다. 저 말을 듣기 전까진 결혼식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갑자기 기억을 잃어버리고 채하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데 정신이 팔려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었다. 결혼 이야기를 듣자 일단 혼인 신고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 집에 이야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직 집에 얘기도 못 했어.”

“아직도? 언제 말씀드리려고?”

“음…. 배 불러 오기 전에?”

“지원아,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괜찮아.”

채하는 항상 내일이라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아직 용기도 부족했고 혹시라도 마음 약한 우리 아빠가 기절할까 봐 무섭기도 했다.

“그래, 채하네는 형님 때문에 부모님이 예방 접종 하셔서 별로 안 놀라실 것 같은데.”

“맞아. 우리 형 때문에 별로 안 놀라실 거야.”

“하긴… 채민이 형에 비하면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6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오고 머지않은 여름 방학을 기다리고 있을 때, 대입 재수생이었던 채하의 형 설채민은 아이돌 가수를 하겠다며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서울로 가출했다. 몰래 재수 학원비를 환불받고 채하 아버지가 채민 형의 재수 학원 비용으로 쓰려고 만들어 뒀던 통장을 훔쳐서. 심지어 채하가 3년 동안 모은 돼지 저금통까지 들고 갔었다.

그다음 해 무척 더웠던 어느 여름날, 채민 형은 잔뜩 부른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돌을 하겠다고 집을 나가서 아이를 만들어 온 것이었다. 아이 아빠는 소속사 대표라고 했다.

아이 아빠이자 소속사 대표라는 사람은 가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채민이 형의 마음을 돌리려고 지극정성이었다. 매일 찾아오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심지어 옆집으로 이사까지 와 버렸었다. 한 층에 세 가구가 마주 보는 구조의 아파트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그 모습을 매일같이 보곤 했었다.

“그래. 그러니까 내일 집에 말하러 갈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니까. 그리고 내일 평일인데 어떻게 집에 가.”

“아, 그러네. 나 내일 출근 안 할래.”

“안 돼. 이번 주 바빠.”

희주의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 처음으로 최희주가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미소를 짓는 나와 달리 채하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그는 사표를 써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사표? 안 돼. 우리 피치 대학까지 보내려면 돈 열심히 벌어야지.”

내 말에 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도 열심히 출근하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자기들이 사 온 음식을 전부 먹고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자고 가겠다며 거실 한가운데에 누워 버린 것들을, 현관문을 열고 등을 떠밀어 겨우 쫓아냈다. 불청객들이 사라진 후에야 우리는 씻고 침대에 누웠다.

“아, 맞다. 나 이제 배가 좀 나온 것 같아. 오늘 만져 봤어.”

채하의 손을 잡아끌어 내 배 위에 올려놓았다. 얇은 잠옷을 사이에 두고 따뜻한 그의 손이 느껴졌다.

“음, 잘 모르겠는데.”

한참을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던 채하는 잘 모르겠다며 ‘옷 위라서 그런가’ 하고 혼잣말을 했다. 채하의 손이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느리게 내 옷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맨살에 닿는 손길을 느끼곤 흠칫하고 놀랐다.

“우리 피치, 놀랐어?”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채하는 “아빠가 미안.”이라고 하면서도 손을 빼지 않았다. 피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 같았다.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화끈거렸다. 천천히 배를 쓰다듬는 손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채하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지 장난스럽게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러곤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채하의 손은 어느새 밖으로 나와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입술과 입술이 짧게 부딪히고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채하의 입에 다시 한번 짧게 입을 맞췄다. 너무나 충동적인 행동이었기에 몸을 돌리고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빠르게 뛰고 있는 내 심장 소리가 채하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채하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아 왔다. 이윽고 내 귓가에 “잘 자.” 하고 속삭였다. 그의 숨결과 페로몬이 함께 느껴지자 심장이 더 빠르게 뛰어 댔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오늘 밤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

잠들기 전 짧게 입 맞춘 그날 밤 이후, 우리는 자주 입을 맞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키스가 아니라 어린애들 장난 같은 입맞춤이었다.

“잘 갔다 와.”

“응. 여기 쪽 해 줘.”

채하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손끝으로 톡톡 쳤다. 나는 그런 채하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짧게 입을 맞추고 손을 흔들었다.

“나 갔다 올게. 피치도 잘 있어.”

허리를 숙여 피치에게 인사한 그가 내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현관에 서서 출근하는 채하를 배웅하자니 부부가 된 것 같았다. 이전에도 출근하는 채하에게 종종 손을 흔들어 주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가 나가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불 안에는 아직 채하의 페로몬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피치가 생긴 이후 잠이 늘어 늦게까지 자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채하의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그의 출근 시간에 일어나 채하를 배웅하고 잠드는 것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깜빡 잠들었던 나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잘 움직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서 확인하니 전화를 건 사람은 엄마였다.

“…여보세요.”

- 뭐야. 아직도 자?

“어. 나 어제 좀 늦게 잤어.”

잠이 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단 그냥 늦게 잤다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했다.

- 이번 주 토요일 너희 아빠 생일인 거 알지?

“어어, 알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일단 거짓말을 했다.

- 언제 내려올 거야?

“나 요즘 좀 바빠서 못 갈 것 같은데.”

- 니가 회사를 다녀, 학교를 다녀. 바쁘긴 뭐가 바빠! 너네 아빠 삐치면 오래가는 거 알지?

“그럼 내일이 금요일이니까 내일 갈게.”

엄마와 말싸움을 하면 항상 내 손해로 끝났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 그래, 선물 같은 거 사 오지 말고 돈으로 줘라.

엄마는 저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직 부모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집에 가는 건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티가 날 정도로 배가 나온 것은 아니니까 조심하면 비밀로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핸드폰으로 내일 아침에 출발해서 일요일 점심 무렵에 돌아오는 KTX 표를 예매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2박 3일간 집에 다녀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작은 캐리어를 꺼내 옷과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챙겨 넣었다. 가볍게 짐을 꾸리고 나자 벌써 12시였다.

짐 가방을 보고 채하에게 연락해 내일 집에 다녀온다고 말할까 고민했지만 그가 나를 따라가겠다고 징징거릴 것이 눈에 훤했다. 나는 지금 내일 아침 그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요즘의 나는 알람 대신 채하가 출근 준비를 하면서 내는 소리에 눈을 뜨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젯밤 미리 맞춰 두고 잔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침대 옆자리가 빈 걸로 보아서 채하는 이미 씻은 듯했다. 나도 채하와 함께 집을 나서기 위해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씻고 거실로 나오자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채하가 물었다.

“내일 아빠 생일이라고 해서 집에 갔다 오려고.”

“뭐? 왜 미리 말 안 했어? 나도 갈래. 같이 가.”

“너 따라온다고 할까 봐. 어차피 이번 주 바쁘다며.”

내 말에 채하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최대한 빨리 퇴근할 테니 자기와 함께 집에 가자고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됐어. 금요일이라 저녁때 차 엄청 막힐걸. 나 그냥 기차 타고 혼자 갔다 올게.”

“그럼 언제 오는데?”

“일요일 오후에 도착하는 걸로 표 끊어 놨어.”

일요일에 온다는 소리를 들은 채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어제 미리 챙겨 둔 캐리어를 꺼낼 무렵, 채하는 배신감을 느낀 표정을 지었다.

“나 갔다 올게.”

나를 서울역까지 데려다준 채하는 작별 인사를 건네는 손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두 번 맞춘 후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도착하면 연락할게.”

채하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단단하게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은 그것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얼른 줘. 너도 출근해야지.”

“정말 저녁때 나랑 같이 가면 안 될까?”

채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채하의 허리를 안고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곤 얼른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너 기차 타는 것까지 보고 갈게.”

“그럼 지각할 것 같은데.”

“이미 늦게 간다고 말해 뒀어.”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끌고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은 채 채하가 걷기 시작했다. 역 안으로 들어와 시계를 확인하자 기차 시간까지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나는 바닐라 라테, 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내가 자리를 잡고 앉는 사이 채하가 커피를 가지고 왔다.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나를 보내기 아쉬운 듯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내 손을 계속 만지작댔다.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씩씩하게 있어. 알겠지?”

“응….”

나는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채하의 목소리에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 곧 기차를 타야 할 시각이 되었다.

채하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기차에 탔다. 짐을 보관하는 곳에 캐리어를 두고 자리에 앉자 아직 플랫폼에 서 있는 채하가 보였다.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 손을 본 채하도 함께 인사했다. 그는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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