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14)

동상이몽 연애사 1권

01

귓가에 웅성거림이 들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 같았다. 힘을 주고 눈을 떠 보려고 했지만 무거운 눈꺼풀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열린 시야로 하얀 천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해 보니 설채하였다. 채하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아… 지원아, 정신 들어?”

“…여기가 어디야?”

“병원이야.”

눈을 뜬 곳은 대학 병원 응급실이었다. 왜 내가 병원에 있냐고 자초지종을 물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하는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무슨 교통사고?” 하고 되물었다.

내 마지막 기억은 소설을 써 내려가다 글의 전개가 막혀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침대에 누웠던 것인데. 왜 누운 곳이 아니라 낯선 병원에서 눈을 뜬 것인지, 교통사고는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상황 파악을 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다가왔다.

“유지원 씨?”

“네.”

“통증이 느껴지거나 불편한 곳 있으십니까?”

“아니요. 없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검사 결과 아기도 큰 문제 없어 보입니다.”

“…아기라니요? 무슨…?”

아기라니? 무슨 아기? 의사는 분명 한국말로 이야기했으나 나는 외계어라도 들은 듯했다.

“유지원 씨 배 속의 아기요.”

나의 되물음에 의사는 뭘 그런 걸 묻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저는 남잔데요.”

“네. 유지원 씨는 오메가 남성이시죠.”

차트가 바뀐 건가? 응급실에 나와 동명이인이 있나 보다.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었다.

“저 베타인데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것 같아요.”

“아닙니다. 저희가 실시한 검사 결과 유지원 씨는 오메가로 나왔어요. 보호자분도 오메가가 맞다고 하셨습니다.”

조금은 가닥이 잡히던 상황이 다시 미궁 속으로 빠졌다. 내 앞에 서 있는 의사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오늘 날짜를 물었다.

“2월… 날짜까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는데 2월 말이요.”

내 대답을 들은 의사는 골치가 아파졌다는 얼굴을 했고, 설채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으어헝… 끄읍… 지원아…. 지금 5월이야.”

채하의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의 옷차림이 2월치고 가벼워 보이긴 했다. 그래도 쉽사리 5월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채하가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5월 28일. 커다란 벽걸이 전자시계도 빨간 불빛으로 오늘이 5월 28일임을 알리고 있었다. 나를 속이려고 병원 벽에 붙은 시계의 날짜까지 바꾸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의사는 뒤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를 섞어서 여러 가지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휠체어에 태워진 나는 엉엉 우는 채하와 함께 여러 검사실을 돌아다녀야 했다. 채하가 탈수로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그래도 병원이니 쓰러져도 큰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모든 검사가 끝났다.

“부분 기억 상실증입니다.”

의사는 짧은 문장으로 나의 병명을 진단했다. 가벼운 교통사고였지만 머리를 부딪혀 충격을 받은 것이 원인인 듯하다고 했다. 의사와 나, 그리고 설채하. 이 중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내가 아니라 채하였다. 겨우 눈물을 그쳤던 채하는 기억 상실증이라는 말을 듣더니 마치 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처럼 울어 댔다.

“흐읍… 끄으… 지원아… 흐…. 어떡해.”

“야, 울지 마. 머리 울려.”

채하는 내 말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손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끅끅거리는 소리는 막지 못했다. 울고 있는 채하를 보니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에 울어야 할까, 아니면 베타였던 내가 오메가가 되었고 임신까지 해 버렸다는 것에 울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 대신 우는 채하 때문에 나올 것 같던 눈물도 다시 들어가 버렸다.

***

일단 오늘 하루는 병원에서 상태를 지켜보자는 주치의 소견을 따라 오메가 전용 병동의 1인실에 입원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려 상의를 벗자 가슴 위에 붉은 자국 여러 개가 보였다. 거울을 보며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 보았다. 간지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것이 피부병은 아닌 듯했다. 의사나 간호사에게 보여 주면서 물어보기엔 부끄럽다는 생각에 재빨리 환자복을 입었다.

“지원아, 나 집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 챙겨 올게.”

내가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채하는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채하가 나가 버리자 혼자 남은 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주변이 조용해지기 무섭게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몰려들었다. 도대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3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내가 아는 사실은 겨우 세 가지뿐이었다. 지금은 2월이 아니라 5월이었고 나는 베타에서 오메가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배 속엔 아기까지 있었다.

지금 가장 먼저 알아내야 할 것은 아기에게 유전자 절반을 제공한 사람이었다. 내가 오메가라고 했으니까 상대는 아마도 알파겠지? 여자일까? 남자일까? 그 존재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채하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원아, 내가 너 편하게 자라고 베개랑 보디 필로우 챙겨 왔어.”

겨우 하루 입원하는 것뿐인데 채하는 병실 침대 위에 이것저것 꺼내 놓기 시작했다. 나는 짐을 푸는 채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채하야, 내가 언제 오메가가 된 거야?”

“어…. 4월 초.”

지금이 5월 말이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채하야, 너 이 애 유전자 제공자가 누군지 알아?”

“어… 그게….”

채하는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늘리며 뜸만 들였다. 나와 연인 관계인 사람이라면 분명히 채하도 알 것이다. 하지만 망설이는 채하의 모습에 의심은 원나잇 쪽으로 기울었다.

“아, 모르면 됐어.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니까 내가 기억도 못 하는 거겠지.”

내 말에 채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미혼부가 될 수도 있는 친구가 기억 상실증까지 걸려 버려 마음이 아픈 걸까.

“우냐? 새끼, 내 걱정 한다고 또 우는 것 봐.”

내 걱정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인생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늘은 아이의 유전자 제공자에 대해 더 곱씹지 않기로 했다.

“채하야. 너 회사는? 지금 회사에 있을 시간 아니야?”

“네가 다쳤는데 어떻게 내가 회사에 있어. 내일 오후에 출근한다고 말해 뒀으니까 같이 퇴원하면 돼.”

“아니야. 집엔 나 혼자 가면 되니까 넌 회사 가.”

우리가 실랑이하는 사이 간호사가 카트를 끌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유지원 님, 체온하고 혈압 좀 잴게요.”

간호사는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와 귓속으로 체온계를 집어넣었다. 체온계가 삑- 소리를 내자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체온 정상이시구요.”

이어서 한쪽 팔에 빠르게 혈압계를 감았다.

“혈압도 정상이시네요.”

체온과 혈압을 측정하는 움직임에서는 일련의 군더더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카트 위에 놓인 노트북 자판을 빠르게 두드리던 간호사가 곧바로 나를 돌아보았다.

“유지원 님은 첫 히트 사이클로 임신하셨잖아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네에.”

“아직 포궁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착상이 됐어요. 그런데 교통사고까지 난 상황이라 무조건 조심하셔야 돼요.”

간호사는 나의 상황을 알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내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심정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조용히 대답만 했다.

“아… 네.”

간호사는 최대한 침대를 벗어나지 말고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말을 끝으로 카트와 함께 나가 버렸다.

“들었지? 절대 안정. 내일 같이 퇴원해.”

“알겠어.”

나는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 그대로 쐐기를 박을 작정인지 채하도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병실을 나섰다. 간호사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말속에 ‘유산 위험’이라는 속뜻이 숨어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손을 들어 아직 평평한 배를 쓸어내렸다. 함께한 지 8주나 되었다고 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을 한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모든 것을 나 혼자 결정해야 했다. 침대에 누워 배 위에 손을 얹고 천장만 바라보았다. 아직도 꿈속인 것처럼 모든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20분 정도 지난 후에 채하가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한 손에는 검은색 편의점 봉지가 들려 있었다.

“편의점 갔다 왔어?”

“응. 너 좋아하는 간식거리 좀 사 왔어.”

채하가 건네준 봉지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간식들이 가득했다. 그중 과일 맛 젤리 한 봉지를 뜯어 입에 넣었다. 젤리를 씹기 시작하자 과일 향과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오, 역시 내 취향은 우리 채하가 제일 잘 알지.”

“맛있어?”

“어, 개맛있어.”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듣는다.”

“벌써 조카랍시고 챙기는 거야?”

내 말에 채하의 눈가가 또다시 붉어졌다. 평소에도 잘 우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심한 것 같았다. 채하가 왜 저렇게까지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병원에서 하루를 보낸 후 채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우리는 대학 진학과 동시에 같이 살기 시작해 벌써 6년째 동거 중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이 내 침실이었다. 그러나 채하가 짐을 들고 향한 곳은 내 방이 아니라 그의 침실이었다.

“어? 그걸 왜 네 방으로 가지고 가?”

“방 안에 화장실 있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 당분간은 여기 쓰라고.”

우리 집은 방 세 칸짜리 아파트였는데, 집에서 일하는 내가 작은방 2칸을 쓰는 대신 화장실이 딸린 가장 큰 방 하나를 채하가 쓰는 중이었다. 아픈 나를 위해 자기 방까지 양보하는 채하를 보자 앞으로도 이 우정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싶어서 코끝이 찡해졌다.

채하는 점심 식사를 챙겨 주고 내가 침대에 눕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 출근했다. 나 혼자 있는 집에는 적막만 감돌았다. 홀로 남으니 어제 미뤄 뒀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내가 베타에서 오메가가 되었다. 6년 전,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받았던 마지막 형질 검사에서 오메가 발현 확률은 27.8%였다. 27.8%는 낮은 확률이었고 대부분의 오메가들은 만 25세 이전에 발현했다. 몇 달 후면 만 25살이 되는 나는 스스로가 오메가로 발현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오메가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끝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내 배 속에 있는 아기. 생긴 지 벌써 8주가 되었다고 했다. 앞으로 약 32주 후면 직접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변수도 존재하겠지만, 일단 아이를 낳았을 때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금전적인 문제. 다행히 나는 또래에 비해 모아 둔 돈이 많았다. 또한 벌이도 괜찮은 편에 속했다. 일단 금전 문제는 통과. 그다음은 육아. 부모님의 손을 빌릴 수 있을 듯했고 작가라는 직업 특성상 집에서 육아와 업무를 겸하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는지, 퇴근하고 돌아온 채하가 나를 깨웠다.

“퇴근했어?”

“응. 저녁 사 왔어. 일어나서 밥 먹어.”

채하를 따라 방을 나오자 식탁 위에 설렁탕이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하얀 국물과 빨간 깍두기가 군침을 돌게 했다. 그런데 식탁 위에는 1인분뿐이었다.

“너는 안 먹어?”

“응. 나는 입맛이 없어서.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채하의 안색이 흙빛이었다. 내가 숟가락을 드는 것을 본 후 채하는 거실 창문을 활짝 열고 소파에 털썩 앉아 버렸다. 어제 보호자 침대에서 불편하게 잠든 데다가 회사까지 다녀와서 그런지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채하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 왔을 설렁탕을 남길 수는 없어 밥 한 그릇을 말아서 싹싹 비웠다. 식사를 마친 뒤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채하는 방금까지 널브러져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려와 내 손에 있던 고무장갑을 뺏어 갔다.

“맛있게 먹었어?”

“그럼, 그럼. 누가 사다 준 건데. 당연히 맛있게 먹었지.”

아부를 살짝 섞어 멘트를 날리자 채하의 얼굴 위로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배 속에 품은 아기에게도 칭찬을 많이 해 줘야겠지. 동시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으면서 김칫국부터 들이켰다는 생각에 조금 침울해졌다.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얼른 방에 들어가서 쉬어.”

채하는 나를 방에 밀어 넣고 부엌으로 가 버렸다. 곧바로 그릇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물소리가 들려왔다. 포만감이 들자 오후 내내 잤던 사람답지 않게 또 잠이 몰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아이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돈? 충분했다. 키우는 데 드는 시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것도 아마 충분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가짐이었다. 아무리 돈과 시간이 넘쳐 나도 사람 한 명을 키워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휴, 혼자 고민해서 뭐 하냐. 나 혼자 만든 것도 아닌데.”

방금 밥을 먹어 살짝 튀어나온 배 위를 쓸어내리며 혼잣말을 했다. 핸드폰을 뒤져 봐도 유전자 제공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없는 데다가 최근 24시간 동안은 핸드폰에 온 연락 자체가 없었다. 상대가 원나잇 알파인가 하는 의심이 틀림없다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고개를 끄덕일 때 설거지를 마친 채하가 방으로 들어왔다. 채하의 손에 들린 베드 테이블에는 예쁘게 깎은 과일이 올려져 있었다. 먹기 좋게 손질된 청포도와 오렌지를 보자 방금까지 복잡하고 침울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어, 청포도네.”

“응. 너 청포도 좋아하잖아.”

“역시 친구가 최고다. 네가 우리 엄마보다 내 취향을 더 잘 아는 것 같아.”

웃으며 말하는 나와 달리 채하의 입꼬리는 웃지 않았다. 표정이 어두운 걸로 보아 무척 피곤한 듯했다.

“채하야, 많이 피곤해? 얼른 내 방 가서 자.”

채하의 방은 지금 내가 쓰고 있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채하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아니야. 혹시 자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나 침대 밑에 이불 깔고 잘게.”

이 헌신적인 태도에 ‘친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바닥에서 자지 말고 같이 침대에서 자.”

침대의 빈자리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내 방에 놓인 침대는 싱글 사이즈였으나 채하 것은 퀸 사이즈라 남자 두 명이 눕기에 충분했다.

“정말? 그래도 돼?”

“네 침대인데 당연히 네가 자는 게 맞지.”

바닥에서 자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채하가 한결 밝아진 얼굴을 했다. 나는 접시 위에 남은 청포도 하나를 포크로 찍어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접시가 깨끗해지자 채하는 다시 베드 테이블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방을 나가는 채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방에 딸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에는 채하가 옮겨 놓은 것인지 내가 사용하던 목욕용품이 놓여 있었다.

“오- 설채하, 센스 있네.”

심지어 평소에 사용하는 순서대로 줄을 맞춰 정리되어 있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몸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화장실 옆 파우더 룸의 의자에 앉아 눈을 반쯤 감은 채 드라이기를 켜 머리를 말렸다. 머리가 절반 정도 말랐을 무렵, 머리가 촉촉하게 젖은 채 파자마 바지만 입은 채하가 거울에 비쳤다.

“드라이기? 나 거의 다 썼어. 조금만 기다려.”

채하는 기다리는 대신 내 손에 들려 있던 드라이기를 빼내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설채하, 서비스 죽이네. 네가 계속 이렇게 해 주면 기억 돌아오는 게 싫어지잖아.”

나는 농담 섞인 말을 뱉었다. 채하는 앞으로도 계속해 줄 테니 얼른 기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쯤 잠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채하가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볼 수 없었다.

물기가 다 사라지자 나를 침대로 데려다 놓은 채하는 협탁 위 수면 등을 켜고 다시 파우더 룸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드라이기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옆으로 누워 지금 귓가에 들리는 드라이기 소리가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할 즈음, 매트리스 한쪽이 푹 들어가는 느낌에 눈을 떴다. 겨우 열린 시야에 내 얼굴을 바라보고 누운 채하의 얼굴이 비쳤다. 나는 입 안에 맴돌던 인사를 웅얼거렸다.

“…잘 자.”

채하의 대답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채하가 옆에 누우면서 몰려든 좋은 향기에, 정신을 잡고 있던 끈을 놓치고 나는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젯밤, 10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잠들었지만 일어나 보니 오전 10시가 넘어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협탁 위의 핸드폰을 들어 채하가 보내 둔 메시지를 확인했다.

채하 : 깊게 자는 것 같길래 안 깨웠어

오전 08:38

채하 : 아침 차려 놨으니까 먹어

오전 08:38

채하는 아침잠이 많았다. 아침 식사를 하느니 30분 더 자는 것을 택하는 사람이었고, 그건 함께한 6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채하가 나 때문에 단잠을 포기했다. 식탁 위에는 햄과 계란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어제처럼 예쁘게 손질된 과일이 있었다. 먹을 것을 보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아, 배 속에 거지가 들었나.”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뒤늦게 정말 뭐가 들긴 들었다고 자각했다.

“헉, 미안. 거지 아니고 네가 있었지.”

배 속의 아기를 깜박해 버렸다. 이건 내 상황에 처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며 혼자 자기 합리화를 했다. 식탁에 앉아 한 손으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물으니 짭짤한 햄과 고소한 계란의 맛이 어우러졌다. 잊기 전에 채하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야 잘 먹을게! 샌드위치 너무 맛있어

오전 10:23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채하 : 잘 잤어? 그릇은 설거지통에 넣어 둬 내가 퇴근하고 설거지할게.

오전 10:25

채하 : 그리고 점심 먹지 말고 기다려 내가 집으로 갈게.

오전 10:26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채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샌드위치와 과일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작업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채하가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지난 3개월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달력이 2월에서 5월로 넘어가 있고 못 보던 펜이나 메모지 따위가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내 기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상 위는 더 살펴볼 것이 없었다.

책상 서랍을 맨 위 칸부터 차례대로 열었다. 첫 번째 칸과 두 번째 칸도 전과 동일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을 넣어 두는 맨 아래 칸은 달랐다. 계약서 따위를 넣어 두던 파일들과 외장 하드, 태블릿 PC 사이로 새로운 것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기 수첩

표지 위쪽에는 큰 글씨로 아기 수첩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밑으로 내 이름 세 글자가 적힌 것도 보였다. 나는 중요한 것이나 절대 버리지 않을 것,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들을 모두 서랍 맨 아래 칸에 넣어 두고는 했다.

여기에 아기 수첩이 들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이 수첩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로 결심한 것일까? 지금의 나로서는 그때의 내 생각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아기 수첩과 태블릿 PC를 챙겨 작업실을 나왔다. 채하의 침대에 누워 수첩을 한 장 넘기자 태명과 보호자 정보를 적는 페이지가 있었다. 이곳은 깨끗하게 비워 놓은 상태였다. 그다음 장은 검진 기록표였다. 맨 위 칸에는 처음 병원에 방문한 날짜와 주 수가 적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주 하고 며칠 전인 걸로 미루어 보아 나도 얼마 전에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수첩을 한 장 넘기니 새까만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보고 저렇게 돌려 본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기의 사진인 것은 분명했다.

‘낳자’. 수첩을 보고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초음파 사진을 보자마자 대단한 부성애나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결정을 내렸는지 지금은 완벽하게 알아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가장 큰 고민거리를 해결한 순간 커다란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넘어야 할 산들이 더 많았다. 일단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을 보고 싶다며 성화였던 부모님의 반응은 어떨까.

곧 손주를 볼 수 있다고 말씀드리면 좋아하시려나, 놀라시려나. 부모님은 아직 나를 베타로 알고 계실 텐데 당연히 놀라시겠지. 부모님이 원하던 나의 미래는 베타인 내가 베타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는 모습이었을 테다. 오메가 미혼부의 삶이 아니라.

채하와 함께 사는 집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으니 본가로 돌아가거나 따로 집을 얻어서 나가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경쾌한 전자음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점심 식사를 사 온 것인지 채하의 발걸음 소리와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지원아.”

“응. 나 방에 있어.”

방으로 들어온 채하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채하의 시선이 협탁 위에 올려 둔 아기 수첩에 고정된 것이 보였다.

“아, 이거? 중요한 물건 넣어 두던 서랍 안에 있더라고.”

“그래…?”

“중요한 거니까 넣어 놨겠지?”

“어…. 그렇겠지?”

“그래서 낳으려고.”

굉장히 중요하고 무거운 결정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지만 내 말투와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하고 가벼웠다. 얼핏 듣기만 해서는 ‘오늘 저녁에 치킨 먹으려고’라는 말을 뱉는 듯했다.

“어… 음…. 어….”

엄청난 결심을 한 나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히려 채하가 당황한 양 말을 더듬었다. 말을 더듬던 채하가 눈가를 빨갛게 붉히다 못해 눈물을 머금더니 금방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나도 안 우는데 네가 왜 울어.”

“아니, 그게… 흐읍, 고마워. 지원아.”

채하의 말을 듣고 의문이 들었다. 내가 내 애를 낳겠다는데 쟤가 왜 고맙다는 말을 할까?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결정한 친구에게 감동해서? 아니면 저출생 문제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에 직면한 대한민국에 기여할 예정인 친구에게 감격해서? 설채하가 그렇게 애국자였나?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일단 밥부터 먹기로 했다.

“채하야, 밥 먹자. 나 배고파.”

배가 고프다는 말에 채하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튀어 나갔다. 그를 따라서 향한 식탁 위에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삼계탕이 있었다. 포장 용기의 뚜껑을 열자마자 통통하고 뽀얀 다리를 꼰 채 국물에 잠긴 닭의 모습이 보였다. 절로 군침이 돌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닭은 두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뿐이었다.

“왜 한 마리밖에 없어?”

“난 속이 안 좋아서…. 얼른 먹어.”

속이 좋지 않다던 채하는 내 앞에 앉아 비닐장갑을 끼고 닭 다리 하나를 뜯어 살을 발라내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잘 먹을게.”

친구를 앞에 앉혀 두고 혼자 밥을 먹으려니 입맛이 돌지 않을 줄 알았으나 웬걸, 술술 넘어갔다. 앞접시에 놓은 고기가 내 배 속으로 사라질수록 채하의 안색은 점점 흙빛으로 변해 갔다. 그러다 결국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채하야, 너 괜찮아? 체했어?”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물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괜찮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채하의 얼굴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아픈 친구를 두고 눈치 없이 닭 한 마리를 전부 먹은 내가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졌다.

채하는 창백한 안색으로 꾸역꾸역 식탁 정리까지 마치고 나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다시 회사로 향하는 채하가 걱정되어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야 속 괜찮아?ㅜ 소화제 꼭 먹고 너무 무리하지 마

오후 12:48

회사에 도착했는지 20분 정도 지나 도착한 답장에는 본인 걱정보다는 내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네 유전자 제공자보다 채하 삼촌이 낫다. 그치?”

방금 먹은 삼계탕보다 배 속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작을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이 없는 상대에게, 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을 거는 것이 웃겨 나도 모르게 킥킥거렸다.

***

퇴원 후 일주일이 지났다. 기억을 잃은 지난 일주일은 정신이 없었다. 일단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문제는 조금 뒤로 미뤄 두기로 했다. 아직 부모님께 말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채하야, 너도 새집을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왜?”

채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운을 띄웠다.

“난 부모님 집으로 가든가 혼자 살 집을 알아보든가 하려고. 여기는 너 혼자 살기엔 너무 크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너랑 같이 사는 집에서 애를 키울 순 없잖아.”

“…있잖아, 지원아. 놀라지 말고 들어 줬으면 좋겠어.”

채하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아빠야.”

채하의 말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짜증이 잔뜩 섞인 내 말에 채하는 “내가 우리 아기 아빠라고.” 하면서 울먹였다. 그러다가 급기야 가지 말라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채하를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턱을 괴고 채하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설채하가 알파이긴 했지만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채하와 그런 짓을 했을까. 나는 머릿속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믿을 만하게 해라. 무슨 우리 아기야. 내 아기지.”

저 말을 마지막으로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내가 방으로 들어오자 채하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지원아, 제발 나간다고만 하지 말아 줘.”

채하는 내 손을 잡고 애원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한 이후 채하는 이것저것 사들여 댔다.

어느 날은 클래식 cd였고, 그다음 날은 딸랑이였다. 그리고 오늘 퇴근한 채하의 손에는 동화책이 여러 권 들려 있었다.

“동화책? 설마 나보고 읽으라는 거야?”

“아니, 내가 아기한테 읽어 주려고.”

“이야, 누가 보면 정말 아빠인 줄 알겠네.”

“내가 아빠 맞다고 했잖아.”

자신이 아빠라고 말하는 채하는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아빠 아니고 채하 삼촌.”

채하는 내가 틀린 점을 여러 번 정정해 줘도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그가 사 온 동화책을 하나씩 펼쳐 보았다.

“<헨젤과 그레텔>?”

“이거 읽어 줄까?”

“애들 갖다 버리는 내용이잖아. 심지어 마녀는 아동 학대. 안 돼,”

<헨젤과 그레텔>을 채하의 무릎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놨다.

“<성냥팔이 소녀>? 너는 애한테 길바닥에서 성냥 팔다 얼어 죽는 내용을 들려주고 싶어? 이것도 안 돼.”

채하의 무릎에 올려져 있는 <헨젤과 그레텔> 위로 <성냥팔이 소녀> 책을 얹어 놓았다.

“<홍길동전>?”

“응. 우리나라 전래 동화도 하나쯤 들려주면 좋을 것 같아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됐어. 얘가 아빠가 없는 것도 아니고 부르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걸 뭐 하러 읽어.”

오늘 채하가 사 온 동화책들은 모두 구독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아동 유기와 학대를 묘사하는 <헨젤과 그레텔>, 아동 노동 문제가 드러나는 <성냥팔이 소녀>, 첩을 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전>. 아이들이 읽기엔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동화책을 보자 아기가 어릴 때부터 부적절한 콘텐츠에 노출되지 않도록 교육에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하는 시무룩한 표정을 한 채 동화책을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치워 버렸다.

“아기 태명은 정했어?”

책을 치우고 다시 내 옆으로 와 앉은 채하가 물었다.

“아니. 아직. 꼭 정해야 되나?”

“태명으로 불러 주면 좋다던데….”

지금까지는 대충 아기라고 부르거나 주어 없이 불러도 아무 불편함이 없었다. 채하의 말을 들으니 태명이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같았다.

“그럼 채하 삼촌이 정해 줘.”

태명의 필요성은 조금 느꼈지만 직접 지을 정도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떠넘기기기 무섭게 채하는 아빠만 믿으라며 큰소리쳤다. 아빠가 아니고 삼촌이라고 정정해 줄까 했지만 금세 마음을 접었다. 상대방이 들을 생각을 안 하는데 나 혼자 떠들어 봤자 뭐 하나 싶어서.

채하는 일할 때만 쓰는 안경까지 꺼내 쓰고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찾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혼자 중얼거리면서 종이에 여러 가지 단어들을 적어 내렸다.

“나 이제 씻고 잘래.”

한마디 툭 던졌더니, 태명 짓기에 열중하던 채하가 씻고 나오면 머리를 말려 주겠다고 했다. 채하는 퇴원한 날 이후로 매일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발을 들었다.

샤워 후 머리까지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채하와 나란히 누웠다.

“태명 후보 잘 들어 봐.”

비장한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다 유치했다. 튼튼하게 크라고 튼튼이, 단단하게 붙어 있으라고 단단이, 쑥쑥 크라고 쑥쑥이, 씩씩하게 크라고 씩씩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럭무럭 크라고 무럭이. 이게 가장 최악이었다. 오리 주물럭 따위가 생각나는 이름에 한숨이 나왔다.

태명 짓기에 열중하는 채하를 보다가 문득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채하의 아버지가 강아지 한 마리를 집으로 데리고 오셨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작고 귀여운 것들을 좋아하는 채하는 입이 귀에 걸려 강아지에게 깜돌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채하는 흰색 강아지 이름이 깜돌이가 말이 되냐며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았고, 강아지 이름은 코코가 되었다. 한참 후 이름을 깜돌이라고 지은 이유를 물어보니 눈이 까매서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채하는 어릴 때부터 작명 센스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던 놈이었다.

“너 남의 새끼라고 막 짓는다?”

“남의 새끼라니? 내 새낀데!”

심혈을 기울여 생각해 낸 이름을 거절당해서인지 채하는 시무룩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조카에게 아빠 노릇을 해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고맙기도 했다.

“얘가 왜 네 새끼야. 내 새끼지. 나 잔다. 잘 자라.”

내가 잠이 들 무렵 채하는 방을 나가는 것 같았다. 잠결에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는지, 다음 날 나가 보니 거실 소파 위에 커다란 덩치를 꾸겨 넣고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우리 집에 있는지도 몰랐던 옥편이 꺼내진 채였다.

“광채…. 대광…. 명대….”

옥편 밑에 깔린 종이에는 한자와 한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어제의 한글 태명보다 더 구렸다. 채하는 빛난다는 뜻을 가진 한자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종이를 작게 접어 쓰레기통으로 집어넣고 속으로 아기에게 약속했다. ‘아빠가 저것보단 더 예쁘게 지어 볼게. 걱정하지 마’ 하고.

느지막이 일어난 채하와 함께 브런치를 먹고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을 때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 아이고, 한 달 동안 연락도 없으신 우리 아드님이신가요?

“어… 엄마, 미안…. 요즘 좀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정신이 없긴 했으니까.

- 별일 없지?

“으응, 없지.”

이건 거짓말. 별일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엄마, 할머니 됐어. 하지만 일단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일단 엄마에게는 별일 없다고 해야 했다.

- 지원이 너 요새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없는데.”

- 어제 엄마 꿈속에 네가 나왔는데, 엄청 커다란 복숭아 하나를 소중하게 안고 다니더라고. 엄마가 나눠 먹자고 해도 주지도 않고. 근데 보통 꿈 같지가 않고 태몽처럼 엄청 생생했어.

“어… 그냥 꿈인 것 같은데. 복숭아 먹고 싶으면 아빠한테 사 달라고 해.”

- 얘는! 엄마가 네 태몽도 꿨는데 설마 그것도 모를까! 혹시 여자 친구 임신한 거 아니지?

“엄마는…. 아니래도!”

임신을 하긴 했지. 여자 친구는 아니고 내가. 괜히 찔려서 엄마에게 큰소리쳤다.

- 아님 말지 왜 소리를 질러! 엄마는 속도위반 절대 나쁘게 생각 안 한다. 응? 알지?

대충 대답을 하다가 조만간 집에 한 번 들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끊어 버렸다.

“야, 채하야. 엄마가 태몽 꿨대. 엄마 꿈속에서 내가 엄청 커다란 복숭아를 소중하게 안고 다녔대.”

내 말을 들은 채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아기 태명 복숭아라고 지을까?”

채하는 아직도 구린 작명 센스로 태명 짓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아기야, 채하 삼촌의 끈기를 보고 배우렴. 너도 저 끈기를 가진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란다. 나는 속으로 아기에게 말했다.

계속 채하가 복숭아, 복숭아 노래를 불러 대는 통에 결국 아기의 태명은 피치가 되었다. 3글자인 복숭아보다는 2글자인 피치가 부르기 편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

내 마지막 기억 속 계절은 겨울이었지만 갑자기 여름이 되어 버렸다. 그때 나는 미래의 나 자신에게 소설의 뒷이야기를 맡기고 잠들었는데, 정말 미래의 나이자 과거의 내가 모두 해결해 놓은 상태였다. 글을 다 쓰고 퇴고까지 한 번 마쳤는지 태블릿 PC에 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다.

형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주인공이 그의 죽음에 의문을 느끼고 형의 친구와 함께 사건을 파헤쳐 가는 추리 소설이었다.

나는 태블릿 PC를 들고 침대에 누워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형의 죽음에 대한 단서를 모아 가는 과정에서 전개가 막혔건만 그 부분이 완벽하게 풀려 있었다. 그러나 결말을 향해 달려갈수록 도무지 내 손을 거친 글 같지가 않았다.

오메가인 형이 히트 사이클 억제제를 다른 약물로 바꿔치기 당했고, 이를 눈치챈 주인공이 범인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다가 우연히 만난 형 친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전개였다. 그 후 안전을 위해 형 친구와 동거를 시작하게 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건을 해결하고 형의 무덤에 함께 다녀온 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키스하는 것으로 글이 끝맺는 것을 보고는 내 눈과 머리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썼던 6권의 소설 중 러브 라인이 있는 글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사귈 것처럼 열심히 썸을 타던 주인공도 일부러 연애에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 내 소설이었다. 도대체 내가 모르는 3개월 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이 주인공은 연애에 성공한 것일까?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설마 나, 연애했나?”

하지만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무슨 연애를 했겠냐는 생각에 그 의심은 접어 버렸다.

“에휴, 연애를 했으면 어떻고 안 했으면 어때. 일단 재미있으면 됐지.”

태블릿 PC의 케이스를 탁 소리가 나게 닫고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윽고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피치에게 말을 걸었다.

“피치야, 너도 재미있었지? 아빠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채하가 사 온 동화책보다 더 재미있는 소설을 보여 준 것 같아서 어깨가 절로 으쓱했다. 아기가 살인 사건 이야기를 접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주인공과 함께 추리하는 과정이 추론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어느새 병원 예약 시간이 다가왔다. 혼자 택시를 타고 다녀와도 되는데 채하는 내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으니 무조건 자신이 동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자신이 아빠인데 같이 안 가는 게 말이 되냐는 헛소리도 덧붙였다.

지난 2주간 채하는 정말 자기가 아기 아빠인 것처럼 굴었다. 채하가 하는 짓을 보고 있자면 고등학교 때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오메가인 채하의 형이 아기를 낳았었다. 조카 육아에 동참하겠다는 이유로 등교를 거부하다가 어머니께 등짝을 맞고 쫓겨나는 게 채하의 일상이었다. 학교에 와서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야간 자율 학습 대신 집에서 아기를 봐서 선생님께 혼나는 것도 빠지지 않는 일이었다.

채하의 형이 아기와 함께 남편에게 돌아간 후, 채하는 우울해하며 핸드폰 속 아기 사진만 바라보곤 했다. 그 후 조카가 집에 올 때마다 채하는 입이 귀에 걸려 집 밖으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기 띠를 하고 조카를 안고 다니던 채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비 다 했어?”

“응. 그냥 내려오라고 전화하지. 뭐 하러 올라왔어.”

“그러다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짧은 시간 동안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겨 기억을 잃어버린 나는 채하의 걱정을 조금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과할 정도로 나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래도.”

“쓰읍, 그런 소리 하지 마.”

채하는 내 말을 끊어 버리고 얼른 나오라며 손짓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아까 떠올렸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채하야, 너 서영이 태어났을 때 학교 안 간다고 떼쓰다가 너희 어머니한테 등짝 맞았던 거 생각나?”

“응, 기억나지. 그때 서영이 보고 있으면 정말 학교 가기 싫었었는데.”

채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그 시절을 얘기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채하는 1층 버튼과 닫힘 버튼을 눌렀다.

“우리 피치도 얼마나 예쁠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밑으로 내려가는 내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채하가 말했다.

“내 새낀데 당연히 나 닮았으면 예쁘겠지.”

채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말이 맞는다며 맞장구를 쳐 대기 시작했다. 차에 타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면서도 피치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울지에 대해 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채하 삼촌, 그만 떠들고 운전에 집중해.”

“어어, 알겠어.”

그제야 채하가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그가 틀어 놓은 오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자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차가 출발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 조심스럽게 나를 깨우는 손길에 눈을 떴을 땐 병원 주차장이었다.

입구에 오메가 전문 병원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평생 올 일 없을 줄 알았던 곳이었는데. 오메가가 되었다는 것이 와닿지 않았는데 병원에 오니 현실로 느껴졌다.

병원 로비는 온통 하얬다. 카운터에 접수한 뒤 채하와 함께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 오메가의 배가 불러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곧 저렇게 되겠지 하는 생각과 내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것인가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 몰려왔다.

“유지원 님, 진료실로 들어가실게요.”

10분 정도 지났을 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혼자 진료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채하가 뒤따라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2주 전에 교통사고가 나셨었다고요?”

병원의 예약 일정을 변경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해 둔 상태였다. 의사와 대화하는 내 옆으로 채하가 딱 붙어 섰다. 나를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네. 사고 났을 때 일단 아기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래도 안정을 취하라는 말은 들었었어요.”

의사는 일단 초음파부터 보자며 초음파실로 안내했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채하는 여전히 내 옆을 지켰다. 어색하게 침대에 누워 웃옷을 걷자 의사가 젤을 바르고 초음파 프로브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계의 화면에 무언가가 나오고 있었지만 어디가 어떤 부위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 이게 아기예요.”

의사가 화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온통 회색 덩어리 같던 화면도 조금이나마 식별이 됐다.

“심장 소리 한번 들어 볼까요?”

손을 움직여 초음파 기계를 조작하자 빠르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초음파실 안에 울려 퍼졌다. 아직 완전한 형태를 띠지 않은 피치의 심장이 열심히 뛰는 것을 보니 정말 내 안에 있는 것이 맞는구나 싶었다.

“흐엉… 으흐읍…. 피치야… 흐으.”

나도 감동을 받았지만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는데 채하는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빠가 저렇게 울보라서 어쩐담.”

의사 선생님이 말하는 울보 아빠는 내가 아닐 것이다. 난 울고 있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선생님이 채하를 아빠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엉엉 우는 채하가 아빠가 아니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대로 둬야만 했다.

진료실로 자리를 옮겨 아기의 상태는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아직 초기여서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도 함께였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채하는 눈과 코가 새빨개진 상태로 연신 웃어 댔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채하에게 물었다.

“근데, 나도 안 우는데 네가 왜 울어?”

“내 새끼가 심장이 뛰는데 그거 듣고 눈물이 안 나는 게 이상한 거지.”

“네 새끼 아니고 내 새끼라고 한 백 번쯤 말했다.”

“나도 내 새끼 맞다고 한 백 번쯤 말했어.”

자꾸 피치한테 내 새끼, 내 새끼 하는 채하 때문에 설마 진짜 쟤가 아빠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설채하와 애를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서로 내 새끼, 네 새끼 하다 보니 어느새 집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채하가 오늘 저녁으로는 피자가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지난 2주 동안 단단히 체했는지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해 얼굴이 반쪽이 되어 버린 채하였다. 그가 먼저 무언가가 먹고 싶다고 말을 꺼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피자? 좋지. 꼬꼬피자로 시켜. 거기 쿠폰 거의 다 모았더라.”

“웅. 구랩.”

피자를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은 것인지 채하는 애교 넘치는 말투로 혀 짧은 소리를 했다. 채하가 배달 앱으로 피자를 시킨 뒤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텔레비전을 켜고 여행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출연자가 현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속 음식에 집중하다 보니까 어느새 초인종이 울렸다. 아직 주방 일을 하는 채하 대신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채하가 빠르게 주방에서 튀어 나가 피자를 받아 왔다.

“오, 맛있겠다.”

저 멀리서 피자 냄새가 풍겼다. 우리는 식탁이 아닌 거실 테이블에서 피자를 먹기로 했다. 채하가 주방에서 피클 껍질을 따고 컵 두 개를 챙겨 오는 사이 피자 박스의 뚜껑을 열었다.

“어?”

피자의 절반은 내가 좋아하는 포테이토 피자였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파인애플이 잔뜩 올라간 하와이안 피자였다.

“채하야, 피자 잘못 시킨 것 같은데.”

“잘못 시킨 거 아닌데.”

컵에 콜라를 따르면서 내용물을 확인한 채하가 말했다.

“너 하와이안 피자 싫어하잖아. 뜨거운 파인애플은 불법이라며.”

“갑자기 먹고 싶더라고.”

갑자기 뜨거운 파인애플 따위를 먹고 싶어 하는 채하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으응. 맛있게 먹어. 못 먹겠다면서 내 꺼 달라고 하지는 말고.”

내 걱정과 다르게 채하는 피자를 들고 맛있게 먹어 댔다. ‘정말 먹을 만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 피자 끄트머리에서 떨어진 파인애플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뜨겁고 달콤하고 물컹물컹한 식감이 이상했다. 콜라로 입을 헹궈 냈지만 익은 파인애플이 망친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턱을 괴고 파인애플 피자를 먹어 치우는 채하를 바라보았다.

“지원아, 왜 안 먹어?”

“채하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서.”

“그러지 말고 식기 전에 먹어.”

채하의 재촉에 피자를 들었다. 먹는 둥 마는 둥 겨우 한 조각을 해결한 후에야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 채하가 곁에 다가오면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은은한 가죽 냄새 같기도 하고 약한 머스크 향 같기도 한 복잡한 향기였다. 침대에 누워 그 향을 맡고 있으면 금세 잠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너 향수 뭐 써? 그 냄새만 맡으면 졸려.”

“나 향수 안 쓰는데.”

“그럼 이거 무슨 냄새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채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킁킁거리면서 향기를 맡았다. 향수가 아니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가 몸을 뒤로 쭉 빼고는 손으로 내 얼굴을 살짝 밀어냈다.

“내 페로몬.”

“뭐? 정말? 아, 이제 내가 페로몬 냄새를 맡을 수 있구나.”

베타에서 오메가가 되어 버린 것이 또 한 번 와닿는 순간이었다. 채하의 페로몬 향을 맡아 보니 호기심이 하나 생겼다.

“그럼 나한테도 페로몬 냄새 나?”

고개를 숙여 내 어깻죽지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으면서 채하에게 물었다.

“어… 음.”

“왜 대답이 없어? 나한테는 냄새 안 나?”

“…레몬.”

채하는 겨우 한 어절을 말하면서 엄청나게 뜸을 들였다.

“너처럼 어른스러운 향이면 좋겠는데 레몬 향이라니.”

페로몬 향이 변하냐고 물어봤지만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후각에 집중하니까 정말 레몬 향이 약하게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빠는 레몬, 아기는 복숭아. 과일 부자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레몬… 좋아해.”

“어, 그래.”

레몬 좋아하는 걸 왜 수줍게 말하지, 나는 채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채하가 빠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쌩 지나가는 뒷모습에서 빨개진 귓바퀴가 보였다. 6월이지만 아직 귀가 빨개질 정도로 덥지는 않았다. 채하가 화장실로 들어가고 5분쯤 지났을까, 문 너머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

병원에 다녀온 이후 채하는 이전보다 더 태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사 왔던 동화책들이 모두 구독 금지 판정을 받은 후로도 포기하지 않고 거의 매일 책과 함께 퇴근했다. 대부분이 저번처럼 구독 금지를 당했지만, 칼같이 날카로운 나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것이 개중 몇 권 있었다.

채하는 밤마다 동화책을 읽어 주었고, 페로몬 향에 긴장이 풀어진 나는 그것을 들으면서 잠드는 것이 요 며칠간의 일상이었다. 아직 11주밖에 되지 않아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해도 채하는 동화책 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너 책 읽으라고 시키면 나 그거 들을 때마다 졸았던 거 생각나?”

“말은 바로 하자. 그거 때문에 잔 게 아니라 그냥 국어 시간만 되면 잤잖아.”

수업 시간에 잘 조는 편이긴 했지만 조금 억울했다. 채하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책을 읽어 주는 것을 들으면 불면증 환자라도 5분 안에 잠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채하가 들려주는 아기 사자의 모험 이야기를 들으면서 꾸벅꾸벅 졸아 댔다. 내 눈이 반쯤 감긴 것을 본 채하는 방의 불을 끄고 조도가 낮은 수면 등을 켰다. 아직 10시도 채 되지 않은,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

꿈속에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내 자리는 교실 맨 뒤 창가였다. 교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열린 창문을 통해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을 반쯤 가린 연한 하늘색 커튼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고개를 숙이고 교과서에 필기를 하는 채하가 보였다. 앳된 얼굴의 채하는 교복 단추를 끝까지 채운 단정한 차림이었다. 꿈에서도 교복 단추를 풀어 헤친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잠들기 전 국어 시간 이야기를 해서였는지, 꿈속 역시 국어 시간이었다. 채하에게 책 읽기를 시키는 것을 좋아했던 선생님은 꿈에서도 어김없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 듣기 좋은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지문을 눈으로 따라 읽는 대신 눈을 감고 채하가 읽어 주는 것을 들었다.

“…가 말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거 하나만은 잊지 말아 주세요.”

어느 소설의 한 부분을 수록해 놓은 교과서의 지문은 어느새 마지막 무렵이었다. 눈을 감고 있다가 채하의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채하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입 모양으로 내게 말했다. ‘나를 잊지 마’라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채하가 읽은 소설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초여름 날씨와 채하의 목소리, 입 모양으로 전한 말은 계속 뇌리에 남아 있었다.

텅 빈 침대에서 혼자 눈을 뜨던 평소와 달리 내 옆에는 곤히 잠든 채하가 있었다. 꿈속의 채하가 마지막으로 한 말 때문이었을까, 현실의 채하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몸을 옆으로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채하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 같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손을 뻗어 나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럽게 안긴 모양새가 되어 버린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채하는 나를 안고 다시 잠들었는지 금세 고른 숨소리를 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안겨 있는 지금 상태가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일단 나는 꼬물거리면서 품 안을 빠져나왔다. 채하는 아직 졸음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자자.”

“자.”

나는 채하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채하가 물소리에 깰까 봐 칫솔을 챙겨 거실 화장실에서 씻고 나왔을 땐 어느덧 그가 일어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잘 잤어?”

방금 잠에서 깨어난지라 채하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졌다.

“응, 얼른 일어나서 씻어.”

다음부터는 자신이 자고 있더라도 침실 화장실에서 씻으라는 말을 끝으로 채하가 방을 나갔다. 그는 샤워를 마치고 와서는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능숙하게 칼질을 하고 빵을 구워 샌드위치를 만드는 채하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처음 집에 놀러 갔을 때는 라면도 제대로 끓이지 못하던 애가 이렇게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기했다.

“맛있게 먹어.”

“잘 먹을게.”

내 앞접시에는 신선한 야채와 햄, 계란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과일이 올라간 반면 채하 앞에 놓인 접시 위에는 과일만 올려져 있었다. 평소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는 채하는 빵 대신 과일만 먹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면서 지난밤 꿈에 대해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꿈꿨는데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어. 너 거기서도 국어 시간에 책 읽고 있더라.”

“그래서? 좋았어?”

“응.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목소리는 좋았던 것 같아. 그리고 꿈속에서 네가, 널 잊지 말라고 했어.”

“내가 널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하고 웃는 나와 달리 채하는 웃지 않았다. 그저 얼른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말만 했다. 그는 내가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그릇을 정리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채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장면과 그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설거지를 하는 채하와 채하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내 모습이었다.

“윽.”

낯선 기억과 함께 몰려오는 두통에 나도 모르게 신음했다. 채하는 수도꼭지를 잠그지도 못하고 부리나케 나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 뭐가 떠올라서.”

“뭔데? 기억이 나는 거야?”

무언가 떠올랐다는 말에 채하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다.

“넌 설거지하고 있고 난 네 허리에 매달려 있었는데. 뭐, 잘못된 기억이겠지. 내가 왜 너랑 껴안고 있겠어.”

“…그거 진짜 있었던 일인데.”

잠시 말이 없던 채하가 입을 열었다.

“거짓말. 너 내가 기억 못 한다고 거짓말하냐?”

“아니야. 진짜야.”

장난으로 넘기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만약 저게 연기라면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배우로 데뷔해야 할 정도였다.

“내가 너랑 껴안고 있을 일이 뭐가 있어.”

“지원이 너는 기억 못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여러 번 숨을 고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사귀는 사이였어.”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말없이 채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였다는 말도, 자연스럽게 채하의 방으로 들어온 나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였다는 거짓말은 진짜 별로야. 그치?”

배를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나는 그냥 기분 나쁜 거짓말을 들은 것으로 여길 작정이었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였다면 피치의 유전자 절반 제공자는 설채하라는 것인데,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다가 문득 채하가 거짓말까지 하면서 장난을 친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오늘 아침 자연스럽게 나를 품으로 끌어당기던 채하가 떠올랐다.

도대체 내가 기억을 잃어버린 3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생각이 한 방향으로 쏠리자 채하가 했던 모든 행동이 다 의심스러워졌다.

친구의 아이를 위해 태교에 신경 쓰는 것? 그럴 수 있다. 만약 채하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나도 클래식 cd와 동화책을 선물하는 일 정도는 기꺼이 할 것이다. 하지만… 미혼부가 된 채하에게 내가 책임지겠다고 할 수 있으려나? 아빠가 되어 주겠다고 자처하는 게 가능할까? 확실히 그건 아니었다. 채하가 지난 2주 동안 했던 행동들을 곱씹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5월 28일의 악몽 (채하 외전)

이제 여름이라고 불러도 다들 수긍할 만큼 낮의 햇볕은 뜨거웠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여름을 싫어했지만 오랜 짝사랑이 결실을 맺고 우리 세 식구가 함께 맞게 될 이번 여름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도 평소처럼 직장 동료 겸 친구인 녀석들과 점심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을 사서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걷던 중 주머니 안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병원이라고 밝힌 상대방은 지원이의 교통사고 소식을 알렸다. 어떻게 병원에 도착했는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응급실에 도착해 확인한 지원이에게는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의사는 배 속 아기도 무사하고 지원이도 곧 깨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빨리 지원이가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며 손을 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의사의 말대로 내가 응급실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이는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을 뜬 지원이는 지난 3개월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기억은 우리가 아직 친구였던 2월 말에 머물러 있었다. 지원이를 데리고 여러 가지 검사를 받으러 다니는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분 기억 상실증입니다.”

겨우 멈췄던 눈물이 다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머리가 울리니 울지 말라는 지원이의 말에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겨우 손 따위로 찢어질 것 같은 내 마음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세상이 끝나 버린 것처럼 슬퍼하는 나와는 달리 지원이의 표정은 의외로 평온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큰 문제는 없지만 입원해서 하루 동안 지켜보자는 의사의 말에 지원이는 오메가 병동의 1인실에 입원을 했다. 지원이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것을 확인한 나는 집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병실 밖으로 나오자 잠시 눌러 담았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병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니 사람들이 모두 힘내라는 말을 하고는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본인도 눈물을 훔쳐 댔다. 괜히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 머쓱한 마음이 약간 들었다. 그러나 아직 눈물을 멈추기에는 슬픔이 더 컸다.

의사 선생님이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고 했기에, 집으로 가는 동안 지원이에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원이는 아직 2월 말에 머물러 있었다. 3개월 사이에 베타에서 오메가가 되었고 심지어 배 속엔 아기까지 생겨 버렸는데 이걸 어떻게 충격받지 않게 설명하라는 말인가. 짧은 시간 동안 해답을 찾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무거운 문제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가 함께 사용하는 침실로 가던 중 거실 테이블 위에서 지원이가 남긴, 오렌지 주스가 조금 담긴 컵을 발견했다. 집에 남아 있는 5월의 흔적을 마주하니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병원으로 돌아가야 해서 천장을 바라보고 눈에 힘을 줘 눈물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가방을 꺼내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하루뿐이었지만 혹시라도 잠자리가 불편할까 평소 사용하던 베개와 보디 필로우까지 챙겨 들었다. 병실에 혼자 남아 있을 지원이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병실을 나왔을 때부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나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원아, 내가 너 편하게 자라고 네 베개랑 보디 필로우 챙겨 왔어.”

병실 침대 위에 제 물건을 올려놓는 나를 지켜보던 지원이가 입을 열었다.

“채하야, 내가 언제 오메가가 된 거야?”

“어…. 4월 초.”

갑작스럽게 던져 오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더듬더듬 답했다. 그러나 다음 질문에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채하야, 너 이 애 유전자 제공자가 누군지 알아?”

“어… 그게….”

“아, 모르면 됐어.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니까 내가 기억도 못 하는 거겠지.”

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충격을 받아 쓰러질까 봐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지원이는 내가 우는 이유를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지원이는 내 속도 모른 채 내일 혼자 퇴원하고 집에 갈 테니 회사에 가라는 소리나 했다. 다행히 우리가 실랑이하던 사이 간호사가 들어와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얘기한 덕분에 지원이도 함께 퇴원하는 것에 동의했다.

간호사가 떠난 후 잠시 나갔다 온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섰다. 병원 1층 로비에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더 고민해 봤자 답을 찾지 못할 것이 뻔했다.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지원이가 좋아하던 간식거리 몇 가지를 사 들고 다시 병실로 향했다.

“맛있어?”

“어, 개맛있어.”

기억을 잃었어도 취향은 변하지 않았다. 젤리 한 봉지를 뜯어 맛있게 먹는 지원이에게 맛있냐고 묻자 격한 대답이 돌아왔다.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듣는다.”

“벌써 조카랍시고 챙기는 거야?”

조카가 아니라 자식인데. 나와 우리 아기는 자식을 자식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신세가 되어 버렸다. 겨우 진정시킨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

병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지원이와 집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함께 쓰던 방으로 짐을 가져가던 중 지원이가 그걸 왜 거기로 가져가냐 묻는 바람에 당황했다. 지원이의 기억 속 나는 아직 방을 혼자 쓰고 있는 상태였다. 화장실이 딸린 내 방이 더 편할 것이라는 말에 지원이는 대충 수긍하는 눈치였다.

점심 식사를 챙겨 주고 침대에 눕는 것까지 확인한 후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다들 지원이의 상태에 대해 묻기 바빴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지원이의 동기들인지라 당연한 일이었다.

“지원이 상태는 어때?”

“많이 다쳤어?”

모두 일을 내팽개치고 내 책상 주위를 빙 둘러싼 채 질문을 퍼부었다.

“다친 곳은 없는데…. 기억 상실증….”

웅성웅성했던 분위기가 찬물을 뿌린 것처럼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다 잊은 건 아니고 최근 3개월 기억이 없어.”

“3개월이면… 설마 너네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것도?”

나는 대답 대신 빨개진 눈가로 질문에 긍정했다.

***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 안이 조용했다. 지원이는 방에서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에 내가 퇴근하면 일이 바쁘더라도 작업실 문을 빼꼼 열고 “잘 갔다 왔어?”하고 묻던 지원이의 말이 없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퇴근길에 사 온 설렁탕을 그릇에 옮겨 담고 함께 포장된 반찬들을 올리니 그럴싸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지원이를 식탁에 앉혀 놓고 숟가락을 드는 것을 확인한 후 바로 거실로 도망쳤다.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바람을 쐬는 순간, 울렁거렸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설렁탕을 맛있게 먹는 지원이를 보았을 땐 내가 입덧을 대신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쳤는지 지원이가 그릇 치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빠르게 달려가 설거지를 하려던 지원이의 손에서 고무장갑을 뺏었다.

“맛있게 먹었어?”

“그럼, 그럼. 누가 사다 준 건데. 당연히 맛있게 먹었지.”

기분 탓이겠지만 맛있게 먹었다는 말에 방금까지 입덧으로 울렁거렸던 속이 잠잠해졌다. 지원이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그릇 하나와 작은 반찬 그릇 두 개를 씻고 정리하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친 뒤 냉장고에 있던 청포도와 오렌지를 꺼내 손질하고 접시에 예쁘게 올려놓았다. 잘 쓰지 않던 베드 테이블까지 꺼내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자 그 모습에 지원이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과일을 먹으면서 자꾸 나한테 친구, 친구 하는 지원이 때문에 조금 침울해졌지만 침대에서 같이 자자는 소리에 재차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인간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과일을 다 먹은 지원이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물소리가 길게 들려오는 걸로 보건대 샤워를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원래 집을 칼같이 나눠서 사용했었다. 거실과 주방은 공동 구역, 화장실이 딸린 큰방은 내가, 작은방 2칸과 거실 화장실은 지원이가. 그러나 지원이의 첫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내고 관계가 발전한 이후 그 경계는 서서히 무너졌고,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내 방에서 함께 잠들었다. 내 방 화장실은 지원이가, 거실 화장실은 내가 쓰기도 했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갈 무렵, 지원이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로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지원이의 손에 들린 드라이기를 빼내 지원이의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내 손가락 사이로 흩날리는 얇은 진갈색 머리카락도, 목덜미에서 풍겨 오는 보디 워시 향기도 그대로였지만 이미 많은 것이 변한 거나 다름없었다.

머리가 다 마른 지원이를 침대에 데려다 놓고 이번에는 내 머리를 말렸다. 사용한 드라이기를 정리해 서랍에 넣어 두고 침대로 가자 지원이는 내가 누울 자리를 바라보고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누웠지만 협탁에 놓인 수면 등이 비추는 지원이의 눈은 반쯤 뜨여 있었다.

“…잘 자.”

짧은 인사를 남긴 지원이는 곧바로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냈다. 나는 잘 자, 하고 인사하는 대신 잠든 지원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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