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진호가 눈을 떴다.
졸린 눈을 비비며 흐릿한 시야를 지우자 저를 끌어안고 있는 커다란 맨몸이 보였다. 얘는 안고 자는 게 버릇인가. 뺨에 탄탄한 살결이 닿아 흠칫 놀란 진호가 꿈틀거리며 수영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잠에 깊이 빠져 있는지, 애를 쓰며 격하게 몸을 흔들었는데도 숨을 내뱉는 속도가 일정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입 안이 말랐다.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낸 진호가 유리컵에 따랐다. 단숨에 한 컵을 비우니 답답했던 속이 시원해졌다. 진호가 골몰히 생각에 잠긴 채 핸드폰 화면을 켰다.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저는 수영과 키스를 하고 있었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격렬하게 입술을 탐하던 수영이 티셔츠 안에 손을 넣어 갈빗대를 어루만지던 감각은 생생했다. 애무를 받으며 충동적으로 수영에게 매달린 것도 같은데 그 뒤는 꿈이라 그런지 온통 암흑이었다.
“많이 쌓였나.”
사춘기 이후로 안 꾸던 야한 꿈을 꾼 것도 모자라서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짠돌이라니, 저도 모르는 새에 성욕이 무시무시하게 쌓인 것 같았다. 잠에서 깸과 동시에 수영의 맨살이 보여 식겁할 뻔했으나, 수영이 윗옷을 벗은 것을 빼고는 둘 다 옷이 멀쩡히 입혀져 있는 것을 보고 한시름 놓았다. 아무리 꿈이라도 짠돌이랑 하는 건 아니었다. 간만에 클럽에라도 가야 하나. 진호가 성욕을 풀기 위한 방법들을 떠올리며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뜬 기사들을 주르륵 읽었다.
“어?”
문화면에 나 있는 기사 헤드라인을 읽던 진호가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을 무렵, 등 뒤에 묵직한 물체가 닿았다.
“샬베스타의 개인 사진전?”
수영이 진호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어깨 위에 턱을 걸쳤다.
“다음 주부터 여네요.”
커다란 손이 굳어진 손 위로 겹쳤다. 제 것인 양 핸드폰을 잡고 화면을 키웠다 줄였다 하는 한편, 허리를 감은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뭐, 뭐예요?”
아직 술이 덜 깼나? 평소에 비해 과한 스킨십이라 생각하며 진호가 수영을 밀쳤다. 아무런 타격도 없는 수영은 진호를 세게 안으며 양손에 깍지를 꼈다.
“왜요. 형도 좋으면서.”
“좋기는 무슨.”
하룻밤 사이에 노망이 났나. 갑자기 왜 이런대. 진호가 굳건하게 엮인 두 손을 풀어내려 버둥거리자, 수영이 가소롭다는 듯 깍지를 풀더니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양팔을 안아서 묶어 버렸다.
“어제는 좋다면서요.”
“내가, 언제요?”
등을 죄는 무게에 숨이 막힐 것 같아 들고 있던 컵으로 수영의 팔을 툭툭 쳤다. 그 덕에 느슨해지긴 했지만 어깨는 수영에게 붙잡혀 있었다. 수영이 날개를 파닥거리는 참새를 보듯 설핏한 미소를 그리며 귓가에 입술을 대었다.
“좋다면서 넣어 달라 할 땐 언제고.”
“……뭐?”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네. 발을 구르며 탈출하려고 애쓰던 진호가 동작을 멈췄다. 무슨 짓이냐며 수영을 쏘아보는데, 수영은 제 행동이 뜬금없다는 눈치였다.
“어제 나한테 넣어 달라고 매달렸잖아요.”
“아니, 장난을 쳐도…….”
“장난 아닌데?”
짠돌이가 뻔뻔한 놈이긴 했지만 이렇듯 과한 장난을 치는 편은 아니었다. 전처럼 웃음으로 무마하지 않고 이상하다는 듯 훑는 눈길에 진호가 기억을 되짚었다. 설마 그 꿈이.
“기억 안 나요?”
수영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진호가 풀어진 두 팔 사이에서 벗어날 여념도 없이 버벅댔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고? 망치에 맞은 듯 골이 댕, 하고 울리는 듯했다.
“나,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그 꿈이 현실이었다고 해도 짠돌이에게 넣어 달라며 사정하는 제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제대로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는데, 술을 진탕 마신 상태였다는 게 변수였다.
“와. 형.”
진심으로 부정하는 모습에 수영이 실망한 듯 성큼 멀어졌다. 신기한 외계 생물을 보듯 충격과 공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안 될 사람이네.”
“아니…….”
“기억이 안 난다고요? 그러면 이건 뭔데요?”
수영이 진호의 티셔츠를 잡아 위로 들추었다. 가슴부터 배꼽 아래까지 울긋불긋 피어오른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이게 뭐야. 언제 생긴 거지? 뇌 속이 혼잡해진 진호가 눈알을 도르르 굴리며 항변했다.
“그럴 리가…….”
이 붉은 흔적들은 꿈이라고 여겼던 수영과의 정사가 진실임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만약에 수영과 섹스를 했다면 오랜만이라 뒤가 아팠을 거다. 그토록 큰 것을 넣었다면 더더욱 아침이 고통스러웠을 터인데 저는 멀쩡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동기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왜 너…… 아니, 수영 씨랑 섹스를 해요? 뭐가 좋아서.”
“……할 이유가 없다?”
수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가 아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큰 잘못을 저지른 듯 심장이 콕콕 찔렸다. 수영이 낮게 한숨을 흘리더니 팔짱을 꼈다.
“형은 꼴리면 아무한테나 입술 부비나 봐요?”
“그게 아니라.”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그럴 형이 아닌데.”
수영이 구시렁거리더니 당혹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진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됐어요. 형은 아무런 의미 없이 대신 딸도 쳐 달라고 하는 사람인 걸 깜빡 잊었네요, 내가.”
진호는 할 말을 잃은 채 수영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의 일은 실수였다고 짚어 주고 싶었지만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구태여 수영의 화를 돋워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하고 싶진 않았다.
“형은 말로 해야 알아들을 거 같으니까, 나도 이젠 내 마음대로 하려고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수영이 결연하게 진호의 어깨를 쥐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각오가 느껴지는 압박감이었다. 대체 뭘 하려고. 불길함을 느낀 진호가 한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못했다.
“다음 주 주말에 시간 비워 놔요.”
“왜, 왜요?”
“사진전, 가고 싶을 거 아니에요.”
수영이 진호가 쥐고 있는 핸드폰을 흘긋 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특별히 곤란한 거라도 시킬 것 같았는데 별거 아닌 제안이라 뜻밖이었다. 나 좋은 대로 해도 되나? 진호가 한편으로 의구심을 세웠다.
“그게 다예요?”
“아뇨.”
“그럼요?”
“그때 되면 알게 될 거예요.”
수영이 선전 포고 하듯 의뭉스러운 답을 남긴 채 바깥으로 나섰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진호가 손에 쥐고 있던 보리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들었다.
근데 정말로 내가 저 새끼랑 잤단 말이야?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얼마나 급했으면 짠돌이랑 뒹굴어. 하긴 술에 취한 상태였고, 저 새끼는 몸이 더럽게 좋으니 한 번쯤은 자 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현관을 나서는 판판한 등판을 바라보며 진호가 의문을 접었다. 어딘가 중요한 부분을 놓친 듯한 위화감과 함께.
* * *
“언제까지 그러고 다닐 거예요?”
마케팅 관리 시간. 김 교수가 들어오길 기다리며 진호가 우측에 버티고 앉은 수영에게 면박을 주었다. 수영이 콧등에 걸치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가슴 왼쪽의 포켓에 다리를 걸쳐 넣었다. 단추가 빈틈없이 채워진 빳빳한 재킷 위에서 금테 선글라스가 빛을 받아 반질거렸다.
“글쎄요. 형이 안심될 때까지?”
수영이 책상 아래에 다리를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길쭉한 팔이 뒤로 뻗어지자 주변의 이목이 흘끔흘끔 이쪽으로 닿았다. 진호가 익숙하다는 듯 시선들을 무시하며 공책을 책상 위에 펼쳤다.
뭔가를 다짐한 듯 보였던 수영은 등교할 때마다 정장을 입고 나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물어보니 ‘경호원이면 이 정도는 입어야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언제부터 그런 걸 중시했다고? 학교에 양복을 입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사람들이 되레 수상하게 볼 거 아니냐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런 옷 하나 걸친다고 경호가 더 잘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제 주변에만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걸 보니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워낙 잘 어울려서 이전과 같이 입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색깔과 패턴만 다른 체크 남방에 청바지만 주야장천 입는 것보단 훨씬 나았으니까. 전에 백화점에서 한 벌 사 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진호가 자신의 안목에 감탄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대수롭지 않았고, 가슴 한구석이 든든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곧 다가올 미래를 유념하며 진호가 공책에 의미 없는 낙서를 적었다. 신현우가 정말 올까. 시간이 정각에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초조감에 진호가 볼펜으로 종이 위를 쿡쿡 찔렀다.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김 교수가 앞문을 열고 들어오며 시끌벅적한 강의실을 침묵으로 바꾸었다. 진호의 눈길이 그 너머를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인영이 교수를 따라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신현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해냈다는 건가. 자신만만한 웃음에 진호가 지지 않고 째려보며 응수했다. 짠돌이 덕분인지 다시 봐도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괜찮을 거다. 진호가 마음가짐을 다듬는 사이, 교탁에 서서 출석부를 편 김 교수가 학생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기뻐할 만한 소식이 있습니다. 전에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신현우 군이 우리 학과의 조교가 되었어요. 앞으로 제 수업에 들어와 여러분들의 학업을 돕기로 했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틈틈이 물어보면 좋겠군요.”
교수가 팔을 현우의 앞으로 내밀어 인사를 권했다. 현우가 뒤이어 짤막한 소개를 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교수님께 부탁해 갑작스럽게 조교로 들어오게 됐다, 다음 학기에 대학원에 들어올 예정이다, 뭐든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얘기해라 등등 진호가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줄줄 읊은 현우가 자리에 앉으려는 듯 책상 사이 통로로 걸어왔다.
“여기 앉아도 되지?”
수영의 앞에 선 현우가 생긋 웃으며 옆의 빈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싫…….”
“네. 앉으세요.”
수영이 진호의 말을 가로막으며 차갑게 현우를 주시했다. 싫다고 하려던 진호가 토끼 눈으로 수영을 훑었다. 현우가 기세등등하게 수영의 옆자리에 앉는 사이, 진호가 수영을 팔꿈치로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왜 앉혀요?”
“괜찮아요.”
수영이 안심하라는 듯 진호의 무릎을 두어 번 토닥였다. 무슨 속셈인 거야. 강의실 안이라 소란을 피울 수도 없었던 진호가 하는 수 없이 수영 쪽으로 틀어졌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남는 자리가 제 주변뿐이라 다른 곳에 가서 앉으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다행인 것은 수영이 저를 구석에 앉히는 바람에 신현우 옆자리에 앉는 불상사는 면했다는 점이었다.
“헷갈리는 거 있으면 물어봐.”
현우가 진호에게 친절을 베풀 듯 눈웃음을 지었다. 팔뚝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며 진호가 대꾸하려고 할 때, 수영이 가로막았다.
“네. 조교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영도 마찬가지로 웃는 낯이었지만 말에 뼈가 있었다. 수영과 현우 둘 다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지만 그 틈에서 서늘함을 느낀 진호가 얼른 고개를 수업 중인 김 교수에게 돌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저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다음은 가격 결정의 단계인데…….”
“이해는 잘돼?”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우가 수영의 앞으로 얼굴을 내밀며 진호에게 말을 붙였다. 진호가 일부러 듣지 못한 척하며 하지도 않던 필기를 했다. 하지만 신현우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했다.
“내가 따로 설명해 줄까?”
“교수님.”
둘 사이에 앉아 있던 수영이 난데없이 손을 들어 이목이 쏠렸다. 돌발적인 수영의 행태에 익숙해진 김 교수가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영 학생. 무슨 일이죠?”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수영을 향한 눈초리가 매서웠다. 자신의 수업을 방해한 것에 언짢아진 모양이었다.
“조교님이 설명하고 싶으시대요.”
얜 또 왜 이래? 진호가 수영과 현우를 번갈아 보았다. 수영이 뻔뻔한 미소를 장착하고 있는 것과 달리 현우의 입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평정을 찾으려는 듯 김 교수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현우를 향해 물었다.
“그래. 현우, 네가 설명하려고?”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교수님의 강의에 첨언을 하겠습니까.”
현우가 낭패라는 듯 내려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굽신거렸다. 김 교수는 수영의 짓궂은 장난으로 받아들였는지 체념한 낯으로 엉뚱한 소동을 끝맺었다.
“둘이 잘 아는 사이인가 본데, 강의 시간에 이런 행동은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네. 죄송합니다, 교수님.”
수영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교수에게 사과했다. 진호가 무사히 넘어간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짠돌이가 창피한 짓을 하긴 했지만 제게는 다행이었다. 그 덕에 신현우가 제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으니.
“……?”
강의가 다시 이어지고, 공책에 아이디어를 끄적거리던 중에 눈앞으로 구겨진 종잇조각이 던져졌다. 뭔가 싶어서 펼쳐 보는데 수영이 들고 있던 종이를 가로채 갔다.
[주말에 시간 돼?]
수영이 대신 펼친 쪽지에는 정갈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익히 알고 있던 필체였다. 진호가 저를 향해 눈썹을 까딱이는 현우에게 인상을 구겼다. 시간이 돼도 너 볼 시간은 없어.
[형은 나랑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
수영이 그 밑에 적고 있는 것을 발견한 진호가 빼앗으려 했다. 전시회에 가는 게 무슨 데이트야. 종이를 놔주지 않아 주먹을 잡으니 수영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마치 신현우랑 만날 거냐는 눈빛에 진호가 서서히 손을 놓았다. 그래. 신현우 만나는 거보다 낫긴 하지.
[이 새끼는 웬 반말이지? 너한테 안 물었으니까 좀 닥쳐 봐.]
종이를 가져간 현우가 수영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글씨를 써냈다.
[그따위로 말하는데 존중할 마음이 들겠음?]
수영이 아래에 답을 덧붙이더니 현우에게 내밀었다. 못마땅한 듯 수영을 살벌하게 노려보던 현우가 한창 강의 중인 김 교수를 흘긋 보더니 종이 뒷면에 글씨를 썼다.
[너 나중에 보자.]
[와. 너무 무섭다.]
[지랄하네. 씨발 새끼가.]
[입에서 나오는 게 욕밖에 없음? 나잇값 더럽게 못 하네.]
둘 사이에서 종잇조각이 빠르게 오갔다. 두 명 다 하는 짓이 초딩인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호가 혀를 차며 관심을 거뒀다. 저러다 또 걸리기 전에 발을 빼는 게 상책이었다.
“이 새끼가…….”
참다못한 현우가 욕지거리를 흘렸다. 수영이 한심하다는 듯 현우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들키면 본인한테 불리한 건 알고 계시죠? 조교가 학생에게 협박이라니.”
수영이 종잇조각을 현우 앞에 펼쳐 보이며 흔들었다. 부아가 치미는 듯 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현우가 종잇조각을 빼앗으려 하자, 수영이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현우가 따라서 손을 뒤쪽으로 뻗으니 수영이 진호 앞으로 종잇조각을 던졌다. 코앞으로 다가오는 종이를 진호가 반사적으로 잡았다.
“진호야. 그거 좀.”
현우가 속삭이듯이 말하며 손을 뻗었다. 드물게 현우가 쩔쩔매는 모습에 희열을 느낀 진호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현우가 난감한 듯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응? 어서. 내가 곤란했으면 좋겠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진호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현우의 손에 닿지 않게 종이를 멀리 떨어뜨렸다. 신현우가 애원해도 동정해 주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이거 치우시죠.”
“이젠 셋인가요?”
수영이 현우의 뻗은 팔을 밀어내는데, 책상에 짤막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분노가 끝까지 오른 듯한 김 교수가 세 사람을 훑더니 진호의 손 틈새로 삐져나온 종잇조각을 발견했다.
“그건 뭐죠? 몰래 쪽지라도 돌린 건가요?”
유치한 싸움에는 엮이지 않으려 했는데 곤경에 처한 신현우를 보는 게 즐거워서 동참하다 보니 교수님께 걸리고 말았다. 진호가 아차 싶어 종이 뭉치가 든 손을 말아 쥐었다.
“그게……. 아, 이건요.”
근데 이거, 들키면 신현우한테 안 좋은 거 아닌가? 습관적으로 핑계를 대려던 진호가 냉큼 종이를 김 교수에게 건네려고 하자, 현우가 중간에서 급하게 가로챘다.
“이건 교수님이 보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두 학생에게 미안한 짓을 하고 싶진 않아서요.”
마치 자신은 관계없는 일인 양 말하고 있었다. 진호가 속으로 아쉬워하며 탁월한 변명에 혀를 내둘렀다. 저러다 사기죄로 감방에 들어가야 정신을 차리려나.
“…….”
김 교수가 ‘또 너희냐’라는 눈빛으로 진호와 수영을 훑어보았다. 의도치 않게 자꾸 김 교수의 수업에 훼방을 놓는 것 같아 죄송하면서도 억울했다. 이번엔 맹세코 가만히 있었는데. 제 잘못이라면 이 두 인간 옆에 앉았다가 얼떨결에 쪽지를 받은 죄밖에 없었다. 신현우를 골탕 먹일 좋은 기회다 싶었는데 이렇게 되는구나. 김 교수의 날카로운 눈빛을 바라보던 진호가 하는 수 없이 사과하려고 허리를 숙였다.
“죄송하…….”
“진호 형은 잘못 없습니다. 저랑 조교님 사이의 일이에요.”
수영이 진호의 앞을 저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조교님이 계속 건드렸어도 참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강의에 차질을 빚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수영이 ‘죄송합니다’ 하고 크게 외치더니 김 교수와 학생들을 향해 꾸벅 허리를 굽혔다.
“그래요…….”
수영의 사과를 듣고 화가 누그러진 김 교수가 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영의 언급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교수님. 그게…….”
“됐어. 나중에 연구실에서 얘기하지.”
김 교수가 현우의 말을 자르며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진호가 안도의 숨을 내쉬던 찰나, 김 교수의 날카로운 눈빛이 셋을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태도 점수에서 10점씩 깎을 겁니다. 셋 다 멀찍이 떨어뜨려서 앉힐 수도 있어요.”
“넵.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수영이 즉시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수영을 따라 허리를 숙이는 진호와 달리, 현우는 허리를 대충 굽히면서도 수영을 노려보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일이 커진 것이 몹시 불쾌한 듯했다.
“그리고.”
김 교수가 말을 덧붙이며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
“수영 학생이랑 진호 학생. 두 사람은 수업을 방해해 여러 학생에게 폐를 끼친 벌로 발표를 맡아서 하도록 하세요. 한 기업을 골라, 마케팅 측면에서 그 기업의 현황과 문제점을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겁니다. 마침 예시를 찾아야 했는데 잘됐네요.”
신현우는 조교란 이유로 혼자 쏙 빠지는 건가? 진호가 억울함에 현우를 노려보았다. 신현우랑 같이 발표하는 것보단 낫지만, 이 수업은 발표가 없어서 들은 건데. 발표라면 극도로 싫어하는 진호가 울상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순응했다. 수영이 옆에서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발표는 2주 후 수업에서 할 테니까 그때까지 준비 잘하세요. 현우, 너는 조교니까 두 사람 발표를 도와주도록 하고.”
“네.”
홀로 승리의 기쁨에 젖어 있던 현우가 표정을 굳혔다.
“도중에 세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제대로 참여 안 하는 사람이 나오면……. 말 안 해도 알겠죠?”
김 교수가 웃으며 무언의 압박을 했다. 세 사람 모두 여지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최대한 신현우랑은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신은 그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릴 계획인 듯했다.
그 뒤에 사진의 세계 수업이 있어 다행이었다. 박 교수의 강의에 집중하며 막혀 있던 숨통을 튼 진호는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수영과 함께 현관문으로 들어서는데, 메신저 앱으로 연락이 왔다.
[발표 주제 정하면 알려 줘.^^]
진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조교라서 번호를 쉽게 알아냈나? 신현우에게 잠수 이별을 당한 뒤로 핸드폰 번호를 바꿔서 연락을 못 할 줄 알았는데 직위를 이용해 바뀐 번호를 찾아낸 듯했다.
“신현우예요?”
제자리에 멈춰 선 진호를 보고 상대를 유추한 수영이 핸드폰을 빼앗아갔다.
“끈질기네. 그렇게까지 했는데.”
글을 보는 수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김 교수의 수업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일을 키워야 수치심을 느낀 신현우가 형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직접 연락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에 대한 대책도 강구하던 차였는데 그때가 지금일 줄은 몰랐다. 형이 보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수영이 미처 대처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대신 답변을 썼다.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마시죠. 프로필은 차단합니다.]
메시지를 보낸 수영이 현우를 앱에서 차단한 뒤, 채팅방에서 나가기를 눌렀다. 수영에게서 핸드폰을 돌려받은 진호가 채팅 목록에서 현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차단하면 발표는 어떡해요? 교수님이 셋 다 참여하라고 하셨잖아요. 대화는 해야 할 텐데.”
“형이 안 괜찮잖아요.”
수영이 좁아진 진호의 미간을 엄지로 살살 문질러 폈다. 진호가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눈썹 위를 매만졌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심하게 구기고 있었나 보다.
“……그건 맞는데요. 교수님한테는 뭐라고 말씀드리려고요?”
“형이랑 상의한 걸 내가 신현우한테 얘기하면 되죠. 그러면 셋 다 참여한 거잖아요?”
아하. 그런 방법이. 뜻밖의 쉬운 해답에 진호가 이마의 주름을 펴는가 싶더니 다시 좁혔다. 짠돌이랑 신현우 사이에 원만한 대화가 가능할까? 둘이 박 터지게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저야 모르는 척 발 빼면서 관전해도 된다지만 짠돌이는 신현우의 시비를 계속 받아 내야 하는 처지였다. 둘이 수업 시간에 투덕거리는 꼴만 봐도 신현우가 얼마나 쑤셔 댈지 눈에 훤했다.
“근데 그렇게 되면…….”
“내가 알아서 해요.”
진호의 근심을 수영이 단숨에 일축했다. 이 자식은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수영을 정면으로 바라보던 진호가 시선을 그 너머로 돌렸다. 옥탑방 구석에 쌓여 있던 택배 상자가 사라졌다. 알아서 처분한다더니 주인에게 돌려준 건가.
“정말 괜찮아요?”
택배를 돌려주는 일은 알아서 한다고 해도 딱히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제가 아닌 수영의 집으로 온 물건이므로 수영이 원하는 대로 처리하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신현우와의 문제는 제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수영이 대신하도록 맡기는 것은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안 괜찮으면, 뭐라도 해 줄래요?”
수영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며 진호의 등을 밀었다. 수영의 힘으로 현관 안까지 들어선 진호가 진지하게 응했다.
“네. 원하는 거 하나 정도는.”
“어?”
의외의 반응에 수영이 신발을 벗던 것을 멈추고 진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내 눈가가 둥글게 휘어졌다.
“에이. 뭐 이런 거로.”
“기회는 한 번밖에 없을 텐데.”
“내가 뭘 해 달라고 할 줄 알고 그래요?”
수영이 답답했는지 정장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옷자락을 뒤로 훌렁 벗기며 천연덕스럽게 진호를 아래위로 훑었다.
“뭘 원하는데요?”
순간 긴장한 진호가 머뭇거리며 수영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음…….”
수영이 부러 뜸을 길게 들이더니 뻣뻣하게 현관에 선 진호를 보고 픽 웃었다.
“이번 주말엔 내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 줘요.”
주말에 대체 뭘 하는데? 범상치 않은 기세에 진호가 무거운 머리를 어렵게 끄덕였다. 일단 말을 뱉었으니 수락은 했는데 찜찜했다. 반면 수영은 흡족한 듯 웃으며 장롱 문을 열고 벗은 재킷을 옷걸이에 걸었다.
“입을 옷 구해 놨으니까 여기서 꺼내 입어요.”
수영이 장롱 서랍을 열자 새것 같아 보이는 옷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맞지도 않는 수영의 옷을 매번 빌리기도 미안해서 제 옷이 두세 벌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걸 새겨들었다가 구해 온 모양이었다. 브랜드도 언뜻 보이는 걸 보니 수영이 고심해서 가져온 것 같았다. 짠돌이치고 고른 옷 스타일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벗었다. 수영의 의미심장한 요구에 썩 달갑지 않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그럴게요.”
사람이 양심이란 게 있는데 짠돌이라고 괴상망측한 걸 시키지는 않겠지. 진호가 불길함을 떨치며 튀어 오르는 후회를 저 멀리 밀어냈다.
* * *
괴상망측한 건 아닌데. 아니, 망측 정도는 되려나? 진호가 집 앞에 세워진 차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타요.”
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선글라스를 낀 수영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 포르쉐를 대체 어디서 구했대? 진호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수영을 훑어보자, 수영이 차에서 나와 조수석 앞으로 걸어왔다.
“타시죠. 진호 도련님.”
직접 차 문을 연 수영이 보닛 옆에 기대어 서서 정중하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듯 곧게 펴진 손바닥을 보는 진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졌다. 제 장단에 맞춰 주길 바라는 건가? 전시회에 갈 거라고 해서 옥탑에서 내려왔더니 뜬금없는 콘셉트를 잡아서 난감했다.
“뭘 그렇게 봐요. 반했어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리며 웃는 수영이 지나치게 수상했다. 인제 보니 머리도 미용실에 다녀온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정장도 전에 입고 다닌 것보다 좋은 것으로 새롭게 맞춘 듯했다.
“아. 평소랑 다르죠? 강 사장님한테 부탁해서 빌렸어요.”
칼라의 매무새를 반듯하게 정리한 수영이 자랑스러운 듯 새까만 보닛 위를 쓰다듬었다. 이 비싼 걸 빌렸다고? 게다가 옷은 무슨 이유로 차려입은 거지?
“굳이 왜요?”
“형 꼬시려고요.”
“뭔…….”
그동안 대충 넘어가 줬더니 농담의 수위가 갈수록 심해지네. 질색한 진호를 보고 수영이 재미있는 듯 웃더니 기대었던 허리를 세우며 바르게 섰다.
“오늘 데이트잖아요.”
전에 쪽지로 신현우에게 말한 게 진심이었어? 진호가 수영을 향해 눈을 둥그렇게 키웠다. 사태를 모면하기 위한 변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진심으로 데이트라 생각해서 이런 걸 준비한 모양이었다.
“벌써 놀라면 나중엔 어떡하려고.”
여기서 뭐가 더 있다는 거야? 수영이 의심을 거두지 못한 진호의 팔을 당겨 조수석에 앉혔다. 진호가 좌석에 제대로 앉은 걸 확인한 수영이 벨트를 매 주더니 문을 닫았다.
“약속은 잊지 않으셨겠죠? 제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 주셔야 합니다. 도련님.”
수영이 액셀을 밟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며 다짐할 때부터 이리될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진호가 뒤늦게 머리를 싸맸다. 짠돌이의 양심을 믿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 사장의 애마는 도로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유명 사진작가의 개인전이라 첫날부터 대기 줄이 길었다. 수영이 구매해 놓은 티켓을 받은 뒤 전시실 안으로 들어선 진호가 오는 내내 얼어 있던 인상을 비로소 폈다. 이게 얼마 만에 오는 사진전인지. 사진작가가 되길 원치 않았던 아버지 때문에 마음 놓고 전시를 관람할 기회가 적었다. 자취 이후에는 자주 전시회에 방문했었지만, 샬베스타의 사진전은 한국에서 무척 오랜만에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기대에 부풀었다.
이번 샬베스타 개인전에서는 그의 초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주제별로 묶어 전시했다. 미술관 전체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개수라는 해설을 홈페이지에서 읽었다며 수영이 알려 주었다. 진호가 ‘자연’이라고 벽면에 크게 적힌 글자를 읽으며 액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계 곳곳의 자연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차례로 눈앞에 펼쳐졌다. 알프스의 하얀 설원, 따사로운 지중해의 햇빛, 웅장한 한국의 산등성이까지.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동감에 진호가 감탄사를 남발하며 홀린 듯이 발을 옮겼다.
“그러다 빨려 들어가겠어요.”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던 수영이 입을 벌린 채 작품을 뜯어보고 있던 진호에게 면박을 주었다. 잘 감상하고 있었는데. 진호가 그림 같은 풍경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수영을 추궁하듯 째려보자, 수영이 진호를 하얀 보호선 뒤로 당겼다.
“진짜 들어갈까 봐 진심으로 걱정돼서.”
이게 놀리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진호가 뻔뻔한 낯짝에 눈을 흘기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작품 감상 안 해요?”
“충분히 하고 있는데요.”
충분히는 무슨. 아까부터 나만 계속 쳐다보는 걸 모를 줄 알았나? 어찌나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뒤통수가 따끔거려서 모른 체하기도 힘들었다. 괜스레 얼얼한 듯한 뒷머리를 문지르며 진호가 앞의 전시실로 발을 들였다. 이 많은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수영의 설명대로 이번 개인전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잡지나 인터넷에서 봤던 것들도 있어서 반갑기도 했다. 층을 오르며 주제별로 전시실을 훑어본 진호가 어느 이름 없는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특별 전시실인지 다른 전시실과는 달리 어두운 조명에 붉은 벨벳 커튼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두꺼운 커튼 자락을 거두며 진호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곧 저녁이 다가와서인지 전시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긴 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들을 모아 둔 공간이래요.”
수영이 여기저기 둘러보는 진호의 뒤통수를 향해 설명을 이었다. 과연 작가의 내밀한 부분을 모아 둔 듯한 추상적인 느낌의 사진이 많았다. 한쪽 벽면은 아예 남성 모델들의 나체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기엔 민망해서 그 앞을 지나쳐 가자 수영이 멈춰 세우며 나체 사진을 향해 턱짓했다.
“그거 알아요? 이 작가,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예술계에서 유명하대요.”
오랜 기간 샬베스타의 팬이었던 터라 사생활이 난잡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설명은 필요 없다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는데, 수영은 그만두지 않았다.
“여기 걸린 사진의 모델이 전부 사귀었던 남자들이라던데, 마음에 들면 아무나하고 자는 스타일인가 봐요. 어디의 누구처럼.”
수영이 ‘어디의 누구’를 강조하며 저를 향해 빙글빙글 웃자 진호가 눈가를 좁혔다. 왜 이런 얘기를 꺼내나 했더니 저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이 사람은 누구랑 다르게 먼저 유혹해 놓고 잊어버리진 않겠죠? 상식적이라면 그러면 안 되지. 그렇죠?”
“그, 그래요?”
비꼬는 듯한 수영의 발언에 뜨끔해진 진호가 헛기침하며 모른 척 앞서 걸었다. 내 의지랑 상관없이 필름이 끊겨 버린 걸 어떡하란 말이야. 목을 뻣뻣이 세운 채 기계적으로 걷는 진호를 바라보는 수영의 눈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지난주 얘긴 갑자기 왜 꺼내서.”
진호가 투덜대며 전시장 안으로 길게 난 안내선을 따라 걸었다. 몇 걸음 걷다 막다른 벽에 다다른 진호가 바닥을 보던 시야를 위로 높였다.
“이건…….”
벽에 커다랗게 걸린 사진을 보던 진호가 입을 크게 벌렸다.
흑백의 사진 속에서 온몸을 검게 그을린 소방관이 건물을 나오고 있었다. 도망치는 사람, 불길을 잡는 사람, 발만 구르며 지켜보고 있는 사람. 그 긴박한 현장에서 소방관이 소중히 안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갓난아기였다.
이 사진이 왜 여기에.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품어 왔던, 그러나 잊고 있었던 해묵은 그리움이 뭉클하게 피어올랐다. 진호는 뜻하지 않은 어린 시절과의 조우에 넋을 잃고 익숙한 장면을 눈에 담았다. 진호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우뚝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 뒤에서 지켜보던 수영이 앞으로 다가왔다.
“아름답네요.”
역설적이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치열한 광경을 바라보는 담담한 카메라의 시선은 안타깝고, 끔찍한 것만을 담고 있지 않았다. 눈을 감은 평온한 새 생명이 아직 끝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소방관의 투지가 살려 낸 것은 이 작은 핏덩이뿐이었고, 그것이 애달프도록 아름다웠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랑 같이 어느 사진전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이 작품을 보고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어린 나이에 어렴풋이 느꼈던 감동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세밀하고 진한 여운으로 다가왔다. 진호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수영이 물었다.
“다시 보니 어때요?”
진호가 뜸을 들이며 적합한 말을 골랐다. 이 복잡한 심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그립기도 하고, 따스하면서도 어쩐지 먹먹한 기분을.
“사진이…… 하고 싶어요.”
여러 감상이 스쳐 지났지만 실은 어떠한 수식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드는 생각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진심으로 하고 싶어요.”
지금껏 제가 바라 왔던 게 막연한 꿈이었다면 이제는 선명한 현실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AE의 후계자라는 이름과 아버지의 반대에 가려져서, 잘할 수 있을지 묘연했던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망설였던 것이 흑과 백처럼 명확해졌다.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사진작가로 성공하고 싶었다. 단순히 사진이 좋은 걸 넘어서서 그것이 되고 싶었다.
“형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수영이 새로운 설렘으로 빛을 내는 진호의 까만 눈동자를 보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곁에서 도울게요.”
전이라면 네 도움 따윈 필요 없다며 밀어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겼기에, 수영이 실질적인 무언가를 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잘해 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돕는 거예요.”
진호가 수영의 옆구리를 찌르며 괜한 심술을 부렸다. 수영이 ‘아!’ 하고 과장된 반응을 보이며 멀리 떨어졌다. 진호가 아픈 척 허리를 움켜쥐는 수영을 보며 꼴좋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왜 자꾸 시답잖은 장난을 쳐선.
“너무해. 이게 재미있어요? 아파하는 게?”
“네. 재미있네요. 진작에 이럴걸.”
“와. 이 형 인성 보소.”
수영이 구겨졌던 재킷을 바르게 펴더니 마냥 즐거운 듯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를 쳐다보고만 있자 민망해진 진호가 말을 툭 던졌다.
“뭐, 왜요.”
“방금 나한테 장난친 거 알아요?”
“장난 아닌데요? 진심인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감격한 수영이 눈물을 닦는 것처럼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장난 아니라니까? 기가 막혀서 혀를 차는 진호에게 수영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래도 이왕 때릴 거면 앞으로는 여기 때려 줘요.”
제 입술을 가리키는 손짓에 진호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역시나 짠돌이와는 말이 안 통한다. 앞머리를 깔끔하게 넘겨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를 손끝으로 밀어낸 진호가 휘장을 걷고 전시실 밖을 나섰다. 뒤에서 수영이 ‘같이 가요!’를 연발하며 뒤따랐다. 저런 놈을 어떻게 이겨. 진호가 한숨을 쉬며 로비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형. 거기 서 봐요!”
로비로 나와 출구로 향하는 진호를 수영이 불러 세웠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무시하고 직진하려는데, 따라오던 수영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웬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수영이 금발의 외국인 여성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영어로 간단하게 몇 마디를 나누던 수영이 여자에게 제 핸드폰을 건넸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진호가 다가가자, 수영이 로비 뒤쪽의 구석을 가리키며 진호의 팔을 이끌었다.
“우리 저기서 사진 찍어요.”
수영이 가리킨 벽에는 샬베스타의 유명작을 배경으로 포토 존이 형성되어 있었다.
“저기 배경으로 인증 샷 찍으면 선착순으로 미술관 배지를 준대요. 관심 없어요?”
“없는데요.”
“냉정하긴. 그래도 찍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멀뚱히 서 있는 외국인에게 손을 들어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한 수영이 진호를 포토 존 중앙으로 데려갔다. 외국인이랑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한 거였구먼. 진호가 어쩔 수 없이 버티던 팔을 놓고 수영이 말한 포토 존 앞에 나란히 섰다. 수영이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한 건 저였으므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Okay, I’ll take a picture at the count of three! (좋아요. 하나, 둘, 셋, 하면 찍을게요!)”
여자가 멀리서 무릎을 굽히며 구도를 잡았다. 수영이 정면을 향하며 진호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왜 굳어 있어요.”
너랑 붙어 있는 게 좋을 리가. 진호가 묵묵히 반짝이는 렌즈를 응시했다.
“하……!”
수영이 돌연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넣더니 손끝으로 눌러 간지럽혔다. 진호가 반사적으로 고꾸라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찰칵, 하는 소리가 나며 사진이 찍혔다. 깜빡이 좀 넣고 들어오지. 심장 떨어지게. 진호가 굽혀진 상체를 바로 세우며 말없이 수영을 노려보자, 수영이 없었던 일인 양 눈길을 피하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Did the picture come out well? (잘 찍혔어요?)”
“Would you like to check it for yourself? (직접 확인해 보실래요?)”
여자가 내민 핸드폰 화면 속에서는 박장대소하기 직전인 진호가 모든 안면 근육을 끌어모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옆의 수영이 여유롭게 입꼬리만 슬쩍 올리고 있는 것을 본 진호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반면 수영은 아주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리며 화면 위를 더듬었다. 여자가 기뻐하며 엄지를 올렸다.
“Both of you look great. This is the pic of the day! (두 분 다 멋있게 잘 나오셨어요. 인생 샷이네요!)”
호들갑을 떠는 여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수영이 SNS에 사진을 올렸다. 진호가 우스꽝스러운 제 모습이 보기 싫어 수영의 핸드폰을 가로채려 했다.
“이거 지워요.”
“좋은데 왜요?”
“나만 못생기게 나왔잖아요.”
“아녜요. 형 역대급으로 잘 나왔는데. 봐요. 웃으니까 딴사람 같잖아요.”
수영이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진호의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 주었다. 진호가 마땅찮은 듯 사진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내 눈에는 그냥 멍청해 보이는데?
“싫으면 올린 건 삭제하고 내 폰에만 저장해 둘게요.”
그게 더 불안한데. 손을 뻗던 진호가 멈칫하더니 수영을 따라 데스크로 향했다. 그래도 잠자코 따라 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배지 드리겠습니다.”
SNS에 올린 인증 샷을 본 직원이 배지 두 개를 수영에게 건넸다. 하나를 눈앞에 보여 주며 수영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디자인이 괜찮은데요?”
하얗고 동그란 에나멜 테두리 안에 금속으로 고급스럽게 미술관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퀄리티가 좋은데? 군인 배지처럼 생긴 그것을 진호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수영이 제 옷에 배지를 달더니 진호의 재킷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까이 와 봐요. 달아 줄게요.”
샬베스타의 전시회를 다녀온 기념으로 이런 것 정도는 받아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기에 얌전히 있었다. 마개 부분을 뽑아 핀을 왼쪽 가슴에 꽃은 수영이 손끝으로 더듬어 제대로 고정됐는지 확인했다.
“우리의 첫 데이트 기념.”
진호에게서 손을 뗀 수영이 똑같은 배지가 달린 제 가슴을 툭 쳤다. 데이트든 뭐든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진호가 수영의 손이 닿았던 자리를 매만졌다. 어쩐지 쉽게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따라와요. 다음 코스로 모실게요.”
수영이 호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며 앞장섰다. 제 앞을 가리는 커다란 어깨가 더없이 든든해 보였다. 저렇게 작정하고 꾸미니까 뭔가 달라 보이긴 하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진호가 그 뒤를 따랐다.
수영이 다음으로 데려다준 곳은 호텔의 최상층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으리으리한 샹들리에가 천장 곳곳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홀 안으로 들어가 구석 자리에 앉은 수영은 두 사람분의 정찬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애피타이저에서부터 메인 요리까지 차례로 들어오는 수많은 접시를 보며 진호가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이렇게 비싼 거 사도 돼요?”
저는 자주 보던 메뉴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짠돌이인 수영에게는 굉장히 부담되는 가격일 터였다. 포르쉐에 비싼 양복까지 준비한 데다 고급 요리까지 추가하면 짠돌이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인데. 이러다 가산 다 거덜 나면 어쩌려고. 몇 시간 뒤면 돌아갈 작은 옥탑방을 떠올리며 진호가 웨이터를 부르는 수영의 손을 저지했다.
“이걸로도 충분한 거 같은데요.”
“그러게 놀라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이 정도까진…….”
“단단히 결심했거든요. 이만큼은 해야죠.”
수영이 진호의 팔을 잡아 내리며 다시 웨이터를 향해 손을 들었다. 멀리서 웨이터가 수영의 신호를 보고 다가왔다. 돈 함부로 썼다고 수갑까지 채웠던 애가 이러는 이유가 뭐야? 수영이 정신이 이상해진 건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한 진호가 재차 물었다.
“뭘 결심했는데요?”
“형. 와인 같은 거 마실래요? 아니면 샴페인?”
“말 돌리지…….”
“네, 고객님.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진호가 타박하려던 찰나, 웨이터가 공손히 손을 모으며 테이블 앞에 섰다.
“아뇨. 괜찮아요.”
진호가 웨이터를 보내려고 하자, 수영이 막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돔 페리뇽 로제 있어요?”
있다는 웨이터의 대답에 수영이 하나를 주문했다. 진호가 고개를 저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난 몰라요, 이제. 돈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요.”
정수리에 열이 올라 생수를 벌컥 들이켜자, 수영이 흐뭇한 듯 테이블 위에 턱을 괴며 진호를 바라보았다.
“형이 내 지갑 사정까지 걱정해 주니까 기쁜데요. 돈 쓴 보람이 있네요.”
너 그러다 거지 된다고. 정신 차려. 진호가 심각성을 느끼며 제정신이 아닌 듯한 수영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수영이 그 손을 잡아채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비싼 술 사 주는 사람 좋지 않아요?”
“좋긴 한데…….”
“맛있는 거 사 주는 사람은요?”
“그것도 좋긴 한데…….”
진호가 수영의 손안에 갇힌 제 주먹을 꼼지락거렸다. 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비싼 술도 사 주고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좋아하는 전시회도 데려가는 사람은요?”
“그것도…….”
좋긴 좋은데 하필이면 그 사람이 짠돌이라서 문제인 거다. 요즘 물러졌다고는 하지만 돈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 슈퍼 짠돌이 남수영이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뭘 각오했기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혼란스러워진 진호가 머뭇거리자, 수영이 감싸고 있던 주먹을 펴서 맞쥐었다.
“그럼 내가 왜 이러는지 알 텐데요?”
뭔데. 뭐야. 왜 이러는데. 진호의 심박수가 빨라졌다. 저를 보는 눈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너무 따뜻해서 가슴속에 얼음처럼 박혀 있던 무언가가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보는데? 그런 눈으로, 네가 왜……?
“고객님. 주문하신 돔 페리뇽 로제 드리겠습니다.”
아까 불렀던 웨이터가 까만색 병을 든 채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수영이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쥐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잡혔던 곳이 불에라도 덴 듯이 화끈거렸다. 진호가 멋대로 펼쳐진 손바닥을 어찌할 줄 모르고 멍하니 내려다봤다.
쪼르르-
마개를 따서 두 사람 앞의 유리잔에 샴페인을 따른 웨이터가 허리를 굽히더니 유유히 떠났다. 수영이 투명한 핑크빛으로 찰랑대는 잔을 들어 진호 앞에 내밀었다.
“건배해야죠.”
“아, 네.”
넋이 나가 있던 진호가 한 박자 늦게 잔을 쥐었다. 곧 챙,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수영이 한 모금을 머금어 맛을 음미했다.
“바에서 일할 땐 비싼 술 시키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됐는데, 확실히 다르긴 하네요. 근데 형 아니면 다신 안 마실 거 같아요.”
“…….”
“안 마셔요?”
“마셔야죠.”
수영을 보고 있던 진호가 황급히 잔을 들어 짧게 입 안을 적셨다. 이제 조금 짠돌이다워서 다행이긴 하나…….
“그거 마시고 또 기억 잃는 거 아닌지 몰라.”
수영이 진호 앞의 스테이크를 썰어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엉겁결에 고기를 받아먹은 진호가 씹는 것도 잊은 채 멀쩡한 눈을 비볐다. 시원찮은 농담도, 은근히 챙겨 주는 행동도, 제가 아는 짠돌이랑 다를 게 없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옷을 꾸며 입고, 돈을 펑펑 쓴다는 것 외에 알맹이는 달라진 게 없는데, 어쩐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그래서 평소라면 대차게 받아쳤을 장난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오늘은 많이 마시면 안 돼요. 이거 먹고 방에서 해야 할 게 남았거든요.”
“방이요?”
“아, 내가 말 안 했나? 여기 스위트룸 잡아 놨어요.”
“푸흡.”
샴페인을 들이켜던 진호가 입 안에 담았던 술을 잔에 그대로 뱉어 냈다. 각오했다는 게 이런 뜻일 줄은 몰랐다.
“스위트룸이요? 이 밤에? 우리 둘이?”
“네.”
수영이 앞에 있던 냅킨을 건네자 진호가 다급히 낚아채어 제 입가를 닦았다.
“왜요?”
“왜긴요. 호텔에서 할 게 하나밖에 더 있어요?”
진호가 입을 벌린 채 태연한 수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설마.
“이번에도 내 말 따라 줄 거죠?”
차갑게 얼어붙은 진호를 보고 씩 웃은 수영이 제 몫의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진호의 머릿속이 혼돈으로 가득 찼다.
* * *
밥을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수영이 내미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음식을 씹다 보니 접시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분명 배부르게 여러 가지를 집어 먹었는데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형 먼저 씻어요.”
카드 키를 꽂고 방 안에 들어선 수영이 창가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제가 호텔방 안에 들어왔단 사실을 인지한 진호가 외투를 여몄다. 진호가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뻣뻣하게 서 있자, 수영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 있던 허리를 세웠다.
“안 씻어요?”
“그게…….”
“아니면 전처럼 같이 들어가요?”
“아, 아뇨. 혼자 씻을게요!”
수영이 일어나며 재킷을 벗으려고 하자 고민하던 진호가 헐레벌떡 욕실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욕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잠금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히 불편한가 보네. 수영이 자그맣게 혼잣말을 읊조리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씨. 어쩌지.”
욕실 안에 들어온 진호는 세면대를 붙잡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뇌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꾀를 내 봐도 이렇다 할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약속을 깨고 도망치자니 갈 곳이 짠돌이네밖에 없었고, 그대로 짠돌이 말에 따르자니 영락없이 제 몸을 내어 주는 꼴이었다.
자는 것만은 싫다고 거절해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겠지. 단단히 결심했다고 했으니 제가 원하는 대로 수영이 넘어가 줄 리가 없었다. 눈 딱 감고 해야 할까? 진호가 거울 속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이미 해 버린 거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또 못 할 건 없었다. 그리고 몸만 섞는 거라면 괜찮을 거 같았다. 짠돌이는 겉만 보면 눈요기로 충분했으니까, 육체만 취하고 끝내도 손해는 아니었다. 같은 사람과 한 번 이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철칙이 깨진다는 게 큰 골칫거리지만.
“어떡하지.”
짙은 한숨을 흘려보낸 진호가 제 뺨을 양 손바닥으로 찰싹 쳤다. 상대는 남수영이다. 얼렁뚱땅 넘어간다고 해서 포기할 상대가 아니었다. 거절하거나 피했다간 거기서 끝나지 않고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방법으로 보복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강하게 나가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는 게 현명한 판단인 듯싶었다. 오늘 밤에 아주 진이 빠지도록 해 놓으면 다신 망측한 요구를 하지 않겠지. 저도 경험은 많았기에 밤일에 있어서만큼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괴롭혀 줄 것이라 다짐하며 진호가 외투를 벗었다.
전투적으로 샤워를 끝낸 진호는 욕실 안에 붙은 파우더 룸에서 가운을 꺼내 입었다. 드라이기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깔끔하게 정리까지 마친 진호가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얼른 씻…….”
수영이 앉아 있던 소파 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는데 사위가 깜깜했다.
“불은 왜 꺼 놨어요?”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건 적막뿐이었다. 설마 벌써 자고 있나? 뒤에서 비치는 욕실 조명에 의지해 침실로 발을 옮긴 진호가 황량한 매트리스 위를 보고는 응접실로 발길을 돌렸다. 잠깐 외출이라도 한 듯했다.
“나 여기 있어요.”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진호가 움칠 어깨를 떨며 뒤돌았다.
“뭐, 뭐예요? 갑자기.”
수영이 응접실 중앙의 테이블 위에 향초 하나를 덜렁 켜 놓고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새로운 장난인가. 진호가 경계심을 풀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분위기 띄울 겸 켜 봤어요. 형이 좋아하는 향으로.”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은은하게 코끝에 스며들었다. 내가 이런 향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그보다 이런 것까지 준비할 정도로 본격적이라고? 진호가 욕실에서 한 다짐을 굳히며 어색하게 웃음으로 받아쳤다.
“분위기까지 챙겨 줄 필요는 없는데, 하하.”
“저한텐 지금이 아주 중요하거든요.”
수영이 뒷짐을 지며 서서히 진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섹스를 이렇게 심각한 사건처럼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서서히 저미는 긴장감에 진호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윽.”
뒤를 보지 못해 발이 소파에 걸린 진호가 휘청거리자 수영이 기울어지는 허리를 한 손으로 받쳤다. 얼결에 수영에게 안긴 진호가 부쩍 가까워진 얼굴을 빤히 올려다봤다. 이 새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잘생겼지?
“형.”
“네, 네?”
“조심해요.”
수영이 허리를 바로 세워 주며 손을 뒤로 뺐다. 약간의 허전함을 느끼며 진호가 엉거주춤 소파를 붙잡고 섰다. 키스라도 하는 줄 알았네.
“나랑 데이트해 보니까 어때요? 괜찮았어요?”
수영이 진호와 거리를 둔 채 조용히 물었다. 뭐지. 이것도 분위기 띄우는 용인가? 대충 어울려 주자는 뜻으로 진호가 수긍했다.
“나쁘지 않았어요.”
실제로 퍽 괜찮기도 했고. 바라던 대로 전시회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었으니 오히려 제겐 좋은 축에 속했다.
“형 꼬셔 보겠다고 노력하긴 했는데 잘됐는지는 모르겠네요.”
수영이 머쓱한지 콧등을 긁적였다. 덩달아 어색해진 진호가 초조한 듯 팔을 쓸었다. 장난이라기엔 진지했고, 심각하다기엔 풋풋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저 섹스 한번 하자는 셈치고는 지극히……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은은한 촛불을 받아 일렁이는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뭐, 안 넘어왔으면 어쩔 수 없지만.”
소파를 뒤로 짚은 채 멀뚱히 서 있는 진호를 보고 빙긋 웃은 수영이 잠시 뜸을 들였다. 진호의 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형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웃음을 지운 수영이 표정 하나 없는 낯으로 진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늘 생글거리고 있거나 장난치거나 둘 중 하나였기에 이렇듯 엄중한 눈 맞춤은 처음이었다. 찰나의 침묵이 영원처럼 늘어졌다.
“형.”
수영은 진호를 불러 놓고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엇을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고, 정해진 말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진호에게 어떤 직감이 스몄다.
이건 섹슈얼한 유혹이 아니었다. 잔다고 해서 해결될 만한 것도, 짓궂은 장난으로 받아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제 마음이 전부였던 스무 살의 자신이 겹쳐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쩐지 뒤에 올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설마 그건 아니겠지. 진호가 제 손에 잡히는 소파 가죽을 세게 쥐었다. 닥쳐올 일에 대한 두려움인지 기대인지 모를 감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좋아해요.”
수영이 등 뒤에서 꽃다발을 꺼내더니 진호 앞에 내밀었다.
“…….”
하하, 농담이 많이 지나치네. 웃음으로 무마하려던 진호가 진지한 수영의 태도에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그 속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진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담담하게 저를 바라보는 옅은 눈동자뿐이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진호의 눈빛을 읽은 수영이 내민 꽃다발을 품 안에 턱 안겼다.
“좋아한다고요. 형을.”
“…….”
“아직 모르겠어요? 나, 남수영이 형, 서진호를 좋…….”
“아, 알겠다고요.”
진호가 말을 가로채며 제 가슴에 닿은 꽃다발을 쥐었다. 수영이 그제야 입가에 호를 그렸다.
“잘 모르는 거 같아서.”
“충분히 알아들었거든요.”
수영을 향해 눈꼬리를 치켜들던 진호가 그윽한 향을 풍기고 있는 붉은 장미꽃 송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홧김에 알겠다고 했지만 믿기지 않았다. 짠돌이가 날 좋아한다니. 저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남수영이. 그간 수영이 한 짓을 되돌아보면 도저히 좋아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로 좋아한다면 괴상한 장난으로 괴롭히지도, 싫증 내는 제 반응이 재밌다는 듯 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제 상식으론 그랬다.
“근데 정말 맞아요? 나 좋아하는 거.”
혹시 착각은 아닐까. 민망해진 진호가 귓가를 살짝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수영이 제 눈을 홀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농담으로 들려요? 그럼 다시.”
“아, 알겠어요.”
수영이 입 앞에 주먹을 대며 목청을 가다듬으려 하기에 급히 말렸다. 부탁이니 제발 저 입에서 더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안 나왔으면 했다. 수영이 입을 닫자 안도한 진호가 찬찬히 수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 예감이 맞았다. 그간 외면했던 저 눈빛에는 저를 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첫사랑의 행복감에 빠져서 설레던 자신과 닮은. 저는 수영의 다정한 눈에서 그 마음을 읽었음에도 애써 아니라며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수영이 저를 좋아한다는 건 아주 잘 알겠는데, 뜻밖에 마주하게 된 엄청난 난관에 진호가 당황하며 포장지 겉면을 매만졌다.
“그, 나는…….”
복잡하게 엉키는 생각을 어떻게 말로 꺼내야 할지 망설이자 수영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하던 진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누군가와 연애할 마음이 없어요.”
신현우에게 배신당한 뒤로 소중한 누군가를 만드는 것이 겁났다. 이따금 외로움에 사무칠 때면 간절히 애인을 바란 적도 있지만, 막상 사람을 만나면 가까워지기 힘들었다. 단순히 성욕만 해결해도 외로움은 어느 정도 덜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살았다. 수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수영 씨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슬그머니 수영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인지 수영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짠돌이는 객관적으로 봐도 매력적이고, 솔직히, 아주 가끔은 끌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연애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사귀고 싶을 정도로 강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형 동생 사이를 유지해도 좋았다.
“받아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에 거절했다. 거부당한 것에 대한 아픔은 잠시일 것이다. 잠깐의 악역이 되는 게 두려워서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면 그 고통은 영원할 수도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심정은 상대를 3년간 짝사랑한 것이나 다름없는 연애를 했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애인이란 껍데기를 취한 신현우와 똑같은 사람이 되긴 싫었다. 진호가 눈을 맞추며 수영에게 진심을 전하고자 했다. 수영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고마워요. 솔직하게 말해 줘서.”
멀쩡해 보이는 수영이 이상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처 안 받았어요?”
“상처를 왜 받아요. 형이 그렇다는데.”
수영이 별일 아닌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서 다행이지만 한편으로 씁쓸한 걸 보면, 은근히 실망하길 바랐던 걸까. 진호는 뒤숭숭한 제 심경의 근원이 수영에 대한 의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겼다. 혹시나 가볍게 떠본 건 아닐까, 라는 사소한 의심. 그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뒤따르는 수영의 덧말이 싹을 잘랐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형에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제대로 알아줬으면 해서 고백한 것뿐이에요. 형에게 부담 주고 싶은 생각도, 받아 달라고 떼쓸 생각도 없어요.”
“…….”
“물론 형도 좋다고 하면 혼인 신고라도 해서 묶어 둘 의향은 있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고, 이 나라에서 동성 간 결혼이 법적으로 불가능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묶어 둔다고 말할 때의 분위기가 시청이 아니라 경찰에 신고하는 것처럼 섬뜩해서 사과를 무르고 싶었다. 갑자기 휑한 손목이 시려 왔다.
“애초에 형이 받아 줄 거란 기대는 안 했어요.”
말에 뼈가 잔뜩 들어간 것 같은데.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고 있는 진호의 어깨를 수영이 토닥였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난 씻으러 갈게요. 졸리면 먼저 자요.”
“이게 끝이에요?”
“그럼요?”
깔끔하게 돌아서는 등을 불러 세우자, 수영이 할 말이 남았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진호의 품에 안긴 꽃다발로 시선을 내렸다.
“아, 그거 안 가질 거면 테이블에 올려 둬요. 내가 나중에 치울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뜸을 들이자 절반만 뒤돌았던 수영이 진호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하고 싶은 말 있어요?”
“그…….”
벙긋거리던 진호가 입술을 닫으며 말아 넣었다. 이대로 끝나면 안 될 듯해서 수영을 붙잡았으나 막상 말을 꺼내자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그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 채 열심히 눈만 굴리고 있는 진호를 수영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 뒤, 진호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이따가 나오면…… 할 거예요?”
수영이 질문에서 생략된 주어와 목적어가 무엇인지 추측하는 사이, 진호가 재빨리 공백을 메웠다.
“스위트룸까지 빌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드디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수영이 가운 차림으로 선 진호를 죽 훑어보았다.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그건 아닌데. 너랑 안 하면 좋은 건데. 그래야 맞는 건데.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바라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연애는 하기 싫고, 섹스는 하고 싶다는 건가? 남수영이랑? 굳이 왜? 진호의 답을 기다리던 수영이 재킷을 벗더니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얘 왜 이래. 진호가 꽃다발을 꼭 붙든 채로 수영의 동태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마침내 바지까지 벗어 내린 수영이 진호에게 다가왔다. 진호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점점 가까워지는 수영의 시선에 맞춰 고개만 들어 올릴 뿐이었다. 손바닥 한 뼘도 안 되는 거리까지 다다른 수영이 멈춰 서는가 싶더니 진호 옆을 지나쳐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양치 도구 세트를 집어 들었다.
“나는 누구처럼 사랑 없는 섹스는 안 해서요.”
진호의 앞에 팩을 흔들어 보인 수영이 칫솔을 꺼내 입에 물더니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닫히는 미닫이문을 바라보던 진호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순간 덮쳐지는 줄 알고 마음 졸이던 제가 창피했다. 욕구만 해결하는 게 뭐 어때서? 수영에게 애꿎은 탓을 돌린 진호가 제 손안에 쥐어진 폭신한 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 보다 진실하고 어쩌면 서글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입을 떼니 엉뚱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까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제 의사는 확실하게 전했고, 사과도 했으니 덧붙일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중요한 것을 잊었다는 사념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아쉬운 느낌은 뭐지. 진호가 텅 빈 듯한 가슴께를 짚었다.
아래로 쳐진 꽃다발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진호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꽃을 잡아 올렸다. 적당히 피어오른 장미 꽃잎이 손끝에 닿았다. 산 지 얼마 안 됐는지 꽃에 뿌려진 물기가 사라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프러포즈도 아닌데 누가 이렇게 고백을 해.”
꽃을 받은 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게 수영다운 방식이었다. 이런 것까지 준비한 걸 보면 꽤 진심이었나 보네. 꽃집에서 종업원에게 다급히 물었을 수영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혹시 깎아 달라고 하진 않았겠지. 올라간 입꼬리가 당기자 진호가 두 손으로 입가를 잡아 내렸다. 짠돌이에게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았더니 충격에 저도 맛이 간 모양이었다. 싫어해도 모자랄 판에 웃고 있다니, 거절한 사람이 이래도 되나.
밤새 상온에 뒀다가 혹시라도 상할까 봐, 포장지에서 생화를 꺼내 물이 담긴 호리병에 담가 놓은 진호가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자 폭신한 매트리스가 지친 육신을 감쌌다. 수영이 한창 샤워 중인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눈은 감았지만 쉬이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양만 5백 마리 넘게 세고 있는데, 미닫이문이 열리며 빛이 새어 나왔다. 진호가 눈을 감으며 자는 척을 했다. 얼마 안 있어 머리맡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원한 스킨 향이 코 안 깊숙이 끼쳐 왔다.
“편하게 눕지.”
제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옆으로 웅크리고 있는 진호의 등을 들어 올려 바르게 누인 수영이 내려간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 덮어 주었다. 이불의 주름까지 반듯하게 편 수영이 이마에 손을 뻗자 진호가 숨을 죽였다.
계속 눈을 감고 있자니 따뜻한 손이 헝클어진 머리를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진호는 수영의 손이 머리칼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몇 번 이마를 간질이던 수영은 금방 손을 뗐다. 이걸로 끝인가? 진호가 눈을 떠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뇌하는 사이에 침실을 나서는 수영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안 자요?”
수영이 침대에 누울 거라 예상했던 진호가 무릎을 세워 멀어지는 가운의 끝자락을 붙잡았다. 수영이 고개를 돌리며 진호의 손을 쥐었다.
“나 때문에 깼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진호가 말끝을 흐리자 수영이 잡은 진호의 손을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소파에서 잘게요.”
“같이 자도 괜찮은데.”
혼자서 소파에서 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저 큰 덩치로는 소파에 몸을 끼워 넣어야 간신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대로 잠들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편히 그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소파는 불편하잖아요.”
“난 그게 더 편할 것 같은데요.”
수영이 침대에 누운 진호를 흘긋 보더니 발을 옮겼다. 전엔 달라붙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이번엔 왜 튕기는지 모르겠네. 어리둥절한 진호가 누우라는 뜻으로 제 옆을 손바닥으로 쳤다.
“내가 불편해요.”
“일부러 그래요?”
“뭐가요?”
수영이 의심스럽다는 듯 양미간을 좁혔다. 하긴, 방금 고백을 거절해 놓고 같이 자자고 하는 건 파렴치한 짓이겠지. 그래도 혼자 못 재우겠는 걸 어떡하냐고. 억울해진 진호가 물러서지 않고 수영의 눈길을 덤덤히 받아 냈다. 진호를 한참 바라보던 수영이 졌다는 듯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다시 말하지만.”
수영이 진호의 옆에 드러누우며 눈을 맞추었다.
“날 좋아하기 전까진 형이랑 안 자요.”
“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누굴 섹스밖에 모르는 변태인 줄로 아나. 하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조금 분한 진호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수영이 공허한 천장을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얼른 잠이나 자요.”
수영이 진호를 나무라며 이불을 바르게 덮었다. 정자세로 가지런하게 누워 있는 수영을 보던 진호가 따라서 눈을 감았다. 가까이 붙은 수영에게서 진한 향이 풍겨왔다. 욕실에 비치돼 있던 유명 브랜드의 보디로션이었다. 짠돌이에게서 이런 고급스러운 향기가 난다니 정말이지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살며시 눈을 뜨니 수영이 저를 보고 있었다.
“왜요. 잠이 안 와요?”
무슨 일이냐는 듯 수영이 눈을 치켜뜨자, 진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생각했던 건 취소. 의외로 잘 어울리네. 머릿속에선 전혀 맞지 않았던 조합이 실제로는 제 몸에 맞춘 듯 딱 맞았다.
심장이 왜 빨리 뛰는 것 같지. 진호가 가슴을 어루만지며 수영을 향해 있던 눈꺼풀을 닫았다. 점차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진호는 어쩌면 수영과 같이 이렇게 잠들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뭘까 깊이 따져 보기도 전에, 진호의 의식은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아침에 일어나니 수영이 보이지 않았다. 낯선 풍경에 진호가 황급히 이불을 걷어 냈다. 어디 나갔나? 넓은 스위트룸 안을 빙 둘러보던 진호가 침대에서 내려와 침실 밖으로 나갔다.
“깼어요?”
어느새 슈트로 갈아입은 수영이 응접실 소파에 앉아 유리 벽을 통해 비친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한 햇살에 눈이 부셔 손으로 이마를 가리자 수영이 졸린 눈을 보더니 침실 쪽을 가리켰다.
“체크아웃까지 시간 남았으니까 더 자도 돼요.”
“아뇨. 잠은 거의 깼어요.”
“이거 먹을래요? 조식 시간이 끝나서 사 왔어요.”
수영이 눈짓으로 가리킨 테이블 위에는 룸서비스로 시킨 듯한 샌드위치 세트가 놓여 있었다. 진호가 망설이자 그 의미를 알아챈 수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형 꼬시려고 비싼 돈 쓴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먹어요.”
권하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나 생각해서 주문한 건데 내가 지나치게 사렸나. 뜨끔해서 -마침 배도 고팠으므로- 군말 없이 수영의 맞은편에 앉아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클럽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무는데 수영과 눈이 마주쳤다.
“어……. 같이 먹을래요?”
“아뇨. 형 먹어요.”
수영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수영에게 내민 샌드위치를 제 쪽으로 거둔 진호가 입 안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씹는 사이, 수영은 불룩하게 늘어났다 줄어드는 진호의 뺨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맛있어요?”
수영의 물음에 진호가 조그맣게 남은 마지막 빵 조각을 한입에 털어 넣더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여기.”
수영이 테이블 너머로 몸을 기울이더니 엄지로 진호의 입가를 쓸었다. 움찔한 진호가 뒤로 물러났다.
“소스가 묻어서요.”
장난인가 싶어서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우자 수영이 사실이라는 듯 직접 엄지를 보여 주더니 그대로 핥아 먹었다.
“아, 진짜.”
더럽지도 않나? 인상을 확 찌푸린 진호가 테이블 위의 티슈를 뽑아 수영의 손을 잡고 엄지를 문질러 닦았다. 진호에게 손목을 잡힌 수영은 뭐가 좋은지 흐뭇하게 웃으며 진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와. 형이 손도 닦아 주고, 호강하네요.”
“입 좀 다물어 줄래요?”
엄지에 묻은 흔적을 말끔히 닦아 낸 진호가 티슈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등을 뒤로 당겼다.
“더 있다 갈래요? 아니면 지금?”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수영이 진호를 연신 훑어보았다. 뭐가 묻었나? 수영의 시선이 떨어지질 않자, 진호가 제 몸을 살폈다. 조여 있던 가운의 허리끈이 풀려 어깨와 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어느 틈에 풀렸지. 진호가 헐레벌떡 옷깃을 여미며 일어났다.
“지금 가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형 옷 여기 있어요.”
후다닥 침실로 달려가는 진호를 불러 세운 수영이 제 옆의 소파에 손을 뻗었다. 진호가 응접실로 나오며 수영이 가지런히 개어 놓은 옷더미를 잽싸게 받아 갔다.
“나 피해서 갈아입을 필요 있어요? 어차피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에.”
뒤돌아서는 진호를 향해 수영이 의문을 표했다.
“댁한테 보이는 건 싫거든요.”
“내가 형 좋아해서요?”
“……닥쳐요.”
진호가 돌아서며 침실 문을 닫았다. 쟤는 차여 놓고 창피하지도 않나? 고백이란 건 저에게는 평생을 걸고 해야 할 만큼 중대사에 속하는데 전후로 바뀌는 거 없이 똑같이 뻔뻔한 행태가 부러울 정도였다.
하긴 어색한 거보단 낫지. 계속 같이 지내야 하는 사이인데 이런 이유로 멀어지게 되는 건 질색이다. 확고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으니 짠돌이도 꼬신다거나 하는 이상한 소리도 하지 않을 것이고, 선을 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저는 전처럼 수영과 친한 형 동생 사이로 지내면 된다. 섣부른 희망을 품은 진호가 내심 안도하며 셔츠를 걸쳐 입었다.
“형. 이것도 챙겨야죠!”
문밖에서 다급한 수영의 음성이 들렸다. 또 어떤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려나. 대충 단추를 끼워 넣은 진호가 투덜대며 문을 열었다.
“뭐요?”
짙은 향기가 비강을 찔렀다. 수영이 내민 붉은 꽃다발에 제 코가 처박힌 탓이었다.
“형이 놓고 갈 것 같아서.”
방금 포장한 건지, 꽃병에 넣어 두었던 장미가 물에 흠뻑 젖은 채 상앗빛 플로드지 안에 싸여 있었다. 그것을 살포시 두 손에 쥐여 주는 수영은 조금 들떠 보였다. 꽃다발을 낚아챈 뒤 문을 닫자, 모서리를 잡고 밀쳐 낸다. 틈을 비집고 들어온 얼굴이 얄궂었다.
“꽃이 싫지는 않았나 봐요?”
“싫어할 이유가 있어요?”
“내가 준 거잖아요. 그럼 내가 싫은 건 아니죠?”
“…….”
“좋을 가능성도 있는 거죠?”
글쎄. 싫지 않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지 않나. 내가 왜 널 좋아하냐고 언짢게 받아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수영을 향해 맹렬히 가동하고 있던 보호벽이 어째 한풀 꺾인 듯했다. 그럴 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 왜 입술은 아닌 것처럼 꾸물거릴까.
“호감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설상가상으로 수영은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만.
“뭘 시작하는데요?”
“뭐겠어요. 우정 같은 건 집어치우고, 우리의 새로운…….”
진호는 보기 좋게 늘어진 수영의 입을 막아 밀어냈다. 미닫이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네.
“나 좋다고 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포기 안 해요!”
귀에 대고 소리치는 것처럼 생생했다. 소파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수심이 가득해 보이더니, 금세 활기를 되찾는다. 역시 젊은 게 좋다니까. 애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며 재킷을 걸친 진호가 잠시 침대에 올려 둔 꽃다발을 슬며시 쥐어 들었다.
짠돌이가 좋아서는 결코 아니다. 기왕 받았는데 버리기도 미안하니까. 그런 의도에서 가져가는 것뿐이다. 게다가 이 예쁜 꽃을 두고 가긴 아깝잖아. 진호는 최면을 걸듯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수영이 아직 멀었냐며 문을 열고 들어오기 직전까지.
* * *
“누나?”
수영이 태워 준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진호가 옥탑방 앞에 선 혜린을 보고 눈을 키웠다. 일이 바빠서 1년에 얼굴을 보는 것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혜린이 직접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진호의 굳은 모습을 본 혜린이 시원하게 웃으며 집주인처럼 반겼다.
“우리 진호 왔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뭐 잘못 먹었나? 냉철하고 차갑기로 소문난 AE의 결재 브레이커 서혜린이 호들갑은. 두 팔을 벌린 채 다가오는 혜린을 가볍게 피한 진호가 흐트러짐 없이 깔끔한 정장 차림의 혜린을 길게 훑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짧은 단발머리는 한 올 삐져나온 것 없이 반듯했고, 슬랙스 바지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너 보고 싶어서 왔지. 제대 후에도 제대로 못 봐서 네 얼굴 잊어버릴까 봐.”
혜린이 진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뜯어봤다. 투시라도 당하는 듯한 기세에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듯했다. 꽃다발을 수영에게 넘겨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제 손에 들려 있었으면 온종일 누나의 심문에 시달렸을 것이다. ‘누구한테 받았냐’부터 ‘그쪽 부모님이 뭐 하시냐’까지 질문 공세에 탈탈 털렸을 테지. 짐짓 태연한 척 입술을 말았다.
“그것 때문만은 아닐 텐데.”
“그것뿐인데?”
혜린이 파란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끝으로 진호의 볼을 꼬집었다.
“아!”
진호가 혜린에게서 한 발짝 뒤로 떨어졌다. 긴 손톱에 눌려서 뺨이 욱신거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100% 나를 감시하러 왔거나 볼일이 있어서겠지. 일에서의 효율을 극도로 중시하는 혜린에게 이유 없는 방문은 용납될 수 없었다. 누나는 날 챙겨 주는 척 은근히 놀려 먹으려고 이러는 거다.
“어, 상무님. 언제 오셨어요?”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어 놓고 계단으로 올라온 수영이 진호 앞에 선 혜린을 보고서 허리를 숙였다.
“나도 방금 왔……. 그 꽃다발은 뭐예요?”
혜린이 수영이 한 아름 들고 있는 붉은 장미 송이를 가리켰다. 수영이 멋쩍은 듯 목뒤를 쓸었다.
“이건, 누구 주려고 샀는데요.”
“어디 다녀온 거예요? 옷까지 번듯하게 차려입고.”
혜린이 팔짱을 낀 채 수영과 진호를 번갈아 보았다. 꽃다발에 정장까지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미심쩍은 듯했다.
“그, 그냥 밖에 다녀왔어. 바람 쐬러.”
“그래? 그렇게 입고 바람 쐬러?”
혜린은 의문이 풀리지 않은 듯 의혹하는 눈초리였다. 진호가 초조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겼다. 누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잘못 말하면 짠돌이가 제게 고백했다가 차인 사연을 줄줄이 읊어야 하는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기분 내려고 입었어요. 제가 누구한테 중요한 얘기를 전할 일이 있어서.”
진호를 대신해 수영이 거짓을 섞어 답하자, 조금 누그러진 혜린이 예리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쭉 훑더니 현관 쪽으로 어깨를 돌렸다. 뒤에서 진호가 입가의 근육을 풀며 안도했다.
“우선 안에 들어가죠. 알려 줄 게 있어서.”
혜린의 지시에 수영이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역시 볼일이 있었잖아. 진호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수영과 함께 혜린의 뒤를 따랐다.
“여기서 지내는 건 어때. 괜찮아?”
혜린이 손 한 뼘 안에 들어올 것 같은 방 안을 구석구석 살피며 물었다. 정리라도 안 돼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잘못한 건 없지만 까딱하다 폭풍 잔소리를 들을까 싶어 뒤에 물러나 있던 진호가 냉큼 대답했다.
“뭐, 나쁘진 않은데.”
“네가?”
풍족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진호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놀란 듯한 혜린이 옆의 수영을 힐긋 바라보았다.
“수영 씨가 잘해 주나 보네?”
“응, 뭐…….”
짠돌이에게 칭찬은 달갑지 않았지만 못해 준다고 하기에는 수영이 제게 해 준 것들이 워낙 많았기에 하는 수 없이 수긍했다.
“자취하던 아파트로 옮길 생각은 없어?”
“옮길 수 있어?”
진호가 눈을 반짝이며 혜린을 보자, 혜린이 눈웃음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사장님 설득해 볼게.”
“누나……!”
기껏해야 볼일이란 게 어떻게 지내나 검사하는 정도일 줄 알았는데 좋은 일이 있었다. 이런 방문이면 언제든 환영이지. 진호가 간만에 혜린에게서 희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었다.
“단, 조건이 있어.”
그럴 줄 알았어. 서혜린이 호락호락 넘어갈 리가 없다. 기쁨의 탄성을 지르려던 진호가 식은 낯으로 혜린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선을 봐야 해.”
“내가?”
“그럼 네가 보지, 누가 보니?”
“누나까지 왜 그래?”
아버지도 그렇고 누나는 게이의 뜻을 모르나? 게이란 것은 동성과만 사랑할 수 있다는 정의를 이마에라도 써 붙여야 알까. 진호가 억울한 듯 목청을 키우자 혜린이 혀를 찼다.
“누가 여자랑 만나래? 선 자리에 나와서 대충 사장님 비위만 맞춰 주란 얘기지. 나도 설득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패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친구랑 맛있는 거 먹으면서 대화하고 온다고 생각하고 다녀와.”
누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가 조금만 양보하면 수영에게 빌붙어 사는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말에 따르는 모양새도 자존심이 상했고, 수영의 거취도 어떻게 될지 몰라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아버지 성격에 저와 짠돌이가 함께 그 집에 들어가는 걸 두고 볼 리도 없고. 그러면 짠돌이와 완전히 떨어지게 될 텐데 괜찮으려나.
“선만 보면 아버지가 화를 풀까?”
진호가 본가에서 도망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선을 보기 싫어서 그 난리를 쳤는데 아버지가 용서할 리가 없었다. 아파트로 돌아가면 찾아 놓은 신붓감이 있다며 상견례를 가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사장님은 네 생각보다 많이 물러.”
“아버지가?”
서재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스탠드를 집어 들던 것을 떠올리면 도저히 무르다고 볼 순 없는데. 아무래도 누나의 어휘 상식은 저와 다른 차원에 있다고 생각하며 진호가 고민을 거듭했다. 자취 라이프를 다시 즐길 수 있게 된 건 좋은데…….
“하…….”
한숨을 내쉰 진호가 수영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나가면 혼자 남겨질 짠돌이가 눈에 밟혔다. 제가 좋다고 고백한 게 당장 하루 전인데, 떨어지는 건 너무하지 않나? 그 고백을 대차게 걷어찬 당사자 주제에 이런 걱정은 지나친 오지랖이었으나 신경이 쓰여서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힘겨웠다. 물론 학교에서 볼 수 있겠지만, 집에 돌아오면 텅 비어 있을 주방과 거실을 상상해 보니 어쩐지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속이 휑했다.
‘하겠다고 해요.’
혜린의 뒤에 서 있던 수영이 입술을 움직여 들리지 않게 신호를 전달했다. 가도 괜찮다고? 진호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되묻자 수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몰라. 자기가 먼저 하라고 했으니 괜찮은 거겠지. 나로서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좋고. 언제까지고 짠돌이 집에서 지낼 순 없잖아. 머뭇대던 진호가 망설임 없는 수영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
“알았어. 할게.”
“잘 판단했어.”
“근데 누나한테 부탁이 있어.”
혜린이 말해 보라는 듯 턱짓하자 잠시 고민하던 진호가 입을 열었다. 혜린의 요구를 수락하기 전에 걸리는 점을 해결해야 했다.
“일단 앞으로 아버지 입에서 본가에 돌아오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끔 해 줘. 선은 제대로 볼 테니까.”
“또?”
“내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남은 수영 씨에게도 피해가 없도록 해 줬으면 좋겠어. 아버지가 우리 사이를 오해하고 있어서 혹시나 뭔 일을 벌일지도 몰라.”
“뜻밖인데? 네가 경호원을 챙기고.”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아버지는 아직도 수영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을 테니, 제가 돌아간 후로 짠돌이에게 감시를 붙이거나 불쑥 찾아와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짠돌이가 암만 싫다지만 저 때문에 괜한 피해를 보는 것을 두고 볼 순 없었다. 그동안 피 같은 돈을 써 가면서 저를 챙겨 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이기도 했다.
“서진호. 너 많이 컸다? 둘이 같이 살더니 그새 친해졌어?”
손바닥에 뺨을 비스듬히 기댄 채 진호의 말을 듣고 있던 혜린이 턱을 바로 세우며 수영과 진호 사이를 묘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근데 한 가지 말해 주자면, 수영 씨는 너랑 같이 그 집으로 돌아갈 거야.”
“어?”
이번엔 진호가 놀랄 차례였다.
“너 혼자 거기서 지내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 수영 씨랑 있으면 네 공부도 도와주고, 네 건강도 챙겨 줄 거고, 전처럼 클럽에 나돌아 다니지도 않을 테니, 널 바른 생활로 인도해 줄 수 있지 않겠어?”
진짜 볼일이라는 게 이거였구먼. 제 뜻대로 하도록 봐주는 줄 알았는데,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래도 짠돌이랑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건가. 안도감이 가슴을 채웠다.
“그건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설득하려고? 나랑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하고 있던데.”
“네가 선을 보면 그런 오해도 사라지겠지.”
혜린이 검지를 올려 경고하듯 진호의 눈앞에 들이댔다. 파란색 손톱 끝에 달린 하얀 큐빅이 시야를 가렸다.
“그러니까 맞선 보는 상대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도록 네가 잘 처신해야지.”
“애프터 없이 어떻게 좋게 끝내?”
“그건 네가 잘 생각해 봐.”
혜린은 제가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손을 내렸다.
“누나.”
서로가 마음에 들어서 만나는 것. 그것 외에 달리 선을 잘 봤다고 할 수 있는 결과가 있을까? 이건 한마디로 여자랑 만나라는 뜻이 아닌가. 억울해진 진호가 대들려고 하자 혜린이 말을 돌렸다.
“아, 참. 택배는 잘 받았어?”
택배? 전에 주소를 잘못 찾은 그 택배 말고 다른 택배가 있었나? 혜린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으려던 진호가 의문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택배라니?”
“집으로 큰 택배 몇 개 오지 않았어?”
“아, 그거 누나가 보낸 거였어?”
옥탑에 쌓여 있던 정체불명의 택배 상자가 누나가 보낸 거였다니. 집에서 보내면 될 걸 미국에서 보내는 바람에 착각했네.
“응. 수영 씨가 너 입을 옷 없다고 해서 내가 임 실장 시켜서 보냈거든. 옷은 어때. 입을 만했어?”
“으응.”
전에 수영이 구해 왔다던 옷을 지칭하는 듯했다. 수영이 사 온 것 치곤 양도 많고 스타일도 괜찮다 했는데 누나가 보낸 거였다. 그나저나 해외에서 직배송으로 보내서 발신지가 미국으로 찍혀 있었던 거군. 옷에 해외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던 것을 떠올린 진호가 해답을 찾은 듯 시원한 얼굴을 했다. 근데 짠돌이는 왜 택배의 정체가 뭔지 모르겠다고 한 거지. 누나한테서 미처 전달을 못 받았나.
“아무튼, 넌 집으로 돌아가면 수영 씨한테 잘해야 해. 뒤에서 얼마나 널 챙기는데.”
제가 모르는 사이에 누나와 짠돌이는 계속 연락하고 있었던 듯했다. -저도 아주 잠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긴 했지만- 전에 정연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했던 건, 수영이 제게 고백함으로써 오해라는 게 밝혀졌으니 어디까지나 업무상의 연락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영이 저 유리한 쪽으로 보고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짠돌이가 고자질이라도 했던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경호원 관련 업무엔 별 관심을 두지 않던 누나가 수영이 제게 어떤 걸 해 주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난 회사로 복귀해야겠다. 맞선 날짜랑 이사 날은 정해지면 바로 알려 줄게.”
손목의 시계를 본 혜린이 현관으로 향했다. 뒤따라온 두 사람에게 나오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은 혜린은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진 하이힐을 신으며 말을 덧붙였다.
“만약에 둘이 사귀게 되면 나한테 꼭 얘기해야 한다? 괜히 숨겨서 일 키우지 말고.”
“아, 누나!”
진호가 혜린을 향해 미간을 좁히자 혜린이 못 들은 체하며 핸드폰 액정에 비치는 제 머리를 정리했다. 이미 뭐든 자를 것처럼 반듯한 칼 단발인데 거기서 또 정리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저번에 너 수영 씨랑 애인인 척 아파트에 잠입한 거, 그거 덮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거야?”
“그건…….”
무사히 넘어간 줄로만 알았는데 임 실장이 상부에 보고한 모양이었다. 혜린이 중간에서 쳐 내서 망정이지 아버지 귀에 들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혜린이 옷가지를 정리하며 피식 웃었다.
“여장까지 하고 나타나서는. 진짜 같아서 놀랍더라.”
“안 들키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래. 그랬겠지.”
진호를 놀리듯 흘겨보며 현관문을 열어젖힌 혜린이 수영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수영 씨. 우리 진호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넵. 상무님.”
“다음엔 언제 볼지 모르니까 그때까지 수영 씨 말 잘 듣고 잘 지내고 있어.”
진호에게 은근한 협박이 담긴 눈빛을 보낸 혜린이 현관을 나서더니 문을 닫았다. 철문 너머로 또각거리는 혜린의 구두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누나도 진짜.”
꼭 어린이집에 애를 맡기는 모양새였다. 내가 그리 못 미덥나? 짠돌이한테 맡기게? 닫힌 문을 향해 진호가 툴툴거리더니 고까운 시선을 그대로 수영에게 옮겼다.
“누나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
“뭔 얘기예요?”
“근데 누나가 왜 저래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셔츠의 단추를 푸는 수영의 손끝을 시선으로 따라가며 진호가 끈질기게 물었다.
“또 누나한테 내 얘기 했죠?”
진호가 답을 듣고야 말겠다며 잠자코 셔츠를 벗어 넘기는 수영의 앞에 바짝 다가갔다.
“했죠?”
“뭘요?”
셔츠를 어깨에 걸친 수영이 버클을 풀던 손을 멈추고 진호와 눈을 마주했다. 진호가 알지 않느냐는 의미로 눈꼬리를 올렸다. 수영이 결백한 듯 다소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상무님께는 몇 가지 물어본 게 다예요. 보고 연락도 요즘엔 안 했고요.”
웃음기 없는 낯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누나는 대체 뭘 보고 날 챙겨 준다고 한 걸까. 순전히 자기 바람 아냐?
“뭐 봐요?”
“아.”
제 눈길이 닿는 끝에 수영의 브리프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떠올리고 말았다. 열이 오르는 기분에 진호가 관심 없는 척 몸을 돌렸다.
“형.”
“아, 안다고요.”
수영이 꺼낼 말이 무엇일지 예상됐다. 딱히 꼴려서 본 건 아니었는데. 눈앞에 보이니까 나도 모르게.
“뭘 알아요. 나 지금 나간다고요.”
불편한 정장 대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수영이 크로스 백을 메며 현관으로 나섰다. 거, 참. 사람 헷갈리게 옷을 왜 아무 데서나 훌렁 벗어젖히는지. 진호가 속으로 무안해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어디 가는데요?”
“투나잇에 알바하러요.”
“알바요?”
“강 사장님께 차랑 옷을 빌리는 대신 오늘부터 일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형 꼬시느라 지출이 커져서 돈도 벌어야 하고.”
그러게 쓸데없이 돈 쓰지 말라니까. 진호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자 수영이 진호의 어깨를 턱 쥐었다.
“형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 책임져요.”
“난 분명히 말렸어요.”
“큰일 났네. 결혼으로 책임지라고 말하려 했는데.”
수영이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내뱉더니 운동화를 신었다. 차이고 나더니 뻔뻔함이 배로 늘었다.
“형도 같이 갈래요? 맛있는 술 만들어 줄게요.”
“됐어요. 난 여기서 쉴게요.”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수영이 밖으로 나서기 전, 진호 앞에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잠깐 줘 봐요.”
“폰은 왜요?”
진호가 의심스러운 듯 질문하면서도 핸드폰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신현우 번호 알아냈어요. 미리 차단하려고요. 나 없는 사이에 연락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전에 메시지가 온 뒤로 줄곧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조교이니 번호 알기도 힘들지 않을 텐데 왜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진호가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수영이 진호의 핸드폰에 신현우의 번호를 저장하더니, 설정 탭을 눌러 차단 번호로 등록했다. 그러곤 더 할 일이 남았는지 액정 위를 두드리더니 한결 가벼워진 낯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과 사무실 번호도 저장이 안 돼 있어서 등록해 뒀어요. 차단은 안 했는데 앞으로 이 번호로 연락 오면 나한테 줘요. 대신 받을 테니까.”
진호가 핸드폰을 가져가려고 잡아당기자, 수영이 제 쪽으로 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갑자기 웬 신경전? 진호가 어리둥절한 듯 핸드폰을 당기지도 못하고 잡고 있으니 수영이 두 손으로 진호의 손목을 잡았다.
“나 없을 때 이 번호로 연락 오면 받지 말고요.”
누나도 모자라서 짠돌이까지 저를 미취학 아동으로 보는 듯했다.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면 안 돼요. 유치원에 다닐 때 자주 들었던 주의 사항이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알아서 잘해요. 신경 끄고 가요.”
진호가 제 손을 빼내며 수영의 등을 떠밀었다. 시간을 확인한 수영이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문밖으로 옮겼다.
“가라니까.”
수영이 현관문을 열고 나간 뒤에도 근심 그득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자, 진호가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닫으려고 하니 수영이 잡아당기며 틈을 만들었다.
“나 보고 싶으면 주저 말고 언제든지 연락하고요.”
제 표정이 일그러진 건 보이지도 않는지 수영이 보고 싶을 거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더니 문을 닫았다.
“보고 싶기는. 안 봐서 좋지, 뭐.”
진호가 미련 없이 등을 돌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동안 짠돌이와 붙어 지냈더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건 오랜만이었다. 진호는 이 시간을 후회 없이 마음껏 누리리라 생각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따라 이 손바닥만 한 방이 사막처럼 황량하게 느껴졌다.
“꽃병으로 할 만한 게 있을까.”
수영이 밥상 위에 올려놓고 간 꽃다발을 물끄러미 보던 진호가 일어나 찬장을 뒤졌다. 심리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선 육체가 바쁜 것이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