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현재 시각은 오전 5시. 수영이 한창 꿈나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침대에서 슬슬 빠져나온 진호는 비장하게 실내화를 신고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재빠르게 세수를 마친 뒤,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은 깜깜했다.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해 어둠을 뚫고 드레스 룸에 당도한 진호는 어제 골라 둔 셔츠와 바지를 꺼냈다. 좋아. 완벽해. 전신 거울 속에 비친 멀끔한 모습에 엄지를 치켜든 진호는 백팩을 멘 채 현관으로 향했다. 행여나 수영이 깰세라 아주 느린 속도로 신발을 끼워 넣은 진호가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서 도어 록을 풀었다.
띠리릭, 하는 잠금 해제 알람이 성가셨지만 거실이 조용한 걸 보니 수영은 듣지 못한 듯했다. 크게 호흡을 몰아쉰 진호가 마무리로 현관문을 천천히 닫았다. 삐빅. 난관이 지나고 진호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반쯤 성공했군. 로비로 내려온 진호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출입구에 다다랐다.
새벽의 도로는 한산했다. 예약해 둔 택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진호는 건널목 앞에 선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얼른 와야 하는데. 금방이라도 수영이 쫓아올 것 같은 느낌에 뒤를 슬쩍 돌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진호는 가슴을 졸이며 텅 빈 도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
그때 멀리서 검은색 형체가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눈가를 좁히며 다가가자 핸드폰에서 봤던 차량 번호가 눈에 띄었다.
“여기요!”
진호가 손을 흔들며 택시를 세웠다. 제 앞에 정지한 차 문을 열고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십년감수했네. 마지막 마무리로 멋있게 차 문을 쾅 닫았다. 짠돌이 새끼. 고생 좀 해 봐라.
“아저씨. 김포 공항으로…….”
“죄송합니다. 오늘 예약 없던 거로 할게요.”
돌연 차 문이 열리더니 두꺼운 팔이 우악스럽게 어깨를 잡아당겼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라 막아 낼 겨를도 없이 인도로 끌려 나왔다.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부축하듯 팔뚝을 옭아맨 수영이 택시를 보내며 진호를 단지 안으로 이끌었다.
“어, 어떻게.”
“낌새가 이상해서 일찍 일어나 봤더니 이럴 계획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진호가 허둥대며 몸을 바로 세우자, 수영이 손목을 붙잡은 채 엄하게 꾸짖었다.
“어제 약속한 건 잊었어요?”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니에요. 방금 택시 타려다가 걸렸는데.”
수영이 뻘쭘하게 서 있는 진호를 쭉 훑어보더니 제 호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이거 또 채워 줘요?”
손에서 튀어나온 것은 어제의 그 수갑이었다. 짤랑거리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니. 그냥 일찍 학교 가려고…….”
마땅한 변명을 찾을 수 없었다. 눈치를 보며 흘긋 표정을 살피니 잔뜩 굳어 있었다.
“걸어서 가야죠.”
“그건 맞는데요. 도저히…….”
댁을 똑바로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죠. 진호는 전날 목격한 거대 사이즈의 기둥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진정해. 서진호. 그 일은 평생의 수치다.
“도저히?”
“……걸어서 가기 힘들어서요.”
“제가 차 운전하면 되잖아요.”
그렇네. 그런 방법이 있었지. 지극히 합당한 수영의 논리에 미처 준비하지 못한 말이 아무렇게나 쏟아져 나왔다.
“하하. 그러게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진호를 향해 한심한 눈빛을 한 수영이 손목을 끌어당겼다.
“자차까지는 허용할 테니까 택시는 절대 금지예요.”
그러니까 네 얼굴 보는 게 제일 문제라고. 차마 사실을 밝히지 못해 진호는 가출하다 걸린 청소년이라도 된 듯이 수영에게 이끌려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강의 시간은 더 지옥 같았다. 그토록 좋아하는 사진의 세계 시간인데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짠돌이 탓에 자꾸만 어제의 일이 의식돼서 교수의 설명이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결국, 진호는 화장실을 핑계로 수영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어떡하냐, 진짜.”
복도에 서서 다른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데, 귓가에서 소곤대는 음성이 들려왔다.
“선배.”
“아, 깜짝이야.”
뒤를 돌자 정연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어딜 가나 했더니만 여기서 뭐 해요?”
“속이 답답해서요.”
은근슬쩍 얼버무렸더니 정연이 기다렸다는 듯 손뼉을 쳤다.
“따라 나오길 잘했네요. 선배한테 물어볼 게 있었거든요.”
잠깐 시간 내주실래요? 정연의 질문에 강의실 쪽을 바라보다 흔쾌히 수락했다. 짠돌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냐.
“수영 오빠랑 무슨 사이예요?”
경영관 건물 뒤 으슥한 곳으로 진호를 데려간 정연은 다짜고짜 궁금한 것을 캐물었다.
“무슨 사이라뇨? 같은 학과 선후배 사이죠.”
“아닌데. 뭔가 있는데.”
계약 관계임을 밝힐 수 없어 -그랬다간 동네방네 귀찮은 소문이 날 것이 분명하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자 정연이 수상한 눈초리로 다가왔다.
“둘이 평범한 사이는 아니죠?”
“…….”
“대답 안 해도 전 알아요. 안 그럼 수영 오빠가 그렇게 챙겨 줄 리가 없어.”
확신에 찬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택시 타고 가는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러니 보통 사이가 아닌 건 확실해요.”
고등학생 때도 얼마나 짠돌이였으면 택시 타는 게 놀랄 일이냐. 새삼 수영의 구두쇠 기질을 실감한 진호가 혀를 내둘렀다.
“물어볼 게 그거예요?”
“이게 다는 아니고, 중요한 게 있죠.”
진호가 화제를 돌리자 정연이 진지한 눈빛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저 좀 도와주세요.”
“뭘요?”
“수영 오빠랑 사귈 수 있게.”
뜻밖의 제안은 아니었다. 개강 총회 때 티 나게 수영에게 관심을 보였던 정연이 떠올랐기에.
“선배 말고는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제가 왜 도와줘야 하죠?”
진호가 팔짱을 끼며 똘망똘망한 정연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친한 친구 잃는 건 서운하시겠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드릴게요.”
물론 수영이 정연과 사귀느라 자신에게 소홀해진다면 그야말로 땡큐다. 그래도 거래의 기본은 윈윈이니 도움만 주고 끝내는 건 멍청한 거지. 진호는 냉큼 도와주겠다고 하고픈 심정을 숨긴 채, 도도하게 고개를 세웠다.
“대신 다음에 내 부탁 하나 들어줘요.”
“좋아요.”
환하게 피어나는 미소가 왠지 찡했다. 자린고비 저리 가라 싶은 짠돌이에다 입 가벼운 놈이 뭐가 좋아서. 멋모르고 신현우를 쫓아다녔던 과거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근데 그 새, 아니, 걔가 왜 좋아요?”
“멋있잖아요.”
수줍게 팔을 배배 꼬는 꼴이 첫사랑에 빠진 소녀 같다.
“멋있어요? 어디가?”
참 이상한 미적 가치관을 지니셨군요. 안타깝게도. 진호가 고개를 내저으며 애도를 표하는 동안, 정연은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망울을 허공으로 향했다.
“다 멋있지만 달릴 때가 가장 멋져요.”
콩깍지가 아주 제대로 씌었는데. 진호가 멍한 정연의 눈앞에다 손바닥을 흔들었다. 저기요. 정신 차려요. 어린 청년이 안 됐네.
“어쩌다가…….”
“어떻게 좋아하게 됐냐고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지금은 좋아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신상에 좋으니까.
“그때는 바야흐로 4년 전, 제가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죠.”
살포시 가슴 위로 양손을 포개는 모습이 한 편의 연극 같았다. 진호는 수영에게서 떨어져 있을 핑계를 댈 겸 정연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저는 예전부터 육상 선수가 꿈이었기 때문에 훈련을 위해 매일 아침 조깅을 하곤 했어요.”
정연은 당시의 아련한 기분을 느끼며 회상에 몰입했다.
* * *
열일곱의 정연은 야망이 큰 아이였다. 소싯적부터 달리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초중고 내내 육상부 소속이었고, 코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엘리트였다. 올림픽 트라이애슬론 종목에서 한국 최초로 금메달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꾸준히 기술을 닦아 가는 그녀에게 남자란 장애물일 뿐이었다.
「정연아. 나랑 사귀자.」
「오래전부터 쭉 지켜봤어.」
「최정연. 나 너 좋아하냐?」
소위 ‘존잘’이라 불리는 애부터 수많은 남학생이 대시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늘 꿈이 우선이었으니까.
「정연아. 넌 도대체 이상형이 뭐야?」
……라고 묻는 친구들에게 정연은.
「나보다 잘 뛰는 사람.」
……이라고 답하곤 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그런 사람이 있긴 해?’ 하며 되물었다. 그때만 해도 남자 육상부보다 빠른 기록을 가지고 있던 정연이니, 그 말은 곧 연애 사절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정연이 선언을 취소하게 된 건 어느 무더운 여름날의 아침이었다. 사나운 시골 모기에 시달리느라 잠들지 못한 정연은 운동이나 할까 하여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후우,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좁은 흙길을 달리는데, 불현듯 뒤에서 쌩하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제 앞으로 거대한 형체가 쓱, 하고 지나갔다. 어렴풋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아하니 같은 학교 교복이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
괜한 승부욕에 속도를 높였다. 꼭 따라잡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뜀박질을 해도 저 멀리 앞서 나가는 물체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정연은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다음 날, 전날과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선 정연은 순식간에 저를 앞서 나가는 남자를 다시 목격할 수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려도 거리를 좁힐 수 없었던 정연은 또 멀리 사라지는 형체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그러나 이미 점이 돼 버린 상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정연은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이. 헬로우-」
「어이! 거기 아저씨!」
어떤 수식어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나치는 그 뚝심이 새삼 부러워질 때 즈음, 정연은 우연한 기회로 그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그날은 학교 수업이 끝나고 육상부 친구들과 시내로 놀러 가기로 했던 참이라, 주머니가 용돈으로 두둑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동전이 흔들리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정연은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지금이면 그 사람이 지나가겠지, 라고 생각하던 차에 역시나 익숙한 그림자가 쌩하니 지나쳤다. 그때였다.
「저기요.」
앞서 뛰어가던 인영이 우뚝 멈추더니 방향을 돌려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더니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냅다 허리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네?」
그가 내민 것은 흙이 묻어 더러워진 10원짜리 동전이었다.
「방금 호주머니에서 떨어지는 거 들었어요.」
그걸 들었다고? 정연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동안 남자는 10원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 교복 바지에 닦더니 정연의 손을 잡아 올렸다.
「10원도 모으면 만 원이 된다고요.」
손 위에 10원을 살포시 놓으며 씩 웃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이렇게 멋있게 보일 일이야? 순간 가슴 왼쪽에 달린 명찰의 ‘남수영’이라는 석 자가 빛나 보였다.
「저, 혹시.」
10원을 건넨 뒤, 돌아서는 등을 향해 급히 외쳤다.
「육상…… 좋아하세요?」
영문을 몰라 멀뚱히 서 있는 수영을 향해 정연이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다.
「저랑 육상부 같이 안 하실래요?」
수영은 난감한 듯 손사래를 쳤다.
「전 아르바이트 때문에 안 될 거 같네요. 지금도 유씨 아저씨 댁에 모내기 도우러 가야 해서요.」
정연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찾은 이상형인데.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정연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육상부에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
「상금!」
「네?」
「대회에서 우승하면 상금 얻을 수 있어요. 자그마치 300만 원!」
10원짜리도 귀하게 여기는 것에 힌트를 얻은 정연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금을 내세웠다.
「300만 원이요?」
좌우로 흔들던 손이 정지했다. 이거다. 정연은 반색하며 손가락을 펼쳐 숫자를 강조했다.
「네. 세금 떼도 230만 원!」
이 정도면 근방의 어떤 알바 월급보다 많지. 아니나 다를까, 수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정연이 내민 손을 덥석 쥐었다.
「좋아요. 하겠습니다.」
「내일 방과 후에 학교에서 봬요. 간단한 면접을 볼 테니까.」
「네. 그럼.」
그러곤 쏜살같이 달려가는 수영은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장군 같은 모습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점이 되어 사라지는 수영을 보며 정연은 다시금 확신했다.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겠어. 반드시.
* * *
“그게 다예요?”
정연의 이야기가 끝나자, 진호가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왜요? 낭만적이지 않아요?”
대체 뭐가. 올려다보는 두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만큼 초롱초롱했다. 그나저나 짠돌이는 고딩 때도 짠돌이였네. 동전 소리에 귀신같이 반응하다니. 꼭 수영 같은 특기에 실소를 흘렸다.
“그건 그렇다 치고. 사귀는 걸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하죠?”
“수영 오빠 이상형을 알아봐 주세요.”
“이상형?”
“네. 그간 오빠랑 친해지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봤는데 실패했어요.”
정연은 시무룩해져서는 애꿎은 흙바닥을 신코로 툭툭 찼다. 진호가 움푹 들어간 땅을 따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같이 육상부도 했으면 친해지기 쉽지 않나요?”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근데.”
정연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워낙 철벽이어서요.”
많은 사연이 있었는지 정연이 뜸을 들이더니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댔다.
“육상부 회식이라도 하려고 하면 아르바이트 있다고 가 버리고, 이것저것 알려 준다고 붙어 있으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며 거절하고, 훈련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고 하면 동생들 밥 해 줘야 한다고 혼자 가 버리는데 말을 걸 수나 있었겠어요? 같은 대학에 와서도 접점이 없어서 포기하고 있다가 우연히 같은 수업 듣는 걸 알고 나서는, 과대 오빠한테 부탁해서 개강 총회에까지 찾아갔는데 무참히 무시당했어요.”
삐죽 내려간 입꼬리가 처량했다. 독종은 독종이구나. 새삼 수영의 집념에 경의를 표하며 진호가 정연을 위로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많이 힘들겠는데요.”
“그래서 선배한테 부탁한 거잖아요.”
정연이 어두운 낯빛을 거두며 진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상형이 어떤지 가능한 한 상세하게 알아봐 주세요.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요.”
“제가 돕는다고 뭐가 다를까요.”
정연의 굳건한 의지에 진호가 머뭇거렸다. 내가 물어본다고 해서 순순히 답해 줄 짠돌이가 아닌데.
“당연하죠. 오빠가 누군가에게 신경 쓰는 거 처음 봤다니까요.”
정연이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진호 앞으로 뻗었다.
“번호 알려 주세요. 나중에 다른 것도 물어보게.”
진호가 정연의 핸드폰을 거두어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진호가 핸드폰을 꺼내 새로운 번호를 저장하는 도중에, 새로운 메시지를 알리는 창이 떴다.
[찾으면 봐요.]
수영에게서 온 것이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 메신저 앱에 들어가니, 수영에게서 온 메시지가 스무 개 넘게 쌓여 있었다.
[어디에요?]
[보면 답장 좀 해 줘요.]
[강의 끝났어요.]
[왜 전화를 안 받아요?]
줄줄이 이어지는 문자에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끼며 통화 기록을 살폈다. 그새 부재중 전화가 열 통이 와 있었다. 망했다. 진호가 다급히 통화 버튼을 눌러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어서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며…….
밝은 목소리의 안내 메시지가 들렸다. 진호가 초조해하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 있어요?”
정연이 굳은 안색을 보며 물었다. 진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경영관 뒤에 있어요.]
“어이, 서진호!”
크게 외치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멀리서 수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죽었다. 진호가 침을 꿀꺽 삼키며 어깨를 움츠렸다. 혹시 몰래 나왔다고 수갑 채우는 거 아냐?
“한참 찾았잖아요.”
두 사람 앞에 도착한 수영이 냅다 진호의 팔을 잡았다.
“계속 여기 있었어요? 말도 없이 가면 어떡해요.”
“후배랑 얘기하는 것도 안 돼요? 아무리.”
경호가 의무라지만, 이라고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수영과 제가 계약 관계임을 들킬 뻔했다. 옆을 살피니 정연이 멍한 얼굴로 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되잖아요.”
걱정? 진호가 잘못 들었나 싶어 따지려다, 정연을 보고 수긍했다. 경호 임무에 대해서 돌려 말하는 거로군.
“김포 공항까지 갈 뻔했다니까요. 제주도라도 가려나 싶어서.”
그렇다기엔 표정이 심각한데. 움푹 팬 수영의 미간을 보며 진호가 어깨를 잡았다.
“설마요. 그런 짓은 안 하죠.”
그러니까 팔 좀 빼 주시죠. 진호가 은근슬쩍 팔을 제 쪽으로 잡아당기자 수영이 더욱 세게 팔뚝을 쥐었다.
“앞으로 어디 갈 때는 말하고 가요. 갑자기 사라지지 말고.”
“역시 둘이 엄청 친한가 봐요.”
정연이 흐뭇한 듯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친하긴 뭐가 친해. 진호가 수영을 흘겨보고는 팔을 빼내려고 시도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너도 있었어?”
그제야 정연의 존재를 알아챈 수영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수영의 힘이 빠진 사이 진호가 슬그머니 팔을 뺐다.
“아까부터 쭉 있었는데.”
정연이 익숙한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진호를 바라봤다.
“이따 연락 주세요.”
작게 속삭이는 말을 눈치챈 진호가 알았다는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얼마나 무시당했으면 아무렇지 않은 거야.
“선배는 내가 불러서 나온 거야. 너무 뭐라 하지 마.”
“그래? 무슨 일로?”
“심심해서 이것저것 얘기했어. 별거 아니야.”
수영의 물음에 정연이 웃음으로 무마하며 얼버무렸다.
“얘기 끝났으면 진호 씨는 내가 데려갈게.”
수영이 내려간 진호의 손을 다시 붙잡으며 앞으로 끌었다. 진호는 단숨에 수영에게 끌려 나갔다.
“다음에 또 봐!”
멀어지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든 정연이 수영 뒤에서 뺨을 붉혔다. 수영에게 붙잡힌 채, 그 광경을 목격한 진호가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콩깍지 언젠간 벗겨져야 할 텐데.
“다음 시간에 카메라 가지고 오래요. 촬영 수업 있다고. 그리고.”
수영이 주차장으로 진호를 이끌며 완강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에도 이러면 그때는 정말.”
수영이 어느 틈엔가 장난감 수갑을 꺼내 들더니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진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조수석으로 재빠르게 도망쳤다. 저걸 부숴 버리든가 해야지. 속으로 이를 갈며 진호가 벨트를 채웠다. 기다려라. 네놈의 이상형을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 테니.
* * *
주말 오후.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나른한 상태로 브런치를 먹던 중이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이상형이 뭐예요?”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입 안에 든 음식을 우물거리며 씹어 넘긴 수영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외모가 이랬으면 좋겠고, 성격은 저랬으면 좋겠고, 뭐 그런 거 없어요?”
“음.”
수영은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턱 밑을 짚었다.
“굳이 따지면 경제관념은 있었으면 좋겠네요.”
수영이 진호를 흘긋 쳐다보며 밥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건 왜 물어봐요?”
“그냥 궁금해서.”
진호가 따끈한 소고깃국을 떠먹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답변이 모호하잖아. 구체적인 걸 원했는데.
“그러면 청순, 귀여움, 섹시 중에 뭐가 좋아요?”
“글쎄요. 딱히.”
수영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진호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진호 씨는요?”
“저요?”
역질문에 당황한 진호가 우물쭈물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도 섹시?”
신현우도 그렇고 지금까지 잤던 남자들의 데이터를 보면 그랬으니까. 말끝을 흐리자 수영이 알겠다는 듯 흐음, 하고 미심쩍은 소리를 냈다.
웅- 식탁 위를 울리는 진동에 진호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혜린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번엔 왜?”
다소 짜증 섞인 말투로 수영에게 눈을 흘겼다. 또 짠돌이가 무언갈 일러바쳤나.
-사장님 전갈이야.
짠돌이가 아니고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었다. 예상 밖이라 진호가 눈썹을 치켜들며 되물었다.
“뭔데?”
-이번 달부터 카드값 500으로 제한하시겠대.
“갑자기?”
-지난달 카드값이 천만 원이 넘었다더라. 뭘 샀기에 그 금액이 나온 거야?
진호는 수영을 떼어 놓기 위해 사들였던 노트북과 요거트, 고급 택시 이용과 고물 처리에 사용된 비용을 떠올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능청맞게 국물을 호로록 빨아들이고 있는 수영을 노려본 진호가 변명을 내놓았다.
“한 번만 봐 달라고 말해 주면 안 돼? 누나.”
-이럴 때만 누나지.
혜린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소용없어. 벌써 아버지가 제한 걸어 뒀으니까.
“누나.”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당분간 몸 사리면서 지내. 적당할 때 되면 올려 줄게.
“그때가 언젠데?”
-내가 아니? 아무튼 넌 호적에서 파이기 싫으면 알아서 예쁜 짓 좀 해 봐. 아버지가 벼르고 있어.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연결 종료음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진호는 허망한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왜요. 뭔 일 있어요?”
“무슨 상관이에요.”
따지고 보면 이리된 것도 전부 짠돌이 탓이다. 수영을 위아래로 훑어본 진호가 눈치를 주려던 걸 참았다. 적어도 이번엔 일러바치지 않았으니 다행인가.
“다 먹었어요?”
“네.”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영이 수저와 반찬을 정리했다.
“할 거 없으면 영화나 볼래요?”
수세미로 그릇을 박박 닦던 수영이 -초반에는 식기세척기를 사용하던 수영은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손 설거지로 돌아왔다- 빈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는 진호에게 물었다. 수영의 옆에 다다른 진호가 그릇을 떨어뜨릴 뻔한 걸 간신히 잡았다.
“갑자기요?”
웬일이야. 돈 쓰는 데에는 질색인 짠돌이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고.
“기분 안 좋아 보여서요.”
내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영화 좋아해요?”
“로맨스 영화요.”
실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다 본다. 로맨스만 빼고. 하지만 정연과의 약속을 위해 일부러 로맨스 영화를 골랐다. 이거라면 이상형에 대한 힌트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영화는 수영 씨가 알아서 고르세요.”
자고로 영화 고르는 취향에서도 바라는 연애관이 묻어나는 법이지. 저절로 풀리는 상황에 진호가 흡족해하며 드레스 룸으로 발을 옮겼다.
“설거지하는 동안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
“외출복은 왜요?”
“이러고 밖에 나갈 순 없잖아요.”
드레스 룸으로 향하던 발을 멈추고 입고 있는 실크 파자마의 옷깃을 잡아 흔들었다.
“밖엘 왜 나가요. 집에서 볼 건데.”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집에서 보자는 얘기였냐.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맛인데.”
“근검절약하기로 약속한 거 잊었어요?”
수영이 고무장갑을 벗으며 거실 벽을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는 신형 TV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요즘 누가 영화관에서 봐요. 케이블만 켜면 무료 영화가 수두룩한데.”
그건 본인만 그렇고요. 진호가 들떴던 어깨를 늘어뜨리며 속으로 투덜댔다.
“전 영화 볼 때 팝콘 먹어야 하는데요.”
“집에 있는 쿠키 먹으면 되잖아요. 꺼내 줘요?”
수영이 싱크대 위의 찬장을 열더니 안을 뒤적였다.
“그럼 편의점에서 팝콘 사 올게요. 그 정도는 괜찮죠?”
영화관 팝콘보다는 훨씬 쌀 테니까. 진호가 타협점을 제시하며 외투를 챙기러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그 정도는 봐줄게요.”
수영이 큰 선심 쓰듯 OK 사인을 보내자, 진호가 큼,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애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허락받아야 한다니.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위로하며 꺼낸 외투를 걸쳤다.
“차 타고 가는 건 아니죠?”
“걸어서 갈 겁니다.”
‘걸어서’를 유독 크게 말하며 진호가 대꾸했다. 잘 생각했어요, 라며 흐뭇하게 답하는 수영이 못마땅하긴 매한가지였지만 어쩔 수 있나. 어차피 용돈도 줄었으니 일석이조라 생각하자.
“뭐 살 거예요?”
“고르고 있어요.”
오리지널, 치즈, 어니언, 캐러멜……. 종류도 다양하네. 편의점에 도착해 과자류가 정리된 진열대를 살피던 진호의 눈에 조그만 네임 태그에 적힌 글자가 들어왔다. 이게 좋겠다.
“이거 살까요?”
“이거요?”
수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진호가 가리킨 팝콘 봉지를 쥐었다.
“이유가 있어요?”
“원 플러스 원이잖아요.”
비싼 걸 샀다가는 수갑 채울 거라며 난리 부릴 거잖아. 진호가 수영이 들고 있던 팝콘을 휙 낚아채더니 같은 팝콘 봉지를 하나 더 챙겼다. 봉지 두 개를 계산대 위에 놓으며 카드를 꺼내는데 곁에서 열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뭘 봐요.”
“기특하잖아요.”
“계산되었습니다.”
편의점 점원이 카드를 내밀자, 돌려받은 진호가 출구로 방향을 틀었다.
“어린 애 취급은 하지 마시죠.”
“그럼 형 취급 해 줘요?”
어쩐지 신나 보이는 듯한 수영이 계산대에 놓인 팝콘을 한 손으로 쥐더니 다른 한 손을 진호의 정수리 위로 올렸다.
“우리 형. 말 잘 듣네.”
“누가 형이에요.”
살살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을 휙 쳐 냈다. 내 나이는 어떻게 알아내서 형이라고 부르는 건지. 제 딴에는 만만히 보지 말라고 어깃장을 놓은 건데 짓궂은 미소에는 변화가 없었다.
“형 맞잖아요. 과대한테 물어봤어요. 저보다 세 살 많던데. 군대도 다녀왔고.”
수영이 편의점을 나서며 진호의 어깨를 제 쪽으로 당겼다. 진호가 목뒤로 걸쳐진 수영의 팔을 즉각 밀어냈다. 과한 처사라고 여겼는지, 수영의 눈매가 휘늘어졌다.
“왜요. 혹시 개인 정보 캐내서 기분 나빴어요?”
초반에 나이를 알려 주기 꺼렸던 건 끝까지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그랬기에 제 나이를 과대에게 물어본 것까진 상관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 동생 사이로 지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야 저는 짠돌이와 멀어져야 하니까. 이벤트에 참여한답시고 호텔에 갔던 날 내렸던 결단을 되새기며 진호가 눈꼬리를 모나게 세웠다.
“우리 이럴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이인데요?”
수영이 슬그머니 팔을 내리며 길가에 우뚝 섰다.
“그거야.”
당연히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수영을 마주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능청맞은 기색이 자취를 감추고 잔잔한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왜 네가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건데. 이러면 다른 답을 해야 할 것 같잖아. 진호는 애써 눈을 돌리며 수영에게서 멀어졌다.
“저는 갑, 수영 씨는 을. 계약서에 적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손을 탁탁 털며 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보지 않아도 축 처진 어깨가 눈앞에 선했지만 외면했다. 그러니까 본분을 잊지 마시라고, 짠돌이 씨. 진호는 수영을 앞서 걸어가며 찜찜한 마음을 털어 냈다.
* * *
“이 영화 엄청 슬프네요. 못 보겠어요.”
수영이 고른 영화는 흔하디흔한 줄거리의 멜로 영화였다. 가난한 여자 주인공이 돈 많은 남자 주인공을 만나 결혼하는 이야기. 지금 나오는 장면은 남자 주인공 집안의 반대로 두 주인공이 헤어지는 부분이었다.
-너같이 땡전 한 푼 없는 년한테 우리 아들을 줄 수 없어!
앙칼진 남주 어머니의 목소리가 화면을 뚫고 나올 듯했다. 수영이 질겁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와. 진짜 너무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죠? 돈 없는 게 무슨 죄라고.”
그렇지. 돈 없는 게 죄는 아니지. 하지만 돈이 있는데 못 쓰게 하는 건 죄라고 생각해. 그렇게 답했다간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 못 들은 척 입을 다물었다. 싸우면 질 것 같아서 이러는 건 맹세코 아니었다. 귀 따가운 건 싫으니까. 그것뿐이었다.
“로맨스 영화는 원래 다 이래요?”
수영이 들고 있던 팝콘을 한 움큼 쥐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씹는 소리가 요란한 걸 보니 열받은 것 같았다.
“글쎄요. 저도 잘 안 봐서.”
보면서 연애 얘기라도 할 줄 알았더니 여자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이나 하고 앉았다. 틀어진 계획에 진호가 새로운 방법을 찾던 중, 진동이 울렸다. 혜린이 또 아버지 일로 연락했나 싶어 찝찝한 채로 핸드폰을 집었다. 알림창을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수영 오빠 이상형이 뭐래요?]
밑에 같이 보낸 토끼 이모티콘이 방긋 웃으며 펄쩍 뛰고 있었다. 최정연이네. 진호는 망설이다 잘 모르겠대요, 라고 답장을 보냈다.
[더 자세히 알아봐 주시면 안 돼요?ㅠㅠ]
토끼 이모티콘이 귀를 접은 채 눈물을 닦고 있었다. 괜히 미안해진 진호가 알겠다며 답신했다. 곧이어 ‘고마워요!’라는 텍스트와 함께 기다란 귀로 하트 모양을 만드는 토끼 이모티콘이 대화창에 떠올랐다. 진호는 수영이 모르게끔 살포시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관찰했다. 때마침 여주에게 남주의 약혼녀가 찾아와 괴롭히는 중이었다.
“저 중에서 누가 이상형이에요?”
여주와 여주의 친구, 약혼녀와 약혼녀의 친구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여주는 발랄한 스타일, 여주의 친구는 청순한 스타일, 약혼녀는 성숙한 스타일이라 물어보기에 알맞았다.
“없는데요.”
딱 잘라 말하기냐. 진호가 김샌 얼굴로 팝콘을 씹어 먹었다.
“이상형 비슷한 거라도 없어요? 한번 만나 보고 싶다든지, 친해지고 싶다든지.”
“그런 건 왜 자꾸 물어요? 없다니까요.”
“진짜 없어요?”
꼬치꼬치 캐묻는 진호를 빤히 바라보던 수영이 포기한 듯 진지하게 TV 화면을 훑었다.
“이 중에서 고르자면 저 사람이요.”
수영이 가리킨 것은 여주의 친구였다. 진호가 호오, 하며 감탄사를 뱉었다. 드디어 알아냈다.
“청순한 스타일 좋아하네요.”
“그건 아닌데.”
수영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긴요. 피부도 하얗고 머리도 까만 게 딱 청순한 스타일이구먼.”
진호가 곧장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 수업 땐 청순하게 꾸미고 와요.]
정연에게선 금방 답이 왔다.
[청순하게요? 어떻게요?]
[집에 있는 원피스 중에 최대한 나풀거리는 거로 입고 와요. 밝은색에 가방도 작은 거로.]
[원피스가 없어요ㅠㅠ]
진호는 인터넷을 뒤져 청순해 보이는 원피스를 서너 개 골라, 구매 사이트를 링크로 보내 주었다.
[이런 거로 장만해요.]
[대박! 감사해요!!!]
그리고 그 밑에는 당근으로 하트를 그리고 있는 토끼 이모티콘이 있었다.
[내일 수업엔 예쁘게 입고 갈게요!]
진호는 네, 하고 단출하게 써서 대화를 마쳤다.
“아까부터 누구랑 연락해요.”
수영이 상체를 진호에게 가까이 내밀며 들고 있는 핸드폰을 쳐다봤다. 진호가 핸드폰 화면을 끄며 뒤로 숨겼다.
“저한테 신경 끄고 영화에 집중해요.”
“보고 있어요.”
보고 있긴 뭘. 용건을 마친 진호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소파에 파묻은 몸을 일으켰다.
“사생활이에요.”
기대해라. 네 이상형에 딱 맞는 여자 친구를 붙여 줘서 내 옆엔 서성이지도 못하게 만들 테니. 각오를 다지며 방문을 꽝 닫았다. 앞일을 모르는 수영은 덩그러니 소파에 남아 진호가 사라진 벽 너머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홀로 거실에 남은 수영은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치닫는 것을 지켜봤다. 어느샌가 악녀는 사라지고 남주와 여주가 여주 친구의 도움으로 다시 만나는 장면이었다.
「저 중에서 누가 이상형이에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많이 받아 왔다. 그때마다 수영이 대답할 수 있는 건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이상형 같은 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박히고부터는 돈 버는 데 혈안이었으므로. 학창 시절 친구들이 아무리 여자 얘기를 해도 저는 관계없는 것으로 여겼다. 왜냐, 연애란 곧 지출로 이어지니 가장 피해야 할 사안이었다.
「청순한 스타일 좋아하네요.」
청순한 스타일을 좋아했나? 수영이 까만 머리의 여주 친구를 무덤덤하게 쳐다봤다. 그저 저 사람의 까만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말에 진호 형을 떠올렸을 뿐이고. 그렇다고 해서 진호 형을 좋아하는 게 되나? 그건 모르겠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당신을 사랑해요.
-저도요.
극적으로 재회한 주인공들은 서로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며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격정적인 키스. 입술이 부딪치고,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목구멍 깊은 곳까지 온기를 탐하고.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수영은 삐딱하게 화면을 바라보며 두 주인공에 자신과 진호를 대입해 보았다. 만약 진호 형과 저런 행위를 한다면.
“뭐야.”
가랑이 사이가 일순 딱딱해졌다. 수영은 낭패라는 듯 제 바지춤을 들추었다. 이거 한번 이러면 가라앉기까지 시간 많이 걸리는데. 전에 수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씻었을 때도 하체에 생긴 이상 현상 때문에 혼이 났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방에 돌아와서 혼자 삭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 하얗던 목덜미와 보드라운 살결이 떠올라서.
“이젠 나도 모르겠다.”
수영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안 챙겨 먹으면 걱정되고, 어떤 사람과 친한지 궁금하고, 어려운 게 있으면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그게 우정과 다를 게 뭐지?
벌써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있었다. 리모컨으로 TV를 끈 수영이 부엌으로 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복잡한 속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일단 확인을 해 볼까.”
모르겠다면 해답을 알 때까지 가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수영은 난데없이 생겨난 퀘스트에 귀찮은 듯 혀를 차며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창을 띄웠다.
[좋아하다 뜻.]
검색 아이콘을 막 누르려는데 알림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메일 한 통이 와 있었다.
[★특별 경품 이벤트 당첨 축하 메일★
투나잇에서 개최한 경품 이벤트에 당첨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귀하는 사장님 배 ‘자극적인 커플 샷’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주소와 받으시는 분의 성명 또는 별명을 알려 주시면 3일 내로 상품을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추신.>
자기야. 잘 지내~? 나야.^^ 사내자식이 연애에는 통 관심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어디서 이런 이쁜 자기를 찾은 거야? 전에 우리 가게에서 낚은 손님이니?^^ 그 사건은 참작해 줄 테니, 혹시 여기서 다시 일해 볼 생각은 없어? 자기만큼 일 잘하는 애를 못 찾겠네~ 나는 언제든 환영이니 일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렴. 연애 상담도 언제든 OK란다.]
“엥.”
추신으로 덧붙인 글에는 누구라는 언급은 없었지만 말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투나잇의 대표 강 사장님. 이벤트에 당첨된 건 차치하고, 착오였지만 고객과의 연애를 이유로 해고했던 사장이 다시 근무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 왔다. 이벤트에 적어 낸 사연에는 서로 손님으로 만난 것처럼 지어냈고 사진도 음영 때문에 누구인지 몰랐을 텐데, 이력서에 있는 메일 주소를 보고 알아챘나. 수영이 턱 밑을 긁적이며 메일을 꼼꼼히 읽었다.
여기 대신 바에서 일해 볼까. 형에게서 떨어져 있다 보면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알게 될지도 모른다. 매일 살을 부대끼다 보니 헷갈리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고민하던 수영은 답장하기 버튼을 눌렀다.
[사장님. 좋은 제안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새 직장을 구해서 적응 중이라, 투나잇에서 일하는 건 어려울 듯싶습니다. 상품 감사드리고 다음에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른 수영이 후련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월급을 감안하면 바텐더는 경호 알바에 비할 바가 안 됐다. 이렇게 큰돈을 벌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마음이야 같이 있으면서 천천히 알아봐도 되는 거고.
그리고 이대로 멀어지는 건 아쉬우니까. 진호 형과 며칠 지내다 보니, 타인과의 벽이 남들보다 갑절은 두터운 형과 가까워지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친해지면 형의 다양한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수영 씨’ 같은 낯간지러운 수식어가 아니라 ‘수영아’라고 불러 줄 날도 오지 않을까. 제 이름을 불러 주는 진호를 연상하니 또다시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느낌에, 수영이 생각을 지우듯 세차게 발을 놀려 진호의 방으로 향했다.
“진호 씨! 얼른 문 열어 봐요!”
여느 때처럼 몇 번 문을 두드리고 나서 진호가 신경질을 내며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 기쁜 소식을 고용주님에게 전해 줄 시간이었다.
* * *
“오늘은 공지한 대로 인물 촬영 연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명 세팅은 미리 해 뒀고요. 각자 카메라 준비하세요.”
수영과 함께 교내 영상실에 도착한 진호가 카메라를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늘 아침에 받은 따끈따끈한 샬베스타의 카메라였다. 혹여나 흠집이 날까 주의하며 카메라를 든 진호가 기대에 부풀어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저한테 고맙다고는 안 해요?”
“제가 왜요?”
옆에서 똑같이 카메라를 살피던 수영이 –진호의 고장 난 카메라를 기어코 수리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진호의 카메라를 흘긋 보더니 팔꿈치로 옆을 쿡 찔렀다.
“제 덕에 그거 얻었잖아요.”
“그게 왜 수영 씨 덕이죠?”
“저 없었으면 못 받았을 거면서.”
“허.”
헛웃음을 뱉은 진호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카메라 전원을 켰다. 유명한 사람이 쓰던 거라 그런지 그립감이 남달랐다.
“수영 오빠.”
머뭇거리듯 손을 작게 흔들며 정연이 다가왔다. 살랑거리는 레이스 원피스에 청 재킷을 걸쳐 입은 채였다. 착실하게 내가 보내 준 대로 입었네. 괜찮은 그림에 진호가 흡족해하며 반갑게 맞았다.
“그 옷 되게 잘 어울려요.”
“고마워요, 선배.”
정연은 차려입은 제 모습이 어색한지 연거푸 양손을 꼼지락거렸다. 진호가 ‘그렇지 않아요?’ 하고 동의를 구하자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던 수영이 정연을 본체만체하며 그런 것 같네요, 하고 인사를 받았다.
“사진 모델이 필요한데, 자원할 사람 없어요?”
박 교수가 주위로 둥글게 모인 학생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
다들 멀뚱히 선 채로 눈치만 살피자, 박 교수는 팔에 끼고 있던 출석부를 올렸다.
“어쩔 수 없네요. 강제로 시키는 수밖에.”
모든 학생이 자신이 아니길 바라며 숨을 죽인 채 교수를 주시했다.
“누굴 고를까……. 서진호 학생?”
긴장이 감도는 찰나의 침묵이 끝나고, 학생들은 안도하며 굳은 얼굴을 활짝 폈다. 진호만 제외하고.
“얼른 나가 봐요.”
수영이 교수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진호의 등을 떠밀었다. 진호가 잔뜩 인상을 구기며 주춤주춤 중앙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토록 원하던 카메라도 얻었겠다, 원 없이 사진을 찍어 보려 했더니만 하필이면 모델로 걸려서.
“선배.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하고 와요.”
옆에 있던 정연이 경직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진호를 응원했다. 처연한 눈길로 정연을 바라보던 진호가 무언가 생각난 듯 수영을 정연에게 밀었다.
“정연 후배 좀 챙겨 줘요. 혼자 두지 말고.”
어쩌면 두 사람이 친해질 절호의 기회였다. 수영에게 정연을 부탁한 진호가 카메라를 가방 안에 도로 넣고는 교수에게로 걸어갔다.
“진호 학생? 여기 앉으세요.”
박 교수는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진호는 지시에 따라 무릎을 굽혀 걸터앉았다.
“여기 보면 조명이 두 개 있죠? 이 조명의 위치를 바꿔서 다양한 방식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 볼 거예요.”
교수가 벽에 기대 두었던 조명을 진호의 정면으로 가져오더니 LED 조명 판을 높이 올렸다.
“인물의 기본 조명 방식 중 하나인 버터플라이는 머리 위에서 비추는 방식이에요. 모델의 코 아래에 작은 그림자가 생기죠.”
박 교수가 진호의 코를 가리키며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잘 안 보이는 학생은 촬영하면서 자세히 보면 알 거예요. 이제부터 각자 나름대로 구도를 잡아서 찍어 보세요.”
“오빠. 이거 좀 봐 줄래? 화면이 너무 밝게 나와.”
설명을 듣던 정연이 수영에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중앙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학생들을 따라, 자리를 옮기려던 수영의 시선이 진호에게서 정연에게로 옮겨 갔다.
“줘 봐.”
카메라를 받아 든 수영은 버튼을 이리저리 눌러 보더니 금세 정연에게 돌려주었다.
“다시 봐 봐.”
“어. 이제 괜찮다.”
뷰파인더로 영상실 내를 바라보던 정연이 수영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역시 오빤 대단해.”
한편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뻣뻣이 앉아 있던 진호는 자세를 고정한 채 눈알을 굴렸다. 멀리서 보이는 정연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수영에게 조잘대고 있었다. 옆에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수영도 나쁘지 않은 듯 정연의 말을 편한 얼굴로 받아 주고 있었다.
알아서 잘하고 있는 것 같네. 눈을 정면으로 되돌린 진호는 눈길을 자꾸만 두 사람에게 주었다. 신경을 안 쓰려 해도 쓰인단 말이지.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조금 지나서 진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수영은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본격적으로 진호를 찍기 시작했다. 같이 온 정연도 수영의 옆에 한자리를 차지했다.
“고등학생 때 기억나? 나랑 마라톤 시합 나갔던 거.”
어디선가 봤던 구도를 얼추 맞추며 셔터를 내리던 수영에게 정연이 문득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어떤 거?”
“그거 있잖아. 우승하는 사람한테 아이스크림 쏘기로 내기했던 거.”
“아아.”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수영이 ‘아이스크림’이라는 단어에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아는 소리를 했다. 공짜로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을 요량으로 흔쾌히 응했었지.
“그때 내가 이기고 싶어서 2주 동안 특훈했었다? 오빠한테 아이스크림 얻어먹겠다고. 그래서 졌을 때 되게 분할 줄 알았어. 근데 막상 지니까 어땠는지 알아?”
정연이 뜸을 들이며 카메라를 목에 건 채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대단하단 생각뿐이었어. 나는 중학생 때부터 줄곧 선수 생활을 해 와서 자신 있었는데, 훈련받은 지 한 달도 안 돼서 오빠가 우승 차지하는 거 보고 많이 부럽더라.”
“그랬어?”
수영이 카메라를 내리며 벙긋거리는 정연의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지긋이 달라붙는 시선에 부끄러워진 정연이 살짝 눈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게다가 나 졌는데도 아이스크림 사 주고. 그때 되게 멋졌는데.”
수영이 무언가를 대꾸하려던 찰나였다. 뷰파인더로 진호에게 초점을 맞추던 수영의 시야에 거슬리는 게 포착되었다. 잘못 봤나. 눈을 비비며 쭉 내민 수영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목 끝까지 단단히 잠긴 셔츠를 지나던 시선이 허리 아래에서 멈췄다. 이거 빨리 알려 줘야 하겠는데. 수영은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진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진호 씨. 남대문 열렸어요.]
멀뚱히 앉아 있는 진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뒀나.
“오빠?”
대답이 없자 민망해진 정연이 수영의 팔을 툭 쳤다.
“난 다른 데서 찍고 있을게.”
수영이 바닥에 내려 두었던 카메라 가방을 챙겼다.
“어? 어.”
정연이 얼빠진 소리를 내며 빨개진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지금 혼자서 뭘 한 거야.
“그리고 너 이에 립스틱 묻었어.”
수영이 제 입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민망해진 정연의 얼굴이 장작에 불을 땐 듯 화르륵 타올랐다. 그래서 아까 빤히 본 거였어?
“어, 어디?”
다급히 손으로 입술을 더듬던 정연이 핸드폰으로 이리저리 입 안을 살폈다.
“여기.”
정연이 허둥지둥대자 수영이 제 앞니를 가리켰다.
“여기?”
“아니. 좀 더 앞에.”
답답해진 수영이 정연의 손을 잡더니 빨개진 이를 쓱 짚었다.
“됐지?”
정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영이 얼른 정연을 지나쳐 진호의 앞으로 향했다.
쟤들 뭐 하는 거야.
20분째 부동자세로 있던 진호가 수영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친해졌는지 수영이 손으로 정연의 입가를 쓸어 넘기는 게 보였다.
벌써 저런 단계까지 갔다고? 뭐야. 이거 안 도와줘도 잘되겠네. 진호는 어딘가 찝찝한 심기를 감추려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고정했다. 누구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앉아 있느라고 목이 뻐근해 죽겠는데.
“저기. 얼굴이 자꾸 움직이는데 가만히 계셔 주시겠어요?”
앞에서 사진을 찍던 한 학생이 진호에게 역정을 냈다.
“아, 네.”
머쓱해진 진호가 헛기침하며 꼿꼿하게 고개를 세웠다. 그때 눈앞에 주저앉은 수영이 보였다. 최정연은 어디 두고. 혼자 있는 수영을 보자니 씁쓸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 남대문 열렸어요.”
진호를 마주 보며 수영이 소리를 죽인 채 크게 입술을 움직였다. 진호는 수영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라는 거야.
“남대문 열렸다고요. 지퍼.”
수영이 허리를 앞으로 내밀며 더욱 크게 입을 벌렸다.
“집에 가고 싶다고요?”
진호가 수영만 알아챌 만큼 입술을 작게 오므리며 물었다. 수영은 도리도리 고개를 젓더니 아래를 가리켰다. 정확히 제 물건을 향하는 손가락에 진호가 그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미친 거 아니야?”
주변을 의식한 진호는 금세 입을 다물고는 수영을 피해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저 새끼가 드디어 맛이 갔나. 짠돌이, 촉새도 부족해서 변태 타이틀까지 얻고 싶은 건가. 하지만 수영은 일렬로 선 사람들 앞을 용감히 지나쳐 나와 진호의 시야에 다시 포착됐다.
“바지 지퍼 열렸다니까요.”
수영이 바지 앞섶을 내렸다 올리는 시늉을 하며 열심히 위급상황을 알렸다. 이 새끼 또라이 아냐. 손을 오므린 채 배꼽 아래를 위아래로 흔드는 동작에 진호는 당황해서 그만하라고 고함이라도 쳐야 하나 고민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진호 탓에 애가 탄 수영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을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모델이었던 진호는 아무런 동작도 취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수영의 행각에 질린 진호가 재차 자세를 옮겼다. 그러자 눈앞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키며 키득키득 댔다. 뭐지. 뭘 보고 웃는 거야.
“교수님. 휴식 시간 좀 가지면 안 됩니까?”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수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의 이목이 진호에게서 수영에게로 옮겨 갔다.
“그럴까요? 모델도 잠시 쉴 겸.”
교수가 흔쾌히 허락하자 수영은 쾌재를 불렀다. 학생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이 수영이 일어서는 진호에게 달려갔다.
“저리 가세요.”
곁에 달라붙은 수영을 벌레 보듯 쏘아본 진호가 그를 저 멀리 밀어내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잠깐 제 말 좀 들어 봐요.”
“저는 할 말 없는데요.”
어떻게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짓을. 진호가 찰나의 눈길조차 아깝다는 듯 쌩하니 영상실을 나가자 수영이 다급히 쫓아갔다.
“잠깐만요. 진호 씨.”
“왜 따라와요?”
진호가 수영을 따돌린 채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쳤다. 이상하게 사람들이 유독 저를 –얼굴도 아닌 하반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별일 아닌 것으로 넘겼다.
“진짜 급한 거예요. 멈춰 봐요.”
“정연 후배 안 챙겨요?”
“그럴 때가 아니라.”
“그냥 꺼지면 안 돼요?”
기어코 화장실까지 따라온 수영 때문에 탈출구를 잃어버린 진호가 잔뜩 경계한 채로 빈틈을 찾았다. 마침 저를 막느라 벌어진 겨드랑이 사이의 공간이 보였다. 그래. 지금이다.
“어딜 가요.”
급하게 빠져나가려다 수영에게 허리를 붙잡힌 진호가 벽으로 밀려났다.
“아까부터 뭐 하는 짓이에요?”
“진호 씨.”
수영이 진호를 화장실 한쪽 구석으로 몰아세우며 두 팔 안에 가두었다. 덫에 걸린 쥐처럼 영락없이 갇힌 진호가 허리를 뒤틀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철통같은 방어에는 소용이 없었다. 지금 이 안에 아무도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진호가 주위를 돌아보며 안심했다.
“오늘 파란색 팬티 입었죠.”
뭐래. 이 변태가. 진호가 난색을 보이며 혐오를 가득 담은 눈으로 수영을 노려보았다.
“맞고 싶어요?”
진호가 재차 탈출을 시도하며 수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세게 찍었다. 수영이 아파하는 틈에 빠져나가려 했던 계획과 달리, 한발 빨랐던 수영이 팔을 붙잡은 바람에 찐빵처럼 수영에게 눌린 꼴이 되었다.
“아, 좀 놔요!”
떨쳐 내려는 진호를 쉽게 제압한 수영이 귓가에 입술을 댔다. 갑자기 닿는 따스한 기운에 진호가 등을 잔뜩 웅크렸다.
“형.”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몸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허리를 붙잡은 손이 억세게 안으로 휘감아 왔다. 진호는 나른해짐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수영의 입술이 벌어졌다.
“남대문 열렸다고요.”
예상치 못한 내용에 진호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헉, 씨발.”
지퍼가 입을 활짝 벌린 채 진호를 맞이하고 있었다. 게다가 눈치 없이 새파란 속옷이 고개를 빠끔 내밀고 있었다. 어쩐지 아래가 시원하더라니. 진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윽. 쪽팔려.”
거기서 사진 찍던 사람들은 다 봤을 거 아니야. 충격에 머리끝까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본 사람 저 말고 별로 없을 거예요.”
수영이 마주 앉아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누가 뭐라고 하면 제가 아주 말도 못 꺼내게 혼쭐을 내 줄게요. 됐죠?”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요. 진호가 무릎 사이에 이마를 파묻은 채 호흡을 골랐다. 괜찮아. 서진호. 눈치챈 사람도 얼마 없었을 거야. ……는 개뿔. 동네방네 소문나면 어떡하지.
“걱정하지 마세요. 그거 가지고 놀리는 놈 있으면 이거라도 채워서 데려올 테니까.”
수영이 허리춤에서 수갑을 짤랑 꺼냈다. 그래도 안심이 되긴 하네.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온기에 차분해짐을 느끼며 진호가 긴장을 풀었다. 짠돌이 자식. 영 쓸모없을 줄 알았는데 이럴 땐 도움이 되는군.
그때 화장실 칸 안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며 과대가 불쑥 튀어나왔다.
“두 사람, 대낮부터 오붓하네요.”
귀에 이어폰을 낀 과대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세면대에 손을 씻었다.
“아, 아니야. 이건.”
뒤늦게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수영을 밀쳐 낸 진호가 벌떡 일어나 출구로 걸어 나갔다.
“형! 괜찮아요?”
“형 아니라니까요.”
진호가 수영을 진하게 노려보고는 복도로 빠져나갔다. 빠르게 쫓아가는 수영을 눈으로 좇던 과대가 물기 묻은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역시 사이가 좋다니까.”
* * *
화장실에서 돌아오니 다들 카메라를 든 채 모여 있었다. 떳떳하게 낯을 보이는 게 창피해 숙인 채 들어갔더니 일제히 저를 향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모델이 왔으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찍어 볼까요?”
홍해 갈라지듯 길을 턴 사람들 사이를 쭈뼛거리며 들어서던 진호를 수영이 가로막았다.
“교수님. 이번엔 제가 모델을 맡겠습니다.”
“진호 학생을 대신해서 하겠다는 건가요?”
“네. 몸이 안 좋다고 해서요.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영이 얼떨떨한 진호를 제 뒤로 보내며 씩 웃었다.
“뒤에서 쉬고 있어요. 제가 모델 할 테니까.”
“그럼 학생이 와서 여기 앉아 봐요.”
박 교수가 수영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이걸로 목이라도 축여요.”
수영이 의자 쪽으로 방향을 틀기 전, 진호에게 생수병을 건넸다. 극성 짠돌이가 무슨 일이람. 진호가 얼떨결에 물병을 받았다. 필시 어디서 공짜로 얻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돈 드는 짓을 자처할 리가.
“이 정도면 품위 유지는 된 거죠?”
수영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몇 분 전까지 진호가 앉았던 의자로 걸어갔다. 품위는 진작에 떨어졌는데. 못 미더운 듯 눈가를 좁히던 진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듯싶더니 즉시 제자리를 찾았다. 저 새끼가 예뻐 보인다니. 정신 차리자.
“선배. 많이 안 좋아요?”
어느새 옆엔 정연이 버티고 서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괜찮아요. 촬영하러 가세요.”
“그래도.”
선뜻 발이 떼어지지 않는지 시원한 눈꼬리가 진득하게 마주해 온다. 진호는 이참에 수영과의 진도를 물어보기로 했다.
“수영 씨랑은 친해졌어요?”
“진전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지만 전보다는 가까워진 것 같아요.”
손잡는 정도면 큰 발전이지. 진호는 정연에게 묻은 걸 손수 짚어 주던 수영을 떠올렸다.
“다행이네요.”
옅게 피어오르는 홍조를 포착한 진호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분명 기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다음엔 셋이서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요?”
“그거 말고.”
그래. 기대한 것보다 진전된 게 없어서 아쉬운 거야. 진호가 다음 단계로 더욱 강력한 수단을 궁리했다.
“데이트 제안해 보는 거 어때요?”
“데이트요?!”
정연이 생각지도 못한 듯 정색을 하며 펄쩍 뛰었다.
“손잡았으면 거의 된 거니까 이때 밀어붙여야죠.”
“어떻게요?”
“같이 영화 보자고 해 봐요.”
“수영 오빠는 영화 별로 안 좋아하는데.”
“같이 본 적 있는데 잘 보던데요.”
“그 오빠가요? 그럴 리 없어요.”
정연이 큰 눈을 번쩍 뜨더니 느리게 깜빡거렸다.
“공짜로 얻은 영화표도 안 쓰고 버리기 아깝다고 남 주는데요.”
지난 주말엔 영화를 억지로 봤다는 거잖아. 말이 안 되는데. 제가 아는 수영과 상반된 얘기에 혼란스러웠지만 의미를 두진 않았다. 어쨌든 데이트 비슷한 거면 되니까.
“그럼 수영 씨랑 같이 볼만한 거 고민해 봐요. 전시회라든가.”
“네……. 근데 선배. 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자신 없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던 정연이 진호에게 바짝 다가왔다.
“선배랑 오빠는 친하면서 왜 서로 존댓말 써요? 서로 진호 씨, 수영 씨 하던데.”
“친하다뇨? 전혀 안 친한데요.”
“아닌데. 수영 오빠 하는 거 보면 정말 친한 거 맞는다니까요.”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왜 자꾸 맞는다고 단정 짓는지 모르겠다. 진호가 포기한 듯 이마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리 부정해도 정연은 둘 사이가 특별하다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아, 알았다. 선배, 낯가리는 스타일이죠? 그래서 저한테도 존댓말 쓰는 거죠?”
알아챘다는 듯 정연이 눈가를 빛내며 목소리를 키웠다.
“아니…….”
남들과 거리를 두는 편이긴 해도 저마다 이유는 있었다. 수영과는 일적인 관계이니 거리를 두는 것이고, 정연과는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구태여 말을 놓지 않은 것이었다.
“편하게 반말 쓰셔도 되는데. 선배한테 존댓말 듣는 제가 다 불편해요.”
정연의 반응은 십분 이해한다. 저도 이전엔 말을 쉽게 놓는 편이었으니까. 계약서를 썼던 날, ‘진호 씨’라고 부르라고 하자 수영이 과장되게 어깨를 떨었던 것도 그럴 수 있다고 간주하고 있었다. 근데 그 새끼랑은 그러는 게 맞지. 짠돌이랑은 앞으로도 영원히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정연은 후배인 데다 앞으로 계속 볼 사이니 보호벽을 내려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럼 편하게 반말 쓸까?”
“좋아요!”
“둘이서 뭔 얘길 그렇게 해요?”
수영이 불쑥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촬영 끝났어요? 벌써?”
진호가 왼손에 걸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대화하는 사이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여러분. 다음 시간까지 과제가 있습니다.”
박 교수가 양손을 허리에 짚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오늘 배운 조명 방식을 이용해 자유 주제로 사진을 찍어 오세요. 반드시 인물이 있어야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늘어져 있던 진호의 어깨가 펴졌다. 드디어 촬영 과제다.
“집에 가죠.”
수영이 진호의 가방을 챙기며 정연을 슬쩍 바라봤다.
“우린 먼저 갈게.”
“…….”
정연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수영이 진호를 쳐다보더니 한마디를 더 보탰다.
“아니면 너도 태워 줄까?”
“정말?”
정연이 눈을 두 배로 키우며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야 고맙지.”
얘네 어느 틈에 이렇게 친해진 거야. 진호가 멍하니 두 사람 사이를 훑어보자 수영이 맑은 눈으로 응답했다. 마치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이.
“좋은…… 생각이네요.”
둘이 더 친해지면 좋은 거지. 진호가 동의하자 수영이 앞서 걸으며 영상실을 나섰다.
“전 차 빼 놓을게요. 1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 * *
“둘이 같이 살아요? 같이 차 타고 돌아가길래.”
뒷좌석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종알거리던 정연이 궁금한 듯 앞으로 나오며 화제를 돌렸다.
“음. 네. 아니, 응.”
계약 관계는 몰라도 동거하는 것 정도야 알려도 상관없겠지. 진호가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사실을 실토했다. 말을 놓기로 한 게 생각나서 급하게 답을 수정했더니, 운전대를 잡은 수영이 힐끔 옆을 쳐다봤다.
“어쩌다 같이 살게 됐어요?”
“벨트 매고 앉아. 앞으로 계속 튀어나오면 다쳐.”
“으응.”
난데없는 수영의 잔소리에 정연이 민망해하며 바르게 고쳐 앉았다. 룸 미러로 얼핏 본 표정이 기뻐 보였다.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건가. 이대로라면 내 도움 같은 건 필요 없겠는데.
[선배 저 어떡해요ㅠㅠ 심장 터질 거 같아요ㅠㅠㅠㅠㅠㅠ]
정연이 보낸 메시지 아래엔 낯익은 토끼 이모티콘이 귀를 배배 꼬며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체대 여신이라 해서 연애 경험도 많을 줄 알았더니 이런 데 하나하나 설레는 숙맥인가 보다. 진호가 의외라는 생각에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웃어요?”
수영이 궁금한 듯 진호를 흘겨보았다. 진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냥 웃긴 게 떠올라서요.”
“뭔데요?”
“상관없잖아요.”
“맨날 그 소리네. 섭섭하게.”
[앞으로 차 탈 때마다 생각날 거 같아요ㅠㅠ 엉엉.]
정연은 둘의 대화는 들리지도 않는지 수영이 무심코 던진 대사에 거나하게 취해 버렸다.
[진정하고, 수영 씨 어디 데려갈지나 생각해 놔.]
진호가 채팅창을 닫으며 급히 대화를 종료했다.
“이쯤에서 내려 주면 돼?”
정연이 주소로 불러 준 건물 근처에서 수영이 속도를 줄였다.
“맞아. 여기.”
정연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차창을 두드렸다.
“조심히 가고 잊은 거 없는지 챙겨.”
수영이 도어 록을 해제하며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다음에 보자.”
“응. 고마워요!”
정연이 차에서 내리며 수영과 진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수영과 마주 보는 입가가 활짝 펴졌다. 문이 닫히고, 수영이 다시 액셀을 밟으며 진호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뭐 어떻길래. 사이드 미러로 얼굴을 비추자 구겨진 미간이 눈에 띄었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눌러 잠재우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다음에 보자라니ㅠㅠ 수영 오빠ㅠㅠㅠㅠ]
“정연 후배 어때요?”
“어떻냐니요?”
수영이 왼손으로 운전을 하며 오른손으로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수정했다.
“여자로서 어떻냐고요.”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괜찮지 않아요? 예쁘고 성격도 좋고, 청순한 면도 있고.”
“괜찮죠. 객관적으로 보면.”
“그럼 사귀어 봐요.”
빨간불 앞에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수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진호를 쳐다봤다.
“얼마 전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네. 걘 그냥 고등학교 후배예요.”
“잘해 주는 거 보니 가능성이 없진 않던데.”
“아니, 언제는 잘 챙겨 주라면서요.”
수영은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 거칠게 핸들을 꺾었다. 이 형이 지금 장난하나.
“좋아하는 건 진호 씨 아니에요?”
“네?”
차창 너머를 보던 진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제가 걜 왜 좋아해요.”
“아까 친하게 반말 쓰던데요. 곧 오빠, 자기 하게 생겼네.”
“수영 씨나 그렇겠죠. 나한텐 맨날 시비 걸면서 정연 후배한텐 친절하잖아요.”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응’이라고 한 번 대답한 게 뭐라고.
“봐 봐. 나한텐 칼같이 ‘수영 씨’라 부르면서. 차별하는 거 봐.”
“그건 후배니까.”
“나도 마찬가지라고요.”
맞서서 진호를 쏘아보던 수영이 진지한 진호의 얼굴을 보더니 픽 웃었다.
“왜요?”
“이러고 있는 게 꼭 커플끼리 다투는 거 같지 않아요?”
“커플이라뇨? 어디가?”
진호가 질색하며 인상을 잔뜩 구겼다. 이 짠돌이가 미쳤나.
“걱정하지 마세요. 한눈 안 팔 테니.”
수영이 얌전히 놓인 진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갰다. 진호에 의해 금방 내쳐졌지만.
“저는 형 옆에만 있을게요.”
“징그럽게 왜 이래요?”
질겁한 진호는 ‘형’이라 부른 것을 지적하는 것도 잊은 채 최대한 수영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문으로 당겨 앉았다.
“그게 제 본분이니까요. 그렇죠?”
수영이 굳어 버린 진호가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뻗었던 손을 핸들 위로 올렸다.
“운전이나 잘해요.”
진호가 친히 고개를 앞으로 돌려주며 콧방귀를 꼈다. 분명 짠돌이 새끼가 최정연과 잘돼야 앞날이 편해질 텐데. 그러려면 또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부터 생각해 보지, 뭐. 진호가 차창을 내리며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았다. 날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