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1화>
211화. 두 달 남았군요
감독의 현장 감각 부족이 문제가 된다면, 배우들의 도움을 받아 아쉬운 부분을 채우자.
그것이 최한수 감독이 떠올린 최선의 방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다. 감독의 역량이 부족해서 배우의 도움을 받겠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최한수 감독은 이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위장취업』은 내 은퇴작이다. 내 기여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좋은 작품으로 대중들의 기억에 남느냐가 더 중요해.’
최한수 감독은 은퇴를 앞두고 있다.
마지막 작품이니만큼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게 중요하지, 자신의 기여도나 감독으로서의 권한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또한 『위장취업』의 장르는 코미디다.
가장 많이 메가폰을 잡은 장르를 은퇴작으로 선택했는데 고배를 마신다면, 은퇴를 한 이후에도 줄곧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이는 최한수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마무리해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은퇴 이후의 삶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무한정이라……. 부담스럽지만 감독님을 도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시현은 최한수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회귀 전에도 최한수 감독은 『위장취업』의 제작을 앞두고서 오랜 시간 현장을 떠나 있었기에 자신의 감이 떨어진 건 아닐까 걱정했고, 배우들의 권한을 늘리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좋은 선택이었다.
배우들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덕분에 『위장취업』은 개봉 초기부터 호평을 받으며 8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으니까.
다만 회귀 전 『위장취업』을 촬영할 당시 안시현은 그리 많은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주연 배우로서 합당한 권한을 지니고 있음에도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듣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안시현이 『위장취업』 전에 주연을 맡았던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며 주연보다는 조연이 어울린다는 평가로 인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아이디어와 피드백은 또 다른 주연 배우인 손해수, 그리고 중견 배우들을 통해 이뤄졌다.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할 거야. 그러면 800만을 넘어서 1000만 관객도 가능할 거야.’
『위장취업』이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배우들은 『위장취업』에 출연한 이후 인터뷰를 통해 아쉬움이 남았던 몇몇 부분들에 이야기했다.
조금만 더 잘했더라도 800만이 아니라 1000만 관객을 돌파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시나리오의 매력을 100% 살려 내지 못했다고 말이다.
최한수 감독으로부터 회귀 전에 소폭 달라진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를 받은 뒤, 안시현은 어떻게 하면 회귀 전에 아쉬움이 남았던 부분들을 보완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답을 도출해 냈다.
물론 배우로서의 권한 이상으로 아이디어를 낼 생각은 없었다. 회귀 전 연출적으로 몇몇 아쉬움이 남았던 부분들에 한해서만 의견을 낼 생각이었다.
이를 통해 『위장취업』이 회귀 전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기를 바랐다. 800만 관객을 넘어 1000만 관객으로 시선이 맞춰졌다.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감독으로 은퇴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 * *
최한수 감독의 귀국 열흘 후.
충무로에 위치한 영화 제작사 혜인원의 사무실에 안시현과 최한수 감독이 방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아, 동생』을 함께했던 감독과 두 주연 배우가 간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오랜만은 무슨. 김 대표님 은퇴식 때 봤잖냐. 감독님은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셋이 모인 건 제 결혼식 이후 처음이지요?”
“허허허. 아영 씨는 잘 지냅니까?”
“네. 늦둥이를 봐서 그런지 한동안 복귀 생각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 복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영이가 좋아하는 뮤지컬의 캐스팅 제안을 받았거든요.”
“역시 배우는 연기를 해야죠. 아영 씨야 연기력이 워낙 탄탄하니 복귀해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겁니다.”
“네. 저도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손해수와 이아영의 결혼식 이후 간만에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해후를 풀었다.
한참 뒤.
최한수 감독이 가방에서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를 꺼내 손해수에게 건넸다.
“전화로 말씀드렸던 시나리오예요. 충분히 검토하고 나서 답해 주시면 됩니다.”
“아뇨. 지금 바로 답하겠습니다.”
손해수가 씨익 웃으며 『위장취업』의 캐스팅 제안에 대해 시원시원하게 답을 했다.
“계약서 바로 작성하시죠. 시놉시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최 감독님의 은퇴작인데 시나리오가 별로일 리가 있나요? 무엇보다…… 제 이미지가 좀 굳어진 경향이 있잖아요?”
손해수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다. 그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다만 어느 정도 이미지가 굳어진 게 사실이다. 대중들은 손해수라는 배우에 대해서 카리스마 있고 진중한 분위기를 이미지를 떠올렸다.
손해수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시도를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마땅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큰 결심을 내렸다. 더 이상 이미지가 굳어지기 전에, 코미디 영화에 출연해서 이미지 변화를 시도하자고 말이다.
어느 정도 보험을 든 채 새로운 시도를 했던 이전과 달리, 배수진을 치고서 사활을 걸고서 『위장취업』에 매달릴 생각이었다.
그만큼 손해수는 자신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걸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손해수라는 배우가 다양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확실히 이미지가 굳어지면 곤란하긴 하죠. 개인적으로 손 배우는 다양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작품 운이 없기에 상대적으로 평가가 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한 가지 스타일의 연기밖에 하지 못한다면 제가 캐스팅을 제안할 리가 없었겠죠?”
“하하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서 좋은 연기를 보여 주더라도, 작품이 흥행하지 않으면 저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손해수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다양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음에도, 새로운 시도를 했던 작품들이 모두 흥행에 실패하며 대중들이 생각하는 손해수의 이미지가 굳어지고 말았다.
항상 좋은 연기를 보여 줬음에도 말이다.
“그나저나…… 시현이 너랑 이렇게 다시 호흡을 맞출 줄은 몰랐네. 이야, 『형아, 동생』 때랑은 입장이 너무 달라져서 부담스러운데?”
“에이. 제 눈치 보면서 연기하실 거 아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우리 막내가 이렇게 성장한 거 보니까 눈물이 다 날 것 같네. 조만간 같이 연습할까?”
“저야 그러면 좋죠.”
류성웅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 안시현은 홀로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함께 『위장취업』을 이끌어 나갈 손해수와 연습을 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한편.
최한수 감독이 스토리 라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아이디어 제안을 얼마든지 해도 좋다고, 배우들의 권한을 높일 거라고 말하자 손해수의 두 눈이 커졌다.
어떻게 보면 감독으로서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한을 내려놓는다고 봐도 될 상황이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제 권한보다 『위장취업』의 흥행이 더 중요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자유롭게 의견 제시해 주세요. 도움이 되는 의견은 모두 수용하겠습니다.”
“……네.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권한이 커졌다는 건 그만큼 책임감 또한 커졌다는 뜻이다. 책임 없는 권한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
손해수가 의욕을 불태웠다.
권한이 커진 만큼, 긍정적인 아이디어들을 통해 『위장취업』을 성공시키리라고 말이다.
* * *
최한수 감독은 당초 의도했던 배역을 모두 캐스팅하는 데에 실패했다.
조연 배역에 캐스팅 제안을 받은 세 배우가 스케줄 문제를 이유로 난색을 표했고, 후보군 중에서는 확실히 마음에 드는 배우가 없어서였다.
이에 조연 배역 셋과 단역을 포함한 공개 오디션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디션 일정은 12월 중순으로 잡혔다.
이에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과 손해수에게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참가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안시현은 정중히 거절 의사를 드러냈다.
“전 연습에 집중할게요.”
“알겠습니다. 손 배우는요?”
“시현이가 참여 안 한다면 저라도 해야죠. 오디션 끝나고 감독님이랑 셋이 밥이나 같이 먹자. 어떤 배우가 캐스팅될지는 너도 알아야지.”
“네, 그럴게요.”
오디션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촬영 일정이 잡힐 예정이다. 빠르면 2016년 1월에서 2월, 늦으면 3월에서 4월 사이에 크랭크인을 할 예정이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고 할 시간이 남아 있다.
안시현은 12월까지는 기존처럼 주말에만 연습을 하다가, 2016년이 되면 매일같이 연습을 하며 박철우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일 생각이었다.
사실 안시현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이토록 철저하게 캐릭터를 구축하는 게 과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토록 바라던 곽상필의 작품에서 주연을 맡겠다는 꿈이 이뤄진 『편지』때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안시현은 지금의 준비 과정이 결코 과하다가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작품이었다면 모를까, 『위장취업』은 이렇게 해도 부족할 수도 있어.’
타인이 아닌 자신과 경쟁해야 한다.
최대한 철저하게 준비하는 게 정답이지만, 웬만큼 준비해도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최대한 준비해야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12월 말.
『위장취업』의 공개 오디션이 진행됐다.
그 결과, 캐스팅에 난항을 겪었던 세 조연 배역은 모두 새 얼굴이 발탁됐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 한 명과 이제 갓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신인 배우,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오디션에 응한 신인 배우가 캐스팅됐습니다. 아마 안 배우도 대본 리딩 때 보면 만족할 겁니다. 다들 연기력이 아주 기가 막혀요.”
“캐스팅이야 감독님과 해수 선배님이 알아서 잘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혜인원과의 상의 끝에 크랭크인 일정이 확정됐습니다.”
그 순간.
안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겹도록 연습을 하며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위장취업』의 크랭크인 날짜가 확정됐다.
“언제인가요?”
“내년 2월 18일, 설 연휴 다음 주 목요일입니다.”
“정확히 두 달 남았군요.”
“대본 리딩은 다음 달부터 진행될 겁니다.”
크랭크인까지 남은 시간은 두 달.
‘슬슬 작정하고 준비해야겠네.’
안시현은 연습에 전력투구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대본 리딩은 언제부터인가요?”
“1월 9일부터입니다.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배우들에게는 촉박한 스케줄이지만, 촬영 일정을 넉넉하게 잡았으니 준비에 차질은 없을 겁니다.”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 『위장취업』은 7개월 동안이나 촬영을 했다. 대한민국 코미디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됐고, 그만큼 최한수 감독과 배우들이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혜인원에서는 『위장취업』이 2017년 초에 개봉하기를 바라고 있는 상황이다. 촬영 일정이 길다는 걸 감안하면, 최대한 크랭크인을 앞당겨야 일정을 맞출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정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잘 준비해 올 배우는 잘해 오고, 아닌 배우들은 안 해 오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건 그렇긴 하죠.”
“선배님, 크리스마스 다음 날부터 저랑 함께 연습하시겠어요?”
“나야 좋지. 간만에 JM액터스 밥 좀 먹어 보자. 거기 구내식당 밥맛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요즘은 더 맛있어졌어요.”
“오. 기대되는걸?”
안시현과 손해수가 대본 리딩과 크랭크인을 앞두고 함께 연습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