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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82화 (18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83화>

183화. 확정됐습니다

안시현과 하정남이 양손에 분식을 한 가득 들고서 녹음실을 방문했다. 프로듀서가 한식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함께 식사를 하려고 준비한 것이었다.

“오, 김밥!”

“일단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하죠.”

프로듀서는 안시현이 사 온 분식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떡볶이를 조금 매워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계속해서 먹으며 안시현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식사 후.

양치를 하고 돌아온 프로듀서가 컴퓨터 앞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작업하면서 고민이 좀 많았어요. 녹음한 것들을 어떻게 짜깁기해야 좋을지 감을 잡기 어려웠거든요. 결과물이 전부 다 좋다 보니…….”

프로듀서가 작업을 하면서 고민을 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결과물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었다.

연기를 하듯이 녹음을 한 판단 덕분에 안시현의 역량 이상으로 좋은 결과물이 나왔고, 이에 어떤 식으로 곡을 완성시켜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긴 고민 끝에 프로듀서는 어렵사리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가장 녹음이 잘된 걸 통째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약간의 보정만 더해서요.”

짜깁기를 할 필요 없이, 그냥 제일 잘 녹음된 결과물을 보정해서 사용하자고 말이다.

“한번 들어 보고 판단해 주세요. 마음에 안 든다면 원래 하던 방식으로 다시 작업할 테니까.”

프로듀서는 곧장 완성된 OST를 들려줬다.

기껏 하루 종일 녹음해 놓고 결과물은 하나만 썼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던 안시현이었지만…….

완성된 OST를 듣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완성된 OST가 그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은 것이다.

연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노래한 가사와 잔잔한 멜로드가 아주 잘 어울렸다. 흡사 70년대 올드 팝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안시현이 부른 노래 중 가장 잘 나온 걸 보정해서 OST를 만든 덕분인지, 각 잡고 만든 느낌보다는 라이브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욱 좋았다.

흡사 데이비드 킴이 헬렌 킴을 위해 노래를 불러 주는 듯한 느낌이 났으니까.

‘괜히 몸값 높은 프로듀서가 아니구나.’

안시현은 새삼 자신의 눈앞에 있는 프로듀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실감했다.

2019년을 기준으로 빌보드 차트 1위 달성 곡을 무려 8곡이나 만들어 내며 가수들이 가장 작업하고 싶어 하는 프로듀서 1위를 차지했던 사내.

이 모든 게 2008년 이후에 이뤄 낸 성과다.

완성된 OST를 듣고 나니 어째서 그가 회귀 전에 대단한 성과를 이뤄 냈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가창력만 놓고 보면 가수들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안시현의 단점을, 데이비드 킴이 헬렌 킴에게 불러 준다는 OST의 콘센트를 충실히 살리며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켜 버렸다.

몇 번을 들어 봐도 감탄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OST가 나왔다.

“분위기 장난 아니에요. 이거 그대로 음원 내면 대박 날 것 같은데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뒤자르댕 감독님과 JP스튜디오 측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지만, 문제가 없다면 이 상태로 OST 작업을 마무리할 것 같습니다.”

“아마 문제없을 겁니다. 이렇게 노래가 좋은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안시현은 JP스튜디오와 기욤 뒤자르댕이 이대로 OK 사인을 낼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을 데리고 OST를 녹음해서 이보다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지 않았으니까.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마음 같아서는 느긋하게 관광이라도 하고 싶지만, 내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바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작업이 더 남아 있어서요.”

“돌아가면 기욤 감독님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할 일이 또 있으면 연락 주세요. 안시현 배우님의 작품이라면 OST 작업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연락처 교환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언제든 편하게 연락 주세요. 특히나 한국 놀러 오면요.”

할리우드에서 연기할 기회가 다시 올까 싶었다.

사실 『Timeless』도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게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고, 다른 감독의 작품이었다면 심사숙고 끝에 다른 작품을 선택했을 거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흔쾌히 연락처를 교환했다.

설사 할리우드에 다시 한번 발을 내딛지 않더라도, 친분을 다져 놔서 손해 볼 건 없다고 판단했다.

몇 주 후.

프로듀서로부터 받은 문자를 통해서 안시현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신이 OST를 작업한 뒤,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 또한 OST에 참여했다는 걸 말이다.

『Timeless』의 메인 OST 세 곡을, 주연 배우들이 나란히 부르게 된 것이다.

*   *   *

OST 녹음 이후.

연말까지 안시현의 외부 스케줄은 단 하나도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스케줄이 존재하지 않았다.

안시현이 스케줄 소화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Timeless』 개봉 전까지는 스케줄 소화 안 하고 푹 쉬고 싶어요. 어차피 그 이후에 인터뷰고 방송 출연이고 지긋지긋하게 해야 하잖아요?”

문자 그대로 온전한 휴식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자잘한 외부 스케줄조차 소화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에 김진석 대표가 흔쾌히 응했다.

단, 조건이 하나 붙었다.

“대신 『Timeless』 개봉 전후로 스케줄이 좀 빡빡할 거야. JP스튜디오 측에서 주연 배우들이 최대한 홍보에 참여해 줬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췄고, 우리 입장에서도 네가 스케줄이 빡빡할수록 이득이니까.”

『Timeless』의 개봉 전후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와. 저 내년에 계약 만료인데 그렇게 해도 돼요?”

“이번 기회에 종신 계약을 하는 건 어때?”

“그럴까요?”

안시현은 계약과 관련된 농담을 주고받으며 흔쾌히 김진석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Timeless』 이후에도 한참 동안 휴식이 예정되어 있다. 김희숙 작가가 대본 집필을 마무리할 때까지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해도 된다.

때문에 『Timeless』의 개봉 전후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안시현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게 됐다.

JM액터스 내부에서도 안시현의 근황에 대해 아는 건 극소수일 정도로, 작정하고 별장을 벗어나지 않은 채로 라온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한 달에 한 번.

하정남이 별장을 방문해서 안시현의 근황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가는 걸 제외하면, 별장을 방문하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칩거였다.

12월 초의 어느 날.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가운데, 안시현 부부의 별장 주차장으로 밴 한 대가 들어왔다.

하정남이 몰고 다니는 회사 차량이었다.

외손에 케이크를 든 채 하정남이 차에서 내렸다. 마당으로 발을 내딛자 현관문을 연 안시현이 라온이를 품에 안은 채 마중을 나왔다.

“간만입니다, 형님.”

“날이 춥네. 서울은 눈 많이 와?”

“출발할 때는 진눈깨비 내리는 정도였습니다. 양평 도착할 즈음에야 많이 내리더라고요.”

“삼촌!”

“우리 라온이, 삼촌 보고 싶었어?”

라온이는 하정남을 제법 좋아했다.

평소 안시현과 정혜영이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웬만해서는 안 주는 군것질거리를, 하정남이 매번 놀러 올 때마다 몰래 챙겨 와서 줬으니까 말이다.

안시현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해 줬다.

‘가끔씩은 괜찮겠지.’

군것질거리를 달라고 조르거나 떼를 쓰면 모를까, 가끔씩 먹을 때를 제외하면 군것질거리에 대해서 욕심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온이가 간식을 먹을 때라고는 하정남이 방문할 때, 그리고 외가에 갈 때를 제외하면 없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허용해 줄 수 있었다.

군것질거리를 먹고 나면 싫어하는 양치를 유독 적극적으로 하기도 하고 말이다.

하정남의 왼손에 들린 초콜렛 케이크를 보는 라온이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웬 케이크야?”

“다음 주면 크리스마스지 않습니까. 장모님이 형님 드리라고 아침에 만드셨답니다.”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들어와. 허브차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누자. 와이프가 직접 키웠는데 향이 기가 막혀. 추울 때 마시기 최고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정남이 눈 내리는 마당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라온이는 그럼 하정남의 품에 쏙 안긴 채 동화책을 들이밀었다.

안시현이 차를 끓이는 사이, 하정남은 라온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며 시간을 보냈다.

케이크 세 조각과 허브차 두 잔, 그리고 데운 우유 한 잔과 포크 세 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라온이가 케이크가 정신이 팔린 사이, 안시현이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눈발이 거세지네. 너무 늦지 않게 가는 게 좋겠다.”

“네. 해 지기 전에는 가야죠. 아, 김진모 배우님 3월에 신혼여행 간다는 거 들었습니까?”

“응. 하와이로 간다더라고.”

김진모와 한나래 커플은 결혼식 이후 서로 작품 일정이 어긋나며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1년 3월에, 2주 일정으로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정을 내렸다. 예정에 없던 신혼여행이 난데없이 잡히게 됐다.

안시현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진모가 라온이 보면서 허니문 베이비를 꿈꾸고 있다는 TMI는 굳이 말해 줄 필요 없겠지.’

하정남은 JM액터스에서 한 달 사이 있었던 여러 이야기들을 안시현에게 전해 줬다.

안시현이 아는 정보와 모르는 정보가 뒤섞여 있었고,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은 정보 또한 있었지만 괜찮았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손님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으니까.

마당에 어느 정도 눈이 쌓였을 즈음.

하정남이 마지막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오늘 방문한 건, 대표님이 형님에게 꼭 전하라고 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서론이 너무 길었던 거 아냐?”

“아하하…… 형님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라서요. 아무튼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건 아니지만, 『Timeless』의 개봉일이 확정됐습니다.”

“드디어…….”

안시현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7월 초에 크랭크업 한 『Timeless』의 개봉일이 마침내 확정되었다는 소식에, 내일 당장이라도 개봉을 하는 것처럼 들떴다.

“언제 개봉이야?”

“한국 시간으로 2011년 2월 25일, 한미 동시 개봉입니다. 언론 시사회는 1월 말과 2월 초에 미국과 한국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고요. 다른 국가에서도 3월과 4월 사이 개봉으로 일정 조율 중이라고 합니다.”

2011년 2월 25일 금요일.

『Timeless』의 개봉일이 확정되자마자 안시현은 잠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두툼한 잠옷 바지에 깔깔이를 걸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정남아.”

“네, 형님.”

“나 배우 같아 보이냐? 동네 아저씨 같아 보이지는 않지? 피부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고, 당분간 신경 좀 써야 될 거 같아.”

전업주부 안시현이 아닌 배우 안시현으로 돌아가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이럴 줄 알았으면 정혜영이 시킬 때 고분고분하게 피부 관리 좀 받을 걸 그랬나? 요즘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은 어떤 거지?

개봉일이 확정됐다고 하니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이 고민거리가 되어 다가왔다.

이에 하정남은 엄지를 치켜 세우여 답했다.

“형님은 언제나 최고십니다. 라온이 기저귀 갈아 주다 나오셔도 천생 배우이신데, 무슨 걱정입니까? 출국 전에 피부 관리 몇 번 받으시면 땡입니다.”

“여름에 텃밭 가꾸느라 피부가 좀 말이 아니지? 그나저나…….”

안시현이 양손으로 턱을 괬다.

심각한 표정으로 하정남을 바라보면서 그가 말한 것 중 잘못된 정보를 수정해 줬다.

“우리 라온이 기저귀 뗀 지 좀 됐어. 용변을 다른 아이들보다 빠르게 가리더라고. 그뿐인 줄 알아? 며칠 전에는 말이야…….”

이날.

하정남은 눈이 많이 내린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야 겨우 집에서 나서며 안시현의 딸 자랑 세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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