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79화>
179화. 여기서 왜 나와?
『Timeless』의 촬영은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로웠다.
주연인 안시현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절정의 연기력을 마음껏 뽐냈으며, 이석재와 송강식의 연기는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할리우드 출신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해 세 한국인 배우를 내심 무시하던 배우들은, 첫날 안시현이 보여 준 엄청난 연기력에 더 이상 텃세를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안시현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촬영장 분위기는 이곳이 미국인지 한국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화기애애했다.
배우는 연기로 모든 걸 이야기하는 직업이라는 안시현의 가치관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 와중에.
“저 신을 롱 테이크로 촬영한다고?”
“사람이 아니라 연기하는 기계 같아. 모든 걸 계산하고 그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면 저렇게 연기하는 건 불가능할 거야.”
“계산? 아니야. 시현에게 물어보니까, 그때의 감정을 최대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한다고 했어.”
“……그게 말이 돼?”
“말이 되지. 대사의 반이 애드리브잖아.”
배우들은 안시현의 장기인 원 테이크와 롱 테이크, 기가 막힌 애드리브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기존 대사보다 더 좋은 애드리브를 한다는 게 경이로웠다.
물론 안시현의 연기를 한국에서부터 자주 봐 온 송강식과 이석재는 비교적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안시현의 좋은 연기를 워낙 자주 봐 왔기에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안시현의 연기가 대단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Timeless』를 위해 이석재의 연기 스타일을 완벽하게 모방해 온 안시현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크랭크인 1주일째.
순조롭게 진행되는 촬영에 기욤 뒤자르댕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촬영 속도가 빨라. 이 정도면 시현의 분량은 지금부터 2주 안으로 마무리되겠어.’
기욤 뒤자르댕이 생각하고 있는 『Timeless』의 촬영 스케줄은 넉 달이었다.
세 주인공들의 현재 시점과 시간여행을 다루는 데에 각각 한 달씩, 세 주인공이 스튜디오에 모여 촬영하는 데에 한 달이 추가로 걸릴 거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첫 촬영부터 변수가 생겼다. 안시현의 컨디션이 절정이라는 변수가 말이다.
내뱉는 애드리브가 죄다 명대사로 탈바꿈됐고, 집중력이 엄청나서 혼자 촬영하는 장면은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가 됐다.
얼마나 컨디션이 좋으면 무려 10분짜리 롱 테이크 신도 만들어 낼 정도였다.
원래는 수차례에 나눠서 촬영하기로 한 걸, 안시현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자 즉석에서 사인을 내지 않고 롱 테이크로 촬영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편집을 거치면 영화에 나가는 건 1, 2분 정도에 불과할 테지만, 롱 테이크를 통째로 내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력이 미쳐 있었다.
이에 기욤 뒤자르댕은 감독판과 DVD에는 롱 테이크 신을 통째로 넣으리라고 다짐했다.
1주일째의 촬영이 끝난 뒤.
기욤 뒤자르댕은 트레일러에서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며 안시현과 대화를 나눴다.
“이대로라면 시현의 촬영 분량은 2주 내외로 마무리될 것 같아요.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마무리될 수도 있고요. 시현이 워낙 연기를 잘해 줘서 일정이 많이 단축될 것 같아요. 그래서 아쉬워요. 마음 같아서는 크랭크업을 할 때까지 같이 촬영하면 좋을 텐데 말이죠.”
“스튜디오 촬영을 할 때 가족들과 함께 놀러 올게요. 저도 감독님과 함께 작품 하는 기간이 생각보다 너무 짧은 것 같아서 아쉬워요.”
“한 작품을 더 한다면 좋을 텐데…….”
“그러지 않으실 거라는 거 알아요. 남은 열정을 『Timeless』에 모조리 쏟고 있다는 게 준비 단계에서부터 느껴졌거든요.”
『Timeless』는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미 공식적으로 선언을 한 이상, 그의 성격을 감안하면 은퇴를 번복할 일은 없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안시현이 기욤 뒤자르댕과 작품을 하는 건 『Timeless』가 마지막이 될 터였다.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할리우드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은 안시현이지만, 기욤 뒤자르댕처럼 마음에 맞는 감독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면 예외적으로 작업을 고려해 볼 수 있었다.
수많은 감독 중 마음에 맞는 이와 함께 작업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안시현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느꼈다.
‘김 작가님도 그렇고 기욤 감독님도 그렇고, 그 외에 지금껏 함께 작업했던 분들도 모두 대체로 마음이 잘 맞았으니까. 최 감독님과의 호흡도 최고였지.’
차기작은 김희숙 작가의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
김진모는 인생 작품에서 주연 배우로서 존재감을 뿜어내며 국민 배우라는 명성을 얻을 거고, 김희숙 작가는 최고 몸값을 받는 드라마로 성장할 것이며, 대기업이 운영하는 케이블 채널인 TV Y가 명품 드라마를 방영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주게 되리라.
그만큼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좋은 작품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어떤 작품을 선택해야 할지 아직까지 정해 놓은 게 전혀 없었고, 아마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촬영할 때까지도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까지처럼 마음에 맞는 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즐겁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연기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 * *
22일.
안시현이 『Timeless』을 촬영을 마무리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원 테이크, 기본적으로 NG를 거의 내지 않는 안정적인 연기력과 집중력으로 인해 예정보다 빨리 촬영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이에 텍사스 촬영장이 정리로 분주해졌다.
스테프들이 분주한 사이.
배우들은 안시현의 트레일러에 모여서 촬영의 마무리를 기념하는 작은 파티를 열었다.
첫 만남이 그리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선입견을 솔직히 인정하고 다가와 준 배우들 덕분에, 세 명의 한국인 배우들은 촬영 기간 내내 불편함 없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몰랐던 할리우드의 촬영 문화에 대해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도 했고 말이다.
“시현, 나중에 한국에 놀러 가도 돼요?”
“물론이죠. 여름에 놀러 오면 제 별장에 초대할게요. 아내가 와인을 좋아해서 지하에 와인 창고를 만들어 놨고, 마당에 수영장도 있어서 푹 쉬기 좋을 거예요. 2층은 방 없이 원룸 형태로 만들어서 영화 감상용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놨고요.”
“오. 생각만 해도 너무 좋네요.”
“우리 한국 홍보 일정 며칠 전에 입국해서, 시현에게 신세 좀 질까요?”
“다들 미리 연락만 하고 와요. 언제든지 환영할게요.”
그렇게 『Timeless』 배우들과는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지게 됐다.
다음 날.
안시현과 송강식과 이석재는 텍사스를 뒤로한 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강식아, 시현아. 촬영 하는 동안 고생 많았다. 강식이는 6월에 나랑 한 번 더 고생하자.”
“고생은요. 전 선생님과 함께 촬영할 수 있는 순간들이 감사하기만 합니다.”
“허허허.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시현이는 당분간 푹 쉬겠구나?”
“네. 스튜디오 촬영 보러가기 전까지는 육아에 전념하려고요. 촬영할 때는 못하는 만큼 쉴 때라도 확실하게 육아 독박 써야죠.”
“너무 오래 쉬지는 말거라. 재능 낭비야.”
“좋은 작품을 찾을 수 있게 노력할게요.”
송강식과 이석재는 스튜디오에서의 단체 촬영을 위해 6월에 다시 뉴욕으로 가야 하지만, 안시현은 추가 촬영이 아닌 한 개봉 전까지는 촬영 스케줄이 없다.
물론 기욤 뒤자르댕과 약속한 것처럼 스튜디오 촬영을 때 방문하긴 할 것이다.
다만 주연 배우로서의 방문은 아닐 터였다.
‘라온이가 부쩍 영어를 잘 배우고 관심도 많다고 하니 한번 같이 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러고 보니 라온이가 자주 보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의 유통사가 JP스튜디오 아니었던가? 스케줄 잘만 짜면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겠는데?’
여행마저도 라온이를 최우선으로 놓고 생각하는 팔불출 아빠 안시현이었다.
* * *
귀국 후.
안시현은 늘 그렇듯 육아에 힘썼다.
자신이 스케줄로 바쁜 시기에는 부모님과 아내 정혜영이 육아를 분담하기에, 쉴 때만이라도 육아에 전념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육아를 분담하는 것도 아니었다.
안시현은 라온이와의 시간을 즐겼다.
아이와 함게 있는 것 자체가 안시현에게는 힐링의 일환이었기에, 영화와 드라마 감상 정도를 제외하면 육아보다 더 좋은 휴식 방법은 없었다.
『Timeless』의 촬영을 끝마치고 귀국할 당시.
미국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인형과 장난감 몇 개를 선물로 사 갔는데, 라온이가 잘 때도 안고 잘 정도로 애지중지한 덕분에 안시현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떠날 날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4월 말.
안시현에게 반가운 전화가 걸려 왔다.
“최 감독님?”
-오랜만이에요, 안 배우님.
“한국 오신 거예요?”
-네. 얼마 전에요. 소속사에게만 말하고 조용히 들어와서 알려지지 않았을 거예요.
바로 『형아, 동생』의 감독인 최한수 감독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안시현은 간만의 연락이 반가웠다.
지금까지 작품을 함께했던 이들과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최한수 감독과는 최근 몇 년 동안 연락을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최한수 감독이 아들 동민이의 미래를 위해 해외 유학을 결정했고, 외국에서 몇 년 동안 함께 지내며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로 결정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최한수 감독은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단절한 채 가족에게만 집중했다.
비자 갱신을 위해 귀국해도 최소한의 볼일만 보고서 다시 출국을 반복하기를 몇 년.
간만에 최한수 감독이 먼저 연락을 한 것이다.
-혹시 주말이 시간 되나요? 간만에 얼굴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안시현은 직감했다.
최한수 감독이 자신에게 뭔가 용무가 있는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두문불출하다가 난데없이 연락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실제로 회귀 전.
최한수 감독은 수년 동안 용무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지인들과의 연락을 일제 단절했었다.
이번에도 다를 건 없었고 말이다.
어쩌면 그 용무가 차기작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차기작은 아닐 거야. 최 감독님의 차기작이 나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잖아. 너무 오래 쉬어서 은퇴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었는데, 지금 이 시기에 차기작 제안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돼. 아마 다른 용무일 거야. 뭔데 갑자기 보자는 걸까?’
안시현은 최한수 감독이 자신에게 어떤 볼일이 있을지 호기심이 생겼다.
며칠 뒤.
양평 읍내의 한 카페에서 안시현은 간만에 최한수 감독과 만나게 됐다.
“오랜만이에요, 안 배우님. 너무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요.”
“이해해요. 동민이 때문에 그런 거였잖아요. 동민이는 잘 지내고 있죠?”
“네. 올 겨울에 합동 전시회가 예정되어 있어요.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있거든요. 처음에는 낯선 환영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오래 걸리지 않아 적응했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최한수 감독의 아들인 최동수의 이야기로 포문을 연 뒤, 최한수 감독이 차분하게 본론을 꺼냈다.
“오늘 안 배우님을 만나자고 한 건, 혜인원을 통해 JP스튜디오로부터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JP스튜디오? 혹시 제가 아는 그 JP스튜디오가 맞나요?”
“네, 맞아요. 『Timeless』의 투자사죠.”
“JP스튜디오에서 감독님께는 왜…….”
“『형아, 동생』을 미국에서 재개봉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안시현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최한수 감독의 본론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형아, 동생』이 도대체 여기서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