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3화>
153화. 준비해 왔습니다
『VVIP』의 대본 리딩은 순조로웠다.
일단 주연 배우인 안시현과 한나래와 우정태가 동문으로서 친분이 있다는 게 컸다.
심지어 한나래와 우정태가 공개적으로 안시현에게 수차례 감사를 표했을 정도로 관계가 좋기에, 세 사람의 호흡을 걱정하는 건 무의미했다.
거기에 김희숙 작가와 다수의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 온 연기력 탄탄한 중견 배우들이 뒤를 받쳐 주고 있다.
대본 리딩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탄탄한 조합이다.
그렇다고 문제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작가님, 슬슬 PD님 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연출 없이 촬영을 시작할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도 조율 중이에요. 대본 리딩 끝나기 전에는 확정지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짜증나네요. 함께하고 싶다고 난리칠 때는 언제고, 제 권한 확실하게 보장해 달라고 하니까 다들 손 떼는 게 어디 있어요? 앞으로 그 인간들하고 상종하나 봐라.”
STS에서 투자를 하고 제작하는 드라마이니만큼 STS 드라마국의 PD 중에서 연출을 맡는 게 상식적이다.
제작이 논의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PD들이 김희숙 작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냈지만…….
이내 곧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김희숙 작가는 제작 단계에서 자신에게 비교적 많은 권한이 주어지기를 바랐고, 그 대신 PD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실제로 JM액터스가 자체 제작을 맡으며 성공한 김희숙 작가의 드라마들은, 그녀에게 비교적 많은 권한을 쥐여 주며 매번 신드롬을 일으켰다.
STS 드라마국 입장에서는 난감했다.
거액을 투자해 김희숙 작가의 효과를 누리고 싶은 게 사실이었고, 그녀가 원하는 비교적 많은 권한 또한 주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김희숙 작가의 권한이 올라가자, 연출을 맡겠다고 하는 PD가 내부에서는 없다는 데에 있었다.
결국 STS 드라마국은 김희숙 작가에게 외부에서 PD를 구하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를 꺼내게 됐다.
그렇게 연출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돌고 돌아, 김희숙 작가는 대본 리딩이 마지막 날이 돼서야 어렵사리 PD를 구하게 됐다.
바로…….
“연출을 맡게 된 최창국이라고 합니다. 제가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뛴 지가 조금 돼서 모르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김희숙 작가님과 간만에 호흡을 맞추며 현장에 복귀하게 됐는데, 좋은 연출로 배우분들의 연기를 빛나게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MBS 퇴사 후 JM액터스의 콘텐츠팀 실장으로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최창국이었다.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의 인연은 『너와 나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두 사람은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너와 나의 시간』의 대성공을 견인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주가를 바짝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후로는 좀처럼 호흡을 맞출 일이 없었다.
물론 JM액터스에서 자체 제작한 김희숙 작가의 드라마에서 최창국 PD가 연출을 총괄하긴 했지만, PD들을 진두지휘하고 연출을 조율한 거지, 현장에서 발로 뛴 것은 아니었다.
‘간만에 현장 복귀라 그런가? 되게 떨려 하시네.’
최창국 PD가 현장에 복귀하는 건 참으로 간만의 일이었다. JM액터스 입사 후, 현장에서 촬영을 진두지휘한 건 지금까지 단 한 번뿐이었을 정도로 그는 뒤에서 맹활약을 하는 역할을 자처했으니까.
다만 이번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STS 드라마국의 PD들이 연출을 맡는 데에 난색을 표했고, 외부에서 구한다고 한들 김희숙 작가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PD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심지어 JM액터스 소속 PD들의 경우 다들 2009년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는 상태.
구원 투수로 나설 만한 사람이 사실상 최창국뿐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창국 PD, 『VVIP』 통해 전격 현장 복귀.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의 만남, 『너와 나의 시간』의 신화 재현한다.
-5년 만의 현장 복귀, 해피 엔딩으로 끝날까?
최창국의 현장 복귀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졌다.
그가 연출을 맡았던 작품들이 모두 성공했고 연출에서 극찬을 받았기에, 『VVIP』또한 연출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는 의견.
최창국의 연출 능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너무 오랜 시간 현장을 떠나 있었고, 이전처럼 좋은 모습을 보여 줄지에 대한 확신을 하기 힘들다는 의견.
안시현의 생각은 전자였다.
최창국이 오랜 시간 현장을 떠나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장을 떠나서 놀고 있었던 게 아니다. JM 액터스에서 자체 제작한 작품들의 연출 총괄을 맡으며, 오히려 현장에서 발로 뛸 때보다 더 많은 작품들을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따라서 현장 감각이 부족하다는 건 최창국에게 결점이 될 수 없다고 봤다.
‘최 실장님이라면 연출은 믿고 맡겨도 되고……. 이제 나만 오디션 마무리하고 작품에 깔끔하게 작품하면 되겠네.’
* * *
안시현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VVIP』 초반 촬영에서 안시현은 철저하게 제외됐다.
이는 안시현과 함께 주연을 맡은 한나래와 우정태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덕분이었다.
안시현이 오디션에 집중하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한 뒤 촬영에 집중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에 안시현 또한 동의했다.
『Timeless』의 오디션이 『VVIP』의 촬영에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배려를 해 주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 또한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시현은 촬영 대신 『Timeless』의 오디션 준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2008년 12월 22일, 도합 열흘에 걸쳐 진행될『Timeless』의 오디션이 다가왔다.
이른 아침.
정혜영이 안시현의 옷매무새를 점검해 줬다. 안시현의 오디션을 위해 손수 준비한 의상을 보며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의상 잘 어울리는데요?”
“당신이 잘 구해 줘서 그런 거죠. 고마워요.”
“오디션만 잘 보고 온다면야 더한 것도 해 줄 수 있어요. 간만의 오디션인데 기분이 어때요?”
“좋네요. 간만에 승부욕이 끓어올라요.”
주연 배우로 자리를 잡은 이후, 안시현은 사실상 오디션을 볼 필요가 없어졌다. 수많은 감독과 작가들이 그를 원했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기만 하면 됐으니까.
간만에 치르게 된 오디션을 앞두고 안시현의 승부욕이 간만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참가자가 1200명이라고 했던가? 치열하겠네.’
『Timeless』에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는 무려 약 1200명으로 알려졌다.
주연과 조연은 각각 한 자리며, 단역까지 다 포함하더라도 10명을 겨우 넘길까 말까다. 소수의 배역을 놓고 1200여 명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안시현은 그들과의 경쟁에서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압도적인 연기력을 바탕으로 왜 자신이 『Timeless』의 주연을 맡을 수밖에 없는지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한나래와 우정태의 배려로 만들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철저하게 준비했다.
오디션장으로 가는 길.
운전대를 잡은 박정상이 안시현에게 물었다.
“잘할 수 있지?”
“형, 요즘 제 걱정 안 한다면서요.”
“오늘만큼은 좀 걱정이 되네. 참가자도 많고, 심지어 주연급 배우들도 최종적으로 40명 넘게 오디션 보기로 했다며. 역대급 경쟁률 아니야?”
“역대급이죠. 그래도 걱정하지 마요.”
안시현이 씨익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죄다 이기고 제가 주연 먹을 테니까요.”
* * *
32번.
안시현이 배정받은 참가 번호였다.
“시현이 넌 몇 번이냐?”
“32번이요. 선배님은요?”
“난 105번. 저녁에나 오디션 볼 수 있겠는데?”
“형님은 좋겠습니다. 전 150번이라, 오늘일지 내일일지 참 애매하네요.”
“번호운 한 번 더럽게 없네. 뒤에 걸릴 거면 아예 화끈하게 밀려 버리던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안시현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안시현은 송강식과 황영민을 비롯해 친분이 있는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분위기만 놓고 보면 오디션을 기다리고 있는 배우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마냥 밝은 분위기라고 볼 수는 없었다.
실제로 다들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에서도 참가 번호 외에는 서로 오디션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담소는 긴장을 풀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오디션을 앞둔 경쟁자가 막바지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행위였다.
본인 또한 연습에 집중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준비를 철저하게 해 왔기에 상대를 방해하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배우들이 더러 존재했다.
안시현과 황영민과 송강식이 그런 케이스였다.
세 사람 다 지금 당장 연기하라고 하면 순식간에 몰입할 수 있는 좋은 배우들이다. 따라서 막바지 연습은 그들에게 승리 전략이 되지 못했다.
반면 세 사람 사이에 껴서 졸지에 대화를 맡게 된 류성웅은 막바지 연습을 하지 못해 울상이 됐다.
“선배님들, 죄송한데 저 연습 좀 하면 안 될까요? 그 대신 제가 저녁에 한턱 거하게 쏘겠습니다.”
“에헤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러기야?
“말씀 안 드렸는데…… 제가 시현이 다음 순번입니다.”
“그건 좀…….”
“연습해, 연습해. 이 괴물 자식 다음이면 연습해야지. 방해해서 미안.”
다행이 안시현의 다음 순번으로 오디션을 봐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황영민과 송강식이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으며 연습에 몰두할 수 있게 됐지만 말이다.
‘다들 어떤 전략을 준비해 왔을까?’
오디션의 어떤 배역을 원하느냐에 따라 전략을 다르게 따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배역에 맡는 연기를 보여 줘야 승산이 높아진다.
이번 오디션에서 선발하게 될『Timeless』의 주연과 조연은 캐릭터성이 전혀 다르다.
아무리 기욤 뒤자르댕이 배우에 따라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스타일이라지만, 기본적인 캐릭터성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주연과 조연, 혹은 단역까지 내다보고서 아무거나 하나 얻어 걸리라는 생각으로 오디션에 임하는 건 최악의 한 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안시현의 경우는 당연히 주연을 노리고 있었다.
황영민과 송강식과 류성웅, 나아가 다른 주연급 배우들이 어떤 배역을 노리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들이 경쟁자이건 아니건, 안시현이 오디션장에서 보여 줄 연기에는 변화가 없을 테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32번 참가자 들어와 주세요.”
마침내 안시현의 번호가 호명됐다.
심사위원은 단 한 명, 기욤 뒤자르댕뿐이었다.
간만에 안시현은 보는 것임에도 기욤 뒤자르댕은 웃지 않았다. 사적인 만남이 아닌 심사위원과 오디션 참가자로서 보는 것이기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프로필을 훑어 보며 질문을 던졌다.
“어떤 연기를 준비해 오셨습니까?”
『Timeless』의 오디션은 자유연기로 진행된다.
지급된 시나리오 내에 있는 신을 연기해도 좋고, 따로 준비해 온 연기를 보여 줘도 괜찮았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연기할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Timeless』의 시나리오에 표현되지 않은 데이비드 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제 나름대로 상상하며 연기로 준비해 왔습니다.”
안시현이 선택은 『Timeless』의 시나리오에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고 넘어간, 그가 따내야 할 배역인 데이비드 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연기하는 것이었다.
시나리오에는 대사로 짤막하게 언급되는 게 전부인 사건을 연기하는 걸로 승부수를 띄웠다.
“비하인드 스토리라…… 재밌네요. 준비되면 바로 시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안시현이 정장을 벗었다. 정혜영의 도움을 받아 소품으로 준비해 온 가슴팍에 하트 무늬가 그려진 하얀색 티셔츠를 입은 채 눈을 감았다.
의식을 치르고서…….
“헬렌.”
데이비드 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