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46화 (14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7화>

147화. 저는

기욤 뒤자르댕.

황금영화제에서 황금뿌리상을 무려 세 번이나 수상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죽는 순까지 메가폰을 잡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영화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건 연기 잘하는 배우, 싫어하는 건 연기 못하는 배우이니 말 다한 거 아니겠는가.

기욤 뒤자르댕은 수많은 명품 배우들과 작업을 하며 다수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그럼에도 그는 늘 좋은 배우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과 함께 작품을 한 배우들의 성공을 지켜보는 걸 삶의 낙으로 삼았다.

몇 년 전.

친구인 곽상필의 은퇴를 아쉬워하며 참여한 황금영화제에서, 기욤 뒤자르댕은 자신의 마음을 쏙 사로잡는 배우를 보고 말았다.

바로 안시현이었다.

황금영화제 이후, 기욤 뒤자르댕은 곽상필에게 부탁하여 안시현이 출연한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결심하게 됐다.

언젠가 안시현과 함께 작품을 하고야 말겠다고, 안시현이 보다 더 큰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만들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그래서였다.

핀란드에 와서 『90일』의 해외 로케이션을 지켜볼 생각이 있냐는 제안에, 기욤 뒤자르댕이 한 치의 고민조차 없이 승낙한 것은.

『칠전팔기』 이후 안시현의 연기가 얼마나 더 발전했을지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안시현은 곽상필과 연락을 취했다. 기욤 뒤자르댕의 핀란드행에 그가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기욤 감독님이 핀란드에 오신다는데, 알고 계셨죠?

-네. 제가 그 친구에게 부탁을 했거든요. 『90일』의 해외 로케이션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좀 달라고 말이에요.

-미리 언질이라도 좀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이런 건 놀라야 제맛이죠. 그 친구, 안 배우한테 관심이 많아요. 조금 과할 수도 있는데, 열정이 과한 거니까 좀 이해해 줘요.

-황금영화제 때 이미 겪어 봐서 괜찮아요.

황금영화제 당시, 기욤 뒤자르댕은 안시현의 남궁수민 연기를 보고 푹 빠졌다. 심지어는 다짜고짜 안시현에게 같이 작품을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미 경험해 봤기에 기욤 뒤자르댕이 과한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안시현은 그러려니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해 봐야 같이 작품 하자고 조르는 정도겠지 뭐.’

안시현이 피식 웃으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정혜영히 골라 준 노래를 들으며, 그녀와 한참 동안 문자메시지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오랜 시간을 비행한 끝에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핀란드 헬싱키 반타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안으로 들어왔을 때.

“오! 시현! 여기에요, 여기!”

안시현은 비교적 정확하게 발음하려 노력하며 한국어로 자신을 부르는 기욤 뒤자르댕 감독과 피켓을 든 채 기욤 뒤자르댕 감독의 옆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이드를 보았다.

“오랜만이네요, 감독님.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한국말 제법 잘하시네요.”

“황금영화제 이후로 많이 연습했어요. 근데 시현,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배역 때문에 다이어트 좀 해서 그래요. 건강에는 이상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다행이네요. 살 너무 빠져서 놀랐어요.”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90일』의 메가폰을 잡은 박의준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필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 한국말 어려워요. 영어로 이야기해도 돼요?”

“물론입니다. 편하게 하세요.”

몇 마디를 한국어로 말한 뒤, 기욤 뒤자르댕은 영어를 사용하여 박의준 감독, 안시현과 소통했다.

기욤 뒤자르댕이 원하는 건 딱 하나였다.

핀란드에서의 해외 로케이션 촬영 내내 제작진과 동행하고 싶다. 그 대신, 핀란드에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와주겠다나 뭐라나.

박의준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욤 뒤자르댕의 합류는 곽상필을 통해 일찌감치 전해 들었던 부분이고, 해외 로케이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 판단해서 일찌감치 수락했다.

물론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듣기로는 시현 씨를 캐스팅하기 위해서 몸이 달아 있다고 하던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곽상필로부터 들은 기욤 뒤자르댕의 배우에 대한 과한 집착이 다소 걱정됐지만…….

일단은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기욤 뒤자르댕 또한 감독이니만큼 촬영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고, 혹여나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이야기해도 될 거라고 봤다.

‘시현 씨가 더 큰 무대에서 연기하는 걸 보고 싶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박의준 감독 또한 안시현이 더 큰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걸 보고 싶었다.

안시현은 이미 대한민국에는 정점에 올라선 배우다. 갑작스레 연기력에 이상이 생기는 게 아니라면 입지가 흔들릴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대한민국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톱배우는 과연 해외 무대, 특히 할리우드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다.

할리우드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몇몇 배우가 존재하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정점에 오른 뒤 할리우드에 진출을 한 게 아니다.

안시현과는 입지가 다르다는 뜻이다.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지만…… 이번 기회에 시현 씨가 한번쯤 더 큰 무대에 설 수 있기를.’

*   *   *

『90일』의 시나리오상, 한노을은 북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보름 동안 여행을 하게 된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 해외 로케이션의 경우 핀란드에서만 촬영하기로 했다.

어차피 마지막 버킷리스트의 핵심은 핀란드다.

핀란드에서 좋은 그림을 다수 따내는 걸로 충분하다고 박의준 감독은 판단을 내렸고, 실제로 핀란드의 야경을 보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촬영은 내일 오전부터 진행하겠습니다. 오늘은 다들 숙소에서 푹 쉬세요.”

“감독님! 룸서비스 시켜도 됩니까?”

“네. 마음껏 드세요.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만큼은 잘 먹어야죠. 아, 물론 촬영에 지장이 갈 정도로 술을 마시는 건 안 되는 거 아시죠?”

“에이. 그 정도야 기분이죠.”

“딱 기분 좋을 정도만 마시겠습니다!”

“흐흐흐. 2층에 바 있다는데 가실 분 손!”

스태프들은 일찌감치 주어진 휴식에 다 같이 술을 마시자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편 안시현과 양소라는 일찌감치 숙소에 짐을 푼 뒤에 나오지 않았다.

양소라는 촬영을 시작하기 전까지 연습을 하며 자신의 연기를 점검하기 위해서, 안시현은 휴식을 취하며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서 말이다.

‘살은 빼는 덴 성공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최대한 식단 조절하자. 최대한 마른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어.’

안시현은 단백질과 과일과 채소 위주로 철저하게 칼로리 관리를 하며 어느 정도 마른 몸매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에 해외 로케이션에 함께하게 된 분장팀장을 통해서, 분장을 한 채 상반신 탈의를 하면 그림이 나올 것 같다는 뜻을 전달받았다.

박의준 감독이 우려했던 것과 달리 안시현이 한노을의 마지막 모습에 어울리는 몸매를 만든 것이다.

얼굴만 봐도 살이 많이 빠졌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죽하면 기욤 뒤자르댕이 오랜만에 안시현을 보고서 아픈 게 아니냐고 했을까.

다행히 안시현의 건강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무리해서 살을 뺀 게 아니라 철저한 식단 관리를 통해 해낸 것이고, 출국 직전까지 꾸준히 건강 검진을 받으며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기까지 했다.

‘한노을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했으니, 확실하게 써먹어야겠지.’

안시현이 무리일 수도 있는 다이어트를 감행한 건, 한노을의 마지막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부터 한노을의 마지막 행보를 연기해야 한다.

안시현은 촬영 전까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대본을 검토하기로 했다.

맛있는 음식들의 유혹을 이겨 내며 식단 관리를 하는 건 곤욕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예 방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냄새를 맡을 일이 없어 그나마 괜찮았다.

그날 저녁.

똑똑똑.

“시현,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기욤 뒤자르랭이 안시현의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기욤 뒤자르댕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먹음직스럽게 익은 사과 하나가 들려 있었다.

“다이어트 한다고 해서 사 왔어요.”

“고마워요. 내일 아침에 먹으면 되겠네요.”

“시나리오 보고 있었어요?”

“네. 내일부터 피날레를 위해서 달려야 하니까요.”

“으음. 그렇군요.”

기욤 뒤자르댕이 소파에 앉았다.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 그를 보며 안시현이 피식 웃었다.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제 눈치 보지 마시고.”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럴 게 아니었다면 제가 감독님을 방으로 들일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황금영화제 이후, 시현이 출연한 작품을 다 봤어요. 『칠전팔기』도요. 시현의 연기를 이해하기 위해서요.”

안시현에게 있어 기욤 뒤자르댕이 자신의 출연작을 보는 건 예상 범주 내에 있었던 일이다.

다만 모든 작품은 봤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감독님이 본 제 연기는 어떻던가요?”

거장의 시선으로 본 자신의 연기는 어떠할지, 배우 안시현에게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말이다.

“정석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개성이 확고하고, 상황에 따라 스타일의 변화를 줄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고, 캐릭터에 대한 해석과 몰입도만큼은 최고인 배우. 이게 제가 본 안시현이란 배우예요.”

안시현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욤 뒤자르댕이 말한 특징과 자신이 생각한 특징이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시현의 연기 스타일은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을 이겨 내기 위해 정석에서 벗어난 지 제법 됐지만, 그 덕분에 상황에 유연한 대처를 하는 게 가능해졌고, 캐릭터에 대한 해석과 몰입은 최고라고 스스로 자부했다.

기욤 뒤자르댕은 그 부분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이 마음에 들었다. 황금영화제 때도 느꼈지만, 영화에 대한 그의 안목과 열정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후하게 평가해 줬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네요.”

“항상 느끼는 건데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너무 평가절하해요. 전 겸손이 미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시현은 좋은 능력을 지닌 배우예요. 좀 더 자신을 고평가했으면 좋겠어요.”

“아하하. 제가 좀 자신감이 없는 편이에요.”

“제가, 자신감 가질 수 있게 해 줄까요?”

“어떤 방법일지 궁금하네요.”

“5분만 기다려 줘요.”

기욤 뒤자르댕이 밖으로 나갔다. 몇 분 뒤,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시놉시스가 들려 있었다.

“상필에게 부탁해 한국어로 번역한 시놉시스예요. 시현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거예요.”

“감독님의 차기작인가요?”

“네. 전 이 작품의 주연 배역 중 하나인 김철수 역에 시현 씨를 캐스팅하고 싶어요. 시현이 대한민국에서 쌓은 필모그래피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보장할 거예요.”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기욤 뒤자르댕이 누구인가. 입봉 때부터 예술영화를 고집하면서도, 할리우드에서 꾸준히 성과를 내며 인정을 받은 최고의 감독 아니던가.

그런 그가 안시현을 캐스팅하기를 바랐다.

심지어 안시현이 지금껏 쌓아 온 필모그래피를 인정하고 합당한 대우를 약속하겠다고 했다.

이 정도면 파격적인 대우가 분명하지만, 안시현은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애석하지만…… 제가 차기작이 이미 계약되어 있어요. 가을부터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거든요.”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요?”

“네. 상필에게 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요. 할리우드를 노리는 작품이라 투자사를 구해야 하고 할 일이 많아요. 빨라야 내년 겨울, 늦으면 내후년에야 크랭크인을 할 거예요.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지 않나요?”

“그 정도라면…… 스케줄이 겹치지는 않겠네요.”

“그럼, 제 제안 받아 주시는 겁니까?”

안시현의 고민이 길어졌다.

선뜻 대답하기에는 스케줄이 너무 컸다. 무려 할리우드 진출작의 캐스팅 여부이고, 심지어는 주연 자리를 보장하겠다고까지 했다.

쉽사리 결정할 수는 없었다.

안시현이 입을 연 건 꼬박 10분이 지난 뒤였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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