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25화>
125화. 다녀올게요
『칠전팔기』의 촬영이 마무리되고 며칠 뒤.
안시현은 정혜영과 며칠 속초 여행을 다녀왔다.
정혜영이 업무 차 속초를 방문할 예정이었기에, 겸사겸사 업무를 끝내고 며칠 동안 휴가를 내서 속초 인근을 여행하며 휴식을 만끽한 것이다.
이는 안시현에게나 정혜영에게나 간만의 휴식이었다.
안시현은 『칠전팔기』의 촬영이 시작된 이후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쉬지 못했으며, 정혜영은 일룡백화점의 대표 이사가 되고서 나이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주말조차 반납한 채 한동안 업무에만 매달렸다.
간만의 휴식이 달콤할 수밖에 없었다.
“아, 간만에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니까 너무 좋았어요. 이렇게 마음 편하게 데이트 즐겨 본 거 간만이죠?”
“자기 쉬는 동안 자주 데이트하게요.”
“그래요. 꽤 길게 쉴 테니까 당신이 여유 있을 때마다 데이트하면 되겠네요.”
안시현, 정혜영 부부는 마음 같아서는 진득하게 속초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정혜영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안시현은 제28회 대한영화제에 참여해야 했으니까.
2006년 6월 3일 토요일.
제28회 대한영화제 당일 아침, 정혜영은 출근을 준비해야 함에도 안시현의 정장과 넥타이를 손수 고르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자신이 고른 정장을 차려입은 안시현의 모습을 보며 정혜영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내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역시 제대로 골랐어. 잘 어울려요.”
“이제 메이크업만 받으면 되겠네요. 정장 골라 줘서 고마워요. 이제 저 신경 쓰지 말고 당신 출근 준비해요.”
“일찍 퇴근해서 생방송 볼 거니까, 남우주연상 수상하기를 바랄게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안시현이 정혜영과 가볍게 입을 맞췄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올게요.”
아예 기대감이 없다면 기분 좋게 시상식에 참여해서 동료 배우들의 수상을 축하해 줬을 거다.
그러나 안시현은 자신이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꽤나 높다 점치고 있었다. 실제로 언론에서도 4파전이 아닌, 안시현과 송강식의 2파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만큼 2005년에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편지』와 『왕의 사람』에서 두 사람이 보여 준 연기는 엄청났다.
그렇다면 안시현과 송강식 중 어느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높을까?
언론은 6 대 4로 안시현의 우세를 점쳤다.
회귀 전.
안시현은 『위장취업』을 통해서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만 그때와 지금의 기분은 사뭇 달랐다.
당시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고서 수상한 것이었고, 이번에는 무려 30대가 되기 전에 수상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게다가 연기대상과 남우주연상을 모두 받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회귀 당시 목표로 했던 국민배우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것이기에 떨리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설레발은 치지 말자. 수상에 실패하면 기대했던 것만큼 실망감도 커질 테니까.’
안시현은 애써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수상이 확정된 게 아닌 상황에서 설레발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혹여나 수상에 실패하더라도 웃으면서 동료 배우들의 수상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참석한 대한영화제 시상식.
안시현은 송강식과 함께 기자들과 짧게 인터뷰를 하고 들어오는 안광석을 마주했다.
안광석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안시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시현의 제대 직후, 안광석이 조언을 구할 때 이후로 간만에 얼굴을 보는 거였다.
서로 스케줄이 겹치지 않다 보니 억지로 시간을 내는 게 아니면 얼굴 볼 기회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저희 김희숙 작가님 단막극에 같이 출연했었잖아요. 시현이는 단역이긴 했지만요.”
“아아, 기억날 거 같다. 용케 친해졌네? 광석이 너 쉽게 친해지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시현이가 먼저 저한테 다가왔거든요. 이래저래 조언을 구할 일도 많았고요. 아, 『왕의 사람』에 출연하기를 권유한 것도 시현이었어요.”
“오. 인생의 은인이네. 뭐하냐. 기자들 보는 앞에서 시원하게 절 한번 하지 않고.”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운데, 화장실을 다녀온 최정수까지 합세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광석입니다!”
“오, 장신? 연기 기똥차던데?”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극단에 한번 놀러 가도 되겠습니까?”
“무대 출신이라고 했던가? 당연히 되지. 올 때 양손 무겁게 해서 오는 거 잊지 말고.”
“물론이지요.”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5명 중 4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기자들에게 관심을 끄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다.
몇몇 기자는 사진을 찍으며 네 사람에게 인터뷰 좀 따 보려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시선을 느낀 최정수가 몸을 돌렸다.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자. 기분 좋게 시상식 와서 기자들한테 시달리긴 싫다.”
“흐흐흐. 이하동문입니다, 형님.”
네 배우가 시상식장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김진모와 황영민을 비롯해 친분이 있는 몇몇 배우가 근처로 다가와 앉았고, 덕분에 시상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카메라 세례를 제대로 받게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우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누라 정신이 없었다. 대한영화제가 시작되기 전까지,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제28회 대한영화제.
‘몇 관왕을 달성할 수 있으려나?’
안시현은 『편지』가 후보에 오른 4개 부문에서 최대한 많은 상을 수상하기를 바랐다. 그 과정에서 남우주연상이 따라온다면 최고의 시나리오가 될 터였다.
일단 포문을 연 건 김진모였다.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김진모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가장 먼저 꽃다발을 건네주러 무대 위에 올라온 안시현에게 미소를 지은 채 귓속말을 했다.
“남우주연상 꼭 받아라.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분명 땅을 치고 후회할 거야.”
안시현은 미소를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기대감을 최대한 내려놓긴 했지만, 그 또한 김진모처럼 남우주연상을 바라고 있었다.
잠시 후.
김진모가 스탠드 마이크로 얼굴을 가져다 대며 준비해 온 수상 소감을 이어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주연으로 출연해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된 배우 김진모입니다.”
김진모의 위트 있는 수상 소감 덕분에 시상식장에 웃음꽃이 번져 나갔다.
김진모의 수상을 시작으로, 『편지』는 본격적으로 상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곽상필이 감독상을, 『편지』가 올해의 영화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영화제의 대미를 장식할 남우주연상의 수상만이 남게 됐다.
전년도 수상자인 송강식이 시상을 위해 무대에 섰다.
“이거 참…… 시상을 위해 무대에 올랐는데 제가 시상하는 난감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아, 물론 저는 제가 수상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수 선배와 영민이랑 남우주연상을 누가 수상할지를 두고 술 내기를 했는데, 개인적으로 내기에서 이기기를 바랍니다. 제가 수상하면 내기에서 지거든요.”
송강식은 술 내기를 하면서 자신을 수상 후보로 지목하지 않았음을 언급했다.
이에 많은 배우들의 시선이 최정수와 황영민에게로 향했다. 송강식과 두 배우가 어떤 배우의 수상을 점쳤는지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안시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선배님, 누구한테 걸었습니까?”
“비밀. 두 명이 같은 사람한테 걸었다는 거만 알려 줄게. 미리 말하면 재미없으니까.”
호기심은 잠시뿐.
안시현은 이내 송강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세 배우가 누구의 수상을 예상했는지가 아닌,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더 궁금한 타이밍이었으니까.
잠시 후.
송강식이 수상자가 적힌 카드를 확인했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안시현과 최정수와 안광석이 나란히 앉아 있는 쪽으로 향했다.
세 사람 중 수상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28회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는『편지』의…….”
편지를 언급하면서 후보는 최정수와 안시현으로 압축됐다. 이에 기자들은 최정수와 안시현으로 포커스를 맞췄고, 생방송 화면에도 최정수와 안시현의 모습을 나란히 비춰 줬다.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어느 정도 뜸을 들인 뒤.
이내 송강식이 수상자를 호명했다.
“안! 시! 현! 축하한다!”
두 개의 1000만 영화, 수상 후보에 오른 네 배우.
그 어느 때보다 남우주연상 경쟁이 치열했고, 어느 후보가 수상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결국 수상의 영광을 안은 건 안시현이었다.
수상자로 호명되자마자, 안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진모가 짧게 포옹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짜식, 축하한다.”
“고맙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 가장 먼저 네게 축하받고 싶었어.”
“내년에 내가 수상하면 너도 똑같이 축하해 줘.”
“2회 수상 가나요?”
“내가 말 안 했던가? 아버지의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3회 수상을 갱신하는 게 내 인생 목표잖냐.”
김진모 이후 여러 배우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안시현과 작품을 함께했던 배우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다가와서 진심으로 축하해 줬고, 그 중에서도 최정수는 안시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유독 거칠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 내 메이크업…….”
“흐흐흐. 축하한다, 인마. 네가 받을 줄 알았다.”
“선배님은 저한테 걸었어요?”
“내가 살 일이 없다는 거만 알아 둬. 뭐해? 얼른 무대 올라가서 상 받고 소감 받아야지.”
안시현이 성큼 무대 위로 올라갔다.
송강식과도 가볍게 포옹을 하고서 그로부터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건네받았다.
제28회 대한영좌에 남우주연상.
아직 수상자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트로피에는, 며칠 내로 안시현의 이름이 새겨지게 되리라.
그 순간 감정이 울컥했다.
회귀 전에도 그랬지만, 남우주연상을 받는다는 건 배우에게 있어 뜻깊은 일일 수밖에 없다.
쉽게 얻은 상이 아니다. 최선의 연기를 위해 수없이 고민하고 노력한 끝에 받아 낸 거다. 감정이 격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안시현이 애써 눈물을 참았다.
좋은 날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기분 좋게 소감을 말하고서 수상의 영광을 만끽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남궁수민 역에 절 캐스팅해 준 곽상필 감독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간첩입니다』 뒤풀이 자리에서, 마지막 페르소나가 되어 달라고 하셨던 감독님의 말 한마디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회귀 후.
안시현이 연기에 몰두하게 된 원동력은 국민 배우가 되겠다는 목표 외에도 여러 가지였다. 단순히 국민 배우 하나만 바라보았다면 이토록 열정을 불태우지 못했을 거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마지막 페르소나가 되어 달라고 했던 곽상필의 말이었다.
존경하는 감독인 곽상필의 마지막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할 정도의 배우로 성장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 말이 없었어도 좋은 배우로 성장했을 거다.
다만 곽상필이 그때 그 말을 해 줬기에 보다 의욕적으로 연기에 임한 게 사실이었다. 국민 배우가 되겠다는 목표 외에도 또 하나의 커다란 목표가 생긴 거였으니까.
“다음으로는 일찍 퇴근해서 시상식을 챙겨 보고 있을 사랑하는 아내, 이 자리에 있는 제 롤 모델 최정수 선배님, 그리고…….”
안시현은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했다.
그사이.
김진모가 최정수와 황영민에게 물었다.
“그래서 술 내기는 누가 진 거예요?”
이에 최정수는 미소를 짓고, 황영민은 인상을 쓰며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영민이가 졌어. 아, 참고로 셋 다 시현이가 수상할 거라고 예상했다.”
“말이 안 되지 않아요? 셋 다 걸었는데 영민 선배가 질 수가 없지 않아요?”
“젠장. 내기가 안 된다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다른 후보에게 걸라고 하잖냐. 그래서 강식 선배한테 걸었다. 이거 완전 사기 아니냐?”
“억울하면 가위바위보 할 때 가위부터 내는 습관부터 고치시던지~”
“와…… 그래서 둘 다 주먹 낸 거였어요? 이건 진짜 사긴데? 두고 보십쇼.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
투탁거리는 황영민과 최정수, 포복절도하는 김진모,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수상 소감을 이어 나가는 안시현까지.
훈훈한 분위기 속에 제28회 대한영화제 시상식이 마무리됐다.
그리고…….
안시현은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회귀 후 꼬박 8년 만에 이뤄 낸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