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20화>
120화 기회가 되면
부상으로 인해 현실과 타협했지만, 그 이후로도 정승상은 꿈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다. 여전히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다는 목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일과가 끝난 저녁.
홀로 체육관에 남아 이른 새벽까지 훈련을 하는 날이 많았다. 평소에 무기력한 모습을 자주 보여 줬던 건, 저녁에 홀로 훈련하면서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일까?
정승상의 기량은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다.
전성기라고 자평하는 20살 때와 비교해도 크게 부족한 부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쌓인 경험을 감안하면 그때보다 더 발전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이에 정승상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도 될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꿈을 위해 내달려도 괜찮을까?
부상으로 인해 번번이 발목이 잡혔다.
어쩌면 또다시 부상으로 인해 고배를 마실 수도 있다. 부상과 상관없이 기량의 저하로 인해 국가대표 선발전의 문턱을 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미련을 놓는 게 어려웠다.
그 와중에 지호성이 찾아온 것이었다.
고민 끝에 속내를 털어놓은 정승상에게, 지호성은 미소를 지은 채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솔직하게 대답해 줘서 고맙다. 그럴 줄 알고 채찍을 준비해 왔지.”
“……채찍이요?”
“어. 확실한 동기 부여를 위한 채찍이지. 열어 봐.”
정승상이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정승상의 기권으로 올림픽에 출전해서 따냈던 지호성의 금메달이 들어 있었다. 부상만 없었다면 정승상이 도전했어야 할 그 금메달이 말이다.
“머리맡에 놔둬.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생각해. 죽어라 노력해서 3년 후에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채찍 제대로네요.”
“정승상 맞춤형 채찍이지.”
정승상과 지호성이 눈을 마주쳤다. 이내 두 사람이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맞잡았다.
“또다시 부상으로 좌절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눈곱만큼의 미련조차 남지 않게 모두 불태워 볼게요.”
“그래. 나랑 함께 싹 다 불태워보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자고.”
3년 후.
33세에 인생 마지막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하기 위해서 정승상이 지호성과 의기투합하기로 결심했다.
* * *
안시현과 류성웅이 손을 맞잡고 십여 초 후.
“……OK.”
양상효 감독이 고민하지 않고서 OK 사인을 냈다.
자리에 일어나서 박수를 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승상과 지호성을 완벽하게 표현해 준 두 배우를 보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많은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안시현과 류성웅은 단 한 번의 시도로 완벽한 그림을 그려 냈다. 첫 촬영에 이은 두 번째 원 테이크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선배.”
“어휴. 원 테이크로 끝내고 싶었는데 다행히 맞아떨어졌네. 두 번 몰입할 자신 없었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한 번에 안 끝났으면 곤란할 뻔했어요.”
촬영 전 연습을 하며, 안시현과 류성웅은 몰입도를 최대한 끌어올려 원 테이크를 노리기로 했다.
신 49는 중학생 유도 선수들의 운동장 뜀박질과 대사 한 마디를 제외하면 정승상과 지호성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다. 두 사람의 연기가 아닌 다른 요소로 인해 NG가 날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는 뜻이다.
중학생 유도 선수들이야 추가로 컷을 따내서 붙여도 무방하니까.
여러 번 시도하는 것보다 최대한 몰입해서 한 번에 끝내는 게 낫다는 게 두 사람의 생각이었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안시현은 원 테이크를 만들어 낸 류성웅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성웅 선배 덕분에 쉽게 갈 수 있었어.’
신 49는 안시현이 아니라 류성웅이 리드했다. 어렵사리 속내를 드러내는 정승상을 설득하러 온 지호성의 연기가 더 중요한 신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연습할 때부터 류성웅이 리드를 했고, 안시현은 류성웅과 호흡을 맞추는 데에만 집중했다.
만약 류성웅의 연기가 시원치 않았다면?
원 테이크는 불가능했을 거다.
‘이렇게 잘하면서 조연에 머무르려고 했다니 참……. 개과천선한 건 좋은데, 사람이 너무 소심해졌어.’
캐릭터 구축, 몰입, 감정 표현, 소소한 애드리브까지.
안시현이 봤을 때 류성웅은 조연에 머물 수준을 넘어선 지 제법 되어 보였다. 이미 한 작품을 끌고 갈 만한 역량이 충분했다.
본인이 자신감이 없어서 도전을 두려워했기에 정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수고했다. 아침 일찍부터 나온 보람이 있네?”
“그러게요. 이제 두 신 남았네요. 사흘 후죠?”
“응. 내일하고 모레는 촬영 없어. 성웅 씨는 연습실에서 살 기세던데, 너는 어떻게 할래?”
박정상의 질문에 안시현은 한 치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고민을 할 만한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틀어박혀야죠.”
어쩌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주요 신의 촬영이 사흘 후에 잡혀 있다.
신 49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신 69와 신 70의 명장면으로 만들 판을 까는 데에 성공했다. 이틀의 여유 시간 동안 연습을 통해 완벽하게 준비를 끝마치고서 촬영에 임하고 싶었다.
‘간만에 셀프 감금 한번 해야겠네.’
* * *
신 69.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한 달 전.
연습을 하다가 어깨 부상이 재발해서 병원에 온 정승상과,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당사자보다 더 초조해하는 정승상의 모습을 그린다.
신 70.
검사 결과 어깨 부상 정도가 심한 상태는 아니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은 무리일 거라는 판정이 내려진다.
그럼에도 정승상은 선발전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사실상 마지막 기회이니만큼 부상을 안고서라도 도전하고 싶었다. 부상을 핑계로 도전을 포기한다면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았으니까.
비교적 무덤덤하게 선발전에 도전하겠다고 말하는 정승상과 그런 정승상의 각오에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는 지호성의 모습이 핵심이다.
연습을 위해 JM액터스 사옥으로 가는 길.
대본을 검토하면서 안시현을 자신도 모르게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정승상이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쪽이 더 공감이 돼.’
당초 대본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감정이 복받친 정승상이 지호성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시현의 제안으로 인해 대본이 수정되며, 정승상은 비교적 무덤덤하게 부상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도전이 좌절된 게 아니다. 미약한 어깨 부상으로 인해 걸림돌이 하나 생긴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 도전을 앞두고 있는 정승상이 감정을 복받칠 만한 부분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계속해서 도전을 이어 나가겠다고 말하는 게 관객들을 더 감동시킬 거라고 내다봤다.
부상으로 인해 우여곡절 가득한 선수 생활을 했고 한 차례 은퇴를 결심했던 정승상이기에, 관객들이 감동받을 포인트는 차고 넘쳤다.
오히려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몇 배는 감동적이리라.
‘최대한 절제한다. 흡사 비장함마저 느껴질 정도라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어. 어느 수준이 괜찮을지 강약 조절을 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절제도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는 법이다.
안시현은 어느 정도로 감정을 절제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류성웅과의 연습을 통해서 적절한 선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기로 했다.
‘간만에 연습실에 틀어박히게 됐지만 괜찮아. 촬영 막바지가 아니면 당분간은 이럴 일이 없을 테니까.’
신 69와 신 70을 제외하면 주요 신이라고 해 봐야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인 신 115 정도가 전부다.
다만 신 115는 양상효 감독의 뜻에 의해 가장 마지막으로 촬영 순번이 밀리게 됐다.
“대미를 장식하는 신이니만큼 가장 마지막에 촬영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안시현은 양상효 감독의 뜻에 동의했다.
신 115의 경우 다른 주요 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은 편에 속한다.
그저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을 모두 토해 낸다는 느낌으로 연기하며 되기에, 심신이 지친 촬영 막바지에 연기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안시현이 JM액터스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온 박정상으로부터 커피를 건네받으며 슬쩍 물었다.
“성웅 선배는요?”
“2시간 전에 와서 연습하고 있어.”
“의욕 장난 아닌데요?”
“들어보니까 『칠전팔기』가 조연으로서 마지막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고, 주연으로 발돋움하는 데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 악물고 신 스틸러 역할에 충실하고 싶은가 봐.”
“이해해요. 저도 그랬었거든요.”
『나는 간첩입니다』 당시.
안시현은 조연 중 가장 비중이 적은 리수철 역을 맡았지만, 존재감만큼은 다른 조연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으며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보여 준 리수철 연기로 인해 『형아, 동생』의 비공개 오디션을 치르며 주연으로 도약할 수 있었고 말이다.
류성웅 또한 『칠전팔기』의 지호성 역이 주연 도약에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지금 보여 주는 연기력을 안정적으로 계속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좋은 주연 배우가 될 수 있을 거야. 좋은 작품이기도 하고.’
류성웅이 선택한 차기작은, 안시현의 기억에 따르면 손익 분기점을 넘은 영화이자 회귀 전의 류성웅과의 접점이 전무한 영화였다.
물론 주연 배우가 바뀌었기에 영화의 흥행 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됐다.
다만 시나리오가 좋고 류성웅의 연기 스타일과 배역의 캐릭터성이 잘 어울리기에, 연기에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내다봤다.
연습실 앞.
안시현은 류성웅의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10분 후에야 문을 열었다.
“왔어?”
“네. 감정선 좋은데요, 선배? 연습이라서 힘 빼고 한 게 이 정도라니, 실전이 기대되네요.”
“속 시원하게 오열 한 번 하면 편할 텐데, 적절한 수준에서 표현해야 하니까 더 어렵네. 네가 볼 때는 어땠던 거 같아?”
“제 생각에는…….”
안시현과 류성웅은 신 69와 신 70에서의 연기에 대해서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연기에 필요한 부분을 받아들이며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연습을 이어 나갔다.
이튿날 저녁.
연습을 끝내고 류성웅과 함께 식사를 하며, 안시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기회가 되면, 성웅 선배랑 주연으로서 다시 한번 함께하는 것도 재밌겠어.’
언젠가 류성웅과 주연 대 주연으로서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날을 꿈꿨다.
그만큼 류성웅과 호흡을 맞추는 건 매우 즐거웠다.
호흡 면에서는 가장 잘 맞는 김진모만큼은 아니지만, 류성웅과도 꽤나 호흡이 잘 맞았다. 특히나 애드리브를 치더라도 서로 눈치껏 받아 주니, 보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게 가능했다.
동시에 진한 아쉬움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류성웅과 함께 연기할 분량이 많이 남지 않은 탓이다.
신 69와 신 70 이후 류성웅에게 남은 신이라곤 고작 다섯 신이 전부였으니까.
안시현은 지금의 아쉬움을 주연 배우로서 다시 만나 해소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다음 날.
“준비됐습니다, 감독님.”
“저도 준비 끝났습니다.”
“그럼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말했던 부분에서 끊어 갈 테니 원 테이크는 생각하지 마시고, 쉬어 가야 할 것 같으면 바로 말해 주세요. 전 새벽까지도 촬영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네. 저희도 그럴 각오로 왔습니다.”
안시현과 류성웅이 신 69와 신 70을 완벽하게 연기할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필요하다면 늦은 새벽까지도 재촬영을 반복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신 69과 신 70이 『칠전팔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판단했다.
몇 분 후.
안시현과 류성웅이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섰다.
“액션.”
훗날.
『칠전팔기』의 최고 명장면으로 손꼽히게 될 신 69와 신 70의 촬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