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04화>
104화. 해냈다
첫 상영을 시작하기 전.
곽상필 감독과 안시현과 최정수와 김진모가 무대 인사를 가지게 됐다.
메가폰을 잡지 않을 때면 파리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 불어에 능통한 곽상필 감독과 정혜영의 도움을 받아 준비해 온 안시현은 불어로 무대 인사를 했다.
반면 최정수와 김진모는 통역의 도움을 받았다.
무대 인사가 끝난 뒤.
꿀꺽.
안시현이 마른침을 삼키며 착석했다. 김진모의 낯빛에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해외영화제는 처음이라 좀 긴장되네.’
회귀 전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안시현이지만, 3대 영화제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경쟁 부문에 초청됐기에, 나흘간의 상영으로 수상 여부가 결정될 터였다.
긴장이 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곽상필 감독과 최정수는 무덤덤했다.
수상을 확신하는 건지,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초청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의연한 태도와 달리 안시현은 상영이 끝날 때까지 긴장하고 있었다.
‘영화가 눈에 제대로 들어온 게 신기할 지경이야. 다행히…… 기대 이상으로 잘 나온 것 같네.’
사실 이맘 즈음에 주연 배우들이 한데 모여 『편지』의 최종 편집본을 확인할 예정이었다.
공교롭게도 황금영화제에 초청을 받으며 나흘 동안의 상영을 통해서 최종 편집본을 확인하게 됐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과물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특히나 클라이맥스가 인상 깊었다.
이정우와 남궁수민이 충돌하는 별장 신의 긴장감이 엄청났다. 곽상필 감독 특유의 숨 막히는 연출이 제대로 빛을 발했다.
첫 상영이 끝난 직후.
짝짝짝.
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는 황금뿌리상을 무려 세 번이나 수상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이었다.
* * *
“『편지』는 작품에 많은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이코패스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집중했고,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혹자는 잔인하기만 한 영화라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오늘 『편지』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단언하건데, 최근 몇 년 동안 제가 봤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편지』가 상필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게 진심으로 아쉬울 정도로요.”
나흘의 상영 기간 동안『편지』는 현지에서 기대 이상으로 화제가 됐다.
복수에 눈이 먼 형사 이정우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남궁수민의 모습은 세계 각국에서 모인 감독과 배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나.
해외 언론들은 영화의 막바지에 나오는 별장 신이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진모가 연기한 황경신의 존재감이 다소 떨어지는 건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황경신은 주연 배역이지만 이정우를 보조하는 느낌이 강한 배역이다. 이정우와 남궁수민의 미친 존재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김진모가 연기를 못한 건 결코 아니다.
마냥 무겁기만 할 수 있는 『편지』가 적절히 강약을 조절하며 별장 신에서 긴장감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건 황경신 덕분이었으니까.
영화의 분위기가 무겁게만 흘러갔더라면 별장 신에서 관객들이 숨을 죽이지 않았으리라.
이에 많은 관계자들이 『편지』를 극찬했다.
곽상필 감독과 친분이 있는 감독들은 물론이거니와, 친분이 없는 감독들 중에서도 『편지』를 본 이후 극찬을 하는 이들이 꽤나 있었다.
이는 한국 기자들을 통해서 곧장 기사화가 됐다.
[프랑스의 거장이 극찬한 『편지』.]
[좋은 연기와 좋은 연출, 좋은 안목의 시너지.]
[『편지』, 곽상필 감독에게 두 번째 황금영화제 수상 영광 안겨 줄까?]
[『편지』는 경쟁 부문 초청작, 수상 가능성 존재한다.]
그리고 김진석 대표는 언론들의 호들갑을 『편지』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했다.
황금영화제에 초청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홍보 수단이 되어 주는데, 현지에서 극찬을 받고 있다고 하니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김진석 대표가 선택한 홍보 방법은 촬영장에서의 훈훈한 분위기를 편집한 영상을 올리는 것이었다.
6월 초부터 최종 홍보 영상과 함께 본격적인 홍보가 시작되기에 앞서, 『편지』가 좋은 분위기에서 제작됐다는 건 대중들에게 어필하기로 한 것이다.
반응은 예상 이상으로 좋았다.
황금영화제 초청으로 인해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촬영장에서의 비하인드는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에 김진석 대표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홍보전은 잠시 뒤로 미뤄놓고서, 황금영화제의 경쟁 부문 수상 결과에 관심을 드러냈다.
“황금영화제에서 수상한다면 은퇴 선물로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뭐…… 황금뿌리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랑프리나 감독상, 연출상 중 하나는 받지 않으려나?”
김진석 대표는 진심으로 바랐다.
곽상필 감독의 은퇴를 앞두고 의미 있는 선물을 받을 수 있기를 말이다.
그것이 『편지』의 흥행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고, 자신이 작정하고 홍보전에 몰두할 판이 마련될 거라고 김진석 대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뭐가 됐건 좋으니까 상 하나만 받아서 와라. 아, 귀국하면 시현이한테 선물 하나 줘야겠네. 녀석이라면 분명 이걸 마음에 들어 할 거야.”
* * *
나흘의 상영 기간이 모두 끝났다.
마지막 상영을 지켜보고 현지 기자들과 짧게 인터뷰를 한 이후, 안시현과 김진모는 해변으로 향했다.
황금영화제에 초청된 각국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해변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해변에서는 촬영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즐기는 게 가능했다.
이에 안시현과 김진모 또한 음료를 손에 쥔 채 해변을 거닐었다.
“이틀만 더 있으면 귀국이네. 정신 차리고 보니까 집에 갈 시간이 임박한 기분이야.”
“좀 정신없이 지나가긴 했지. 통역의 힘을 빌려서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 힘든 부분도 있었고.”
“그래도 재밌었어. 동기 부여도 됐고.”
김진모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금영화제 기간 동안 새로 생긴 목표를 안시현에게 슬쩍 이야기했다.
“다음에 초청받는다면, 그때는 반드시 남우주연상을 받고 말겠어. 세계 3대 영화제 모두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게 내 새로운 목표야.”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넌 관심 없어?”
“나? 나는…….”
안시현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현재 목표와 김진모가 말한 새로운 목표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나한테는 그렇게 거창한 목표는 안 어울려. 매 작품마다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는 게 내 목표야. 그러다 보면 수상 경력이야 하나둘씩 쌓일 거고, 어쩌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어?”
“너다운 목표네. 난 솔직히, 몇 년 정도 더 연기하다가 잠깐 쉬려고 했었거든? 근데 황금영화제 와 보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고. 내가 구상한 캐릭터를 내 의지대로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적당히 휴식기만 가져가면서 계속 달려 보려고.”
“하여간 열정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안시현은 김진모의 연기 열정에 혀를 내둘렀다.
실제로 김진모는 회귀 전에도 가장 긴 휴식기를 가져본 게 8개월에 불과할 정도로, 꾸준한 연기를 하며 국민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8개월도 할리우드 진출을 위해서 영어를 배우려고 이태원에서 살다시피 한 것이었고 말이다.
반면 안시현의 경우는 달랐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야 김진모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신했지만, 더 좋은 연기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휴식이 필요할 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아마…… 내후년 즈음에는 가능하지 않으려나?’
안시현은 그 시기를 내후년 즈음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1년에서 2년 동안, 긴 휴식기를 가지며 더 좋은 연기를 위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다만 김진모에게 그 이야기는 하진 않았다.
안시현이 휴식기를 1, 2년 가져가려는 건 회귀로 인해 매년 어떤 드라마와 영화가 흥행했는지, 어떤 작품이 아쉬웠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과 2008년 사이에는 안시현이 하고 싶은 작품이 마땅히 보이지 않았기에, 그때를 기점으로 휴식기를 가져가려는 것이었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굳이 그때 휴식기를 취하는 걸 설명할 방법도 없고.’
물론 휴식기가 길어질 여지는 존재했다.
만약 현재 찾고 있는 시나리오 두 개를 결국에 찾아내지 못한다면, 안시현은 휴식기를 보다 길게 이어 갈 생각 또한 하고 있었다.
귀국하면 안시현은 미리 부탁해 놨던 곳들로부터 대본을 건네받게 될 거다.
안시현은 그중에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두 대본 중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나흘의 상영이 끝난 다음 날.
황금영화제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쟁 부문의 시상식이 진행됐다.
시상 순서는 매년 조금씩 달랐지만, 마지막 시상 부문 3개는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감독상, 최우수상이라고 볼 수 있는 그랑프리상, 매년 단 한 명의 작품에게만 수상의 영애가 주어지는 황금뿌리상까지.
경쟁 부문에 초청된 모든 작품의 감독과 배우들이 간절하게 바라는 상이 마지막에 몰려 있는 것이다.
‘연출상이 세 번째였나? 초반부에 이름이 불리면 한결 마음이 편해질 텐데 말이야.’
애석하게도 안시현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편지』는 여러 부문에서 후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번번이 수상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안시현의 경우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아쉽게도 두 번째로 많은 기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수상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수상자와의 격차는 고작 3표였다.
“만약 『편지』가 개봉을 한 작품이었다면 남우주연상은 안시현 배우의 차지였을 겁니다. 선상영 작품의 경우 아무래도 투표에서 불리한 경우가 더러 있다 보니…… 그토록 화제를 모았는데도 3표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군요.”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이자 곽상필 감독과 친분이 두터운 감독은, 곽상필 감독의 옆자리에 앉아 진심으로 안시현의 남우주연상 수상 실패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반면 안시현은 통역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 어린 미소를 지은 채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자신의 메소드 연기 구축에 많은 영감을 줬던 이탈리아 출신 배우가 수상한 것이기도 했지만…….
‘3표 차이면 며칠 만에 화제가 된 것치고는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봐야지. 게다가 황금영화제의 핵심은 내가 아니기도 하니까.’
영화제 기간 동안 상영한 게 전부임에도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뻔 했다. 수상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고작 3표 차이로 밀렸다는 걸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만큼 남궁수민 캐릭터가 『편지』를 본 심사위원들에게 인상 깊었다는 뜻일 테니까.
게다가 황금영화제의 핵심인 황금뿌리상은 작품에, 정확히는 작품과 감독이 수상을 받게 된다. 배우가 메인이 아닌 감독이 메인인 영화제라고 봐야 한다.
안시현은 안타깝게도 수상에 실패했지만…….
아직 곽상필 감독이 남아 있다.
감독상, 그랑프리 상, 황금뿌리상.
안시현은 셋 중 하나만이라도 곽상필 감독이 수상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일단 감독상은 실패였다.
곽상필 감독이 아니라,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나의 영혼의 친구인 상필과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기쁘지만, 더 이상 이 무대에서 볼 수 없다는 게 저를 슬프게 만듭니다. 오늘 이 상은, 제 작품 구상에 많은 도움을 줬던 상필에게 바치겠습니다.”
뜻밖의 수상 소감으로 인해 일순간 스포트라이트가 곽상필 감독에게로 집중됐다. 곽상필 감독은 자신의 친구가 수상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기립박수로 화답을 해 주었다.
몇 분 뒤.
곽상필 감독은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그랑프리상의 수상자로 곽상필 감독과 『편지』가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해냈다.’
후보에 오른 대부분의 부문에서 수상에 실패했지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크고 의미 있는 상이 주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