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93화 (93/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3화>

93화. 표정 보니

사실 곽상필 감독은 장례식장에서 촬영하게 될 세 신의 촬영 순서를 놓고서 생각이 많았다.

고민 끝에 최정수가 먼저, 최정수와 김진모가 함께 촬영하는 신이 두 번째, 주연 배우 셋이 한 카메라에 잡히는 신을 마지막에 배치하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순서야 어떻게 해도 다들 잘해 주겠지만, 이렇게 배치해야 기자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거야.’

이는 기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내린 결단이었다.

세 번째 신은 피해자의 장례식에 참여한 두 명의 형사 이정우와 황경신, 그들을 남궁수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신이다.

남궁수민 역을 맡은 안시현이 제대로 연기해 주기만 한다면, 취재를 위해 모인 기자들에게 제대로 임팩트를 남길 게 분명했다.

영화 개봉 전에 이슈가 된다고 해서 흥행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준이냐면 그것 또한 아니다.

실제로 개봉 전부터 제작비나 캐스팅라인 등으로 이슈가 된 영화들의 경우, 예고편의 퀄리티가 확 떨어지지만 않으면 대체로 개봉 초반 스코어가 좋은 편이니까.

무엇보다 『편지』는 목표를 높게 잡은 영화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사상 최다 관객 동원, 나아가서는 1000만 관객을 노리고 있다.

흥행에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은 모조리 다 시도해보는 게 맞는 상황이다.

‘제대로 판만 깔린다면, 1000만 관객도 이제는 더 이상 꿈이 아니야.’

2003년에만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무려 둘이나 탄생했다. 더 이상 1000만 관객 돌파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목표가 됐다.

스크린 쿼터제와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의 대대적인 도입으로 이전에 비해 관객 동원력이 급증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영화가 대박이 나거나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심지어 스크린 쿼터제의 해택을 누리고도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는 영화들도 제법 많다. 영화의 퀄리티와 별개로 기대 이하의 흥행 성적을 기록한 작품들 또한 어디 한 둘이던가.

『편지』가 추구하는 두 가지 목표는, 영화를 잘 만드는 걸 넘어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잘 맞아떨어져야 이루는 게 가능하다.

첫 촬영을 기자들에게 오픈한 건, 여러 가지 조건들 중 하나를 만들기 위한 곽상필 감독의 포석이었다.

사실 첫날 촬영의 세 번째 신 같은 경우는 대화가 그리 많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신에서의 대사가 상당 부분 반복된다.

조문을 온 이성우와 황경신을 지켜보는 남궁수민의 왜곡된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신이니까.

신 내에서 남궁수민의 대사는 딱 한 마디다.

대사보다는 이성우와 황경신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보여 주는 리액션이 핵심이었다.

“선배님, 방금 장례식장에…….”

“그게 정말이야?”

“네.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이성수와 황경신이 분주해졌다. 남궁수민이 미리 준비해 놓은 택배가 장례식장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형사들을 보며…….

남궁수민의 입가에서는 조금씩 미소가 사라져갔다.

함께 온 사람들은 뒤숭숭한 분위기가 신경이 쓰여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남궁수민의 표정이 굳은 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가까이 있다고 했잖아. 흔적도 잔뜩 남겨 놨잖아. 그런데도 날 못 찾으면 어떻게 해?’

형사들이 자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살인을 저지른 이후.

남궁수민은 살인을 통해 얻는 쾌감이 줄어들었음을 느꼈다. 이제 살인만으로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짓을 해야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을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남궁수민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살인에 조금 더 스릴 있는 요소가 추가된다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형사들과 놀이를 해 보자.

이에 남궁수민은 열 번째 살인부터는 의도적으로 흔적들을 조금씩 흘렸다. 급기야 살인 증거에 편지를 더해서 보내기까지 했다.

형사들이 자신을 찾아 주기를 바랐다.

자신을 잡으러 온 형사들을 도리어 죽이는 그 순간.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전율을 느낄 수 있으리라, 최고의 살인이 되리라 확신했다.

다만 아직은 부족한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형사들을 너무 높게 평가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살인에서는 어떤 식으로 흔적을 남기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사들을 자극할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자리를 뜨는 남궁수민의 시선이 한 여성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바로 황경신의 연인이었다.

“다음은…… 네가 좋겠어.”

남궁수민이 몸을 돌렸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는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다시 미소가 맺혀 있었다.

*   *   *

안시현의 연기가 끝나고, 곽상필 감독은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이내 그는…….

“……OK. 이대로 갑시다. 수고했어요.”

OK 사인을 냈다.

원 테이크로 촬영을 끝낸 안시현이, 장례식장 안으로 다시 들어오며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야. 대사 한 마디가 전부인데 캐릭터가 살아 있다니, 연기 많이 좋아졌네. 이제 어디 가서 당당하게 배우라고 명함 내밀어도 되겠어.”

“선배님이 명함 하나 파 주시면 잘 내밀겠습니다.”

“크흐흐. 내기해서 딴 돈으로 파 주랴?”

캐릭터성을 드러내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은 대사와 행동이다. 당연하게도 대사와 행동이 적을수록 특징을 표현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촬영에서 안시현은 최정수와 김진모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일어나서, 대사를 속삭이며 자리를 떴다. 그것이 대사와 행동의 전부였다.

캐릭터성을 드러내기에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감정과 행동이 조금만 넘쳐도 사이코패스라는 캐릭터성이 무너지고, 그렇다고 부족하면 캐릭터성 자체를 드러낼 수가 없는 장면.

그럼에도 기자들은 안시현이 표현하려는 남궁수민이라는 캐릭터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기자님들 표정 보니…… 역시 포인트를 주는 게 좋은 선택지였던 것 같네.’

세 번째 신의 촬영에서 안시현이 선택한 남궁수민 캐릭터의 표현 방법은 미소의 조절, 그리고 눈빛이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던 남궁수민이지만, 기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이질감을 느꼈다. 촬영이 끝난 뒤에야 한 기자의 말로 인해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 뭐가 이상한지 계속 헷갈렸는데……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입만 웃고 눈은 안 웃고 있어서 이상하게 느껴졌던 거예요. 다시 웃을 때는 눈도 웃었고요.”

“……그러네, 맞네. 그것 때문이었네!”

“와. 저 방금 소름 돋았어요.”

남궁수민을 연기하는 안시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지만, 눈빛은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는 걸 말이다.

거기에 이성우와 황경신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안시현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사라졌다. 대사 한 마디 없음에도 남궁수민의 심리가 변화했다는 걸 느끼게 해 줬다.

단 한 마디의 대사 이후 다시 미소를 지을 때는, 이전과 달리 눈 또한 웃고 있었다. 남궁수민이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드러냈다.

미소, 그리고 눈빛.

생각해 보면 지극히 평범한 연기 수단이다.

중요한 건 안시현이 이 두 가지만으로, 사이코패스의 왜곡된 심리를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데에 있었다.

꿀꺽.

몇몇 기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질감의 원인을 깨닫고서 소름이 끼친 기자들이 꽤나 많았다. 사이코패스 그 자체를 보여 준 메소드 연기에 감탄했다.

동시에 기자들은 고민에 빠졌다.

최정수, 김진모, 안시현.

셋 중 누구를 메인으로 기사를 써야 할까?

*   *   *

-블록버스터 스릴러 『편지』, 명품 연기의 항연.

-김진모와 안시현, 공백기는 의미가 없었다.

-사이코패스 그 자체를 보여 준 안시현.

-연기를 보고 소름이 돋았던 순간 Top3.

-『편지』, 이토록 개봉이 기다려지는 영화라니.

결과적으로 첫 촬영 현장을 기자들에게 공개한 건 신의 한 수가 됐다.

첫 번째 신에서는 최정수가, 두 번째 신에서는 최정수와 김진모가 함께, 마지막 신에서는 안시현이 맹활약을 하며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기사에서 메인으로 다룬 배우는 저마다 달랐지만, 기사들의 뉘앙스는 대부분 비슷했다.

『편지』의 개봉이 기대된다, 첫 촬영에서의 퀄리티를 계속 이어 나간다면 대박이 날 거다.

이른 새벽.

첫 촬영이 끝난 뒤, 김진석 대표와 만나 곽상필 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분위기가 좋네요.”

“이 분위기를 개봉 직전에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지. 예고편을 세 차례에 나눠서 내보내기로 한 건 대단히 좋은 선택이야.”

“인터넷을 통한 공개라서 반응이 얼마나 좋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여론몰이는 내 전문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넌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주기만 해.”

“결과물은…… 최고일 거라 장담합니다.”

좋은 분위기를 개봉 전까지 계속해서 끌고 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빨라야 2005년 6월에 개봉할 가능성이 높은 영화다.

8개월이 넘게 남은 상황에서 화제성을 계속 이어 가는 건 무슨 짓을 하더라도 힘들다.

중요한 건, 개봉 전까지 주기적으로 대중들이『편지』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거다.

그래서 택한 전략이 언론들에 주기적으로 촬영 현장을 취재하도록 허락하는 것, 잊을 만하면 배우들의 인터뷰를 기사화하는 것, 마지막으로 세 차례에 나눠서 예고편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다만 예고편을 방송 3사를 통해서 내보내면 광고비가 너무 높아지기에, 최종 예고편을 제외하고는 인터넷을 통해서만 공개를 할 생각이었다.

1차와 2차 예고편이 얼마나 화제가 될지는 홍보를 전담할 JM액터스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이에 곽상필 감독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연예기획사 중 언론 플레이로만 따지면 JM액터스를 능가할 곳은 없을 테니까.

차를 마시며 김진석 대표는 첫 촬영의 결과물을 확인해 보았다. 장례식장에서의 세 신을 포함해 도합 여섯 신을 촬영했는데…….

여섯 신을 모두 확인한 김진석 대표의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맺혔다.

“잘 뽑혔네. 주연 셋이 캐릭터를 아주 잘 잡았어.”

“동의합니다. 캐릭터성과 관련된 디렉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세 사람 완벽하게 캐릭터를 만들어 왔더군요. 대본 리딩 하면서 몇 번이나 눈물이 날 뻔해서 고생했습니다.”

“허허허. 너도 진짜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무슨 철면이 그런 걸로 눈물을 흘리려고 해.”

“은퇴할 때가 되니 감성적이게 됐나 봅니다.”

김진석 대표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곽상필 감독이 두세 작품은 더 메가폰을 잡아도 될 거라고 봤지만, 곽상필 감독은 자신의 감독 인생을 상징할 만한 영화인 『편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메가폰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한 번 결정하면 좀처럼 판단을 번복하는 법이 없는 곽상필 감독이기에, 김진석 대표는 두어 차례 설득을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현역에서 물러나는 거지, 이 바닥을 완전히 뜨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곽상필 감독의 경험을 후배 감독들에게 전수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봤다.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감독이, 1000만 관객 한 번은 넘기고 은퇴해야 하지 않겠어?”

“이거…… 어째 1000만 관객을 넘지 못하면 은퇴를 시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그럴 일 없게 최선을 다해 줘.”

“노력하겠습니다.”

배우와 스태프들과 마찬가지로, 김진석 대표의 시선 또한 아득히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1000만 관객.

첫날 촬영한 여섯 신의 완성도는, 제대로 된 환경만 조성된다면 충분히 높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만큼 좋았다.

‘환경이야 내가 만들어 주면 되는 거지. 잊을 만하면 하나씩 터트려 보실까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