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0화>
90화. 역시
흔히들 밖에서는 시간이 참 빨리 흐르는데, 군대 안에서는 질리도록 느리게 흐른다고 말한다.
안시현의 군 복무 기간이 딱 그러했다.
당사자는 언제쯤 제대할까 싶어 지겨워 죽을 것 같았지만, 밖에서 봤을 때는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제대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 즈음.
우정태가 안시현에게 면회를 왔다.
단체로 온 것까지 포함하면 도합 세 번째 면회였지만, 앞선 두 번의 면회와는 그 목적이 달랐다.
“시현아, 나 곽 감독님 영화에 캐스팅됐다!”
“오디션 봤어요?”
“어! 3차까지 가서 겨우 합격했어! 박치홍 역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건 기적이야!”
“축하해요. 근데…… 안전하게 다른 작품 캐스팅을 받아들이는 쪽이 더 낫지 않았겠어요? 솔직히 공개 오디션은 도박수라고 봐야 하잖아요.”
“나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곽상필 감독님의 마지막 작품에 꼭 출연하고 싶었거든. 여차하면 엑스트라 출연이라도 자처할 생각이었어.”
우정태는 안시현에게 캐스팅 소식을 전했다.
안시현이 군대에 있는 사이, 그가 아는 배우 중 입지가 180도 바뀐 배우가 세 명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인『북파』에 비중 있는 조연을 맡으며 대한영화제 남우조연상 수상으로 연기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류성웅.
최고 시청률 42.5%를 기록한 드라마 『놀이공원』에서 사람 속 뒤집어 놓은 시누이 연기로 악역 연기의 재능이 만개하기 시작한 한나래.
몇몇 작품에서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하다『두밀령』에서 안타까움 죽음으로 존재감을 폭발시킨 우정태까지.
세 사람 모두 안시현의 복무 기간 동안 성실하게 연기를 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제대로 다졌다.
세 사람 중 안시현을 가장 놀라게 한 건 우정태였다.
회귀 전에는 연기를 포기하고 매니저의 길을 걸었던 우정태였지만, 지금은 데뷔 후 4년 여 만에 나름대로 입지를 다지는 데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두밀령』은 안시현 또한 휴가를 나가서 정혜영과 둘이 조조로 감상을 한 영화다. 회귀 전과 바뀐 배역이 세 개 있었지만, 그중에서 우정태는 가장 긍정적인 변화로 보였다.
주인공을 대신해 희생하며, 죽는 순간 아내의 사진이 들어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우정태의 연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완벽했으니까.
상당수의 대중들이 『두밀령』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라고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우정태를 케어했던 박정상과 최봉팔이 흐뭇함을 느낄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였고, 우정태를 캐스팅하기 위해 여러 제안이 왔다고 했다.
하지만.
우정태의 선택은 공개 오디션이었다.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작품 공개 오디션에 도전해서, 조연 중 두 번째로 비중이 높은 박치홍 역을 따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였다.
그러나 돈과 안전함을 택하는 게 아닌,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좇아서 연기하는 모습이 안시현의 눈에는 참으로 멋져 보였다.
『너와 나의 시간』 정영철 역에 우정태를 추천했던 4년 전 그날의 선택이 최고의 판단이었다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말이다.
* * *
『편지』.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영화는 2004년 1월 초부터 공개 오디션을 진행한 끝에, 마침내 2004년 4월 말이 돼서야 캐스팅 라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주목할 만한 배우는 크게 다섯 명.
쓰리톱인 최정수와 안시현과 김진모, 단역으로나마 출연해서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영화를 빛내 주겠다고 자처한 송강식과 황영민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연기파 배우들이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작품을 빛내기 위해서 모였다. 그중에는 주연 경험이 있는 배우들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다.
캐스팅 라인만 보면 대한민국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수준임이 분명했다.
2004년 7월 초.
마침내 안시현의 길고 길었던 복무가 끝이 났다.
사회로 돌아온 안시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제대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기자와 팬들 앞에서 전역신고를 하는 것이었다.
“2년 2개월 동안 잊지 않고 기다려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공교롭게도 제대하자마자 바로 작품 준비에 들어가게 될 것 같은데, 너무 늦지 않게 좋은 연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후에는 부모님과 정혜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간만에 어머니표 진수성찬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해가 뜨기도 전에 잠에서 깨며 각 잡고 이불을 개면서, 군인 티를 벗으려면 한참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려와 달리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서 군인 티를 벗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남은 흔적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머리카락 정도가 사실상 전부였다.
부모님이 고향으로 다시 내려간 뒤.
안시현은 정혜영과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정혜영에게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미안해요. 결혼식 내년 봄으로 미루자고 해서.”
2004년 가을에 하려고 했던 결혼을 2005년 봄으로 미루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예정보다 빨리 준비가 끝난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영화 『편지』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7월 말부터 『편지』의 촬영이 예정되어 있고 두 차례로 나눠서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었기에, 2005년 2월까지는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안시현은 원래도 작품을 할 때 촬영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지만, 이번에는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의미 또한 존재했다. 때문에 되도록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을 미루자고 한 것이었다.
이에 정혜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저도 대형마트 지점 늘리는 문제로 올 한 해는 바쁠 것 같았거든요. 서로 바쁜데 굳이 급하게 결혼할 필요 있겠어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까 고마워요. 그 대신…….”
안시현은 결혼식을 미루는 대신 다른 제안을 하나 했다. 정혜영은 이전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안시현은 7월 말까지 정혜영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혜영이 출근했을 때는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4년 7월 25일.
영화 『편지』의 첫 대본 리딩이 진행되는 날.
안시현과 김진모가 일찌감치 만나 점심식사를 함께 한 뒤, 영화사 혜인원으로 향했다.
“준비는 잘했어?”
“너보다 일주일 늦게 제대한 사람한테 준비 잘했냐는 말을 하고 싶냐?”
“지겹도록 대본 검토해서 넝마가 됐을 게 뻔한데 엄살 부리기는.”
“오랜만의 복귀작이라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네. 네가 군대에서 남우주연상 받은 배우의 기분을 알아? 부담감 장난 아니야.”
“그래도 덕분에 포상 휴가 받았잖아.”
“4박 5일 너무 행복했어…….”
2년 2개월의 복무에도 안시현과 김진모의 사이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만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다 엄살을 부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어찌 됐든 2년 2개월 만의 복귀다.
중간에 육군홍보영상이 화제가 됐고, 김진모의 경우 뒤늦게 개봉한 『두밀령』으로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 또한 안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공백이 있었던 건 또한 사실이다.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영화라는 화제성까지 감안하면, 복귀작치고는 과한 관심이 몰릴 게 뻔하다.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제 몫을 못할 것 같냐고 묻는다면, 두 사람 다 단호하게 저을 생각이었다.
엄살은 말 그대로 엄살에 지나지 않았다.
오후 2시.
모두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안시현과 김진모는 최정수와 우정태를 포함하여 친분이 있는 배우들 위주로 대화를 나눴다. 단역으로 출연하기로 한 황영민과 송강식은 다른 영화 촬영 스케줄로 인해서 대본 리딩에는 참여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주요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곽상필 감독은 배우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배역의 비중과 무관하게, 제 마지막 영화를 함께하게 된 모든 배우분들에게 감사합니다. 『편지』가 부디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의미 있는 영화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곽상필 감독에 이어 주연 배우들을 시작으로 배우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안시현의 차례는 최정수 다음이었다.
“남궁수민 역을 맡게 된 안시현입니다. 제대를 하자마자 무게감 있는 배역을 맡게 된 거 같아 부담이 되긴 합니다만, 짐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연기하겠습니다. 일찌감치 캐스팅을 확정 짓고 준비할 시간을 주신 곽상필 감독님께 감사합니다.”
배우들의 인사가 끝난 뒤.
곧장 대본 리딩이 시작됐다.
처음으로 리딩하게 될 신은 신 21, 공교롭게도 주연 배우 중에는 안시현 혼자만 대사가 있는 신이었다.
안시현과 호흡을 맞추게 된 배우는 그가 복무 중인 사이 데뷔한 배우 강주원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대본 리딩이 오랜만이라 영 긴장되네요.”
입으로 엄살을 부리는 것과 달리 안시현의 태도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분위기만 보면 떨기는커녕, 지금 당장 카메라가 돌아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대본 리딩.
“그거 알아요?”
특유의 의식은 없었다. 곽상필 감독이 사인을 주자마자 자연스럽게 대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은, 절 죽이겠다고 소리치거나 풀어 달라고 난리를 쳐요. 어떤 사람은 원하는 게 무엇이냐며 협상을 하려 하기도 하죠. 당신처럼요.”
“돈, 돈이 필요해서 납치한 거 아니에요? 몸값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까 제발 풀어 줘요. 부모님이 건물이 여려 채 있어요. 몸값이라면 얼마든지 지불할게요!”
“봐, 봐. 이런다니까.”
“얼마면 돼요? 1억? 2억? 말만 해요! 제 몸값이라면 부모님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까!”
“오해가 있네요. 제가 당신을 납치한 건,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단순하고 본능적인 이유죠.”
“본, 본능적인 이유요?”
“네. 룸싸롱에서 돈지랄하며 노는 재벌2세는,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졌거든요.”
안시현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은 채 일관된 톤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부분의 감정이 거세된 채,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라고는 친절함이 전부였다.
그 모습이 이질감을 자아냈다.
그렇다고 연기를 못하고 있냐면, 아니었다. 오히려 곽상필 감독이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생각한 남궁수민 역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곽상필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지문을 읽어줬다.
“남궁수민. 지창환의 오른손 새끼손톱을 5번에 나눠서 도려낸다.”
곽상필 감독의 지문 이후.
신인배우 강주원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대리운전 시발 새끼야! 풀어 줘! 나가게 해 달라고! 돈 준다는데 왜 지랄이냐고!”
“걱정하지 마요. 때가 되면 나가게 될 테니까.”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입꼬리가 올라간 채, 신 21의 마지막 대사를 읊조렸다.
“저 안에 들어간 뒤에요.”
신 21의 마지막 대사를 들은 순간.
몇몇 배우들은 2년 2개월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그 사이 더 발전한 듯한 안시현의 연기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무엇보다 안시현이 맡은 배역인 남궁수민의 캐릭터성을 대사 몇 마디로 완벽하게 표현해 낸 건 감탄을 넘어 전율이 일 정도였다.
“안시현. 진짜 2년 2개월 쉬다 온 거 맞아? 나랑 똑같이 쉬었는데, 왜 공백기가 없는 것처럼 대본 리딩을 하냐. 와, 배신감 확 드네.”
“짜식. 푹 쉬다 온 보람이 있겠네.”
“선배님. 연쇄살인마 그 자체였습니다.”
“연쇄살인마 앞에 하나가 빠졌잖아. 그게 핵심인데.”
이는 곽상필 감독 또한 마찬가지였다.
간만에 배우의 연기를 보며 팔뚝에 소름이 돋은 곽상필 감독은, 동시에 다시 한번 확신했다.
‘역시 남궁수민 역은 안 배우에게 맡기는 게 맞았어.’
군 복무 기간 동안의 공백기와 무관하게 오디션조차 보지 않고 남궁수민 역에 안시현을 캐스팅한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이 아는 배우 중, 남궁수민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안시현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