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4화>
84화. 웬수 같은
NHK에서 준비한 일본 팬미팅을 앞두고 출국하기 전, 아파트 앞까지 데려다 준 박정상과 헤어진 안시현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짐은 이미 다 싸둔 상태였고, 준비도 끝났다.
그럼에도 굳이 집에서 쉬다가 출발하겠다고 한 건, 점심시간에 맞춰서 정혜영과 통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안시현은 자신과 정혜영의 관계에 대해서 단 네 명의 사람에게만 말했다. 김진모와 김진석 대표, 그리고 부모님이 전부였다.
일단은 매니저인 박정상과 최봉팔에게도 비밀이었다. 다른 사람도 재벌 3세와 사귀는 것이니만큼 아는 사람이 최대한 적은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뭐, 그래 봐야 입대 전에는 박정상과 최봉팔에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팬미팅 시부야에서 하는 거예요?
“NHK 방송사가 시부야에 있으니 그렇겠죠?”
-시부야 인근 맛집 알려 줄 테니까 매니저님이랑 통역사님 데리고 가 봐요.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숨은 맛집이라 식사하기 편할 거예요.
“그런 건 어디서 알아 왔어요?”
-전에 브랜드 입점 건으로 일본 출장 갔을 때 파악해 놓은 곳들이에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분위기를 풀어 놓으면 업무 이야기를 하기가 한결 수월하거든요.
통화를 하는 내내 안시현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데 정혜영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맛집 리스트를 알려 주는 모습에서 자신을 챙겨 준다는 게 확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다.
‘문자메시지는 괜찮은데, 전화는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네. 밖에서 통화할 때는 연기 좀 해야겠어.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도 표정이 이러면 너무 티 나잖아.’
안시현은 연애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더 표정 관리를 할 필요를 느꼈다.
“아, 일본 가 있는 동안 연락 안 될 거예요.”
-괜찮아요. 그래 봐야 2박 3일 일정인걸요. 가서 팬미팅 잘하고 와요.
“저 노래도 준비하고, 일본어 공부도 틈틈이 했어요. 잘하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30여 분 동안 정혜영과 통화를 한 뒤.
안시현이 소파에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타이틀은 ‘끝까지 보면 당신도 일본어 완전 정복!’이었다.
* * *
오후 5시.
안시현은 박정상, 통역사와 함께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시간여 후.
비행기가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안시현이 박정상과 대화를 나누며 공항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호텔로 갈 거죠?”
“응. NHK에서 아예 한 층을 통째로 빌려 놨으니까 편하게 쓰면 될 거야.”
“한 층이라니, 스케일이 다르네요.”
“작정하고 팬미팅 준비한 거 같더라고. 참여 인원도 3천 명 정도라던데.”
“와…… 진짜 장난 아니네요. 전부 다 사인해 주려면 저 팔목 부러질 거 같은데요?”
“사인은 추첨으로 100명에게만 하기로 했어.”
“아, 좀 미안하긴 한데…… 하루에 3천 명 사인은 역시 무리겠죠? 군대에서 왼손으로 사인하는 법 좀 연습해야겠어요. 양손으로 사인하면 두 배로 사인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크흐흐. 미친놈. 사인 속도가 느려서 양손잡이가 되겠다는 건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다.”
공항에 들어선 순간.
“와아아아아!”
엄청난 환호성과 눈을 아프게 하는 플래시 세례가 안시현을 맞이했다.
족히 수 백 명, 넉넉잡으면 1000명도 넘을 것 같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경찰들은 엄청난 인파를 통제하느라 이만저만 고생하는 게 아니었다.
시청률, 관광객, 일룡백화점의 매출 상승 등.
『너와 나의 시간』이 일본에서 꽤나 인기를 끌었고 덩달아 안시현의 팬 또한 많이 생겼지만, 정작 안시현은 그 인기를 몸소 체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아주 가끔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한 게 전부였다.
회귀 후 처음으로 방문한 일본.
안시현의 생각 이상으로 자신의 인기가 엄청나다는 걸, 일본 팬들과의 첫 만남부터 확실하게 느꼈다.
* * *
일본에서의 2박 3일은 황홀함의 연속이었다.
국내에서의 인기 또한 엄청났고 팬들과의 만남에서 엄청난 사랑을 몸소 확인했지만, 타국에서 인기를 실감하는 건 색다른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감동스러웠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회귀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안시현이 출연했던 몇몇 작품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조연인 안시현이 아니라 주연 배우들이 독차지했으니까.
기분이 좋기보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이 앞섰다.
제대 후에도 꾸준히 좋은 연기를 선보이며 지금과 같은 관심을 계속해서 받기를 바랐다.
안시현은 미리 준비한 일본어 문장들을 기억하며 팬들에게 인사했고, 연기대상 이후 시간을 내서 연습한 『너와 나의 시간』의 OST를 불렀으며, 팬들이 선정한 『너와 나의 시간』명장면 1위를 즉석에서 재연해 보이기도 했다.
그 신이 18화의 막바지의 오열 신이었고, 안수진 역을 매니저인 박정상이 대신했음에도 안시현은 완벽하게 몰입해서 눈물을 쏟아 냈다.
소름이 돋는 오열 연기를 보여 준 직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나 팬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인 건 보너스였다.
‘『빌딩 숲』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너와 나의 시간』을 끝낸 직후의 안시현이었다면 몰입에서 벗어나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을 테지만, 『빌딩 숲』을 통해 메소드와 자연스러운 연기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한 덕분에 연기를 끝내자마자 곧장 몰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열 연기를 했기에 어느 정도 여운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연기 이후에는 팬들로부터 질문을 받은 시간과 팬들로부터 선물을 받고 사인을 해 줬다. 또한 안시현이 직접 준비한 몇몇 선물을 추첨해서 팬들에게 주기도 했다.
그렇게 꼬박 6시간에 거친 팬미팅이 끝났다.
NHK에서는 팬미팅 영상을 편집해 『빌딩 숲』의 방영 전에 사전 특집 방송의 일부로 내보낼 예정이었다.
그만큼 『빌딩 숲』에 거는 기대가 커 보였다.
팬미팅이 끝난 뒤.
NHK 방송사 직원들로부터 성공적인 팬미팅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들 좋아해 줘서 다행이야. 생각보다 다들 매너 있게 행동해 줘서 고맙기도 하고. 그나저나 저 선물들을…… 어떻게 다 가져가지?’
또한 팬들로부터 받은 어마어마한 양의 선물을 한국으로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에 빠졌지만…….
“선물은 NHK 직원들이 나눠서 보내 주겠다고 합니다. 몇 가지만 적어 주고 가면 될 것 같네요.”
“그래요? 그럼 회사로 보내 달라고 해야겠네요.”
NHK 직원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JM액터스 사옥으로 순차적으로 나눠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한 번에 가지고 가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안시현은 공항으로 향하며 뿌듯함과 짙은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무려 3천 명의 팬들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100명은 너무 적다는 이유로 150명에게 사인을 해 줬음에도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귀국을 위해 하네다 공항에 갔을 때, 자신을 배웅해 주기 위해 와 준 수백 명의 팬들을 보며 다시 한번 아쉬움이 커졌다.
동시에 욕심 또한 생겼다.
‘언젠가 내게도 훗날 아시아 순회 팬미팅을 하는 날이 오려나? 진모가 했을 때 진심으로 부러웠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일본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도 팬미팅을 하고 싶었다. 한국과 일본을 넘어, 보다 다양한 국적의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 * *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2월 말에 예정된 국내 팬미팅을 앞두고 안시현은 휴식 및 팬미팅 준비에 들어갔다.
휴식과 팬미팅 준비의 비율은 6 대 4 정도였다.
그리고 휴식 중 일부는 퇴근을 한 정혜영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에 할애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데이트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안시현은 정혜영과 최대한 다양한 것을 하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보드게임이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정혜영이었지만, 몇 번 하다 보니 보드게임에 푹 빠졌다. 결국 퇴근 후 몇 시간 동안 보드게임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보드게임을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별 기대 안 했는데…… 재밌네요. 계속 지다 보니까 승부욕도 생기고요. 알잖아요. 저 지고는 못 사는 거.”
“저번 주부터 한 번도 이기지 못하면서 확실히 느끼고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보드게임까지 잘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적당히 봐줬으면 좋았잖아요. 치사하게 한 번을 안 져 줘요.”
그렇게 휴식을 취하던 어느 날.
-[단독] 김진모와 한나래 열애, 배우 커플 탄생!
-[단독] 김진모와 한나래, 애정 넘치는 심야 데이트.
김진모와 한나래의 열애설이 터졌다.
어떻게 촬영했는지는 몰라서 김진모와 한나래의 얼굴이 떡하니 찍힌 사진이 기사에 실렸고, JM액터스에서는 곧장 보도 자료를 배포해 두 사람이 1년 넘게 예쁜 만남을 가져오고 있다며 열애를 인정했다.
열애설을 인정한 직후.
김진모가 안시현의 집을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연락 오는 게 귀찮아 휴대폰까지 꺼 놓은 채로 말이다.
“방금 전까지 정상 형 있다 갔어. 며칠 동안 휴대폰 꺼 놓으래. 여기저기서 연락 오고 난리도 아닐 거라고. 에휴. 피곤하다, 피곤해.”
“사진은 어쩌다 찍힌 거야?”
“모르겠어. 새벽에 한 데이트라서 절대 안 걸릴 줄 알았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 사귀어야지. 청춘남녀가 연애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죄는 아닌데 피곤하지. 허구한 날 기사에서 별것도 아닌데 엮을 테니까. 헤어지면 그것대로 문제고. 괜히 선배들이 공개 연애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얼씨구. 그러는 너는 안 걸릴 것 같냐?”
“나? 당분간은 안 걸리지 않을까? 스캔들 피하려고 일부러 혜영 씨 집에서만 보잖아. 걸릴 리가 있나.”
“……아파트 보안 뚫려 버려라.”
욱하는 마음에 내뱉은 김진모의 저주는, 그로부터 며칠 후 현실이 되고 만다.
일본에서 『빌딩 숲』의 첫 방영이 예정된 날 오전.
-[단독] 톱배우와 재벌 3세의 만남, 세기의 커플 탄생.
김진모와 한나래의 열애설을 터트렸던 언론사에서, 안시현과 정혜영의 열애설을 연타석으로 터트렸다.
더 큰 문제는…….
안시현과 정혜영의 얼굴이 떡하니 찍힌 키스 사진을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었다는 것이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열애설이 아니라, 그냥 두 사람이 사귄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걸 어떻게 찍었대?’
며칠 전.
정혜영은 새벽까지 자신과 있어준 안시현을 주차장까지 배웅해 줬다. 안시현이 혼자 가도 된다고 했음에도 굳이 배웅을 했고, 운전석에 앉은 안시현과 창문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하기도 했다.
그 모습이 제대로 찍힌 것이다.
각도를 보아 하니 정면은 아니고 대각선에서 촬영한 것이었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철통 보안을 자랑하던 연예인 아파트가 회귀 전보다 훨씬 더 빨리 뚫렸다는 거고, 그 시작이 바로 안시현과 정혜영 커플이라는 것이었다.
‘아파트 집값 떨어지겠네. 아, 이거 오늘 휴대폰 꺼 놔야겠는데? 바로 사옥에 가 봐야겠네.’
대책 논의를 위해 JM액터스로 향하면서 정혜영과 통화를 하며 입장을 정리해나갔다.
한편.
안시현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진석 대표는…….
“에휴. 웬수 같은 놈들. 걸리더라도 시간 좀 두고 걸리지, 아직 첫 번째 열애설 수습도 다 안 끝났는데 두 번째가 터지냐.”
“아하하. 그래도 진모랑 시현이가 나쁜 일을 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대놓고 뭐라고 안 하잖아. 연애가 죄도 아니고, 걔들한테 뭐라고 하겠어.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진 찍어 대는 파파라치 놈들이 문제인 것을. 아, 스트레스 받았더니 관자놀이 아프네.”
“차 한잔 타 드릴까요?”
“그래. 부탁할게, 박 대리. 아, 다음 달부터는 박 팀장이지? 내가 승진시켜 놓고도 영 어색하네.”
“저도 어색합니다. 차차 적응되겠죠.”
쑤셔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박정상과 함께 보도 자료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