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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3화 (23/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3화>

23화. 이 작품이에요

7월 말, 송강식과 황영민이 대본 리딩 이후 간만에 대학로를 방문했다.

“어휴. 징글징글한 놈들. 뭐 볼 거 있다고 사내새끼 둘이서 여길 찾아와?”

최정수는 그런 두 사람을 핀잔으로 반겨 주었다.

“형님이 안 오니까 저희가 온 거 아닙니까.”

“무슨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든지 원. 거 자주 보면서 술동무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곽 감독님도 형님 못 봐서 서운해하시던데.”

“안 그래도 촬영 끝났다는 이야기 듣고서 내일 뵈러 가겠다고 전화 드렸거든? 야. 그리고 솔직히 내가 촬영장을 어떻게 가냐. 내 새끼가 둘이나 있는데 촬영장 드나들면 로비하는 것 같잖아.”

“에이.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닙니까?”

“이 바닥에서 개소리 나오는 거 한두 번 보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그럼 밖에서라도 가끔은 볼 수 있었잖습니까?”

“지랄하고 자빠졌네. 둘이 허구한 날 돌아가면서 전화해 가지고 진모랑 시현이 칭찬하는 거 듣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내가 미쳤다고 얼굴까지 보냐?”

“매정하시기는.”

『나는 간첩입니다』촬영 이후, 최정수는 절친한 후배인 송강식과 황영민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들이 만나자고 아무리 졸라도 만나 주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톱배우의 반열에 올려 준 곽상필 감독에게마저도 연락만 할 뿐 만남은 없었다.

김진모와 안시현 때문이었다.

두 사람 다 연기력 좋은 배우들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광대들 출신이다. 주연을 맡아 본 경험은 없지만, 광대들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제법 이슈가 될 거다.

그 와중에 최정수가 『나는 간첩입니다』의 주연 배우와 감독과 자주 만나면 어떻게 될까?

김진모가 안시현의 캐스팅이 실력으로 이뤄 낸 게 아닌, 최정수의 후광 때문이라는 루머가 나돌 거다.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게 이 바닥이다. 연기력 좋은 신인 배우는 루머의 대상이 되기 딱 좋다. 만약을 대비해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게 최정수의 판단이었다.

물론 촬영이 종료된 지금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술잔을 기울이며 송강식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형님, 그 이야기 들었습니까?”

“무슨 이야기?”

“따끈따끈한 소식이라 아직 못 들으셨나 보네. 곽 감독님, 마지막 작품 준비하시겠대요.”

뚝.

최정수의 움직임이 멈췄다.

곽상필 감독과 친분이 두터운 배우들은 그의 마지막 작품에 대해서 한 번쯤은 이야기를 들어 봤다. 그리고 그중 최정수는 유일하게 시나리오를 본 배우였다.

페르소나인 최정수는 알고 있었다.

곽상필 감독이 마지막 시나리오에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렇기에 마음에 드는 배우를 찾지 못해서 제작을 포기했다는 걸 말이다.

최정수 자신을 제외한 다른 두 주연 자리에 어울리는 배우가 누구일까? 그리 고민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두 사람이 아니라면 곽상필 감독의 마음이 변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진모랑 시현이? 최소 5년, 길면 10년 걸리겠네.”

“빙고. 그러고 보니 형님은 곽 감독님 마지막 작품 시나리오 보지 않았습니까?”

“초고지만 보긴 봤지.”

“어땠습니까?

“가장 곽 감독님다우면서도, 곽 감독님 같지 않은 스타일로 빚어진 걸작이라고 표현하면 되려나.”

“아 좀, 똥개가 이단옆차기 하는 것 같은 소리 좀 하지 말고 제대로 좀 설명해 줘요.”

“됐고, 너희 둘 다 그때 가서 카메오로 출연해라. 조연으로 출연해 주면 좋은데, 수지타산이 안 맞지?”

송강식과 황영민은 이제 막 주연 배우로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시나리오가 크랭크인을 할 즈음에는 정상급 배우로 성장할 거다.

그때 가서 조연을 맡기에는 몸값이 맞지 않겠지만…….

“어떤 배역이든 곽 감독님이 부르시면 무조건 사인해야죠. 우릴 키워 주신 분이 누군데.”

“금수도 은혜는 잊지 않고 갚는데, 사람이 돼서 은혜를 잊으면 되겠습니까?”

두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무대에서 경험을 쌓아 나가던 두 사람을 캐스팅해 빛을 보게 해 준 게 바로 곽상필 감독이다.

다른 작품도 아니고 마지막 작품이다. 스케줄이고 몸값이고 상관없이, 곽상필 감독이 원한다면 어떤 배역이든 참여할 의사가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최정수가 미소를 지었다.

곽상필 감독이 발굴해 낸 다른 배우들 역시 송강식과 황영민처럼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봐서 감독님께 스케일 키워 보자고 해야겠네.”

“그거 재밌겠는데요?”

“연기력 검증된 배우들로 꽉꽉 채워서 해 보죠. 주연급 배우가 다수 출연하는 영화.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연기력 구멍도 없을 거고요.”

한 번 물꼬를 트니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았다. 세 사람은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이른 새벽이 됐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술병이 잔뜩 쌓여 있었고, 제법 취기가 오른 송강식과 황영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반면 최정수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피식 웃은 그는 평소와 달리 소주를 잔에 따라 마시면서 중얼거렸다.

“하. 술 좀 줄여야겠다. 10년 후에 인생 작품 찍기 전에 간경화로 죽으면 안 되니까.”

*   *   *

“안녕하십니까, 안시현 배우님. 매니지먼트 3팀 박정상입니다. 오늘부터 안시현 배우님을 전담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진석 대표로부터 자신의 매니저를 소개받은 안시현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박정상은 회귀 전에도 안시현의 매니저를 맡아 오랜 시간 그와 함께 호흡을 맞춘 이였다.

이번에도 함께하길 바랐지만 회귀 전과 달라진 부분이 많아 걱정했었다. 여차하면 몇 달 후에 변명거리를 만들어서 매니저를 박정상으로 교체할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어졌다.

“편하게 말 놓으세요. 저도 형이라 부를게요.”

“그럴까? 언제까지 함께할지 모르지만, 널 담당하는 동안은 잘 부탁할게.”

“저 은퇴할 때까지 함께하는 건 어때요? 전 연기대상도 받고, 남우주연상도 받을 거거든요.”

“아하하. 그러면 나야 좋지.”

회귀 전, 박정상은 담당 연예인의 성공 덕분에 본부장을 거쳐 결국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물론 그 성공은 안시현이 이룬 건 아니었다.

박정상이 매니저를 맡은 배우는 도합 두 명이었는데, 안시현을 제외한 다른 한 명이 김진모였다. 국민배우의 매니저이니 승진은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이번 생에는 김진모와 더불어 박정상의 승진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무명 시절을 자신을 김진모와 차별하지 않고 잘 챙겨 줬던 박정상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국민배우 두 명 담당이면 부사장을 넘어 사장도 가능하지 않겠어?’

회귀 전과 동일한 매니저와 일하게 된 안시현이 박정상과 가장 먼저 한 일은.

“형, 저 당분간 스케줄 없죠?”

“응. 『나는 간첩입니다』개봉일에 맞춰서 인터뷰 몇 개 잡긴 할 건데, 당분간은 없지.”

“그럼 저 신경 쓰지 말고 한 달 정도 월급 날로 먹고 있어요. 대본 검토하고 오디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제가 연락할게요.”

“크흐흐. 야. 대표님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날로 먹겠냐? 담당 배우가 뭐하는지 정도는 파악해서 보고를 드려야 나도 양심 안 찔리지.”

“오케이. 딱 그 정도로 합의 보죠.”

바빠지기 전에 푹 쉬라고 권유하는 거였다.

차기작 오디션을 본 이후 한동안은 정신없이 바빠질 테니 말이다.

*   *   *

5억 원.

JM액터스와 5년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 안시현의 통장에 입금된 선금이었다. 신인 배우에게 지급된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액수였다.

그 때문에 JM액터스 내부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좋은 배우라 해도 신인에게 5억은 과한 거 아니냐, 선금을 주는 건 좋지만 금액을 조금 낮추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 등이었다.

이에 김진석 대표는 단호하게 답했다.

안시현은 몇 백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배우라고, 그를 데려오기 위해서라면 5억 원은 오히려 싼 투자라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자신의 사비로 선금을 지급하겠다, 그 대신 안시현을 통해 얻은 수익은 자신이 모두 가져가겠다고 말이다.

그 말 이후 어떤 불만도 제기되지 않았다.

김진석 대표가 그 정도로 확신을 가지고 말한 배우 중에 성공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기대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더 많았다.

과연 5억 원을 받은 신인은 언제쯤 김진석 대표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줄까? 언제쯤 주연 배우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러한 기대를 한 것과 달리, 안시현에 대한 소식은 한 달 가까이 들려오지 않았다.

매니저인 박정상에게 근황을 물어봤지만.

“이사하고 고향 내려가서 축사 공사를 맡겨 놓고, 그 후에 주야장천 봉사 활동만 다니고 있어요. 본인 말로는 차기작 검토도 하고 있다던데, 오디션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죠. 어쩌면 데뷔작이 끝났으니 조금 길게 쉬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고요.”

박정상조차도 정확한 근황을 알지 못했다.

5억 원의 선금이 지급된 이후, 안시현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대학로의 옥탑방을 벗어나 강변 근처의 32평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게 됐다.

옥탑방에서 살며 안시현은 추억이 얼마나 심하게 미화되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고, 비 오면 허구한 날 새고, 벌레 천지인 곳에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싶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때가 제일 좋았다.

김진석 대표에게 선금을 요구한 건 하루라도 빨리 옥탑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번듯한 집에서 살며 오롯이 연기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이사를 준비하며 김진모에게 물었다.

앞으로도 같이 살 거냐고, 아니면 따로 살 거냐고.

이에 김진모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당연히 같이 살아야지. 너, 나 없으면 심심해서 살 수 있을 거 같냐?”

“흐음. 좀 심심하긴 할 거 같네. 그래도 계속 같이 살 순 없잖아. 언제쯤 나갈 계획이야?”

“솔로 탈출할 때쯤?”

“하. 불알친구 새끼랑 평생 함께할 생각하니까 아침에 먹은 김치찌개 올라올 것 같아.”

“연기밖에 모르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도긴개긴이야, 인마.”

그렇게 안시현은 1층에 입주했다. 고소 공포증이 심한 김진모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뭐, 진모랑 같이 살면 나도 좋지.’

안시현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김진모는 연기에 미쳐 있었다. 연기만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김진모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김진모가 옆에 있다면 안시현의 입장에서도 작은 성과에 도취돼 느슨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이사를 끝낸 뒤에는 고향에 내려갔다. 일주일을 지내며 새 축사 공사를 발주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로는 봉사 활동을 연속이었다.

안시현의 차기작 준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김진모가 휴식을 위해 집으로 들어가 한동안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아파트에는 안시현 혼자 남겨졌기 때문이다.

박정상에게 말하기로는 차기작 검토 중이라고 했지만, 결과물이 없으니 진실을 아는 건 안시현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8월의 마지막 날.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오전에 박정상이 안시현을 데리러 집 앞을 찾아왔다. 안시현이 JM액터스와 계약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개봉이 10월 중순으로 확정됐지만, 인터뷰는 9월에 3개가 잡혀 있기에 그와는 무관한 방문이었다.

박정상의 방문은 안시현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형, 저 차기작 검토 끝냈어요. 오디션 보기 전에 대표님께 어떤 작품인지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김진석 대표는 안시현을 위해 점심시간을 비워 뒀다. 식사를 하며 차기작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안시현이 김진석 대표와 만난 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을 때 방문했던 청담동의 한정식집이었다.

“차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대표님.”

“그러지 말고 박 대리도 앉지? 매니저도 차기작에 대해 함께 들으면 좋잖아. 그리고 여기 한정식 맛있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안시현과 김진석 대표와 박정상, 세 사람이 착석했다. 식사가 나오기 전 안시현이 본론을 꺼냈다.

“가지고 간 시나리오 중에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있었어요. 오디션을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캐스팅이 끝나지만 않았다면 얼마든지. 비공식도 가능하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궁금하네. 우리의 슈퍼 루키는 과연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든 걸까?”

“이 작품이에요.”

툭.

안시현이 아직 식사가 세팅되지 않은 테이블 위에 시나리오를 올려놓았다.

타이틀을 확인한 김진석 대표는 흠칫 놀랐다.

안시현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나리오가 김진석 대표와 제법 인연이 깊은 감독이 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의문이 떠올랐다.

‘시현이가 저 작품을? 어떤 배역을 원하는 거지?’

과연 안시현은 어떤 배역을 원하는 걸까?

“음. 시현아, 이 작품은 배역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캐스팅이 끝난 걸로 알고 있단다.”

“그래요? 그럼 곤란한데……. 저 진짜 이 작품이 너무 마음에 들거든요. 한 배역에 완전 꽂혀 버렸는데.”

“허허허. 어떤 배역이 그리도 마음에 든 거냐?”

“주지성이요.”

김진석 대표의 표정이 굳었다. 안시현과 박정상이 눈앞에 있음에도 표정 관리를 하는 게 어려웠다.

“그 배역은…… 아직 캐스팅이 안 됐단다.”

안시현이 원하는 배역은 아직 유일하게 캐스팅이 되지 않은 배역이자 두 자리의 주연 중 하나, 그리고 영화의 아킬레스건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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