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23)

듀스 포에버

숍에서 간단하게 스타일링을 받은 지수는 현욱과 함께 서울 모처에 있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드라마 종방연을 위해 오늘 저녁 제작팀에서 통째로 빌렸다는 식당 입구는 현장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든 취재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형, 끝나고 연락할게.”

“사람… 왜 이렇게 많냐? 안 넘어지게 조심해.”

“누가 보면 나 아역배우인 줄 알겠다.”

“바리케이드 쳐져 있긴 한데, 그래도 조심하라 이거지…. 혹시 중간에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아직 문이 열리지도 않은 차를 향해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줄지어 늘어서 있는 카메라를 보자 요즘은 종방연 또한 스케줄의 연장선상이라는 방송가 우스갯소리가 몸소 실감이 났다. 누가 내릴지도 모르면서 바쁘게 셔터부터 눌러 대는 분주한 모습이 음악방송 출근길 현장을 방불케 했다.

아니, 진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언론사 로고가 박힌 수십 대의 카메라를 보니 잠깐 속이 울렁거렸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조용하던 거리에 웅성대는 말소리가 퍼져 나갔다.

어, 고지수…. 곳곳에서 제 이름이 들려왔다. 달라진 헤어스타일이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조금 놀라게 한 것 같았다.

너무 짧게 잘랐나. 비공식 석상이긴 했으나 짧아진 머리가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리였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좋은 기삿거리를 발견한 듯 찰칵대는 셔터 소리에 속도가 붙었다. 시원하게 자른 머리카락 덕인지 남들보다 포토타임이 배로 길었다.

식당 안에는 오랜만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윤주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두껍고 편한 패딩 두 개를 줄기차게 돌려 입던 촬영 때와 사뭇 비교되는 옷차림이 시작 전부터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열 맞춰 놓인 테이블들이 아직은 듬성듬성했다. 중앙에 놓인 긴 테이블 끝에 앉은 윤주는 그동안 마치 피부처럼 붙어 지내던 그 남색 패딩은 어디 두고 왔냐며 고약한 추궁을 당하는 중이었다.

나도 집에 옷 많다니까? 촬영 끝났다고 얘들이 내 말을 안 믿네…. 어, 지수야! 궁지에 몰린 채 반론을 펼치던 윤주가 반갑게 제 이름을 불렀다.

“PD님, 안녕하세요.”

“실연당했어?”

윤주가 건넨 당찬 한마디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저를 향했다. 몇 달간 상투 튼 것만 보던 사람들이니 낯설어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근데 안타깝게도 실연은 아니고요. 사실 굳이 따지자면 실연이랑 정반대되는 일이 있었긴 한데…. 자세한 사정은 속으로만 읊었다. 지수는 순순히 차인 사람 행세를 하며 윤주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상지 전화 받는다고 잠깐 나갔어. 곧 올 거야.”

마음 놓고 종방연을 즐기기 위해 밤을 새워서 추가 촬영분 편집을 마치고 왔다는 윤주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태정이랑 나랑 둘이서 오늘 아침까지 진짜 뼈를 깎으면서 편집했거든? 아마 예고편에 나갔던 것보다 더 잘 나올 거야. 다들 기대해도 좋아.”

자연스러운 화면 연결을 위해 키스 장면을 포함해 앞뒤로 붙는 신들만 한 시간가량 붙잡고 있었다는 윤주의 말을 들으며 지수는 이틀 후 밤 열 시에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웠다. 잠깐 나간 예고편만 보고도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던 승이니 본방송이 있는 날에는 어떻게든 꼬셔내 밖으로 나돌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디든 좋으니 멀리멀리, 무조건 텔레비전이 없는 곳으로 가자. 민망한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세우면서도 결과물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들떴다. 편집에 대한 윤주의 자신감이 대단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먼저 술을 한 잔 받고 있었더니 자리를 비웠던 상지가 돌아왔다.

“상지야, 지수 차였대.”

짧아진 머리를 본 상지가 놀라려는 찰나 윤주가 먼저 입을 뗐다. 흔해빠진 농담을 던져놓고 반응을 기다리는데 눈치 빠른 상지가 더 큰 농담을 던졌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어?”

“그러니까 진작 좀 잘해 주라고 했잖아.”

“……어?”

별 뜻 없이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대며 환호를 보냈다. 윤주가 운을 띄웠을 때만 해도 지나가는 말에 불과하던 농담이 상지의 열연에 급물살을 탄 듯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원망하듯 올려다봤으나 상지는 모르는 척 웃기만 했다. 아역 시절부터 다져 왔다는 그 귀한 연기력을 이럴 때 쓰는 거야? 그간 매일 보다시피 하며 호흡을 맞춰 온 파트너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지수는 옆에 있던 의자를 빼 줬다.

곧이어 사람들이 모일 만큼 모이자 숟가락을 마이크처럼 잡은 윤주가 감사 인사를 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던 이들도 그때만큼은 입을 다물고 윤주의 말을 경청했다. 윤주는 열악했던 환경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준 모두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렇게 윤주를 시작으로 촬영 감독, 조명 감독, 미술 감독, 상지 그리고 저와 다른 배우들까지 돌아가며 짧게 종영 소감을 나눴다. 방영 초반, TSC에서 밀어주는 기대작은 따로 있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대박이 터졌다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알게 모르게 조금 서러웠던 마음이 끝에 이른 지금에서야 완전히 해소된 듯 포근한 분위기였다.

그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촬영 내내 죽이 잘 맞던 상지와 윤주는 주량 면에서도 엄청난 궁합을 자랑했다. 하루걸러 술자리가 있는 연극영화과를 다니며 단단히 주량을 다졌다는 상지는 독한 술을 꿀떡꿀떡 넘기면서도 얼굴색 하나 안 변했다.

“PD님, 저 진짜 PD님한테 너무너무 감사해요.”

“아냐, 내가 고맙지. 나 믿고 따라와 줘서….”

“저는 이번에 이나 연기하면서 진짜 행복했거든요.”

근데 얼굴색은 안 변했는데 그래도 좀 취하니까 그때부터는 목이 빨개지더라고. 작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주변부가 붉게 달아오르는 걸 보며 지수는 상지의 잔과 물이 든 소주잔을 종종 바꿔치기했다.

오늘이 지나면 이렇게 모일 날도 없을 테니 저도 빼지 않고 주는 술을 다 받아마셨다. 제일 먼저 윤주에게 한 잔을 받았고, 그다음엔 멋지게 찍어 준 촬영 감독님한테 한 잔, 또 그다음엔 예쁘게 빛을 쏴 준 조명 감독님한테 한 잔…. 감사한 분들께 그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인사를 전하며 한 잔씩만 얻어 마셔도 다 더하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양이었다.

아직 아홉 시도 안 됐는데 이렇게 초고속으로 달려도 되는 건가. 망가질 정도로 취하는 일은 없어야 했기에 중간중간 계속 물을 마시면서 페이스 조절을 하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https://entertain.v.view.net/v/show//new/4950490990099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