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23)

내 것 아닌 내 것

어제부로 6라운드 5경기를 끝낸 승의 소속팀은 경기 후 비공식적으로 준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지었다. 리그 승점 계산법에 따라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본 내부 전략팀은 그에 따른 결과를 팀 전체에게 알렸다.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인 6라운드 6경기에서 한 점도 내지 못하고 패하는 극한의 상황만 생기지 않는다면, 팀은 올 시즌 최종 순위 3위를 기록하며 무난하게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팀 차원에서는 기뻐 마땅한 일이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도 아쉬움이 먼저 들었다. 중요한 시기에 5주 가까이 공백을 만들어 냈던 부상이 없었다면 팀이 우왕좌왕하며 헤매는 일도 없었을 테고 지금보다 더 많은 승점을 얻어 준플레이오프가 아니라 곧바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여러모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었지만, 코치진에서는 최대한 남은 일정에 집중하자는 말로 팀을 독려했다. 총 서른여섯 개에 달하는 리그 일정 중 무려 서른다섯 경기를 소화하고 이제 남은 건 오직 한 경기였다.

오전 운동으로 몽땅 소진한 에너지는 점심을 든든하게 먹으며 보충했다. 빡빡한 오후 일정을 소화하려면 뭐든 먹어야 했다.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연습장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던 승이 대기실에 설치된 정수기 앞으로 향했다.

목이 말랐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먹은 국이 약간 짰던 것도 같았다. 때아닌 갈증에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켜는데 마찬가지로 식사를 마친 진석이 뒤이어 대기실로 들어왔다. 세수를 하고 왔는지 앞머리가 젖은 진석이 제 옆으로 다가와 물병에 물을 받았다.

“승아.”

“네?”

“오늘 점심… 전체적으로 좀 짜지 않았냐? 아닌가. 내 혀가 이상한가.”

커다란 물병 가득 물을 받은 진석이 긴가민가한 투로 제게 물었다. 유독 짜게 느껴지던 북엇국 맛을 떠올리며 승은 동의를 표했다.

“딴 건 모르겠고 국은 저한테도 좀 짰어요.”

“너도 그랬어? 역시… 뭔가 좀 이상했어. 아침에 식당에 무슨 일 있었나?”

입을 헹구듯 물을 마신 진석이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문제의 원인을 추측했다. 순식간에 반쯤 비워진 물통이 다시 정수기 앞으로 향했다.

폭신한 수건을 반듯하게 개는 것으로 다가올 오후 일정을 준비하던 승의 시선이 솥뚜껑만 한 진석의 손을 쫓았다. 간편하게 수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까만 스포츠 물병과 진석의 손 사이엔 길쭉한 종이 두 장이 끼어 있었다.

“아, 이거? 와이프랑 이안이 꺼. 방금 받아서 오는 길이야.”

“…….”

“애가 작년까지만 해도 나 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더니 올해 들어서 이상하게 한 번씩 경기 보러 가자고 와이프를 조르나 봐. 왜지? 가끔 보면 유치원 체육 시간에 공놀이도 하고 그러던데… 그런 거 때문인가?”

묵직해진 물병 뚜껑을 닫은 진석이 들고 있던 종이를 제게 보여 주듯 내밀었다. 팀 로고가 크게 그려진 종이는 다름 아닌 티켓이었다. 경기 날짜와 장소를 비롯한 경기 정보가 빳빳한 종이 위에 진하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형, 이거 프런트에서 받으셨어요?”

“왜? 승이 너도 필요해?”

“저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초대권 필요하면 프런트 가서 말해. 달라고 하면 두어 장 정도는 그냥 줘. 너도 알잖아.”

다음 주 경기는 원정이 아닌 홈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정규 리그 마지막 경기가 다른 지역이 아닌 저희 안방에서 펼쳐지니 팬들도 많이 몰리고 아무래도 평소보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될 터였다.

“…….”

프런트? 초대권? 지금껏 한 번도 필요하지 않았던 티켓을 두고 골몰하는 사이 갈라진 앞머리를 정리한 진석이 제 오른쪽 골반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너 근데 아까 부딪힌 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움직이고 하는 건 다 괜찮은데 그래도 저녁 되면 멍은 좀 크게 올라올 것 같아요.”

오전 훈련 도중에 작은 충돌사고가 있었다. 네트형 스포츠이니만큼 네트 건너에 있는 상대와 접촉할 일은 거의 없었으나 오늘처럼 같은 쪽 코트를 지키는 선수끼리 부딪치는 불상사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너 조심해. 로디 몸이… 진짜 딱딱해. 근육 때문이 아니라 걔는 그냥… 뼈가 딱딱해. 나중에 집에 가기 전에 테이프로 좀 감고 가.”

“네, 그럴려구요.”

“로디는 괜찮대?”

“아까 보니까 로디도 멍들 것 같던데….”

“…로디도? 그럼 내가 승이 네 걱정해 줄 때가 아니었구나. 둘이 손잡고 테이프 감으러 가야겠네.”

걱정스레 제 안위를 챙겨 주던 진석 앞에서 승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딪혀 욱신거리는 골반 위에는 이미 파스가 붙어 있었다.

아찔했던 충돌 순간을 되새기며 조금은 불편한 근육을 문지르던 승의 고개가 돌아갔다. 받은 티켓을 가방에 넣으려는 듯 젖은 얼굴을 마저 닦은 진석이 라커룸이 있는 대기실 뒤쪽으로 돌아섰다.

“…….”

좁은 문 앞을 지키고 선 진석의 가방 지퍼가 내려갔다. 아내와 아들 몫으로 챙겼다는 티켓 두 장은 백팩 앞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최승, 나가자.”

“네, 형.”

할 일을 끝내고 라커룸 문을 잠근 진석이 저를 향해 손짓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승은 앞서가는 진석의 뒤를 따랐다. 오후가 되었다고 마냥 신나기에는 남은 일정이 아직 아득하게 많기만 했다.

어제는 웬일로 지수를 못 만났다. 서울에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상대 팀 경기장에서 늦은 오후까지 경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문 저녁이었다.

길었던 시합에서 쌓인 피로를 끌어안고 늦은 저녁을 먹던 그때 지수는 마지막 촬영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슨 촬영을 이렇게 어정쩡한 시간에 하냐. 저녁도 안 먹고 분장을 하고 있다는 지수에게 퉁명스레 물었더니 다른 팀들이 일찍부터 줄줄이 세트장을 예약해 놓은 탓에 자기들은 비어 있는 타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정연한 답변이 돌아왔다.

늦어도 자정쯤이면 끝날 것 같다던 촬영은 찍다 보니 또 시간이 훌쩍 흘러 깊은 새벽이 되어서야 파한 것 같았다. 나 이제 누웠다. 힘내서 경기 잘해라. 드디어 종지부를 찍고 집에 들어온 지수가 짧게 남겨 놓은 메시지 옆에 찍혀 있던 시간은 제 기상 시간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한 번 때를 놓치면 좀처럼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어제는 잘 잤으려나. 승은 촬영 스케줄을 따라 질서 없이 들쑥날쑥한 지수의 생활 패턴을 걱정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분명 집에 있겠다고 했었는데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다시 눌러 볼까. 참을성 없는 손이 한 번 더 집주인을 불러 보자고 저를 설득하는 순간 저벅저벅 둔탁한 발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미안하다, 야. 방에 있어서 못 들었어.”

활짝 열린 문틈 사이로 모습을 내비친 지수는 사과부터 했다. 가벼운 종이가방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실렸다. 문이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승은 멀뚱히 서서 지수의 까만 정수리만 응시했다.

“……머리 언제 잘랐어?”

목덜미를 수북하게 덮을 만큼 길었던 머리카락이 손가락 두 마디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아져 있었다. 좀 날카로워진 것 같은 인상과 함께 미끈한 두 귓바퀴가 유독 빛났다.

하다못해 귀까지 잘생긴 고지수. 늘 귀 뒤에 고정되어 있던 머리카락들이 사라지니 동그랗고 맨질한 귓바퀴마저 그간 어렵게 숨겨 온 잘생김을 만천하에 어필 중이었다.

“아까 오후에 잠깐 나가서 자르고 왔어.”

“이렇게 짧게 잘라도 돼?”

“안 그래도 걱정돼서 회사에 먼저 말했는데 자르고 싶으면 그냥 자르라고 하더라고.”

쓰고 있던 큼직한 마스크를 벗은 지수가 어색한 듯 목덜미를 문질렀다. 헤어스타일이 달라지자 이목구비가 풍기는 분위기에도 작게 변화가 일었다.

“오, 그럼 차기작은 군인? 아니면 좀 젊고 실력 있는 전문직?”

“너 귀신이냐? 회사에서 안 그래도 무슨 특공대 역할이 하나 들어왔다고는 하더라.”

특공대… 그거 괜찮은 것 같네. 무슨 내용인지 어떤 역할인지도 모르지만, 벌써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승은 지금보다 머리를 더 짧게 자르고 특공대로 열연을 펼치는 지수를 멋대로 상상하며 신발을 벗었다.

“촬영은? 잘 마쳤어?”

“응, 드디어 끝. 이제 진짜 진짜 끝. 찍기는 잘 찍었는데… 편집할 시간이 너무 없어서 그림이 잘 나올지는 모르겠다. 나란히 붙여 놨을 때 추가 촬영분이 최대한 안 튀어야 할 텐데….”

“너는 제발 그런 걱정 사서 하지 좀 마. 걱정은 됐고, 지금은 그냥 나한테 잘 끝낸 소감이 어떤지나 말해 줘.”

“소감? 시원… 그리고 섭섭? 좀 허하네. 너도 시즌 끝나면 이런 기분이냐.”

홀가분해진 지수의 목소리를 들으니 드라마와 아무 상관 없는 저에게까지 행복감이 전해졌다. 남은 하루분의 촬영 때문에 주먹보다 작은 붕어빵 몸통을 먹으면서도 마음에 걸려 하던 고지수 아니던가. 많이 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쉴 수 있는 동안은 최대한 편하게 지내길 바라며 발을 들인 집은 전보다 월등히 나아져 있었다.

짬이 날 때마다 필요한 물건들을 부지런히 알아보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놀라웠다. 가히 환골탈태의 현장이었다. 언제 다 치우고 이렇게 예쁘게 정리까지 했대? 거실 한쪽에 놓인 큼직한 소파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커버 잘 골랐네. 웬만해서는 쉽게 오염되지 않을 것 같은 두껍고 어두운 색상의 소파 커버를 살핀 승이 들고 온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그때 두고 간 거, 네 옷.”

“아… 고맙다. 네가 준 옷은… 내가 아직 안 빨았네?”

“잘했어.”

“다음에 줄게.”

지수는 제가 두고 간 옷의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던 듯싶었다. 하긴 옷이 산더미만큼 있었으니 그 많은 것들 중에서 몇 개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대도 영원히 모르고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청소하고 있었어?”

“어, 옷방 좀 정리했어. 어떻게 억지로 분류해서 넣어 놓긴 했는데… 잘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덴 다 진작 끝냈는데… 옷은 진짜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먼지가 너무 많아서 죽는 줄 알았다.”

굳이 그런 부가 설명 없이 지수가 입고 있는 까만 맨투맨의 현 상황만 봐도 옷방 상황이 어땠을지가 짐작이 갔다. 도톰한 맨투맨 천 위로 색색의 섬유 먼지가 눈꽃처럼 소복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호들갑 떨 줄 모르고 유난이랑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고지수가 마스크까지 챙겨 쓸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입 안이 텁텁한지 크게 목을 가다듬던 지수가 곧 양해를 구하듯 제게 물어왔다.

“최승, 나 잠깐 샤워 좀 하고 와도 되냐? 옷 정리한다고 거기 있던 먼지를 다 뒤집어썼더니 온몸이 갑갑해서….”

“응, 하고 와. 깨끗하게 씻고 와.”

방에 들러 갈아입을 새 옷과 수건을 챙긴 지수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거실에 혼자 남은 승은 달라진 집 안 구경에 매진했다. 커튼도 달고 스탠드 조명도 사고…. 두툼한 암막 커튼의 두께가 숙면에 대한 욕구를 대변하는 듯했다. 이런 데서 잠이 오나 싶게 어수선하던 첫 방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확실히 깔끔하고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소파 옆에 놓인 길쭉한 공기청정기는 이사 기념으로 제가 준 선물이었다. 이런 거, 내가 안 사 주면 쟤는 영영 안 살 것 같더라고. 배우한테 기관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귀한 호흡기를 책임져 줄 공기청정기를 뿌듯하게 바라보는데 납작한 거북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 앞을 기어갔다.

까맣고 동글동글한 거북이는 직진밖에 모르는 순정파였다. 네가 아무리 빨빨거리고 돌아다녀 봤자 나보다 잘할 수는 없을걸. 그런 확고한 자부심과 또 몸으로 직접 부딪쳐야만 막다른 길임을 인식하는 게 어쩐지 멍청하다는 감상이 한 스푼 더해져 괜히 거리를 뒀었는데 지수가 산 최신 모델을 보니 요즘 나오는 애들은 제가 알던 것과 굉장히 달랐다. 신식 기술이 탑재된 거북이는 전면에 장착된 3D 센서로 비교적 작은 크기의 장애물도 거뜬히 피해 가는 영리한 모습을 보였다.

멈춰 선 자리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며 혼자서 알맞은 경로를 새로 설정하는 게 얼마나 기특하던지…. 그래, 나는 괜찮은데 쟤는 아마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애. 그러니까 네가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쟤 좀 많이 도와줘, 응?

쪼그려 앉은 승은 기계의 꽁무니를 응원하듯 토닥였다. 격려를 듬뿍 받은 까만 로봇청소기는 자기만의 여정을 떠나듯 이번에는 부엌이 있는 방향으로 마구 직진했다.

“……너 뭐 하냐.”

짧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수는 조금 황당해 보였다. 냉장고를 지나친 청소기가 부엌 안쪽으로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졸지에 그윽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되어 버린 게 문제였다. 프러포즈하듯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있던 승은 얼른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그냥 놀고 있었는데?”

먼지가 없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수가 머리를 털며 다가왔다. 근데 너 이제 털어서 말릴 만큼 긴 머리카락이 없는데…. 지수는 가만히 둬도 오 분이면 마를 정도로 짧아진 머리를 수건으로 재차 문질렀다.

“그나저나 집이 되게 깨끗해졌다? 이렇게 치워 놓으니까 훨씬 넓어 보여.”

“으응, 누가 저번에 마구간 같다면서 막 경기를 일으키려고 하길래….”

“…….”

“내가 그날 이후로 이 악물고 싹 치웠어.”

뼈 있는 발언에 뜨끔한 승이 지수의 낯을 살폈다. 욕실에서 물기를 머금고 나온 도톰한 입술이 유달리 촉촉하고 빨갰다. 살짝 내리깐 눈꺼풀에는 과연 제가 뭐라고 할지 두고 보자는 식의 기대가 서려 있었다.

“…진짜? 누가 말을 그렇게 재수 없게 했어?”

“있어, 좀 깐깐하고 많이 이상한 애.”

어색하게 받아치는 말에 지수는 느릿하게 답했다. 하루아침에 짧아진 머리가 어색한지 정수리를 긁적이며 줄곧 바닥 부근만 배회하던 시선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좀 깐깐하고 많이 이상한 애는 다시 말을 돌렸다.

“너 근데 그걸… 저기에 뒀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럴 리가 있냐. 가만 보면 너는 나를 너무… 파렴치한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애.”

좋은 핑곗거리를 찾아낸 듯 승은 처음 보는 장식장 앞으로 다가갔다. 따로 문이 달리지 않은 개방형 구조의 장식장이 간소하고 정적인 집 안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저기에 둔 건… 좋아? 괜찮아?”

“야, 고지수.”

“응?”

“좋은 걸 넘어서서… 너무 영광이지.”

소파와 함께 세트로 구매했다는 다용도 장식장의 상단에는 지수의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들과 함께 제 사인볼이 놓여 있었다. 감격스러운 자리 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적막한 공원에서 소원을 걸고 자유투 내기를 했을 때 썼던 공이었다. 우연히 어린이 팬을 마주칠 날을 대비해 트렁크에 싣고 다니던 공이었는데 어린이도 아니고 팬도 아닌 지수가 거기에 관심을 보인 건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었다.

“너 근데 이거 왜 달라고 했었어?”

“나중에 나 늙어서 돈 떨어지면 그거 경매에 부쳐서 생활비로 충당하려고.”

어디 관심만 보였던가. 기념으로 저도 하나 갖고 싶다는 예쁜 말로 저를 한껏 설레게 했었지. 빈말을 가장하며 무뚝뚝한 얼굴로 조르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는데, 뭐? 경매?

“그런 치밀한 계획이 있었어?”

“그러엄.”

새로 들은 대답이 황당해 뒤를 돌아보니 지수는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저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먼 훗날 귀한 생활비가 되어 줄 공은 현재로서는 깨끗하게 닦여 트로피 옆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근데 내가 위대한 네 계획에 초를 치려는 건 아닌데… 있잖아, 그 사인볼 같은 게 비싸게 팔리려면 좀… 그러니까 희소성 같은 게 있어야 되지 않냐?”

사인이 잘 보이도록 고심해서 놓은 게 명백한 공을 바라보던 승은 천천히 운을 띄웠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줄곧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던 지수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왜? 네 건 희소성이 없어?”

“…미안.”

짤막한 사과가 답을 대체했다. 새로 산 소파 중앙에 걸터앉아 제 반응을 구경하던 지수가 돈이 안 된다는 말에 한달음에 옆으로 달려왔다.

“희소성이… 얼마나 없는데?”

“아무리 비싸게 팔아도 쌀 한 포대 가격밖에 안 나올 것 같은데?”

다가온 지수가 공을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이자 향긋한 샴푸 냄새가 건너왔다. 머리를 자르더니 샴푸도 바꿨나. 짧아진 머리와 딱 어울리는 시원한 숲 향기가 배를 간지럽혔다.

“쌀 한 포대? 진짜 그것밖에 안 돼?”

“그거보다 더 쌀 수도 있어.”

“…너 되게 유명한 사람 아니었냐?”

“내가… 유명하긴 유명하지. 근데 유명한 거랑 별개로 나는 사인 같은 팬서비스에는 굉장히 후한 선수여서… 내 사인볼이 큰돈이 될 만큼 엄청난 희소성은 없을 것 같은데. 큰 대회 결승전에서 쓴 우승 볼이라도 되면 또 모르겠는데, 이건 그냥 기본 공인구라서….”

공을 들고 있는 꼬마 애들을 그냥 지나치기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걔네가 사인이 그려진 공을 보며 무럭무럭 꿈을 키워서 훗날 엄청난 선수가 될지 누가 아냐고. 이탈리아에서 보낸 2년간 경기장을 찾아온 어린이들한테 해 준 사인만 해도 수백 개는 거뜬히 넘을 거였다.

올 한 해는 또 어떠했나. 국내에서는 그때만큼 경기장에 어린아이들이 많이 오지 않아 공에 사인을 해 줄 일은 전보다 적었으나 공에 못 한 딱 그만큼을 굿즈로 판매한 유니폼과 팬들의 실물 티켓에 다 했다. 이런 일이 앞으로 적어도 십 년은 더 반복될 테니 제 사인볼을 팔아서 한몫 거하게 챙기겠다는 지수의 바람은 안타깝게도 실현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소망이었다.

“…실망했어?”

“당연한 거 아니냐. 넌 지금 지난 며칠간 내가 힘들게 세운 노후 계획을 다 어그러뜨린 거라고.”

기대와 다른 실제 가치를 알게 된 지수는 불같이 역정을 냈다. 공을 팔아서 몇 달 놀고먹을 생각에 들떠 잠 못 이룬 사람 같은 메소드 연기가 아주 일품이었다.

근데… 진짜 연기 맞지? 부푼 꿈을 접으며 억지로 돌아서는 뒷모습이 너무 진지해 승은 아주 잠깐 과연 무엇이 지수의 진심일지 고민해야만 했다. 근래 들어 연기력만큼이나 부쩍 얼굴도 두꺼워진 지수는 지금 같은 장난에도 과하게 재능을 쏟곤 했다.

알면 알수록 웃긴 구석이 무궁무진했다. 번듯하고 점잖은 허우대 안에 숨어 있는 달달한 별사탕 같은 알맹이가 그렇게 귀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너 샴푸 바꿨어?”

“응, 왜? 냄새가 좀… 이상하지?”

지수가 있다 간 자리마다 비 내린 숲에서나 맡을 법한 시원한 피톤치드 향이 자국처럼 따라다녔다. 소파에 앉은 지수는 마침 앞을 지나가던 청소기를 살피고 있었다. 흙냄새에 취해 산책하는 강아지들처럼 잔향을 쫓아간 승이 지수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 숍에서 추천해 주길래 샀는데 아무래도 잘못 산 것 같아.”

“왜 잘못 샀다는 거야? 난 좋기만 한데.”

“좋긴 뭐가 좋냐. 냄새 때문에 지금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그렇게 좋으면 너 들고 갈래? 아, 혹시… 쓰던 거라서 싫냐. 근데 오늘 산 거라서… 나 진짜 한 번밖에 안 썼어.”

단순히 그 냄새가 좋은 게 아니라 너한테서 느껴지는 그 냄새가 좋은 건데…. 네 살이, 네 피부가 매개체로 있어야만 그 냄새가 좋은 거라고. 말귀를 통 못 알아듣는 모습에 복장이 터질 것 같았으나 입을 다물고 손만 놀렸다.

잔근육이 예쁘게 잡힌 매끈한 허리는 더듬는 맛이 좋았다. 간지러움에 잠깐 몸을 떨던 지수는 곧 적응을 끝냈는지 이내 주무르는 대로 가만히 있어 주었다.

“살 빠졌어?”

“아니, 살 말고 근육이 빠졌어.”

“여기는 아직 그대로 있는데?”

“거기 있는 그게 다야. 원래 더 많았는데….”

조작법이 서툰 투박한 주인 손길에 전자 거북이가 삑삑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저러다 전에 쓰던 휴대폰 액정처럼 청소기도 박살 나겠어.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은 승은 신음하는 청소기를 힐끔대며 지수의 마른 옆구리를 더듬었다.

옷 속에 숨은 여린 살을 헤집는 야한 손길에 지수는 이따금 움찔움찔 몸을 떨면서도 로봇청소기에 정신이 팔려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작은 디스플레이 화면에 계속 같은 숫자가 깜빡거리는 걸 보니 아마도 예약을 걸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낯선 기계를 두고 지수가 고군분투하는 틈을 타 야비한 손은 옆구리를 돌아 가슴까지 진출했다. 관심을 구걸하듯 예민할 부분을 끈질기게 갉작대자 싸늘한 시선이 닿아 왔다.

“……왜 이래?”

“네 거 딱딱하게 만들려고.”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 건지 지수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다시 동그란 버튼들만 눌러 댔다. 그래도 싫다고 하지는 않았잖아? 침묵을 좋을 대로 해석한 승은 손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웃어 주지는 않았어도 짜증을 부리지도 않고 화도 안 내고…. 지수는 웬일로 참을성이 좋았다. 나름 호의적인 반응에 장난이 점점 대담해졌다. 용기를 얻은 손이 방향을 달리해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작은 화면을 집중해서 들여다보느라 내내 웅크리고 있던 지수가 마침내 거북이를 방생하며 제게 물었다.

“이제 좀 속이 시원해?”

“어… 그런 것 같네.”

허벅지 위에 놓여 있던 청소기가 사라지자 빳빳해진 실루엣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대단한 포커페이스였다. 어딜 만져도 묵묵부답이길래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실은 저렇게 무럭무럭 크기를 키우고 있었단 말이야? 얄궂은 손장난이 만들어 낸 위압적인 결과물을 확인하자 증상이 전염된 듯 배꼽 아래로 회오리가 쳤다.

그다음부터는 익숙한 수순대로 흘러갔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쇄골에 입을 맞췄더니 지수가 허리를 안아 왔다. 질세라 옆구리를 더듬던 손이 어깨까지 올라갔고 곧이어 지수의 티셔츠가 벗겨졌다.

“아, 더워.”

“벗겨 줘?”

“응, 벗겨 줘.”

매끈하고 판판한 가슴팍이 오르내릴 때마다 짙은 흥분감을 불러일으켰다.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어리광을 부렸더니 지수가 제 왼쪽 다리를 들어 양말을 잡아당겼다. 벗겨 달라는 대담한 요구에 애먼 양말을 제일 먼저 공략하다니…. 재야의 고수들이나 쓸 법한 고단수 기술에 바짝바짝 애가 탔다.

양말 두 짝을 벗겨 내 맨발로 만든 다음엔 드디어 제 티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짧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지수가 혀를 세워 입천장을 문지르는 동안 저는 지수의 바지를 벗겨 냈다. 순식간에 반 나신이 된 지수가 지그시 어깨를 눌렀다.

“이 소파 진짜 다 좋은데… 길이가 좀 짧다. 아니, 많이 짧다.”

버티지 않고 미는 대로 넘어가 주었더니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누운 꼴이 되어 있었다. 지수의 등 뒤로 뻗어간 왼쪽 다리가 허공을 떠돌았다. 장정 둘이 붙어서 난리를 치기에는 소파가 턱없이 비좁았다. 억지로 누인 몸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아, 근데 지금 좀 너무 커진 것 같은데…. 쟤도 알겠지. 모를 리가 없지. 무차별적으로 바지 위를 주무르던 지수가 마침내 단추를 풀었다. 한껏 팽창한 부피감에 잠시 말썽을 피우던 지퍼가 스르륵 내려가며 약간의 해방감이 찾아왔을 때였다.

“…너 이거 왜 이래?”

키득대며 제 아랫배를 더듬던 지수가 얼떨떨한 투로 물어왔다. 어정쩡한 자세로 누워 있던 승은 고개만 살짝 들어 아래를 살폈다.

“아, 그거…. 별거 아니야. 오늘 훈련하다가 잠깐 부딪혀서.”

골반에 붙여 놓은 네모난 파스가 속옷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또 뭐라고…. 들쑤시듯 건드리지 않는 한 통증이 거의 없었기에 그런 걸 붙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어디에 부딪혔는데? 무슨 벽 같은 데 부딪혔어?”

“벽? 아니, 그냥… 사람이랑 부딪혔는데?”

로디 걔가 나보다 2cm 더 크긴 하지만 그래도 벽은 아니고 사람이지. 부딪혔을 때 체감 내구성이 좀 벽돌 같긴 했지만서도.

“…사람이랑 부딪혔는데 멍이 이렇게 들었다고?”

멍이 들었어? 번쩍 몸을 일으킨 승이 그제야 제대로 골반을 살폈다. 살짝 내려간 속옷 밴드 위로 푸릇한 멍 자국이 크고 진하게 잡혀 있었다.

정확히 낮에 예상했던 대로여서 딱히 놀라울 구석도 없었다. 충돌하기 직전에 알아채고 방향을 틀었기에 망정이지 정면으로 부딪쳤으면 골반에 멍이 들 게 아니라 앞니가 부러졌을걸. 멍들고 살갗이 벗겨지는 작은 찰과상쯤이야 일일이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게 무슨 큰일이라고…. 못마땅한 눈으로 제 골반을 바라보는 지수의 턱을 붙잡았다. 시선을 빼앗으며 다시 원래 하던 일에 집중을 유도하려는데 방금까지 실실대며 제 옷을 벗겨 대던 지수가 낯을 바꿨다.

“뭐 하는 거야?”

밀려 내려간 속옷 밴드를 정리해 주는 손길이 퍽 금욕적이었다. 벗겨 준다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왜 다시 입혀? 제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지수는 떨어지려는 파스 귀퉁이까지 꼼꼼히 정리했다. 그러더니 화룡점정이 되어 줄 멘트를 제게 날리는 게 아닌가.

“환자랑은 안 해.”

당황한 승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앞니가 부러지면? 그건 환자지.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찢어지면? 그것도 환자지. 근데 고작 이 정도로 환자라고 칭한다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고지수, 너 진짜 환자 본 적 없지.”

완전히 일어선 지수는 이제 벗어 던진 옷들을 줍고 있었다. 저런 것도 일종의 정신력이라고 칭해야 하는 걸까. 무섭게 서서 마치 속옷을 뚫고 나오려는 성기가 아직 그대로였는데 지수는 그 꼴을 하고도 조용히 옷만 주웠다.

“나 괜찮아.”

“내가 싫어.”

입은 싫다고 하지만 거기 사정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속옷 안에 갇힌 성기가 방금 들은 말에 반박을 하듯 거세게 꾸물댔다.

여기서 그만하자는 게 말이나 돼? 눈앞에 정상을 두고 하산을 하는 것처럼 억울했다. 일단 한번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봉우리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 앞에서 기념사진이라도 한 방 남기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고.

“지금은 진짜 괜찮은데….”

“지금은? 나중엔 안 괜찮아진다는 거야, 뭐야.”

중얼거리듯 뱉은 말을 지수는 콧방귀를 뀌며 받아쳤다. 소파 주변을 돌며 듬성듬성 떨어진 옷가지들을 줍는 중이었으나 발기한 성기 때문에 걷는 모양새조차 시원찮았다.

눈으로 보고 있는 몸의 증상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아득한 간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에 알아채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내 무릎이랑 어깨랑 허리랑 다 멀쩡할 때 최대한 재밌고… 또 좀 즐겁기도 하고… 우리끼리만 할 수 있는 진하고 끈적한… 그런 시간을 많이 가져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좋은 것보다 싫은 게 훨씬 많은 애였다. 싫다고 고집을 부리다가도 어떻게 잘 꼬시면 나중에는 누구보다 재밌게 즐긴 적이 좀 많았냐고.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귀한 속내를 들여다보기 위해 던진 가벼운 부추김에 옷을 개던 지수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너 그냥 너네 집 가라.”

눈이 마주치자마자 깨달았다. 어, 나 실수했다. 피가 몰린 아래가 여전히 뻐근한 동시에 등 뒤로는 오싹함이 한기처럼 끼쳐 왔다. 주운 옷들을 소파 구석에 툭 내려놓은 지수는 이제 장식장 앞에 서 있었다.

“돈 안 된다는 네 공도 다시 들고 가고.”

동그란 공이 가볍게 날아오는 걸 본 승은 저도 모르게 손부터 뻗었다. 아오, 잡지 말걸. 망할 직업병…. 과하게 프로페셔널한 몸짓이 안 그래도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에 망치질을 했다.

이렇게 잡으니까 뭔가 되게… 약 올리는 것 같잖아. 두 번째 실수였다.

잠시 헛숨을 내뱉던 지수는 곧 방을 향해 돌아섰다. 제가 딱딱하게 만든 성기 탓에 덩달아 바짝 힘이 들어간 뒷허벅지가 공포심을 배가시켰다.

삐걱 열린 방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소음이 각성제라도 된 듯 공만 만지작대던 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려올 때도 말썽이던 지퍼는 이번에도 올라가길 거부했다. 그림의 떡 같은 단추는 그대로 두고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만 옷을 추슬렀다. 마음이 급해서 그마저도 걸으면서 했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밀자마자 분노가 덕지덕지 붙은 문장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너 그게 지금 할 소리냐? 내가 살다 살다 너같이 생각 없는 놈은 처음 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좋다고 달려들 줄 알았어?”

“…….”

“미안한데, 너 사람 잘못 봤어. 미친 새끼가 사람을 도대체 뭘로 보고….”

티셔츠에 팔을 꿰어 넣고 있던 지수는 옷을 입는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고 화만 냈다. 입은 것도 아니고 벗은 것도 아닌 미끈한 팔뚝 위로 오소소 닭살이 돋아 있었다.

“미안. 내가 잘못 말했어. 너 우습게 본 거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닌데? 넌 방금 나를 개무시했어.”

“진짜 미안해. 내가 너 무시한 거 아니고, 그런 거 진짜 아니고, 내가 너무 내 식대로 생각했어….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응?”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티셔츠 목구멍에 지수 얼굴을 끼워 넣었다. 내가 진짜 진짜 잘못했는데 너 추워 보이니까 그래도 옷은 좀 입고 욕해 주면 안 될까. 흥분한 지수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지 제가 티셔츠를 어떻게 하든 말든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욕만 했다.

“아이, 씨. 나도 미쳤지. 내가 진짜 이런 놈이랑 도대체 뭘 해 보겠다고….”

무섭게 욕을 처먹는 상황에서도 그 한마디를 들을 땐 좋아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뭘 해 보려고 했는지, 네가 나랑 도대체 어떤 걸 어떻게 해 보려고 했는지 그게 너무 좋고 궁금해서… 욕을 뒤집어쓰는 와중에도 가슴이 뛰었다.

나 진짜 쓰레기네. 죄책감이 몰려왔으나 생략된 말풍선 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소망들이 들어 있었을지 상상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힘이 빠진 지수는 어느 순간 털썩 침대에 주저앉더니 선언하듯 제게 공표했다.

“최승, 너 잘 들어. 오늘부터 내 이상형은 잔병치레 없고, 뼈 튼튼하고, 관절 튼튼하고, 인대 근육 멀쩡하고, 연골 다 있는 사람이야.”

말을 마친 지수는 눈을 부릅뜨고 저를 노려봤다. 날카로운 눈초리를 따라 엄마인 혜경 앞에서나 종종 느끼던 감정이 좀 더 명확하고 선명한 형태가 되어 꽃잎처럼 피어났다. 한평생 소유물처럼 대해 온 제 몸에 대한 책임감이 무섭도록 육중하게 다가왔다.

“누가 나한테 사람 볼 때 어떤 거 제일 먼저 보냐고 하면, 나는 뼈랑 관절이랑 연골 본다고 할 거라고. 어디 연골 없고 인대 끊어지고 관절 고장 난 그런 사람들, 난 진짜 세상에서 제일 싫어. 상종도 안 할 거야.”

단호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천히 다가간 승은 지수의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내가 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는 직업인데…. 지수가 조건으로 제시한 것 중 하나도 잃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약속을 했다.

“알았어. 다 지킬게. 한 군데도 고장 안 나도록 진짜 다 잘 지킬게.”

한바탕 크게 쏟아 낸 지수는 조금이나마 화가 풀린 것 같았다.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드로즈 아래로 훤히 드러난 지수의 허벅지를 쓸었다. 맨손이 전해 준 체온이 현실감각을 깨운 듯 물끄러미 속옷을 내려다보던 지수가 멍한 표정으로 제게 물었다.

“내가 지금 바지도 안 입고, 너랑… 이게 도대체 무슨 바보 같은 짓이냐?”

“발기한 채로 말싸움한 거… 나도 살면서 오늘이 처음이야.”

지수는 바지를 안 입고 저는 티셔츠를 안 입고…. 그야말로 풍기가 문란한 광경이었다. 남사스럽게 풀어 헤쳐진 바지 단추를 뒤늦게나마 제대로 잠그는데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덴 괜찮냐.”

“어, 다 괜찮아.”

사실 거기도 괜찮은데…. 이미 단단히 밉보인 상황에 더 밉보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진짜 다 괜찮아?”

이후로도 지수는 몇 번이나 같은 걸 물었다. 조금 전 언쟁으로 저에 대한 신뢰도가 폭락한 것 같아 다소 울적했으나 한편으로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지수가 나를 이렇게나 걱정한다고? 그 고지수가? 진짜?

“어제 경기에서 슬라이딩을 너무 세게 했더니 젖꼭지가 좀 쓰리긴 한데….”

“젖꼭지?”

“네가 호 해 줄래?”

예쁘게 눈을 깜빡이며 건넨 요청에는 마침내 퍽 소리 나는 베개가 날아왔다. 질색을 하며 일어서려는 지수를 힘껏 껴안는 기분이 아주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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