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23)

하얀 털옷을 입은

연옥은 2박 3일 상인회 나들이에서 있었던 재미난 사건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제게 들려주었다. 여전히 조금 들떠 있는 목소리에서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실컷 즐거운 구경을 하다 온 티가 났다.

“근데 아저씨 너무 겁이 없으신 거 아니야?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그 양반은 예전부터 그랬어. 우리 시장에 가게 처음 냈던 이십 년 전부터 겁대가리가 없었는데…. 좌우지간 사람이 착하고 성실하고 다 좋은데 한번 훼까닥 하면 눈에 보이는 게 하나두 없어지는 건지…. 그 넓은 길바닥에서 버스 기사랑 싸우는데 내가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

행주로 테이블을 훔치는 연옥의 손이 신바람이 들린 것처럼 힘이 넘쳤다. 애든 어른이든 원기회복에는 새롭고 예쁜 풍경을 보는 게 제일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연옥의 말투며 표정이 싱그러운 생기로 풍성했다.

우리 할머니 밖에 돌아다니는 걸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그동안 이 좁은 가게에 답답하게 콕 붙어 사느라 고생이 많았지. 조잘조잘 늘어놓는 연옥의 이야기보따리를 경청하던 지수는 때 이른 부추김을 시도했다.

“할머니, 이제 그런 거 하면 빠지지 말고 같이 갔다 와. 이모들 갈 때 같이 가면 좋잖아. 여럿이서 가니까 재미도 있고, 또 스트레스도 풀리고…. 여름에 또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걸 어떻게 매번 가. 그리고 여름 일은… 여름 되어 봐야 아는 거지. ”

“신청서 딱 내고, 액수 맞춰서 총무 아저씨한테 경비 얼른 보내고, 그렇게 이번처럼 그냥 후딱 갔다 오면 되는 거 아니야?”

“말이야 쉽지. 근데 어디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느냔 말이야.”

맑은 풍경 소리가 청아하게 울리는 한겨울 산사 경치가 얼마나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는지 아냐며 한참을 떠들던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그렇게 좋았다면서 왜 싫대? 역시 가게를 며칠 닫는 게 좀 그런가 싶어 마땅한 비책을 강구하고 있는데 싫다며 질색을 하던 연옥이 슬그머니 속내를 비쳤다.

“그리고… 산에 간다 그러면 나는 싫어. 나이 먹어서 높은 데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건 힘에 부쳐서 안 돼. 가 봤자 무릎 관절만 아프고….”

높은 산이 싫어서 망설여지는 거라면 방법은 많았다. 산 말고 다른 곳을 가면 되잖아. 지수는 기쁘게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알았어. 그럼 내가 조만간 운전면허를 딸게. 면허 따고 차도 살 테니까 내 차 타고 나랑 같이 좋은 데 놀러 다니자.”

“징그러운 소릴랑 하지도 마. 그건 더 싫으니까.”

“…징그럽다고?”

가차 없는 연옥의 반응에 지수는 눈만 깜박였다. 방금까지 신바람 나게 행주질을 하던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탁, 탁 소리 나게 젖은 행주를 다시 개킨 연옥은 쐐기를 박듯 이유를 댔다.

“그래, 징그러운 소리. 지수 너랑 가면 옆에서 맨 잔소리나 해 댈 텐데 괴로워서 나 같은 늙은이 어디 맘 편히 구경이나 하겠어?”

“너무한 거 아니야? 할머니, 나 지금… 와, 진심으로 상처받았어.”

“웃기고 있네. 네가 그동안 여기 와서 하고 간 잔소리에 내가 더 상처받았다, 이놈아.”

“…….”

진짜 한 마디를 안 져 주네. 애교랍시고 서운한 티를 내 봤다가 상대가 안 되는 말재주에 탈탈 털리기만 한 지수는 괜히 앞에 놓인 냅킨만 만지작댔다.

“자동차고 뭐고 돈 생기면 쓸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버는 대로 착실히 모아 놔. 원래 사람이란 게 통장에 여윳돈이 크게 있을수록 맘이 든든한 법이야.”

끝에서부터 갈래갈래 찢긴 하얀 냅킨이 문어 다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물 들어왔을 때 열심히 노를 저어야지. 댐 수문이 열린 듯 무섭게 몰아치다가도 잠시 후면 가뭄을 맞은 논두렁처럼 바싹 말라 버리는 게 연예계에 흐르는 물이었다. 지당한 말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이번에 절에 가서 지수 네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 줄 알어?”

“무슨 기도?”

“너 하는 방송 일 다 잘되고 너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엄청나게 많이 해 놨어.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 기도 다 들어주실 수 있게 허튼 생각 말고 올바르게 살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제가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잘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의 8할 정도는 연옥의 기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 할머니 기도가 나를 쑥쑥 자라게 했지. 그 힘이 얼마나 강력했냐면, 갖은 거친 풍파들이 저를 집어삼키려 다가오다가도 연옥의 기도 맛을 보고 난 뒤로는 기세가 팍 사그라들어 유야무야 지나가고는 했을 정도였으니.

“고마워, 할머니.”

“잘 있다가 갑자기 뭐가 또 고맙다고 난리야?”

“그냥… 내가 요즘 좀 행복한데, 생각해 보니까 그게 다 할머니 기도 덕분인 것 같아서.”

예술혼을 담아 열심히 찢어발겨 놓은 티슈를 한데 모아 뭉친 지수는 허심탄회하게 소감을 밝혔다. 연옥의 기도는 아무래도 날로 막강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점점 과해지는 효능에 요즘은 멀쩡히 잘 있다가도 불쑥불쑥 웃음이 나오곤 했다.

“방송국 드나드는 건 좋은데 그래도 눈은 너무 높아지지 말어. 남자가 배포가 있어야지. 막 이거저거 너무 따지고 들면 그것도 꼴불견이야.”

처음 주연을 맡은 드라마가 상상 이상으로 잘됐고, 또 거기서 예쁘고 화려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행복하다는 걸로 알아들었는지 연옥은 또 이상한 쪽으로 앞서가며 저를 단속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짜…. 곁눈질로 연옥을 살핀 지수는 말랑한 풍선껌을 씹듯 저만 아는 은밀한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어젯밤에는 같이 한강 변을 산책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는 조용하고 어두운 산책로를 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가까운 곳을 산책하거나 혹은 드라이브를 하거나, 승과 밖에서 보내는 시간은 대부분이 그런 식이었다.

“가기 전에 뭐 도와줄 거 없어?”

승. 최승…. 걔가 요즘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구강기가 다시 온 게 아닐까 싶어. 근래의 승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입에 넣으려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르고 살았던 아찔한 취향이었다.

지수는 이틀 전 아플 정도로 빨렸던 왼쪽 갈비뼈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린 살을 물고 늘어지던 입술은 주인을 닮아 근성이 넘쳤었다.

시종일관 진솔함을 뽐내며 종일 같이 있고 싶어 하는 티를 굳이 숨기지 않는 승이었으나 경기를 앞둔 며칠 전에는 어김없이 조금 이르게 집을 찾아 들어갔었다. 물론 그렇게 쿨하게 고한 안녕이 진짜 끝은 아니었고, 그날 밤은 서로 각자의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귀 옆에 둔 채 또 새롭게 시시한 이야기들을 조금 길게 주고받았었다.

“여기는 할 거 하나도 없으니까 집에 가서 드라마 대삿말이나 외워.”

“아, 다 외웠어. 그리고 촬영 이제 한 번만 하면 끝이라서 별로 할 것도 없어.”

몸을 돌린 지수는 가게 텔레비전 위에 걸린 동그란 벽시계를 확인했다. 한 삼십 분 있다 여기서 나가면 되려나. 자기 전에 잠깐 얼굴이나 보자며 잡은 약속 시각이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어제는 사람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한강 산책로가 오늘은 각종 생활체육을 하러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장비를 풀로 장착한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이 지난밤 저희가 거닐었던 산책로를 장악하듯 달리고 있었다. 짧은 거리를 요란하게 왕복 질주하는 무리를 보니 선뜻 나갈 엄두가 안 났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농구 코트에서는 어설픈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농구공을 든 사람들이 낡은 골대 아래에 폭죽을 심고 있었다. 엉성한 폭죽이 위로 짧게 솟구쳤다가 핑핑 힘없이 불꽃을 터뜨렸다. 심상치 않을 정도로 활기찬 분위기에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보지도 못하고 운전대 방향을 돌려야만 했다.

“들어가도 되는 거 맞아? 안에 사람 아무도 없어 보이는데….”

“너 아까는 사람 없는 데 가고 싶다며.”

“응, 그렇긴 했는데….”

밖으로 나온 지수는 입고 있는 패딩 주머니에 손부터 찔러 넣었다. 송산 소공원 입구. 멋스럽게 걸린 나무 현판이 무색하게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근데 진짜 아무도 없는 걸까. 바로 한 블록 옆의 큰 도로와 대조되는 무거운 정적이 공원 입구를 연기처럼 감싸고 있었다.

“저기 뒤에 보이는 회색 건물, 저거 너네 방송국 아니야?”

“너네 방송국? 너 지금 저 큰 방송국을 내 소유물로 쳐 주는 거야?”

“뭐 어때.”

“드라마 한 편 출연한 것치고는 너무 황송한 표현이라 내가 정말… 뭐라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앙상한 나무들 너머엔 눈에 익은 건물이 있었다. 공원 후문과 방송국 별관 건물이 거의 연결되다시피 한다더니 언뜻 봐서는 저 멀리 높이 솟아 있는 빌딩 꼭대기마저 공원의 일부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가깝네. 삐죽 튀어나온 건물 옥상을 응시하며 여기서 방송국까지의 대략적인 거리를 재 보는 동안 성큼성큼 몇 걸음 앞서나간 승은 현판 아래에 붙은 커다란 조감도를 읽어 나갔다. 팔짱을 끼고 유심히 그림을 들여다보는 옆모습이 어딘지 학구적이었다.

“야, 여기 여름에 오면 진짜 예쁘겠다.”

“그래봤자 지금은 겨울이야.”

코를 훌쩍인 지수는 무심하게 답했다. 추워서 나오던 콧물도 얼어붙을 지경이건만 웬 여름 얘기를…. 짤막했던 대꾸에 곧 싸늘한 승의 시선이 답장처럼 돌아왔다.

“하여튼… 멋없는 고지수.”

“멋? 무슨 멋?”

무슨 뜻인지 뻔히 알면서도 일단 시치미를 뗐다. 멋있는 말? 그런 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와, 그럼 우리 여름에 같이 오면 되겠다. 이렇게 낯간지러운 호들갑을 떨었으면 칭찬을 들었으려나.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것 같아 양 주먹에 꽉 힘을 주는데 살랑대는 목소리가 바람처럼 건너왔다.

“아냐, 됐어. 너는 그런 거 없어도 괜찮아. 멋은 나한테 많이 있으니까, 응?”

잠깐 사이에 새로운 결론을 내린 승은 즐거운 얼굴로 다시 조감도를 살폈다. 근데 내가 멋이 없다며 시작된 대화가 왜 자기가 멋있다는 말로 끝나는 거지? 약간 억울한 대화 흐름을 되짚으며 지수는 공원 안으로 발을 옮겼다.

여태 이름은 여러 번 들어 보았으나 실제로 안을 구경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어두컴컴하던 입구 때문에 스산한 그림만 떠올랐었는데 입구를 넘어서자 의외로 밝고 깨끗한 광경이 펼쳐졌다.

“야, 최승. 여기 농구장도 있는데?”

“너 왜 이렇게 좋아하냐. 농구 하고 싶어?”

깔끔한 우레탄 코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기 이렇게 잘 깔린 코트가 있는데 아까 그 사람들은 왜 한강에서 그 야단을 부렸던 거야?

“하고 싶냐고? 아니, 하고 싶은 건 아닌데….”

낡은 골대만 덜렁 심긴 흙바닥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놀던 어린 학생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다시 한번 코를 훌쩍인 지수가 옆을 돌아봤다.

“나 트렁크에 공 있거든. 물론 당연히, 농구공은 아니지만….”

공을 빌미로 꼬시는 듯한 목소리가 거부할 수 없게 사근사근했다.

금방 차에 갔다 오겠다던 승은 잠시 후 본인 말대로 공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게 실제 경기에서 사용하는 공인구라는 건 이제 저도 알았다. 테니스장에서 만났던 날 승이 타포린 백 가득 들고 왔던 공도 저 공이었고, 빨간 유니폼을 입고 실제 시구를 할 때도 저것과 똑같이 생긴 공을 던졌으니까.

근데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지금 들고 온 공에는 이전에는 못 보던 어떤 ‘흔적’이 있다는 거?

“사인볼이야? 누구 사인인데.”

“이거? 당연히 내 사인이지.”

멋들어지게 흘려 쓴 글씨가 하얀 가죽 위를 이지러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사인이… 생각보다 멋진데? 굴곡진 공 표면에 힘있게 휘갈겨진 이름 두 자에서는 야성미가 느껴졌다.

“얼마 전에 우리 구단에서 후원하는 유소년팀에 보낸다고 다 같이 사인을 했었는데 내가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그래서 아무튼 그때 남았던 거 중에 그냥 하나 챙긴 거야.”

승은 탄성을 확인하듯 공을 팡, 팡 소리가 나도록 땅에 튀겼다. 탄탄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공이 우레탄 바닥을 가볍게 치고 달아났다.

“그러면 너 농구도 잘해?”

“너 지금 같은 공놀이라고 너무 한 묶음 취급하는 거 아니냐. 엄연히 룰이 다르고 경기 방식이 다른데….”

의외로 객관적인 답변에 지수는 조금 놀랐다. 이거나 그거나 크게 다르지 않다며 자신 있어 할 줄 알았던 승은 제 분야가 아닌 타 종목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서 이걸로 뭘 하자는 건데. 자유투 내기라도 하자고?”

“오, 그럼…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큰 뜻 없이 그냥 해 본 말에 구미가 확 당겼는지 승은 눈을 번뜩이며 제가 한 제안을 덥석 물었다. 이야기가 또 이렇게 되네. 언제나처럼 예상 못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우물쭈물대며 대꾸를 망설이는 사이 탄력을 받은 승은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

“핸디캡 필요해? 네가 원하면 내가 너보다 약간 뒤에서 던질게.”

“방금 네 입으로 엄연히 룰이 다르고 경기 방식이 다르다며? 그럼 너나 나나 똑같은 처지인 건데 핸디캡은 무슨…. 공평하게 둘 다 자유투 라인에서 던져.”

사지 멀쩡한 성인 남성에게 기꺼이 핸디캡을 베풀겠다는 과한 아량이 살짝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지수는 터프하게 공을 가로챘다. 어딜 가도 빠지는 피지컬이 절대 아닌데 웬 약체 취급?

손바닥에 공을 얹고 위풍당당하게 자유투 라인으로 향하자 뒤에서는 조금 과장된 감탄이 들려왔다. 크, 고지수 멋지다. 그런 말을 들으니 진짜 멋진 걸 보여 주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각자 열 번씩 던져서 많이 넣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하자.”

“오케이.”

상대는 호기롭게 동의의 의사를 밝혔다. 땅에 공을 튕겨 보던 지수는 곧 심호흡을 내뱉으며 들고 있던 공을 던졌다.

“…….”

힘껏 날아간 공은 백보드 앞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아래로 뚝 떨어졌다. 묵직한 농구공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었기에 던지는 것 자체는 훨씬 쉬웠다. 덜어진 무게만큼이나 컨트롤도 쉬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백보드가 너무 높이 있는 탓에 얼마나 힘을 줘야 하는지 잘 가늠이 안 됐다.

“야, 이거 은근히… 어렵다.”

처음 세 번은 사방으로 공이 튀었다. 잘못 날아가 데굴데굴 골대 아래를 구르는 공을 지수는 재빠르게 쫓아다녔다. 그렇게 실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임했더니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적중률이 꽤 올라가는 쾌거를 보였다.

“자, 참가번호 1번 고지수… 4점.”

“…5점 아니고?”

다섯 번은 넣은 줄 알았는데…. 열심히 한 것치고는 성적이 저조했다.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공을 쫓아다니는 데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한 지수는 이제 멀찍이 물러나 구경꾼이 될 준비를 했다.

“나 한다?”

허벅지에 손바닥을 문지른 승이 위로 공을 던졌다. 오, 그래도 쟤는 한 번에 백보드 바로 앞까지는 날아가네…. 아슬아슬한 차이로 골대를 벗어난 공이 아쉬운지 반듯하던 얼굴에 약하게 구김이 갔다. 그물이 달린 림 아래에 똑 떨어진 공을 주워 온 승은 흘러내린 옷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내가 알기로 농구는… 가슴 근육을 되게 많이 쓴다고 하더라고.”

그런 귀한 팁을 왜 인제 와서 말하는 건데? 약간 어이가 없는 가운데 승은 곧바로 다음 슛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버릇처럼 공을 바닥에 튕긴 승이 크게 어깨를 돌렸다. 가슴 근육을 예열하는 걸까. 어깨를 지렛대 삼아 크게 돌아가는 팔이 굉장히 본격적이었다.

“오….”

효과는 탁월했다. 대흉근으로 길어 올린 공은 가볍게 날아가 동그란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쟤 근데 왜 저렇게 진지하냐.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 봐서는 서로 재밌자고 하는 친선 게임이 아니라 큰 국제 대회의 결승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한 번 넣어 본 후로는 금방 감을 잡았는지 이후로 승은 던지는 족족 점수를 얻어냈다.

“참가번호 2번, 몇 점?”

“…7점. 야, 한 번 더 해. 한 판 더 하자.”

오기가 생겼다. 상대가 저토록 사력을 다하니 저도 더 진심으로 임해야 할 것 같았다. 낚아챈 공을 들고 자유투 라인으로 향하면서도 대체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할게.”

“응.”

이미 열 번이나 슛을 쏴 본 덕에 오차 범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까처럼 아예 생뚱맞은 곳으로 공이 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승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손이 아니라 가슴의 힘으로 던진다고 생각하자 공은 매번 무난하게 백보드 근처까지 날아갔다.

던지는 게 해결되니 이제는 미세한 각도가 말썽이었다. 가볍게 떠오른 공이 두 번 연속으로 골대를 맞고 밖으로 튕겨 나왔다. 저것만 들어갔어도…. 놓친 기회에 아쉬움이 남는 만큼 다음 슛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다.

“오, 발전했어. 성공률 50%.”

“…….”

발전했는데 왜 기쁘지가 않냐. 공을 넘겨주고 뒤로 물러나자 순서를 맞은 승이 자유투 라인으로 걸어갔다.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 게임에 임하는 승의 얼굴을 보자 재미로 시작했던 게임이 더는 즐겁지 않았다.

왜 먼저 나서서 그런 말을 했을까. 조그맣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공은 던지는 족족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놀라운 적중률이었다. 승이 여섯 번 만에 다섯 번째 골을 기록해 게임의 승패가 이르게 결정이 난 순간 지수는 투항을 선언했다.

“네가 이겼어. 가자.”

“…….”

“…네가 이겼다니까?”

“…….”

승은 무아지경으로 골대만 겨냥 중이었다. 옆에서 뭐라 말을 해도 전혀 들리지가 않는 것 같았다. 공이 만들어 내는 둥근 궤적을 바라보던 지수는 곧 발길을 돌렸다.

코트 바깥에는 음수대가 있었다. 꽉 잠긴 수도꼭지를 힘주어 돌리자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잠시 파이프가 삐걱대며 조금 요란하게 물을 뱉어 내는 와중에도 승은 슛을 날리고 있었다.

젖은 손을 대강 털어 낸 지수는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공원에 들어올 때만 해도 산뜻했던 기분이 지금은 갑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리를 쭉쭉 뻗으며 가로등이 밝혀 주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더니 곧 길고 잘생긴 그림자가 옆으로 바짝 따라붙어 왔다.

“……화났어?”

“왜 왔냐. 거기서 밤새도록 슛 연습이나 하지.”

공을 든 승의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할 만큼 하고 손까지 야무지게 씻고 쫓아온 게 너무 기특해서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야, 어디 가.”

“나도 몰라.”

주차장을 지나친 지수는 발이 닿는 대로 계속 걸었다. 차로 향하려던 승이 저를 따라 급하게 방향을 트는 게 보였다. 저를 쫓아오느라 미처 놓고 오지 못한 공이 옆구리에 불편하게 끼어 있었다.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이 끝나자 큰길이 나왔다. 나란히 서서 잘 깔린 보도블록을 따라 계속 걸었다.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조용히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승이 불쑥 이상한 말을 했다.

“오랜만에 같이 낚시나 할까?”

“무슨 낚….”

그러고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총알 같은 속도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지수의 시선이 멀어지는 넓은 등을 따라 움직였다.

돌진하듯 걸어간 승이 멈춰 선 곳에는 붕어빵을 파는 트럭이 있었다. 아, 미치겠네. 지수는 힘겹게 무표정을 유지했다. 트럭 높이에 맞춰 구부정해진 승의 등허리를 보고도 웃지 않으려면 말 그대로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어?”

천천히 다가가자 허공에 대고 짧게 말을 뱉은 승이 도움을 청하듯 저와 눈을 마주쳐 왔다. 손에 들린 지갑의 지폐 칸이 텅 비어 있었다.

지수는 느긋하게 뒷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을 꺼내 뿌듯한 표정으로 돈을 내밀자 비닐장갑을 갈아 낀 할아버지가 따끈따끈한 붕어빵으로 하얀 종이봉투를 채워 나갔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두둑해진 종이봉투를 받아 든 지수는 잊지 않고 인사를 했다. 현금도 없이 야심 차게 낚시를 하러 떠났던 승은 거래 현장을 넋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물고기… 내가 잡았다?”

“응, 맞아. 다 네가 잡았어.”

따끈한 봉투를 전리품처럼 내보이며 한 말에 승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둘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처럼 왔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까는… 그냥 재밌자고 하는 건데 네가 뭐에 씐 것처럼 너무 열심히 하니까 좀 약간… 짜증이 나더라. 너 하는 거 보니까 데이트가 아니라 무슨 전지훈련 하러 온 사람 같길래… 내가 좀 욱했다.”

“어, 미안…. 근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한번 뭐에 꽂히면 다른 게 눈에 잘 안 들어와. 그러니까 내가 좀… 내가 그러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 좀… 무슨 말인지 알지?”

“앞으로 너한텐 내기하자는 말 같은 건 장난으로라도 절대 안 하려고.”

지수는 조금씩 기름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봉투를 내밀었다. 화해의 의미를 담은 적극적인 제스처였는데 승은 내키지 않는 듯 훈기가 도는 하얀 봉투 속을 보고만 있었다.

“안 먹어?”

“내가 원래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은 잘 안 먹어서….”

끝내주는 일관성에 말문이 막혔다. 허, 참…. 이번엔 다른 의미로 기분이 아찔했다. 야멸차게 외면당한 생선들을 가여운 눈빛으로 들여다보던 지수가 고개를 쳐들었다. 어렵게 도착한 화해의 문턱에서 다시 무섭게 전투력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럼 이건 왜 샀어? 너는 더러워서 안 먹고, 나는 먹어도 되고?”

“아니, 아까는 네가 화난 것 같으니까 나도 좀….”

“계산할 때 보니까 트럭 엄청 깨끗하더라. 할아버지 마스크도 쓰고 계시고 돈 만지고 나서는 끼고 있던 장갑 버리고 바로 새 장갑 꺼내 끼시더만.”

“…그래? 난 네 뒤에 있어서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못 봤지.”

와다다 쏘아붙인 말에 설득력이 있었는지 망설이던 손이 봉투 속으로 쓰윽 침범해 왔다. 뭐냐, 평생 안 먹을 것처럼 굴더니…? 힘줄이 돋은 하얀 손등에서 진한 뻘쭘함이 느껴졌다.

“너 그렇게 깔끔 떨면서 우리 가게 만두는 어떻게 먹냐. 허름한 시장통 가게에서 만든 음식에 뭐가 들어갔을 줄 알고.”

“아니, 그건 내가 너희 가게 주방을 직접 봤잖아. 엄청 깨끗한 거 내 눈으로 봤으니까… 그러니까 믿고 먹는 거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할 말이 없기는 한데…. 틈이 날 때마다 좁은 가게를 닦고 또 닦는 연옥의 부지런함이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승을 따라 붕어빵을 하나 꺼낸 지수는 머리 부분부터 크게 베어 물었다. 달콤한 팥 알갱이를 음미하며 옆을 돌아보니 승은 저와 정반대로 꼬리 부분을 먹고 있었다.

“너 꼬리 좋아하냐.”

“응, 몸통 달아서 맛없어.”

그 말을 들은 지수는 곧바로 수술에 돌입했다. 양손에 힘을 주고 조심히 반죽을 갈라 허여멀건한 꼬리를 똑 분리해 냈다. 드러난 단면에는 까만 팥이 손톱만큼 붙어 있었다.

“자, 맛있는 꼬리 너 많이 먹어라.”

“…너 꼬리 싫어해?”

“거긴 그냥 밀가루 반죽인데 무슨 맛으로 먹냐.”

떼어 준 꼬리는 곧 몸통이 되어 돌아왔다. 이 부분이 알짜배기 아니냐고. 만 원을 빌려 줬더니 이자만 삼만 원이 돌아온 것 같은 상황이었다.

“고지수.”

“왜 불러.”

“우리 둘… 알고 보면 천생연분 그런 거 아닐까?”

“…….”

꼬리를 독점한 게 너무 기뻤는지 승은 키득대며 유치한 소리를 해 댔다. 붕어빵 몸통은 달아서 싫다던 사람이 그보다 더 단 소리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만 했다.

“아니면… 만생연분 혹은 억생연분?”

“천생연분 할 때 천, 그거 한자로 하늘 천인 건 알고 하는 말인 거지?”

“우리끼리 말장난할 때도 그런 학문적인 근거를 완벽하게 따져 가면서 해야 되는 거야? 나 진짜…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어.”

붕어빵 몇 마리를 갈라 먹으며 말장난을 하다 보니 어느덧 주차장이었다. 입구는 여전히 조용하고 어두웠다.

키를 꺼내 잠금을 해제시킨 승이 트렁크로 향했다. 문이 열린 걸 감지한 내부에서는 주황색 불빛이 새어 나왔다.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귀중한 사인볼이 제자리를 찾듯 트렁크 구석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래서 네 소원이 뭔데.”

“응?”

넓은 트렁크는 단출했다. 여기도 득달같은 감시 대상에 해당하는지 전체적으로 몹시 청결했는데 승은 문을 연 김에 그마저도 가볍게 정리를 했다.

“아까 내기할 때 소원 걸었잖아.”

“아, 그거….”

살짝 열려 삐뚜름하게 걸쳐진 신발 상자 뚜껑을 제대로 눌러 닫은 승이 느릿하게 저를 돌아봤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킨 승은 곧 쾅 소리가 나게 트렁크 문을 닫았다.

다시 찾아온 새까만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차가운 공기를 타고 담백한 시선이 건너왔다.

“나 너 혼자 하는 거 보고 싶어.”

“…….”

“내 생각 하면서 혼자 하는 거.”

“…….”

조금 쭈뼛거리며 전해진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어쩐지 너… 너무 열심히 하더라. 이유 없는 승부욕은 없다는 듯 곧바로 튀어나온 엄청난 대답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 * *

얼마 후 방문한 승의 집 거실에는 그동안 못 보던 물건이 있었다. 지수는 방금 막 상자에서 꺼낸 듯한 얇은 화면 앞을 어색하게 서성거렸다.

“티비 샀어?”

“응.”

새로 생긴 물건은 텔레비전이었다. 다른 집에서는 없으면 서운할 정도로 흔한 가전제품이 거기에선 그렇게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전파를 송신하는 바보상자의 필요성을 때아니게 실감했는지 승은 얇고 큰 모니터를 집에 들였다. 다양한 스포츠용품만 드문드문 있던 거실의 한 면을 보기 좋게 차지한 텔레비전은 혼자만 확연히 다른 결을 자랑했다.

“너 나오는 드라마 크게 보려고 샀어. 재활할 때 숙소에 있으면서 주문한 건데 배송이 이제야 왔네.”

“크게 보려고 이걸 샀다고? 큰 화면으로 보면 뭐… 드라마 내용이 더 흥미진진하고 긴박해진대?”

“내용은 똑같지. 근데 잘생긴 네 얼굴을 크게 보면… 내 기분이 달라. 내 기분이 흥미진진하고 긴박해지더라고.”

커다란 텔레비전은 밋밋하던 거실 벽면을 그럴듯하게 채워 줬을 뿐만 아니라 얼핏 모델하우스처럼 단조롭던 집을 실제 사람이 거주 중인 집처럼 보이게 하는 데 크게 일조를 하고 있었다.

“이제 좀 있으면 드라마 끝나는데 뭘 이런 것까지 사.”

“왜? 돈 낭비 같애?”

“어, 솔직히 조금…. 잘 쓰지도 않는 거에 큰돈 쓰면 아깝잖아.”

“그럼 돈 낭비 안 되게 네가 또 다른 작품 찍어 주면 되잖아, 아니야?”

승은 그럴싸하게 들리는 해결책으로 구박과 잔소리가 튀어나올 틈을 봉인했다. 하여간 말은 잘하지. 지수는 미끈하게 잘빠진 텔레비전을 꼼꼼하게 훑어봤다. 얇은 프레임을 제외하고는 디테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 깔끔한 디자인이 모델하우스에서 사는 사람과 잘 어울렸다.

“지수야.”

“응?”

“나 배고프다.”

액정 필름조차 아직 그대로 붙어 있는 신상 가전제품을 거실에 둔 채 그날은 승과 함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후식으로는 칼로리가 없는 탄산수를 한 병씩 마셨다. 있는 재료를 이용해 뚝딱 차린 소박한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로는 새로 산 텔레비전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제가 출연 중인 드라마를 크게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샀다는 승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날은 잘 몰랐다. 휴대전화나 노트북으로도 충분히 콘텐츠를 볼 수 있는 편리한 시대에 굳이 그 큰 텔레비전을 살 필요가 있나 싶긴 했으나, 과한 오지랖인 걸 알았기에 괜한 딴지는 1절까지만 걸었었다.

내가 멍청했었지. 안일했던 제 태도에 뒤늦게 후회가 막심했다. 그걸 사서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으면 기를 쓰고 말렸을 텐데…. 빈백에 드러눕다시피 한 지수는 현재 문제의 텔레비전 덕분에 서라운드로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재밌냐?”

“엉.”

디자인만 예쁜 줄 알았던 텔레비전은 성능도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났다. 분리형 사운드바가 제 느끼한 목소리를 선명하게 거실로 전달했다. 영화관 느낌을 내겠다며 승이 온 집 안의 조명을 끈 덕에 울리는 소리가 지나치게 맑고 깨끗했다. 크게 보이는 화면 속 제 얼굴이 부담스러워 마치 어제 데뷔한 사람처럼 멀미가 날 것 같았다.

파핑뮤직 첫 방송을 무사히 소화했던 다음 날 오후, 회사 사람들과 회의실에 둘러앉아 어제 했던 생방송을 집중 모니터링할 때도 이렇게까지 수치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부끄러움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딴 거 보면 안 되냐? 요새 그, KNC에서 새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 되게 재밌다고 하던데….”

“KNC? 미안한데 우리 집에 그런 채널 안 나와.”

드라마에 눈이 먼 승은 안 나올 리가 없는 채널의 존재를 부정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 줄래? KNC가 무려 대한민국 공영방송국이다, 인마.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지수는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재밌는데 왜 그래?”

“…응, 재밌어. 우리 드라마 잘 만들어서 재미있는 건 나도 알아.”

최대한 흐린 눈을 하며 텔레비전 테두리만 뜯어보고 있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와, 드디어 장면전환. 고작 이 분 남짓 했던 시간이 체감상으로는 십 분은 되는 것 같았다.

“근데 지금 방송하는 이거 언제 찍은 거야?”

“한… 한 달 됐나? 아니다, 한 달까지는 안 됐겠다. 삼 주 전? 응, 대충 그쯤에 찍었던 것 같아.”

맑고 높은 상지 목소리가 안정제 역할을 한 듯 차게 식었던 손바닥에도 피가 돌았다. 살 것 같아진 지수는 빈백에 젤리처럼 늘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옆을 돌아봤다.

거기엔 넘치는 힘이 주체가 안 되는지 짐볼에 앉은 채 드라마를 시청 중인 승이 있었다. 무척추동물처럼 흐물대는 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시청 태도였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선 척추에서 굳센 코어 근육의 힘이 느껴졌다.

“아, 그럼 찍은 지 얼마 안 된 거구나…. 아까 그 장면 찍을 때… 많이 추웠어?”

“어, 저 날 좀… 되게 추웠었지. 근데 왜?”

“방금 그 장면에서 네 코가 되게 빨갛길래.”

저를 보고 히죽 웃는 예쁜 얼굴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들었다. 이러려고 텔레비전 샀어? 나약한 인내심이 필라멘트 끊어지듯 뚝 부러지려는 순간,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갓을 쓴 제가 부채질을 하며 낡은 고서를 읽고 있었다.

“오.”

“하지 마라, 진짜.”

가끔 촬영 일정과 본방송 스케줄이 겹칠 때면 현장에서는 찍던 걸 잠깐 멈추고 다 같이 드라마를 시청했다. 출연진에 스태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연기자들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들까지 합세해 적극적인 비평을 주고 받았지만, 한 번도 지금 같은 민망함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도대체 언제 끝나냐고. 지수는 옆에 둔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봤다.

“몇 시야?”

“열 시 오십 분.”

“벌써?”

“벌써라니…. 네가 그 거대한 타조알 위에 앉아서 콩콩대느라 모르나 본데, 우리 이거… 한참 봤어.”

휴대전화 화면 안에는 어젯밤 잠이 와서 보다가 말았던 소파 사진이 그대로 떠 있었다. 차라리 못다 고른 소파를 고를까. 제 얼굴을 나노 단위로 뜯어 보는 승 옆에서는 연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 같은 건 할 수가 없었다.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소파들을 다시 보는 손가락이 무성의하게 액정을 두드렸다. 대체로 모든 일에 선택지가 너무 많은 세상이었으므로 그중 적당한 상품을 골라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거 끝나면 이렇게 크고 좋은 화면으로 네 경기 영상이나 좀 보자. 아니면… 어디서 스포츠 뉴스 같은 건 안 하냐? 그런 거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나?”

역지사지가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 주리라. 장바구니에 넣어 둔 또 다른 소파를 클릭하며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상대는 끄떡도 없었다.

“따끈따끈하게 저번 주에 한 걸로 틀어 주라. 3세트 초반에 내가 그 뭐랄까… 센스 있는 플레이?”

“…뭐?”

“참고로 내가 한 말 아니고 해설에서 한 말이야. 아무튼 그런 걸 선보이면서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멋진 활약을 펼친 부분이 있거든? 이왕 볼 거면… 나는 우리가 그 부분을 같이 봤으면 좋겠어.”

쏟아지는 자화자찬이 장황했다. 청산유수 같은 설명에 보지도 않은 하이라이트가 저절로 눈앞에 그려졌다. 그치, 최승 얘는 내가 아니지. 이제는 정말 익숙해질 만도 한 그 당연한 사실을 또 잠시 잊고 있었다.

“…그냥 안 볼래. 갑자기 안 보고 싶어졌어.”

오랜 아이쇼핑 끝에 최종적으로 제일 무난한 소파 두 개를 골라 천천히 비교 분석을 해 보던 지수는 잘 보던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놨다. 놀리는 것도 어느 정도 보장된 반응이 있어야 할 맛이 나는 거였다.

흥미를 잃은 지수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저 날이야말로 진짜 추웠는데…. 바람 부는 갈대밭으로 걸어 들어가는 상지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역시 윤상지… 표정 좋고, 감정선 좋고. 아래로 툭 떨궈진 고개가 처량했다. 섬세한 동료의 연기에 아낌없이 감탄을 보내는데 애달픈 선율의 OST 곡이 흘러나왔다.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거야?”

“우리 PD님… 진짜 잔인하지 않냐.”

“……진짜 이렇게 끝난다고? 진짜?”

“응.”

다음 화를 보지 않고는 배겨 낼 수가 없는 윤주의 절단 신공에 바쁘게 콩콩대던 타조알마저 굳어 버렸다. 민망함에 한 시간 내내 반쯤 누워 있던 지수는 끝날 때가 되어서야 자세를 바로 했다.

“야, 경기로 따지면 4세트까지만 보여 주고 마지막 세트는 다음 주에 확인하라는 거랑 뭐가 달라.”

“다음 주가 마지막이잖아. 궁금증을 강하게 유발해서 끝까지 화제성을 잃지 않겠다는 제작팀의 큰 뜻 아니겠냐.”

화면에서는 이제 다음 화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다. 뒤에 깔린 드라마 테마곡을 배경으로 눈에 익은 장소와 정겨운 소품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종영을 목전에 둔 마음이 조금 시큰했다.

그때 빨리 텔레비전을 껐어야 하는 건데…. 저는 출연자로 승은 시청자로, 각기 다른 감상에 젖어 화면을 보던 둘 사이에 일순 긴장감이 흘렀다.

“야, 야.”

“왜.”

키스 신, 상지와 저의 진한 키스 신이 화면 가득 송출되고 있었다.

“리모컨 어딨어.”

“…….”

“리모컨 없어?”

허둥대며 리모컨을 찾아 나섰을 땐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다. 잠깐 스쳐 지나가듯 보여 주는 다른 컷들에 비해 입을 맞추는 장면만 유독 길게 재생됐다.

아까 여기에 뒀던 것 같은데 어디로 갔지. 빈백 근처를 속속들이 뒤졌으나 리모컨은 없었다. 느리게 재생되는 키스 신에서는 마지막까지 시청자를 박박 긁어모으겠다는 윤주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짧게나마 몇 마디 대사까지 들려준 맛보기가 뜨겁고 강렬했다.

“잘 나왔네.”

“…응, 잘 나왔지.”

넋두리 같은 승의 말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래도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런 직업인 걸 모르고 만난 것도 아니잖아. 불편하더라도 반드시 존중받아 마땅한 영역이었으므로 저도 당당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멋지다.”

“…그렇네. 편집된 거 보니까 배경이 예쁘네.”

드라마가 시작한 후로 줄곧 짐볼 위에 앉아 있던 승이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인영이 오늘따라 유달리 거대했다.

“근데 나는 우리가… 저거보다 더 멋진 걸 할 수 있을 것 같애.”

“어?”

마치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저벅저벅 다가온 승이 어깨를 짚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너 거기 있었구나. 조금 전 간절히 찾아 헤매던 리모컨은 제가 앉은 빈백의 왼쪽 귀퉁이 아래에 있었다.

“네 생각은 어때?”

커튼을 치듯 텔레비전 전원을 끈 승이 곧바로 입을 맞춰 왔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빈백의 길쭉한 상단부가 부드럽게 뒤통수를 받쳤다. 할짝대는 입맞춤이 메마른 입가를 적셨다. 벌어진 입술 사이를 파고든 혀가 심술을 부리듯 아랫니 뒤편을 긁었다.

저항은 하지 않았다. 최승 성질났네. 연인이란 기본적으로 서로의 몸과 마음에 대한 독점을 전제로 맺어진 관계였다.

아무리 일이었다고 해도 그 불문율이 깨지는 현장을 생생히 목격한 셈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겠지. 모자이크가 겹겹이 덧칠된 흐릿한 이미지로 봤어도 찜찜했을 장면을 얼굴 근육 하나까지 생생하게 담아내는 초고화질의 동영상으로 봤으니 오죽했을까. 그런 불유쾌한 현장을 목격한다면 누구라도 평정심을 지키기 어려울 터였다.

푹신한 빈백에 편안히 몸을 누인 지수는 두 손으로 하얀 볼을 붙잡았다. 키스 신 때문에 반듯하고 건강한 심성이 고통을 호소한다면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줄 의향은 제게도 있었다.

더 멋진 걸 해내리라는 각오가 녹아든 혀가 녹진하게 입 안을 데웠다. 동그란 코끝이 인중을 스치며 아랫입술이 빨렸다. 12세 관람가 등급의 지상파 드라마에는 절대 실리지 못할 선정적인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렇게 하면 네 기분이 좀 나아져? 그렇다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해. 심통이 나 빵빵해진 볼을 꽉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며 지수는 눈을 감았다.

“…….”

아니, 근데… 야, 그래도 정도가 있지. 이건, 아오, 이건 진짜… 너무 하잖아. 눈치껏 장단을 맞추기 위해 살포시 아래로 내려앉았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제풀에 지칠 때까지 너그럽게 기다리려던 다짐은 채 삼십 초가 못 갔다.

“야.”

“…….”

“읍, 최승…!”

턱을 비틀어 가까스로 입술을 피한 지수의 손이 커다란 손등 위를 덮쳤다. 키스하라고 놔뒀더니 어느새 손이 엉뚱한 곳에 가 있었다. 몰염치한 상도덕에 씩씩 콧김이 나왔다.

“…왜?”

“우리 드라마에 이런 장면도 있었어?”

뻔뻔하게 제 다리 사이를 마구 더듬던 손에 순간 힘이 풀렸다.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거세게 뛰는 맥을 품은 피부가 열로 후끈후끈했다. 지압하듯 눈썹 뼈를 누르던 지수는 곧 손을 들어 턱을 닦았다. 쓱 한 번 스쳤을 뿐인데 누가 묻힌 침이 마른 손등 위로 흥건하게 묻어났다.

“고지수.”

“왜.”

“너는 내 맘 몰라. 진짜 몰라.”

“내가 모른다고?”

승은 본격적으로 볼멘소리를 뱉어냈다. 내가 모르긴 뭘 몰라. 네가 손만 저속하게 안 놀렸으면 우리는 깔끔한 키스와 함께 지금보다 한층 성숙한 관계로 거듭났을걸? 여기서 진짜 마음을 모르는 게 누군데 그래.

“그래. 넌 아무것도 몰라.”

일방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으니 저도 마음이 상했다. 조금 전의 너그럽던 마음 같은 건 다 사라져 버렸다. 달아오른 뺨을 크게 쓸어내린 지수는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

“그렇게 억울하면 너도 훈련장 가서 네 친구들이랑 해.”

맹세컨대 결코 나쁜 의도는 없었다. 우리 원래도 이런 유치한 말싸움 같은 건 차고 넘치게 많이 했잖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다툼에 약간의 도발을 첨가한 농담이었는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미쳤어?”

“……어?”

“아씨, 너 때문에 나 지금 상상했잖아.”

말 한마디가 뻗친 파급력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거셌다. 당혹스러움에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는 가볍게 투덜거리기만 하던 승이 정색을 하고 덤벼들었다.

“너 거기… 거기 어떤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아?”

“어? 나는, 나는… 나야 모르지.”

그 말을 시작으로 승은 저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중얼 뱉어 냈다.

“어, 거기… 막 수건이랑 유니폼 다 젖은 거, 어, 그런 거 그냥 아무 데나 놔두고.”

“…….”

“방, 아니, 침대 정리도 안 하고….”

“…무, 무슨 침대?”

“주변은 엉망인데 향수, 막 비싼 향수들….”

“향수? 향수는 또 왜. 무슨 말이야, 어?”

수건과 유니폼에서 침대로, 또 침대에서 향수로 급류를 탄 듯 대화 주제가 과격하게 변했다. 뭐가 어쨌다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승은 끔찍한 악몽에 갇힌 것처럼 괴로워했다.

“아, 나 죽겠다. 한번 떠오르니까 계속 생각나잖아.”

“…….”

너 혹시 쓰레기장에서 훈련하냐. 듣다 보니 그런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반쯤 패닉 상태에 빠진 건지 이유도 모르는 채로 지수는 일단 조용히 두 팔을 크게 벌려 보였다.

괴로운 듯 주먹 쥔 손으로 가슴 중앙을 두드리던 승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제가 보낸 사인만은 놓치지 않고 알아들었다. 고개를 쳐든 승이 와락 저를 껴안았다. 나한테 안기라는 뜻이었는데 얘는 또 나를 안아 버리네…. 빈백과 승 사이에 납작하게 끼인 지수는 잠깐 누군가의 곰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체험했다.

“고지수, 나 진짜 토할 것 같으니까… 너 다시는… 진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응, 절대 안 할게. 진짜 미안.”

“…….”

“내가 실언했어. 미안해.”

훈련장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열화와 같은 반응에 쓸데없는 궁금증이 무럭무럭 자랐으나 지수는 열심히 등만 토닥였다. 체중을 온전히 실어 묵직하게 누르는 힘 때문에 팔에 피가 잘 안 통했다.

이 정도면 손끝이 보라색으로 변해 있지 않을까. 마비된 듯 손바닥 전체가 저릿했지만 그래도 넓은 등을 쓸어 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자장가 같은 손짓만이 계속 이어졌다.

“근데 최승.”

“응.”

“토할 것 같다면서 이건 왜 이래?”

피가 통하지 않는 상태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던 지수의 손이 퍼뜩 느껴지는 감각에 순간 미끄러져 허공을 헤집었다. 맞닿은 허리춤이 묵직했다.

입으로는 토할 것 같다면서 하체는 이러기 있냐고. 다른 이유로는 절대 설명이 되지 않을 정확하고 확실한 감각이 배꼽 아래로 전해졌다.

“괜찮아졌나 봐.”

“……벌써?”

뭐가 이렇게 회복이 빨라? 승은 대답 대신 문제의 부위를 더욱더 가깝게 밀착시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진짜 너무 끔찍해서 다시는 안 설 뻔했는데… 이제 다 나은 것 같애.”

뭉그적대는 몸짓을 이겨 내지 못한 제 성기 또한 초 단위로 크기를 달리하고 있었다. 아까 손으로 더듬을 때도 충분히 위험 상황이었는데 이젠 대놓고 좆을 들이대다니…. 노골적인 접촉에 골반이 쿵쿵 울렸다.

다시 작아지기에는 늦은 걸 감지한 지수는 천천히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어지자 속옷 안에 든 좆이 제 세상을 맞은 듯 꺼떡꺼떡 춤을 췄다.

“만져 줘. 나도 너 만져 줄게.”

바지를 풀어 헤친 지수는 승의 얇은 홈웨어 안으로 손을 뻗었다. 토할 것 같은 와중에도 꿋꿋하게 발기를 해? 거대한 불수의근이 욕망으로 꿈틀댔다. 지수는 살짝 스치기만 해도 두둑함이 느껴지는 다리 사이를 조심히 더듬었다.

“지수야.”

“응.”

붙어 있던 몸을 조금 떨어뜨린 승 또한 본격적으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늘 왼쪽 허벅지에 바짝 붙어 있던 좆은 불어난 몸집에 이미 원래의 위치를 이탈해 버린 후였다. 딱딱하게 커진 귀두가 속옷 밴드를 뚫고 나와 배꼽 바로 아래까지 불거져 있었다.

“넌 여기 만져 주면 되게 좋아하더라.”

벗은 것도 입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 아예 다 벗고 있을 때보다 더 야한 기분이 들었다. 연약한 귀두가 손바닥과 마찰할 때마다 허리가 뒤틀렸다.

“살살, 살살 좀….”

“참아 봐.”

단추와 지퍼만 풀었을 뿐인 빳빳한 일자 청바지가 움직임을 제한했다. 노크하듯 귀두를 두드리던 손가락은 이제 아래로 내려가 피가 몰릴 대로 몰린 뿌리 부분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읏….”

그동안 몸을 헛섞지는 않았는지 둘 다 질세라 서로의 약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무려 다섯 개나 달린 손가락과 너른 손바닥을 적재적소에 자유로이 사용하자 삽입을 할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 무한으로 생겨났다.

“윽, 고지수….”

이걸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손으로 하는 섹스? 아니면 좆으로 하는 키스? 성기를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섹스 같다가도 쿠퍼액으로 젖은 속옷 두 겹을 사이에 두고 좆이 스칠 때의 쾌감은 확실히 키스와 더 닮아 있었다.

섹스면 어떻고 키스면 어때. 지수는 딱 하나로 정의 내리기를 포기하며 승을 불렀다.

“최승.”

“응.”

“하, 나 쌀 것 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닿았다. 넌 여기서 뽀뽀를 하면 어떡하니. 쌀 것 같으니까 더러워지기 싫으면 비키라는 말이었는데 승은 청개구리처럼 행동했다.

야, 너 거기…. 사정은 하지 않았지만, 귀두에서 늘어진 투명한 액으로 배꼽 아래가 이미 더러웠다. 승이 입은 하얀 티셔츠가 제 성기가 흘린 흔적들을 말끔하게 닦아 냈다. 나 집에 뭐 입고 가냐. 끈적한 정액을 뒤집어쓰고 싶은 게 아니면 제발 좀 비키라고 힘껏 가슴팍을 밀었으나 어림도 없었다.

“야, 제발….”

“아, 고지수 그냥 싸.”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지수는 옷 안을 주무르던 손에 잔뜩 힘을 줬다. 속옷을 파고든 손이 기둥을 세차게 흔들었다. 윽…. 승의 낮은 신음이 다리가 여섯 개 달린 벌레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가며 지수는 성큼 다가온 끝을 예감했다. 딱딱한 좆이 맞닿은 뱃가죽 사이로 질척한 액체를 뱉어 냈다. 딱딱한 걸 열심히 주무르며 자극을 재촉하던 제 손이 흠뻑 젖어 든 것도 정확히 그 타이밍이었다.

“하…….”

소리 없이 터진 폭죽 두 개가 동시에 꽃가루를 흩뿌렸다.

젖은 몸에 가운을 두르고 밖으로 나오자 먼저 샤워를 마친 승이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니, 쟤는 왜 허리끈도 안 하고…. 풀어헤친 가운 사이로 흉기 같은 성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저기 옷.”

“아, 그래….”

“네 옷은 내가 세탁기에 넣어 놨어. 빨아서 줄게.”

식탁 위에는 잘 개켜진 티셔츠와 바지가 놓여 있었다. 정액이 끈적하게 묻은 티셔츠와 바지는 세탁이 불가피한 신세가 되었다.

“나도 물 좀.”

플라스틱 생수병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은 승이 냉장고로 향했다. 의자에 주저앉은 지수는 고개를 숙이고 엉킨 머리카락을 풀었다.

이게 지겨워서라도 빨리 머리부터 잘라야지. 부스스해진 머리카락들을 손으로 정리하는데 콩 소리와 함께 식탁이 살짝 흔들렸다. 눈을 들자 라벨이 정확히 제 쪽으로 향해진 생수병이 있었다.

이게 남한테 줄 때는 정렬 기준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는 건가 봐? 복잡다단한 룰을 추측해 보던 지수가 승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승.”

“응?”

허리끈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여민 지수는 한 손으로 승의 턱을 붙잡았다.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자 꾹 다물고 있던 입이 살짝 벌어지며 선홍빛 혀가 드러났다.

“너, 아─ 해 봐.”

으애…. 억지로 입을 벌리게 된 승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승의 입 속을 살폈으나 제가 기대한 건 없었다.

“……왜 이래?”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좀 봤어. 근데 너 되게 건치네. 어렸을 때 이 열심히 닦았구나?”

나는 네가 요즘 하도 뽀뽀를 해 대길래 혹시 이갈이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거든.

“어, 나 완전 열심히 닦았어. 삼 분 꼭 지키고.”

턱이 잡힌 채 잠깐 어리둥절해하던 승은 소소한 칭찬을 날리자 이내 의심을 거둬들였다.

“그래?”

양치질 하나는 자신 있다며 으스대는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큰 몸이 움직일 때마다 순백색의 헐렁한 가운이 펄럭펄럭 휘날렸다.

“응, 자기 전에는 군것질도 잘 안 했어.”

이가 썩는 게 싫어 사탕마저 멀리했다는 승이 씨익 웃으며 저를 돌아보았을 때 지수는 차마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착시 현상을 경험했다.

“…….”

갈증이 여전한지 다시 냉장고로 향한 승이 물 하나를 더 꺼냈다. 장난스러운 호기심으로 남의 입 속을 들여다보던 지수는 굳은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저번에는 전두엽이 말썽이더니 이제는 시신경까지…. 냉장고 문짝보다 더 큰 놈이 떨어진 빙하 조각을 갖고 노는 새끼 북극곰처럼 보였다. 스무 해 넘게 견고하던 하나의 세계에 마침내 멸망이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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