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23)

무질서한 천국에서

열렬했던 새벽을 힘겹게 배웅하고 맞은 아침, 승은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밤새도록 그 난리를 쳤는데도 이 시간에 일어나지네. 눈썹을 긁적인 승은 일곱 시와 일곱 시 오 분, 정확히 오 분 간격으로 설정된 두 개의 알람을 미리 껐다. 인간의 생체리듬이란 아마 제 생각보다 더 위대한 무엇인 듯싶었다.

잠기운이 여전한 손이 허리 밑을 더듬었다. 두꺼운 나뭇잎을 깔고 누운 것처럼 골반 아래가 수상하게 배겼다. 원인을 찾아 시트 위를 수색하던 손끝에 미끄덩한 물체가 닿았다. 반쯤 녹은 젤리? 그게 아니라면 씹다 뱉은 풍선껌? 불쾌한 쪽으로 번지는 상상의 나래를 잠재우며 휙 빼든 손안에는 의외의 물건이 잡혀 있었다.

“…….”

젤리도, 씹다 뱉은 껌도 아닌… 콘돔. 희멀건 정액이 말라붙은 콘돔이었다. 우욱. 팔자 좋게 눈을 비비던 승은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쓴 콘돔이었는데도 연약한 비위는 끔찍하다며 발악을 했다. 말라비틀어져 괴상한 허물이 되어 버린 판국에 그게 누구 물건을 감쌌는지가 뭐 그리 중요하냐는 식이었다.

산불 같은 섹스였다. 푸른 숲을 집어삼키는 불길이 쉬이 멎지 않을 걸 알았다면 애초에 콘돔을 찾아 씌우는 사치 같은 건 부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콘돔…. 어제 우리에게 그게 과연 소용이 있기는 했었나. 딱 하나뿐이었던지라 더는 여분도 없었지만, 두 번째 삽입부터는 저나 지수 둘 다 그런 거엔 신경도 안 썼다.

잠기운이 덜 가신 승은 콘돔을 쥐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둥그런 뼈를 감싸 안은 손바닥에 양껏 힘을 주며 다리를 가슴 쪽으로 바짝 당겼다. 묵직한 둔통이 번개처럼 뇌를 때리고 도망쳤다.

미쳤네, 진짜. 햄스트링 전체가 얻어맞은 것처럼 뻑적지근했다. 국가대표로 소집되어 들어갔던 선수촌에서 다섯 시간가량 등산을 하고 난 직후에도 다리가 이렇지는 않았었는데…. 한 입으로 두말은 안 하는 지수가 싸면 또 세워 주겠다는 본인의 약속을 찰떡같이 지킨 탓이었다.

청렴하면서 동시에 성실하기까지 하던 고지수는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차마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매력에 고래고래 큰 소리로 자랑을 하고 싶다가도 이내 마음이 바뀌어 평생 나만 보겠다 다짐하며 변덕을 부린 게 무려 수차례였다.

뻐근한 근육을 아프게 눌러 대던 승은 곧 조용한 하품과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만 보고 있던 좁은 시야가 파노라마 렌즈를 단 것처럼 넓게 확장됐다. 커진 화면 위로 고사양의 선명도가 프리미엄처럼 덧붙었다.

“…….”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눈앞엔 손에 들린 콘돔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듯 아찔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두워서 못 봤고, 또 자느라 몰랐던 방 안 상황이 가관이었다. 초토화된 협탁과 동서남북으로 흩어진 옷가지들…. 힘도 좋지. 지수의 손에서 미끄러졌던 베개는 유리로 된 장식장 바로 앞까지 날아가 있었다.

제가 정한 기준에서 벗어난 물건들이 날카로운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이럴 때를 위해 모니카가 알려 준 특별 호흡법이 있다는 거였다. 어차피 모든 건 마인드 컨트롤에 달려 있었다. 집중력을 끌어모아 명상하듯 숨소리를 정돈한 승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살폈다.

“…….”

거기엔 저와 손을 맞잡고 수풀에 불을 지른 공범자가 있었다. 승은 스트레칭하듯 살살 어깨를 돌리며 잠든 지수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어쩌면 이렇게 잘 자냐. 자기 집인 양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지수는 생체리듬이라는 게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무방비로 풀어진 얼굴에서 자그마한 평화가 읽혔다. 잘 익은 수제비를 얹어 놓은 듯 부드러운 한 쌍의 눈꺼풀을 보며 승은 조금 전 어지러운 방을 향해 냉랭하게 날렸던 제 감상평을 백팔십 도 뒤집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여기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야.’

어설프게 지옥을 흉내 중인 천국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이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노곤하게 자는 지수에게서는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니까 천국은 천국인데 현실성을 팍팍 곁들인 그런 천국인 거지?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뜬 두 사람이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며 지난 밤을 회상하는 건 작은 소품 하나까지 아름답게 포장된 영화에서나 통하는 법이었다.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온 승은 뚜벅뚜벅 욕실로 향했다. 둘 다 씻지도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잤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급하고 감격스러웠다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 꼴을 하고 그냥 잘 수가 있냐고…. 지난 밤을 회상하던 승은 양치질을 하다 말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긴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자 죽은 것처럼 자고 있던 지수가 침대에 앉은 채 협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어났어?”

“……어.”

“너 목소리 뭐야?”

“…내 목소리? 내 목소리가 왜?”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몰래 투명 마이크를 채워 주고 간 게 틀림없었다. 지수가 하는 말에만 웅웅웅 하는 에코 효과가 진한 음영처럼 따라붙었다. 엄청 깊게 자고 일어난 아침에는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건가. 원래도 듣기 좋은 목소리가 맑은 강바닥에 깔린 자갈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중저음의 보이스가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근데 이 타이밍에 네 잠긴 목소리가 너무 섹시해서 놀랐다고 하면 아무래도 욕을 먹겠지. 어디 욕만 먹으면 다행이게. 아마 제가 아는 지수라면 그 말을 듣자마자 민망함에 몸서리를 치며 입에 꾹 지퍼를 채워 버릴 터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

“너 언제 일어났어? 아까까지만 해도 자고 있더니.”

“아… 나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 너 씻는 소리 듣고 깼어.”

“씻는 소리?”

“으응, 누워 있는데 샤워기 물소리가 나길래….”

좋은 소리 듣는 걸 통 어색해하는 지수의 행동 패턴쯤이야 이제 익숙해지고도 남았다. 승은 고맙다는 말도 못 들을 칭찬을 날리는 대신 물건을 줍는 지수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말하자면 아주 가끔, 그것도 이른 아침에만 공개되는 귀한 한정판 같은 거잖아? 쇳소리가 나른하게 섞인 지수의 목소리를 계속 계속 듣고 싶었다.

“많이 시끄러웠어?”

“…아니, 괜찮았어.”

“…….”

“와아, 나 진짜… 너무 깊이 잤나 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지수는 주운 물건들을 크기별로 정렬 중이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비슷하게나마 따라 하려는 노력이 가상하면서 조금 귀여웠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거 그렇게 놓는 건 아닌데…. 턱 끝까지 차오른 멋대가리 없는 말은 혀를 깨물 기세로 참아 냈다.

다 늦게 내외라도 하듯 이불로 아랫도리를 꽁꽁 감싸고 있는 지수에게 승은 가져온 수건과 가운을 내밀었다.

“씻어.”

“…어, 고맙다.”

마지막으로 침대 아래에 앙증맞게 숨어 있던 손톱깎이까지 주운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수건을 재빠르게 펼쳐 허리 아래를 감쌌지만, 오랜 샤워로 정신이 개운해진 제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초정밀 카메라를 방불케 하는 예리한 시선이 결정적인 증거를 쫓듯 다리 사이로 향했다.

“…….”

잘빠진 지수의 허벅지 안쪽으로 흐르다 만 자국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었다. 음심을 무섭게 자극하는 선정적인 그림에 기껏 차분하게 가라앉혀 놓은 신경이 다시 곤두서려 했다.

고지수 쟤는 애가 소극적인 거야, 적극적인 거야? 내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방 안에 딸린 욕실로 향하는 지수의 뒷모습을 보며 승은 모니카가 제게 비밀스레 전수해 준 호흡법을 또 한 번 열심히 실천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없었으나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도움이 간절했다. 후두둑 타일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아, 근데 이것도 음심을 자극하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한 승은 지수가 본인 마음대로 세워 놓은 물건들을 다시 정렬했다. 무질서를 바로 잡는 마음이 다분히 기꺼웠다.

씻고 말끔하게 나온 지수와는 초콜릿 맛 단백질 셰이크를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배가 미친 듯이 고팠다. 당장 고기라도 거하게 구워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해야 할 것 같았는데 애석하게도 시간이 그리 여의치 않았다. 몰랐는데 천국에도 직업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더라고.

“누구야?”

“매니저 형.”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저번에 상지 다치는 바람에 찍다가 만 거 추가 촬영 스케줄 잡혀서 알려 준다고….”

은근슬쩍 넘겨다 본 휴대폰 액정에서는 반짝반짝 새 물건에서만 나는 광택이 흘렀다. 한동안 실시간으로 수신되는 메시지를 바라보던 지수가 프로틴 분말이 담긴 통을 집어 들었다. 뒤에 붙은 영양성분표를 살피는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처음 먹어본 단백질 셰이크의 맛이 생각보다 괜찮은 모양이었다.

“좀 이따 점심때 잠깐 회사 좀 가야겠다. 너는?”

“응?”

“넌 오늘 뭐 하냐고.”

“오늘… 오후까지 뭐 또 이거저거 해야 하는 스케줄이 있어.”

“이거저거? 그게 뭔데?”

“응, 뭐 여러 가지 있는데…. 별로 재미는 없고 힘만 쓰는… 그냥 생각 없이 꾸준히 해야 되는 그런 지루한 활동 같은 게 있어. 시즌 중에는 하는 거 거의 비슷비슷해. 비시즌엔 좀 다르고….”

“촬영은 뭐 재미로 하나…. 나도 마찬가지야.”

노란 껍질을 깐 지수는 하얀 바나나 속을 크게 베어 물었다. 실하게 생긴 바나나에서는 달큰한 냄새가 났다. 단맛이 전해지는 강한 향에 잠깐 잠잠해졌던 식욕이 다시 살아났다.

나갈 준비를 하며 버릇처럼 식탁을 닦던 승은 마음을 바꿔 제 몫으로 꺼내 놓은 바나나로 손을 뻗었다. 이 상태로 점심때까지 버텨야 할 테니 조금이라도 더 먹고 가는 게 여러모로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몇 시에 끝나는데?”

“네 시 반? 아마 늦어도 다섯 시에는 끝날걸. 늘 그랬거든.”

까마득하게 긴 일과를 미리 점쳐 보며 목 아래로 에너지원을 열심히 씹어 넘겼다. 점심을 많이 먹어야겠어. 그리 길지 않았던 수면 시간에 비하면 컨디션은 괜찮은 편이라는 게 놀라웠다.

“그럼 너 끝나고는 뭐 하는데?”

“끝나고? 몰라. 아무 계획 없는데.”

빈털터리가 된 바나나껍질 두 개를 신속하게 주워 들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벌레가 꼬이지 않게 하려면 이런 음식물 쓰레기는 특히 제때제때 처리해야 했다.

얼른 컵만 씻고 나가면 딱 알맞은 시간에 훈련장에 도착하지 않을까. 설거지를 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때까지도 동그란 컵 테두리를 가만가만 문지르고 있던 지수가 조금 뜸을 들이며 저를 불렀다.

“최승.”

“…어?”

유리컵 아래에는 차마 녹지 못한 가루들이 그대로 가라앉아 있었다. 점점이 박힌 작은 알갱이들을 보던 승은 천천히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같이 저녁 먹을래? 내가 살게.”

“…….”

“왜 그렇게 봐?”

열없이 자꾸 만지작대던 빈 컵을 제게 내민 지수에게서 약간의 설렘을 목격한 것 같다면 저만의 착각일까. 민첩하게 컵을 낚아챈 승은 조금 뻔뻔하게 말을 뱉었다.

“고지수, 너… 내가 그렇게 보고 싶을 것 같애?”

시종일관 온화하기만 하던 지수의 낯에 오늘 처음으로 금이 갔다. 엉망으로 구겨지는 표정이 끔찍하게 사랑스러웠다.

천국에서는 다들 이렇게 사는 거야? 달라진 공기에 현기증이 일 것 같았다.

지수는 태워 주겠다는 제 호의를 재차 거절했다. 회유를 위해 옆에 서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으나 승은 끝내 그 이상한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예전처럼 멀리 살았다면 내가 이런 말을 했겠냐고. 이제 같은 동네 주민이니 그걸 핑계로 가는 길에 떨어뜨려 주겠다는 건데 얘는 진짜 사람 속도 모르고…. 소소한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는 제 계획을 지수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자.”

“…뭔데?”

“그렇게 꼭 걸어서 가야겠다면 이거라도 신고 가라고.”

패딩 지퍼를 채우며 담담히 집을 나설 준비를 하는 지수에게 승은 하얀 양말 한 짝을 건넸다. 두꺼운 스포츠 양말은 발목 윗부분을 넉넉하게 덮을 정도로 목이 길었다. 기어이 혼자 걸어서 가겠다는 아집까지는 두고 본다 쳐도 이 날씨에 맨발을 운동화에 욱여넣으려는 것까지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양말도 없는 주제에 고집은 왜 이렇게 세대? 현관 앞에 철퍼덕 주저앉아 주섬주섬 양말을 꿰어 신는 지수를 승은 탐탁지 않게 바라봐야만 했다.

“훈련 끝나면 연락할게. 집에 있을 거야?”

“아마도?”

“…그래.”

“훈련 잘해라. 나 간다.”

단조롭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지수는 지체 없이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포옹도 한번 없이 그냥 이렇게 헤어지는 거야? 좁은 문이 닫히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워 냈다.

내리지 않은 승은 그대로 한 층을 더 내려갔다. 볕이 들지 않는 지하 주차장은 여전히 깜깜하고 스산하기만 했다.

* * *

딱히 서두르지 않고도 승은 여유 있게 훈련장에 도착했다. 태워 주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한 누구 덕분이었다. 다들 서울 밖으로 나들이라도 갔는지 복잡해서 곧잘 막히곤 하던 구간도 오늘은 비교적 널널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어제도 만나고 그제도 봤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새로울 건 전혀 없었다. 지루하고 고단한 체력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너 지금 노래 부를 힘이 있어?”

아직은 할 만한지 알 수 없는 팝송을 흥얼대는 로디에게 수겸이 괜히 딴지를 걸었다. 툭툭 수건을 털어 낸 수겸은 성의 없이 땀을 닦았다. 조심성 없고 무성의한 동작에서 더디게 흐르는 시간에 대한 불만이 읽혔다.

이제 남은 건 고작 세 경기. 리그가 끝물에 이르면 대개 팀 분위기에도 약간의 변화가 불기 마련이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결말을 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긴장의 고삐를 풀지 않는 훈련장 공기는 조금 차분하면서도 짐짓 비장했다.

힘들어하는 수겸 앞에서 로디는 망설임 없이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세차게 고갯짓을 하는 눈빛이 초롱초롱 맑기만 했다.

“이거, 이거 참 큰일이네…. 로디 얘가 지치질 않네.”

허리에 손을 올린 수겸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쌩쌩한 동료의 상태가 절망스러운 듯 내쉬는 콧김에 근심이 가득했다. 옆에서 구경 중이던 후배가 잽싸게 끼어들며 철부지 선배를 다독였다.

“형, 벌써 그러면 안 되죠. 아직 반도 안 지났잖아요.”

“반도 안 지났다고?”

“네.”

후배의 발언에 수겸이 두리번거리며 바쁘게 시계를 찾았다. 그 오버스러운 몸짓에 아무 생각 없이 숨을 고르던 승의 시선도 덩달아 시계가 걸린 훈련장 벽으로 향했다.

“저 시계, 저거… 고장 난 거 아니야?”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본 수겸이 짜증 내듯 발을 굴렀다. 헛된 소망에 가까운 터무니없는 의심이었다. 시계 따위 어떻게 되든 말든 로디는 여전히 콧노래 삼매경이었다.

“형, 그만 봐요. 계속 보면 시간 더 안 가는 거 알잖아요.”

“나도 그러고 싶지. 근데 자꾸 눈이 저리로 가는 걸 어떡해?”

수겸이 로디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는 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행동이었다. 지금처럼 자진해서 노래까지 부르며 쌩쌩함을 자랑하는 로디도 끝나는 시간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웃음이 사라지고 말수가 적어졌다.

“큰일 났다. 로디 쟤 오늘따라 컨디션이 엄청 좋아 보이네.”

“수겸아.”

“네?”

“너 로디한테 관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

수겸은 벽에 걸린 시계보다 로디의 상태를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디가 지치면? 모두가 지친다. 모두가 지치면? 훈련이 끝난다. 이번 시즌 수겸이 체득한 기적의 삼단논법이었다.

“형, 로디가 좀 귀엽잖아요.”

훈련 때는 다들 웬만하면 시계를 잘 안 봤다. 시간 가는 것도 잊을 정도로 행위에 강하게 몰입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시계를 챙겨 볼수록 훈련이 더 곤욕스럽다는 걸 다들 더할 나위 없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승이 넌 다리가 왜 그러냐.”

“잠을… 잠을 좀 잘못 잤나 봐요.”

수건을 털며 이쪽으로 다가오던 수겸의 눈길이 이번엔 제 허벅지를 뜯어 살피고 있었다. 승은 민망함을 애써 숨기며 테이프가 겹겹이 붙은 허벅지를 손으로 쓸었다. 뭉친 다리 근육이 움찔움찔 떨릴 때마다 어젯밤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잠? 잠을 뭐, 물구나무서서 잤어?”

물구나무는 안 섰지만 별짓을 다 하긴 했지. 어제 일은 앞으로 수천 번을 곱씹는대도 절대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심심했던 찰나에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수겸이 싱겁게 시시덕댔지만 아무렴 어떤가.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으므로 다 괜찮았고 뭐든 좋았다.

승은 훈련 시작 전 만약을 대비해 응급처치 격으로 붙여 놓은 두꺼운 테이프를 쓰다듬었다. 쥐가 난 것 같은 다리 근육이 불편하기는커녕 최선을 다했다는 징표 같아 조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현관문을 열었던 순간부터 꾀죄죄한 몰골로 눈을 뜬 오늘 아침까지…. 승은 마치 값비싼 피아노 건반을 눌러 보는 심정으로 꿈결 같은 기억을 되짚었다. 하얀 건반을 하나씩 누를 때마다 화려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로디 노래 잘하네. 너무 잘해. 아주 가수왕이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뱉어진 수겸의 감상평을 쫓아 승의 고개가 돌아갔다. 로디, 너 근데 정말 언제 지칠 거니. 에너자이저 같은 동료의 활동력이 까마득하게 느껴지기는 또 처음이었다.

지수는 저녁을 사 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승은 얻어먹을 밥보다 더 급하게 궁금한 게 있었다. 두 손 가득 무겁게 뭘 들고 가면 걔도 아마 못 말릴걸. 꾀 한 번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훈련을 마쳐 낸 승은 그런 생각으로 마트에 갔다.

우선 제일 만만한 휴지를 카트에 담았고, 그다음엔 각종 세제를 하나씩 골랐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필요할 생필품들을 담다 보니 가볍던 카트는 금방 무거워졌다. 기쁜 마음으로 계산을 끝마친 승은 곧바로 지수의 집으로 향했다.

“잠시만 기다리라니까 왜 굳이 들어와서 이 난리….”

“…….”

“…이게 다 뭐야?”

“집들이 선물.”

멋대로 쳐들어온 손님을 나무라려던 지수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양손 가득 무거운 짐을 든 승은 열린 현관문을 천연덕스럽게 비집고 들어갔다.

실은 나 네가 어떤 집에 새로 살게 됐는지가 너무 궁금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네 이사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랐었잖아.

운전석에 앉은 채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다 똑같이 생긴 작은 창문만 보였다. 그 너머에 과연 어떤 공간이 있을까. 처음 소식을 들었던 날부터 못 견디게 궁금했었는데 그때는 날이 날이었던 지라 나중에 초대해 달라는 가벼운 인사조차 못 했었다.

커다란 휴지 뭉치를 지수에게 넘긴 승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잠재우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 근데… 내 예상에 이런 풍경은 없었는데. 커다란 봉투를 세게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집 상태가 왜 이래?”

“뭐가.”

“이런 데서… 잠이 와?”

멀끔하고 넓은 거실이 널브러진 상자들로 어지러웠다. 짐을 푼 것도 안 푼 것도 아닌 혼란한 상황에 승은 눈을 껌뻑이며 지수를 바라봤다. 훤칠한 지수의 이목구비에 잠시 민망함이 스쳤다. 할 말을 고민하는 듯 조용히 콧등을 문지르던 지수가 곧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데서 잠이… 안 와.”

“…….”

“그래서 내가 어제 너 찾아간 거잖아. 이런 데서는 잠이 잘 안 와서.”

뻔뻔하게 씩 올라가는 잘생긴 입꼬리에 심장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반칙이었다. 드라마 찍고 오더니 얘가 이상한 순발력이 늘었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상황을 얼버무리는 모습이 우스워 뻘하게 실소가 터졌다.

“다른 덴 그래도 깔끔하고 여기만 이래.”

“믿어도 돼? 거실만 봤을 땐 그냥 마구간 같은데….”

“뭐? 싸우자고?”

“아니, 아니…. 집 구경시켜 달라고. 와, 전망 좋네.”

짐을 내려놓은 승이 크게 창이 난 쪽으로 다가갔다. 들뜸 현상도 없고 갈라진 곳도 없고…. 창틀에 덧칠된 빡빡한 실리콘 패킹에서는 새집 티가 여실히 났다. 이중창이 튼튼하게 설치된 너른 창문 너머로 해 저문 도로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방은 몇 개야?”

“두 개.”

묻는 말에 답을 하며 지수는 바닥에 멋대로 놓여 있던 큰 상자들을 일제히 벽 쪽으로 밀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정리에 크게 소질이 있지는 않구나. 나쁘게 말하면 조금 어수선하고, 좋게 말하면 모난 곳 없이 수더분한 본인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풍경이었다.

“햇볕은 잘 들어?”

“햇볕? 너무 잘 들어서 가끔 잠을 못 자겠어.”

서 있는 자세 그대로 어설프게 발만 움직여 지나다닐 길을 만들어 낸 지수와 함께 집을 한 바퀴 빙 둘러봤다. 제 공간에서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 혼란한 광경을 차분히 살펴보던 승은 곧 못 보던 물건 하나를 포착해 냈다.

“저건 뭐야?”

“아, 저거….”

창틀 아랫면과 연결된 좁은 턱에 각기 다르게 생긴 트로피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투명 아크릴로 만들어진 왼쪽 트로피는 전에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옆을 지키는 진회색의 원기둥은 아무래도 초면인 듯싶었다.

“적당한 선반 같은 게 없어서 일단 그냥 여기 뒀는데….”

“너 상 받았어?”

“응.”

쭈뼛거리며 설명을 잇던 지수의 표정이 일순 조금 의기양양하게 변한 것도 같았다. 이 눈빛은 뭐지. 오묘한 기대가 덧입혀진 듯한 눈동자를 마주 보던 승은 불쑥 자세를 낮췄다.

하늘녘가족독립영화제. 낯선 단어 조합에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궁금증이 가득 들어찬 시선이 바로 다음 줄로 향한 것도 잠시, 창틀 앞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있던 승은 곧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왜, 왜 이래.”

“고지수.”

놀라 뒷걸음질 치려던 지수의 손목을 잡아챈 승이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힘 조절에 대차게 실패한 포옹은 포옹이라기보다는 몸통 박치기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나 진짜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

그 말을 시작으로 팔불출 같은 칭찬 멘트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만하라며 소리를 지를 줄 알았던 지수는 웬일로 묵묵히 제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봐, 이것도 듣다 버릇하면 는다니까? 마음이 통했는지 쇄골과 정면으로 맞부딪힌 어깨뼈 아래가 찡하게 울려왔다.

끌어안고 있는 내내 지수는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이럴 때 방긋방긋 잘만 웃더니 왜? 세상 사람을 다 꾀어내리라 다짐한 듯 굴던 텔레비전 속의 고지수와 현실의 고지수는 여전히 조금 간극이 있는 편이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던 격한 포옹이 끝난 뒤에는 본격적으로 집을 구경했다. 거실만 이렇지 다른 곳들은 그래도 깔끔하다던 지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냉장고 있고 세탁기 있으면 됐지, 뭘 그래.”

아직 가구가 없어 짐도 풀지 못한 사람치고는 시원시원한 반응이었다. 바쁘긴 진짜 바빴구나. 침대도 고르지 못해 지금도 예전에 쓰던 그 손바닥만 한 침대에서 잔다는 지수를 보니 빡빡했을 촬영 일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급하게 거처는 옮겨 왔는데 찬찬히 공간을 채울 여유 같은 건 전혀 없었던 건지 집이 전체적으로 허전했다. 새 옷장을 기다리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지수의 옷들에게 승은 소리 없이 애도를 표했다.

“너 앞으로 한 십 년간은 진짜 옷 하나도 안 사도 되겠다.”

“산 건 별로 없어. 활동하면서 거의 다 어디서 받아 온 건데 뭐가 어쩌다가 이렇게 많아졌는지….”

본인이 봐도 뾰족한 답이 안 나오는지 무수히 많은 옷가지를 보며 지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2단으로 된 행거에 열 맞춰 좌르륵 걸려 있을 때도 많다 싶었는데 그런 거치대 없이 그냥 놓여 있으니 전보다 배로 많아 보였다. 흡사 조각상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캡 모자들을 보던 승이 삐딱하던 자세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네 아들, 아니, 네 아들이랑 손주까지 입고도 남겠다. 앞으로 계속 활동한다 치면 여기서 더 많아질 거잖아.”

“내 아들?”

유난스러운 제 감상평을 가만히 듣고 있던 지수가 조금 무표정한 얼굴로 제게 되물었다.

너 나 몰라? 나는 영원히 아들 같은 건 없을 건데. 단호함을 한입 크게 머금은 것 같은 말랑한 입술을 보던 승은 어색하게 말을 바꿨다.

“아니, 그러니까… 우리 아들?”

“뭐래, 진짜.”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지수는 한쪽 귀를 막으며 인상을 썼다. 문틀에 기대어 서 있던 승의 손끝이 톡톡 나무 몰딩을 두드렸다. 표현이 좀… 이상했나? 승은 있는 대로 질색을 표하며 방을 나서는 지수의 뒤를 쫓으며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태연하게 물었다.

“집에 먹을 거 없어?”

“먹을 거 뭐 어떤 거.”

“라면?”

“…라면 먹고 싶어?”

“응, 들어오니까 다시 나가기 귀찮기도 하고.”

제대로 있는 게 없는 집에 희한하게 라면은 있었는지 곧 냄비에 물 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땅한 식당을 찾으려면 또 좀 시간이 걸릴 테고…. 나가서 사람들 눈을 의식하며 불편하게 식사를 하느니 뭐가 됐든 둘밖에 없는 집에서 편하게 먹는 게 훨씬 나았다. 드라마를 통해 부쩍 높아진 지수의 유명세도 이럴 땐 걸림돌로 작용했다.

“라면 몇 개 있어? 많아?”

“왜?”

“나 두 개 먹고 싶어서.”

물 받은 냄비를 들고 인덕션으로 향하던 지수가 다시 싱크대로 방향을 틀었다. 물을 받는 지수의 자세가 영 엉거주춤했다. 이 집은 다 좋은데 싱크대가 왜 이렇게 낮냐. 허리 높이보다 약간 위에 달린 수도꼭지를 잠그는 지수의 등이 반쯤 굽어 있었다.

식탁을 겸하는 조리대 앞에 앉은 승은 라면을 끓이는 지수의 뒷모습을 음미하듯 감상했다. 물이 끓으며 칼칼한 조미료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아, 배고파. 그냥 있기가 심심해 옆에 굴러다니던 오피스텔 분양 전단지를 집었다. 커다랗게 펼쳐 양쪽 모서리가 맞닿도록 여러 번 겹쳐 접었더니 종이는 금세 두꺼워졌다.

이리저리 방향을 돌려가며 반듯하게 잘 접힌 걸 확인한 승은 그걸 정확히 식탁 가운데에 두었다. 딱지처럼 두툼해진 홍보지는 잠깐 냄비 받침대로 쓴대도 손색이 없었다.

“야, 미안. 그릇이… 없는 건 아니고 찾아보면 있긴 있을 건데… 그게 지금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어.”

“괜찮아. 캠핑 왔다고 생각할게.”

잠시 후 지수는 깨끗하게 씻은 머그잔 두 개와 나무젓가락을 들고 왔다. 연이어 들고 온 냄비는 라면을 세 개 끓이기에는 크기가 많이 작았다. 벽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면과 국물을 감당 중인 작은 냄비가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하긴 줄곧 혼자 살았으니 그동안은 라면 세 개를 한꺼번에 끓일 일이 없었겠지. 면이 너무 많아 지수가 덜어 먹는 용으로 꽂아 둔 또 한 쌍의 나무젓가락마저 케이크 중앙을 장식한 초처럼 안정감을 자랑했다.

“많이 먹어라.”

“엉.”

뭐가 하나씩 다 부족한 이 상황에서도 손님 대접만은 제대로 해 주는 건지 지수는 건져 올린 면을 듬뿍 담은 컵을 제게 먼저 건넸다. 머그잔은 일반 그릇과 비교해 좀 작은 감이 있긴 했으나 옆에 동그랗게 달린 손잡이 덕에 들고 먹기에는 아주 제격이었다.

“비싼 거 사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라면이 먹고 싶다고….”

“그럼 비싼 건 다음에 사 줘.”

“웃기지 마. 다음은 없어.”

후 입김을 불어 면을 식히던 승이 살짝 눈을 들어 지수를 살폈다. 진짜 없어? 방금 들은 야박한 말이 얼마나 진심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는데 미세하게 씰룩이는 입꼬리를 보니 그냥 장난인 것 같았다.

쟤는 좋으면서 꼭 저러더라고. 이상해, 아주…. 투덜대면서도 즐거움이 가시질 않았다. 면을 식히는 척 잠깐 웃음을 참아 낸 승은 곧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손이 큰 탓에 일반 쇠젓가락보다 살짝 짧은 나무젓가락이 이따금 이쑤시개처럼 느껴졌지만, 이런 건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고지수.”

“응?”

“…너 라면 왜 이렇게 잘 끓여?”

기대 없이 먹은 라면이 너무 맛있었다. 완벽한데? 그 좁은 냄비에서 세 개를 끓였는데도 면이 전혀 안 불어 있었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뱉은 제 물음을 지수는 조금 거들먹거리며 받아쳤다.

“이거 원래 돈 받고 파는 거야.”

가게 메뉴에 라면이 있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만둣가게 손자로서 만두를 예쁘게 잘 빚는 만큼 같이 파는 라면도 기가 막히게 끓일 거라는 생각을 왜 미처 못 했을까.

“아, 그래서 너 지금… 나 돈 내라는 말인 거지?”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은 승이 주머니를 더듬었다. 지갑을 찾아 부산을 떠는 연기가 못 봐주게 어설펐는지 지수는 작게 킬킬대며 젓가락을 든 손으로 잠깐 눈을 가렸다.

“오늘은 돈 안 받을 테니까 불기 전에 빨리 먹기나 해.”

“왜? 왜 오늘은 돈을 안 받아?”

“음… 계란이랑 파를 안 넣었으니까?”

“그럼…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양심 있는 주인장에게 꾸벅 감사 인사를 전한 승이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이렇게 맛있는 라면을 공짜로 주다니. 하늘 같은 은혜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비법이 뭔데?”

“라면 맛있게 끓이는 비법이라는 건 그냥… 물 조절이랑 불 조절이지.”

“…물 조절, 불 조절? 그렇게 뭉뚱그리지 말고 좀 자세히 말해 봐.”

“야, 자세히는 당연히 말 못 해 주지. 우리 가게 영업 비밀인데….”

조금 으스대며 조잘조잘 말하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박치기 같던 포옹 이후 약간 어색해하는 것 같던 지수는 이제야 완전히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지수가 확 편해졌음이 느껴지자 저도 말이 더 잘 나왔다.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참이나 라면을 먹었다.

“다 먹었어?”

“어, 나 배불러.”

“그래도 좀 더 먹지.”

“괜찮아. 그리고 아직 촬영이 하루 남아서… 막 마음껏 먹지를 못하겠다.”

배가 별로 안 고팠는지 아니면 애써 참는 건지 조금 일찍 젓가락을 놓은 지수는 팔짱을 낀 채 제가 먹는 걸 구경했다. 유심히 보고 있다가 더 건져 먹을 면이 없어질 때가 되자 친절하게 냉장고에서 물까지 꺼내 왔다. 극진한 손님 대접에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여태 조용하던 지수가 가만히 제 이름을 불러 왔다.

“최승.”

“어?”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너 오늘 아침에 운동 갔냐? 나 일어나기 전에.”

예리한 질문에 승은 좀 놀랐다. 정신없이 자고 있길래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건만…. 저를 보는 지수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했다. 너무 진지해서 마치 제가 몰래 훈련을 땡땡이치다 들켜 혼쭐이 나는 상황인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 안 갔어.”

“왜 안 갔어? 너 저번에는 나한테 아침마다 공복 유산소를 꼭 해야 한다고 뭐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냐?”

“…….”

“비행기에 있을 때 말고는 맨날 한다, 그런 말도 했었던 것 같은데…. 아니야?”

오늘 아침… 비행기가 아닌 데도 비행기에 타고 있는 것처럼 들뜬 기분이긴 했었지. 근데 그렇다고 그 이유 때문에 아침 운동을 생략한 건 아니었다.

차가운 냉수로 목을 축이며 승은 잠깐 할 말을 고민했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거 이참에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그냥 안 갔어. 내가 너랑 있고 싶어서.”

뭣도 모르고 처음 몸을 섞었던 날, 주인도 없는 집에 혼자 두고 나갔던 게 지나고 보니 되게 미안하더라고. 그래서였다. 그때 일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어서 승은 오늘 아침 공복 유산소를 생략했었다.

“근데 지금 미리 말할게. 오늘 같은 일은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혹시 다음에 눈 떴는데 내가 없어도 놀라지 말고,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하려고 했는데… 너 진짜 하나도 안 서운해 보이네.”

잠깐이었지만 애인보다 코치에 가까운 태도로 저를 나무라던 지수는 마침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원했던 답이 바로 이거였다는 듯이.

“이런 건 나보다 최승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더는 말 안 할게.”

“그러니까 네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그런 거잖아. 한마디로, ‘따로 또 같이’…? 아, 근데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공익 광고 문구 같은데… 하여튼 대충 이런 거 아니야? 같이 있을 때는 재밌게 놀고 떨어져 있을 때는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하자.”

“오, 나 그 말 딱 마음에 들어. 따로 또 같이.”

고지수 얘 아직 나를 잘 모르네. 그런 아마추어적인 마인드로 살아왔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고. 승은 격한 공감을 표함으로써 지수의 우려를 끊어 냈다.

“근데 그러면 가끔 섹스도 따로 해?”

한동안 흐뭇하게 제가 하는 말을 듣던 지수는 대뜸 이상한 질문을 했다. 홀로 품고 있던 걱정이 완전히 걷혔는지 낮은 목소리가 장난기로 가득했다. 근데 섹스를 따로 할 수도 있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갔다.

“그럴 수도… 있지.”

당연히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지수가 작게 입을 벌려 보였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살짝 옆으로 기울었던 고개가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속삭이듯 낮게 뱉어진 말이 통통 튀는 탁구공처럼 식탁 위를 구른 건 바로 그다음이었다.

“알았어. 그럼 나 오늘 네 생각 하면서 한 발 빼고 잘게.”

“…….”

말라붙은 상상력에 듬뿍 소나기가 내렸다. 뭘 해?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를 억지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미간이 좁아졌다. 난데없는 비가 척박한 땅을 촉촉이 적셨다.

“미안, 방금 나 너무 저질이었다.”

붕 뜬 침묵이 민망했는지 능글거리며 야한 농담을 하던 지수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 준비를 했다. 얕은 도랑에 소방 호스를 갖다 대 놓고 저 혼자 발을 빼고 나가? 넘치는 박력에 정신이 혼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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