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4권) (18/23)

우리의 제자리

사고 쳤다. 처음 몸을 섞었을 때도 하지 않았던 생각은 키스 후에 찾아왔다. 최근에 잠을 너무 못 잤더니 전두엽이 망가졌나.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객기가 발동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적막함이 흐르는 가운데 뾰족한 파스 냄새만이 차 안을 두드려 댔다. 지수는 태연한 척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갈게.”

“……어?”

얼떨떨한 되물음이 비겁한 목덜미를 붙잡았다. 돌아볼 용기가 없는 지수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내렸다. 아스팔트를 딛는 발이 휘청였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았지만 눈앞에 있는 익숙한 건물을 향해 일단은 걸었다.

그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건물주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두 해 가까이 방치해 둔 건물 이곳저곳을 뜯어고쳐 댔다. 딱 보니 조만간 내다 팔려고 그러는 모양이네. 여기 땅값이 좀 짭짤하게 올랐나 봐? 저번 주, 같이 촬영장에 가기 위해 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현욱은 연륜을 발휘해 그런 추측을 했다. 획이 해체된 글자 하나가 높은 사다리에 오른 인부의 손을 빌려 현관 위 외벽에 붙여지던 중이었다.

“아, 씨….”

딱 일주일 써 본 새 비밀번호가 손에 익었을 리 없었다. 버릇처럼 예전 비밀번호를 눌렀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지수가 미간을 짚었다. 뭐였지. 뭐였더라, 그게…. 힘들게 떠올리고 나서도 손가락이 삐끗해 마지막 숫자를 잘못 누르는 실수를 저질렀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정답을 맞힌 지수는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 아무 층계참에 섰다.

이제 여기 살지도 않는데 나 왜 이리로 들어왔냐.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돌진해서 들어온 피난처가 실은 막다른 코너였다. 복도 끝에 난 창문 뒤로 까만 차의 앞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다시 밖으로 나가는 건 둘 모두에게 생뚱맞은 그림이었다. 그게 말인데… 사실 내가 어, 저번 주에 이사를 갔거든? 근데 어, 너랑 키스하고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예전 집으로 들어와 버렸네, 하하. 끔찍한 상황은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들었다.

일단 쟤 가면, 그래, 쟤 가고 나면… 그때 나도 나가자. 그런 생각으로 벽에 기대섰다. 천장에 붙은 센서 등은 조그만 움직임도 아주 예민하게 감지했으므로 등에 힘을 주고 눈만 깜빡였다. 검은 차를 주시하며 허리를 곧추세울 때만 해도 기다림이 그렇게 힘들어질 줄은 몰랐었다.

왜? 걔가 너무 안 가더라고. 하도 안 가니 나중에는 차주의 건강에 걱정이 솟을 정도였다.

쟤가 죽었나 아니면 쓰러지기라도 했나. 내가 여기 이렇게 숨어 있을 게 아니라 다시 나가서 생사를 확인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진지하게 들 때쯤 차 헤드라이트에 불이 들어왔다.

정물처럼 동네 풍경을 지키던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지수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 * *

시작부터 어수선한 하루였다.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촬영장 분위기가 진짜 그랬다. 가자마자 키스 신을 찍는 건 아니었기에 아침에는 샌드위치를 챙겨 먹었다. 먹고 난 다음에는 곧바로 잇몸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격한 양치질을 했다.

차라리 이런 장면을 좀 일찍 찍었으면 더 좋았으려나. 그간 동고동락하며 막역해진 상지와 촬영 끝물에 이르러서야 간지러운 애정 신을 찍으려니 그건 그거대로 또 조금 어색했다.

여러모로 준비를 굳게 하고 들어간 키스 신 촬영은 예상과는 많이 다르게 흘러갔다. 늘 함께하는 스태프만으로도 지켜보는 눈동자가 수십 쌍인데 거기에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더해지니 현장은 장날을 맞은 시장이 따로 필요 없을 만큼 소란스러웠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연인과 실제로 키스를 한다면 잘되어 가던 연애도 진창에 처박히겠다 싶을 정도로 주변이 번잡했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냐. 상지 네가 초대했지.”

“우리 키스하는 거 소문났나? 그때 갈대밭에서 촬영할 때보다 사람 더 많은 것 같아. 그때도 진짜 많았는데….”

두 달 가까이 드라마를 감상한 시청자가 긴 여운을 느끼게 해야 하는 장면이었으므로 컷이 아주 상세하게 쪼개져 있었다. 손짓과 호흡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서 윤주의 세심한 지시가 뒤따랐다.

전신이 다 실리는 풀샷은 개중 수월한 편에 속했다.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 둘이서 마주 보고 대사를 뱉다가 자연스럽게 입술을 겹치기만 하면 됐으니까.

풀샷 촬영을 끝내고 바스트 샷을 찍을 차례가 되자 방해 요소는 급격히 늘어났다. 정수리 바로 위에는 털 달린 붐 마이크가 말풍선처럼 둥둥 떠 있었으며 얼굴 근처에 비스듬하게 세워진 커다란 반사판은 너무 밝아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환한 빛에 지지 않으려 눈꺼풀에 힘을 준 지수는 두 손으로 상지의 볼을 붙들었다. 제가 먼저 입술을 부딪치며 키스를 리드해야 했는데 키 차이 때문에 각도가 자꾸 어긋났다.

“컷. 다시, 다시. 아까 풀샷으로 찍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찍으니까 상지 고개가 너무 우물에 달린 두레박처럼 확 딸려 올라가네.”

윤주는 무시무시하고도 찰진 비유로 잘 잡혀 가던 핑크빛 무드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몇십 명의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인 채 애틋한 감정을 나누던 두 사람은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며 대책을 강구했다.

“그럼 아예 제가 완전 느리게 다가갈까요?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면 제가 까치발을 좀 들어도 되고요.”

아래에 있는 상지의 턱이 직각으로 꺾이는 걸 보다 못한 윤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지수가 다리를 조금만 벌리고 서 볼래?”

“…….”

“조금만, 조금만 더. 어, 이제 좋다.”

시키는 대로 어깨너비보다 더 넓게 다리를 벌리고 섰다. 눈높이가 조금 낮아지니 그냥 서 있을 때보다 고개가 내려가는 각도가 한결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긴 대사를 실수 없이 뱉고 부드럽게 키스만 하면 되는데 애달픈 표정을 하고 있던 상지의 눈빛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아, 죄송해요. 참으려고 했는데 저 진짜 너무 웃겨서….”

“내가?”

“야, 고지수. 너 하지 마, 진짜.”

입술이 닿기 직전 상지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흐느끼듯 웃는 모습에 지수는 넓게 벌리고 섰던 다리 간격을 더 크게 벌렸다.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빚어낸 강렬한 해프닝은 결국 소품 차를 뒤져 상지의 발 받침대로 쓸 만한 물건을 찾아낸 것으로 일단락이 됐다. 다리를 벌린 남자와 입을 맞추는 상황이 못 견디게 웃겼는지 상지는 이후로도 한 번씩 뜬금없는 타이밍에 뻘한 폭소를 터뜨렸다.

처음의 어색함은 앵글을 여러 번 바꾸어 찍는 동안 서서히 사라져 갔다. 발 받침대에 올라선 상지는 평소처럼 뛰어난 몰입력을 보여 줬고, 어느 순간부터 둘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하게 보던 로맨틱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컷, 오케이.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할게요.”

누가 봐도 키스다운 키스였다. 키스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듯 어디 한 곳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키스였으나 그게 다였다. 키스 신은 키스가 아니었다.

설렘이나 두근거림? 그런 감정은 약간도 들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어떻게든 그럴듯한 그림을 뽑아내려는 고군분투에는 철저히 동작만 있고 감상이 없었다. 그건 연기에 대한 집중이나 몰입의 여부와는 관계없는 무언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상지와의 키스 신 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내며 지수는 어제 다른 이와 했던 엉터리 입맞춤을 생각했다. 키스…. 과연 그걸 키스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키스보다는 일방적인 인공호흡 쪽에 가까울 것 같았다.

걔는 그냥 가만히 있고 나 혼자만 아등바등 애를 썼었지.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수상 안전요원이 물을 잔뜩 먹고 쓰러진 사람을 살려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처럼.

저도 처음이었으니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거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너… 키스는 진짜 못하더라. 요령이라고는 전혀 없이 아랫니 뒤에 바짝 붙어 보초를 서던 딱딱한 혀가 또렷한 감촉으로 남아 있었다.

여태 큰 짐으로 남아 있던 과제를 해결하고 나니 드디어 숨통이 트였다. 모니터링을 마친 윤주는 저와 상지의 연기에 대단히 만족한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그림이 나왔다며 들뜬 윤주를 보니 남아 있던 약간의 불안감마저 깨끗하게 가셨다.

춥고 복잡한 밖에서 집중하느라 에너지가 바닥난 몸이 먹을 걸 달라고 야단이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지수는 두툼하게 잘 말린 김밥을 아작냈다.

세트장에 도착한 후엔 바로 가글을 하고 의상부터 갈아입었다. 새로 받은 옷을 입다가 버릇처럼 거울을 봤더니 입술이 좀 튼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온 지수는 살짝 부르튼 입술 위에 미끄덩한 립밤을 듬뿍 얹었다.

“지수야, 너 토요일 저녁에 시간 돼? 이번 주 주말.”

“왜?”

“몰라? 그냥 실장님이 너한테 물어보라는데…. 할 말 있으신 거 아냐?”

“얼마 전에 회사에서 만났을 땐 별말 없으시던데….”

“너랑 밖에서 따로 오붓하게 보고 싶으신가 보지, 뭐. 혹시라도 너 개인 약속 있을까 봐 나한테 미리 물으신 것 같은데.”

새벽까지 이어질 스케줄을 버티려는 방편으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몸 안에 때려 붓고 있을 때였다. 출출하다며 아까 같이 먹다 남은 김밥을 마저 먹고 있던 현욱이 주말 스케줄을 물었다.

“토요일? 모레를 말하는 거면… 나 아마 집에서 스무 시간 정도 수면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스케줄이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럼 남은 네 시간 동안 실장님이랑 밥 먹으면 되겠다.”

솔직히 아무 생각도 없었다. 밥을 사 주면 감사하게 먹는 거고, 안 사 주면 그냥 집에서 뭐라도 알아서 먹는 거고. 석 달가량 밤낮없이 매진했던 촬영은 다가오는 새벽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을 거였다. 근시일 내로 전 출연자와 스태프가 한자리에 모이는 종방연이 있을 예정이니 아쉬움의 눈물은 그때로 미루고 우선은 좀 자고 싶었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아마 실장님… 지수 너한테 재계약 이야기하시지 않을까 싶다.”

“재계약?”

“아니, 저번에 그러니까 너 없을 때, 실장님이 나한테 그런 말씀 지나가듯이 한 번 하시더라고. 솔직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 회사야 당연히 너랑 계약 연장하고 싶을 테니까….”

귀한 소식을 귀띔하듯 현욱이 목소리를 낮췄다. 지수는 얼음만 남은 컵 안을 빨대로 휘저었다. 녹아서 크기가 반으로 줄어든 얼음이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근데 나 계약 기간 끝나려면 아직 열 달 넘게 남았는데?”

“다 미리미리 작업하는 거지. 이 바닥 비즈니스가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

딱히 할 말이 없었으므로 지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쨌든 당장 결정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었으니 서두를 건 없었다.

“알겠다고 한다?”

“응, 이러나저러나 난 다 괜찮아.”

밥 먹기 전에 숍에 가서 머리나 잘라야지. 목덜미를 답답하게 덮는 머리카락들만 다 쳐 내도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도 꽁꽁 조여 가끔 두통을 유발하기까지 했던 망건도 이제 몇 시간 후면 안녕이었다.

“그리고 선정이도 너 찾는다.”

“누나가?”

“응, 너 왜 연락이 안 되냐는데?”

“누나가 날 왜?”

오늘을 끝으로 당분간은 쓸 일이 없겠지. 얼른 미용실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 촘촘한 그물망을 더듬던 지수의 시선이 다시 현욱에게로 향했다.

“너한테 전해 달래. 근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뭐가?”

“까마귀 탐정이… 너 찾으러 왔다 갔다는데?”

“…….”

까마귀 탐정? 그게 뭘까. 철 지난 만화영화 제목이라도 들은 양 무덤덤하게 이마를 긁던 지수의 기억 사이로 어떤 장면 하나가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비를 뚫으며 꽃다발을 사러 갔다가 어깨가 흠뻑 젖었던 저와 작품이 성황리에 무대에 올라 기뻐하던 선정의 목소리, 그리고 서로 짠 것처럼 드레스 코스가 같던 두 사람의 옷차림은 모두 같은 밤에 소속된 그림이었다.

“형, 우리 촬영 새벽에 끝나?”

“왜?”

번쩍 일어난 지수는 입고 온 패딩을 찾아 나섰다. 휴대폰을 어디 뒀더라. 자꾸 꺼지길래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였다. 옷더미 틈에서 휴대폰과 충전기를 건져 낸 지수가 콘센트를 향해 다가갔다.

“뭐 좀 사러 가게.”

날 찾아서 거기까지 갔어? 멀쩡한 새 휴대폰이 필요했다.

* * *

마지막 촬영이라고 다들 알게 모르게 긴장이 풀렸던 걸까. 그날 밤에는 예기치 못한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상지는?”

“앉아, 앉아. 너 나가지 마. 밖에 분위기 진짜 안 좋아.”

차에 다녀온다는 핑계로 잠시 바깥 동태를 살피고 온 현욱이 손을 내저었다. 급하게 일어서려던 지수는 다시 앉아 그대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벌어진 손 틈으로 채 수습하지 못한 근심이 모래알처럼 흘러나왔다.

“시간이 늦어서 일단 근처 응급실 갔대. 나는 출혈이 없어서 다행인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는 그게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했나 봐. 그래서… 지금 거기 있으면서 이것저것 검사하고 있대.”

“…….”

“큰일 아니겠지. 어쨌든 나갈 때도 자기 발로 걸어서 나갔잖아. 거기 조명 떨어진 곳 주위에 유리가 너무 많아서 안에서는 아직도 그거 치우고 있더라.”

스태프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상지의 소식을 듣고 온 현욱이 피곤한 듯 눈을 비볐다. 천장에 붙어 있던 조명이 불시에 낙하하며 상지의 어깨를 스친 게 벌써 두 시간이 더 지난 일이었다. 어깨에 맞았으니 망정이지 만에 하나 머리나 얼굴에 맞았으면 진짜 어쩔 뻔했냐고. 아슬아슬하게 대형 사고를 면한 조명은 쾅 소리와 함께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세트장 바깥에서 머무르고 있던 지수는 깨지는 소리만 들었었다. 카메라 앞에서 모니터를 하던 윤주가 헤드폰을 집어 던졌다. 보던 대본을 팽개친 지수도 급하게 달려가는 윤주의 뒤를 쫓았다. 쪼그려 앉은 상지는 어깨를 감싼 채 앓고 있었다.

“병원이 어딘데? 여기서 멀어?”

“몰라, 나도.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어.”

상황 파악을 끝낸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윤주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상지는 놀랍게도 웃고 있었다. 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말도 안 되는 프로의식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되려 당황을 표했다.

촬영은 그대로 올 스탑됐다. 바닥에는 유리가 가득했고 윤주를 포함한 스태프들의 끈질긴 권유에 상지는 마지못해 병원으로 향했다.

“근데 아까 조명 감독님은 왜 그렇게 화를 내신 거야? 지금까지 늘 조용조용 말씀 없으신 것만 보다가 아주 깜짝 놀랐다, 야.”

“…….”

“가끔 같이 담배 피우면서 이야기도 길게 하고 했었는데 그때마다 난 되게 젠틀하시다고 생각했었거든? 촬영 길어지면 다들 좀 까칠해져서 그러기가 쉽지가 않잖아.”

“……나도 모르지.”

한동안 촬영장에 싸하게 흐르던 정적은 곧 일부 사람들의 높아진 언성으로 대체됐다. 사고의 책임을 따지는 목소리들이 서로를 할퀴어 댔다. 시베리아 벌판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에서 다들 말없이 현장 정비에만 매진했다. 바닥에서는 쓸어도 쓸어도 깨진 유리 조각이 계속 나왔다.

“그냥 오늘 촬영은 여기서 끝날 것 같다. 병원에서 괜찮다고 하면 내일이나 모레나… 그것도 아니면 다음 주에 다시 찍거나 하겠지. 오늘은… 내가 봤을 땐 글렀다, 글렀어.”

집에 갈 준비를 하는 현욱 옆에서 지수는 그래도 윤주의 지시를 기다렸다. 상황이 이토록 어지럽게 됐으니 저라도 윤주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작품의 총책임자로서 상지만큼이나 낯이 하얗게 질렸던 윤주는 시간이 꽤 오래 흐른 후에야 대기실에 빼꼼 얼굴을 비췄다.

“지수야, 상지 괜찮대.”

“진짜요?”

“응, 어깨뼈 이런 데는 다 괜찮고 병원 가서 보니까 튄 유리에 발목이 좀 긁혔다더라. 십년감수했다, 진짜. 어차피 오늘은 더 안 찍을 거니까 집에 가서 쉬라고 했고, 남은 장면은… 미안해. 내가 다음 주 중으로 다시 스케줄 공지해 줄게.”

“네.”

“급한 내 성격 같아서는 몇 장면 남지도 않은 거 얼른 찍고 치워 버리고 싶은데, 이게 사람들 한 명 한 명 스케줄 다 조율하려면 시간이 좀 걸려서… 아무튼 네가 이해 좀 해 주라.”

“저는 진짜 괜찮습니다.”

촬영이 일주일 밀린 것쯤이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고대하고 있던 머리 자르기를 좀 더 미뤄야 한다는 불편함만 있을 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키스 신부터 상지의 사고까지, 종일 머리 위에 얹고 있던 긴장이 녹으며 잠이 쏟아졌다. 찍을 날이 하루 더 남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찝찝했으나 일단은 잤다.

대여섯 시간쯤 자고 일어나서는 휴대전화를 사러 갔다. 번호도 바꾸고 만약 또 떨어뜨릴 때를 대비해 비싼 케이스도 사서 끼웠다. 박살 난 액정을 통해 겨우 글자들을 보고 살다가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화면을 보니 수술을 한 것처럼 눈이 편안했다.

제일 먼저 연옥의 휴대전화 번호와 가게 번호를 저장했고, 다음으로는 상지에게 진짜 괜찮은 게 맞는지 안부를 물었으며, 이후엔 현욱에게 저의 새 번호를 알렸다.

이제 됐나. 급한 일들은 해치웠고 나머지는 차근차근히 하면 되겠지 싶었지만, 사실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