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23)

은혜 같은 물고기

11시 59분 59초에서 다음 날 자정으로 넘어가는 순간, 현장에 있던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들은 다 함께 모여 기도를 했다.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소원을 불어넣는 사람들 옆에서 지수 역시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무엇을 빌어야 이루어질까 같은 고민은 하지 않았다.

‘우리 드라마 잘되게 해 주세요.’

소원을 비는 목소리가 더없이 진중했다. 입술 앞에 두 손바닥을 모으고 있던 지수가 눈을 떴다. 감았던 눈꺼풀을 사뿐히 들어 올렸을 뿐인데 시간을 세는 큰 단위가 달라져 있었다. 1월 1일, 새해 첫날이었다.

새해를 촬영장에서 맞는 건 데뷔 이래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작년 이날에는 내가 뭘 했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잘 떠오르지 않는 걸로 보아 아마도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았다.

촬영장에만 붙어 있다 보니 연말 분위기를 체감하며 괜한 상념에 젖을 여유도 없었다. 굉장한 장점이었다. 일이 없으면 골머리를 싸매야 했고, 반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건 귀한 축복으로 통하는 직종이었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녹초가 되고 있었으나 촬영장 특유의 떠들썩한 분위기에는 도통 싫증이 나지 않았다.

천장이 높은 실내 세트장 가운데에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가 있었다. 아무리 오늘도 촬영 중이라지만… 우리 그래도 케이크 같은 건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카메라 동선을 체크하던 윤주가 조심스레 뱉은 말에 연출부 스태프는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앵글을 조정하던 윤주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며 나가려는 스태프를 붙잡아 세웠다.

윤주는 이건 방송국에서 제공하는 법인카드가 아니라 제 개인카드고, 비록 제가 월급으로 먹고사는 평범한 회사원일지언정 오늘만은 사용 한도에 상한선을 두지 않을 테니 뭐든 사 오라는 기분 좋은 말을 선물처럼 덧붙였다.

두꺼운 목도리로 무장하듯 얼굴을 가리고 나간 스태프는 얼마 후 네모난 상자와 함께 돌아왔다.

“저희 인원수 생각해서 뭘 좀 많이 사 오려고 했는데요….”

꽁꽁 여민 외투를 벗던 스태프가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아서…. 할 수 없이 별관 뒷문 근처에 빵집 하나 있길래 케익만….”

고해성사 같은 설명이 튀어나왔다. 말인즉슨,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으나 다른 가게들은 다 문을 닫고 어렵게 찾은 빵집에서 케이크만 겨우 구해 왔다는 거였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크지도 않은 케이크 하나를 나눠 먹어야 할 판국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뭐라도 있는 게 월등히 나았다. 짧은 휴식 시간을 맞아 각자 할 일에 매진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테이블 주위로 모여들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런 건 경건하게 소원을 비는 용도야. 영양 섭취가 주된 목적이 아니라니까?”

민망해서 어물쩍대는 스태프를 달랜 윤주가 포장된 초를 뜯었다.

“PD님, 초 몇 개 꽂을까요?”

“음… 긴 거 세 개?”

“오, 그럼 우리… 막방 시청률 30%?”

“그렇지. 사람이 꿈을 크게 가져야지.”

잔챙이처럼 짧은 초는 미련 없이 옆으로 치운 스태프가 길쭉한 초 세 개를 푹신한 스펀지 위에 꽂아 넣었다. 간단한 기도 후엔 다 같이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당분을 섭취하니 몰려오던 잠이 확 달아났다. 케이크를 동내며 나름대로 신년맞이 구색을 갖추고 있었더니 구석 의자에 앉아 있던 촬영감독이 들뜬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이번 TSC 연기 대상은 이우찬이 받았나 본데?”

“진짜요? 지금 발표 났대요?”

자정이 넘어서까지 진행 중인 시상식에서는 대상을 받은 배우가 소감을 발표하고 있었다. 3개월 전 종영한 주말 드라마에서 유능한 의사 역할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배우였다.

“받을 만하죠. 그게 30부작이었나?”

“그 드라마가 그렇게 길었어요?”

“그거 엄청 오래 찍었어. 실제 촬영한 거에 준비 기간까지 더하면 더 길어지지. 심지어 태국 로케도 있었잖아.”

로맨스 비중이 거의 없는 의학 드라마였다. 전문 용어가 마구잡이로 섞인 긴 독백 같은 대사가 회차마다 평균 네다섯 번은 있었다고 했다. 처음엔 역할 때문에 체중을 감량했는데 찍다 보니 저절로 살이 빠지더라는 배우의 후일담 섞인 인터뷰가 신들린 연기와 함께 유명세를 치렀었다.

“진짜 받을 만했지. 이우찬 그 드라마 찍는다고 살도 완전 많이 뺐잖아요.”

대망의 연기 대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잠시 분위기가 술렁였다. 웅성대는 스태프들 틈에서 덩달아 시상식 상황을 살피던 윤주가 어느 순간 결심이라도 한 듯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내년에는 우리도 저 자리에 있는 겁니다, 아시겠죠?”

멋진 출사표인 동시에 훌륭한 동기부여였다. 바야흐로 첫 방송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 * *

“이러다 다음 주에는 6% 넘는 거 아니야?”

“PD님, 이건 제 생각인데… 넘을 것 같아요. 느낌이 왔어요.”

“진짜? 정말 믿어도 돼?”

“네, 제가 원래 촉이 좋아요.”

확신에 찬 상지의 눈을 본 윤주가 와락 웃음을 터뜨렸다. 잘되는 현장은 이래서 분위기가 좋다는 건가. 윤주와 조명 감독을 시작으로 연이어 입꼬리를 올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상승세를 예고하는 상지의 발언이 마치 대단한 농담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즐겁기 그지없는 분위기였으므로 지수 역시 크게 웃었다.

드라마는 어제부로 4화 방영을 끝냈다. 아직 전체 분량의 사 분의 일이 송출되었을 뿐이었으나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조짐이 심상치가 않았다. 매화 방송이 끝날 때마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반응이 제작팀에게도 즉각적으로 와닿았다.

“CG 팀에서 너무 잘해 주시는 것 같아요. 효과가 되게 자연스럽고 재밌어서… 기사 댓글 같은 거 보면 CG 이야기 엄청 많더라고요.”

“지수가 겸손하네. 자기가 잘해서 그랬다는 생각은 안 들고?”

“아이, 감독님 저는 뭐…. 상지, 상지가 잘했죠.”

“진짜? 내가 잘했다고?”

귀엽게 눈을 흘긴 상지가 작게 웃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외부의 호평에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웃는 걸로 대화가 마무리됐다. 신기한 상황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는 6% 콜.”

“제 촉을 믿어 주세요.”

“그 촉 그대로 이어받아서 딱 6%만.”

거침없이 상승곡선을 그리는 시청률 그래프를 보던 윤주가 펜을 들어 굵게 숫자를 적었다. 6%. 모두의 희망 사항이 빈칸에 큼직하게 들어찼다. 진짜 될까. 지금 추세라면 될 것 같기도 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높아지는 수치를 감상하던 지수의 눈이 이내 그래프의 시작점으로 돌아갔다.

 3.6%   4.6%

 1화    2화

진짜 촉이 좋은 건 상지가 아니라 걔 아닐까. 1화는 3.5%, 2화는 4.5%. 내기를 빌미로 승이 제게 장담했던 숫자에서 정확히 0.1을 더한 수치가 실제 시청률로 돌아왔다.

작두 탔어? 아니면 진짜 미래 사람이기라도 한 거야?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걸 이렇게 딱 맞추냐고. 웬만큼 용한 점쟁이를 찾아간대도 이렇게까지 근소한 결괏값을 예언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말없이 그래프를 들여다보던 지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볼만한 드라마 나왔대.”

“에이, 그건 좀 오바다. 연기 대상에서 상 쓸었다는 주말 드라마 그거도 되게 퀄리티 높지 않았나? 나 그 드라마 재밌다는 소리 진짜 많이 들었는데.”

후끈한 반응은 현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세간의 관심이 뜨거워지며 매니저인 현욱도 하루하루가 싱글벙글 모드였다.

“아, 고지수 진짜….”

“왜?”

“그냥 좀 들어, 어? 오바면 어때. 듣고 기분 좋으면 됐지.”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요즘 현욱은 담배도 많이 안 피우는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크게 뿌듯함을 느끼며 지수는 흐트러진 망건을 바르게 정리했다.

“아니,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너는 진짜… 됐다. 이 물러터진 놈.”

같이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향할 때면 옆자리에 앉은 현욱에게서 콧노래가 배경음악처럼 따라붙었다. 이렇게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인데 내가 괄목할 성과를 못 내는 바람에 그동안은 마음껏 좋아하는 티도 못 내고…. 아직 얼떨떨한 저를 대신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현욱이 고마웠다.

“어제 회사 갔다가 실장님 마주쳤는데 실장님이 드라마 너무 재밌다고 너한테 전해 달래.”

“실장님도 보신다고? 이거 보실 시간이 있으셔?”

“당연하지. 자기는 미쁜 가람 이거 딱 시놉시스 보자마자 잘될 줄 알고 있었다고 지나가는 나를 붙잡고 몇 번이나 얘기를 하는데… 아휴, 내가 진짜 귀가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그건 방송국 관계자들을 모시고 함께 밥을 먹었던 날 저에게도 했던 말이었다. 단순히 제게 어떤 자극을 주기 위해 일부러 과장해서 하는 말인 줄로만 여겼었는데 그게 진심이었던 걸까. 여우 같은 아저씨들과 억지로 술잔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벅차 건주의 발화 의도를 기민하게 솎아 낼 분별력이 없었다.

“형, 근데 반응이 세니까 좀 무서워.”

“욕먹을까 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당분간 집에만 있으려고. 괜히 쏘다니다가 이상한 사건 같은 데 연루되기라도 할까 봐.”

여럿이서 즐기는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음주는 각종 사고 발생률을 높이는 주범이니까. 운전면허가 없는 것도 다행이었다. 애당초 핸들을 잡을 자격이 없으니 누군가를 칠 일도 없었다. 일이 잘 풀릴수록 안팎으로 몸가짐을 더욱 조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이 늘어갔다.

“지수 너 저번에 찍었던 화보도 요즘 다시 좀 난리인 것 같더라.”

아직 있지도 않은 각종 사건 사고 단속에 힘을 쏟는 저와 반대로 현욱은 드라마의 인기를 제대로 즐기며 인터넷 반응을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혹여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일희일비하게 될까 봐 되도록 인터넷을 멀리하는 중인 지수는 현욱을 통해 대중의 반응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아, 그거는 진짜 좀 더 난리 났으면 좋겠다. 나 그날 끝나고 형이랑 스튜디오 앞에서 먹었던 삼겹살 맛이 아직도 안 잊혀져.”

“그 집이… 그렇게 맛있었어? 나는 그냥 그랬는데….”

평범한 식당을 향한 과한 상찬에 현욱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다시 먹으면 당연히 그 맛이 안 나겠지. 근데 쫄쫄 굶고 가서 그랬는지 그날은 고급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맛이 났었다. 오래 전에 먹은 한 끼 식사가 너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드라마 관련 기사도 엄청 떠.”

“그중에 반은 별 내용이랄 것도 없는 인터넷 기사잖아.”

“봐, 오늘도 떴네. 고지수 윤상지, 냉동된 연애 세포 후드려 패는 러블리 엔딩으로….”

민망한 동공이 거울 위를 어지럽게 헤맸다. 아니, 저 형은 혼자 눈으로 보면 되지 왜 그걸 소리 내서 읽기까지….

진짜 기사 제목은 맞는지 의심되는 과한 단어들의 조합에 귓바퀴가 간지러웠다. 멀쩡한 옷고름을 다시 매며 딴청을 피우는데 희희낙락 기사를 낭독하던 현욱이 청천벽력 같은 운을 띄웠다.

“지수야.”

“응?”

“너 근데… 이 사진 뭐야?”

채 매듭지어지지 못한 고름이 후드득 아래로 풀어졌다. 가슴팍에 달린 끈 두 개를 너풀대며 지수는 한달음에 현욱에게로 다가갔다. 뭔데 그래? 무슨 사진? 각종 사회적 물의에 휘말리는 걸 피하고자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겠다고 다짐한 게 바로 몇 분 전이거늘 대체 무슨 사진이….

불길해진 지수는 불쑥 고개부터 들이밀었다.

“너 맞지?”

픽셀이 처참하게 깨진 사진 속에는 총 두 명의 인물이 담겨있었다. 일단 한 명은 저였다. 그건 확실했다.

“……어.”

취침 중인 남자의 정수리 꼭대기에 공처럼 동그란 상투가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제가 아닐 리가 없었다. 안대로 눈을 가렸었고, 사진에서는 안 보이지만 원활한 숙면을 위해 주도면밀하게 이어플러그까지 꼈었지.

“뭐야. 너 언제 찍힌 거야?”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세상 모르게 허물어져 자는 고지수. 제가 맞았다.

“…옆에는 누군데?”

삐죽 솟은 상투를 보던 지수의 시선이 천천히 왼쪽으로 옮겨갔다. 처참한 화질 속에서는 교묘하게 눈코입이 가려진 이가 낮게 쳐진 난간 앞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자느라 구겨진 저와 대비되는 꼿꼿한 자세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조잡한 화질과 교묘한 앵글의 합공으로 가려진 귀티 나는 이목구비가 저에게만은 선명히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야, 너 눈에서 불 나오겠다. 까만 새벽, 홀로 시청률을 낚고 있는 승이었다.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파파라치 샷의 최초 출처는 ‘바다와 나그네들’이라는 어느 인터넷 낚시 카페였다. 문제의 사진은 낚시터에 대한 정보 공유를 목적으로 작성된 한 후기 글 하단에 첨부되어 있었다.

[ 바다나그네 | 조황정보 ] 남천 현성낚싯골 후기~~~^^

               작성자 : 붕어도사

수리수리 붕어도사입니다~~~^^ 쪼까 올만이죠? 하핫 거의 한달만에 갔다왔네요 겨울이니 노지는 추워서~ 이번에는 따땃한 하우스로~~^^ 마눌님 주무시는 사이에 몰래 나온 거라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 온건 비밀임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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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어료는 만냥~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적당한 금액~~ 옥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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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고수 횐님들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확실히 하우스는 중앙이 고기가 잘 잡히더라는~ ^^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중앙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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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사진이 마니 어둡죠??? 아무래도 새벽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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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추워서 ㅋ 자판기에서 커피도 한잔~ 맛은 so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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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설비 그런 건 없습니다만 ㅎ,, 저는 여기 종종 옵니다~ 나이 먹을수록 가까운 데가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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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그네분들 보시라고~~~^^ 어두워도 구석구석 찍어봤네용~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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