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23)

끌어당김의 법칙

만에 하나 좀비에게 쫓기던 중 우연한 기회로 깨끗한 물이 나오는 샤워실을 발견하면 이렇게 씻게 되지 않을까. 그만큼 정확하고 신속한 샤워였다. 펄펄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물이 풍성한 샴푸 거품을 개운하게 앗아갔다.

자고, 먹고, 그리고 씻고…. 단순한 세 가지 욕구가 골고루 충족되자 드디어 좀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닷새 만에 겪는 개운함에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비좁고 보잘것없어도 집은 집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대충 물기만 닦아 낸 지수는 완전히 마르지 않은 몸에 억지로 옷가지를 걸쳤다. 아, 찝찝해. 부드러운 옷감이 아직 촉촉한 살갗에 철썩 달라붙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꼼꼼한 마무리를 할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았다. 마음이 급했다. 수건을 챙긴 지수는 벌컥 문고리를 돌렸다.

“야, 많이 기다….”

기다리게 하는 게 미안해 꾀죄죄한 도망자까지 자처하며 급하게 씻었건만 정작 욕실 밖에서는 뜻밖의 상황이 진행 중이었다. 머리카락을 털던 지수의 목소리가 혀 밑으로 숨어들었다. 젖어서 무거워진 수건을 의자 등받이에 내려놓은 지수의 발걸음이 살금살금 행거 쪽으로 향했다.

“…….”

배꼽 위로 손을 단정하게 겹쳐 모은 승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되게 얌전하게 자네. 감긴 눈꺼풀이 단정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누운 사람은 또 처음 보네….”

슈퍼싱글 사이즈의 매트리스가 좁았는지 승은 대각선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엉뚱한 곳에 잘못 수납된 물건 같은 모습에 웃음이 샜다. 가지런히 모은 두 발은 프레임을 벗어나 아예 공중에 떠 있었는데 아마도 침대에 발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미간이 움찔움찔 떨려 왔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감은 두 눈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빽빽한 속눈썹이 바람결을 따라 나부끼는 들풀처럼 흔들렸다. 멀거니 서서 자는 모습을 구경하던 지수는 곧 찝찝하던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 보송한 새 옷에 팔을 넣었다.

“…….”

그냥 바지도 갈아입을까. 자는 이의 얼굴을 잠시 살핀 지수는 손으로 허벅지를 문질렀다. 얇은 바지는 티셔츠와 매한가지로 욕실에서 물기를 잔뜩 머금고 나온 상태였다. 깊게 단잠을 자고 있는 것 같으니 옷 하나 더 갈아입는 것쯤이야…. 비좁게 걸린 옷가지들 사이에서 새 바지를 골라낸 지수가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야.”

“어?”

“…나 꿈꿨어.”

저승사자처럼 번쩍 눈을 뜬 승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와, 나 진짜 십년감수했네. 하마터면 자다 깬 승에게 팬티 바람을 들킬 뻔했다는 생각에 닭살이 돋았다.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바지를 조용히 옷더미 사이에 찔러 넣으며 지수는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꿈?”

“…오동나무로 만든 관에 갇히는 꿈.”

“…….”

잘못된 수납치고는 너무 살벌한 예시 앞에서 지수는 말을 잃었다. 어린이용 수저통에 들어간 어른 젓가락 정도를 상상했던 건데 누운 자리가 수저통이 아니라 관이었다니.

몸을 일으킨 승은 눈을 비비며 마른세수를 했다. 황당한 꿈이 남긴 여운이 생각보다 진한 듯싶었다. 얼굴을 가린 손 아래로 삼키지 못한 하품 소리가 새어 나왔다.

“피곤해?”

“어…. 아까 오후에 웨이트를 좀… 격하게 했더니 피곤하네.”

격하게? 지구를 둘로 쪼개는 연습이라도 한 걸까. 지수는 거듭된 손날치기로 지구 격파를 시도하는 승을 상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승의 입에서 그런 표현이 나오니 저로서는 그런 허무맹랑한 그림을 그려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쟤도 지치긴 하는구나. 한 번도 체력적으로 다운된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척추 뒤에 닳지 않는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는 줄만 알았다.

“빨리 나가자.”

“갑자기 왜 이렇게 서둘러?”

“네가 있으니까 이 방이 너무 좁게 느껴져서 안 되겠어.”

“…뭐?”

“아, 몰라. 방 자체가 오동나무 관 같다고.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떠밀리듯 일어난 승이 현관으로 향했다. 좁은 현관에 쪼그려 앉아서는 어김없이 운동화 끈을 풀어 헤쳤다. 축축한 바지를 끝내 갈아입지 못한 지수는 외투를 챙겼다. 배가 부르고 몸에 훈기가 돌아서 그런지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주변 환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이걸 언제 다 치우냐. 전체적으로 너무 너저분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도 먼지는 쌓인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갑갑한 마음으로 집안을 둘러보는데 유독 한 곳에서만 번쩍번쩍 빛이 났다.

“…….”

싱크대. 깨끗하게 설거지를 마친 그릇들이 크기 순서대로 스테인리스 거치대에 세워져 있었다. 개수대 주변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었다. 집요하게도 닦았네. 그렇지 않아도 다 써 가던 키친타월이 덩달아 격한 웨이트를 한 듯 홀쭉해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저건 왜 저기에 꽂아 놨지? 너무 피곤해서 테이블에 앉은 채로 양치질을 하느라 싱크대 위에 던져뒀던 칫솔과 치약이 파란 컵에 꽂혀 인덕션 근처에 놓여 있었다.

“…….”

저 컵을 내가 어디서 받았더라. 굳이 꺼낼 일이 없어 찬장 어딘가에 처박아 두기만 했던 컵이었다. 멀쩡하기만 한 끈을 기어코 새로 묶어 낸 승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저보다 먼저 밖으로 나가는 승의 뒷모습을 살피던 지수의 시야에 하얗고 납작한 봉투가 날아와 박혔다.

그렇게 달라고 난리를 치길래 줬더니, 어? 챙기지도 않고…. 티켓 같은 건 까맣게 잊은 듯 홀가분하게 집을 나서 버린 승을 대신해 지수는 봉투를 챙겼다. 반으로 접힌 흰 봉투가 두꺼운 외투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먼저 출발한 이를 놓칠세라 한달음에 계단을 주파해 밖으로 나왔더니 승은 고개를 쳐들고 벽에 붙은 건물 이름을 보고 있었다. 흔적만 남은 첫 글자는 돌아올 기미 따위 없이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너 이사 갈 계획 없냐?”

“가야지. 이사… 가야지. 이번 드라마 대박 나서 좀 좋은 데로 이사 가는 게 내 목표 중 하나야.”

관리실이 없어서 택배가 와도 현관문 앞에 그냥 두고 가는 건물이었다. 얼굴이 제대로 알려져 지금보다 인지도가 두터워진다면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라도 이사를 해야만 했다. 지수는 그간 혼자서만 몰래 바라고 있던 희망 사항을 처음으로 입 밖에 냈다.

“그 목표 아주 마음에 드네.”

고개를 끄덕인 승이 가로등을 지나 모퉁이를 돌았다. 왜 나보다 쟤가 더 흐뭇해하는 것 같냐. 그런 말을 하는 승의 표정이 궁금해 옆으로 따라붙다 보니 어느새 둘이서 사이 좋게 동네 골목을 걷고 있었다.

“웃지 말고 물 떠 놓고 우리 드라마 잘되라고 기도 좀 해. 나 좋은 집으로 이사 가게.”

“그래. 내가 열심히 기도할 테니까 드라마 대박 나면 다음 집은 제발 꼭 방음 잘되는 집으로 구해주라.”

웬일로 조용한 동네를 배경으로 알맹이는 없고 야망만 가득한 대화가 오고 갔다. 지금 사는 곳으로 처음 이사를 왔을 땐 바로 옆방에 게임중독자가 살고 있었다. 목청이 튼튼한 남자는 무슨 게임을 그렇게 종일 하는지 새벽까지 마이크에 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때는 좀 힘들었지. 찾아가서 담판을 짓고 싶었던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또 나름 연예인이라고 그럴 수가 없었다.

“방음? 난 방음은 괜찮은데…. 적응돼서 그런가? 오늘도 봐. 네 노크 소리도 못 듣고 나 완전 깊게 잤잖아.”

얇은 벽을 타고 건너오던 상스러운 수다는 고맙게도 오래는 못 갔다. 간단한 룩북 촬영을 끝내고 곧바로 귀가했던 어느 날, 지수는 활짝 열린 옆집 현관문과 그 앞에 마구잡이로 쌓여 있던 커다란 박스들을 목격했었다.

설마 하고 품었던 희망은 진짜였다. 그날 이후로는 다 괜찮았다. 가끔 흐릿하게 들려오는 물소리 따위가 거슬릴 때도 있었으나 그 시절에 비하면 그 어떤 것도 참을 만한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 이상한 거에 적응하지 말고 말하면 그냥 좀 새겨들어.”

“왜 갑자기 성질을 내냐. 시공업체에서 나왔어?”

“이야기가 왜 또 그리로 튀는 건데?”

유치한 말싸움을 하며 걸었더니 저 멀리 편의점이 보였다. 교복을 입은 남자 고등학생 여러 명이 머리를 맞댄 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야 하나. 무방비한 상태로 사람들 앞을 지나기가 살짝 꺼림칙해서 정면만 주시하고 있었더니 승이 옆으로 방향을 꺾었다.

오, 나이스 타이밍. 지은 죄도 없으면서 가슴을 졸이던 지수는 다시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네 충고 새겨듣고 꼭 방음 훌륭한 집으로 구할게. 드라마가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진짜… 아니, 그런 말은 왜 해? 안된다는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무조건 된다고 여기고 덤벼들어야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진짜 할 수 있게 되는 거라니까?”

저와 나란히 발을 맞추며 걷던 승이 돌연 핏대까지 세워가며 열변을 토했다. 집에 메달과 트로피를 몇십 개씩 소장 중인 사람다웠다. 걸어 다니는 명언 모음집 같은 모습에 박수갈채가 저절로 나왔다.

“와, 역시 최승…….”

“최승, 뭐? 이름만 부르지 말고 말을 끝까지 해.”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는 법이 없는 승이 콕 꼬집어 뒷말을 졸랐다. 하여튼 자기 칭찬 듣는 건 또 되게 좋아해요. 그런 식의 돌려 말하기를 상대하는 게 오늘따라 퍽 즐거웠기에 지수는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건… 인정. 백번 천번 맞는 말이다.”

“당연하지.”

“…쑥스러운 척하면서 좀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는 거야?”

차갑게 힐난하자 여태 능청을 떨며 잘 걸어가던 승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본인이 생각해도 웃기겠지. 숨죽인 승의 웃음소리가 얼어붙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이미지 트레이닝 한번 가 보자.”

“…이미지, 뭐?”

“너희 드라마가 막 세간의 화제가 되고 난리가 났어. 그러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알아보겠지? 막 목격담 같은 것도 돌아다니고. 시나리오랑 대본 계속 들어오고…. 인기가 미친 듯이 많아져서 너 한동안은 이렇게 편하게 걸어 다니지도 못할 거잖아, 맞지?”

“그렇지. 그렇게 될 거지.”

지수는 승이 저 대신 펼쳐 주는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기쁘게 청취했다. 말이 하도 빨라 과연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승이 늘어놓는 말을 따라 만화경을 눈앞에 대고 돌리는 것처럼 새로운 장면들이 시시각각 이어졌다.

“자, 지금처럼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너한테 말을 해. 고지수 씨, 저 진짜 팬이에요. 사인 좀 해 주세요.”

“네, 여기요. 감사합니다.”

사인쯤이야 스무 번도 해 주지. 지수는 예쁘게 사인을 휘갈긴 종이를 가상의 상대에게 내밀었다.

“사진도 찍어 주세요.”

“아, 지금 좀 못생겼는데….”

“아니에요. 잘생겼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 말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네, 찍어 드릴게요. 제 팬이시니까요.”

잠깐의 고민 끝에 지수는 사진을 찍기로 했다. 웬만큼 이상한 상태가 아니고서야 사진은 꼭 찍어 줘야겠어. 순발력 있게 대답을 이어 가다 보니 그동안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기준도 정립할 수 있었다.

효과가 좋은데? 트레이닝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할수록 기지가 늘어나 자신감이 조금 뚱뚱해졌을 때였다.

“입고 있는 티셔츠 어디 거예요?”

“이거, 너무 오래전에 산 거라 제가 잘 기억이 안 나서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그거 저 주시면 안 돼요?”

상냥하던 팬이 낯빛을 바꾸더니 본색을 드러냈다.

“아씨, 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아씨? 팬한테 그렇게 말한다고? 너 탈락.”

황당한 요구에 욕이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팬을 연기하는 승에게 한 말이었는데 승은 자비 없이 제게 낙제를 선언했다.

“아, 왜 탈락이야. 다시, 다시 할래.”

“다시가 어딨냐. 대중이 그렇게 만만해?”

“…….”

얼핏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은데 희한하게 들어 보면 다 맞는 말이었다. 말실수 한 번으로 골로 가는 세상이 아니던가. 좀 참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나는 대중이 아니니까 특별히 다시 해 준다.”

“특별히? 참 나.”

뒤늦게 밀려오는 깨달음에 조금 숙연해지려는 찰나 승이 채찍 대신 당근을 내밀었다. 혀를 차면서도 지수는 아까보다 훨씬 나은 대처를 해냈다. 이 옷은 제가 입고 있어서 조금 그런데, 다음에 다른 거 드리면 안 될까요? 이걸 드리면 저는 벗고 가야 해서요. 처음엔 그럴듯했던 대처는 하면 할수록 그야말로 되는대로 지껄이는 수준으로 변했다.

팬을 자처하며 망측한 요구를 하는 이에게 왜 옷을 벗어 줄 수 없는지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설명하던 지수가 어느 순간 멍하니 자리에 멈춰 섰다.

“야, 근데 네 차 어디 있어?”

“너네 집 앞에.”

조금 전 보자마자 피하듯이 옆길로 들어갔던 편의점이 다시 눈앞에 있었다. 학생들은 없고 학생들이 먹다 남긴 컵라면 쓰레기들만 테이블 위에 수북했다. 시시덕거리다가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그럼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빨리도 묻는다. 빨리도 물어.”

“…….”

그대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조금 서먹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별 이상한 요구를 하며 저를 혹독하게 트레이닝하던 승도 이젠 말이 없었다.

골목을 몇 개 지난 둘은 금세 출발지로 돌아왔다. 차는 승의 말대로 제가 사는 건물 앞에 보란 듯이 주차되어 있었다. 내가 저걸 못 봤다고?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시력이 저하된 게 아닌가 싶은 우려마저 들었다.

“갈게.”

목적도 없이 같은 구역을 반복해서 순찰한 승이 인사를 했다. 아까 연기를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일까. 그냥 잘 가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건데 입이 잘 안 떨어졌다.

말없이 언 손을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던 지수는 곧 놀라서 다시 손을 꺼냈다. 손에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 맞다. 너 이거 가져가야지.”

지수는 저도 까먹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연극 같은 건 영영 잊고 있었던 것 같은 승은 조금 불퉁한 얼굴로 봉투를 건네받았다. 추워서 빨개진 손끝이 천천히 입구를 더듬었다.

“…너는 이날 뭐 하는데?”

“아마 촬영하겠지? 스케줄표가 그때까지 안 나와서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어.”

벌어진 종이 틈새로 빳빳한 모서리가 드러났다. 안에는 똑같이 생긴 표가 두 장 들어 있었다.

“이거 너 아는 사람이 하는 거야?”

“응, 나 연기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연출에 참여했어. 거기 팸플릿에 보면 이름 있을 건데, 이선정이라고…. 그 누나가 내 선생님이야.”

“그럼 너도 가야 되는 거 아니야?”

“나도 가야지. 가야 되는데….”

선정이 처음으로 배우가 아닌 연출자에 이름을 올리게 된 역사적인 작품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가 하는 건데…. 배 터지게 욕먹으면서 돈독해진 선정과의 관계를 헤아리면 초연 때 당장 출동을 했어야 했는데 그날은 진짜 종일 촬영을 하느라 갈 수가 없었다.

“고지수.”

“어?”

봉투를 다시 벌린 승이 조심히 손을 집어넣었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보자.”

들어갈 때는 아무것도 없었던 검지와 중지 사이에 티켓 한 장이 끼어 있었다.

* * *

“지수야, 좀 이따가 다시 비 올 것 같지 않냐?”

“또?”

“밖에 좀 봐 봐. 하늘이 어둑어둑한 게 또 한바탕 쏟아질 기센데….”

뒷좌석에서 대본을 보던 지수는 창문을 열어 바깥 동태를 살폈다. 한옥 모양을 한 2층짜리 도서관 건물 뒤로 흐릿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 왜 또…. 반갑지 않은 소식에 곧바로 탄식부터 흘러나왔다. 잿빛 하늘은 힘을 줘 짜내면 금방이라도 물을 뚝뚝 흘려 댈 젖은 수건만큼이나 축축해 보였다.

“오전에도 제대로 못 찍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세 시에 강수 확률 75%래. 어쩌냐.”

“겨울 맞아? 한겨울에 무슨 비가 이렇게 와.”

아무리 야외 일정이라고 하더라도 비나 눈이 온다고 무조건 촬영이 취소되지는 않았다. 대비를 해도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기에 통상적으로 촬영장에서는 처한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스토리 전개상 반드시 맑은 날에 찍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게 아니라면 땅을 적시는 빗방울 같은 건 그다지 큰일이 될 수 없었다. 딱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도 그저께 꽤 많이 찍어 놓지 않았어?”

“응, 이렇게 되니까 목요일 날 혹사 당했던 게 다행이다 싶네.”

그 한 가지란 해당 신 바로 앞뒤에 붙을 장면을 미리 찍어 놓은 경우를 뜻했다. 배경이 들쑥날쑥한 영상들을 하나인 것처럼 쭉 이어 붙이면 속된 표현으로 ‘연결’이 무너지니까.

기상청 일기예보도 귀띔해 주지 않은 깜짝 부슬비가 내렸던 오늘 아침, 촬영팀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두 시간가량 손을 놓고 있어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민공원에 몰리는 인파를 피하고자 개장 시간 전부터 촬영을 감행했던 이틀 전 목요일은 해가 쨍쨍해도 너무 쨍쨍했었다.

“나가서 커피라도 마셔.”

“…카페 열었어? 공원이랑 도서관 둘 다 휴관이라며.”

“아니, 닫았지. 대신 재이 팬들이 커피 차를 보냈더라고. 옆에 쿠키 같은 것도 있더라. 여기 이거 봐, 짠.”

“오.”

현욱이 들어 보인 일회용 커피 컵 중앙에 상큼한 재이의 사진이 동그랗게 박혀 있었다. 까탈을 부리는 날씨 덕에 촬영이 통 진도를 못 빼고 있으니 몸에도 으슬으슬한 기운이 돌려던 차였다. 지수는 보던 대본을 내려놓고 얼른 차 밖으로 나왔다.

“재이야.”

“지수 오빠!”

“잘 마실게. 고마워.”

“두 잔 드세요. 아니, 오빠는 특별히 열 잔 드세요!”

시험과 과제에 찌든 대학생 역할을 위해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재이가 조이더스의 단체 사진이 프린트된 현수막 앞에서 반갑게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목이 늘어난 무채색 트레이닝복에 낡은 슬리퍼를 신은 재이는 글리터 섞인 화려한 무대화장을 했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돋보였다.

“나도 쿠키 하나 더 먹어야겠다. 그나저나 재이 너 엄청 든든하겠네. 팬들이 이런 것도 보내 주고.”

“감동받아서 울 뻔했어요. 은규 오빠가 말을 안 해 주셔서 저 진짜 오늘 이런 거 오는지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은규가 은근히 입이 무겁다니까. 참, 근데 재이 너 빼고 다른 멤버들 오늘 라디오 스케줄 있지 않아?”

“네, 맞아요! 나중에 여덟 시에.”

간식을 한 아름 담은 트럭의 등장에 스태프들 사이에도 활력이 돌았다. 광활한 갈대밭에서 저와 상지가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을 찍기 위해 일부러 한 달에 두 번 있는 시민공원 정기휴관일에 맞춰서 잡은 일정이었다.

번거로운 출입 통제 없이도 멋진 그림을 얻어 낸 건 좋았지만, 도서관과 시민공원이 휴관하자 이용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전무하다는 게 단점이었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남천시가 엄격하게 관리하는 갈대밭 주변은 카페나 식당은 고사하고 그 흔한 편의점조차 없었다.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빨리 접고 그냥 서울 가는 게 나을 것 같지 않냐? 내일은 오후부터 촬영 있으니까 오늘 좀 일찍 끝내서 너랑 상지 씨도 좀 쉬고….”

“…….”

고소한 땅콩이 박힌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먹던 현욱마저 은근슬쩍 솔직한 속내를 내비쳤다. 무리하게 달리다가 과부하가 오는 것보다는 한 템포 쉬어 가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짧은 브리핑 때 있었던 윤주의 말에 따르면 벌써 16부작 드라마 전체 촬영분의 25% 이상을 찍었다고 했으니 지금도 진행 상황은 충분히 빠른 편에 속했다.

“상지 씨 아까 무리해서 컨디션도 안 좋은 것 같던데…. 아침에 날씨가 좀 추웠냐.”

“…몇 시부터 비 온다고? 세 시?”

“응, 그때쯤 온다고 돼 있더라.”

“아침에도 두 시간 그냥 날렸는데…. 일단 찍을 수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 찍어 봐야지.”

동조를 바라는 듯한 현욱의 발언에 지수는 힘들게 본심을 숨겨 냈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후 불어 마신 지수의 손이 입고 있는 두꺼운 패딩 주머니로 향했다.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일정 다시 잡아야지 뭐 어쩌겠냐. 촬영하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지수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세게 힘주어 쥐었다. 만약 진짜 이대로 날씨가 계속 안 따라 준다면…. 펼친 손바닥 안으로 딱딱한 휴대폰 케이스가 만져졌다. 액정을 거나하게 깨 먹었던 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던 케이스였다. 지수는 조잡한 플라스틱 케이스의 모서리 부분을 더듬었다.

“상지 많이 안 좋대? 아까 안 그래도 걱정돼서 약 먹으라고 갖다주니까 나한텐 그 정도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던데.”

“이 날씨에 그 얇은 옷차림으로 허허벌판을 그렇게 뛰어다녔는데 몸이 멀쩡하다? 나는 그게 더 이상하다고 본다.”

조금 한산해진 트럭 앞에서 재이가 요리조리 셀카를 찍어 댔다. 찰칵찰칵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컵에 붙은 본인 사진이 잘 나오도록 각도를 조정해가며 찍는 걸 보니 아마 팬들에게 보여 줄 인증샷인 것 같았다.

“재이야, 내가 찍어 줄까?”

“진짜요? 예쁘게 찍어 주세요. 길어 보이게.”

커피를 얻어 마신 지수는 선뜻 포토그래퍼를 자청했다. 팔을 있는 대로 뻗어 가며 낑낑대던 재이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휴대폰을 건넸다. 이왕 찍는 거 잘 찍어 주고 싶어 빛이 잘 드는 방향을 찾아 앵글을 조정하는데 재이의 매니저인 은규가 나타나 현욱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형.”

“엉?”

“여기 형 담배.”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뜯지 않은 새 담배였다. 손바닥 위에 놓인 조그만 담뱃갑에 현욱의 얼굴 가득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져 나갔다. 저 형, 진짜… 심각하네. 금단현상 때문인지 현욱은 담배가 똑 떨어진 몇 시간 전부터 사탕이며 쿠키 같은 주전부리를 쉬지 않고 먹어 대던 중이었다.

“여기서 차 타고 밑으로 조금 내려가니까 낚시터가 있더라고요.”

“낚시터?”

“네, 하우스 낚시터. 이십사 시간 영업한다던데 아무튼 그 안에 매점이 있길래 거기서 샀어요.”

“와이씨, 나 좀 감동받아도 되냐? 하여튼 이 기특한 새끼.”

생각지도 못한 기지를 발휘해 낸 후배가 아주 예뻐 죽겠다는 투였다. 칭찬을 듬뿍 날리며 비닐 포장을 뜯는 현욱을 두고 지수는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었다. 양손을 턱 아래에 모아 꽃받침을 만든 재이는 아이돌답게 일 초에 한 번씩 새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음에 들어?”

“네, 좋아요! 나중에 우리 팀 계정에 팬들 보라고 올려야겠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멀어지는 현욱의 팔이 은규의 어깨에 둘려 있었다. 확대까지 해 가며 꼼꼼히 베스트 컷을 고르는 재이를 보며 지수는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드러난 목덜미가 추웠다.

“…….”

이마를 덮은 망건을 더듬던 지수의 시선이 다시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손바닥으로 가려질 정도로 작았던 먹구름 무리는 이제 기와로 된 지붕 전체를 가릴 정도로 기세등등해져 있었다.

시곗바늘이 두 시 반을 지나자마자 비가 미친 듯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의 가랑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굵은 빗줄기는 흡사 하늘에 구멍이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차게 세상을 두드렸다. 이대로 저녁까지 쭉 이어질 거라는 야속한 비 소식에 윤주는 결국 헤드폰을 벗었다. 빗속에서 오매불망 윤주의 결정만 기다리던 스태프들은 빠르게 짐을 쌌다. 비싼 장비가 비에 젖지 않게 하려면 뭐든 최대한 신속하게 실어 날라야 했다.

“지수 너 집으로 갈 거지?”

“응.”

“그래. 가서 쉬어라. 잠도 좀 푹 자고.”

“…….”

사나운 빗줄기가 차창을 때렸다. 몇 번의 방문으로 조금 눈에 익은 남천시 중심가의 모습이 물기 맺힌 창문 뒤로 흐릿하게 비쳤다. 조금이라도 저를 더 쉬게 하려는 현욱의 배려를 배신하는 듯해 미안했으나 지수는 차가 촬영장을 빠져나올 때부터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도서관에서 찍는 장면 많아서 어차피 한동안 거기 계속 가야 하니까… 오늘 못 찍은 건 그때 찍겠지.”

“응.”

“너는 뭐라도 좀 챙겨 먹고 잠이나 제대로 자.”

갈 수 있을까. 여기서 서울까지 못 해도 두 시간은 걸릴 테고, 빨리 샤워만 하고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나간다 치면…. 송산동까지 가는 길이 막히지만 않는다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을 쥔 지수의 손끝이 초조하게 케이스를 두드렸다. 현욱 몰래 최적의 동선을 짜 보던 지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

“형, 근데 나 저녁에 잠깐 나갔다 오려고.”

“응? 어딜?”

“그 왜, 선정이 누나가 하는 연극 있잖아. 거기 가서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고 와야 할 것 같아서.”

바뀌는 신호에 맞춰 차가 부드럽게 우회전했다. 원심력을 따라 한쪽으로 쏠리려는 몸에 힘을 주며 지수는 현욱의 얼굴빛을 살폈다. 라디오 광고 음악을 따라부르는 모습에서는 의심의 기색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맞네. 생각해 보니까 오늘이 토요일이구나.”

“응, 오늘도 안 가면 이제는 진짜 시간 못 내지 않을까 싶어서.”

“하긴….”

따지고 보면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선정의 연극을 보러 간다고 해 놓고 다른 곳에 간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정말 선정이 연출한 연극을 보러 가는 거였다.

촬영 역시 천재지변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일찍 끝났을 뿐 거기에 제 입김은 하나도 없었다. 실시간으로 구름이 몰려오는 촉박한 상황에서 오케이 신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상지와 제가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웠던가. 합심이라도 한 듯 대사 실수 한 번 내지 않는 둘의 모습에 종일 날카롭던 윤주마저 끝내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해 보였었다.

그러니 찔릴 건 전혀 없지. 정당하게 흘러간 하루의 흐름을 되짚으며 지수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남천시를 벗어나는 내내 머릿속으로 그렸던 타임라인은 빗줄기 앞에서 모두 어그러졌다. 나빠진 도로 사정에 차가 평소보다 훨씬 막혔다. 집에 도착해 샤워를 마치고 시계를 봤을 때는 이미 연극 시작 십오 분 전이었다.

제때 도착하긴 글렀네. 그때를 기점으로 맥이 확 풀려 버린 지수는 서두르던 걸 멈추고 느긋하게 외출 준비를 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모자 여러 개를 썼다 벗었다 하며 거울 앞을 서성거렸지만 결국은 아무 무늬가 없는 검은색 캡 모자를 썼다.

택시를 잡아타고 도착한 송산동에서는 소극장 근처에 있는 꽃집에 들렀다. 내리는 비에 어깨를 내어 준 지수는 신중하게 선정에게 줄 꽃을 골랐다. 어차피 인터미션 때나 되어야 입장할 수 있을 테니 더는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었다.

풍성한 꽃다발을 손에 든 지수는 미끄러운 거리를 우산도 없이 걸었다. 소극장 입구에 도착해 휴대폰을 꺼내니 현욱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지수야 나 지금 은규랑 티에쓰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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