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3권) (12/23)

토탈 패키지

“저는 이번 드라마의 총책임을 맡은 백윤주 PD입니다. 다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마지막 촬영 날까지 에너지 넘치는 현장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자 청바지에 까만 목폴라 니트, 수수하면서도 깔끔한 옷차림은 첫 대본 리딩 날이라는 타이틀과 무척이나 잘 맞아떨어졌다. 미팅 때보다 포멀하게 차려입은 윤주는 간략하게 본인의 포부를 밝혔다. 멀리 앉은 출연자들까지 빼놓지 않고 둘러본 윤주가 마침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를 했다. 기대 어린 눈빛으로 윤주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힘차게 손뼉을 쳤다.

“네,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 드라마의 각본을 맡은 작가 신재은입니다.”

다음은 작가 차례였다. 윤주가 앉자 곧바로 이번 작품의 대본을 집필한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소개를 했다. 기다란 디귿 모양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출연진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넉넉한 크기의 회의실은 참석한 관계자들로 빽빽했다. 테이블만으로는 자리가 모자라 양옆 벽을 따라 접이식 의자가 또 한 줄 깔려 있을 정도였다.

“제가 출연을 희망했던 분들과 이렇게 드라마를 찍게 되어 작가로서 너무나 영광입니다.”

캐스팅 직후 가졌던 미팅에는 윤주를 비롯한 일부 연출팀 사람들만 참석했었기에 지수도 작가와는 초면이었다.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는 작가의 손에는 까만 볼펜이 분신처럼 쥐어져 있었다.

“앞으로 힘써 주실 여러분께 미리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고요. 작가인 저는 흔들리지 않는 스토리와 탄탄한 문장으로 현장의 노고에 보답하겠습니다.”

제가 닳도록 펼쳐 보고 있는 대본이 모두 저 손에서 탄생했다니. 동그란 뿔테 안경을 코끝에 걸친 작가는 방금까지도 대본을 쓰다 온 듯 이지적인 인상을 풍겼다. 든든한 인사말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떨리는 기색이 역력하던 작가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란스러운 틈에 섞여 남들처럼 두 손바닥을 맞부딪히던 지수는 급하게 앞에 놓인 생수를 뜯었다. 자리마다 부착된 이름표 우측에 작은 카메라가 놓여 있었으므로 서둘러 물을 집는 순간마저도 조금은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대본은 아직 한 줄도 읽지 않았는데 목이 타들어 갔다.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카메라를 살피는 사이 손뼉을 치던 사람들의 시선이 또 한 칸 옆으로 이동해 왔다. 다름 아닌 제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람 선비 역을 맡은 고지수입니다.”

목을 축인 지수는 너무 늦지 않은 타이밍에 일어나 입을 뗐다. 조금 전까지 떨리는 목소리로 소감을 전하던 작가가 흐뭇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혼자만 우뚝 서 있게 되자 허리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의 표정이 산 아래 풍경처럼 훤히 내려다보였다. 상체를 앞으로 빼고 제 소개를 경청하는 윤주는 잘 듣고 있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족한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모두의 이목이 저를 향해 있었다. 어느 작품이든 첫 대본 리딩 현장에서는 지금 같은 통성명 시간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같은 배를 탄 한 식구가 되어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각자 하는 일에 따라 보는 사람만 보게 되는 법이었다. 대본 리딩 때 처음 안면을 트고 그다음 만남이 종방연 현장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번 드라마처럼 규모가 큰 프로젝트라면 특히 더 그랬다.

“최선을 다해서 앞으로 다 같이 멋진 작품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수는 자주 만나게 될 사람들과, 또 오늘이 지나면 통 볼 일이 없을 사람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허벅지를 문지르는 손에서 진득한 땀이 배어 나왔다.

연기에 발을 들인 후로 지금과 비슷한 스케줄이 몇 번 있었으나 오늘은 뭔가 달랐다. 배우들이 앉은 자리에 카메라까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거나한 연습 규모도 모자라 이토록 이른 소개 순서라니.

보통 이런 자리에서의 발언 순서는 작품에 대한 기여도를 따르는 법이었다. 몇 개월 전 종영한 드라마에서 작은 조연 역할을 맡았을 때엔 PD와 작가, 그리고 주연 배우들과 주요 연출진의 인사가 다 끝나고서야 비로소 제 차례였다. 굳이 따져 보면 열세 번째 정도 됐으려나. 그러니 이렇게 번듯한 자리에서 제가 방금처럼 이르게 인사를 한 건 데뷔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에 윤이나 역을 맡은 윤상지라고 합니다.”

“이야, 상지 오랜만이네.”

“촬영 감독님, 저 기억하세요? 오랜만에 뵈니까 엄청 반갑네요.”

드라마에서 저와 러브 라인을 만들어 갈 상지는 나이는 동갑이지만, 연기 경력이 무려 19년에 이르는 베테랑이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아역배우 생활을 시작한 상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출연한 영화만 헤아려도 스무 편이 훌쩍 넘었다.

이후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게 되며 잠깐 활동을 쉬었던 상지는 졸업과 함께 본격적으로 성인 연기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PD인 윤주는 이번 드라마를 통해 아직도 꼬리표처럼 저를 따라다니는 아역배우 이미지를 씻어 내고 싶다던 상지의 뚜렷한 목표가 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며 캐스팅 비화를 밝힌 바가 있었다.

“즐겁고 유쾌하고 또 감동까지 있는 작품에 제가 배우로 참여할 수 있게 되어서 굉장히 기쁘고요. 앞으로 몇 달간 윤상지가 아닌 대학생 윤이나로 새로 태어났다는 야심 찬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촬영에 임하겠습니다.”

탄탄한 연기 경력을 증명하듯 소개도 청산유수였다. 상지는 촬영장에서 유아기와 사춘기를 보낸 사람답게 뛰어난 붙임성을 자랑했다. 누구와도 편하게 어울리는 재주가 볼수록 탁월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우러러봐야 마땅할 대선배의 멋진 모습에 지수는 진심을 담아 박수를 보냈다. 이런 건 일도 아니라는 듯 막힘 없이 술술 말했어도 약간의 민망함은 어쩔 수 없었는지 자리에 앉은 상지가 두 손으로 볼을 감쌌다.

옆에서는 파도타기 같은 자기소개가 계속되고 있었다. 상지의 손등이 달아오른 뺨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괜찮아? 이거 좀 마셔.”

편집을 맡은 연출부 스태프의 쾌활한 농담을 들으며 지수는 상지 앞에 놓여 있던 생수를 대신 뜯어 내밀었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정리한 상지는 상체를 바짝 붙여 오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제게 물었다.

“나 좀… 오바했어?”

제게만 몰래 내비치는 속내에 소리 죽여 웃음을 삼켜 낸 지수는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무 잘했어.”

느낌이 좋았다. 닻을 올리고 마침내 출항 준비를 마친 배는 지수로 하여금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품게 했다.

세 시간이 넘게 이어진 대본 리딩은 목이 쉬기 직전에야 끝이 났다. 지수는 열연으로 뻑뻑해진 목을 붙잡고 현욱과 회사로 향했다. 뒷좌석에는 여자주인공 친구 역할을 맡아 대본 리딩에 함께 참여했던 재이도 있었다. 가수로 데뷔해 드라마 현장은 이번이 처음인 재이는 새로 접한 전혀 다른 업무 환경에 적응하느라 녹초가 된 채 잠들어 있었다.

“아까 나한테 멤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그러더라.”

“진짜?”

오늘 같은 자리가 매번 있는 게 아니니 주연 배우들은 대개 흐르는 시간을 아까워하며 합을 맞춰 보기 바빴다. 촬영이 몰아치는 후반부에 들어서면 대사 한 번 제대로 못 맞춰 보고 슛을 들어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 다 같이 모인 자리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중요했다.

반대로 분량이 많지 않은 조연들은 대본 리딩이라고 해 봤자 몇십 분을 앉아만 있다가 겨우 한두 마디 뱉어 보는 게 다였다. 구석에 놓인 의자 하나를 지키고 앉은 재이가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대본을 넘기던 모습이 멀리 떨어진 제 자리에서도 보였었다.

“재이야.”

“…….”

“재이야, 일어나. 다 왔어.”

“…벌써요?”

“그래, 멤버들 보고 싶어 죽겠다며. 얼른 일어나. 연습실에서 애들이 너 기다린대.”

비몽사몽인 재이가 힘겹게 안전벨트 버클을 풀었다. 지쳐서 한풀 꺾인 건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쉬지 않고 긴 대사를 읊어 댔더니 목이 아프고 머리마저 조금 멍했다.

차에서 내린 지수는 운동화 코를 툭툭 바닥에 쳤다. 히터 때문에 자꾸 노곤해지던 차 안을 벗어나 상쾌한 바깥 공기를 맡으니 그래도 좀 살 것 같았다. 작게 기지개를 켜던 지수는 반가운 냄새를 쫓는 리트리버처럼 차가운 바람을 들이쉬었다.

“나 잠깐 사무실 가서 일정표 좀 보고 올게.”

“응, 나 2층에 있을 테니까 거기로 와. 여기까지 온 김에 누나한테 인사 좀 하고 가려고.”

멀어지는 현욱의 발소리를 뒤로 하고 지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마 지금 쯤이면 오후 수업을 끝내고 쉬고 있지 않을까 했던 선정은 예상대로 2층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누나….”

“어, 지수야. 너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누나, 어디 아파요?”

조금 전, 현장에서 지적받았던 몇 가지 사항들이 내내 속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선정이라면 뭔가 실질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온 거였는데 푸석한 안색을 보자 하려고 했던 말들이 다 사라져 버렸다.

“나? 왜?”

“안색이… 아픈 사람 같아요.”

“아… 안 아파. 잠을 못 자서 그래.”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눈 밑이 핼쑥한 게 살도 좀 빠진 것 같았다. 변화를 알아채자 곧바로 걱정부터 솟았는데 선정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내가 연출한 연극이 이번 주말 오픈이거든.”

손목을 주무른 선정은 가방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상태를 체크하듯 핑크색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반복적으로 여닫는 모습에서 피로와 초조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탄성 좋은 뚜껑이 뒤로 젖혀질 때마다 팅, 티잉, 경쾌한 음이 울려 퍼졌다.

“아, 그거…. 그게 벌써 오픈이에요? 어디서 하는데요?”

“송산동 TSC 뒤에 소극장 모여 있는 골목 알지? 거기서 해. 초대권 챙겨 줄 테니까 시간 될 때 한 번 와. 아, 근데 지수 너 이제 바빠져서 안 되겠다.”

선정은 본격적으로 연출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작년부터 무대 기획에 관한 이론서들을 끼고 사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올봄 들어 세부 계획이 잡혔다며 구체적인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고 하더니 드디어….

두껍던 새 책이 낡아 가는 것까지는 눈치채고 있었는데 그렇게 준비한 작품이 벌써 무대에 오를 준비를 끝냈을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아, 무슨 소리예요. 누나가 하는 건데 나도 당연히 가야지. 얼마나 오래 하는데요?”

“일단 한 달 해 보고 반응 좋으면 더 길게 가야지.”

“잘됐네. 나도 줘요, 초대권.”

“정말? 진짜? 아싸, 너 오면 고지수 이름 앞세워서 홍보해야지.”

적극적인 요구에 선정은 조금 감동한 듯했다. 작품 이야기를 나눈 덕인지 스트레스로 메말라 있던 이목구비에도 옅게나마 생기가 돌았다.

“이선정, 뭐가 그렇게 신났어? 네 목소리가 온 건물에 다 울린다.”

“미안, 내 발성이 너무 뛰어나서 그만….”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걸어 올라온 현욱의 핀잔을 선정은 연극 톤의 말투로 맞받아쳤다.

“실장님 위에 계신대?”

“잠깐 밖에 나가셨대. 급하면 나중에 연락하시겠지, 뭐. 아, 근데 지수 너 모레 낮에 스케줄 있더라. 오늘 아침에 급하게 잡혔는지 실장님이 따로 메모해 놓으셨더라고.”

“스케줄? 뭔데?”

일정표를 확인한 현욱이 새 소식을 전했다. 언질도 낌새도 전혀 없던 이야기에 지수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시구.”

그건 끽해야 짧은 인터뷰 정도를 예상했던 제 짐작을 멋지게 배반하는 답이었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시구? 어디서?”

“숭안실내체육관. 배구 경기야.”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지수의 미간이 사정없이 우그러졌다.

* * *

느리게 위로 올라가는 트렁크 문은 꼭 먹이 앞에서 보란 듯이 벌어지는 고래 입 같았다. 공을… 이렇게 들고 다녀? 입이 큰 고래는 속에 큼지막한 타포린 백을 품고 있었다. 가로등 빛을 받은 차 주인의 실루엣이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로 길게 늘어졌다.

“시구?”

“응, 시구.”

“나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가방 손잡이를 낚아챈 승이 트렁크를 닫으며 말했다. 못 들었다니. 이미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불러낸 이유도 모르고서 이렇게 공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남의 동네에 마실을 나올 수가 있나. 의구심이 들었으나 알쏭달쏭한 두 눈동자를 보아 승은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몰랐어?”

“어.”

“그럴 수도… 있겠다. 나 너네 팀 말고 상대 팀 초청으로 가는 거라.”

내일 시간 되면 나 배구 좀 가르쳐 줄 수 있냐. 짧고 간단한 요청을 실은 제 메시지에 승은 한강 어딘가에 있다는 테니스장 주소를 보내 왔다. 이유도 묻지 않고 만날 장소를 제시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지수는 승이 당연히 내일 제 스케줄을 알고 있는 줄만 알았다.

“티엑스화재?”

“어.”

“…네가 티엑스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금시초문의 소식을 접한 승은 언짢은 표정으로 문장 끝마다 물음표를 붙여 댔다.

“남천시에서 우리 드라마에 장소 협찬을 해 주기로 했거든.”

남천시는 지역 특산물인 막걸리와 함께 드넓은 갈대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고도가 높고 해안가와 인접한 동네에 있는 갈대밭은 풍광이 뛰어나 드라마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소였다. 바로 옆에는 잘 조성된 시민공원과 한옥을 모티브로 최근에 새로 지어진 도서관도 있었다. 입구에 있는 멋스러운 연못과 정자 덕에 공원 역시 갈대밭과 함께 여러 사극에 심심치 않게 모습을 비추는 이름난 촬영지였다.

갈대밭과 시민공원, 그리고 작년에 완공되어 아직 제대로 방송을 탄 적이 없는 도서관까지. 시설의 운영 주체인 남천시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기 위해 제작팀에서 상당한 노력을 들였다는 뒷이야기를 지수는 윤주로부터 전해 들었었다.

“너 그럼 내일 티엑스 유니폼 입고 와?”

“…어, 그 팀 유니폼에 바지는 개량 한복 입는다던데. 드라마 홍보 때문에 가는 거야.”

저를 내일 경기의 시구자로 초청한 배구팀 TX화재의 연고지가 바로 남천시였다. 제작사 측은 곧 방영될 작품을 미리 홍보하고, 지자체는 라이징 스타의 시구로 지역 스포츠팀 경기에 활기를 불어넣고.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훌륭한 상부상조였는데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승이 눈썹을 있는 대로 구기며 강하게 불만을 표했다.

“너 내일 시뻘건 옷 입고 올 거면서 나한테 지금 공 던지는 거 가르쳐 달라는 거야?”

“…왜? 안 돼?”

“장난해? 그쪽 팀 가서 가르쳐 달라고 해.”

닫혔던 트렁크 문이 다시 열리고 있었다. 승은 제가 자기 팀 초청이 아니라 상대 팀 손님으로 간다는 사실에 크게 빈정이 상한 것 같았다.

아니, 근데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무섭게 굳은 눈꼬리에서 어지간해서는 털어 내지 못할 심술이 느껴졌다. 불같은 주인 성질머리에 가방에 차곡차곡 담겨 온 공들 역시 밖으로 나와 보지도 못하고 다시 차에 실리려 했다.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 덩칫값을 전혀 못 하며 이상한 고집을 피워 대는 승을 멀뚱히 보고만 있던 지수는 순간 번뜩이는 기지를 떠올려 냈다.

“야, 네가 우리나라에서 배구 제일 잘하는 거 아니야? 난 그런 줄 알고 너한테 도와 달라고 한 건데…….”

“…….”

“이게 급하게 잡힌 스케줄이라… 나도 어제 들었어.”

“…….”

볼멘소리를 가장한 칭찬을 공수표처럼 날리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긴가민가했다. 과연 이 전략이 먹힐까. 이왕 잡힌 시구 스케줄, 그거 좀 멋지게 소화해 보겠다며 이런 말까지 하는 스스로가 참을 수 없게 가증스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지수는 이대로 진짜 가버리려는 듯 발길을 돌리는 넓은 등에 대고 꿋꿋하게 낯간지러운 갈채를 퍼부었다.

“어제 대본 리딩 끝내고 잠깐 회사에 갔더니 새로 스케줄이 잡혔다더라? 나 보고 시구를 하래. 근데 다른 종목도 아니고 배구라네.”

“…….”

“나는 진짜 와, 딱 듣자마자 당연히, 어? 당연히 네 생각이 나던데.”

“……”

“너 그때 우리 가게에 만두 사러 왔을 때 막 나한테 친구로 지내자고 한 거, 아직… 기억하지?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배구 선수는 너밖에 없는데… 친구한테 이런 것도 못 해 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탕발림이 이어질수록 보기 싫게 불거져 있던 승의 귀 아래 핏대가 차츰 누그러졌다.

“어차피 내일 경기장 가면 시작 전에 거기서 미리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준다고 하긴 했거든? 근데 나는 그냥 그 사람들보다 네가 더 편하니까, 그래서 너한테 가르쳐 달라고 한 건데….”

“…….”

이상한 데서 핀트가 나갔던 승의 초점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철조망 그늘에 가린 옆모습이 보일락말락 결국 보이지 않아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티엑스 선수들보다 네가 더 잘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절대 꺼지지 않는 횃불 같은 승부욕에 기름을 부을 직접적인 비교 구문은 아껴 뒀다가 일부러 맨 마지막에 덧붙였다. 지수의 시선이 까만 뒤통수를 좇았다. 벼락치기로 답을 써낸 시험지의 채점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좋은 지적이야. 제대로 찾아왔어.”

두꺼운 트렁크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빳빳한 타포린 백을 가뿐하게 들어 올리는 승의 얼굴엔 언제 심통을 부렸냐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 새끼 칭찬 듣고 싶어서 일부러 삐진 척한 거 아니야? 각 면이 서로 보색 관계를 이루는 양면 색종이를 뒤집은 것처럼 확 달라진 태도가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졸지에 승을 최고의 배구 선수로 추켜세우게 된 지수는 떨떠름한 얼굴로 승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오, 씨. 내가 또 말렸네. 위트 있게 대응했다고 자부한 조금 전 일에 배알이 꼴렸으나 이미 뱉은 말을 무를 수도 없었다.

한강 바로 옆의 테니스장은 꽤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각종 레슨 정보를 알리는 대형 안내문이 철조망에 묶인 채 펄럭였는데 정작 넓은 코트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하긴 이 추운 겨울밤에 누가 테니스를 치겠어. 휘영청 밝은 달 아래 가까운 산책로를 따라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시민들만이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일단 힘 실어서 그냥 한 번 던져 봐.”

코트를 가르는 네트를 보며 추위에 어깨를 떠는데 승이 공 하나를 제게 던졌다. 양옆에 하얀 세로줄이 들어간 까만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승은 스카우트 담당자라도 된 것 같았다. 두꺼운 후드티와 그 위에 걸친 넉넉한 스포츠 점퍼는 그동안 봐 왔던 옷차림이랑 별다를 게 없었는데 공이랑 같이 붙어 있으니 신기하게도 프로페셔널한 분위기가 풍겨 왔다.

“…너 공 그렇게 맨날 트렁크에 들고 다녀?”

“이걸 왜 들고 다녀. 오늘만 너 때문에 특별히 가져온 거야.”

“오, 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

“…….”

축구공보다 살짝 작은 것 같은 공을 이리저리 만지며 지수는 승을 한 번 노려봤다. 괴팍한 스카우트 담당자. 말본새가 저래서 어디 좋은 선수 영입할 수 있겠냐고.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배구공은 생각보다 훨씬 딱딱했다.

아까 영상에서 보니까 사람들이 막 이런 식으로 하던데…. 딱딱한 표면을 가볍게 툭 치자 공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른팔을 높이 들어 올린 지수가 떨어지는 공을 힘껏 내려쳤다.

팟. 손과 공이 부딪히며 참 애매한 소리가 났다. 반대편 철조망까지 날려 버리리라 다짐했던 게 민망하게 둥그런 공은 뜨자마자 땅으로 고꾸라졌다. 데굴데굴, 데구르르…. 땅과 붙어 있는 낮은 네트가 볼품없이 날아간 공을 막아섰다.

“…….”

형편없는 궤적을 닮은 쑥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서 있던 승이 떨어진 공을 손수 주우며 제게 물어왔다.

“너 배구 제대로 본 적 없지.”

“응, 없어.”

터치 한 번에 빈약한 밑천을 들킨 지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실력은 시원하게 인정하고 대신 배움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원래도 스포츠에 크게 열광하는 타입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직접 하는 것도, 남이 하는 걸 관람하는 것도 통 흥미가 없었다. 대중적인 인기를 구사하는 축구나 야구조차도 온 국민이 열광하는 국가대항전 정도만 사람들 틈에 섞여 겨우 보곤 했다. 그러니 그 외에 해당하는 배구는 뭐… 굳이 더 갖다 붙일 말도 없었다.

“자, 던지는 거 봤으니 네 실력은 알겠고. 그럼 이제 네가 원하는 그림을 말해 봐.”

“무슨 그림?”

“시구하러 온 사람들 보통 다 방금 네가 했던 것처럼 던져. 그렇게 던져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고.”

“…….”

“근데 네가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한 건 뭔가 다른 걸 원해서 그런 거 아니야?”

“…너 갑자기 내 마음을 왜 이렇게 잘 아냐?”

“그러니까 어떤 걸 원하시냐고요. 목표 겨냥해서 맞춤으로 솔루션 내려 드릴게.”

시구 스케줄이 생겼다는 걸 듣자마자 지수는 제일 먼저 다른 사람들의 배구 시구 영상부터 찾아봤었다. 인기순대로 정렬해 차례대로 여러 영상을 봤으나 던지는 모습은 하나같이 다들 비슷비슷했다.

“나는 좀… 임팩트 있게 하고 싶어.”

“임팩트?”

“그냥 한 번 어설프게 던지고 나가는 거 말고, 이왕 하는 거… 폼이 좀 났으면 좋겠어. 너도 알겠지만… 나 이번 드라마는 진짜 잘 돼야 하거든.”

경기 전 저를 초청해 준 팀 선수들과 짧게 연습해보는 시간이 있는 걸 알면서도 승에게 따로 연락한 이유 역시 그거였다. 처음 본 사람들에게 꼬치꼬치 뭔갈 묻기도 좀 그렇고, 또 설령 잘 알려 준대도 그렇게 잠깐 배워서는 아무래도 효과가 미미할 확률이 높았다.

“폼… 그래. 네 말대로 폼이 나려면, 공이 네트만 넘어가도 보는 입장에서는 폼 날걸?”

“그래? 그럼 쉽네.”

“너 진짜 배구 본 적 없구나.”

“응?”

“네트 높이가 이 미터 사십 센티가 넘어.”

“아하.”

네트가 땅에 붙어 있는 테니스 코트에 서 있기 때문일까. 지수는 배구 네트의 까마득한 높이를 조금도 가늠하지 못 하고 있었다. 이 미터 사십이면… 한 이 정도 되려나? 감이 잘 안 왔다. 팔을 위로 뻗어 높이를 어림짐작해 보던 지수는 다시 승을 졸랐다.

“그래서 어떻게 던져야 네트를 넘기는데? 빨리 가르쳐 줘.”

“네트까지 가려면 일단 비거리가 나오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

“오버 핸드로 가자.”

저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다가온 승이 땅에 공을 튀겼다. 지켜보던 지수 역시 질세라 뒤에 놓인 가방에서 공을 꺼냈다. 옆에 선 승을 똑같이 흉내 내며 공을 튀겨 보았으나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닥을 때릴 때마다 퍽퍽 소리를 내는 제 공과 달리 승이 튀기는 공에서는 유독 쫀득한 소리가 났다. 공과 바닥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고무줄로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자, 이게 기본자세.”

“응.”

지수는 승이 하듯이 왼발을 한 발 앞으로 내밀었다. 왼발이 오른발보다 앞에 있으니 아마 오른손으로 공을 치려는 듯싶었다.

“공이 너무 위에 있으면 타점이 잘 안 맞아서 멀리까지 안 나가거든? 앞에 있어야 돼. 눈앞에 띄운다고 생각해.”

“어.”

“팔은 어깨 뒤로. 손은 최대한 펴고.”

“…어.”

연결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승은 움직임을 눈에 익힐 시간을 주려는 듯 이후로도 허공에 대고 팔을 반복해서 휘둘렀다. 넓은 어깨를 지렛대 삼은 긴 팔이 커다란 호를 그리며 시원하게 돌아갔다.

“…….”

직업인은 직업인이네. 선수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아예 태부터가 다른 동작을 보던 지수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토스가 중요해. 그래야 잘 맞거든.”

왼손으로 살짝 밀어 친 공이 위로 붕 떴다. 올라간 공의 꽁무니를 쫓으며 턱을 든 승이 떨어지는 타이밍에 맞춰 팔을 휘둘렀다.

“와, 대박….”

뻥! 속이 시원해지는 타격음을 남긴 공은 순식간에 족히 십오 미터는 날아갔다. 훌륭한 교본을 라이브로 목격하자 의욕이 솟았다.

쟤처럼, 그러니까 내가 본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제대로 목격했음을 자신하며 지수는 다시 공을 띄웠다.

“나는… 왜 안 돼?”

승이 했던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시원한 타격음을 기대하며 사력을 다해 쳤으나 어쩐지 이번에도 어설픈 팟, 소리에 그치고 말았다. 지수는 네트에 한참 못 미치게 떨어진 공을 절망스레 응시했다.

“야, 여기로 쳐.”

거듭된 실패에 의기소침해지려던 찰나 성큼 다가온 승이 손목을 낚아챘다.

“응?”

“손금 아랫부분.”

바싹 깎아 언제나 하얀 부분이 조금도 없는 검지 손톱 끝이 손바닥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두꺼운 손금을 문질렀다.

“어?”

“여기.”

잡힌 손목으로 뜨끈한 체온이 전해졌다. 길고 잘생긴 손가락이 긁고 간 손금 위로 간질간질한 기분이 알레르기 반응처럼 퍼져 나갔다.

“아…. 어, 알겠어.”

낯선 찌릿함을 떨쳐 내려 지수는 공연히 주먹만 쥐었다 펼쳤다. 불쑥 다가와 남의 손금 위에 웬 자국을 새겨 넣은 승은 홀연히 돌아서더니 다시 공을 내밀었다.

“밑 부분으로 쳐 봐.”

“…….”

지수는 심기일전하는 심정으로 공을 받아 들었다. 토스가 중요하다고 했지. 승의 조언을 떠올리며 공을 살짝 띄웠고, 그와 동시에 턱을 위로 든 지수가 팔을 위로 뻗었다.

팡! 손바닥 하단이 정확히 공 표면에 부딪히며 아까보다 훨씬 경쾌한 소리가 났다. 처음 해 보는 공놀이에 마침내 재미가 붙으려 했다.

힘있게 정면으로 날아가는 공을 보며 지수는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같은 진부한 격언을 사랑해 마지않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었다. 가벼운 공놀이에서조차 노력은 정말이지 배신을 몰랐다.

“팔, 팔. 뒤에서 앞으로.”

“뒤에서 앞으로? 이렇게?”

“응.”

지수는 던질 때마다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발전이 몸소 느껴지자 저로서도 사력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작이 몸에 익을수록 공이 날아가는 거리 역시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칠 때 체중 더 싣고.”

한동안 바로 옆에 붙어서 기본기 강습에 열을 쏟던 승은 언젠가부터 건너편 코트에서 제가 던진 공을 수거하는 중이었다. 눈이 정수리에도 달렸는지 떨어진 공을 주우면서도 이래라저래라하는 코칭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단시간에 열과 성을 쏟아 냈더니 어깨가 삐거덕댔다. 선수들은 이걸 어떻게 계속하는 걸까. 매번 같은 자리로 쳐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공과 맞부딪히는 손바닥이 쓰리고 얼얼했다. 

“어때. 나 이제 잘하지?”

순간적으로 기운이 빠진 지수는 띄운 공을 힘없이 쳐 냈다. 아, 진짜 되게 힘드네. 잠깐 무릎을 짚고 있다가 어느덧 빨갛게 변한 손바닥을 내려다보는데 방금 쳐 낸 공이 휙 다시 날아왔다. 아픈 손을 맞비비던 지수는 자로 잰 듯 정확히 제 앞으로 날아온 공을 얼떨결에 품에 안았다.

“야, 고지수. 너 왜 대충해?”

“…….”

잡은 공을 옆구리에 끼운 지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쟤는 또 왜 저래. 가방 가득 공을 담아낸 승은 네트 건너편에서 진지하게 제 태도를 나무라고 있었다.

“어? 한 번을 해도 제대로 해야 실력이 늘지.”

연습 1일 차 아마추어의 전후 사정 따위는 일절 고려하지 않는 싸늘한 질책에 흥이 싹 달아났다. 이제껏 열심히 하다가 딱 한 번 힘이 달려 살짝, 아주 살짝 대충 쳤던 건데…. 반반한 코트 바닥에 운동화를 문지른 지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른 말을 꺼냈다.

“너 은퇴하면 무슨 자격증 같은 거 따서 애들 가르칠 거라고 했지? 내가 보기에 그거 좀 아닌 것 같으니까 너 오늘 집 가면 인생 플랜 다시 세우던가 해라.”

“뭐?”

“그렇게 짜증이 많아서 어떻게 애들을 가르친다고….”

“…….”

네가 애들을 알아? 의젓하게 굴다가도 피 칠갑 분장을 한 배우가 피에로 같다며 슛 들어간 카메라 앞에서 으앙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애들이었다. 그 나이대 애들이 얼마나 예민한 감수성을 장착했는데.

혼쭐이 난 지수는 깊은 심호흡과 함께 이를 악물고 공을 띄웠다. 잠시 기다렸다가 최적의 순간에 체중을 가득 실은 팔을 휘둘렀더니 내려오던 공이 빵 소리를 내며 앞으로 직진하듯 날아갔다.

“선생님, 저 공 없는데요? 빨리 공 주세요.”

이제 가진 공이 하나도 없는 지수가 애들 흉내를 내며 승을 보챘다. 이러다 어깨 빠지겠네. 아무렇지 않은 척 얄미운 소리를 뱉었지만 힘주어 돌린 어깨가 고통을 호소했다.

와중에 네트를 무사히 넘어간 공만은 참을 수 없게 만족스러워 지수는 선 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더없이 훌륭한 포물선에도 칭찬 한마디 해 주지 않은 승은 조용히 떨어진 공을 주워 다시 제 쪽으로 던졌다.

“야, 최승. 너 왜 대충해?”

“…….”

가볍게 날아 퍽 땅으로 꽂힌 공이 신발코를 간질였다. 성의 없이 날아온 공의 궤적은 던진 이의 기분 위에 종이를 대고 그대로 떠 낸 탁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직했다.

“한 번을 해도 제대로 해야 실력이 늘지.”

“…….”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어?”

지수는 조금 전 승이 제게 했던 말을 정확히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후, 제가 지어낸 그럴듯한 격언을 피날레 장식처럼 얹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저를 싸늘하게 한번 건너다본 승은 곧 공 하나를 들고 코트 바깥으로 향했다. 미끈하게 쭉 뻗은 콧대 아래로 씩씩대는 콧김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오….”

뭔가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을 느낀 지수의 입에서 흡사 멜로디에 가까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두껍게 칠해진 흰색 라인을 그대로 지나 철조망 바로 앞에 멈춰 선 승은 탄성을 확인하듯 땅에 공을 튀겼다.

“…….”

팡, 팡, 팡. 일정한 음을 자랑하며 정확히 세 번 튕겨진 공이 왼손 위에 올랐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공이 넓은 손바닥 위에서 반 바퀴쯤 회전할 동안 승은 나머지 오른손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갑자기 무슨 폼을 저렇게 잡냐. 의미 모를 행동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있으려니 따르릉따르릉 자전거 벨 소리가 철조망 바깥으로부터 들려왔다. 잎 없이 앙상한 가지만 듬성듬성한 수풀 사이로 자전거가 쌩하니 모습을 감출 때였다.

아무런 예고 없이 몇 걸음을 달려 나온 승이 공을 띄우며 점프를 했다. 정확히 경계선 바로 앞에서 위로 붕 떠 오른 승의 허리가 반 곡선 모양으로 예쁘게 휘었다. 손을 뻗느라 훌렁 들린 후드티 사이로 하얗고 탄탄한 복근이 빛났다.

“오…….”

입이 벌어졌다. 사람이 도움닫기 없이도 저만큼 뛸 수가 있는 거야? 놀라운 인체의 신비와 함께 지수는 진심 어린 감탄사를 뱉었다. 보기 드문 진귀한 광경에 귓바퀴 위에 난 솜털마저 바짝 곤두서 경의를 표했다.

쩍 소리를 내며 떨어진 공은 제가 있는 코트의 한구석을 때리고 달아났다. 공을 포탄으로 둔갑시키는 마술을 선보인 승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바닥에 놓인 타포린 백을 어깨 뒤로 훌러덩 둘러멨다.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진짜….”

“…무, 무슨 복.”

벌써 여러 번 봐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투덜거림 앞에서 지수는 우습게도 말을 살짝 더듬었다.

“오늘 있었던 일 이거, 나중에라도 사람들한테 꼭 말하고 다녀.”

“…뭘?”

“너 시구 연습하는데 내가 따라다니면서 공 주워 줬다고 말하고 다니라고. 그냥 따라다닌 것도 아니고, 아주 졸졸 따라다니면서 주워 줬다고.”

“…….”

“꼭 말해, 응? 나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아주 놀라서 까무러칠 거니까.”

뼈있는 투정을 깔끔하게 쏟아낸 승이 코트 구석으로 향했다. 방금 던졌던 마지막 공을 주우러 가는 것 같았다.

내가 좀… 장난이 심했나. 아랫입술을 꾹꾹 씹던 지수는 굳어 있던 다리를 세차게 놀려 앞서가던 승을 따라잡았다.

“코치님, 제가 줍겠습니다.”

“이렇게 되바라진 선수, 나는 둔 적이 없는데?”

말로는 둔 적이 없다고 하면서도 승은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여전히 화가 났다는 걸 강조하듯, 샐쭉하게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아 공을 낚아챈 지수 역시 연옥 앞에서나 가끔 보이는 착한 얼굴을 해 보였다.

공으로 가득 찬 가방이 다시 텅 빌 때까지 지수는 한 번 더 연습을 했다. 여태 들은 조언을 모두 되새기며 터치 한 번에도 최선을 다했더니 승은 그제야 흡족한 듯 더는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가방이 텅 비었고, 민들레 씨처럼 코트 위에 흩뿌려진 열 몇 개의 공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평화롭게 연습을 종료한 두 사람은 근처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딱히 엄청나게 격한 동작을 한 것도 아닌데 끝나고 나니 그것도 운동이라고 갈증이 났다.

얼어붙은 바깥과 반대로 내부는 히터가 과하게 짱짱했다. 입맛을 다시는 혀끝에서 텁텁한 공기 맛이 느껴졌다. 편의점 냉장고 앞에 선 지수의 시선이 주류 코너로 향했다. 침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흘긋흘긋 냉장고를 훔쳐보던 지수가 옆에 선 승에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맥주?”

“미안. 경기 전날엔 술 안 마셔.”

재미없는 놈.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모범 답안을 제출한 승은 맥주 대신 캔 콜라를 꺼냈다.

쌉싸래한 맥주 맛이 아른거리긴 했으나 목을 뻥 뚫어 줄 가벼운 탄산도 나쁘진 않았다. 설탕이 전혀 함유되지 않은 제로 콜라를 골라 든 승 옆에서 저 혼자만 술을 마시고 싶진 않았으므로 지수 또한 같은 걸 집었다.

콜라를 집어 든 승은 잘 정리된 편의점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봤다. 계산대 근처에서 얌전히 일행을 기다린 지수는 콜라 두 캔을 함께 계산했다.

바깥에는 편의점이 으레 그러하듯 플라스틱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입구에서 제일 먼 자리로 향한 둘은 꼭짓점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정사각형 테이블을 한 면씩 차지하고 앉았다. 하얀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차가운 캔 콜라가 하나씩 놓였다.

“인간적으로 레슨비가 너무 헐값인 거 아니냐.”

“…다시 들어갈래? 너 사고 싶은 거 내가 다 사 줄게.”

지수는 정말 일어날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겨우 콜라 하나 집어 온 게 누군데…. 쪼잔하다는 누명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손짓에 발짓까지 동원해 적극적으로 해명을 시도하는 지수 앞에서 승은 꿈쩍도 안 하고 입고 있는 외투 주머니에 손만 찔러 넣었다.

“편의점에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걸 판다고…. 그냥 적립해 둬.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에 더 좋은 걸로 받을게. 근데 너 저번에도 시사회 티켓 준다고 해 놓고 주지도 않고…. 너 혹시 맨날 말로만 이러는 거 아니야?”

승으로부터 깜짝 택배를 받았던 날 제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간 답장이 떠올랐다. 내가 그런 말도 했었지, 참. 불명예를 털어 내고자 덤벼들었는데 잊고 있던 전적까지 화두에 오르며 오해가 두 배로 공고해졌다.

“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갚을게. 그러니까 너도 꼭 기억하고 있다가 좋은 걸로 받아 가라. 네 몸값에 상응하는 만큼 꼭 받아 가, 알겠지?”

“내 몸값? 너… 괜찮겠어?”

눈을 과장해서 둥그렇게 뜨고 되묻는 게 상당히 재수가 없었다. 얘는 잘 나가다가 꼭 이러더라. 그대로 뒀다간 좀 전의 특별 레슨을 두고 솟았던 고마움마저 다 사라질 것 같아 지수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봤다.

삭막한 도시의 밤하늘에는 인공위성 불빛들만 점점이 박혀 있었다. 별이라고 하기엔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빨간 점을 응시하던 지수는 승을 향해 조금 뜬금없는 질문을 날렸다.

“넌 취미가 뭐냐.”

“취미? 나 청소.”

매번 부르면 부르는 대로 재깍 나오는 게 신기해서 한 질문이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갑작스러운 만남 요청에 충분히 거절을 놓을 만도 했는데 승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로 승낙을 했다.

얘는 쉬는 날 도대체 뭘 할까. 고차원적인 사고가 가능하고, 유희를 즐길 줄 아는 인간 대 인간으로 궁금한 점을 물은 거였는데 승은 고민도 않고 이상한 답을 들이밀었다.

청소? 과연 그걸 취미라고 할 수 있나. 추상적인 단어의 허용 범위를 헤아리던 지수가 한쪽 눈을 살포시 찡그리며 다른 답을 재촉했다.

“그거 말고.”

“음… 세차?”

그것도 취미야? 어째 답이 하나같이 다 이상했다. 세차에 비하면 차라리 좀 전에 말한 청소가 훨씬 그럴듯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게임 같은 건 안 해?”

“나 게임 싫어해.”

호오의 뜻을 전하는 표정이 단호했다. 승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까지 젓고 있었다. 좀체 본 적 없는 강력한 의사 표현에 지수는 설명 없이도 그 이유를 눈치챘다.

지는 걸 못 견디는 거겠지. 해당 게임의 모든 메커니즘을 설계한 개발자라 하더라도 한 번도 지지 않고 전체 플레이를 끝마치는 건 확률상 제로에 가까울 터였다.

게임하는 최승? 아마 다크서클이 내려와 판다 같아진 눈을 하고 조이스틱을 죽어라 두드려 대겠지. 승이라면 뭐가 됐든 끝판을 깰 때까진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거기에만 매달릴 것 같았다.

“너도 경기 중에 화나면 막 욕하고 그래?”

“별로.”

“…….”

“나는 좀… 그런 스타일은 아니야.”

불같은 승부욕과 그걸 밀어붙이는 집요함으로만 보면 얼핏 굉장히 공격적일 것 같은데 승은 또 신기하게 그런 구석은 없는 편이었다. 좀 투덜거리고 때때로 애 같은 고집을 피워서 그렇지 말버릇도 저보다 깨끗했다.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은근히 왕자님 같은 구석이 있단 말이지. 그간의 날들을 돌이켜 보아도 욕은 고사하고 가벼운 비속어를 쓰는 것조차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험한 말을 뱉는 게 선뜻 그려지지 않는 귀티 나는 이목구비를 보며 지수는 또 한 가지 새로운 질문을 했다.

“너 그럼 살면서 누구랑 싸워 본 적은 있어?”

“주먹질?”

“어.”

“있어, 딱 한 번.”

있다고? 이것도 의외네. 욕도 안 하는 애가 왜 싸움박질을 했을까.

세차게 이는 호기심에 녹다 만 떡처럼 흐물흐물하게 퍼져 있던 지수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언제?”

“중학교 때. 전국체전 지역 예선이었는데, 아마 그게 3세트였나?”

잠시, 잠시만….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지수는 중대한 발표를 하려는 사람처럼 번쩍 손을 들었다.

“…경기 중에 사람을 때렸다고?”

“어.”

“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을 때렸을까. 그것도 경기 중에. 이유를 묻는 지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걔가 엄마 욕을 해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건 흐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지수의 입이 합 다물렸다. 그래, 그런 일이라면…. 그런 일이라면 온순한 왕자님을 급진적 폭력주의자로 변모시키기에 충분한 이유 같았다.

승과 저는 동갑이니 중학교 때면 대략 십 년 전쯤 될 테고…. 제 기억이 옳다면 혜경은 그때도 아주 유명한 배우였다. 정도를 모르는 저열한 애들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나 있는 법이니 잘나가는 엄마의 유명세가 승에게 약점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네가 싫으면 네 욕을 하면 되지 왜 선생님 욕을 하냐?”

“아, 내 말이.”

마침내 알게 된 폭력 사건의 전말이 씁쓸했다. 지수는 앞에 놓여 있던 콜라 캔으로 손을 뻗었다. 얼른 따서 마실 심산으로 알루미늄으로 된 고리에 손가락을 걸려는데 옆에서 끼어든 손이 차가운 캔을 가로채 갔다.

“좀 닦고 마셔라. 그게 얼마나 더러운데.”

자기 옷은 깨끗하다 이건가. 입고 있는 후드티의 소매를 길게 뺀 승이 입이 닿는 부분을 꼼꼼히 닦았다.

“…….”

“자.”

세균도 학을 떼고 도망갈 정도로 빡빡 문지른 승은 곧 시원한 소리와 함께 고리가 앞으로 꺾인 캔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옷감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에서는 반질반질 윤이 났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어떻게 됐냐고. 만족할 만큼 패 줬어?”

“아니, 제대로 패기도 전에 바로 퇴장당했지.”

사람 패서 경기 중에 쫓겨난 이야기를 승은 전래동화 들려주듯 재밌게도 했다.

“멋지게 퇴장당하고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엄청 혼나고.”

“…진짜? 왜 때렸는지 말씀드렸는데도?”

“어.”

제 것과 더불어 본인 몫의 캔도 세심하게 닦아 낸 승이 고리를 젖혔다. 탄산 알갱이가 캔을 두드리는 청량한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근데도 네 편 안 들어 주셨어?”

“내 편 하나도 안 들어 주고 행동거지 그따위로 하고 다닐 거면 운동 때려치우라고 욕만 더 먹었는데.”

억울했을 지난날의 에피소드를 담담하게 털어놓으며 승은 테이블 위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 냈다. 더러운 캔 음료에 이어 이번엔 바람을 타고 온 모래 알갱이가 왕자님의 심기를 건드린 듯싶었다.

지금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바르게 잘 자란 티가 여기저기서 묻어나는 승이었지만, 그게 꼭 훤칠하고 훌륭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 좀… 집에서는 순종적인 아들이었나 봐?”

“…순종적?”

“왜?”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해 줄 순 없는 거야?”

자칫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제 표현을 손수 교정해 주며 승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맞다. 듣고 보니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는 그런 훌륭한 표현이 있었네. 테이블 위를 구르던 모래알들이 승의 손길을 따라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럼 그 이후부터는 그런 소리 들어도 다 참았어?”

“미쳤어? 그런 걸 참고 넘어가게.”

“……안 참았다고?”

“쓰잘데기없는 소리하는 놈들 다 잡아다가 코트 위에서 아주 박살을 내 줬지. 그건 합법이잖아?”

유쾌한 너스레에 웃음이 터졌다. 그럼 그렇지. 못난 구김살이랄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보고 있자니 어떤 가능성 하나가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쩌면 적당히 괜찮은 사이로 남을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우리가 시작은 조금 이상했었지만, 이대로라면 그럭저럭 편하게 알고 지내는 친구 같은 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너 그 멍청했던 애들 덕분에 실력 많이 늘었겠다.”

한 가닥 희망을 품은 지수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향했다.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어때.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승의 생각이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뭐… 훌륭한 선수 탄생에 걔네의 공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하지.”

지금은 그저 이 시시한 대화가 즐거운 듯 시원하게 올라간 승의 입꼬리를 계속 보고 싶을 뿐이었다.

* * *

드디어 남천시 중심부로 진입한 밴 안에서 지수는 이제 막 올라온 상지의 기사를 읽었다. 오, 잘했나 보네. 13분 전에 올라왔다는 따끈따끈한 인터넷 기사에선 농구공을 든 상지가 조금 엉거주춤한 자세로 활짝 웃고 있었다. 하얀 긴 팔 티셔츠 위에 민소매 유니폼을 겹쳐 입은 수수한 모습이 풋풋한 대학생 같아 보였다.

제가 남천시로 오게 된 것과 같은 이유로 상지 역시 농구장을 방문했다. 이름 앞에 드라마 타이틀을 달고 실질적인 활동에 돌입하자 집에서 혼자 대본을 읽을 때와는 기분부터가 달랐다. 다가오는 주말엔 대본 리딩 현장을 녹화한 클립 영상이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한 차례 소소한 홍보 자료가 풀리고 나면 다음 주부터는 빽빽한 촬영 일정이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수는 드라마의 성공을 염원하며 기사 아래에 달린 댓글들을 훑어봤다. 중간에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를 홍보하는 광고성 리플이 하나 있긴 했지만, 오랜 활동으로 대중 평판이 워낙 좋은 상지답게 댓글란은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개나리 컬러의 민소매 유니폼을 입은 싱그러운 상지의 사진이 원만한 출발의 신호탄처럼 느껴졌다.

경기 시작은 두 시였으나 지수와 현욱은 그보다 훨씬 이르게 경기장에 도착했다. 안내를 따라 대기실로 향한 지수는 구단의 홍보 담당 관계자와 깍듯하게 인사를 나눈 후 곧장 오늘 입을 유니폼을 건네받았다.

발랄한 빨간색 유니폼은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채도가 훨씬 높았다. 지수는 아까 본 기사 사진 속 상지가 그러했듯 걸치고 간 검은색 긴 팔 티셔츠 위에 유니폼 상의를 덧입었다. 공들여 드라이한 헤어가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유니폼을 착용한 후, 곧바로 넓은 거울에 얼굴에 비춰 보던 지수가 근심 어린 얼굴로 현욱을 불렀다.

“형.”

“응?”

“나 이 색 진짜 안 어울린다, 그치?”

“…….”

소속 연예인 일이라면 없는 말을 지어내서라도 기를 살려 주는 현욱조차 말이 없었다. 붉은 계열이라면 원래도 젬병이었다.

톤을 살짝 죽인 와인색 정도만 됐어도 무난하게 봐줄 만은 했을 텐데 하필…. 각종 로고와 글자로 어지럽게 장식된 강렬한 빨간색 원단이 목 아래에서 크로마키 판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형, 빨리 나가자.”

그대로 계속 거울을 봤다간 심란함만 배가 될 것 같았다. 평소 거의 입지 않는 색을 뒤집어쓴 꼴이 굉장히 어색했으나 그렇다고 중요한 사항도 아니었기에 지수는 서둘러 정리를 끝내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시합을 앞둔 경기장 뒤편은 경기 준비를 하는 양 팀 관계자들로 분주했다.

관중들이 입장하기 전 막바지 준비가 한창인 틈바구니에서 무전기를 든 단정한 용모의 남자가 두 사람 곁을 스쳐 지나갔다. 관계자임을 알리는 명찰을 목에 건 남자는 짙고 푸른 남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앞서가는 관계자의 눈치를 재빨리 살핀 현욱이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지수 너는 저런 색이 잘 어울리는데…….”

아까 제가 물었을 땐 말없이 동공만 흔들던 현욱은 뒤늦게 솔직한 의사를 전해 왔다. 내가 좀… 저런 서늘한 파란색이 잘 받긴 하지. 지수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 소리 없는 동의를 보내며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늘의 시구자를 기다리고 있던 TX화재 소속의 선수 세 명이 저를 반갑게 맞았다. 빨간 천이 닿는 목부터 피부가 떠 보이는 저와 달리 유니폼을 멋지게 소화한 선수들과 지수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이 영상을 볼 TX화재의 팬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는 카메라맨의 다소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무척 감사하고 영광이라며 즐겁게 소감을 밝혔다.

지켜보던 선수들은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추후 구단의 공식 채널에 올라간다는 말을 제게 전하며 카메라의 집요함을 고발했다. 호의 가득한 가벼운 대화 덕에 조금 딱딱했던 분위기가 빠르게 유해졌다.

“언더? 오버?”

시구 상황을 미리 연습해 보기 위해 공을 넘겨준 선수가 제게 물었다. 장신의 선수 세 명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약간씩 뒤로 젖혀야만 하는 상황이 익숙지가 않았다.

“저는… 오버로 해 보겠습니다.”

시선이 위로 향해 인상이 조금 온순해진 지수가 낮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몰라, 모르겠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제 테니스장에서 연습했던 게 아마 오버였던 것 같았다.

“오, 오버.”

“오버… 흠, 쉽지 않으실 텐데.”

저를 위한 설명을 경청하는 지수의 시선이 정면의 장애물로 향했다. 네트가 저렇게 높아? 촘촘한 그물이 땅과 붙어 있던 테니스장과 비교하면 지금 보고 있는 네트는 마치 하늘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어제 헤어지기 전 승이 제게 마지막으로 했던 당부가 뭐였더라.

“공을 이렇게 딱 띄우고, 반대편 손으로 팡! 떨어지는 타이밍을 잘 맞추면 돼요.”

이대로라면 문제없을 테니 네트 높이에 지레 겁먹지만 말라고 했었지.

실전이 다가오자 더욱 귀하고 시기적절해진 그 조언을 지수는 천천히 곱씹었다.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시범을 보인 선수가 친 공이 툭 소리를 내며 네트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떨어지는 공이 그리는 포물선을 주시하던 지수가 심호흡과 함께 공을 띄웠다.

탄탄한 가죽이 위에서 앞으로 뻗은 손바닥 아랫부분을 치고 지나갔다. 따끔한 아픔이 한겨울의 시린 강바람을 떠올리게 했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을 땐 이미 공이 손을 멀리 떠나 버린 후였다.

“어? 너무 잘하시는데….”

제가 하는 걸 주의 깊게 지켜보던 선수들 얼굴 위로 옅은 당황이 퍼져 나갔다.

통, 통…. 가볍게 휙 날아 너끈히 네트를 넘어간 공이 코트 반대편을 자랑스레 구르고 있었다.

“너 기사 떴다.”

옆자리에 앉은 현욱이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석상처럼 굳어 코트만 노려보던 지수가 코앞으로 다가온 두꺼운 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화면을 살폈다.

[스포츠타임] “TX화재 파이팅~!” 고지수, 네트 넘긴 멋진 오버 핸드 시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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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3라운드 1경기(TX화재 대 세계건설)에서 배우 고지수가 시구를 하고 있다. /장소: 숭인실내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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