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3)

퍼펙트 클린

우연인지 고의인지, 승은 정확히 제 얼굴을 반쪽만 더럽혔다. 지수는 눈썹을 중심으로 물감처럼 흩뿌려진 자국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내디딜 때마다 쨍한 감각과 함께 축이 고장 난 것처럼 몸이 기울었다. 무릎을 꿇은 채 애를 썼더니 다리에 쥐가 난 것 같았다.

곧장 싱크대 앞으로 간 지수는 콸콸 쏟아지는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했다. 눈두덩이를 포함해 왼쪽 얼굴이 죄다 끈적거렸다. 헤어밴드도 없이 허리까지 한참 숙이고 얼굴을 씻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질척한 얼룩을 남김없이 씻어 내고 다시 자세를 바로 했을 때는 귀 뒤에 잘 고정해 둔 머리카락들이 죄다 흘러내려 찝찝하게 젖어 있었다.

가르마를 새로이 새겨 넣기라도 하듯 제 머리카락을 헤집던 승의 손길이 선연했다. 한참이나 벌리고 있던 턱이 치과 치료를 받은 직후처럼 얼얼했다. 손으로만 쥐어도 위압감이 엄청난데 그걸 입에 처박고 있었으니…. 한순간의 객기가 남긴 여파치고는 고통이 상당했다.

지수는 방금 막 첫 사랑니를 뽑은 사람처럼 턱을 감쌌다. 훈훈한 실내 온도에도 불구하고 척추뼈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뒤가 조용했다. 선뜻 돌아보기가 무서울 정도의 고요함이 등 근육을 긴장시켰다.

“…….”

참을 수 없이 욱했던 와중에도 차마 환한 데서는 그런 짓을 벌일 자신이 없어 불부터 껐다. 좀 비겁했나. 이미 벌어진 일을 이제 와서 공정하게 뜯어고칠 수도 없었다.

집이 여전히 깜깜했으나 차차 어둠이 눈에 익어갔다. 이젠 뒤집어진 채 건조대에 놓인 유리컵 손잡이마저 선명하게 구분이 됐다. 바싹 마른 컵 표면을 응시하던 지수는 결국 키친타월을 몇 장 뜯었다.

두껍고 흡수력이 좋은 티슈는 피부에 닿자마자 물기를 빨아들였다. 힘주어 얼굴을 눌러 닦으며 지수는 다소 건조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나중에 애인 생기면 너도 이렇게 해 줘.”

“…….”

“네 애인 다리 사이에도 우리처럼 그런 게 달려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니 제 말에 숨은 속뜻 정도는 충분히 알아듣고도 남을 거였다. 지수는 제가 가진 것 중 촉이 가장 두꺼운 펜을 꺼내, 승과 저 사이에 제가 할 수 있는 제일 굵고 진한 선을 그었다.

유령처럼 꼼짝없이 앉은 자리를 지키던 승은 그제야 주섬주섬 정리를 시작한 듯싶었다. 돌아서 있는 탓에 보이는 건 전혀 없었지만, 막연히 엄청 화가 났을 거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내쉬는 숨소리가 낮고 무거웠다.

마지막 말이 결정타였겠지. 경악과 환희가 오묘하게 섞여 새로 빚어낸 것처럼 반짝이던 얼굴이 못내 눈에 밟혔다. 강한 자극에 어쩔 수 없이 들뜬 와중에도 저를 먼저 살피는 눈에선 악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누가 될진 몰라도 네 애인은 엄청 행복하겠다. 봐, 네 박력에 애인 아닌 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넘어갔잖아?”

흥분의 기색을 싹 걷어 낸 승이 읊조리듯 말했다. 한껏 빈정대는 말투는 앞뒤 안 가리고 남의 다리 사이로 돌진할 수 있었던 제 객기의 원천을 떠오르게 했다.

“…….”

쟤 저러는 게 보기 싫어서 그랬었지. 싱크대 턱을 짚고 선 지수의 손에도 다시 힘이 들어갔다. 매사에 건강한 에너지를 자랑하던 승이 저를 따라 하겠답시고 삐딱하게 나오는 게 얼마나 꼴 보기가 싫던지.

“오늘 은혜는… 조만간 갚을게.”

조만간? 이 새끼는 진짜 벨도 없나. 지금은 다음 만남을 약속할 게 아니라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이 나와야 마땅한 시점이었다. 눈치가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런 몹쓸 수모를 겪고도 다음을 기약하는 승의 정신력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

그대로 굳은 지수는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묵묵히 싱크대 앞을 지켰다. 문을 닫고 떠나는 승의 표정이 어땠는지 궁금했으나 보지 못했으니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모르겠지.

복도를 지나는 발걸음이 조금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방이 쥐 죽은 듯 잠잠해지자 지수는 벽으로 다가가 불을 켰다.

반듯하게 정리된 식탁에는 제가 뜯었던 생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약속했던 십 분보다 훨씬 길게 머물다 갔건만 승이 있던 자리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 * *

승을 만나기 이전에 제가 맺었던 모든 관계는 일종의 계단 오르기에 비유할 수 있었다. 1층에 도착하지 않고는 2층에 갈 수 없고, 마찬가지로 2층을 지나지 않고서는 3층에 갈 방법이 없었다.

물론 상대의 성격이나 당시 처한 환경, 혹은 만나게 된 계기 같은 여러 조건에 따라 속도의 차이는 있었다. 느리기도 하고 또 언제는 조금 빠르기도 하고, 때에 따라 제각각이었지만 그 어떤 과정에서도 스킵은 없었다. ‘차근차근’, 그건 모든 종류의 관계 맺기가 거쳐 가야 하는 제1의 규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따져 보면 승과 저는 첫 단추부터가 글러 먹은 셈이었다. 둘은 예외 없이 적용되는 규칙을 깨부수고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8층 정도 될까.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층을 지나쳐 8층까지 도달했다. 2층부터 7층까지의 상황은 전혀 모르는 채로.

겪고 보니 몸을 섞는다는 게 그런 일이었다. 내밀하고 은밀한 접촉은 상대를 아주 잘 알게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만약 제가 조금만 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면 저 역시도 그 속임수에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오늘은 여섯 시 이후로 물만 마셔.”

“그럼 저 내일 화보 촬영 끝나면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어도 돼요?”

“마음껏은 안 되고… 마음껏의 삼 분의 일 정도만 먹어. 마음껏은 안 돼. 절대 안 된다, 알겠지?”

잡지 화보 촬영이 내일 오후로 다가왔다. 혹독한 트레이닝과 함께 먹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지수는 헬스장 매트에 엎드려 스타일리스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내일 현장에 동행할 회사 소속의 스타일리스트는 촬영 때 입을 옷에 콘셉트 시안을 덧댄 자료를 제게 미리 보내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진짜요?”

좀처럼 봐주는 법이 없는 세용이 웬일로 반가운 소리를 했다. 기력이 없어 실시간으로 죽어 가는 중에도 일찍 끝난다는 말은 놓치지 않고 알아들은 지수가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응, 여기서 더 하면 너 오늘 밤에 폭주할 것 같다. 무서워. 내가 무서워서 더 못 시키겠어.”

세용의 확언에 한시름 놓은 지수는 휴대폰을 붙잡고 막 전달받은 사진들을 다시 꼼꼼하게 훑어봤다. 하루 일찍 스튜디오에 방문해 미리 찍어 온 고운 한복들은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분위기를 풍겼다. 구석구석에 있는 화려한 장식들은 못 해도 장인 손이 열두 번은 더 갔을 것 같았다.

얼른 끝내고 음식다운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마지막으로 간이 된 음식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지난주 주말, 현욱과 백반집에서 먹었던 꿀맛 같던 점심이 지나치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저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내일 촬영이 몇 시라고 했지?”

“슛 들어가는 건 모르겠는데… 일단 열두 시까지 스튜디오에 가기로 했어요.”

“점심때네? 그래도 일찍 일어나서 부기 쫙 빼고 가.”

“먹은 게 없어도… 사람이 부어요?”

콘셉트 확인을 끝낸 지수는 심란한 마음으로 메시지 창을 들락거렸다. 적당한 때를 노린답시고 혼자 망설인 게 오늘로써 벌써 사흘째였다.

잘못 끼운 단추에는 작별을 고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만나서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 때보다도 험악했던 지난번 분위기 때문에 좀처럼 용기가 안 났다.

“당연하지. 일어나면 찬물로 세수 화끈하게 하고, 얼굴 마사지도 좀 하고 가. 그럼 확실히 달라.”

그대로 스크롤을 위로 쭉쭉 올리니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던 메시지들이 나왔다. 제 손목을 찍은 사진과 훤히 드러난 승의 허벅지 사진이 한 화면 안에 사이좋게 담겨 있었다. 남들에게 절대 보여 주지 못할 수위 높은 농담을 보니 초고속 엘리베이터의 위력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형.”

“응?”

“별로 안 미안한데 미안한 그런 기분 혹시 아세요?”

“어? 그게 뭐야.”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승에 대해 아는 일반적인 사실이라고는 모두 합해도 열 개도 채 되지 않았다. 이름 두 자, 현재 소속팀, 생년월일, 부모님 직업, 거기에 기껏해야 스파이더맨을 좋아한다는 유치한 영화 취향 정도.

대신 조금 음습한 다른 쪽으로는 아는 게 무궁무진했다. 승이 흥분했을 때 어떤 표정을 하는지, 어떤 체위를 좋아하는지, 절정이 남기고 간 여운을 어떤 식으로 즐기는지….

그런 것들은 고화질로 찍어 저장해 둔 영상을 재생하는 것처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혹시 내가 우리 와이프한테 느끼는 그런 감정인가? 가끔 와이프랑 싸우고 나면 처음에는 분명히 별로 안 미안하거든? 내가 잘못한 게 없으니까. 근데 갈수록 점점 미안해지면서 다 내 잘못 같아진다? 별로 안 미안한데… 미안해져. 이상해.”

냉랭했던 부부싸움을 되새기는 듯 세용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와, 형 제 말이 그 말이었어요. 지수는 속으로 열렬하게 맞장구를 쳤다.

“형 그럴 때 어떻게 하세요?”

“그냥…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 별수 있냐.”

지수는 요즘 승에게 미안했다. 이 기이한 관계가 마치 다 제 잘못처럼 느껴져서.

제가 그날 승에게 그렇게 커밍아웃만 안 했어도, 콘돔을 들고 다짜고짜 절 찾아온 승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쫓았더라면…. 완벽한 무시 앞에서는 걔도 더는 어떻게 고집을 못 부렸을 텐데.

스멀스멀 커지던 죄책감은 며칠 전 우연히 전해 들은 소식에 수십 배로 짙어졌다. 소소하기 그지없는 규모였지만 상영이 무사히 끝난 기념으로 감독이 전화를 걸어 왔었다. 영화에 대한 감상과 그간의 가벼운 안부 인사가 오가던 중 감독은 제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러면 효과가 있어요?”

부족한 예산으로 상영관을 구하느라 고전하는 스태프들의 사정을 전해 들은 혜경이 본인 출연료의 상당 부분을 기꺼이 반납했다고 했다. 덕분에 지방에 위치한 꽤 괜찮은 상영관 하나를 더 섭외할 수 있었다는 개봉 비하인드 스토리에 지수는 웃을 수가 없었다.

“효과?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

전화를 끊은 후부터 말 못 할 자괴감이 폭풍우처럼 밀려왔다.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저도 똑같이 출연료라도 뱉어 냈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싶었지만, 계약서에 명시된 정산 날이 한참 남은 저는 아직 제 몫의 출연료를 구경도 못 한 실정이었다.

감독은 뺄 전세금이 있고 혜경은 흔쾌히 반납할 수 있는 출연료가 있고, 나한테는 뭐가 있지? 빈곤한 통장 사정이 절망스러웠다.

“그래도 보통 미안하다는 소리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

빨갛게 변한 승의 허벅지 사진을 들여다보던 지수는 결심한 듯 화면을 꾹꾹 눌렀다.

저녁에 잠깐 만날 수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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