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23)

해피 버스데이

“…왜? 그러면 안 돼?”

기껏해야 마음이 바뀌었으니 태워 달라는 말 따위나 할 줄 알았는데…. 어퍼컷처럼 날아온 의외의 질문 앞에서 단순했던 추측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어, 안 돼.”

망설임 없는 답이 확고했다. 지수는 부상 당한 투수처럼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꽤 자라 목덜미를 덮기 시작한 지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피부로 느껴지는 안과 밖의 기온 차이가 흡사 문이 아니라 국경선을 사이에 둔 것 같은 착각을 만들었다. 산이 뚜렷한 붉은 입술이 다부진 느낌을 자아냈다.

“야, 뒤에 차 온다.”

창밖으로 손을 내민 승이 덥석 지수의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한 쌍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사이드미러 안에서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손목이 붙잡힌 지수는 한 박자 늦게 뒤를 살폈다. 지나가는 차에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는 듯 지수의 몸이 힘껏 차 쪽으로 밀착해 왔다.

“…….”

하얀 승용차를 시작으로 차는 몇 대나 더 지나갔다. 근처에 교차로가 있나. 조용했던 골목에 줄지어 들어오는 차들은 초록 신호를 받고서 일제히 같은 곳으로 몰려들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승은 끊길 듯 끊기지 않는 행렬이 끝나길 기다리며 사이드미러를 주시했다. 불편한 듯 붙잡힌 지수의 손목이 작게 꿈틀댔지만, 차가 계속 오고 있었다. 승은 거리가 다시 휑해진 다음에야 잡고 있던 지수의 손목을 놓았다.

“…….”

차체에 바짝 붙어 있던 지수의 몸이 멀어지며 잠깐 어색한 침묵이 끼어들었다. 창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지수는 이제 손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뼈가 잘생긴 곧은 손목이 제게 잡혔던 모양을 따라 빨갛게 부어 있었다.

“미안,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

“야, 손목 부러지는 줄 알았다. 너 잘난 거 충분히 알겠으니까 힘 조절 좀 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강철은 아니야.”

“…….”

지수는 오버스러운 농담으로 제 사과를 받아쳤다. 쓸려서 빨갛게 변한 피부가 꽤 아파 보여 승은 지수처럼 마냥 생각 없이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근데 나도 강철은 아닌데…. 겸연쩍어진 승은 공연히 미간만 문질렀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들어가라, 어? 너 바쁜 몸이잖아. 얼른 자야 아침에 또 득달같이 튀어 나가서 유산소 하지.”

“……알겠어.”

귀가를 독촉하는 눈빛이 불량했다. 또 한 번 꾸물댔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협박조의 말투에 승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밤 산책이 절실히 하고 싶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기꺼이 존중하며 갈 채비를 하는데 지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봐.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

한쪽이 애매하게 올라간 입꼬리에서 희미한 조소가 묻어났다. 아니, 이걸 조소라고 해도 될까. 얼핏 비웃음 같아 보였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대로 저를 다독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이어지는 단정에 승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묻고 싶었으나 말이 안 나왔다. 저를 보고 있는 지수의 눈이 확신으로 가득했다.

“저기 또 차 온다. 갈게.”

또 다른 한 쌍의 헤드라이트가 존재감을 과시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수는 반쯤 뛰는 듯한 걸음걸이로 차 후방을 둥그렇게 돌아 인도로 올라갔다.

무작정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던 그 당시로 시간을 돌려놓은 듯 아까와 같은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모르는 차들이 옆을 지나칠 때마다 열린 창문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닥쳤다.

안전벨트를 느슨하게 푼 승은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둡던 영화관, 장면이 전환되며 스크린이 밝아질 때면 저보다 두 줄 앞에 앉은 지수의 옆모습이 덩달아 빛을 받았다. 오똑한 콧날과 또렷한 인중 위에서 가늘게 부서지는 빛은 개기일식 중인 달을 연상케 했다. 컷이 바뀔 때마다 남의 콧등 위에서 반복되는 일식을 훔쳐보는 게 영화만큼이나 재미가 있었는데.

어느새 밖과 다름이 없어진 내부 온도를 느끼며 승은 좌측 깜빡이를 켰다. 절대 붙잡지 말라는 듯 제가 가야 할 방향과는 정반대 쪽으로 멀어지는 지수의 뒷모습이 조수석 사이드미러 안에 조그맣게 담기고 있었다.

* * *

아시안 게임 출전을 두 달 앞두고 있던 어느 오전, 선수단 이모저모를 촬영하기 위해 국영방송사 PD가 선수촌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막바지 체력 점검을 이유로 승이 속한 남자 배구팀이 해가 뜨기도 전인 이른 새벽부터 등산을 하고 돌아왔던 날이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는데 왜 시간이 이 모양인 거야? 할 만큼 다 한 것 같은데 아직 열두 시도 되지 않은 상황에 너나 할 것 없이 조금 황당해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 같은 내부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신참 PD는 의욕에 불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선수들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오늘 어떤 훈련을 하셨나요? 다들 지치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매일 이런 걸 하시나요? 훈련할 때 보통 어떤 생각 하시며 버티시는지…. 마지막으로 메달을 기대하는 국민 여러분께 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열을 식히기 위해 얼음이 가득 든 주머니를 이마 위에 얹은 고참 선배가 겨우 예의를 차려 무난한 인터뷰를 해냈다. 왕복 네 시간이 넘는 험한 산행 덕에 선수들은 물론이고 같이 정상을 찍고 돌아온 코칭스태프마저도 반쯤은 초주검인 상태였다.

그날 승은 팀을 통틀어 제일 상태가 멀쩡한 사람이었다. 와, 확실히 어린 게 좋긴 좋네. 하산 후, 세수 한 번으로 원래의 혈색을 되찾고 온 승을 보고 선배들은 그런 말을 했었다. 당시 막내였던 승은 팀에서 유일하게 프로 선수가 아닌 대학생 신분이었다. 선배들은 본인들보다 적게는 네 살, 많게는 열 살 넘게 어린 후배의 지치지 않는 체력에 감탄을 보냈었다.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연차가 찬 선배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매트 위로 고꾸라졌다. 승은 차례로 넘어가는 도미노의 맨 끝자리를 앉은 채로 지켰다. 그저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라던 정호의 충고를 홀로 되새기는 중이었는데 PD는 그 길로 목표물을 바꿔 승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본인의 평소 생활을 압축해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답을 해 주실 건가요? 원하는 그림을 담아내기 위해, 마치 구면인 것처럼 친근하게 물어오는 PD에게 승은 말했다.

먹고 운동하고… 잔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선수 대부분의 생활이 다 그런 식이었다. 하하, 너무 많이 압축하신 거 아닌가요? PD는 너털웃음과 함께 방금의 답변에 살을 조금만 더 붙여 달라고 했다. 고민 끝에 승이 다시 내놓은 답은 아래와 같았다.

‘힘을 충분히 쓸 수 있을 만큼 먹고, 그렇게 얻은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하고… 푹 잡니다.’

PD는 다시 웃었다. 이후로도 경기를 중심으로 설계되는 승의 생활 사이클은 언제나 그때의 답변만큼이나 단순했다.

“승, 컨디션 어때.”

“좋은데요?”

맨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은 승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좀 과식했나? 몇 시간 전 혜경과 함께했던 아침 식사는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었다. 때깔이 고운 음식들은 제가 평소 아침으로 삼는 삶은 달걀이나 인스턴트 닭가슴살에 비할 바가 못 되게 화려했다.

갈비찜과 잡채, 그리고 제 입맛에 맞춰 소고기 대신 조개를 넣은 미역국까지. 혜경의 정성이 듬뿍 들어갔을 한상차림이 비축시킨 열량을 따져 보면 오늘 저에게는 경기장에서 펄펄 날아다녀야 할 의무가 있었다.

“밥 맛있는 거 먹었어?”

“네, 집에 들러서 엄마랑 같이 먹고 왔어요.”

“오, 좋았겠네.”

짧게 부러움을 표한 수겸이 팔에 붙은 테이핑을 정리했다. 며칠 전 경기에서 공을 쫓다가 경기장 바닥에 팔꿈치를 찧는 해프닝을 겪은 수겸은 팔 상태를 점검하듯 이리저리 어깨를 움직였다.

“형, 그거 다시 붙여야 할 것 같은데.”

“그치. 이게 자꾸 떨어져. 옷 갈아입고 다시 붙여 달라고 해야겠다.”

몸을 아끼지 않은 슬라이딩에 희생당한 팔꿈치 아래가 처참했다. 마찰로 피부가 벗겨진 빨간 살갗을 보며 승은 제가 잡았던 팔목을 생각했다. 추운 저녁, 무식할 정도로 세게 붙잡았던 남의 손목을.

세상 사람이 모두 너처럼 강철은 아니라고 제게 일갈했던 지수는 그 이후로 연락 한 통이 없었다. 많이 바쁜가. 집에 가서 생각해 보라며 엄청난 과제까지 던져 줘 놓고 본인은 무소식으로 일관 중이라니.

출제자의 부재와 함께 제가 떠맡은 과제 역시 물음표만을 한껏 띄운 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여자친구가 그날 나 팔꿈치로 바닥 찍는 거 집에서 라이브 중계로 보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대. 겁나 혼났음. 잔소리 너무 많이 들어서 팔꿈치보다 지금 귀가 더 아파.”

“형, 애인 있었어요?”

“몰랐어?”

“완전 몰랐어요.”

“사실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어. 근데 진짜 너무 좋아서 내후년에 결혼하려고. 너 그때 우리 팀에 있냐? 네가 몇 년 계약이지?”

“저 2년이요.”

여자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행복이 주체가 안 되는지 수겸이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작은 일에도 쉽게 투덜거리는 수겸의 성격과 사뭇 다른 긍정적인 반응에 승은 놀라 눈만 깜빡거렸다.

“좋네. 그때 되면 축하하는 마음 많이 많이 담아서 축의 두둑하게 해라. 아, 결혼하기 전에 우승컵 한 번은 들어야 면이 딱 제대로 서는 건데…. 최승, 열심히 좀 해 봐.”

“제가 제대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오, 자신감 좋아. 역시 사람은 그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돼. 승아, 나 너 믿는다, 어?”

그러고 보면 먹고 운동하고 자는 게 전부이던 제 일상에 지수는 모내기하듯 새로운 이벤트들을 심어 넣고 있었다. 섹스도 하고, 남의 집 가서 만두도 얻어먹고, 아마 지수가 아니었다면 평생 존재조차 몰랐을 소규모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그나저나 승이 너 오늘은 꼭 이기고 싶겠네.”

“저는 언제나 이기고 싶은데요.”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어? 좀 더 그런 강렬한 기분이 있잖아, 안 그래? 난 그렇던데. 그래서 나는 막 특별한 날 경기 있으면 싫고 짜증 나. 그냥 다 평일에 했으면 좋겠어. 어쩔 수 없는 의욕 과다, 뭔지 알지?”

선수라면 누구든 반 정도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수겸의 이야기에 승이 웃었다. 경기를 앞둔 라커룸에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 자체가 승에게는 흥분제처럼 작용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경기에서 원하는 대로 흐름을 풀어 나갈 때의 그 희열, 그건 일종의 전능감이었다.

“오늘 잘해 보자, 최승.”

“네.”

결국 테이프를 남김없이 떼어 낸 수겸이 비장한 얼굴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수겸의 의도를 알아챈 승은 한 걸음 다가가 가볍게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의지를 다지는 짝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예감이 좋았다.

* * *

[V리그] 태성하이츠 vs 세계건설 경기 하이라이트 11월 11일

@백넘버08

: 오늘 두 팀 다 쩔었네??? 4세트 막판 랠리 무슨 일? 직관 간 분들 부럽,,,

@qwerasdf

: 태성에서 안윤상-이호재 이 조합이 제일 좋음

 └ 제일 안정적 시너지도 좋고

 └ 앙융상♡호식이

@스윗앤사워

: 박감독님 기분 좋았겠네ㅋㅋㅋㅋ 3세트부터는 그냥 누가 봐도 딱 박계형이 좋아하는 경기 스타일인데?

 └ 안 그래도 끝나고 인터뷰에서 오늘 경기 후반부 만족스러웠다는 식으로 말하심ㅋㅋㅋ 본인이 세터 출신이어서 그런지 세터 중심으로 공 분배 칼같이 되면서 점수 예쁘게 따는 거 넘 좋아하심 물론 보는 나도 좋구,,ㅎㅎㅎ

  └ 방구석 알못이지만 포메이션 변화 잘 준 것 가틈 작년보다는 확실히 전술이 순조롭게 먹히는 느낌

   └ ㅇㅇ 동감 글구 볼수록 박계형은 선수보다 감독이 체질인 듯 본인도 감독할 때가 더 행복해 보여ㅋㅋ 선수 땐 우여곡절이 워낙 많았어서

@RYU

: 태성 진짜 이런 말 하기 싫은데 최근 들어 리시브가 너무... 진짜 너무 하..... 사람 바뀔 때마다 이렇게 줄줄이 무너지는 게 말이 되나 공 하루 이틀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이 부분은 진짜 해결이 필요해 보임 이거 안 고치면 태성은 절대 우승 못 함

 └ 정재선 감독이 너무 결단력이 없음.... 못하면 즉각즉각 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맨날 두고 보다가 타이밍 다 놓치고..... 여긴 어느 시점부터 선수가 문제가 아니고 진짜 감독이 문제임....

@okletsgetit

: 12:43 여기 무한 반복 중

 └ ㅇㅈ 최승 약 하는 순간

  └ ?????

  └ 또 이 ㅈㄹ이네

@웨스트코스트45

: 오늘 이렇게 싸웠지만 올스타전에서는 두 팀이 같은 편이라는 놀라운 사실 ㅇㅇ

@cactus

 └ 최승승 내가 너 믿고 있었다 역시 후반으로 갈수록 제대로 보여주는 ㅠㅠㅠㅠ 그런 의미에서 다다음주 올스타전도 믿어도 되겠니???

 └ 막판에 너무 잘해서 다 풀림ㅋㅋㅋㅋㅋ 오늘 생일이라던데 ㅠㅠ ㅎㅏㅇㅏ

  └ 2세트 초반 그거는 집 소파에 드러누워서 경기 보고 있던 최정호도 열 받아서 리모콘 집어던졌을 듯

  └ 던졋다 vs 생일이라서 한 번 참앗다 ???? ㅋㅋ

   └ ㅋㅋㅋㅋ던지기 직전까지 갔다가 아아악 참 생일이지 하면서 한번 참아줬을 듯ㅋㅋㅋ

   └ ㅋㅋㅋㅋㅋㅋ

  └ 근데 이건 최승 잘못이 아니고 중간에 로디랑 동선이 꼬인듯? 굳이 따지자면 센터 실책 같은데 해설에서도 그러케 말했음

@포레스트그린

: 2세트까지 보다가 일 있어서 껐는데 뒷부분이 이러케 꿀잼이었다구?

 └ 난 1세트까지 밖에 못 봤는데 ㅜㅜ 이렇게 꿀잼이었다구???

  └ 꿀잼이었다구? 33 꼭 내가 못 볼 때만 이러더라

@24/7

: 태성 이번 시즌 세계한테 왜 이렇게 약하냐 아직 초반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상대전적이 너무 안 좋네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는 좀 잘 해보길

 └ 진짜 작년이랑 너무 다르다 ㅠ 1년 만에 무슨 일ㅇㅣ 생긴 거여

@일확천금

: 태성 개새끼들아 이 썩어주글놈들

 └ 아저씨 토토 그만 하셔요;;;

 └ 돈 잃어서 승질 났네 닉행불일칰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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