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의 고양이들
“와, 나 이 바닥 십 년 넘게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고 파격적인 부도 스토리는 또 처음이네.”
“선정이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아, 진짜 듣긴 들었는데 나도 잘 이해가 안 돼서….”
빈 담뱃갑을 구긴 선정이 주머니에서 핑크색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늘 생기 넘치던 선정의 눈 밑이 답지 않게 푸석푸석했다. 처음으로 연기가 아닌 무대 연출에 참여한 연극이 드디어 기획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며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담배 끝에 불을 붙인 선정은 동그랗게 뭉친 담뱃갑을 툭 가볍게 던졌다.
“근데 거기 부도 직전이라는 말 나도 듣긴 들었는데 진짜일 줄은 몰랐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충무로에 발 걸친 회사 중에 도산 위기 한 번 안 겪어 본 회사 꼽으면 겨우 세 개 나올까 말까라고들 하잖아. 난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소문인 줄 알았지.”
턱이 높은 화단에 삐뚤게 걸터앉은 지수의 시선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물체의 궤적을 쫓았다. 동그랗게 뭉쳐진 담뱃갑은 그대로 붕 날아 철제 쓰레기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 누나는 연기가 아니라 투수를 했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감탄이 나오는 정확도에 지수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작게 입을 벌렸다. 팔자 좋게 놀라는 와중에도 딱딱한 벽돌에 눌린 엉덩이 근육으로는 누가 찌르는 것처럼 꾸준한 고통이 전해졌다.
“근데 누나 담배 끊은 거 아니었어요?”
“끊었었지, 끊었었는데…. 그게 그렇게 됐다, 지수야.”
조약돌 크기의 분홍색 지포 라이터를 요리조리 돌려 보던 선정이 쓴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과는 살짝 언밸런스한 감이 있는 연분홍색 라이터는 이래 봬도 선정의 애장품이었다. 올해 초, 새해 다짐과 함께 선정이 돌연 금연을 선언한 이후 한동안 본 적이 없었던지라 오랜만에 보는 라이터가 조금 반가웠다.
“근데 그 감독 입장도 이해가 되기는 해. 이 상태에서 회사 망하면 자기 영혼 갈아서 찍은 필름만 없던 일 되는 거잖아. 회사 사라지면 저작권 문제 골치 아파져서 죽은 필름 부활시키기가 상당히 힘들어지거든. 전 회사 입장에서는 그 필름 찍을 수 있게 돈 대 준 게 자기넨데 그게 딴 데 가서 잘되는 꼴 보고 싶겠어?”
“그래서 너 죽고 나 죽자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야?”
“보통은 그렇지. 더러워도 어쩌겠어. 현장에선 감독이 갑이겠지만 돈 문제 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감독도 을이야. 그냥 을도 아니고 슈퍼 을.”
“개같네, 진짜.”
거칠게 욕을 뱉은 현욱이 짧아진 꽁초를 비벼 껐다. 건물 꼭대기 층 테라스에 마련된 사내 흡연 공간은 회색 연기와 어울리지 않게 싱싱한 풀이 가득했다. 붉은 벽돌 사이사이 마련된 화단에서는 관리가 잘된 묘목들이 저마다의 푸릇함을 자랑했다.
“감독은 뭐래? 지수 너한테 따로 연락은 왔어?”
“감독님은 뭐 그냥 미안하다고….”
“그 감독도 지금 속이 말이 아니겠다. 그게 데뷔작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그래서 감독님도 엄청 열심히 하셨죠. 사람 부족해서 다른 데였으면 안 해도 될 고생도 많이 하셨고…. 다들 열심히 했는데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
제작비를 댄 영화사가 망하게 생겨서 멀쩡히 편집까지 끝낸 작품 개봉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현장에 있던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빠듯한 예산에 맞춰 찍느라 고생을 바가지로 뒤집어쓴 배우나 스태프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가 있다면 실무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무식하게 열심히 일한 죄밖에는 없었다.
“오늘 프로필 촬영은 어땠어? 잘했어?”
“찍는 건 괜찮았어요. 근데 아무리 어떻게 해도 지금 머리가 너무 지저분해서….”
반도 태우지 않은 장초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선정이 제게 물어왔다. 안 좋은 소식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띄워 보려는 의도가 전해지는 명랑한 말투에 지수도 애써 씩씩하게 답을 했다.
“답답하지? 나 아는 선배도 예전에 사극 한번 들어갔다가 학을 떼고 나왔잖아. 머리 기르는 거 싫다고.”
지수는 슬슬 목덜미를 덮기 시작한 애매한 길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예 이것보다 좀 더 길어서 확 묶을 수 있으면 그래도 좀 나을 텐데…. 자르지 않아 귀 아래로 지저분하게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아직 묶어 올리기에는 모자라 처치 곤란의 상태에 봉착해 있었다.
“저 살면서 머리 이렇게 길러 본 거 이번이 처음이에요. 생각보다 엄청 불편하네요.”
“그대로 쭉 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지수 넌 장발도 잘 받을 것 같아. 그거 알지. 장발 잘 어울리면 들어오는 역할 폭 확 넓어지는 거. 화보 찍을 때도 좋구.”
덥수룩한 뒷머리가 어색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자른 게 언제였더라. 《동틀 무렵》을 찍기 한참 전이니 어림잡아 족히 다섯 달은 된 것 같았다.
출연이 확정되고 곧바로 가졌던 개인 미팅에서 드라마 PD가 지수에게 처음 했던 말은 다름 아닌 ‘지수 씨, 이제 촬영 전까지 머리 자르지 마세요.’였다. 남자 배우의 짧은 뒷머리? 그건 사극의 적이자 상투의 적이었다.
시대극 고증에 열의가 넘치는 PD는 구멍 없는 단정한 지수의 귓불 역시 칭찬했다. 꽉 막힌 귓바퀴와 귓불이 조선 시대 사람으로 딱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이물감이 전혀 없는 자연스럽고 단정한 이목구비 역시 흐뭇한 칭찬거리가 되어 작품 설명을 이어 가던 PD를 연신 미소 짓게 했었다.
“맞아, 잘 나왔어. 포마드로 넘기니까 분위기 있던데? 네 기분이 답답해서 그렇지 결과물은 괜찮기만 하던데, 뭘. 아까 실장님이 나한테 사진 잘 나왔다고 따로 메시지까지 주셨더라.”
“그걸 벌써 실장님이 보셨어?”
“너 모르지? 실장님이 요즘 너 엄청 신경 쓰는 거. 임 실장님이 점 찍은 내년 상반기 우리 회사 기대주가 너야, 너.”
당최 금시초문인 현욱의 말에 지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이더스 아니고?”
“얘 진짜 뭘 모르네.”
제 말을 단숨에 일갈하는 현욱을 보며 지수는 건주와 TSC 관계자들과 가졌던 저녁 식사를 생각했다. 다른 건 다 잊어도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조금도 받지 못했던 불쾌함만은 지금도 응어리처럼 마음에 남아 있었다.
“회사에서 걔네만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지? 왜겠냐.”
“…….”
“아이돌은 팀을 유지하는 데만 해도 워낙 돈이 크게 들어가니까 회사 차원에서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어. 활동 한 번만 삐끗해도 마이너스가 쭉쭉 찍히잖아. 걔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야 일이 수월하니까 회사에서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퍼 주려고 하는 거고, 그러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거기에만 손이 가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알겠냐, 인마.”
“…….”
영 못 미더운 의견이었지만, 현욱이 침까지 튀겨 가며 열변을 토했기에 지수는 입을 닫았다. 답답한 막냇동생을 사랑으로 다그치는 큰형 같은 현욱의 말투가 싫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회사 입장을 대변하는 현욱의 눈썹이 흥분으로 크게 꿈틀댔다.
그러니까 죽어도 편애는 없다 이거지? 확인받듯 쏘아보는 지수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현욱은 다시 담배를 찾았다.
“그만 피워. 선정 누나 좀 봐. 딱 깔끔하게 한 개비만 피우고 끝, 어?”
“비흡연자인 네가 뭘 알아?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타입의 흡연자가 있는데.”
“건강 생각은 안 해? 형 아프면 나 누구랑 일하라고.”
현욱은 기어이 지지 않고 반박을 하면서도 막 꺼내 든 담뱃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제가 카메라 앞에서 느끼한 포즈를 줄줄이 지어 대며 프로필 촬영을 하는 동안 현욱은 스튜디오 밖에서 뻑뻑 줄담배를 피워 댄 걸 다 알고 하는 말이었다.
“고지수.”
“네?”
담배를 사이에 두고서 현욱과 옥신각신 실랑이를 주고받는데 이제껏 조용히 옆을 지키고 있던 선정이 불쑥 제 이름을 불렀다.
“동틀 무렵 그거, 감독은 일단 개봉관 수 상관없이 어떻게든 극장에 걸리게만 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했지?”
“네.”
“너 내가 그 영화 띄우는 법 알려 줄까?”
“…뭔데요?”
선정은 신고 있던 로퍼를 바닥에 문지르며 말했다. 검은색 로퍼의 둥근 앞코가 자갈이 곱게 깔린 옥상 바닥을 가볍게 노크하듯 두드렸다.
“너 들어가는 드라마, 그게 만약 빼도 박도 못하게 대박이 나서 네가 배우 판에서 확실히 자리매김하잖아?”
“…….”
“그럼 그 영화 재개봉하게 될지도 모른다?”
“네?”
“가수들만 역주행을 하는 게 아니라니까?”
묘책을 일러준 선정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돌아섰다. 아리송한 말에 지수는 현욱을 바라봤다. 생각이 그대로 읽히는 멍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현욱도 선정의 묘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두고 멀어지는 선정의 입가에만 뜻을 알 듯 말 듯한 오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뭐냐.”
“뭐가.”
“누구한테 얻어맞았어? 너 걷는 게 왜 그래.”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5층에서부터 힘들게 기어 내려온 보람도 없게 승은 시작부터 반가운 루머로 저를 반겼다. 삐거덕거리는 골반을 붙잡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와 처음 듣는 소리가 폭행 피해 의혹이라니.
“눈물 연기 제대로 못 한다고 회사에서 처맞았다, 왜?”
움직일 때마다 몸 여기저기가 연신 삐걱거렸다.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승의 시선을 무시하고 지수는 정면을 향해 팔을 뻗었다.
목표물은 명확했다. 승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샛노란 표지의 종이 뭉치. 내 소중한 대본과 연기 노트.
“……신고는? 경찰에 신고했어?”
승은 빨랐다. 눈치도 빨랐고, 제 손이 닿기 전에 종이 뭉치를 집어 번쩍 위로 들어 올리는 운동 신경은 눈치보다도 더 빨랐다. 머뭇대며 던져진 질문과 함께 바로 앞에 있던 표적이 삽시간에 위치를 이동했다.
손쉽게 낚아채려던 계획은 어정쩡하게 뻗은 팔과 함께 그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하체만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줄 알았던 지수는 팔을 뻗어 보고 나서야 허리 위 사정도 다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고해도 소용없어. 나 우리 회사랑 20년 노예 계약해서.”
겨드랑이 아래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이 엄청났다. 가까스로 비명을 삼킨 지수는 이를 악물고 팔을 주물렀다.
“…….”
회색 후드 티를 입은 승의 오른손에 들린 대본은 이제 지수의 정수리 한참 위에 있었다. 본체가 느끼는 놀라움의 정도와 들어 올린 팔의 높이가 비례하는 건가. 살짝 내려간 소매 아래로 보이는 손목에는 당장이라도 뭔가를 내려칠 것처럼 굵은 핏줄이 돋아 있었다.
너무… 높다. 저걸 뺏으려면 내가 덩크슛이라도 해야겠네.
“줘.”
“…….”
근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덩크슛을 못 하겠으니 사실을 고하는 수밖에.
“어제 하체 두 시간, 오늘 상체 두 시간.”
“…….”
“최승, 나 죽을 것 같다.”
“…….”
“넌 어떻게 이런 걸 매일 하냐?”
긴장이 물러난 자리에 짜증이 들어차는 모습이 나른한 초저녁 햇살 아래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다. 지수는 망가지는 승의 표정을 즐겁게 감상했다.
여기가 명당이네, 명당.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게 기분 나쁜 일인 줄만 알았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좋냐, 어? 사람 놀리니까 재밌어? 즐거워?”
살짝 처졌던 눈매가 당겨 올라가며 인상이 확 사나워진 승은 다소 맹해 보이던 조금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어, 재밌네. 야, 최승. 너 표정 관리 연습 좀 해야겠다. 이렇게 표정 관리를 못 해서야 경기 제대로 할 수 있겠어?”
화사함을 가장한 야비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게 비웃어 주고 싶었으나 숨을 들이쉴 때마다 무리하게 자극받은 복근이 터질 듯 뻐근해지는 통에 지수는 제대로 웃을 수도 없었다.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다니. 첫날부터 봐주는 거 없이 과격하기만 했던 운동 스케줄이 야속했다.
“…….”
짝다리를 짚고 선 승의 꾹 다물린 입 안에서 느릿하게 혀가 굴러갔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는 시베리아 벌판 부럽지 않은 냉기가 흘렀다.
어, 나 인제 그만 웃어야겠다. 장난은 그만. 본능적으로 멈춰야 할 선을 알아챈 지수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고맙다. 원래 어제 너네 집으로 받으러 가려고 했는데 아까 말했듯이 내가 어제 하체 트레이닝 받고 다리가, 진짜 다리가 너무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
“그래서 못 갔어. 내가… 너 번거롭게 해서….”
“…….”
이 정도 말했으면 이제 나한테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유치했던 거짓말과는 별개로 제가 두고 온 대본 때문에 승이 직접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한 고마움만은 진심이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본심을 전했으나 대본을 쥔 승은 꼼짝을 안 했다.
“……미안. 미안해.”
눈치를 살피던 지수는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데드 리프트로 허리와 팔근육이 작살난 지금의 지수가 고통 없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였다.
네가 들고 있는 그거… 내 거니까 좀 돌려주겠니? 그런 의미를 실어 상냥한 미소까지 덤으로 얹었으나 승은 활짝 펼쳐진 두 손바닥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기만 했다.
“맨입으로?”
쩨쩨한 놈.
“기름값이라도 줘?”
불량스레 받아치는 지수에게는 미소도, 곧게 내민 두 손바닥도 사라지고 없었다.
“기름값은 됐고.”
시세보다 훨씬 후한 값을 쳐 줄 의향이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쳐들고 건물 위를 살피던 승이 말했다.
“너네 집 구경이나 시켜 주라.”
대본과 노트를 인질로 잡은 승은 큰 걸음으로 건물 현관으로 향했다. 볼 것도 없는 집인데 뭘 구경시켜 달라고 하는 건지. 허벅지를 두드려 욱신거릴 근육을 미리 달랜 지수는 서둘러 승의 뒤를 쫓았다. 비밀번호도 모르면서 위풍당당하게 현관 앞에 선 승을 어깨로 슬쩍 밀어 내며 손바닥 크기의 도어락에 숫자 네 개를 입력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크게 써서 현수막에 걸어 놓지 그러냐.”
한 걸음 옆으로 밀려나면서도 시선만은 도어락에 고정돼 있었는지 승이 기가 찬다는 식으로 말했다. 2456. 비밀번호를 구성하는 숫자 네 개 주위만 하얗게 닳아 있는 걸 보고 하는 말이었다. 나쁜 맘을 먹고 주변을 배회하는 좀도둑이 행여 그냥 지나치기라도 할까 봐 온몸으로 암호를 어필 중인 도어락이 오늘따라 더 민망했다.
“어쩌라고. 도둑 들면 싸워서 이기면 되지.”
“그 몸으로 잘도 이기겠다.”
갑작스러운 운동으로 몸통과 사지가 고장 나 버린 저를 정확히 겨냥한 언사가 촌철살인이었다. 재수 없는 새끼. 그대로 뭉그적대다가는 내쫓길 걸 알았는지 승은 잠금이 해제된 문을 밀어 열더니 쌩하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볍게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짜증을 유발했다. 타닷타닷, 리듬감 실린 발소리를 지수는 껑충대며 쫓았다. 속도를 낼 수 없는 제 사정을 배려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몇 층까지 올라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건지 아무튼 3층에서부터 둘은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업어 줘?”
“기운이 하도 넘쳐서 막 주체가 안 돼?”
“싫음 말아라.”
“차라리 기어가고 말지.”
남은 2층을 오르는 그 짧은 시간 역시 옆에서 이상한 소리를 해 대는 불청객 덕분에 전혀 유쾌하지가 않았다.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려도 끄떡없던 계단이 어제오늘은 에베레스트였다.
돈 많이 벌면 그때는 꼭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로 이사 가야지. 5층을 걸어 올라와 현관문 앞에 서니 차오르는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절로 마음이 들떴다. 들썩이는 허벅지 근육을 달래며 502호 앞에 걸어가 선 지수는 문을 열려다 말고 뒤에 있는 승을 향해 말했다.
“야, 근데 내가 미리 말해 두는데.”
“응?”
“너네 집처럼 그렇게 안 깨끗해. 모르고 들어갔다가는 너 기절할까 봐.”
약간의 가소로움이 덧입혀진 제 사전 예고에 승이 코웃음을 쳤다. 심신 미약한 노약자 취급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였다.
문이 열리자 승은 좁은 현관에서도 용케 가지런히 신발을 벗었다.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흔적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제 운동화가 천덕꾸러기처럼 보였다.
“빨리 주고 나가.”
애매한 크기의 원룸은 현관에 가만히 서서 눈만 굴려도 안에 있는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가구라고는 침대와 때에 따라 책상의 역할도 겸하는 2인용 식탁뿐이었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전체적으로 빈약한 살림살이에 옷만 비정상적으로 많았는데 대부분이 모델 시절 촬영하러 갔다가 선물로 받아 온 것들이었다. 그렇게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옷더미는 가뜩이나 좁은 집을 더 좁아 보이게 하는 데 단단히 일조하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더 들어섰을 뿐인데 밟고 있던 신문지를 반으로 접은 것처럼 공간 자체가 줄어든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1구짜리 인덕션으로 겨우 구색만 갖춘 소규모 싱크대는 등지고 선 승의 키와 체격에 밀려 소꿉놀이용으로 제작된 장난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볼 것도 없는 집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승에게 다가선 지수는 그때까지도 옆구리에 잡혀 있던 불쌍한 제 노트와 대본을 구출해 냈다.
“안 봤지?”
“뭘?”
“내 노트.”
“그런 거 있는지도 몰랐는데?”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한심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아니면 아닌 거지, 그 띠꺼운 표정은 뭐냐고. 야멸찬 화답에 지수는 며칠 만에 보는 반가운 제 노트와 대본만 쓰다듬었다.
정신 차리고 다시는 잃어버리지 말아야지. 고작 이틀 떨어져 지낸 대본과 노트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소중한 대본과 노트를 침대 머리맡에 모셔 놓고 왔더니 승은 허리를 숙인 채 현관 옆에 있는 선반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거 뭐야?”
“뭐? 아, 그거…. 파핑뮤직에서 받은 거.”
검은색 철제 선반은 이전 세입자가 두고 간 물건이었다. 멀쩡하게 생겼는데 왜 버리고 갔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살펴보니 한쪽 축이 살짝 어그러져 균형이 안 맞았다. 지수는 덜컹거리는 뒤편에 여러 번 접은 공과금 고지서를 받쳐 넣었다. 언제 기우뚱했냐는 듯 멀쩡해진 선반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요긴하게 쓰이는 중이었다.
“공로상 그런 거야?”
“응, 마지막 방송 날 그동안 수고했다고 주더라.”
아크릴로 만들어진 트로피 하단에는 레이저 각인까지 있었다. 진행 고지수. 매주 1위를 한 가수들에게 꽃다발과 함께 주어지던 트로피였는데 지수는 그걸 마지막 스케줄 날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1위도 아니고 가수도 아닌 저를 위해 제작진이 준비해 준 작별 선물이었다.
“되게 예쁘게 생겼네? 너 좋았겠다.”
“…좋았지.”
휘황찬란한 메달을 수십 개 가진 사람답지 않은 진솔한 감탄이었다. 자기가 이룬 것들에 비하면 이건 너무 어설프고 소박하지 않나. 멋쩍은 지수는 말끝을 흐렸다. 생글생글 웃는 승의 표정만 봐서는 프로그램에서 그동안의 잔정으로 챙겨 준 야매 트로피가 아니라 예쁜 물고기 한 쌍이 노니는 어항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너 근데 진짜 윙크 못 해?”
“어떻게 알았어?”
“말했잖아. 나 이태리에 있을 때 그거 자주 봤었다고.”
“응, 아무리 연습해도… 난 그게 안 되더라고.”
“그래 보이더라.”
지수의 두 눈은 곧 죽어도 동기화를 고집하는 뚝심이 엄청났다. 티가… 많이 났구나. 가끔 프로그램 시청자 게시판에 제 어설픈 윙크에 대한 말이 올라오고는 했었지만 그래 봤자 어디까지나 소소한 수준이었다.
웬만큼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못 알아챌 거라 여겼는데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탈리아에 있던 승이 알아챘다니. 윙크를 못 하는 게 죄는 아니지만 그래도 직업이 연예인인 사람으로서 어떤 결점을 들킨 기분이었다.
“너 근데 안 가냐? 구경 끝났잖아. 이제 가.”
“여기까지 왔는데 물이라도 한 잔 줘 봐. 시원한 얼음물로.”
“포장마차에서 와인 찾는 소리 하고 있네. 여긴 너네 집처럼 얼음 나오는 냉장고 그런 거 없어.”
까다로운 요구에 어깃장을 놓으면서도 냉장고로 향했다. 더위에 젬병인 지수는 비록 아직 얼음정수기가 달린 냉장고는 없었지만, 대신 얼음을 무한 생성해 낼 수 있는 실리콘 얼음 틀은 있었다. 잘하면 그저께 얼려 놓은 얼음이 몇 개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까탈스러운 손님을 빨리 쫓아내고 싶었다. 냉장고에서 안 뜯은 생수를 하나 꺼낸 지수는 다소 과격하게 냉동실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
남은 얼음의 여부 같은 건 채 확인하기도 전에 반투명한 하얀 봉투 두 개가 퍽 퍽 소리를 내며 잇따라 바닥으로 낙하했다. 승과 지수의 시선이 일제히 아래로 향했다.
“너 만두 공장 집 아들이야?”
‘우정만두’ 상호가 박힌 봉지 꾸러미를 본 승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통 한 번 제대로 크네. 덩치만큼이나 남다른 짐작의 규모가 재밌었으나 지수는 웃지 않고 곧바로 정정에 돌입했다.
“만두 공장 아니고 만두 가게.”
“…….”
“그리고 아들 아니고 손자야.”
“아.”
떨어진 봉투를 주워야 했다. 쪼그려 앉기 위해 무릎을 굽히자 스쿼트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하체가 아우성을 쳤다. 백기를 든 지수는 허리만 겨우 굽혀서 봉지를 낚아챘다.
꽝꽝 얼어붙은 만두는 막 빚었을 때보다 훨씬 묵직했다. 이걸 언제 다 먹냐. 며칠 전에 들렀다가 여느 때처럼 한 손 가득 받아 온 것들은 하나 먹어 보지도 못하고 냉동실로 직행해야만 했다. 트레이너가 정해 준 식단 때문에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 소중한 만두들이 냉동실에서 썩어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야.”
“…….”
“만두 먹을래? 이거 되게 맛있어.”
양손에 만두 꾸러미를 든 지수의 제안에 승은 시계를 봤다. 약속 있나. 그럼 할 수 없고.
“응, 먹을래.”
“약속 있는 거 아니야?”
거절의 낌새를 눈치채고 돌아서던 지수가 물었다.
“없는데?”
“그럼 시계 왜 봤어?”
“시간 보느라고. 나 야식은 안 먹어서.”
야식 운운하는 승의 발언에 지수는 알 수 없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얘도 참 어렵게 사는구나. 아직은 창밖이 훤했으나 하루가 다르게 해가 짧아지고 있는 요즘 날씨를 생각하면 머지않아 해가 질 터였다.
“금방 해 줄게. 앉아서 기다려.”
인덕션을 켠 지수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어서 빨리 바삭하게 만두를 구워 여덟 조각으로 쪼개진 승의 가여운 복근을 달래 줘야 할 것 같았다. 달궈져 작게 기포가 생긴 기름이 프라이팬 위를 미끄러지듯 코팅했다. 넓게 펼친 손바닥이 팬의 열기를 가늠했다.
“나 이거 읽어 봐도 되냐.”
인덕션 세기를 줄이며 돌아봤더니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승이 눈짓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미쁜 가람의 책갈피 1화》. 넘기는 방향을 따라 벌써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한 첫 화 대본이었다. 내가 저 안에 뭘 써 놨더라. 군데군데 그어놓은 밑줄과 자잘하게 적어둔 메모들이 조금 걸렸으나 그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뭘 알아?”
악감정 같은 건 절대 없었는데 뱉고 보니 흔쾌했던 마음과는 달리 허락의 형태가 상당히 투박했다. 내가 미쳤나. 스스로의 무례함에 식은땀이 흘렀다.
“왜 이래. 나 이래 봬도 한글 공부를 드라마 대본으로 한 사람이야.”
한낱 인성 파탄 연예인들처럼 망가져 가는 듯한 제 성격에 눈앞이 아찔했는데 정작 승은 천연덕스러운 대꾸로 제 면박을 격파했다.
“선비는 은둔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닦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하다. 항상 마음을 닦아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함이니라.”
드라마 대본과 함께했다는 본인의 한글 공부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승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대본을 읊어나갔다. 드라마의 첫 장면으로서 대사헌을 지낸 부친이 주인공 가람 선비에게 진정한 지식인의 의미에 대해 설파하는 부분이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버지.”
“오.”
그 바로 다음이 제 차례였기에 달궈진 팬에 만두를 늘어놓으며 자연스럽게 대사를 받아쳤다. 그게 첫 장면 첫 대사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은 승의 호들갑이 남사스럽기만 했다.
“그것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으며 모자라지도 않은 것이니라. 매사에 편벽되지 않으며 가운데를 지향함이니라.”
“저와 형님이 어렸을 적, 아버지의 오랜 벗 수어청사 홍사윤 어르신이 해 주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무엇이냐.”
대사를 주고받는 동시에 지수는 타지 않게 만두를 마저 굽고 작은 종지에 간장과 식초를 적절히 섞어 따랐다. 깔끔한 승의 성격을 생각해서 제가 쓰는 쇠젓가락 대신 찬장을 뒤져 일회용 나무젓가락까지 찾아냈다.
“내 이미 다 들었노라.”
“아닙니다, 형님. 그것은 정말 아니옵니다.”
마지막으로 프라이팬에 살짝 물을 붓고 증기로 뜸까지 들였는데 그러는 동안 장면이 두어 번 넘어갔다. 밤마다 비밀스럽게 행한 외출을 알게 된 가족들이 선비를 문책하는 장면이었다.
“아니다. 그것은 안 되느니라.”
잘 구워진 만두를 접시에 옮긴 지수가 식탁으로 향했다.
“나는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너희 형제를…!”
겉멋이 잔뜩 든 목소리의 승은 혼자서 1인 3역을 소화 중이었다.
“야.”
“어?”
화가 나 불호령을 내리는 대감 같은 목소리를 듣던 지수가 툭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석영 그 사람, 아저씨 아니고 할머니야.”
“…인내와 사랑으로 품었느니라.”
걸걸한 톤으로 무섭게 호령하던 승의 목소리가 바로 한 옥타브 넘게 올라갔다.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지수가 젓가락을 내밀었다. 연기 실력은 몰라도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두가 입맛에 맞았는지 승은 그날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한 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휙휙 종이를 넘기는 승을 지수는 조용히 지켜봤다.
재미가 있나. 재밌었으면 좋겠는데…. 출연자로서 외부인의 의견이 궁금했기에 잠자코 앉아 승이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2화 대본까지 다 훑고서 더 없냐고 물어본 걸로 봐서 내용이 흥미롭긴 한 것 같았는데 자세한 생각은 묻지 않았다.
그렇게 두 편의 대본 읽기를 마친 승은 멀쩡한 신발 끈을 풀어 새로 묶는 걸 끝으로 퇴장했다. 승이 떠나고 혼자가 되자 반으로 접었던 신문지를 다시 펼친 듯 방은 원래 크기를 되찾았다.
조금 좁고 어지럽지만, 안정감을 주는 공간에서 지수는 다시 평범한 일상을 며칠 살아 냈다. 운동을 하고 식단을 지키며 연기 수업을 들었다. 그러다 한복을 협찬해 주기로 한 스튜디오에 방문해 피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저녁, 지수는 현관문 앞에서 커다란 택배 꾸러미를 발견했다.
시킨 게 없는데? 의문을 품은 시선이 송장에 붙은 주소로 향했다.
│서울특별시 중탄구 도양동 서전로12 빅토리원룸 502호 고지수│
주소도 맞고 이름도 맞고, 그러니 받는 사람은 제가 맞았다. 누가 보냈지. 송장에 붙은 박스 먼지를 털어 낸 지수는 발신인을 확인했다.
│보내는 사람 최 승│
잉크가 살짝 번진 상단부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이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생각보다 가볍네? 품에 안기 버거울 정도로 크길래 그만큼 무거울 줄 알았던 박스는 의외로 가뿐하게 들렸다. 싱크대 앞에 박스를 던지듯이 내려놓은 지수는 바닥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짧은 시간 동안 옷을 수십 벌 갈아입은 피로가 몰려오며 기분이 묘하게 처졌다. 비싼 옷들이 상하지 않게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던 피팅은 얼마든지 괜찮았다. 룩북 찍으러 쏘다녔던 모델 시절에는 한여름에 몇 시간씩 패딩을 입은 적도 있었으니 이런 일쯤이야 특별한 고생도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일이라고 생각하면 못 할 게 없었다.
까다로운 스케줄이 절대 아니었는데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처지는 이유는…. 택배 상자로 다가간 지수는 쪼그려 앉아 포장을 벗기기 시작했다. 굵은 테이프 끝을 손톱으로 아프게 긁었지만 열리라는 박스는 안 열리고 오후에 있었던 감독과의 통화가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생됐다.
지수야, 잘 지냈어? 여느 때와 같은 안부 인사 후에 감독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영화사의 부도가 확실시되었으며 향후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에 지수는 의연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대로 개봉을 못 하는 건 받아들일 수가 없어 집 전세금을 뺐다는 감독의 말 앞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비를 털어 넣은 감독은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주로 취급하는 소규모 극장을 노리고 있다고 했다. 아쉽게도 시사회 같은 홍보 활동은 없겠지만 상영 일정이 잡히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는 감독의 목소리에는 그래도 자신의 창작물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다는 들뜬 희망이 읽혔다.
전화를 끊은 지수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영화가 망했다는 건지 안 망했다는 건지, 아니면 아직은 안 망했지만 머지않아 망할 거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시사회에 선정과 연옥 두 사람만큼은 정식으로 초대하려던 제 계획이 실현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비싼 한복을 쉴 틈 없이 걸쳐 보는 내내 개봉을 위해 전세금을 뺐다는 감독은 이제 어디서 자는 건가 하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
입고 있던 얇은 카디건을 벗은 지수는 일어나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붙여 놓은 테이프는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아마 가위가 어디 있을 텐데…. 의외의 인물이 보낸 깜짝 택배는 이사 온 날 짐을 풀 때 딱 한 번 쓰고 어딘가 처박아 뒀던 가위를 찾아내고서야 그 정체를 드러냈다.
“뭘 보냈나 했더니.”
맨 위에 깔린 포장용 에어백을 제거하자 제일 먼저 돌돌 말린 얇은 스트레칭 매트가 눈에 들어왔다. 매트를 감싸고 있는 비닐 포장을 뜯으며 지수는 승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