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2권) (7/23)

이름값의 역사

두 번째 결혼기념일을 사흘 앞두고 있던 어느 목요일, 혜경과 정호는 둘에게 아기 천사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선물처럼 찾아온 임신 소식에 정호는 눈물을 살짝 글썽이며 혜경을 꼭 껴안았다.

아이, 참. 이 사람이 또…. 갑작스러운 포옹에 혜경은 억지웃음을 지었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머지않아 엄마 아빠가 될 두 사람을 인자한 미소로 축복했다.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아예 상상하지 않았던 일도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기쁘게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일 년 넘게 고생했던 주말드라마가 끝나고 데뷔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휴식기를 보내고 있던 차라 혜경 역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임신 소식에 기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온 아기천사의 태명은 연승이. 결혼과 함께 커리어의 정점을 걷고 있던 정호의 소속 팀, 푸른하늘생명보험이 그해 한국 배구 역사상 유례없는 연승 행진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개막전 승리로 물꼬를 튼 하늘생명의 연승 행진은 해가 바뀌고 계절이 달라지려 할 때까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해 하늘생명의 전력은 그야말로 막강했고 정호는 팀의 주전 공격수로서 매 경기 전방위의 활약을 펼치며 코트를 누볐다. 시원한 점수 차로 상대를 꺾어 역대 최고 기록에 또다시 1승을 추가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면, 예비 아빠 정호는 혜경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연승이 덕분에 아빠가 오늘 또 이겼네.”

아직 판판하기만 한 배에 미주알고주알 승리담이 전해졌다. 건장한 체구과 어울리지 않는 정호의 행동이 귀여워 번번이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사실 혜경은 그때까지만 해도 도통 실감을 못 하고 있었다.

남들은 수돗물 냄새만 맡아도 토기가 치민다던데…. 주 수가 꽤 지날 때까지 그 흔한 입덧 한 번 하지 않는 혜경을 보고 주변의 어른들은 벌써부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며 배 속의 아기를 기특해했다. 각오했던 바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순탄한 나날들이었지만 아무도 예상 못 한 복병은 만삭이 되어서야 정체를 드러냈다.

“왜?”

“배가 너무….”

부른 배를 감싸 안고 뒤척이자 옆에서 자고 있던 정호가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불편한 자세로 선잠을 자던 혜경은 배꼽 아래를 손으로 더듬었다. 쿵. 쿵. 발길질이 심상치 않은 게 아무래도 이대로 다시 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

눈을 비빈 혜경이 시트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자 덩달아 잠이 깬 정호가 얼른 일어나 무거운 배를 부축했다.

“또 그래?”

“응…. 못 자겠어.”

배기지 않게 혜경의 등과 침대 헤드 사이에 베개를 끼워 넣은 정호가 둥그런 배에 손을 갖다 댔다.

“연승이 너,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해?”

목이 잠긴 정호는 짐짓 무서운 목소리를 꾸며 내며 배 속 아기에게 말을 붙였다. 쿵. 쿵쿵. 저를 나무라는 말을 알아들은 건지 손바닥 아래로 다시 세찬 태동이 전해졌다.

“왜 애한테 그런 말을 해? 연승아, 아빠 말 듣지 마. 절대 듣지 마, 알았지?”

그즈음의 혜경은 아기의 세찬 발길질 덕분에 이틀에 하루꼴로 앉은 채 선잠을 자야 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아빠 닮아서 점프력이 좋으려고 그러나? 안에서부터 콩콩 울려 오는 움직임이 유달리 세찼다.

며칠이나 남았지. 혜경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병원에서 귀띔해 준 날짜를 헤아렸다. 바야흐로 예정일이 코앞이었다.

<11월 12일 오늘 서울은 한낮 기온이 12도까지 올라가 비교적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겠습니다. 일부 남부 지방에서는 오전 시간 짙은 안개로 출근길 교통정보가….>


명랑한 목소리의 기상 캐스터가 전하는 날씨 소식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다. 그래도 오늘은 날이 좀 따뜻해서 다행이네. 태어난 지 이틀째인 조그만 아기를 품에 안은 혜경은 몇 시간 전 출생신고를 위해 홀로 비장하게 길을 나선 정호를 떠올렸다.

“산모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특별히 불편하신 데는 없으시구요?”

때맞춰 병실을 방문한 간호사는 환자인 혜경을 살뜰하게 살폈다. 골반을 중심으로 아직 여기저기가 불편했지만 쾌적한 1인실과 주변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혜경은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침 보호자 분이 오셨네요.”

아기를 받아 능숙하게 속싸개를 갈아 준 간호사가 열리는 문을 보며 말했다. 들뜬 표정의 정호가 종이 한 장을 꼭 쥔 채 병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점심때 한 번 더 체크 할 테니 편하게 쉬고 계세요. 천천히 걷는 건 괜찮은데 가급적 많이 움직이지는 마시구요.”

간호사는 꼼꼼한 당부와 함께 아기를 혜경의 품에 안겨 주었다. 허리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한 정호의 시선이 곧 꼬물거리는 아기의 입술로 옮겨갔다.

“잘하고 왔어?”

“응.”

달싹대는 조그만 입술을 보던 정호는 들고 온 종이를 내밀었다. 주민등록등본. 상단에 적힌 파란 글씨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혜경은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1 본인 ㅤㅤㅤㅤ최 정 호

2 배우자 ㅤㅤㅤ장 혜 경

3 자녀 ㅤㅤㅤㅤ최ㅤ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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