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속의 모래알
예술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연기를 전공했다는 선정은 나이에 비해 잔뼈가 굵은 연극배우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 선정은 대학로에 가서 ‘이선정’ 이름 세 글자를 대면 아는 사람 반, 모르는 사람 반이라는 허풍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연기의 이응도 모르던 스물셋의 지수는 대번에 쫄았다. 그도 그럴 게 선정은 누군가 제게 종이와 펜만 쥐여 준다면 모든 말을 무리 없이 받아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발성과 발음을 구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아니 제 이름은, 네… 고지수입니다. 방금의 선정처럼 또박또박 멋지게 말하고 싶었지만, 애를 쓸수록 혀가 꼬였다. 아홉 시 뉴스 앵커 뺨치게 명확한 선정의 발음과 톤에 비하면 지수는 아기가 옹알이하는 수준으로 제 소개를 마쳤다. 흐음…. 선정의 다문 입술 사이로 긴 숨이 흘러나왔다.
동그란 탁자 위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만 해도 지수는 타인이 그런 식으로 절 쳐다보는 일에 익숙지가 않았다. 오가는 말 사이에 잠시 마라도 뜨면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 식은땀이 흐르던 시절, 천천히 지수를 훑어보던 선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목소리가 좋네.’
지수가 선정에게 처음 들은 칭찬이었다. 그 칭찬이 얼마나 귀한 건지 알았다면 그때 좀 더 호탕하게 그 말을 즐겼을 텐데.
십 년 가까이 연극배우와 연기학원 강사를 겸업했다는 선정은 아는 선배에게 이 일을 소개받았다고 했다. 괜찮은 엔터 회사에서 애들한테 연기 가르쳐 줄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혹시 생각이 있느냐고. 넌지시 물어봐 준 선배는 몰랐겠지만, 선정은 때마침 연극영화과 진학을 희망하는 입시생들 지도에 싫증을 느껴 가던 참이었다.
학원들은 대개 말도 안 되게 비싼 돈을 받고 어린 애들에게 찍어 내듯 스킬을 주입하는 데 몰두했다. 지도 방식은 대학의 입시 요강에 맞춰 해가 갈수록 획일화되어 갔다. 강사진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대학 합격이라는 성과를 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게 학원 운영진의 입장이었다.
의욕과 사명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정은 좌절했다. 현업 종사자로서 그게 꼭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좌절의 맛은 더욱 쓰고 깊었다.
그러는 사이 현실과 신념 사이를 헤매는 고민 역시 깊어져 갔다.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연극보다 큰 수입처였기에 무턱대고 강사 일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선정은 부수입이 필요했다. 사랑해 마지않는 연극과 연기는 선정을 행복하게 했지만, 선정이 걱정 없이 윤택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벌어다 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선정은 폴리곤 매니지먼트라는 새로운 부수입원을 만났다. 처음 발을 들였던 재작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회사 규모가 크지 않아 선정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시간 강사 같은 역할이었다.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확실히 보수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하루가 다르게 판도가 바뀌는 엔터 업계 상황을 고려하면 이 일도 결코 안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일을 하나 더 구할까. 학원을 떠나며 오랫동안 미뤄 왔던 무대 연출 공부까지 시작했던 터라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우선 반년만 해 보자. 달력을 넘겨 보던 선정은 짧게 기한을 정했다. 육 개월을 마지노선으로 잡았던 일이 회사의 사업 확장과 함께 시간 강사를 넘어 보다 어엿한 밥벌이가 되리라고는 선정도 예상하지 못한 미래였다.
“누나, 이거 드세요.”
“너 이거 뇌물이지? 연습 엉망으로 해 온 거 커피로 때우려고, 응?”
짙은 색의 일자 청바지가 미끈하게 잘 어울리는 지수가 등장과 함께 선정에게 커피를 건넸다. 얘 좀 봐라? 수상한데…. 연기학원 선생님으로 일하며 별별 애들을 다 봐 온 경력 때문인지 선정은 사소한 부분에서 뛰어난 통찰력을 자랑하곤 했다.
“와, 진짜 억울하다, 억울해.”
“아직도 몰라? 이런 거 나한텐 안 통해.”
“그럼 그냥 줘요. 내가 다 마셔 버릴 테니까.”
웃으며 커피를 내밀던 지수는 뜨끔해서 주던 걸 다시 거뒀다. 여하튼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날카로운 짐작에 지수는 선정 몫으로 사 온 커피를 다시 음료 캐리어에 꽂았다.
“줬다가 뺏는 게 어딨어? 빨리 줘.”
“그러니까 처음부터 고맙다고 하고 받으면 될….”
“궁시렁댈래?”
“저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결국 커피는 원래 목적대로 선정의 손안에 들어갔다. 아마존 전사 같은 선정의 입맛에 맞춰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한 커피는 맛이 사약처럼 진해 선정 말고는 누구도 마실 수가 없었다.
“이런 거 거절하면 안 되지. 비록 우리 지수가 어제는 날 크게 화나게 했지만, 응? 나중에 유명인사 됐을 때 사람들한테 자랑하려면 고지수가 주는 커피는 사양 말고 일단 마시고 봐야지.”
“…왜 또 그러세요.”
선정은 뼈 있는 말로 지수의 양심을 건드렸다. 지은 죄가 있는 지수는 잠자코 선정의 너스레를 들었다. 내가 어제 좀… 굉장히 들뜨긴 했었지. 미심쩍은 선정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모두 어제 연습을 망친 대가였다.
본격적으로 제 정체성을 확신했던 중3 여름방학부터 수도 없이 상상해 온 커밍아웃은 의외의 인물과 보내는 뜬금없는 밤에 벌어졌다. 이걸 남한테 말하는 날이 오긴 오는구나. 데뷔와 함께 앞으로도 최소 십 년 정도는 혼자만이 아는 비밀로 묻어 둬야 할 줄 알았던 터라 한동안은 실감이 안 났다.
나도 이런 내가 황당한데 걔는 오죽할까.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승의 얼굴이 볼만했다. 불덩이 같은 비밀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던 때에는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저조차도 어안이 벙벙했으니.
그 뒤로의 기억은 다 뒤죽박죽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땐 이미 말끔히 샤워를 마친 제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일 일이야 어찌 됐든 일단 이불을 덮었다. 베개 옆에 연기 수업을 위한 노트가 있었지만 펼칠 힘이 없었다. 잠이 시급했다. 지수는 목마른 사람이 냉수를 들이켜듯 급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다 몇 시간 후 화창한 햇살에 스르륵 눈을 떴을 땐 웬일로 머리가 맑았다. 왜 이렇게 몸이 가볍지? 잠기운이 기상과 동시에 말끔하게 자취를 감췄다. 오래된 비밀의 무게가 그리도 육중했던 걸까. 묵은 고백을 덜어 낸 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욕실로 향한 지수는 서둘러 씻었다. 그다음에는 집을 뒤져 어제 잃어버린 것과 비슷하게 무난한 모자를 찾아냈다. 이것도… 괜찮네. 쓰던 것만 쓰는 단조로운 습관 때문에 받아 놓고 처음 써 보는 모자가 생각보다 잘 어울려 기분이 좋았다.
집을 나선 지수는 지하철역을 지나쳐 일부러 버스를 탔다. 보통은 교통체증 없고 시간 약속 잘 지키는 지하철을 선호했으나 어제는 웬일로 버스가 타고 싶었다.
눈에 익은 풍경들이 휙휙 뒤로 멀어졌다. 하루아침에 계절이 변했나. 익숙한 도시 풍경이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커밍아웃 한 번 했다고 세상이 변하진 않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자의식 과잉인 거고.
그래, 변하지는 않았는데… 세상이 뭐랄까. 좀 넓어진 것 같은 느낌?
듬성듬성 자리한 승객들을 보던 지수는 닫혀 있던 창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좁은 틈 사이로 불어온 공기는 아직 늦여름의 열이 남아 있어 거칠고 텁텁했다. 바람에 속눈썹이 날렸다. 두 배로 넓어진 듯한 세상과 함께 낯선 종류의 해방감을 만끽했었는데, 문제는 그 들뜬 기분이 그대로 연습 때까지 이어졌다는 거다.
“오늘은 잘해 왔겠지? 다 읽고 내가 시킨 거 해 봤어?”
“당연하죠. 저 어제 집에 가서 진짜 연습 많이 했어요.”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한 번을 해도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말은 누가 못 해. 어제 재이도 말로는 열심히 하겠다면서 끝에 가서는 졸더라.”
“그 친구 간이 크네요. 누나 앞에서 졸 생각을 다 하다니.”
“근데 반전이 뭔지 알아? 꾸벅꾸벅 조는 걸 보고도 내가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다는 거 아니겠니.”
“말도 안 돼. 도대체 왜?”
“자는 거 보고 열이 확 나서 흔들어 깨우니까 애가 코피를 흘리더라고. 그것도 쌍코피를.”
잘 듣고 있던 지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 회사가 그렇게 악덕이었나. 도대체 얼마나 일정을 빡빡하게 잡았으면 자다가 코피를 흘린단 말인가.
“새벽까지 안무 연습하고 지방 행사 두 개 갔다가 라디오 녹음하고 왔대. 내가 걱정이 돼서 진짜…. 혼내려고 깨웠다가 너무 놀라서 수업이고 뭐고 간호를 해 줬다니까?”
선정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스케줄이 작품 활동 위주로 돌아가는 배우 쪽과 다르게 행사를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일이 잦은 가수 쪽은 소속사의 욕심에 따라 스케줄표에 테트리스 하듯 일정을 욱여넣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들었지? 재이가 그렇게 쌍코피를 흘렸는데 지수 네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어?”
“말이 왜 그렇게 튀어요? 그리고 누나, 저는 원래가 건강 체질이에요.”
“그래서 지금 네 말은 재이는 안 건강하다는 거네?”
“아니, 제가 언제 또 말을 그렇게 했다고.”
지수는 투덜대면서도 가방에 든 책과 노트를 꺼냈다. 마음이 종잇장처럼 펄럭였던 어제, 제가 얼마나 선정을 짜증 나게 했던가. 차마 주체가 안 되는 후련함 덕에 진지한 대본을 읽는 내내 말꼬리가 럭비공 마냥 사방팔방으로 튕겨 나갔었다.
고지수, 이게 지금 무슨 내용이야? 남자가 여자를 배신하려고 계획을 세우는 장면이잖아. 앞에서는 사랑한다고 해 놓고 뒤로는 벗겨 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거라고. 소위 ‘연기 바보’ 시절을 졸업한 후, 웬만해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던 선정이 실로 오랜만에 짜증을 냈다.
“저 어제 집에 가서 누나가 말해 준 영상 찾아봤거든요.”
“어떻던데.”
“열심히 하려고요.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어서.”
쓴소리와 함께 선정이 언급해 준 단편 영화는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노트를 펼쳤다. 뜨거웠던 이틀이 마침내 과거가 되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편의점에 들러 라면을 한 묶음 샀다. 집 계약 시 옵션으로 딸려 있던 용량 작은 냉장고의 냉동실에는 연옥의 만두들이 가득했다. 구워서 라면이랑 같이 먹어야지.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맛에 침이 고였다. 어제 일을 만회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수업에 임했더니 배가 고팠다.
지난주 현욱이 슬쩍해 준 귀띔에 의하면 다음 달부터 본격적인 운동과 체계적인 식단이 주어질 거라고 했다. 말이 좋아 다음 달이지 벌써 9월 중순인 걸 감안하면 다음 달인 10월까지는 3주도 채 남지 않은 셈이었다.
그때 되면 라면 같은 건 아마 입에도 못 댈걸. 간이 된 듯 안 된 듯 심심한 음식들과 푸릇푸릇한 풀떼기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면이 든 흰 봉투를 손에 든 지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뭐야.”
입맛을 다시며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서던 지수가 우뚝 멈춰 섰다. 건물 바로 근처에 어딘가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이틀 전 노터치 기계로 자동 세차를 한 것처럼 번쩍번쩍 광이 나는 차였다.
“…….”
운전석으로 다가간 지수는 멈춰 서서 내부를 살폈다. 안 보이네. 짙은 선팅 덕분에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흔한 차종은 아니라는 사실이 지수를 불안하게 했다.
근데 그렇다고 세상에 이 차가 한 대만 존재하는 건 아닐 테니까. 불길한 예감을 쫓아낸 지수가 입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아오, 깜짝이야. 너 여기서 지금 뭐 하는….”
모퉁이를 돈 지수는 공인으로서의 체통도 잊고 하마터면 욕을 뱉을 뻔했다. 내가 얘를 왜 못 봤지. 짐짓 비장한 표정을 한 승은 정확히 사라진 글자 ‘빅’ 아래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지수는 봉투를 든 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복잡한 주택가 지형지물에 그 남다른 체구가 교묘히도 가려져 있었다.
“야, 놀랐잖아. 너… 나 보러 왔어?”
승은 위아래가 세트로 맞춰진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곧게 뻗은 척추 때문인지 짝다리를 짚고 선 삐딱한 자세에서도 불량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 설치된 주황빛 가로등이 잘 빠진 몸매를 빛냈다.
“고지수.”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비장했다. 어… 얘 왜 이래? 이번에야말로 진짜 불길했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승이 지폐 칸을 뒤적였다.
지켜보던 지수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설마 그거 돌려주려고 온 거야? 이만 원. 그날 밤 제가 승에게 투척하듯 주고 떠났던 약소한 내기 값.
“그때 내가 준 돈 때문에 그래? 나 괜찮다니까?”
아 진짜, 나 이상한 애한테 잘못 걸렸네. 답답해진 지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나 게이 됐어.”
“…….”
“너 때문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구긴 지수 앞으로 이번에는 승이 폭탄을 투척했다.
“…뭐?”
벙찐 지수가 되물었다. 맛이 간 건 귓구멍 같은데 왜 눈 밑으로 열이 몰리는 걸까. 지수는 허리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짚었다. 마감처리가 영 부실한 아스팔트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글자도 없어, 바닥 공사도 하다 말았어. 내가 진짜 이상한 건물에 살고 있네. 아스팔트 위 엷게 간 실금을 따라 시선을 옮길수록 숨이 차올랐다.
“네가 나 게이 만들었다고.”
남이야 어떻든 말든 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천천히 자세를 바로 세운 지수는 저를 향해 내민 승의 손을 응시했다.
“…미친놈.”
“나 안 미쳤는데?”
손바닥에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콘돔들을 얹은 승이 말했다. 난데없이 들은 커밍아웃에 대한 복수를 이렇게 하는 건가?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는데 그런 지수를 보고도 승은 전혀 웃지 않았다.
목 아래로 작게 소름이 끼치며 눈이 마주쳤다. 거기엔 너무 진지해서 도리어 미쳐 보이는 사람의 형상을 한 승이 있었다.
뻔뻔한 하관 위로 혜경의 단정한 이목구비가 겹쳐 보였다. 이 새끼는 엄마 망신을 시키고 다녀도 유분수가 있지. 선생님이 나한테 얼마나 잘해 줬었는데…. 지수는 제가 혜경에게 받았던 크고 작은 친절들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승과 저 사이의 유일한 공통분모인 혜경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저 번듯한 얼굴로 주먹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너 나한테 왜 이러냐?”
“내가 뭘.”
가히 안하무인의 태도였다. 지수는 잠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이름 석 자만 넣어도 기본 신상을 비롯한 각종 정보가 앞다투어 뜨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피차 얼굴이 팔릴 대로 팔린 처지였으니 이런 어이없는 대화는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이 없도록 애당초 단속을 철저히 해야 했다.
사방이 개미 새끼 기어 다니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지수는 목소리를 낮추고 짓씹듯 힘주어 말을 뱉었다.
“할 말도 없으면서 사람을 불러내지를 않나. 나중엔 또 이상한 내기 운운하면서 바쁜 사람 데리고 세차장이니 뭐니 엉뚱한 곳이나 데리고 다니고.”
“…….”
“그러고는 대뜸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뭐? 내가 널 어쨌다고?”
그간의 일이 단 몇 마디로 간추려졌다. 승과 저는 살을 붙여 길게 늘여 보려 해도 그럴 만한 건덕지조차 없는 사이였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요약에 지수의 한쪽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갔다.
그거 봐, 너도 할 말 없지? 내가 이렇게 친절히 말해 줬으니 이제 정신 차렸겠지. 그런 자신감에서 비롯된 불친절한 미소였으나 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허튼소리를 이어 나갔다.
“네가 그때 그랬잖아. 혼자 할 때 너보다 큰 남자 밑에 깔리는 상상 한다고.”
“야, 너 진짜 조용히 안 할…?”
“나 봐.”
“…….”
“너보다 크지 않아?”
손바닥에 한 무더기 콘돔을 얹은 승이 천천히 왼쪽 다리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조금 전 예고 없이 마주쳤을 때처럼 짝다리를 짚은 자세였다.
재수 없는 새끼. 그건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이런 식으로 본인의 큰 키를 강조하시겠다? 태생적인 거만함이 깃든 승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지수는 여타의 남자들이 왜 그다지도 작은 키 콤플렉스에 괴로워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너 깔아 줄게, 제대로.”
비스듬한 자세 덕에 한층 거만해진 승이 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까치발이라도 들어야 하나. 지수는 여울지는 승의 속눈썹 그림자를 보며 고민했다. 옆으로 두 걸음만 가면 건물 현관이었고, 현관 앞에는 좁은 반석이 있었다.
저게 높이가 못해도 이십 센티는 될 테니 위에 올라서면 쟤보다 내 눈높이가 더 높아질 텐데. 처음부터 저기 서서 이야기를 시작할 걸 하는 알량한 후회가 들었다. 지금처럼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각도에는 저도 익숙지가 않았다. 위로 뻗는 제 시선이 굴욕스러워 지수는 괜히 턱을 조금 치켜들고 대꾸했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너보다 큰 남자….”
“…….”
“잘 없지 않냐?”
그렇지. 왜냐면 나도 충분히 크니까. 하지만 그 조건이 충족된다는 이유만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몸을 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유난히 보수적인 사람이라서? 아니. 그저 어디까지나 특별할 거 하나 없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정상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해 주겠다고.”
그러니 이건 반대로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인 거고.
눈앞이 막막했다. 얘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지금 승은 수치심이라는 걸 도통 모르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수치심만 없나. 염치는 또 어떻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둔갑시키는 승의 연금술 앞에서 지수는 좀 세게 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네가 왜? 안 해 줘도 돼.”
“내가 해 주고 싶어.”
“왜 네가 그걸 해 주고 싶은데? 원래 아무한테나 이렇게 자자고 조르고 다녀? 그러면 사람들이 군말 않고 알겠다고 하면서 너한테 대 줬어?”
“…….”
쏘아붙이는 말투가 차가웠다. 밖에서 사람들이랑 싸우고 다니지 말라던 연옥의 당부가 머리를 스쳤다. 우리 여사님 진짜 대단하시네. 그럴 리가 있냐며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말이 알고 보니 저보다 앞일을 몇 수나 멀리 내다본 충고였다.
무슨 말을 해도 끄떡 않던 승은 문란한 취급만은 참을 수 없었는지 살짝 못마땅한 티를 냈다. 말문이 제대로 막힌 듯한 모습에 비로소 한 줌 보람이 느껴졌다.
“할 말 없지? 나 간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집을 두고 쓰레기 같은 설전에 시간을 길게도 허비했다. 지수는 늦어진 귀가를 서둘렀다. 다섯 개에 한 묶음인 라면이 든 비닐봉지가 손목을 아프게 죄고 있었다.
“나 잘해.”
“…….”
“……진짠데.”
낮고 직설적인 읊조림에 고개가 돌아갔다. 나는 왜 쓸데없이 귀만 밝아서는.
“…네가 그렇게 잘한다니 나도 집에 가서 차근차근 생각해 볼게.”
“…….”
가까스로 체면을 차린 지수가 말했다.
“혼자 몇 시간 고민하다 보면 생각이 바뀔지 누가 아냐?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는 말고 너도… 좀 가. 너네 집 가라고.”
수없이 연습한 대사를 카메라 앞에서 늘어놓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대처였다. 물 흐르듯 능청스러웠던 방금 제 표정 연기를 스승인 선정이 보았다면 분명 기뻐했을 텐데.
지수는 되는대로 생각의 가지를 뻗쳐 나갔다. 딴생각… 딴생각이 절실했다. 색정적인 승의 꼬드김에 움찔 놀란 아랫배를 숨기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생각이라도 괜찮았다.
“싫어. 지금 생각해. 나 못 기다려.”
“왜?”
“그날 너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 내가 그날 밤에, 아니 이틀 동안 꿈에서 네가 자꾸─.”
“…내가? 네 꿈에?”
“내 말은, 내가 지금 어제부터 아침마다…. 그러니까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네가 먼저 꿈에서… 아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
정체 모를 무언가가 배꼽 아래를 휘젓고 다니는 가운데 주어와 술어가 호응되지 않는 문장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공기 위를 둥둥 떠다녔다. 본인도 자기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알긴 아는지 승은 정수리를 아프게 긁어 대며 중언부언 말을 이었다. 좀 전의 오만방자함은 사라지고 이젠 급격한 초조함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아무튼 나 못 기다려. 지금 결정해. 난 오늘… 오늘, 너랑 하고 싶어. 오늘 해야 돼.”
쩔쩔매는 걸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동했다. 뱃가죽 아래를 휘젓고 다니는 미꾸라지 같은 욕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천히 제 페이스를 되찾은 지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펼쳐 들었다.
“그래?”
“으응.”
어르듯 흘러나온 말투에 승은 온순하게 답했다. 개소리를 하도 당당하게 해 대길래 천성이 기고만장한 놈인 줄 알았더니 아쉬울 땐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아는 모양이었다. 새로웠다. 폐공장을 개조한 세트장에서 울먹이는 혜경을 달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을 봤을 때처럼.
“그렇게 급해?”
“응.”
“그러니까 왜 그렇게 급하냐고.”
“…….”
키가 몇일까. 승이 입고 있는 검은 티셔츠 중앙에 새겨진 브랜드 로고가 호흡을 따라 아래로 조금 꺼졌다 이내 다시 올라오기를 되풀이했다.
“말을 해 봐. 왜?”
“…….”
조여들었다 펴지는 판판한 가슴 근육이 주인의 심경을 대변했다. 지수는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다시 푹 눌러쓰고는 승과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제가 올려다봐야 했지만, 전과 달리 어떠한 굴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개의 발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그럼 일단… 들어가자. 사람들 있으니까… 들어가서 마저 얘기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남녀 목소리가 섞인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했다.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고요하던 골목에 소음이 끼어드니 잠시 잊고 있던 현실감각이 몰려왔다. 아, 불안해. 습한 긴장감이 몸을 감쌌다.
큰 보폭으로 공동현관으로 향한 지수는 작고 네모난 기계 앞에 섰다. 글자도 하나 잃어버리고 기본적인 바닥 공사도 제대로 안 된 건물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보안장치는 구비하고 있었다. 부동산에서 알려 준 비밀번호는 2, 4, 5… 그리고 6.
익숙한 나열을 따라 숫자 네 개를 차례로 입력한 지수는 마지막으로 열쇠가 그려진 버튼을 눌렀다. 띠링. 기계에서 흘러나온 짧고 경쾌한 효과음이 현관문에 붙어 있는 안전장치가 해제되었음을 알렸다. 지수는 평소처럼 어깨를 들이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너 몇 층에 살아?”
“나? 5층.”
들어올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밖을 지키고 선 승은 고개를 쳐든 채로 건물을 살피고 있었다.
대학교 근처에 지어진 고만고만한 자취용 건물이 특별하게 새로워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하얀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아마도 건물의 대략적인 크기를 통해 안에 들어 있을 세간 살림의 규모를 어림짐작 중인 것 같았다.
“너네 집 침대 커?”
지수는 속으로 제가 사는 좁은 방의 조감도를 그려 나갔다. 전자레인지도 냉장고도, 그리고 세탁기도 풀옵션 조건에 포함이었지만 침대만은 불포함이어서 손수 인터넷으로 가격을 비교 검색해 가며 주문했던 매트리스의 크기가 어땠더라.
백팔십을 훨씬 웃도는 제가 혼자 자기에 부족함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넉넉하지도 않은 크기, 슈퍼 싱글.
“…….”
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귓전을 긁었다.
“싫은….”
싫은데, 내가 왜? 누가 너랑 잔대? 곧바로 이어지려던 지수의 말은 낯선 수다 소리에 막혔다.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들이 아까보다 확연하게 크고 분명했다. 실용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인지 무리 중 한 명이 문장에 되는대로 멜로디를 붙여서 노래를 불렀다. 장난이라고 하기엔 버스킹이라도 하는 양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우리 과 학장님, 수업은 재미가 없어, 저녁은 무엇을, 학식은 맛없어, 내일은 목요일, 지옥의 1교시, 우리는 죽겠네….
부드러운 음조를 얹은 말소리가 점점 또렷해져 갔다.
“타.”
콘돔을 쥔 커다란 손이 차를 향해 손짓했다. 괴상한 가사를 얹은 감미로운 멜로디는 어느덧 끝을 모르는 돌림노래가 되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승차를 종용하는 단호한 눈매가 출처 없는 신뢰감을 뿜어냈다.
건물 밖으로 내려온 지수는 왔던 길을 돌아 승의 차로 향했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무릎에 부딪혀 오는 비닐봉지가 부스럭부스럭 소란을 피워 댔다.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 낸 기다란 그림자 두 개가 차체 위로 어지럽게 겹쳐졌다. 땀이 고인 축축한 손이 조수석 손잡이를 잡았다.
차는 쫓기듯 골목을 빠져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차는 그냥 달렸는데 그 안에 탄 제 기분이 쫓기는 듯했다는 편이 더 옳았다.
“제대로 이야기부터 하자.”
“그래.”
대로변으로 진입하던 차가 갓길에 멈춰 섰다. 용기를 낸 지수가 먼저 운을 띄웠다. 해야 할 말이 많았다. 아니,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많았다. 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너 내 생각 하면서 자위했냐?”
“미쳤어? 아니.”
서로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 그나마 순화시킨 표현이었는데 강한 부정을 실은 대답이 우렁찼다. 누가 보면 기합이라도 넣는 줄 알겠네. 높은 데시벨에 잠깐 맥이 엇박으로 뛰었다. 그런 오해가 불쾌하다는 듯 승은 찌푸린 얼굴로 결백을 주장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근데 그 비슷한 건 했어.”
심드렁하게 대꾸하던 지수의 낯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뭘… 했는데?”
승은 대답 대신 두 손으로 핸들을 감싸며 몸을 숙였다. 시꺼먼 운동복을 차려입은 큰 덩치가 둥그렇게 고꾸라지는 모양새가 실로 볼만했다.
“야, 야. 그러지 말고 말을, 말을 좀… 해 봐….”
이 새끼가 굳어 버렸나. 웅크린 채 묵묵부답인 승은 거대한 흑임자 찹쌀떡 같았다. 지켜보기가 답답해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보려던 지수는 그러다 괜히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것 같아 마음을 바꿨다.
“…네가 물어보니까 나도 최대한 쉽게 말할게.”
“응.”
한동안 머리를 처박고 있던 승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공포스러운 선전포고를 날렸다.
무서워…. 줄곧 예상을 빗나가는 말만 해 온 승이라서 더 그랬다. 마른침을 삼킨 지수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을 재촉했다.
“너 남자 좋아한다며.”
“응.”
맞는 말이었다. 지수는 가상의 빨간펜을 꺼내 저 혼자만 볼 수 있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근데 누구 사귀고 뭐 그런, 그러니까 실제 연애 경험 같은 건 없다며.”
“…응.”
역시나 이것도 맞는 말이니 동그라미 하나 더 추가. 단순한 사실 여부만 가리면 되는 답변이었기에 채점이 쉬웠다.
“궁금하지 않아? 남자랑 자는 거.”
“…….”
이건… 세모. 넌지시 들어온 물음에 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선 두 질문과 다르게 제 개인적인 감상을 묻고 있었으니까.
“나는 궁금해졌어.”
“…….”
“너 때문에.”
까놓고 말하면 발정 났다는 소리를 승은 참 감미롭게도 포장했다.
“대충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 모르고 잘 살다가 어느 순간 뒤늦게 자기 정체성 깨닫는 사람도 많다고 하더라….”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네가 혼란스러울 거 나도 이해해. 나는 좀 빨리 깨달은 편이기는 하지만… 나라고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고민?”
“응, 고민.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지금 네가 느낄 혼란… 나는 진짜 이해해.”
“무슨 혼란?”
선험자로서 지수는 최선을 다해 공감과 이해를 표했다. 뱉고 보니 모두 오래전의 제가 간절히 듣고 싶어했던 말이었다.
“…동성을 좋아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지수는 어른스럽게 승을 달랬다. 길 잃은 어린 양을 사랑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처럼.
“응, 내 말이 그거야. 잘못된 거 아니지. 그래서 너한테 해 보자는 거야.”
“야, 그렇다고 그게─.”
“너 커밍아웃할 거야?”
“아니?”
참혹한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지수는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커밍아웃? 그런 건 배우 고지수의 향후 5년짜리 계획에도, 10년짜리 계획에도, 20년짜리 계획에도 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일거리가 끊기는 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겠지. 끝도 없이.
불과 며칠 전, 고작 동성 애인이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만으로 신나게 당사자를 씹고 뜯던 저열한 술자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누구든 간 크게 그런 사실을 공표한다면, 남은 일생을 도마 위에서 보낼 각오를 해야만 했다. 앞뒤가 꽉 막힌 이 나라 방송가에 발을 들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수는 비밀이 알려짐과 동시에 어그러질 저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떠오른 모든 장면이 견딜 수 없게 끔찍했다.
“평생 모르고 살 건 아니잖아.”
“…….”
무거운 제 비밀은 지켜져야 마땅했으나 반대로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좀 우울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연애 한 번 못 해 본 게 아쉬워 데뷔를 너무 일찍 했나 싶다가도 아웃팅 생각을 하면 이른 데뷔가 오히려 감사했다. 연애든 뭐든 경험이 전무하다는 건, 동시에 비밀이 폭로될 확률도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었으니.
그렇다면 나는 이걸 얼마나 더 숨길 수 있을까. 잘만 처신한다면 영영 숨기는 것도 가능할까. 그런 식으로 비밀의 유효기간을 따져 보고 있으면 마치 작은 모래시계를 앞에 두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모래알의 개수를 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한 번 자 보면 너 연기할 때도 도움 될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승은 끈질겼다. 허무맹랑한 논지를 지수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럼 너는? 너는 나랑 자는 게 네 경기력에 도움이 돼?”
“응.”
“어떤 도움이 되는데?”
“…….”
“봐, 제대로 말도 못 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일단은 홀로 조용히 현재의 국면을 곱씹어 보고 싶었다.
“분명히 도움 될 거야. 못 믿겠으면 나랑 내기하든가.”
“야, 너는 이 상황에 무슨 내기를….”
“네가 준 이만 원 아직 여기 있어.”
지긋지긋하다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승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콘솔 박스를 가리켰다.
“입 좀 다물어, 제발.”
두 손으로 얼굴을 크게 쓸어내린 지수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유동 인구가 많은 대학가답게 많은 이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행복해 보였으나 이런 감상이 허상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저마다의 말 못 할 고민이 있겠지.
신호등에 초록 불이 들어왔다.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건넜다. 반대편으로 향하는 종종걸음은 하나같이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해 보였다.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걸까. 번갯불에 콩이라도 볶아 먹는 듯 성급한 형상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갓길에 안전히 정차한 저희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었는데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갔다. 감정이 이런 식으로도 전이가 되나. 깜빡이는 초록 신호마저 재촉처럼 느껴졌다. 상대 배우가 연기하는 정서에 더불어 젖어 든 적이야 많았어도 지금 같은 경험은 난생처음인데….
초조함이 넝쿨처럼 발목을 붙들었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다가는 신호가 바뀌어 버리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언제 저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을까.
“야.”
“응?”
결심을 굳힌 지수가 승을 불렀다.
“시동 걸어.”
곧게 세워져 좁은 틈으로 모래 알갱이를 내려보내던 모래시계가 마침내 동이 났다. 손을 뻗은 지수는 기꺼이 시계를 치워 버려 보기로 했다.
승의 집은 송산동이었다. 차는 좁은 골목이 아니라 번듯한 아파트의 더 번듯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자취를 이렇게 준수하게 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가족들이랑 사는 집에 저를 데려갈 정도의 비상식인은 아닐 테니 아마도 혼자 사는 집일 터였다.
송산동은 해당 관할구 내에 큰 방송국이 두 개나 있어 예로부터 방송업계 종사자들에겐 출세의 상징과도 같은 동네였다. 어쩐지 그날 되게 빨리 나오더라…. 실장 건주, 그리고 TSC 관계자들과 식사를 하고 송산 공원 초입에서 승을 만났던 저번 날이 떠올랐다. 만나자는 말에 지체 없이 접선 장소를 대길래 그저 근방 지리에 밝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어엿한 송산동 주민이었다니.
하긴 엄마가 배우고 아빠 역시 유명한 체육인인 승의 유복한 가정환경을 고려하면 크게 유별난 일도 아니었다. 동갑이지만 현격히 차이 나는 자취의 규모만 따져 봐도 저와 승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었다.
좋네. 지수는 무덤덤했다.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런 태생적인 차이에 지나칠 정도로 배알이 꼴려 하는 건 하수들의 사고방식이었다. 본인의 노력이 개입되지 않은 결과에 대한 비교는 대개 열등감을 낳았으며, 그렇게 완성된 열등감은 건강한 정신을 좀먹기 마련이었으니까.
제가 사는 대학가 건물과 달리 멀끔한 승의 자췻집을 보며 지수는 도리어 안심했다. 이렇게 가진 게 많은 놈이라면 적어도 제 입으로 남자랑, 그것도 연예인 고 모 씨랑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리 같은 걸 떠벌리고 다닐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할 것 같았다.
입신양명의 아이콘 같은 동네에서 첫 경험을 하다니. 어영부영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지만, 곧 벌어질 오늘의 이벤트가 과연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탈일지는 여전히 헷갈렸다.
“혼자 살아?”
“응.”
승은 숫자 11이 적힌 네모난 버튼을 눌렀다. 문 닫힌 엘리베이터가 상승하자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타임머신을 탄 것 같았다.
곧이어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을 중심으로 양옆에 현관문 두 개가 데칼코마니처럼 나타났다. 1101호. 승은 그중 왼쪽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1102호에는 어린이가 사는지 보조 바퀴가 달린 작은 네발자전거가 문 바로 옆에 세워져 있었다.
“들어와.”
“…어.”
도난 방지를 위해 앞바퀴에 칭칭 둘려 있는 어설픈 체인을 보던 지수는 승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현관에 서서 감으로 신발을 벗고 있었더니 곧 센서가 달린 현관 조명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먼저 신발을 벗은 승이 문턱 가까이에서 빤히 제 두 발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지수는 꾸물대던 걸 멈추고 재빠르게 신발을 벗었다.
“…….”
내내 아래를 주시하던 승이 성큼 현관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긴 다리를 뻗어 발로 툭 가볍게 제가 벗은 신발을 쳤다. 아무렇게나 벗어 둔 운동화 두 짝이 순식간에 왼쪽 구석에 가지런하게 자리를 잡았다.
뭐야. 이상행동에 놀란 지수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살폈다. 황당하게도 오른쪽 구석에는 정확히 똑같은 모양으로 벗어 둔 승의 운동화가 있었다.
“좀 거슬려서.”
“어….”
남이 벗어 놓은 신발의 모양새까지 신경 쓰다니. 신발이 집 밖으로 굴러 나가는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에 좀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지수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옛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좀 피곤하게 사는 타입인가 보네. 저와는 전혀 다른 피가 흐르는 종족을 조우한 지수의 턱이 굳게 다물렸다. 그러나 경악스럽게도 신발 두 짝은 시작에 불과했다.
“야, 진짜 너 여기 사는 거 맞아?”
“그럼 내가 살지 누가 살겠어.”
“…….”
“왜?”
거실이 밝아지자 집의 정체가, 아니 승의 정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휑한 거실 곳곳에 지수의 알쏭달쏭한 시선이 가 닿았다. 평수와 비교해 짐이 많이 없는 거실은 누군가 실제 거주 중인 집이 아니라 철거 중인 모델하우스 같았다.
텔레비전이 걸려 있어야 할 벽 아래에 갖가지 모양의 아령들이 놓여 있었다. 1kg부터 5kg까지, 크기도 모양도 알록달록한 아령들이 크레센도 저주에 걸린 것처럼 무게를 따라 정렬 중이었다. 구석에 있는 보라색 기둥은 스트레칭 시 바닥에 까는 매트인 것 같았는데 옆에는 역시나 점점 크게의 저주에 걸린 다양한 크기의 기둥들이 열 맞춰 줄을 서 있었다.
저들끼리 군집한 채 전문성을 강하게 어필하는 컬렉션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띵했다. 반대편에는 커다란 눈덩이를 닮은 빈백 두 개가 소파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개별 사이즈 두 개를 마치 하나처럼 길게 붙여 놓은 거로 봤을 때 주로 한쪽에 앉아서 머리를 두고 다른 쪽에 다리를 올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빈백 옆에는 까만색 짐볼까지 있었는데 도대체 여기가 집인지 체육관인지…. 작지만 프로페셔널한 기구들의 행렬이 아찔했다. 찬찬히 살펴볼수록 모델하우스로 오해했던 방금의 생각도 틀린 감상 같았다.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아무리 건강하고 지속적인 삶이 트렌드라지만 그 어떤 건설사도 이런 콘셉트로 모델하우스를 꾸미지는 않을 테니까.
“얼마 전에 이사 와서 짐도 그렇고 가구도 그렇고… 하여튼 뭐가 별로 없어.”
“…….”
“왜 그렇게 봐? 이상해?”
“아니, 이상하진 않은데….”
성욕이 뚝 떨어지는 광경이야.
잘빠진 몸매에 혹해 생겨났던 세속적인 욕구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한기가 돌았다.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미꾸라지도 이제는 죽고 없었다. 차 안에서까지만 해도 숨이 붙어 있던 끈질긴 놈이 아령 행렬을 보더니 재빨리 유명을 달리했다.
거실 한쪽을 차지하는 전면 창 너머로 손톱 크기의 빨간 십자가가 빛났다. 교회는 안 가 봐서 좀 낯선데… 근처에 절은 없나? 아무래도 좋았다. 순식간에 뒤집힌 이 기분으로는 섹스가 아니라 당장 가까운 종교단체에 달려가 고해성사를 해야 할 듯싶었으니.
“자.”
배꼽에 딱 붙어 있는 고추도 기가 죽을 것 같은 메마른 광경 가운데에서 집주인만이 태평했다. 언제 챙겨 왔는지 승은 가운과 수건을 비롯한 각종 세면도구를 내밀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투명한 팩 안에는 미니사이즈의 샴푸와 린스, 그리고 바디워시가 들어 있었다.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호텔이었어? 어매니티 구성이 숙박업소 뺨치게 알찼다. 잘 접힌 수건 중앙이 불룩하길래 슬쩍 들춰 보니 거기엔 칫솔과 치약이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숨어 있었다. 가운과 수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뜯지 않은 새 제품이었다.
“난 밖에서 씻을 테니까 안방 화장실에서 씻어. 이사 오고 나서 바깥 욕실만 써서 거기 아직 아무도 안 썼어.”
지수는 제가 쥐고 있는 어매니티 꾸러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왜 이렇게 불쾌하지. 살뜰한 챙김에도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당연했다. 이건 배려가 아니었다.
“너 왜 이러냐?”
배려를 가장한 격리였다.
“하기 전에 씻어야지. 아니야?”
“…그건 그렇지.”
받은 꾸러미를 돌려줄 듯 내밀었더니 뜻밖에도 상식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 씻어야지. 황송한 손님맞이를 가장했지만 어딘지 문전박대를 가장하고 있다던 지수의 음모론이 위생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무해한 얼굴 앞에서 힘없이 가로막혔다.
내가 너무… 의심이 많았나 봐. 지수는 타인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때 묻은 저의 사상을 반성했다.
“설마… 같이 씻고 싶어? 난 그건 좀… 싫은데.”
“뭔 소리야? 나도 싫어.”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도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억울한 오해만큼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부정했다.
“잘됐네.”
“응.”
“들어가서 씻어. 아까도 말했듯이 아무도 쓴 적 없어서 깨끗할 거야.”
집이 꼭 어느 철 지난 게임에서 가상 화폐로 구매한 3D 모형 아이템들로 꾸며 놓은 아지트 같은 분위기를 내길래 저도 덩달아 좀 예민해졌던 듯싶었다. 하물며 더러운 시궁창보다야 인간미는 덜 하더라도 이렇게 청결하고 잘 정리된 곳에서 뒹구는 게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훨씬 나았다.
지수는 승의 손짓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불은 켜지 않았으나 왼쪽 구석에 방문과 똑같이 생긴 문이 하나 더 있는 건 또렷하게 보였다.
투명한 샤워 부스가 딸린 작은 욕실은 승의 말대로 깔끔했다.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면서 비누, 손 세정제 그리고 작은 크기의 핸드타월 등 또 있을 건 다 있는 광경이 적잖이 희한했다. 수분기 없이 바싹 메마른 공기에서는 시트러스 계열의 방향제 냄새만이 강하게 났다.
현재 제가 거주하고 있는 집보다 확실히 쾌적한 환경에서 지수는 개운하게 샤워를 마쳤다. 승이 준 가운도 처음에는 이유 없이 거부감이 들었는데 입고 보니 천이 어찌나 도톰하고 보들보들한지 아기 피부 같았다.
짧은 샤워를 마치고 욕실 밖으로 나왔더니 우렁차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벽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되게 오래 씻네. 아무래도 주인 없는 방에 혼자 있기가 어색해 밖으로 나가려던 지수의 발이 문턱 근처에서 멈춰 섰다.
“얘 진짜 미쳤네…….”
이걸 다 딴 거야?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메달들이 좁고 긴 형태의 3단 유리 진열장 안에 줄지어 걸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메달들을 지수는 넋을 놓고 감상했다. 중앙 칸 가운데에는 개성 넘치는 디자인의 트로피도 여럿 놓여 있었다.
체육관을 방불케 하는 각종 운동 기구를 봤을 때도, 호텔 뺨치는 어매니티 꾸러미를 받아 들었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순도 백 퍼센트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한 인간의 나고 자란 역사가 이런 식으로 고스란히 전시될 수도 있다니.
주렁주렁 걸려 있는 메달들은 실력 좋은 사냥꾼의 전리품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지수의 몸이 유리장 쪽으로 기울었다. 되게 열심히 살았네. 금빛 물성으로 표상된 그간의 성과들은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대충 길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배포되는 물티슈 같은 게 아니었다.
“뭘 그렇게 봐?”
사뭇 대단한 광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집주인이자 방 주인인 승이 돌아왔다. 승 역시 아기 피부처럼 보들한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어쩐지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뒤바뀐 것 같은 상황이 머쓱했다. 지수는 서 있던 자리에서 반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나름의 입장을 표명했다.
“나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봐, 괜찮아.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가벼운 허락과 함께 승이 불을 켰고 지수는 다시 메달 구경에 몰두했다.
“너 장난 아니다.”
“…….”
“중간에 걸린 저거는 어디서 딴 거야? 메달이 되게 크네.”
지수는 제일 눈에 띄는 메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파란 거 저거? 어, 그거 좀 중요한 거야.”
“왜?”
“걔가 나 군 면제 시켜 줬거든.”
“아…….”
3년 전 여름, 지수가 졸린 눈에 힘을 주며 보초를 서고 있을 때 승은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간 군대 생활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인성 파탄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부대 내 최고참과 단둘이서 서는 보초만은 지금도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주 조금 부러웠지만 지수는 거기다 대고 네가 그렇게 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건 다 나 같은 사람이 열심히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라는 식의 허풍을 떨지는 않았다.
세상에 유세 떨 게 따로 있지. 얼마나 촌스러워. 지수는 대신 진짜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럼 너 연금도 나와? 막 국가대표들 메달 따면 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돈 주는 거.”
“연금은 안 나와. 아시안 게임은 금메달 두 번 따야 연금 대상자라서…. 그냥 포상금만 좀 줘. 그리고 연금 받는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주는 것도 아니야.”
“아, 그래?”
몰랐던 사실이었다.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 두 개 있어야 연금을 받는 것도, 받는다고 해도 죽기 전까지 주는 게 아니라는 것도.
“다 봤어?”
“으응.”
과하게 몰입한 지수에게 승은 친절히 용건을 상기시켰다. 본격적으로 방으로 들어온 승은 가져온 콘돔을 협탁 옆에 내려놓고 옆에 놓인 조명등을 켰다.
거실이랑 비슷하게 휑한 방 중앙에는 크기가 상당한 침대가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자는 제 앞에서 느닷없이 침대 사이즈를 운운하길래 대충 큰 침대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직접 맞닥뜨린 침대는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컸다. 두꺼운 매트리스와 각 잡힌 네 모서리에서 뛰어난 쿠션감이 전해졌다.
천장의 형광등이 꺼지고 곧바로 협탁 위 조명등의 조도 역시 낮아졌다. 멀뚱한 손님을 두고 혼자서 척척 준비를 해 나가는 승에게서는 별다른 흥분감이 전해지지 않았다.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닌가 봐? 저렇게 많은 메달을 따면서 연애도 부지런히 하고 다녔다니… 나도 좀 분발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승이 좀 다른 의미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너 언제부터 남자 좋아했어?”
“나? 그냥 태어날 때부터.”
협탁 앞에 선 승이 콘돔 포장지를 벗겼다. 멀찍이 떨어져 선 지수는 판판한 뒷모습을 감상했다. 허리에 매여 있던 가운 끈을 풀어낸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소맷귀가 너풀대며 등 근육이 꿈틀댔다.
“너도 껴.”
하긴 나중에 편하게 뒤처리하려면 둘 다 끼고 있는 게 좋으니까.
“응.”
다가선 지수 역시 콘돔을 집어 들었다. 명품 브랜드에서 만든 콘돔이라길래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냥 평범했다. 동그랗고 미끄덩한 비닐을 귀두 끝에 댄 지수는 중학교 성교육 시간에 배운 콘돔 착용법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삽화가 딸린 교육 자료와 함께 주어졌던 덜 익어서 딱딱하고 푸르스름하던 바나나 하나. 실제 상황을 꼭 닮은 실습으로 익혔던 콘돔 착용법은 쉽고 간단했다.
끝을 평평하게 눌러 공기를 빼 주고, 콘돔 전체를 굴리면서 아래로 내리기만 하면 끝. 바나나가 아닌 진짜 성기에 끼워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바나나나 성기나 별 차이가 없었다.
이제 침대에 누우면 되려나. 초짜 티를 내긴 싫었다. 조용히 다음 단계를 넘겨짚으며 옆을 흘겨본 지수의 동공이 바쁘게 흔들렸다.
“……그거 달고 어떻게 경기해?”
극악무도한 크기에 모로반사처럼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이거? 그게… 다 방법이 있는데… 약간 이걸 넣을 때, 그러니까 수납을 잘하면 되는데…. 미안, 말로 설명하려니까 좀 어렵네.”
다리 사이에 어떻게 저런 게…. 보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부피였지만 지수를 놀라게 한 포인트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털은? 왜… 없어?”
“나 주기적으로 제모해서 목 아래로는 털이 없어.”
“…….”
“있으면 운동할 때 불편하고 찝찝해서.”
그러고 보니 가운 아래로 훌렁 드러난 종아리 역시 유독 매끈했다. 겨드랑이에도 분명 없겠지. 감싸 주는 체모가 전혀 없는 척박한 상황에서 성기의 존재감만이 흉흉하게 빛났다.
지수는 시선을 잡아끄는 그것의 존재를 애써 무시했다. 넋 놓고 놀라고만 있기에는 아직 해결 못 한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야, 최승.”
“어?”
“솔직히 말해 줘.”
“뭘?”
“너 처음이지?”
“…….”
지수는 확신했다.
“너 여자랑도 자 본 적 없지?”
“…….”
“무르자고 안 할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응, 없어. 그게… 왜?”
승은 발뺌하지 않고 무경험을 인정했다. 문제가 있다면 양심이 있어서 자백한 게 아니라 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와, 진짜 어이가 없네. 추궁하던 지수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아까 네가 네 입으로 너 잘한다며. 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말은 왜 한 건데?”
“잘할… 거니까?”
“뭐?”
“나 잘할 거라고. 안 해 봐도 알 수 있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네가 너한테 박아 보기라도 했어?”
“난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해. 지금까지 살면서 몸으로 하는 걸 못 했던 적?”
“…….”
“한 번도 없어. 섹스도 몸으로 하는 거 아니야?”
앞뒤가 요상하게 바뀐 논리 전개가 당당했다. 픽 비웃음이 샜다.
“그거야 뭐 이제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
“근데 그 잘난 운동 신경에 손재주는 포함이 안 되나 봐? 너 콘돔 뒤집어 꼈어.”
뭉툭한 성기 끝, 쓰다만 중절모처럼 엉성하게 씌워진 초박형 비닐에 지수의 조소가 날아가 꽂혔다.
반대쪽으로 씌운 탓에 끝까지 펼쳐지지 못한 콘돔은 무지막지한 크기의 버프를 받아 도저히 못 본 척 지나칠 수가 없을 정도로 초짜 티를 내고 있었다.
폼을 잡고 싶었으면 성교육부터 좀 제대로 받고 오지 그랬어. 목과 뒤통수에 바짝 힘이 들어간 승이 어설프게 씌워진 콘돔을 한 번에 잡아 뺐다. 빠르게 새 콘돔을 뜯으며 돌아서는 뒷모습에서는 약이 오른 심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이번엔 제대로 끼웠어.”
실수를 수습한 승이 몸을 들이밀었다. 한바탕 크게 비웃어 준 후,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던 지수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집에 있는 싸구려 제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급 매트리스가 무방비하게 넘어가는 척추를 안정감 있게 받쳐 줬다.
“야, 뭐 하는 건데.”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야, 야.”
“아니면 내가 또 손재주가 별로야?”
뜨거운 손이 아직 말랑한 성기를 노골적으로 주물렀다. 처음 닿는 타인의 손길에 당황한 지수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기둥을 쥔 채 엄지로 천천히 귀두 주변을 문지르는 동작에 피가 빠르게 모여 갔다.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어?”
“기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으…, 왜 이렇게 세게─.”
흐물흐물하던 성기에 딱딱한 심지가 생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얘가 진짜 미쳤나. 지수는 피가 돌아 뻐근하게 조이는 아래를 느끼며 허공에 의미 없는 발차기를 몇 번 날렸다. 운동 신경 운운하며 자존심 건드린 거 미안하니까 좀 살살 하자는 무언의 신호였는데 위에 떡하니 버티고 선 승은 끄떡도 없었다.
체모가 없는 몸이 비누처럼 미끈했다. 일어나지 못하도록 허벅지 위에 앉아 제 중심을 주무르는 승의 허벅지를 만지자 덜컥 공포심이 들었다. 누운 채로 버둥거리던 지수는 순간 버퍼링이 걸린 프로그램처럼 버벅거렸다. 단순히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앞두고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손에 닿는 몸의 밀도가 너무 빽빽했다. 울창하게 자란 소나무들이 빈틈없이 들어찬 산허리를 손끝으로 더듬는 듯한 기분이 나쁜 뜻으로 아찔했다. 이 정도 단단함이라면 근육은 물론이고 안에 든 뼈조차도 일반인이랑은 내구성 자체가 다르지 않을까. 운동선수라는 승의 직업이 비로소 생생하게 실감 났다. 허벅지 위에 놓인 승의 성기가 비틀리는 허리 움직임을 따라 제 음낭 근처에서 퉁퉁 제자리 뛰기를 했다.
“어때.”
“좋아….”
묵직하게 흔들리는 손안에서 아득한 기분이 이어졌다. 눈을 감고 끙끙 신음을 삼키던 지수는 손을 뻗어 아래를 더듬었다. 거래처럼 이루어진 관계니 작은 것 하나조차도 공평해야만 했다. 지수는 늘어져 제 허벅지 위를 간지럽히고 있는 승의 성기를 천천히 그러쥐었다.
민감한 곳을 만지자 몸을 누르고 있던 허벅지가 제일 먼저 사인을 보내왔다. 가뜩이나 단단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며 속에 든 근육이 팽창했다. 맞붙을 듯 가까운 배꼽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갔다.
“하….”
지수는 승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미끌한 콘돔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탄탄한 복근이 호흡을 따라 잘 마른 장작처럼 갈라졌다가 이내 다시 붙었다. 끝을 모르고 부풀고 있는 성기를 손으로 느끼는데 불쑥 승의 다른 손이 엉덩이 아래를 파고들었다.
“젤…! 젤 같은 거 없어?”
금방이라도 엎어질 듯 가까이 다가오는 승의 그림자를 보며 지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나마 있던 무드마저 모조리 박살 난대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상대도 분위기 따위 팽개치고 가타부타 말없이 제 성기에 손부터 뻗어 오지 않았던가. 지금 상황에서는 분위기보다 살기 위해 외치는 구조 신호가 백 배는 더 중요했다.
“…그건 없는데.”
저걸 그냥 이대로 넣는다고? 말도 안 되지. 뻑뻑한 맨살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삽입이었다.
“…….”
텁텁한 열기 사이로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실망을 해야 마땅한 말이었건만 안도감이 들었다. 다리 사리에 저토록 무시무시한 걸 달고 다니는 주제에 관계에 앞서 그 흔한 젤도 하나 준비해 놓지 않았다니. 만약 콘돔을 옳은 방향으로 잘 꼈다 하더라도 승의 뻔뻔한 거짓말은 틀림없이 이 대목에서 들통났을 거였다.
“있어 봐.”
금방이라도 넣을 것처럼 바짝 아래를 붙여 오던 승이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 아래를 받쳐 주던 손이 빠져나간 자리가 휑했다. 깔려 있느라 혈액순환이 더디던 하체에 피가 돌며 다리가 저렸다. 돌아누운 지수는 공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주먹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대충 로션 발랐어.”
미끄덩한 손이 가운을 젖히며 한쪽 엉덩이를 쥐었다. 놀란 지수가 자세를 바로 할 새도 없이 닫힌 구멍에 뭉툭한 살덩이가 둔탁하게 닿았다. 로션을 바른 게 아니라 들이부었는지 아래로부터 파우더리한 비누 향이 강하게 올라왔다.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차마 지름조차 가늠되지 않는 두꺼운 살덩이가 노크하듯 엉덩이 사이를 문질렀다. 젤이든 로션이든 일단 발랐으니 이제는 쑤셔 넣겠다는 의지가 선연한 움직임이었다.
“잠깐만.”
“왜.”
“…바로 넣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대로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모로 누워있던 지수는 몸을 좀 더 둥글게 웅크렸다. 왼손으로 팔베개하듯 머리를 받친 지수의 오른손이 입고 있는 가운을 가르고 들어갔다. 폭이 넓은 소매가 치렁치렁 움직임을 방해했지만, 지수는 개의치 않고 제 뒤를 더듬었다.
“야, 뭐 하는 거….”
“좀 넓혀야 돼. 이대로는 안 돼.”
엉덩이골 전체가 로션으로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이 안으로 저게 들어갈 수 있을까. 잠시 망설이던 지수의 검지손가락이 곧 틈 없이 꽉 다물린 구멍 사이로 들어갔다.
이물감에 골반이 굳었다. 고작 손가락 한 마디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하체 전체가 빳빳해지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지레 겁을 먹은 근육을 살살 달래듯 손마디를 움직였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내가 해 줄게.”
“야, 괜찮….”
“누워 봐.”
힘으로는 승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죽은 곤충을 해부하듯 가벼운 손짓 몇 번을 거치자 둥글게 말려 있던 자세가 어느새 천장을 보고 누운 정자세로 탈바꿈했다. 벌어진 다리 틈으로 침범한 손이 구멍을 더듬었다. 스스럼없이 다가온 손끝이 다물린 주름 위를 훑을 때마다 반질반질한 회음부가 움찔움찔 떨렸다.
“아, 살살. 살살 좀….”
길고 깨끗한 손가락이 내벽을 긁듯이 뚫고 들어왔다. 방금 제 손가락이 들어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생경함이었다. 망설임 없이 쭈욱 안쪽까지 침입한 손가락은 마치 탐험하듯 내벽 여기저기를 꾹꾹 힘주어 문질렀다. 죽을 것 같았다. 이를 악문 지수가 어렵사리 신음을 삼키던 그때, 돌연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너 여기 엄청 부드럽다. 되게… 촉촉해.”
지극히 자유분방한 두 개의 손가락은 색종이를 예쁘게 오리는 가위처럼 서걱서걱 몸 안에서 놀아났다. 부끄러운 마음에 다리를 오므릴라치면 골반을 누르고 있던 다른 손이 회음부를 간지럽혔다. 야릇한 느낌이 배로 짙어지며 긴 다리가 다시 힘없이 벌어졌다.
“말하지 마. 으, 그런 소리… 하지 마.”
“왜.”
“아, 몰라. 그냥… 그냥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찌꺽찌꺽.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지저분한 소리가 울렸다. 헤집는 손가락에 빠듯하게 벌어지는 구멍이 조금 아플라 치면, 승은 놀고 있는 엄지손가락으로 좁아지려는 테두리를 문질렀다. 애태우듯 쓸어 주는 담백한 손놀림에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았다.
힘이 달린 지수가 허리를 들썩였다. 땀이 난 두피가 화끈화끈했다. 토닥이듯 회음부를 주무르는 손길을 대차게 피하자 구부러진 채 깊숙이 박혀 있던 집요한 손가락이 훅 빠져나갔다.
“넣을게.”
“야, 야. 안 될 것 같애. 진짜, 진짜… 안 될 것 같애.”
뭉툭한 끝이 다시 구멍에 닿았다. 지수는 황급히 승의 손목을 잡아챘다. 손가락으로 들쑤신 덕에 아까보다는 확실히 나았지만, 엄두가 안 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수는 죽어라 도리질을 쳤다.
“괜찮아. 나 믿어.”
“장난해? 내가 널 보면 얼마나 봤다고. 도대체 뭘 보고 널 믿냐고.”
와, 이 새끼 또 허세 떠네. 몇 분 전까지 콘돔 씌우는 법도 제대로 모르던 놈의 호언장담에 열이 올랐다.
지수는 다리를 파닥이며 되는대로 몸을 피했다. 집이었다면 진작에 침대 헤드에 머리를 대차게 부딪치고도 남을 거센 몸부림이었지만 넓은 침대가 끔찍한 불상사를 막았다. 크고 푹신한 침대는 누운 채로 도망치기에 무척 용이하다는 또 다른 장점이 있었다.
“야, 왜 자꾸 도망가.”
“내가 언제 도망을 갔다고 그래.”
다리를 이용해 위로 몸을 밀던 지수의 손에 푹신한 베개가 잡혔다. 귀퉁이를 낚아챈 지수는 정면을 향해 힘껏 베개를 던졌다. 위에 버티고 선 승의 가슴팍에 내던질 생각이었는데 조준이 잘못된 베개는 힘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스트라이크를 맞은 물건들이 볼링 핀처럼 와르르 흩어졌다. 두 사람의 고개가 소음의 근원지를 향했다.
“미안…….”
던지기 직전에 힘이 풀려 승의 가슴팍과는 정반대 쪽으로 날아간 베개는 정확히 협탁 상부를 맞추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의 집 살림살이를 박살 내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힘겨루기하던 것도 잊고 저절로 사과의 말이 나온 순간, 각진 어깨를 방패 삼아 무섭게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승이 벌떡 일어나 침대 밖으로 향했다.
“야, 불을 켜면 켠다고….”
갑자기 밝아진 주변에 지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갸름하게 생긴 철제 스탠드에서 나온 노란 빛이 은은하게 방 안을 밝혔다.
“고지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손버릇이 엉망이구나.”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방금까지 저를 잡아먹을 듯 굴던 승이 쪼그리고 앉아 떨어진 물건들을 줍고 있었다. 몸싸움으로 거의 벗겨지다시피 한 가운을 대충 여미며 승은 빠르게 물건을 정리해 갔다. 빡빡한 콘돔에 갇혀 발딱 선 성기가 더는 참기 힘든 듯 다리 사이에서 꺼떡여 댔다.
소품들은 주인의 주도 아래 재빠르게 원래 자리를 찾아갔다. 바디로션과 휴대폰, 스포츠용 손목 아대와 안대 그리고 제가 누운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다른 물건들까지…. 지체 없이 빠른 손놀림은 얼핏 집히는 대로 늘어놓는 것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다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것 같았다. 승은 날아간 새 콘돔들을 각 맞춰 쌓는 걸 마지막으로 다시 불을 껐다.
“괜찮을 거야.”
“야, 안 된다고.”
“내가 괜찮게 할게.”
“안 들어간다고!”
침대 위로 올라온 승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괜찮다고? 정말? 무슨 근거로? 승이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뚫리는 게 제 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열이 받은 지수는 험한 말을 삼키며 턱을 들었다.
“할 수 있어, 어? 아프게 안 할게.”
정체를 숨긴 투명한 불꽃이 잘생긴 눈꺼풀 안에서 무섭게 연소되고 있었다. 형형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지수는 긴 속눈썹을 지붕 삼아 타고 있는 불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성욕? 호기심? 아니면 순간적인 충동?
“…….”
아니. 지금 승의 눈에 담긴 건 앞서 나열한 그 무엇도 아니었다.
“내가 괜찮게 할게. 나 믿으라고.”
승부욕. 쫄딱 젖은 장작도 거뜬히 태울 것 같은 승부욕.
“하…….”
능히 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함께 뭉툭한 끝이 안으로 들어왔다. 감정의 출처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몸은 착실하게 반응을 뱉어냈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섞인 야릇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보다 훨씬 굵은 성기가 느릿하게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어정쩡한 자세가 불편했는지 승은 아래에 깔린 지수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자기 어깨 위에 하나씩 걸쳤다. 엉덩이가 위로 들리면서 귀두 끝을 힘겹게 오물거리는 구멍이 한층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벌어진 양 무릎을 두 손으로 고정한 승의 등 뒤로 메달이 가득 걸려 있던 장식장이 보였다. 커튼 틈으로 숨어 들어온 불빛이 금빛 메달들에 반사되며 천장에 희미한 잔물결 무늬들을 만들어 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나도 트로피로 변해 저 전리품 컬렉션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아까 구경했던 메달들이 좁은 구멍을 버겁게 채우는 느낌과 맞물리며 멍청한 망상이 들었다.
“흐…. 읏…!”
벌어진 구멍이 빤히 보여지고 있었다. 창피함에 지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땀으로 젖은 이마가 축축했다.
“앗, 흐….”
“좀 가만히.”
괜찮게 하겠다는 말이 퍽 진심이었는지 승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가진 능력의 최대치에서 한참 떨어져 있음이 분명한 느린 허릿짓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책임감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거듭될 때마다 귀두는 이전보다 은밀한 곳을 찌르고 달아났다. 삽입이 깊어지며 막연히 고통으로 인지되던 감각이 서서히 쾌감으로 변했다. 지수는 손으로 제 성기를 더듬었다. 딱딱히 선 귀두 끝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액이 콘돔 끝에 고여 가고 있었다.
“아, 앗…. 아….”
“참아 봐.”
힘없이 콘돔 위를 더듬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승은 중심부를 가리는 지수의 손을 가볍게 툭 쳐냈다. 빨갛게 익은 채 빳빳이 선 성기가 아래에서 쳐올리는 박자에 맞춰 찌를 것도 없는 허공을 푹푹 찔러댔다.
근거 없던 호언장담이 무색하지 않게 승은 확실히 배움이 빠른 타입이었다. 그렇다면 섹스도 정말 운동의 영역인 걸까. 궁금했지만 당장은 그런 걸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눌러 삼킨 신음이 다투듯이 터져 나왔다. 짧은 숨 고르기와 함께 승의 어깨에 올리고 있던 오른쪽 다리가 침대로 떨어졌다. 정면을 향하고 있던 몸이 살짝 옆으로 기울며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잠깐이었다. 자세가 달라지며 움직임에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었다.
비스듬히 틀어진 각도에 성기가 안을 푹푹 파고들며 한 번도 찔려 본 적 없는 곳을 자극했다. 깊은 곳의 여린 살이 둥글리며 눌릴 때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짜릿한 감각이 머릿속을 망치로 때리듯 울려 댔다.
과감해진 움직임으로 봤을 때 승은 아마 자신감을 제대로 얻은 것 같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솔직히 기대했던 것 이상의 궁합이었다. 억센 힘이 들어간 손이 위로 들린 엉덩이 한 짝을 떡 주무르듯 주물렀다. 절정이 코앞이었다.
“야, 나 흡…! 쌀 것 같애.”
“싸.”
상황이 비슷했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끝을 향해 치닫는 승의 낮고 굵은 신음이 들려왔다. 채 언어로 빚어지지 못한 색정적인 소리들이 귓가에 울렸다. 퍽퍽 승이 차올리는 박자에 맞춰 정액이 팟 팟, 폭죽처럼 쏟아졌다. 사정의 여운이 몸 위로 진득하게 내려앉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콘돔을 끼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 전체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지만 그와 반대로 기분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상쾌했다. 거친 호흡을 갈무리하며 땀을 흘리는 지수의 눈이 빛났다.
사정을 마친 승의 성기가 아직 제 안에 있었다. 한껏 부풀었던 살덩어리가 서서히 작아질 준비를 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야, 최승.”
“응?”
제 허리를 더듬는 습한 손바닥에서 아쉬움이 읽힌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한 번 더 할래?”
빼지도 못한 접합부가 다시 빠듯해지고 있었다.
입 안이 찢어지듯 갈라지는 갈증과 함께 천장에 달린 커다란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집이… 아니네? 눈을 굴린 지수는 상황 파악에 힘썼다. 허리 아래가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각에 어젯밤 있었던 일이 한꺼번에 와다다 떠올랐다. 언제 잤더라. 잘 기억도 안 났다. 분명히 한 번만 더 하자며 서로 몸을 맞댔는데 둘은 이후 또 무섭게 타올라서 그야말로 미친 듯이 붙어먹었다. 마치 남들보다 늦은 첫 경험을 두둑하게 보상받으려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섹스를 했다.
전희와 후희가 과감히 생략돼 몸통만 남은 격한 섹스였다. 먼저 백기를 든 건 역시 지수였다.
‘야, 나 안 돼. 진짜 안 돼.’
거듭되는 삽입과 사정에 지쳐 참을 수 없이 잠이 몰려왔을 때였다.
‘이 침대 진짜 좋다. 이런 건… 얼마나 하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웅얼웅얼 그런 말을 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어눌한 제 물음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승이 무어라 답을 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암전이었다.
비싼 건 확실히 다르네. 저렴한 침대에서 잤을 때와 비교해 수면의 질이 월등하게 높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에서 이렇게 세상모르고 단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이 밝은 방에서는 이른 아침 특유의 상쾌한 냄새가 났다. 제식훈련 하듯 데굴데굴 구른 지수는 침대 끄트머리에 닿아서야 몸을 일으켰다.
“뭐야, 이게.”
두 다리를 바닥에 늘어뜨린 지수를 반긴 건 황당한 옷 탑이었다. 나 이런 거… 촬영하러 산에 갔을 때 종종 봤던 것 같아. 입고 있다가 두 번째 섹스 때 거추장스러워서 벗어 던진 가운 위에 제 청바지가, 청바지 위에는 티셔츠가, 티셔츠 위에는 신고 왔던 양말과 속옷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캡 모자까지. 차곡차곡 개인 채 크기 별로 쌓여 있는 소지품들은 등산객들이 오가며 소원과 함께 쌓아 놓은 소규모 돌탑을 연상시켰다.
지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툭 발로 탑을 무너뜨렸다. 꼭대기 층을 탈주한 모자와 양말이 바닥을 굴렀다. 굳이 굳이, 어? 굳이 이 아침부터 이걸 이렇게 쌓아 둔 집주인을 떠올리던 지수는 턱을 가로 저었다.
“…….”
엄청 깔끔 떠네. 어젯밤만 해도 그랬다. 승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환상적인 합을 리드해 나가다가도 흥분을 못 이긴 지수가 밀어 낸 베개나 이불이 바닥에 떨어질라치면 퍽퍽 처넣는 중에도 기가 막히게 그걸 잡아 냈다. 하는 짓만 봐서는 베갯잇이 바닥에 닿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사람 같았다.
간밤에 있었던 신기한 일을 곱씹는 지수의 표정이 오묘했다. 다시 하품이 터져 나왔다. 양말과 모자를 주운 지수는 맨 아래에 깔려 있던 가운에 팔을 꿰어 넣고는 끈으로 허리를 묶었다. 몇 시지. 느낌이 왠지 새벽 같은데. 지수는 공처럼 동그랗게 말린 양말을 장난스레 던졌다가 받으며 방문을 열었다.
해가 들어차기 시작한 거실이 환했다. 씻고 있나. 뭐든 목을 축일 게 시급했다. 설마 물 몇 모금 허락 없이 마셨다고 사람을 죽이진 않겠지. 목이 쓰리고 입이 텁텁했다. 곧 갈증을 떨칠 수 있다는 반가운 마음으로 냉장고 문을 열어젖힌 지수는 장풍이라도 맞은 듯한 환각을 느껴야만 했다.
“얘 완전 환자네…….”
불시에 공격을 당한 지수의 손이 굳었다. 살면서 이렇게 전투력 높아 보이는 냉장고를 본 적이 있었던가. 안에 든 모든 제품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라벨이 정면을 향하도록 정렬돼 있었다. 물, 이온 음료, 요거트, 심지어는 버터와 잼까지.
“이게 냉장고야, 군대야?”
간격을 맞춰 삼 열 종대로 놓인 생수병들에서는 비장함마저 뿜어져 나왔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자기들끼리 연합해 단체로 봉기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부은 눈으로 멍하니 오차 없는 질서정연함을 감상하던 지수는 순간 느껴지는 서늘한 기분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좀 이상하지 않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냉장고를 닫은 지수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
집이 너무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