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 마인드
기계마다, 또 지점마다 근소한 차이는 있지만, 자동 세차에 소요되는 시간은 보통 9분 남짓이다. 가장 먼저, 진입과 동시에 차량 하부에 물을 뿌려 줌으로써 세차는 시작된다. 출구와 입구가 완전히 닫히면 천장에서 내려온 호스가 차 주변을 빙 돌면서 예비세척을 한다. 그다음 차 표면에 전체적으로 얇게 약품을 도포하며 이후 중성세제로 쌓인 먼지를 녹이는 시간을 2, 3분 정도 짧게 가진다.
그 뒤로는 본격적으로 천장에서 비누 거품이 쏟아진다. 진한 흰 거품 탓에 차 내부에서는 바깥 상황이 보이지 않는데, 승은 특히 이 과정을 좋아했다. 차 안을 벙벙하게 울리는 소음에 귀는 살짝 멍했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만은 더없이 상쾌해서.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식으로 사람 불러내지 말라고.”
“…….”
원래라면 느긋하게 앞 유리를 바라보며 명상하듯 마음을 다스릴 시점이었다. 도로 위에서 얻은 때와 먼지들이 깨끗하게 씻겨 날아가고 앞 유리에 연하게 있던 반원 모양의 와이퍼 자국마저 사라지는 과정을 감상하는 건 운동을 제외하고 승이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으니까.
이걸 보니 나는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은데 너는 좀 어때. 옆에 앉은 동승자를 향해 눈짓으로 무언의 동의를 구하려던 승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가로막혔다.
“알겠냐.”
“…….”
폭탄 같은 선언을 토해 낸 지수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안감이 따로 없는 얇은 여름용 맨투맨 아래로 호흡을 내쉴 때마다 부풀었다 가라앉는 흉곽이 정직하게 비쳤다. 그래프로 옮겨 그린다면 큰 낙폭이 불안정하게 반복될 지수의 가슴팍을 보며 승은 입술을 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자비했던 고백과는 정반대로 지수는 덜덜 떨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고압수가 살포되기 시작했다. 둔탁한 소리만 들으면 쏟아붓는 소낙비를 온몸으로 맞아 내는 듯한 상황이었다. 털끝 하나 젖지 않은 승과 지수는 상상 속의 소나기를 두 귀로 감상했다. 어색하게 침 넘기는 소리가 흔적도 없이 묻혀 사라졌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안절벨트를 꽉 쥔 지수의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을 보며 승은 최대한 태연한 척 평정을 유지했다. 깨끗해진 차는 만지면 뽀득뽀득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사방에서 거센 바람이 불며 차에 남은 물기를 말려 나갔다. 세찬 바람을 버티지 못한 물방울들이 데굴데굴 유리 위를 굴렀다. 길었던 9분간의 세차가 끝을 보이고 있었다.
“끝났어. 나간다.”
“어.”
바람이 멈추고 칸막이가 올라가자 고요한 세상이 펼쳐졌다. 부스 안에서 겪었던 소낙비와의 대비 효과로 인해 평소 듣던 생활 소음들이 다소 아기자기하게 다가왔다.
차는 천천히 부스를 빠져나왔다. 출구 근처에는 세차를 마친 고객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 가능한 극세사 타월이 배치되어 있었다. 모든 걸 기계가 했지만, 차에 남은 물기를 닦는 마지막 과정만은 사람이 직접 해야 했다.
“나가서 유리창 좀 닦고 올게. 안 닦고 달리면 물기 때문에 먼지가 다시 다 달라붙어서.”
“…그래.”
캐비닛 위에 직원이 정갈하게 정리해 둔 수건들이 있었지만, 승은 그대로 지나쳐 트렁크를 열었다.
누가 쓰고 언제 세탁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찝찝하게 그걸로 차를 어떻게 닦아. 트렁크 안에는 언제나 따로 들고 다니는 세차용 수건이 있었다. 잘 마른 검은색 수건을 집어 든 승은 먼저 운전석 옆 사이드미러를 닦았다.
이게 더러우면… 운전할 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거든. 그다음엔 팔을 길게 뻗어 앞 유리창을 휙휙 닦아 나갔다. 수건이 유리를 크게 문지를 때마다 안에 탄 지수의 절망스러운 얼굴이 까만 선팅 아래로 슬쩍슬쩍 보였다 사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오기 직전에 곁눈질로 봤던 지수의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무섭게 일렁이고 있었다. 물기를 쫓기 위해 간헐적으로 깜빡대는 눈이 아슬아슬했다. 승은 일부러 꼼꼼하게 물기를 닦았다. 그건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해 보이는 지수를 위해 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까지 데려다줄게.”
승은 반쯤 젖은 수건을 트렁크에 넣고, 마지막으로 손까지 씻은 다음 다시 차에 올라탔다.
“안 그래도 되는데.”
“…….”
“일단… 그래, 고맙다.”
고마운 것 치고는 띠껍기 그지없는 인사였다. 배우는 배우네. 위태롭던 조금 전의 혼란을 싹 지워 낸 지수는 조금 쌀쌀맞은 투로 답했다.
“전에 갔던 그 주소로 간다. 형인예술대 후문, 맞지?”
“어.”
승은 내비게이션에 저장돼 있는 최근 목적지 목록을 뒤져 지수의 집 주소를 찾아냈다. 지친 듯 시트에 몸을 기대는 지수를 싣고 승은 군말 없이 차를 몰았다. 남의 기사 노릇을 자청할 정도로 한가하진 않았지만 만약 여기서 헤어지면….
막연한 상상일 뿐이겠지만 왠지 밤이 새도록 걷고 또 걸어서 집에 갈 지수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차로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삼십 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성질을 죽인 승은 운전기사를 자청했다. 지난번에는 혜경이 등을 떠밀어 어쩔 수 없이 데려다준 거였지만 이번에는 순전히 제 자의로 내린 결정이었다.
들르듯이 스쳐 지나간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한 번 와 본 동네라고 오는 길이 한결 쉬웠다. 승은 길눈이 밝고 순간 기억력이 뛰어난 운전자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공과 득점을 위한 빈 공간을 캐치해 내는 게 일이다 보니 뜻하지 않게 길러진 소소한 능력이었다. 학생들이 북적대는 정문 근처를 지나친 승은 익숙하게 후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곧 길이 좁아지며 미로처럼 이어지는 짧은 거리의 골목들도 어렵지 않게 헤쳐 나아갈 수 있었다. 심하게 취한 학생이 꽉 붙잡고 죽을 듯이 토를 하던 전봇대도 언제 치웠는지 지금은 깨끗하기만 했다. 골목을 따라 양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술집들을 지나자 빨간 우체통이 나왔다.
저 우체통 다음 길에서 좌회전이었지. 우체통 색깔만큼이나 기억도 선명했다. 지수의 도움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한 승은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토 리 원 룸. 창밖으로 내다본 공동현관 위에는 벽에 붙어 건물명을 알려 주는 글자 하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너 사는 건물 이름이 뭐야?”
“어?”
토리? 토리가 뭘까. 성을 잃어버린 두 글자는 너무 깜찍해서 5층짜리 건물이 아니라 누군가 애지중지 키우는 개나 고양이 이름 같았다.
앞이 휑하니 빈 걸로 봐서 원래는 다섯 글자인 것 같은데… 사라진 첫 글자가 뭘까. 승은 그게 궁금했다.
“토리, 저 앞에 있던 글자 뭐였냐고.”
“아…. 저거? 저거 나 이사 올 때부터 저 상태였는데.”
“토리…. 토리 원룸….”
승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입 밖으로 뱉으니 그 앙증맞음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무슨 건물 이름이 저러냐. 어감은 귀여운데 막상 글자 자체는 삐침이 뚜렷한 굵은 궁서체로 쓰여 있어서 위화감이 배로 들었다.
“그렇게 황당해하지 마. 원래는 빅토리니까.”
“아.”
“…빅토리 원룸이야.”
흐물흐물 터져 나오던 중얼거림이 지수의 짧은 설명에 단번에 멎었다. 잃어버린 성이 빅 씨였어? 그런 거였으면 진작 말을 해 줬어야지.
빅토리. 한국말로 하면 승리. 승은 갑자기 지수가 사는 건물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기는 건 승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까.
“마음 잘 추스르길 바랄게. 주변에서 그러는데…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니래.”
“뭘?”
빅토리 세 글자에 긴장이 풀린 승은 없는 다정함을 발휘해 위로를 날렸다. 오늘이 지나면 더는 지수를 볼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인류애적 차원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위로였다. 제 딴에는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간접적으로 접근한 건데 뱉고 보니 위로보다는 종교 경전에 적혀 있을 법한 구절 같았다.
내가 너무 교과서적인 발언을 했나. 멋쩍은 마음에 눈썹을 긁적이는데 지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너 애인이랑 헤어진 거 아니야?”
“내가?”
혹시나 해서 확인 사살을 했더니 살짝 아래로 처져 유순한 느낌을 풍기던 두 눈이 땡그랗게 변했다. 지수는 황당해서 죽으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야?”
“어, 아닌데?”
그럼 뭔데? 승의 눈에 지수는 영락없이 헤어진 사람이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깜짝 놀랄 사실을 쏟아 내는 꼴이 딱 다른 곳에서 뺨 맞고 엄한 곳에 와서 화풀이하는 꼴이었으니까.
누구한테 대차게 차였나 보네. 조금 전 한강 근처,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다던 지수의 발언이 세차 중 폭탄선언과 맞아떨어지며 추측을 굳혔다. 분한지 작게 콧김을 씩씩대면서도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촉촉한 눈을 하고 있길래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았더니.
“난 근데 왜 네가 헤어졌다고 생각했지? 차인 줄 알았어.”
“내가 차였다고?”
“응.”
“아닌데…. 애인 같은 거 있어 본 적도 없는데.”
멍하니 앞 유리를 보던 지수가 작게 혼잣말을 했다. 초점이 불확실한 공허한 눈빛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어이가 없는 것 같았다. 뚜렷한 부정에 승은 다시 미간을 긁적였다.
그랬구나. 애인이 한 번도 없었구나. 내가 이상한 오해를 했네.
근데 정말 한 번도 애인이 없었다고…? 지수가 한 말을 천천히 되짚던 승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근데 아까 너 남자 좋아한다며.”
“어, 어…. 내가 그런 말을, 그래… 내가 했었지, 참.”
부스 안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방금까지 약하게 툴툴대던 지수가 한순간에 얌전해졌다.
“그럼 남자 사귀어 본 적 없는 거야?”
“……응.”
“…….”
“그게 왜?”
지수는 이유 모를 헛기침을 했다. 밭은 숨이 내뱉어질 때마다 뚜렷하게 생긴 목울대가 기침 소리에 맞춰 크게 일렁였다.
“누구를 만나 본 적도 없는데… 네가 남자 좋아하는지는 어떻게 아는 거야?”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어떤 깨우침 앞에는 그걸 뒷받침해 줄 경험이 선행하기 마련이니까.
“너는 그걸 꼭 누굴 만나 봐야 안다고 생각해?”
“…….”
“아마… 아닐걸?”
되려 제게 물음을 던지는 지수는 제법 강경했다. 좀 빈정이 상한 것도 같았다. 하긴 꼭 직접적인 교제가 아니라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는 설렘 같은 것도 여러 번 축적되면 어떤 유의미한 경험이 될 수 있으니까.
“왠지 말해 줘?”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리려는데 서늘한 음성이 종이비행기처럼 날아들었다.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진 목소리 톤에 승의 고개가 이끌리듯 옆을 향했다. 까맣고 깊은 지수의 눈동자가 항구에 정박하는 배의 닻처럼 신경을 붙들었다.
“나는 있잖아.”
“…응.”
“혼자 할 때 남자 상상해.”
“…….”
“나보다 더 큰 남자 밑에 깔리는 상상하면서 간다고.”
“…….”
둥글게 말아 쥔 지수의 왼손이 가슴 앞에서 흔들렸다. 두툼한 걸 감싸 쥔 듯 둥그렇게 말린 채 위아래로 부드럽게 왕복하는 손짓….
그건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노골적이고도 사실적인 제스처였다. 당황을 숨길 방도가 없었다.
“…….”
도발적인 고백에 적당한 대처를 찾지 못한 눈동자가 뚝뚝 끊어지듯 허공을 헤맸다. 지수는 조용히 지갑을 꺼냈다.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은 얼핏 평온해 보였지만 검은 지갑을 탈탈 뒤지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
“뭔데.”
내민 손에는 만 원짜리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세지 않고 집히는 대로 뽑은 걸 보니 아마도 그게 지갑 안에 있던 모든 현금인 것 같았다.
“아까 내기했잖아.”
“…….”
“네가 이겼어.”
“…….”
지폐를 내미는 손에서 펄떡펄떡 뛰는 맥이 전해졌다.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온 돈을 홀린 듯이 전해 받으며 승은 별안간 손끝이 찌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상하지. 종이는 전기가 안 통하는데.
“오늘 고마웠다. 갈게.”
홀연히 인사를 남긴 지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승의 시선이 건물로 들어가는 지수의 뒷모습에 따라붙었다. 진짜 기분이 좋아졌나? 늘씬한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그림자에서는 어떤 경쾌함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계단을 오르는 인영을 따라 한 층씩 켜지기 시작하던 불이 마침내 5층까지 도달했다. 승은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시간 차를 두고 켜지는 불빛을 눈으로 좇았다. 빳빳한 지폐 두 장 아래로 여전히 저릿저릿한 감각이 흐르고 있었다.
* * *
“와, 최승…. 이적할 때 검사 제대로 한 거 맞죠? 이거… 다시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좋은데?”
“이 선생, 설마 진심은 아니지?”
“당연하죠, 코치님.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워낙 월등하니까. 기록이… 아, 진짜 어떻게 이러지?”
“그래도 그런 말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 괜히 시즌 앞두고 우리 팀 부정 탄다고.”
“…넵, 죄송합니다.”
자. 다음, 다음. 익숙한 코치의 목소리와 함께 마우스 딸깍이는 소리가 의무실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문 앞에 선 승은 손목을 매만졌다. 오늘 오전, 훈련을 앞두고 손목부터 팔까지 길게 붙여 둔 테이핑은 웨이트 좀 했다고 귀퉁이가 벌써 너덜거리고 있었다. 피부에서 한 번 떨어진 테이프는 아무리 힘주어 붙여도 잠시 뒤면 다시 덜렁거리기 일쑤였다.
접착력을 상실한 살구색 스포츠 테이프를 미련 없이 뜯어낸 승이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오늘 일과의 메인이나 다름없는 웨이트가 끝났고 남은 건 기초체력 훈련뿐이니 그쯤은 맨몸으로 해도 될 터였다. 의무실이 위치한 2층 복도를 걸으며 승은 손쉽게 자가진단을 내렸다.
어제 있었던 팀 연습에서 공을 무리하게 받아 낸 탓인지 왼쪽 팔목이 약하게 저렸다. 실전이 아니니 적당히 하고 끝냈어야 했는데 막상 불이 붙으니 그게 또 쉽지가 않아서.
평소 같지 않은 움직임이 불편했던 승은 훈련 시작과 함께 의무실을 찾아가 간단한 테이핑을 처방받았다. 아마도 근육이 덜 이완된 거겠지. 이런 자잘한 문제들은 남은 한나절 근육만 꽉 잡아 줘도 알아서 해결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금과 같은 비시즌 시기는 경기 일정이 꽉 찬 시즌 때보다도 바쁘고 치열한 면이 있었다. 선수들은 다가올 실전에서 최고의 폼을 보여 줄 수 있도록 가진 기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전투력을 다졌다. 배구는 팀 스포츠고 팀원 간의 호흡 또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기에 각 팀 프런트에서는 언제나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코치진과 선수들을 도왔다.
포지션과 컨디션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든 선수에게는 기본적으로 웨이트를 포함한 각종 훈련이 주 단위로 줄줄이 예정돼 있었다. 장소도 다양했다. 오늘은 최신 설비를 자랑하는 팀 클럽하우스 내부 시설에서 훈련을 소화했지만, 수요일인 내일은 외부의 체육 전문 시설로 훈련 원정을 가야 했다. 선수들은 점프 시 필요한 다리 근력 강화를 위해 넓은 수영장 안에서 전자 패치가 붙은 모레 주머니를 차고 발을 구를 예정이었다.
이렇듯 기본을 지키되 다양한 변주를 주며 반복되는 고강도 훈련들은 힘들지만 익숙한 일이었다. 아무리 까다로워도 프로 리그에 재직 중인 선수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못 해낼 훈련 같은 건 없었다.
여느 때처럼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온 승은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청소를 시작했다. 2주 전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무엇보다도 위치가 좋았다. 서울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소속팀 클럽하우스와는 20분, 또 홈 경기장인 장원체육관은 차로 30분. 거기다 근처에 산책로가 잘 정비된 한강도 있어 아침마다 유산소 운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근처의 큰 방송국들 때문에 조금 떠들썩한 동네 분위기는 반갑지 않았지만, 집에만 주로 있을 걸 생각하면 그 정도 단점은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면적과 비교해 별로 없는 짐과 간소한 살림살이 덕에 딱히 치울 게 있지도 않은 새 보금자리를 승은 열심히 쓸고 닦았다.
한 달 전에 샀는데 주문이 밀려 저번 주에야 배송 온 무선 청소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뭐든지 다 빨아들일 것 같은 이 훌륭한 흡입력. 처음 배달받은 날, 뭣 모르고 각종 충전 선이 여러 개 꽂혀 있는 침실 콘센트 근처에 청소기 헤드를 댔다가 청소기가 케이블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바람에 승은 전원을 끄고 빨려 들어간 선을 하나하나 빼내야 했다.
“…배터리가 없나?”
갑자기 낮아진 세기에 청소기 몸통 측면을 살피니 빨간 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위잉…. 힘을 완전히 잃은 엔진 소리가 확연히 낮아졌다. 승은 전원을 끄고 본 품에 포함돼 있던 전용 거치대에 청소기를 올려놓았다.
할 일을 잃은 승은 집안을 휘 둘러봤다. 없어서 억지로 만들어 낸 설거지 완료, 짐이 없어서 보이는 곳만 쓸고 닦으면 되는 현관 및 거실 청소 완료, 사실 할 것도 없는 침구 정리 완료, 그나마 이게 제일 할 게 많았다. 다양한 무게의 덤벨과 스트레칭용 매트 포함 각종 운동 기구 정리 완료. 샤워하며 샤워 부스의 물기까지 싹 닦았으니 화장실 청소도 완료.
“아, 왜 이러냐.”
더는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자 짜증이 났다. 어떻게든 뭐라도 해서 잡생각을 물리쳐야 하건만, 왜 할 일이 없단 말인가.
부엌으로 향한 승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중간 칸에는 언제나처럼 600mL짜리 생수병이 흐트러짐 없이 세 줄로 정렬해 있었다. 개중 왼쪽 맨 앞의 병을 집어 든 승은 뒤에 줄지어 서 있던 병들을 차례로 한 칸씩 앞으로 이동시켰다.
냉장고 문을 닫고 뚜껑을 뜯다시피 따고는 벌컥 물을 들이켰다. 새로 나온 냉장고의 팔팔한 보냉 기능 덕에 목젖이 아플 정도로 시려 왔다. 식도 전체가 찌르르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승은 두 눈을 꾹 감았다.
‘와, 최승…. 검사 다시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좋은데?’
‘이 선생, 설마 진심은 아니지?’
‘당연하죠, 코치님.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워낙 월등하니까. 기록이… 아, 진짜 어떻게 이러지?’
‘그래도 그런 말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 시즌 앞두고 괜히 부정 탄다고.’
‘…넵, 죄송합니다.’
검게 변한 시야 안에서는 낮에 들었던 대화가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거기서 문을 열고 들어갔었어야 했나? 어쩌다 듣게 된 저와 관련된 발언에 제대로 목소리 한 번 내 보지 못하고 물러났던 게 속을 쓰리게 했다.
이 생각을 안 하려고 오후 훈련 내내 무섭게 집중하고 집에 와서는 온 집 안을 들쑤셔 가며 청소에 매진했던 건데 기어코…. 지팡이처럼 들고 있던 무선 청소기의 전원이 꺼지자마자 제일 하기 싫었던 생각이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왔다.
항간에 떠도는 저에 대한 그런 우스갯소리가 싫어서 승은 얼마 전 체력 측정 때 더 이를 악물고 임했었다. 기록이 저조하면, 약빨 떨어졌냐는 비아냥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그러니 반드시 최고 그 이상의 폼을 보여 주리라.
그래서 몰랐다. 몇 시간에 걸쳐 치르는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기량 테스트에서 매 항목 항상성을 유지하며 우수한 기록을 내고도 그런 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온 짧은 대화는 승을 제대로 자극했다. 검사 다시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만에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면 그게 운이 좋아 일시적으로 나온 결과가 아니라 평균적인 저의 능력치임을 앞으로 있을 경기에서 증명해 내면 될 일이었다.
다시 한번 차가운 물이 입술을 적셨다. 축축해진 턱을 손등으로 닦는데 이번에는 수개월 전 모니카가 제게 해 준 조언이 떠올랐다.
‘승, 불안감이 심해진다 싶을 때는 너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들을 생각해. 청소를 하고 싶으면 청소를 해. 옷장에 있는 옷을 다 꺼내서 색별로 다시 정렬하고 싶으면, 원하는 대로 다시 정리해. 그렇게 해도 돼, 네 마음이 편해질 수만 있다면. 그게 타인과 너 자신을 해치는 행동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다 괜찮아.’
금발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즐겨 썼던 모니카의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료실 의자가 엄청 불편했었지. 전문적이고 자세한 이전의 모든 말은 당시 동석했던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파악했었고 그때 승이 실질적으로 듣자마자 곧바로 이해했던 말은 마지막 한 마디가 전부였다.
‘Va bene.’
남부 출신 이탈리안 특유의 억양이 도드라졌던 모니카가 두 번째 손가락을 나란히 펼쳐 보이며 강조하듯 재차 했던 말.
정말 다 괜찮다고? 승은 반쯤 비운 물병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주춤하던 손이 방금 닦아 깨끗한 식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으로 향했다.
저장돼 있는 연락처 목록은 실로 단출했다. 어딨지. 내가 그때 저장을 안 했었나? 가나다순에 따르면 비교적 상단에 있어야 할 이름이었다. 손가락으로 화면 위를 튕기듯이 훑으며 목록의 아랫부분으로 향했다.
엄마 아들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왜 이렇게 저장을 해 놨을까. 승은 곧 저장 명을 변경했다.
고지수
그러고는 싱거운 메시지를 써 내려갔다. 이렇게 보내면 스팸 문자인 줄 알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든 건 이미 전송 버튼을 눌러 버린 후였기에 급하게 제 소개를 덧붙였다.
하지만 정체를 밝히자마자 후회가 급습했다. 괜한 짓을 한 것 같았다. 내가 진짜 미쳤지. 그냥 가볍게 몇 분 뛰고 오는 게 훨씬 나을 텐데. 나가서 조깅이나 할 셈으로 옷을 갈아입으려 할 때 액정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어디서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