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틀 무렵
덜컹대는 소리와 함께 몸이 우뚝 솟았다. 어, 지수야, 미안. 내가 도로가 패어 있던 걸 못 봤네. 예고 없이 들어온 외부자극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가 파득 구겨졌다. 지수는 하도 많이 들여다봐 애저녁에 너덜너덜해진 종이 뭉치 모서리를 툭툭 손으로 튕겨 반듯하게 펼쳤다. 앞 좌석에서는 운전대를 잡은 현욱의 씩씩한 사과가 날아왔다.
혀만 안 깨물었으면 됐지, 뭐. 방지턱 위를 전속력으로 달려 넘은 것처럼 차가 크게 흔들렸지만, 천장에 머리를 거의 박을 뻔한 덕에 졸음이 확 달아나는 효과를 얻었다. 본의 아니게 정신을 바짝 차린 지수가 다시금 목을 가다듬었다.
“아저씨, 저는 됐다구요. 몇 번을 말해요!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시라구요! 제발, 제발 그만…!”
“…….”
“아, 발음이 왜 이러냐 진짜.”
아르르르. 몇 줄 내려가지도 못하고 대사가 꼬여 버린 지수는 하던 걸 멈추고 혀를 풀었다. 앞에 있는 현욱을 의식한 듯 좀 전보다 작아진 목소리에는 촬영에 대한 걱정이 진하게 실려 있었다.
극의 중심 갈등이 급격하게 고조되며 인물의 감정이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이었는데 중요한 대사가 자꾸 혀끝에서 겉돌았다. 종이 위에 쓰인 글자를 눈으로 볼 때는 괜찮은데 막상 입 밖으로 뱉어 내기만 하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게 문제였다. 대사 연결이 왜 이러지. 대본이 전체적으로 좀 묘하게 번역 투라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몇 번을 말해요! 더 해 드려요? 제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저도 이제는 진짜 그만하고 싶어요!”
줄곧 일상적인 연기만 해 온 터라 이렇게 바락바락 악을 써 대는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망이 가득하지만 이판사판의 태도’라니. 이번 작품은 괄호 안에 쓰인 지문의 세심함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원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잘됐다 싶기도 한 복잡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고민에 잠긴 지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발성과 표정, 그리고 감정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면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정리를 해 가며 연습을 해야 했다.
실제로는 살면서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정도의 분노를 십수 명이 보는 앞에서 쏟아 내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난도가 상당했다. 밀려드는 걱정에 지수는 어제 오전부터 대본을 옆구리에 내내 끼고 살았다. 빨래를 널면서도 입으로는 중얼중얼 대사를 읊었더니 그래도 감정 처리에는 한결 발전이 있는 듯싶었다. 좋아. 슛 들어갈 때까지 제발 이 느낌 그대로 쭉 유지되길.
불안감에 스스로를 다독인 지수가 마르는 입술을 축였다. 중대한 장면이니만큼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로서 책임감과 의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수 너, 촬영 가기 전에 커피 마실 거지?”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현욱이 룸미러를 통해 눈을 맞추며 물어왔다. 때맞춰 바뀐 신호에 차는 정지선 바로 앞에 안전하게 멈춰 선 상태였다.
“커피? 응, 마실래. 너무 더워서 일단 뭐라도 좀 마셔야겠어.”
에너지를 빠르게 깎아 먹는 한여름 야외 촬영을 견디려면 카페인 충전은 필수였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뜨거운 햇살이 아침부터 쪄 죽일 듯 내리쬐는 오늘 같은 날에는 더 간절했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지수는 들고 있던 펜을 딸깍여 대본에 밑줄을 그었다.
“오케이. 그럼 거기 카페 들른다.”
“응.”
“날이 더워서 그런지 계속 처지네. 나도 시원한 거 한 잔 마시고 정신 차려야지.”
파란 볼펜이 굵게 표시된 신 넘버 앞에 별표 두 개를 그려 넣었다. 여기가 자꾸 걸리네. 도저히 못 본 척 지나칠 수가 없을 만큼 무식하게 커다란 별이었다.
“형, 오늘 왜 이렇게 덥지?”
“그러게. 아직 오전인데도 이러는데 나중에 점심때는 진짜 우리 다 죽겠다. 이쪽 동네들이 높은 데에 있어서 그런지 다른 데보다 더 더운 것 같애. 저번에 보니까 그 골목이 넓기만 넓지 주위에 나무나 지붕 같은 게 없어서 그늘도 안 지던데…. 너 오늘 더워서 어떡하냐, 지수야.”
“그래도 야외 촬영은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이거 잘 끝내면 이제 남은 건 실내 신이랑 세트장 촬영이니까….”
“그래.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되긴 된다. 야, 내가 혼자 가서 사 올게. 넌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왜, 나도 같이 갈래. 어차피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아냐, 넌 여기 있어. 너 이 날씨에 괜히 밖에 나갔다가 땀 흘려서 얼굴 망가지면 내가 피곤해져서 그래.”
선팅이 시꺼멓게 된 창문 너머로 넘겨다본 거리는 전체적으로 한산했다. 점심시간 전이라 그런가. 널찍하게 잘빠진 프랜차이즈 카페 매장 내부도 아직은 한가로운 듯싶었다.
답답해서 좀 나가고 싶었는데…. 이유가 확실한 현욱의 만류에 더는 조를 수가 없었다. 지수를 뒷좌석에 붙들어 놓은 현욱은 서둘러 지갑을 챙겼다.
“형!”
아쉬운 마음에 조용히 눈만 굴리던 지수가 편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 현욱을 급하게 불러세웠다.
“엉?”
“커피 살 때 유자차도 한 잔 같이 사 와 달라구. 그, 안에 건더기 없이 물만 넣고 완전 뜨겁게 해 달라고 해 줘.”
“혜경 선생님 드릴 거?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인마. 걱정하지 말고 눈이나 좀 붙여. 어제 늦게 잤다며.”
“알겠어. 고마워, 형.”
문을 닫은 현욱이 카페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오늘 촬영은 얼마나 걸리려나. 마이크 사운드를 조정하느라 유독 오래 걸렸던 며칠 전 촬영을 되돌아보며 지수는 다시 시트에 몸을 기댔다.
잠을 설친 탓에 몸 여기저기가 잘못 끼워 맞춘 레고 블록처럼 뻐근했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작품을 하나둘씩 해 나갈수록 여태 등한시하며 살아왔던 체력관리의 소중함이 나날이 크게 다가왔다.
커피를 사러 갔던 현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지수는 굵은 얼음이 풍성하게 든 쓴 커피를 생명수처럼 쭉쭉 들이켰다. 따로 부탁했던 뜨끈한 유자차는 꽉 닫힌 뚜껑을 재차 확인한 후 조수석 앞 컵 홀더에 꽂았다.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이 촬영 동선에 맞춰 장비를 세팅 중인 현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했다. 오늘로써 세 번째 방문이라 어느새 조금 익숙해진 동네 풍경 뒤로 눈에 익은 하얀 밴이 보였다. 지수는 빳빳한 테이크아웃 종이컵에 담긴 유자차를 들고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엄마.”
살가운 목소리와 함께 동그랗게 말아쥔 주먹으로 창문을 두드렸다. 성난 햇빛 덕에 차 표면이 달궈진 프라이팬처럼 뜨끈뜨끈했다.
“다른 건 아니고, 이거 드시고 하세요.”
무심코 댄 손바닥에 불같은 열기가 전해졌다. 용건을 알리던 지수는 황급히 손을 뗐다. 되게 뜨겁네. 그거 잠깐 만졌다고 손바닥 중앙이 데인 것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펼치며 따끔한 손을 급하게 식히고 있자 곧 꽉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휴, 언제 또 이런 걸 다 사 왔어. 그냥 오지.”
스프레이를 듬뿍 뿌린 앞머리를 집게 핀으로 고정한 혜경이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촬영을 앞두고 소품을 체크 중이었는지 손에는 미술팀에서 준비해 줬을 굽이 높은 구두가 한 짝 들려 있었다.
“그냥 여기 오면서 근처 카페 들르는 김에 사 오는 거라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그게 아니지.”
“여기, 유자차…. 건더기 없는 거요.”
어두운 신 분위기에 맞춰 탁한 메이크업을 한 혜경이 웃으며 컵을 받아 들었다. 따로 시킨 적도, 그렇다고 알려 준 적도 없는데 어쩜 애가 이렇게 싹싹할까. 요즘 애들답지 않게 우직하고 묵묵한 지수를 바라보는 혜경의 눈에서는 한참 어린 아들뻘 후배를 향한 애정이 뚝뚝 흘러넘쳤다.
“매번 이렇게 나까지 챙겨 주고. 고마워, 아들.”
이 바닥에서 배우라는 타이틀을 달고 삼십 년 넘게 연기 생활을 해 오며 번듯하고 잘생긴 애들이야 셀 수도 없이 봐 왔지만, 만약 그중 알맹이까지 괜찮았던 애들이 몇이나 됐었는지 세어 본다면 글쎄…. 제대로 된 답을 내놓기 위해서는 고민을 좀 더 길게 해 봐야겠지만 일단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다는 건 확실했다.
“오늘 엄청 덥대요, 엄마. 잘 준비하시고 좀 이따 봬요.”
“응, 아까 김 감독이 조명 때문에 시간 좀 걸린다고 했으니까 혹시 대사 맞춰 보고 싶거나 하면 언제든 오고.”
두 번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낯을 가리던 지수는 세 번째 만남부터 엄마라는 호칭과 함께 살갑게 다가왔다. 커피를 일절 안 마시는 입맛은 어떻게 안 건지 손에는 유자차 한 잔이 들려 있었다. 건더기 없이 맑고 뜨거운 게 혜경이 평소에 즐겨 마시는 취향 그대로였다.
하루아침에 성격이 바뀌었을 리는 없을 테고, 애가 그래도 제 딴에 노력을 많이 하네. 뻔히 수가 다 보일 정도로 미숙한 구석이 많았지만, 그런 태도 자체를 높게 산 혜경은 아들이라는 말로 지수의 어색한 부름에 화답했다. 이번 영화에서 혜경이 연기하는 ‘신영주’가 지수가 맡은 ‘남선우’의 엄마였으니 그런 식의 호칭이야 촬영장에서 흔히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네, 그럼 저 가 보겠습니다.”
문가에 서 있던 지수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고 있는 높은 구두와 어울리는 흐뭇한 미소가 혜경의 얼굴 위로 흘러갔다. 뜨거운 차 표면에 몸이 닿지 않으려 대화 내내 조금 어정쩡하게 서 있던 지수가 문을 닫기 위해 몸을 슬쩍 뒤로 빼던 때였다.
“…엇.”
무언가에 가로막힌 지수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지수는 잽싸게 발을 바꿔 무게중심을 옮겨 잡았다.
“…….”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꼴만은 아슬하게 면한 지수의 고개가 천천히 뒤를 향했다. 얼이 빠져 살짝 벌어진 턱이 끝을 모르고 위로 들렸다. 지수는 순간 사람이 아니라 마치 두 발 달린 문짝 하나가 제게로 성큼 다가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넌 어디 있다가 오는 거야. 어딜 가면 간다고 말도 안 하고.”
“코치님한테 전화가 와서 통화 좀 하느라고요.”
겨우 몸을 바로 세운 지수의 시야에 캡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마주한 표정이 꼭 멱살잡이라도 하고 온 사람 같았다.
누구랑 싸우고 왔나? 빳빳한 모자챙 아래에서 기세 좋게 빛나던 눈동자는 흠칫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지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나갔다.
‘되게 크고.’
예고 없이 마주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잘생겼네.’
바투 붙어선 이의 생김새를 분간할 눈이 있으니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며, 지수는 실로 오랜만에 육체적인 위축감을 느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날 때마다 교복 바지 밑단이 짧아져 있던 중학교 3학년 시절부터 키로는 어디 가서 빠진 적이 없었는데…. 놀랍게도 상대는 그런 저보다도 어림잡아 반 뼘 정도는 더 클 것 같았다.
“아, 지수는 처음 보는 거지?”
“…네.”
나긋한 혜경의 목소리에 입꼬리를 올린 지수가 어색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아, 누군지 알 것 같은데…. 익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근데… 이름이 뭐였더라.
“인사해, 승이. 우리 아들이야.”
기억났다. 최승. 이번 작품에서 제 엄마 역을 맡은 혜경의 진짜 아들이었다.
기분이 찝찝했다. 왜 이렇게 뒤통수가 따가울까. 돌아서서 걷는 내내 지수는 바지 뒷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는 애먼 옷만 괴롭혔다. 이상했다. 늘 그렇듯 미소 가득 온화한 혜경의 배웅에도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봤어?”
“뭘?”
“최승.”
촬영이 있을 골목 어귀에 안전하게 주차된 차 앞에는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현욱이 있었다. 끝이 텁텁하고 싸한 냄새가 현욱을 중심으로 둥실 하얀 연기를 만들었다가 이내 공중으로 흩어졌다.
“형도 봤어?”
“앗, 뜨거.”
“조심 좀 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흡연을 즐기던 현욱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정신 팔고 있다가 짧아진 담배가 타들어 가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불붙은 종이 필터에 닿은 손끝이 따가운지 두 손가락이 서로를 바쁘게 맞비볐다.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까 엄마 엄청 닮았더라. 코랑 하관이 완전 혜경 선생님 빼다 박았던데.”
부산한 손동작과 함께 지수의 시선도 자연히 현욱의 손으로 향했다. 하여간 형은…. 회사에서 전담 매니저로 붙여 주어 같이 일하게 된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현욱은 경험이 짧은 저를 알뜰히 챙기고 끌어 줬다.
운전 잘해, 시간 약속 잘 지켜, 성격 꼼꼼해. 전체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동료는 어울리지 않게도 종종 이런 식으로 본인의 빈틈을 과시했다.
으어, 아프겠다. 차에 반창고가 있었던가. 빨갛게 변한 손톱 옆 피부가 쓰려 보여 절로 미간이 구겨졌는데 정작 당사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대수롭지 않아 했다.
“눈 위쪽으로는 아빠 얼굴도 살짝씩 보이고… 인물 진짜 훤하더라.”
“…어.”
“그 얼굴로 왜 운동을 했을까? 우리 회사 들어오지. 물론 아빠 영향이 크게 있었겠지만…. 근데 뭐, 그렇게 따지면 엄마 영향도 있을 수 있었던 아니야? 엄마가 장혜경인데.”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나 보지.”
맞장구를 친다고 뱉은 말인데 저도 모르게 불퉁한 말투가 나왔다. 이 형은 왜 이렇게 남의 집 자식한테 관심이 많아? 조금 전 초면의 저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던 승의 인상 때문인지 도통 좋은 말이 안 나왔다.
“운동선수라고 해서 막 까무잡잡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얼굴도 하얗고….”
사정을 모르는 현욱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솔직히 그 정도면 하얗기보단 허옇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나. 아까처럼 무심하게 대꾸하려던 지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뒀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못난 말투가 튀어 나갈 것 같았으니까.
눌러쓴 모자 아래로 보이던 잘빠진 코와 입술, 그리고 조금은 사나운 느낌을 풍기던 눈까지. 전체적으로 선이 뚜렷하면서도 입자가 고운 얼굴은 현욱 말마따나 혜경을 연상케 했다. 다만 바탕은 같지만 세세한 결이 다른, 그러니까 좀 예상 못 한 방식으로 엄마를 닮았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형, 나 차에 있을게.”
“알았어. 근데 아까 보니까 세팅 꽤 오래 걸릴 것 같더라. 조명에 문제 있는 것 같던데…. 하여튼 준비되면 부를 테니까 쉬고 있어.”
“응.”
차로 들어오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갑게 몸을 감쌌다. 셔츠를 펄럭인 지수는 조금 남은 커피를 빨아들였다. 겨우 십 분 정도 밖에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힘이 빠지다니. 하여간 더위에는 정말이지 젬병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옛말에 여름에 태어난 아가들은 더위를 안 탄다더니만 우리 똥강아지는 어쩜 이리 더워해.’
학교를 마친 후 땡볕을 걸어서 가게에 도착한 어린 지수는 선풍기 앞을 차지하고 앉아서 땀을 뻘뻘 흘려 댔다. 감은 두 눈 위로 까맣고 숱이 빽빽한 눈썹이 조용히 바람에 날렸다. 포장된 만두를 봉투에 넣고 돈을 거슬러 주던 연옥은 손님이 떠나면 후다닥 다가와서 축축한 이마를 손수건으로 눌러 줬다. 쪼글쪼글한 손바닥 두 개로 폭 가려질 조그만 얼굴이 열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니까 우리 애기는 틀림없이 꼭 시원한 데서 일하는 사람이 돼야겠네.’
할머니 연옥은 찬물에 적신 수건을 한껏 상기된 볼 위로 대어 주며 말했다. 하나뿐인 손주가 시원한 사무실에서 에어컨 바람 펑펑 맞으며 일하는 회사원이 되기를 바라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소망이었다.
그러나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지수의 현실은 어떠한가. 촬영은 한번 들어가면 최소 반나절이 기본에 잘 풀리지 않는 날은 한 장면을 가지고 온종일 찍기도 하는 끈질긴 작업이었다. 날씨나 환경처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작업이 중단될 때는 더 심했다. 수십 명의 사람이 스탠바이 상태를 유지하며 그저 다시 때가 조성되기를 기다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더운 날이면 실현되지 못한 연옥의 바람이 미지근한 열과 섞여 목덜미를 끈적하게 간지럽혔다. 지수는 잠시 후 콧등에 맺히는 땀을 조심히 눌러 닦으며 어렵게 촬영을 이어갈 제 모습을 눈앞에 훤히 그려 낼 수 있었다. 자세한 현장 사정을 모르는 할머니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래도 촬영이 좋았다. 더위가 대수인가. 무자비한 정글을 닮은 연예계에서는 데뷔조차도 기회였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 《동틀 무렵》(아직은 어디까지나 가제다)은 저예산 영화였다. 빵빵한 투자금을 보유한 상업 영화가 아니니 개봉 후에도 공격적으로 상영관을 확보한다든가 국내외로 뻗어 나가는 전폭적인 홍보 활동 같은 건 없을 거라고 보는 게 무방했다.
그래서 배우 고지수 앞으로 《동틀 무렵》의 시나리오가 도착했을 때 소속사는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었다. 해외 수익을 기대하기도 힘들고, 인지도를 올리는 데도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개런티가 세지도 않은 영화에 굳이 시간을 할애해? 그것도 이런 황금 같은 시기에? 소속사의 입장은 분명하고 명쾌했다.
진짜 그런가. 다들 말리니 괜한 반항심에 한 번 읽어 보기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집에 시나리오를 들고 갔던 지수는 그날 새벽 홀로 출연을 결정지었다. 새벽 두 시, 손에 쥔 《동틀 무렵》 시나리오의 맨 마지막 장을 덮던 순간이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영화를 찍어 보겠어. 올 초 출연한 미니시리즈에서 주인공을 도와 중요 사건을 해결하는 열혈 형사 역을 맡으며 인지도가 조금 올라간 걸 기점으로 향후 반년간은 이미 큼직큼직한 스케줄이 여럿 들어차 있는 상황이었다. 내년 초 지상파 채널에서 방영될 과거와 현대를 넘나드는 퓨전 사극에서는 무려 주인공 역할도 따냈다. 장장 16부작에 이르는 장편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바로 저였다.
탈 없이 잘만 풀린다면 이후로는 더 많이 바빠지겠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많이.
그러니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알짜배기 경력을 하나라도 더 쌓고 싶었다. 괜찮은 작품을 필모그래피에 추가할 수 있는 기회를 이대로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배울 점이 많았던 미니시리즈 촬영을 거치며, 멋모르던 데뷔 초 때와 달리 본격적으로 연기에 욕심이 생겨나던 무렵이었다.
그렇게 본인의 뜻을 살려 출연을 결심한 영화 《동틀 무렵》에서 지수는 혜경을 만났다. 사실 혜경이야말로 이런 작은 규모의 영화에 출연하기에는 존재감이 너무 뚜렷한 배우였다. 이 같은 주변의 반응을 접할 때마다 본인은 정말이지 진지하게 난색을 보였으나 그렇다고 사실이 사실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모자가 느닷없이 도착한 서류 한 통을 빌미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상 두 사람이 같이 찍는 장면이 아주 많지는 않았다. 부잣집 사모님이 된 영주와 평범한 대학생인 선우. 모자지간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보다는 흘러간 세월만큼 달라진 두 사람의 분위기가 대비되며 서로를 견제하는 깊은 감정 연기가 필요했다. 촬영 초반, 경력 차이에서 비롯된 어색하고 불편했던 혜경과의 감정은 웃음기 지운 진지한 촬영을 몇 번 겪고 나니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일전에 다른 영화에서 조연출로 만났던 현재 감독과의 인연을 계기로 기꺼이 이번 작품에 출연을 결심했다는 혜경은 지수의 눈에는 숙련된 전문가 그 이상이었다. 몸 어딘가에 마음대로 껐다 켤 수 있는 스위치라도 달린 게 아닐까.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저주 같은 대사를 막힘없이 내뱉다가도 감독의 컷 소리 한 번이면 이내 다시 상냥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쩌다 단체로 배달 도시락이라도 먹게 되는 날이면 나이 어린 스태프들에게도 혜경은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갔다. 그럴 땐 주로 작품과 관련한 대화를 나눴기에 사실 혜경이 본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다가 언제였더라. 맞은 편에 있던 미술감독이 얼마 전 절친의 소개로 야구 선수와 소개팅을 했다는 소식에 혜경이 조용히 날린 대꾸가 모두를 웃게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진짜 누가 운동하는 남자 만난다고 하면 아주 그냥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거야. 어어, 왜들 웃어? 나 진심이야. 윤경 씨, 웃지 말고 평소에 무슨 음식 좋아하는지나 말해 줘.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리려면 윤경 씨가 뭐 좋아하는지 정도는 내가 알아야 하니까.’
진심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혜경의 말에 다들 하하 웃었다. 혜경의 남편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에 터져 나올 수 있는 웃음이었다.
‘에이, 선생님 왜 그러세요. 최정호 감독님 엄청 멋지시잖아요. 대한민국에서 배구 하면 다른 건 다 몰라도 사람들이 최정호 이름 석 자는 알았는데….’
‘저 어렸을 때도 최정호 감독님은 알았어요. 스포츠 뉴스 하이라이트에 하도 자주 나오셔서.’
이번에는 혜경도 웃었다. 제대로 질려 버린 척 말했지만 그래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더 크다는 건 편안히 휘어진 두 눈꼬리가 말해 주고 있었다. 혜경의 그 너스레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터였다.
‘요즘은 아드님이 더 유명하시잖아요.’
‘맞아. 뉴스에서 봤어요. 국내 복귀한다고.’
‘오. 그럼 지금 한국에 계세요?’
‘…아직은 아니고. 다음 달에 올 거야.’
웅성대는 사람들의 반응에도 혜경은 더는 말없이 젓가락질만 했다. 조잡하게 생긴 나무젓가락이 따뜻한 흰쌀밥을 쿡쿡 건드리는 사이 대화는 금세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각자가 겪은 최악의 소개팅이 새로운 밥상머리 화두로 올라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해괴한 경험을 반찬 삼아 즐겁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이번 영화를 찍는 동안 지수가 혜경이 본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남편과 아들 얘기가 나오자 순간 소녀처럼 수줍어졌던 혜경의 미소를 반추하며 지수는 다시 대본을 펼쳐 들었다.
근데 아까 걔는 날 보는 표정이 왜 그랬을까. 귀퉁이가 닳아 없어진 종이를 빠르게 넘기던 지수의 머릿속에 조금 전 있었던 일이 필름처럼 펼쳐졌다. 모자챙 밑으로 보이던, 끝이 붉던 귓바퀴와 어금니를 악다문 듯 굳었던 턱선. 어딘가 못내 불쾌해 보이던 인상은 기억에 콱 박혀 좀처럼 잊히지가 않았다.
오늘 찍을 부분을 펼쳤으나, 마음은 글자가 아니라 딴 곳으로 향했다.
혹시 내가 선생님 음료만 사 가서 그랬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그걸로 기분이 상했다기에는 앞뒤가 안 맞았다. 내가 자기가 거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자기 몫까지 사 간단 말인가. 커피 못 마셔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됐다.
‘그럼 설마… 혹시 그거 때문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뚱딴지같은 상상을 거쳐 이상한 방향으로 증폭되어 가던 순간, 불현듯 어떤 가능성 하나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엄마. 다른 건 아니고, 이거 드시고 하세요.’
‘오늘 엄청 덥대요, 엄마. 잘 준비하시고 좀 이따 봬요.’
그러니까… 내가 자기 엄마한테 ‘엄마’ 소리를 해서? 생면부지의 남한테 공짜 커피 한 잔 못 받아먹어서 성질이 났다는 가정보다는 확실히 이쪽이 말이 되는 것 같았다. 부쩍 가까웠던 저와 혜경 사이의 거리를 고려하면 더 그랬다. 비록 저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뒤에서 그 정도로 가깝게 붙어 서 있었다면 제가 혜경에게 없는 사회성을 끌어모아 힘겹게 아양을 떠는 걸 남김없이 들었으리라.
막연한 짐작은 빠르게 확신으로 변했다. 요약하자면 저 새끼는 뭔데 우리 엄마한테 친한 척인가 싶었던 거겠지. 비슷한 경험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족끼리 사이가 되게 돈독한가 봐. 먼젓번 식사 자리에서 혜경이 보였던 태도가 추측에 힘을 실었다. 아무도 듣지 못할 혼잣말과 함께 피식 웃음이 샜다.
“좀… 웃기네.”
됐고, 오늘 촬영에 집중하자. 줄곧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잡생각을 이제는 밀어 내야 했다.
주머니에 넣어 뒀던 휴대전화를 꺼낸 지수가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여태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슛 들어가기까지 못해도 이십 분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지수는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남은 커피를 죄다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얼음이 녹아 그새 연해진 커피가 목 아래로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목을 가다듬은 지수가 입을 풀기 시작했다. 아아─. 으. 어. 오. 이. 군더더기 없이 가볍게 똑 떨어지는 끝 음이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섞여 나갔다.
* * *
지수는 3년 전 데뷔했다. 우리나라 나이로 스물셋, 군대를 제대한 직후였다. 복무지는 강원도 어귀였는데 무지막지한 제설량으로 이름이 난 지역이었다. 입대와 함께 모르고 살았던 담배를 잠깐 피웠고 상병을 달면서 도로 끊었다. 흡연이 크고 작은 고민 해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대학은 안 갔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는 일엔 원래부터가 통 관심이 없었다. 피할 길이 없는 의무교육이었기에 중고등학교는 몇몇 친구들이랑 시시덕거리며 노는 재미로 겨우 버텼다. 비록 공부는 안 했을지언정 학생 고지수에게는 저만의 ‘성실 마지노선’이란 게 확고했기에 딱 하나, 출결만큼은 언제나 훌륭했다. 초중고 12년을 통틀어서 개근상만은 꼬박꼬박 받았다는 점이 그에 대한 근거였다.
말썽을 피우는 데엔 관심이 없었지만, 워낙 근사한 생김새 덕택에 학기 초만 되면 알량한 교내 세력 다툼에 목숨 거는 애들이 불나방처럼 꼬여 들었다. 유치한 놈들. 지수는 번번이 조금 받아 주는 척을 하다 말았다. 며칠 그렇게 굴면 불나방들도 눈치는 있어서 금방 겸연쩍어하면서 다른 이를 물색하러 떠나곤 했다.
튀는 건 싫고 나쁜 짓도 싫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진심을 가린 뚜껑을 열어 보면 그 아래엔 먼 훗날 제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소망이 비밀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과묵한 척에 점점 능통해질 수밖에 없는 청소년기였다.
본격적으로 모델 에이전시에 오디션을 보러 다닌 건 제대를 하고 딱 30일이 지났을 때였다. 색시 찾고 싶어 안달이 난 수컷 공작처럼 한껏 꾸미고 온 다른 지원자들 사이에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기본 디자인의 블랙 라이더 재킷을 걸친 지수는 꼭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표정 연기를 해 보라는 지시에 이런저런 시도를 열심히 했으나 밀려드는 민망함에 마지막은 늘 손바닥으로 정수리를 문지르는 거로 끝이 났다. 덜 자라 짧동한 머리카락 끝이 까끌까끌했다. 쓰다듬는 건 빽빽한 정수리였지만 정작 화르르 붉어지며 부끄러움을 감당하는 건 뼈가 도드라진 곧은 목덜미였다.
‘할머니, 나 앞으로 뭐 하까?’
‘뭘 하긴 뭘 해. 큰 사람이 되려면 대학교엘 가야지.’
지수는 뜨끈뜨끈 김이 나는 찜통 위로 조심히 뚜껑을 덮었다. 사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해 댔다. 할머니 연옥이 따로 챙겨 준 걸 하나씩 집어 먹다 보니 벌써 한 접시 가까이 먹고 말았다.
아, 살 붙으면 안 되는데. 다음 주에 예정된 오디션이 두 개 더 있었다. 좌우간 이럴 때면 연옥이 빚은 만두만큼 무서운 게 또 없었다.
‘대학? 에이, 재미없어.’
‘어디 공부를 재미로 하더나?’
‘싫어, 싫어. 그거 말구 딴 거.’
대학은 들어가는 기회비용에 비하면 얻을 수 있는 소득이 너무 불분명한 투자였다. 시간적 비용 최소 4년, 금전적 비용은 아마 못해도 이삼천만 원 정도? 초기 투자금의 가치를 생각하면 아무리 따져봐도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치명적인 마이너스로 다가왔다.
가진 게 많지 않은 지수는 좀 더 확실하고 즉각적인 보상을 원했다. 모델이 되고 싶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비록 옆에서 만두를 척척 빚어내는 연옥조차도 지수의 그런 화려한 장래 계획 같은 건 꿈에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디션을 보자마자 휴대전화에 불이 붙으며 여기저기서 저를 모셔가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조용했다. 지금은 유명한 모 모델이 말하길 처음엔 본인도 오디션을 수십 번 보고서야 한 군데 합격했다고 하니 겨우 열 몇 번 떨어진 제가 할 불평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판 모르는 이들을 앞에 두고 뻘쭘함에 등허리가 젖어 가는 순간들이 늘어나자 자신감이 점점 추락했다. 무소득에 기가 죽었다.
괜한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딴 길을 찾아봐? 아무리 아득바득 모아 봤자 좀처럼 푼돈을 벗어나지 못하는 통장 잔고를 보며 시름이 깊어지던 어떤 날, 마침내 구원의 전화가 걸려 왔다.
대형 회사는 아니었고 모델 전용 에이전시도 아니었다. 화보 촬영 위주의 모델, 연기를 꿈꾸는 신인배우 그리고 아이돌 그룹 육성까지. 향후 5년 정도 대대적인 사업 확장을 감행하며 이름있는 종합 기획사로의 탈바꿈을 희망하는 나름 건실한 중형 기획사가 지수에게 관심을 보였다.
인터넷에 사명을 검색하면 나오는 꽤 번듯한 결과로 판단했을 때 유령회사는 아닌 것 같았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계약서에 도장이 찍혔고 지수는 현재 소속사를 통해 소소한 데뷔를 했다. 첫 시작은 스트릿 의류 브랜드의 룩북이었다. 제대 후, 충분히 기를 시간이 없어서 밤톨처럼 짧은 머리로 다녔던 오디션이었는데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이 없다는 사실이 뜻밖에도 정직하게 잘생긴 이목구비 어필에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그 후로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감각적인 몇 개의 의류 화보는 곧 드라마 형식의 뮤직비디오 출연으로 이어졌다. 연기는 처음이었고 발성은 형편없었지만, 뮤직비디오 아니던가. 다소 엉성했던 부분들은 가수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꽁꽁 덮어졌다. 그렇게 두 달 텀을 두고 세상에 공개된, 각기 다른 콘셉트의 뮤직비디오 두 편은 차츰 입소문을 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수에게 음악방송 진행자라는 장기 일자리를 물어다 줬다.
진행을 하라고? 전혀 계획에 없던 일에 지수가 어리둥절하는 동안 소속사는 이거야말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릴 절호의 찬스라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그건 확실히 옳은 결정이었다. 짧지만 주기적인 출연이 확보된 프로그램으로 생긴 인지도가 얼마 전 끝난 미니시리즈와 현재 촬영 중인 영화 《동틀 무렵》을 물어준 셈이었으니.
그러니 죽어라 열심히 해야지. 무색무취 맹물처럼 큰 특징 없이 흘러온 고지수 인생에 마침내 한 뼘씩이나마 볕이 드는 시기가 찾아왔음이 분명했다. 회사 실장님이나 현욱이 하는 말마따나 이렇게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딱딱 연결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건 지수도 알았다. 돈이 오가는 모든 비즈니스가 그렇듯이 연예계 또한 인내심이 극히 드문 업계였다. 고작 3년 차지만 뜨지 못해 사라지는 사람들을 벌써 숱하게 봐 왔다. 저와 나란히 오디션장에서 대기하던 지원자 중 대다수가 일다운 일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진로를 틀었을 확률 또한 상당했다.
‘지수 네가 쩌기 티비에 나온다고?’
‘……어.’
드문드문 이어지던 연옥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했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황당해하는 모습에 긴장했던 지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테레비 어디?’
‘왜? 안 믿겨?’
좋은 옷 입고 사진 찍으러 다닌다고 할 때부터 우리 새끼 출세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연옥이니 텔레비전 출연 소식은 오죽 큰일이었을까. 첫 뮤직비디오 촬영을 끝낸 후 이젠 회사에서 얻어 준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며 같이 살던 집에서 짐을 뺄 때도 연옥은 그 회사라는 게 혹시 새파랗게 어린 애들 등쳐 먹는 나쁜 놈들은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을 했었다.
‘그래, 그래. 지수 네가 하는 말, 대충 무슨 뜻인지 알긴 알겠는데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지….’
걱정 어린 연옥의 중얼거림에 지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 내가 이건 진짜 부끄러워서 안 보여 주려고 했는데…. 회사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한 지수는 ‘소속 아티스트’란을 클릭했다. 고지수 이름 세 글자를 누르니 제 사진과 함께 간략한 프로필이 나왔다.
지수는 연옥이 화면 속 제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휴대폰을 내밀었다. 가족한테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니 여간 겸연쩍은 게 아니었다.
‘거참, 살다 보니 이런 신기한 일도 다 있네.’
감상평은 짧고 굵었다. 어색하고 멋쩍은 지수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차분한 시선은 조그만 액정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아마도 연옥은 그 순간 처음으로 바깥을 바쁘게 쏘다니며 손자가 하고 다닌다는 ‘그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한 것 같았다.
‘할머니, 기대해. 나 더 유명해질 거니까.’
멍한 연옥 앞에서 야무진 음성으로 그런 다짐을 뱉은 것도 어느덧 2년 전의 일이었다. 일이 있는 날은 일을 하고 촬영이 없을 때는 연기 연습을 하는 게 이제는 익숙한 일상이었다. 애초에 카메라 앞에 서서 사진을 찍히는 일까지가 제가 부렸던 욕심의 전부였기에 지수는 연기를 시작하며 발성부터 호흡법까지 모든 걸 새로 배워야 했다.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죄송합니다.’
회사에서 붙여 준 연기 선생님 선정은 첫 만남에서 뻥 뚫린 목소리만으로도 지수를 제대로 겁먹게 했다. 다년간의 연극 무대 경험으로 망치가 정을 치듯 귀에 때려 박히는 선정의 발음과 안정된 톤을 들으며 지수는 제 앞에 성곽처럼 둘리는 까마득한 높이의 벽을 느꼈었다.
예상대로 연기는 어려웠다. 저런 건 나 같은 사람은 죽어도 못하겠지 싶어서 일찌감치 감히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을 이토록 본격적으로 하게 될 줄이야. 쉽지 않아 애를 먹는 와중에 한 가지 긍정적인 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거였다.
“선우가 여기서 영주 볼 때 눈빛이 좀 더 건조했으면 좋겠어.”
“더 건조하게요?”
감독을 중심으로 양옆에 자리를 잡은 혜경과 지수가 가운데 있는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조그만 화면 안에서는 두 사람이 방금 찍은 장면이 음소거 상태로 재생되고 있었다. 소리가 없는 화면 속에서는 표정이 언어를 대신했다. 피부의 떨림과 바람에 날리는 눈썹 한 올까지, 화면에 담긴 모든 게 뜻을 품은 말로 치환되고 있었다.
“응, 그렇다고 표정을 너무 크게 짓지는 말고. 좀 뭐라고 하면 될까… 음, 눈 근육을 덜 쓸 수 있을까?”
“……네. 해 볼게요.”
감독은 이상하면서도 세밀한 지령을 내렸다. 눈을 아예 깜빡이지 말라는 건 아닐 테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텐데 무슨 뜻일까. 지수의 난감함을 알아챈 건지 옆에서 혜경이 웃으며 거들었다.
“아들, 있잖아. 찍을 때 앞에 있는 나를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멀리 있는 걸 본다고 가정해 봐. 그렇다고 너무 멀리는 말고 두 뼘 정도만.”
“시선을 뒤로요?”
“응, 그렇지.”
애매하던 지령이 구체화되자 이해도가 쑥 올라갔다. 시선 처리를 좀 더 길게 끌라는 뜻이었네.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터를 돌려 보는 사이 혜경이 감독에게 농 섞인 타박을 했다.
“김 감독 말 어렵게 하는 거 여전하네. 시대가 변했어요, 감독님. 나이 먹은 우리들 대하듯 그렇게 뜬구름 잡으면서 말하면 요즘 애들은 어려워한다니까.”
“감독이 하는 말이 어려우면 자기들이 공부를 해야죠. 안 그래, 지수?”
“맞습니다. 제가 공부를 해야죠.”
지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경험에 기반해 모호한 설명도 어렵지 않게 곧잘 번역하는 혜경을 보면 연기도 일종의 기술직 같았다. 죽어라 연습하고 죽어라 배우면 어느 순간 저번보다 도구 다루는 스킬이 눈에 띄게 훅 늘어 있는 기술직과 연기는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 장면 끝내고 오늘 인서트 컷까지 따로 찍을 거지?”
“네, 그래야 편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미술팀에서 자꾸 소품 관리 어렵다고 난리라서….”
“햇빛만 비추면 꽃잎이 쭈글쭈글해지던데 그 꽃이 그렇게 구하기 힘들고 비싼 거라며? 제작비 아껴야지. 난 괜찮으니까 오늘 다 끝내자.”
말을 마친 혜경은 대본으로 부채질을 하며 돌아섰다. 현장 읽는 눈이 훌륭한 중견 배우 한 명이 만들어 내는 추진력은 실로 대단했다. 지금처럼 혜경이 잠깐 나서고 나면 뻑뻑한 톱니바퀴에 기름칠을 한 것처럼 촬영 과정에 탄력이 붙었다.
“좀 이따 보자, 지수야.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니니까 내 이야기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네, 걱정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담배를 꺼내 무는 감독에게 작게 고개를 숙인 지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렇게 눈칫밥 먹는 상황 같은 거야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은 지 오래였다. 아직 뚜렷한 한 방이 없는 신인을 향한 가시 돋친 언사를 모두 놓치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다가는 얼마 안 가 화병으로 병원에 실려 가고야 말 테니까.
“안 피곤해?”
“응, 난 괜찮아. 형은?”
“어제 늦게까지 운전을 했더니 어깨가 살짝 결린다.”
주먹으로 어깨를 퉁퉁 치는 현욱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소속사에서 야심 차게 기획한 여자 아이돌 그룹은 반년 전 데뷔했다. 두 번째 미니 앨범 발매를 앞두고 현재는 여기저기 불러 주는 곳은 마다치 않고 행사를 도는 모양이었는데 거기에 종종 지수의 매니저인 현욱이 찬스처럼 동원되곤 했다. 어제도 인천 끝자락에서 열린 모 음식 축제에 멤버 몇을 데리고 다녀왔다고 하더니 현욱은 밤잠을 지독하게도 설친 듯 보였다.
“참, 너 실장님한테 들었어? 호랑이 소굴 PD가 너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
피하고 싶은 주제가 다시 등판했다. 지수는 입을 다물었다.
“싫어? 그냥 만나만 봐. 얼굴도장 찍어 놓으면 좋잖아.”
“만나 보면 또 그 프로그램 나가라고 할 거면서.”
음악방송 진행자의 효과를 톡톡히 본 이후 소속사에서는 틈만 나면 예능 쪽으로 저를 꽂고 싶어 안달이었다. 제가 입만 열면 모두를 빵빵 터뜨리는 재치 넘치는 타입도, 그렇다고 초면인 사람들과도 느물느물하게 잘 어울릴 만큼 곰살맞은 성격도 아닌 걸 알면서 그랬다. 커다란 윙크와 함께 애교 섞인 멘트를 날리던 음악방송 엔딩도 적응하기까지 자그마치 3개월이 걸렸는데 밀착 예능은 무슨.
“나 진짜 재미없는 스타일인 거 형도 알잖아.”
“네가? 지수야, 너 모르나 본데 너 은근히 진짜 웃겨.”
터무니없는 소리라도 들었다는 양 황당해하는 현욱의 얼굴이 훨씬 더 웃겼다.
“됐어. 나가 봤자 욕만 먹을걸? 노잼이라고.”
“네가? 아, 이 새끼…. 얘 진짜 자기 객관화가 안 돼 있네.”
소속 연예인 기를 살려 주려는 매니저 현욱의 배려가 눈물 나게 고마웠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욱을 뒤로한 채 지수는 차 문을 열었다.
촬영이 재개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감독이 하는 말이 어려우면 자기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맞는 말이기에 토를 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날카로운 농담이 불쏘시개가 되어 의욕에 펄펄 불을 지펴 나갔다.
* * *
영화 촬영은 어느새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다른 부가적인 스케줄 없이 두 달을 통째로 이렇게 한 작품에만 매진해 본 건 데뷔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음악방송 진행은 올해 초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나는 드라마 촬영 분량과의 병행이 힘들어지면서 그만두었다. 당시에는 아기자기한 말투로 대본을 소화하는 게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는데 정작 그만둘 때가 되자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아쉽기만 했다. 시원함은 짧았고, 섭섭함은 길었다. 몇 주 지나 바쁘게 해 오던 드라마 촬영까지 끝이 나자 지수는 너무 큰 자유는 인간에게 되레 혼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생에 처음으로 경험했다. 일시적인 실직 상태가 주는 공허함이 예상보다 컸다.
《동틀 무렵》은 상실감이 한 단계 더 높아지려고 기승을 부리던 때에 등장해 부정적인 마음가짐에 제동을 걸어 준 고마운 작품이었다. 상업성이랑은 거리가 멀었지만 자기는 제대로 된 작품성을 추구한다는 감독의 말대로라면 가까운 영화관에서는 못 보더라도 훗날 선댄스 영화제 같은 명망 있는 국제 시상식에 초청될지도 모르는 영화가 《동틀 무렵》이었다.
어려웠던 야외 촬영이 끝나고 실내 촬영과 세트장 촬영 단계로 넘어가자 현장 분위기도 조금은 유해졌다. 문제 발생 시 즉각적인 해결이 어려운 야외에 비해 웬만한 사항들은 사전에 대비가 가능한 실내 작업의 장점 덕분이었다.
세트장은 서울 외곽에 위치했다. 말만 서울이지 실제로는 간선도로와 이어지는 샛길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이십 분 넘게 달려야 나오는 곳이었다. 오래된 폐공장을 비우고 간이 패널들을 조립해 배경을 구현해 놓은 세트장은 전체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맑은 공기를 찾아 밖으로 나온 지수는 들고 있던 작은 생수병에 꽂힌 빨대를 물었다. 목을 축이며 휴대폰 화면에 비춰 본 얼굴이 실로 가관이었다. 분장 한번 제대로 살벌하네. 분장팀이 이마에 완성해 놓은 엉겨 붙은 핏자국은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지만 않으면 진짜 상처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진짜처럼 했을까. 신기함에 손이 꾸덕꾸덕하게 굳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으로 향했다.
“만지지 말랬지, 참.”
저를 붙잡고 신신당부를 하던 스태프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만지기를 포기한 대신 지수는 웃음기를 거두고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이번에는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장면이지만 더 깊은 수련을 거친다면 나중에는 지금과 비슷한 느낌으로 제대로 된 액션 영화를 찍어 봐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가 해 본 적 없는 일을 두고 제 한계를 가늠해 보고 있을 때 낯선 차 한 대가 건물 마당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진짜 크다….”
커다랗고 검은 차는 꼭 탱크처럼 천연하게 입구를 넘어왔다.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슬레이트 지붕이 만들어 준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지수는 그게 출연진 누군가를 태운 밴이라고 여겼다. 차 전장과 전폭의 길이가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넓고 길어서였다.
근데 우리 팀에 저런 차를 타는 출연자가 있었던가. 혜경과 감독의 차종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면 혹시 감독님이 차를 바꾸셨나. 지수는 혹시 모를 가능성에 주차된 차량이 밀집해 있는 공터 쪽을 살폈다. 높은 펜스 앞에 혜경의 하얀 밴과 감독의 낡은 해치백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누굴까. 궁금증이 깊어지던 찰나 운전석 문이 열렸다.
“…….”
모습을 드러낸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집채만 한 차가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훤칠한 이가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모자가 없네. 붉었던 귀 끝도 오늘은 원래 색을 찾은 듯 하얘 보였다.
엄마 보러 왔구나. 피딱지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스레 앞머리를 넘긴 지수는 다시 빨대를 물었다. 들어가서 혜경을 불러 줘야 하나. 괜한 노파심이 발동해 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수보다 혜경이 빨랐다.
“승이 너 여기 왜 왔어?”
“…….”
“엄마가 보낸 메시지 못 봤어? 내가 오지 말랬잖아.”
“나 엄마 보고 싶어서 왔지. 진짜야.”
입고 있던 얇은 카디건을 여미며 혜경이 천천히 차로 다가갔다. 잡아떼는 어설픈 모양새가 어이없는지 콧방귀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지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변부터 살폈다. 촬영이 잘 안 풀릴 때면 흡연자인 스태프들이 이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고는 했었다. 설마 아무도 없겠지. 촬영과 상관없는 사적인 현장이니 왠지 누구도 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상황을 기민하게 판단하며 지수는 서 있던 곳에서 몇 걸음 물러나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음침하게 남의 대화 엿듣는 짓 같은 건 질색이었는데 멀리서도 워낙 카랑카랑한 혜경의 딕션 덕분에 눈과 귀가 자꾸만 흘긋흘긋 그쪽으로 향했다.
“웃기지 마. 네 아빠가 나 여기 있다고 했지?”
“…….”
“너네 아빠도 진짜 주책이다. 이러면 누가 넘어갈 줄 알고?”
“…그런 거 아니야. 언제 끝나?”
잔뜩 삐진 척을 하고 있으나 진심은 아닌 것 같았다. 둘이서 얼굴 맞대고 길고 긴 대사를 읊어 낸 신이 자그마치 몇 갠데. 혜경의 평소 모습을 조금이라도 지켜본 이로서 감히 의견을 내보자면, 이 정도 연기에 속아 넘어간다면 바보나 다름없었다.
이걸 눈치 못 채면 그건 진짜 바보지. 암, 그렇고말고.
“안 끝나. 내일 낮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아니, 나 그냥 여기서 평생 살 거야.”
“…….”
그래서 황당했다. 그 바보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니까 승이 너도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가.”
“싫어.”
승은 정말로 쩔쩔매고 있었다. 화난 척하는 혜경의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승의 모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들이라며? 근데 자기 엄마를 저렇게 모를 수가 있어?
“아버지 지금 서울로 오고 계시대요.”
“오긴 어딜 와? 다시는 오지 말라고 전해. 집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고 그 잘난 배구공 끌어안고 코트에서 자라고 해.”
“…병원에서 괜찮다고 했대. 뼈도 근육도 다 멀쩡하다던데?”
“네 아빠한테 어디 멀쩡한 구석이 있긴 하대? 그 잘난 국가대표니, 뭐니 하면서 여기저기 줄기차게 불려 다니느라 연골이며 뼈며 뭐 하나 빼놓을 거 없이 다 닳아 없어졌으면서.”
“…….”
“내가 진짜 그것만 생각하면…. 은퇴하고 감독 달면 이런 일 없을 줄 알았지.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이런 거로 날 놀라게 해…. 내가,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뒤이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순 당혹감이 밀려들며 지수의 몸이 굳었다.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어 버렸다는 예감이 뒤늦게 머리를 강타했다. 눈물로 일그러진 혜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화사한 분위기로 촬영장을 주무르던 평소와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왜 그래, 엄마. 울지 마요, 응?”
“다 네 아빠 때문이니까 내 욕하지 마.”
“나 진짜 억울하네? 내가 이 상황에서 엄마 욕을 왜 해.”
“몰라. 실컷 화장 다 했는데 이게 뭐야. 사람들 보기 창피하게.”
달래 주는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물기 어린 말소리를 듣자 조금 전 혜경의 상태를 멋대로 단언하며 승의 반응을 비웃었던 스스로에게 수치심이 들었다.
아들은 아들이네. 들고 있던 물을 남김없이 비운 지수는 차분히 발길을 돌렸다. 우연히 남의 대화를 엿들은 뒷맛이 각오했던 바보다 쓰게 다가왔다.
눈과 귀를 닫은 지수는 세트장으로 돌아왔다. 현장에서는 의자에 앉은 감독의 손짓에 따라 미술팀 막내 스태프가 소품으로 준비된 화장대를 왼쪽 구석에서 오른쪽 구석까지 이리저리 옮겨 대며 애를 쓰고 있었다.
“위치상으로는 거기 놓인 게 좋은데 막상 화면으로 보면 맞은편 벽 때문에 그림자가 너무 지네.”
“많이 심해요?”
스태프는 바닥을 무릎으로 기어 다니다시피 하며 감독이 원하는 앵글을 찾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야, 시은아. 안 되겠다. 그냥 처음 뒀던 데 두고 찍자.”
“…네, 감독님.”
끙끙대며 커다란 화장대를 옮기다 조금 전 겨우 허리를 편 스태프가 다시 몸을 웅크렸다. 뒤편에 커다란 거울이 달린 원목 화장대는 딱 봐도 여자 혼자 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짬이 덜 차 현장의 궂은일을 죄다 떠안은 스태프가 부득부득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무거울 텐데 같이 밀어요.”
“아, 감사해요.”
“위험하니까 천천히 해요. 방금 뒤에 거울 거의 넘어갈 뻔했어요.”
“이게 어렵게 빌린 건데, 잘 고정이 안 돼서요….”
조금씩 밀 때마다 거울이 사납게 덜컹거렸다. 지수는 손을 뻗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휘청이는 거울을 세게 붙들었다.
“어떻게… 이거 좀 더 밀까요?”
“아뇨, 아뇨! 이제 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한 명이 거드니 옮기는 게 훨씬 수월했다. 지수는 스태프와 함께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위치를 확인하고는 다시 세트장 밖으로 나왔다. 온갖 촬영 기기들에 연결되어 질서 없이 땅에 깔린 전선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딛는 곳을 잘 확인하고 걸어야 했다.
“지수가 보면 참 힘이 세.”
아직 마흔도 안 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상하게 성격만 꼬장꼬장한 감독은 뭐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낌새였다. 편하게 앉아서 오랜만에 감독 권한 팍팍 시전 중이었는데 출연자가 눈치 없게 방해했다, 이건가. 아무리 영화가 감독예술이라지만 이렇게 한 번씩 드러나는 감독의 이상한 권위 의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이, 저는 감독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감독의 낯짝이 차게 식어갔다. 아, 방금은 내가 좀 심했네. 누가 봐도 작고 비쩍 마른 체형인 감독에게 하기에는 너무 유치한 대응이었다.
자존심 세고 속 좁은 감독이 알게 모르게 저를 긁어 댈 때마다 늘 잘 참아왔는데 지금은 왜 그랬지. 이런 소리 들은 게 처음도 아니잖아. 질러 놓고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대뜸 욕이라도 할 것 같은 감독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그냥 딴청을 피웠다. 진짜 프로라면 이 정도 참고 넘기는 아량은 감독에게도 있을 터였다.
“5분 뒤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다들 준비해 주세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바뀐 화장대 자리만 보고 있었더니 잠시 후 있을 촬영 재개를 알리는 조감독의 외침이 현장에 울렸다.
슛 들어가기 전에 분장만 잠깐 다시 확인해야지. 지수는 인위적으로 만든 핏물이 굳어 흐르는 이마를 긁적이며 현욱을 찾았다.
“형, 나 여기 피딱지 괜찮아? 어때?”
“응, 괜찮아. 잘생겼어.”
“지워진 부분 없어?”
“하나도 안 지워졌으니까 걱정하지 마. 완전 진짜 같애.”
가짜 상처가 얹힌 왼쪽 눈썹 위를 보며 찡그린 현욱의 얼굴이 분장의 퀄리티를 대변했다. 내 얼굴 지금 엄청 징그럽구나. 실제로 뒤지게 얻어맞은 사람을 보듯 측은함이 넉넉하게 묻어나는 눈빛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지수는 엉킨 앞머리를 털며 곧 찍을 장면의 동선을 체크했다.
“근데 지수야, 촬영 언제 끝날 것 같냐?”
“몰라? 아까 나 분장할 때 들으니까 다들 저녁 어디서 시켜 먹을지 이야기하고 있던데…. 그런 거 보면 좀 걸리지 않을까?”
“그치. 지수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현욱이 짐짓 심각하게 맞장구를 쳤다. 저 형 웬만해서는 저런 표정 안 짓는데…. 지켜보던 지수는 옆에 있던 새 물병을 하나 집어 들고서 현욱에게 다가갔다.
“지수야, 있잖아. 너 촬영하는 동안 나 잠깐만 자리 비워도 돼? 길게는 아니고 한… 두 시간 반 정도?”
“왜? 무슨 일 있어?”
“조이더스 걔네 지금 스케줄 가다가 도로에서 차가 퍼졌댄다.”
조이더스라면 어젯밤 늦은 시각까지 이어지던 스케줄로 현욱의 잠을 설치게 만든 그 아이돌 그룹이었다. 워낙에 활동하는 분야가 다르니 직접적인 친분이라고는 없었지만, 종종 회사에서 마주치고는 했기에 누가 누군지 정도는 지수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근데 거길 왜 형이 가?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아니, 걔네 지금 서 있는 데가 바로 요 옆이야. 동부간선도로.”
현욱이 말하는 대로라면 진짜로 요 옆이긴 했다. 근처에 있는 샛길로 빠져 비포장도로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지수와 현욱 역시 오늘 오전 그 도로를 그대로 타고 달려왔으니.
“차가 어떻게 퍼져도 그런 데서 퍼지냐. 은규 말로는 일단 보험사에 전화하고 견인차는 불렀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나 봐.”
“많이 걸린대?”
“야, 은규 난리 났다. 제발 도와 달래. 나 지금 안 가면 얘 나 죽일 기센데?”
“…….”
“오래는 안 걸릴 거야. 걔네 오늘은 행사가 아니라 인터뷰 때문에 방송국 가는 거라서.”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나 신인일 땐 스케줄 하나하나가 소중한 법이었다. 이름을 알릴 기회만 있다면 땅끝마을 방문도 마다치 않는 게 장르 불문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신인들의 마음가짐이었으니.
도로 위에서 발을 구르고 있을 한 무리의 꿈 많은 소녀들 얼굴이 지수의 눈앞에서 빛났다 사라졌다.
“알았어. 갔다 와. 대신 빨리 와.”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은 밥 먹는 사이에 이런 일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형이 가면 나는 어쩌지. 전장에서 늘 함께하던 내 편을 상실하는 상황에 살짝 걱정이 들었으나 지수는 쿨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차피 오늘 몫의 남은 촬영은 아직 길기만 했다.
“여기, 여기. 이때 선우 표정이 되게 좋다.”
연타로 얻어맞은 뺨이 욱신거렸다. 아, 졸라 아프네. 손으로 오른쪽 턱 아래를 받친 지수가 허리를 숙였다. 모니터에서는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는 제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저를 중심으로 보조출연자 네 명이 달려드는 과정에서 동선이 계속 어긋나는 바람에 일곱 번을 찍고 나서야 가까스로 건진 오케이 컷이었다.
두꺼운 손바닥이 얼굴을 훑고 간 순간, 놀란 맘에 심박 수가 치솟으며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릴 거라는 말은 사전에 없었으면서…. 건장한 체격의 연기자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뺨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부르르 떨렸다. 움찔대는 볼 근육은 신들린 연기가 아니라 고통에 반응하는 통상적인 신체 반응 그 자체였다.
“이때 선우 눈빛이 너무 마음 아프네.”
현 남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엄마 영주의 사주로 아들 선우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린치를 당하는 장면이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자식도 저버리는 이의 표독스러움을 짙게 덧바른 붉은 립스틱으로 표현한 혜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엄마, 저 괜찮아요.”
“아후, 저 얼굴 진짜 어떡해….”
계속되는 감독의 ‘다시’ 소리에 출연자들의 액션이 점점 커졌다. 분명 어떤 점이 성에 차지 않으니 다시 찍는 것일 텐데 이렇다 할 구체적인 지시가 없어 다들 긴장한 채로 본인 해석에 따라 열연을 펼치던 중이었다.
“여기 이 부분, 편집할 때 잘라서 아까 두 번째 찍었던 거랑 이어 붙이려고요. 화면에서 탁한 느낌 더 올라오게.”
“잘 나왔네. 맞고 나서 이어지는 표정도 너무 좋고…. 김 감독이 봐도 그렇지?”
“그러게요. 우리 지수가 오랜만에 한 건 했네요.”
“…감사합니다.”
칭찬일까 욕일까. 언제나 그랬듯이 감독은 마냥 좋아하기에는 애매한 감상평을 남겼다. 지수는 맞아서 열이 오른 아랫입술을 꾹 씹으며 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던 현욱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조감독님, 거기 식당 오늘 영업 안 하나 봐요. 아까부터 계속 전화했는데 한 번을 안 받네요.”
“아, 혹시 오늘이 월요일인가?”
“정주야, 오늘 무슨 요일이니? 월요일? 네, 조감독님. 오늘 월요일이래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저번에 배달 왔을 때 사장님이 월요일은 쉰다고 하시더라구.”
장비를 정리하는 스태프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넓은 마음으로 현욱을 다른 팀 비상 상황에 보내 줬더니 오늘따라 예상보다 촬영이 일찍 끝났다. 보통 늘어졌으면 늘어졌지 단축된 적은 거의 없는 촬영인데 하필 오늘….
점심 무렵부터 쉬지 않고 이어진 촬영에 배가 고플 대로 고파진 스태프들 의견에 따라 미술팀 막내가 총대를 메고 식당에 연락을 시도했다. 워낙 외진 곳에 있고, 근처에 이렇다 할 상권이라고는 전무한 동네였기에 여기까지 음식을 배달해 주는 식당은 딱 한 군데뿐이었다.
“집에 먹을 거라고는 물밖에 없어서 대충 여기서 때우고 가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되겠네. 촬영장에서 날씨 복 없는 새끼는 먹을 복도 없다더니, 에라이.”
“그래도 오늘은 퇴근 복이 있잖아요. 전 먹을 복보다 퇴근 복이 훨씬 좋은데.”
“정주 너 그동안 쌓인 게 많았나 봐? 내가 방금 그 말 잘 기억하고 있을게, 엉? 자, 여러분. 우리 정주가 얼른 집에 가고 싶답니다. 다들 빨리빨리 정리합시다.”
배달을 해 주는 유일한 식당마저 오늘이 정기휴업일이었다. 배 채우고 떠날 계획이 무산된 스태프들이 몸놀림을 빨리했다. 혜경과 감독은 아직 나눌 말이 많이 남았는지 낮에 미디엄 쇼트로 찍은 혜경의 단독 컷을 보며 의견 교환이 한창이었다. 이래저래 어수선한 분위기 틈에서 지수는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 왜 안 와? ㅠ 우리 지금 촬영 끝났어